관심 & 배움/이스라엘 史

제5장 오스만 제국 시대

淸山에 2013. 6. 6. 21:37

 

 

 

 

 

제5장 오스만 제국 시대

 

 

 

오스만 투르크의 셀림 1세(1512∼1520)는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스탄불을 건설한 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아울러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아랍 세계를 통합하였다. 1517년 술탄 셀림은 팔레스타인에 들어와 약 400년 동안 새 주인이 되었다. 이전에 예루살렘을 지배한 바 있던 셀주크 투르크는 이 지역의 문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지 못하였다. 그러나 셀림의 뒤를 이어 등장한 그의 아들 술레이만 1세(1520∼1566)는 아시아와 팔레스타인을 다스리는 오스만 제국의 황제로서 새로운 역사를 펼쳐 나갔다. 그는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봉건국으로 삼고, 그 땅을 나누어 봉건 군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였다. 팔레스타인은 모두 4개의 지역(sanjak bey, 터키어로 '표준 단위'를 일컫는 말이다.) - 예루살렘, 가자, 나블루스, 그리고 사페드 - 으로 나누어졌다. 각 지역은 각각의 군사, 경제, 법률 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서방에서조차 '위대한(magnificent)' 통치자라 불리던 술레이만 1세의 대표적인 작품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완벽하게 둘러싼 예루살렘 성벽으로, 1539년에 착공해서 1542년에 완공하였다. 성벽은 사방의 길이가 총 13,410피트, 즉 약 4㎞나 되며, 사방으로 통하는 7개의 성문 - 남쪽의 분문(糞門)과 다윗 문 혹은 시온 문, 서쪽의 아브라함 문(욥바 문), 북쪽의 다마스쿠스 문과 사히라 문(Sahira Gate, 헤롯 문), 그리고 동쪽의 스데반 문과 황금 문 - 이 있다. 욥바 문 상단에는 1538~1539년이라는 연대가 포함된 술레이만의 업적을 기리는 아랍어 비문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술레이만은 성채를 보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샘물을 성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수로도 건설하였다.

술레이만은 바위 사원을 자신의 건축 재능을 발휘하여 아름답게 꾸몄는데, 바깥쪽을 모자이크대신 쿠란의 구절을 새겨 넣은 파랑, 흰색, 초록의 파양스 도자기 타일로 교체했다. 타일 색깔의 비밀은 아나톨리아에서 온 아르메니안 장인이 잘 보존해 온 것이었다. 19세기 술탄 마흐무드 2세(Mahmud Ⅱ, 1808~1839)는 바위 사원의 안쪽 표면을 타일로 다시 도금하고, 바깥쪽을 대리석과 타일로 복원하였다. 이 시대의 인구는 점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지역 주민들은 농업에 종사하였다. 특히, 유목민인 베두인족(Bedouin)을 활용하여 많은 약초, 밀, 보리, 콩 등의 농작물을 생산하도록 하였다. 주로 아랍인들의 경제 활동이 돋보였으며, 올리브, 꿀, 과일, 목화 등의 생산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492년과 1497년, 스페인의 유대인들이 대량 학살과 대추방을 맞으면서 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들어온 것도 바로 이 시기를 전후한 때였다. 아울러 오스만 제국의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유럽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끌어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주로 나블루스, 헤브론, 가자, 사페드, 갈릴리 지방의 여러 도시에도 흩어져 정착하였다. 오스만 제국의 초기에 팔레스타인에는 약 1000여 가구에 약 5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16세기 초에 이주한 이민자들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의 사페드(Safed)였다. 그 곳은 중세에 발전한 유대 신비주의의 본고장이자 번영하던 유대인 거주지였다. 종종 예루살렘을 방문한 유대인들의 관심은 건축물에 있지 않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유럽 사회의 중상주의자 그룹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부터 이들이 가져온 새로운 기술과 상업은 오스만 제국의 경제적 · 정치적 안정을 넘어 아랍 지역에 퍼졌다.

이 시기에, 유대인들은 다시금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며 새로운 희망을 불태웠다. 이러한 희망은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자극하여 많은 유대인으로 하여금 귀향을 서두르게 하였다. 1526년에는 스페인으로부터 약 200여 가구가, 1554년에는 다시 338가구가 이주해 들어왔다. 이 시기에 예루살렘에는 다비드 이븐 아비 짐라(c. 1485∼1575년)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사페드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농업과 각종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왕국의 수입을 증가시켜 주는 유대 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6세기 중엽에 사페드의 유대인의 숫자는 10,00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사페드는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도시로 부각되었다. 사페드는 토라 연구의 중심지로 부상하였으며, 유대 신비주의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요셉 카로에 의해 쓰여진 『카발라(Kabbalah)』와 『조하르(Zohar)』라 일컬어지는 유대 신비주의의 책은 토라의 신비주의적 연구의 대표적인 책으로 전해져 내려 왔다.

