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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1. 17~18세기 유럽 사회의 태도)

淸山에 2013. 6. 6.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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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

 

1. 17~18세기 유럽 사회의 태도

 

14~15세기에 걸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문예 부흥(Renaissance)은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인정된다. 나아가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중세 교회가 지니고 있던 가치관이 파괴되면서 세속주의와 개인주의가 새로운 사회의 가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결과 '종교'와 '정치'의 분리 원칙이 세워지게 되는 동시에, 한쪽에서는 극단적인 종교주의가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신앙은 통치자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종교와 국가 사이의 강력한 경쟁 관계를 만들었다.

 

 

· 종교적 관용과 유대인에 대한 존경심의 증가

 

설교가 로저 윌리엄스는 1644년에 쓴 한 수필에서, "기독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두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다. 종교의 자유, 즉 이방인과 유대인, 터키인이나 기독교인들의 예배나 사상은 모든 국가나 지역 안에서 인정되어야만 한다."라고 역설하였다. 존 로크는 『관용에 관한 서한』(1689)에서, "이방인도, 무슬림이나 유대인들도 그들의 종교 때문에 시민권이 제한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17세기 말의 종교적 관용 이론의 기초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영향은 17세기의 히브리 - 유대 문학에 대한 유럽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기독교 유대주의자들은 유럽 대학 안에서 히브리 - 유대학 강좌를 두었다. 성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 사상, 사회 및 국가에 대한 권위 있는 책으로서, 그 속에 담겨져 있는 히브리 사상은 계몽된 국가의 정치 · 사회 발전의 좋은 예서(例書)로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 상업 이론과 유대 변증학

유럽 사회의 새로운 정치 · 경제적 사상은 유대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태도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국가의 복지'는 유럽 사회에서 하나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 주장은, "모든 인간은 종교에 의하여 판단되지 아니하며, 국가에 대한 유용성에 의해 판단된다."라는 것이었다. 유럽의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인간의 경제적, 상업적 행위를 보다 중요시하게 된 것이다. 17∼18세기의 사람들은 중상주의자 이론(mercantilist theory)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유럽 사회의 유대인의 통합을 지지하게 된다.

이런 실용주의적 변화에 따른 유대인들의 지지는, 1638년 변증가인 시몬 루자토가 쓴 『베니스의 유대인에 관한 소고』에 나타나 있다. "유대인들이 사는 곳은 어디에서나 무역과 상업이 넘쳐흐른다." 특히, 영국에서는 철학자 존 톨란드가 『대영 제국과 아일랜드의 유대인 귀화를 위한 근거』(1714)에서 "유대인들을 영국으로 데려오는 일이 왜 이익이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 몽테스키외는 "기독교는 무역이나 상업적 이익을 위하여 고리 대금을 엄격히 금지했는가 하면, 또 왕은 유대인들의 재산을 압수하고 추방시켰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들의 돈을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기기 위해 환어음을 고안해 냈다."라고 하면서, 유대인들이 유럽의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개인의 이익은 자동적으로 전체의 이익을 낳는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 계몽주의와 유대인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은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 교육받은 유럽인들의 유대인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들은 종교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동등한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고, 국가 안에서 구별된 신원을 보존하는 것을 역사적 집단의 실존으로 받아들였으며, 나아가 `분리주의자 유대인 집단을 비록 그들이 위선적일지언정 인정할 정도였다.

독일 작가인 에브라임 레싱은 『유대인』(1749)에서 유대인이 정직하고 훌륭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고 밝히고 있을 정도이며, 『현자 나단』(1779)에서는 유대인을 이론이나 실제에 있어서 자연 종교의 제안자로 보았다. 그는 이 책 속에서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간주하자 현자인 나단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 자신의 백성을, 너는 너 자신의 백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 나는 먼저 인간이요, 다음이 유대인이며, 너도 먼저 인간이요, 나중이 기독교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기생적인 모습으로 발전되는 것을 배격하였다. 클레르몽 토네르는 1789년 12월,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우리는 한 국가 안에서 유대인들에게 독립된 정치 기구나 계층을 두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각자 개인적인 자격으로 시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러한 우리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추방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국가 안에 비시민 단체나 국가 안의 국가를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 이신론자들과 철학적 합리주의자들

유대인들을 하나의 단체로 인정하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그것은 곧 '국가 안의 국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18세기 영국의 이신론자(理神論者, deist)들은 자연 종교를 지지하고 계시 종교를 반대하는 자들로서, 모든 종교 사상을 합리주의적으로 보려는 자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유대인의 성서는 지어 낸 거짓말이요, 그들의 조상과 영웅들은 부도덕한 악당이며, 예언자들은 편협한 광신주의자라는 것이다. 이들은 종교적 기적이나 환상 등을 거부하는 자들로서, 이러한 사상을 가진 종교는 모두 미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야만족이고 잔인한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 교부들의 반(反)유대 논쟁의 부활이었다.