유럽인의 눈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의 근대사는 153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 사이의 협상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협상의 의제는 유럽에 있는 터키인과 오스만 제국에 있는 프랑스인 간의 특별 자유 무역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1569년까지는 결코 비준될 수 없고 체결되지 못한 제안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14세기 중엽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이전에 오스만 제국은 제노아, 베니스, 플로렌스와 특별 협정, 즉 소위 '항복 문서(capitulations)'라 불리는 조약을 맺은 바 있었다.

이 협정은 1740년까지 새로운 술탄이 등극할 때마다 재협정을 맺거나 갱신하여야 했다. 이 일은 프랑스 대사가 주로 맡았는데(예루살렘에 최초의 프랑스 영사관이 설치된 것은 1621년이었다.), 사실상 협정의 결과는 매우 일방적인 것이어서 오스만 제국 내에 프랑스 상인은 넘쳤지만, 프랑스에서 오스만 상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19세기에 들어 영국과 독일 등 유럽 국가 대부분이 예루살렘에 영사를 파견하였다. 이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럽의 관심이 종교보다는 경제 쪽으로 많이 치우쳐가고 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무라드 3세(1574∼1795), 그의 아들인 무함마드 3세(1595∼1603), 그리고 아흐메드 1세(1603∼1617), 무스타파 1세(1617∼1618, 1622∼1623), 무라드 4세(1623∼1640)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쇠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레바논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던 드루즈(Druze)의 마안(Ma'an)족 추장인 파크르 알 - 딘(1590∼1635)은 사페드와 아즐룬(Ajlun) 등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이는 시리아와 사이프러스 등지에서 역시 독립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던 십자군들과의 연합의 결과였다. 16∼17세기 오스만 제국은 점차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세력들로 인하여 쇠퇴하여 갔다.

무스타파 2세(1695∼1703)가 통치하는 동안 오스만 제국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러시아의 남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의 중요한 성지가 이들에게 점령당했으며, 세금 징수권과 무슬림의 사법권을 박탈당하였다. 18세기 초에는 갈릴리 지역의 대부분의 영토를 자히르 알 - 오마르가 받아 통치하면서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였으며, 십자군 함대의 지지를 얻어 가자, 욥바 등을 점령하였다.

한편,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점령은 콘스탄티노플을 매우 놀라게 하였다. 나폴레옹 군대는 이듬해 팔레스타인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에 들어와서 가자, 람레, 룻다 및 욥바 등을 어렵지 않게 점령하였다. 해안길을 따라 팔레스타인을 점령해 올라간 나폴레옹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지는 않았다. 그의 목표는 북쪽으로 가는 정복의 길을 열어 놓은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하이파를 정복하고 악고를 포위하였다. 그런데 이때 나폴레옹의 군대에게 큰 재앙이 내렸다. 전염병으로 많은 군인이 죽자, 그의 군대는 이집트로 퇴각하고 말았다.

17세기 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아 운동이 발효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유다 하시드와 하임 말라크가 이끄는 메시아 운동가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끌고 이주해 왔다. 오는 길에 많은 사람이 죽는 어려움을 당하였나, 그들의 이주는 차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당시 예루살렘에 약 1200여 명의 유대인들이 공동체를 이룰 정도였다.

유럽에서 온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짐(Ashkenazim)이라 부르는데, 이들에 대하여 아랍 정착자들은 심각한 배타심으로 경계하였다. 그들은 모습이나 복장이 유럽풍의 분위기였기 때문에 눈에 잘 띄었다. 아랍인들은 안식일에 유대인들의 회당을 공격하고, 방화하는 등 많은 충돌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갈릴리 북쪽 지역 - 사페드, 티베리아 등 - 으로 이주해 갔다. 이 곳은 당시 가장 큰 유대 공동체가 발전하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경제 상태는 매우 악화되었다. 경작지는 폐허처럼 변해 있었으며, 마을은 가난하였다. 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들은 어느 정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오스만 제국과 협상하여 경작지를 사들여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또 유럽과도 무역을 하였는데, 주요 상품들은 이들이 생산한 면과 설탕, 커피 등이었다. 인구도 급증하여 18세기 말엽 팔레스타인에는 약 3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 기간 중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에 대한 9년 동안의 이집트 통치(1832∼1840)는 유대인들의 정착을 유리하게 해 주었다.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와의 갈등이 고조되는 동안 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 들어왔으며, 양측으로부터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지원을 동시에 받을 수 있었다. 유럽에서 계몽된 유대인들 - 아브라함 베니쉬나 몽테피오르, 앨버트 코헨 등 - 이 이민하여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 시기도 바로 이때를 전후해서였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사이의 갈등과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1859∼1869) 등의 영향으로 팔레스타인은 차츰 황폐해져 갔으며, 인구도 급격히 감소하였다. 바로 이러한 기간을 틈타,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1896년 헤르츨이 제창한 이른바 시온주의(Zionism) 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새로운 이스라엘 건립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
이 유대국가의 독립을 북돋으면서, 유대인 이민자들의 파도가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영국에게 내어 주고 영국은 30여 년 간(1917∼1948) 팔레스타인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