프랑스의 사상가인 볼테르는 그의 『철학 사전』(1764)의 '유대인' 항목에서, "큰 국가가 작고 알려지지 않은 노예 국가로부터 법이나 신앙을 가져올 수는 없는 것이다. ······ 유대인들은 전적으로 무식한 민족이며, 오랫동안 폭력과 증오, 반역과 인색함으로 살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화형에 처해지지 않았다."라고 소개하였다. 또, 홀바흐는 반유대주의에 입각하여 유대인을, "간단히 말해서 약탈 민족이다."라고 정의하기도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 역시 유대인들을 '도덕적 타락'과 '국가 안의 국가'라는 두 원리에 입각하여 비판하면서, 1793년에는 유대인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그들이 이 권리를 계속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목을 자를 수밖에 없다. 만일, 그들에게 시민권을 준다면 그들은 다른 시민들을 짓밟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8세기 이러한 논거의 주장자들은 전세계에 이 일을 알리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철학자 칸트는 『의사단의 전쟁』(1798)에서, "유대인을 안락사시키는 방법은 그들의 종교적 도덕성과 순수함, 오래 된 법규들을 그들로 하여금 포기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하다."라고 설파하였다.

 

· 통합의 방법으로서의 유대인들의 개량(改良)

이신론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유럽의 교육받은 계층은 유대인들이 그들의 종교나 신앙을 버리거나 변경하지 않고도 그들의 권리를 증진시키는 통합의 길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돔은 『유대인의 시민 변형』(1781)에서, 유대인들의 동등한 시민권과 직업 선택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격려하였다. 나아가, 그들의 예배의 자유, 회당을 열 수 있는 권리 및 학교에서 과학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일도 허락하도록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국가를 위해 봉사하도록 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훈련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은 그들이 온전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후에 실시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기독교나 국가에 대한 증오심이 표출될 가능성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임을 경고하였다. 따라서 그는 영향력 있는 정부 밑에서 새로운 교육을 통한 개량 방법이 창안,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돔의 주장은 다른 여러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인 목사 아베 그레그와는 『유대인의 육체적, 도덕적, 정치적 문예 부흥 소고』(1789)에서, "모든 유대인들의 모임은 정부가 임명하는 대표가 의장이 되어야 하며, 모든 토의는 그 국가의 언어로 진행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1785년, 폴란드에서 온 유대인들을 개량하기 위하여 모든 서류에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군 복무를 의무화하였다.

 

· 프랑스 혁명기의 유대인들에 관한 토의들

프랑스 국민 의회 및 독일 국민 의회는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비중 있는 토의를 계속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유대인들의 인권, 즉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박탈하자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주창하는 것은 꺼려하였으나, 유대인들의 정치적 문제 및 시민권 부여에 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었다.

1789년 12월,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목사 및 보수주의자들은, '유대인(juif)'이라는 말을 종교적 분파(sect)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들의 법을 가지고 있는 한 민족으로 규정하면서, 이들에게 시민권을 주는 것은 영국 사람이나 네덜란드 사람들이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로베스피에르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의 나쁜 성격을 강조하면서, "시민이 될 만한 적절한 자격을 갖춘 시민에게만 공민권을 주어야 한다."라고 차등 권리제를 주장하였다.

1796년의 독일 국민 의회에서도 프랑스에서와 비슷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땅으로부터 추방당하였으며, 그들의 희망은 오직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 사는 모든 유대인들은 나그네로서 살고 있으며, 또 전능자로 오실 메시아를 늘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다른 땅에서의 거주 자체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에 반해 유대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은 우리가 그렇듯이 한 인간이며, 그들의 행동 역시 다른 민족이 가지고 있는 것 같이 취급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지금 유대인들은 한 백성(a people)으로 생각되는가? 아니면 한 국가(a nation)로 생각되는가? 이들에게 주어진 이름은 신앙의 이름인가? 국가의 이름인가? 그들은 그들의 국가를 잃은 이래 그들 스스로를 한 번도 국가로 부른 적이 없으며, 한 신앙의 백성으로 부르고 있을 뿐이다."라고 옹호하였다.

결론적으로, 17∼18세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태도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종교적 관용 이론 혹은 중상주의적 이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대인을 한 인간으로, 또 경제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봄으로써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자는 입장이며, 다른 하나는, 유대인을 정치적으로 '국가 안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17∼18세기의 유대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이중적 태도는 하나의 민족으로 다시 태어나려는 유대인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틀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종교 개혁으로 인한 정교 분리 운동, 합리주의자들의 계시 종교의 거부, 교회 전통과 조직에 대한 비판 및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자유 및 인권에 대한 존중이라는 유럽의 커다란 변화에 따라서 유대인들의 정치적, 법적, 철학적 전통에 대한 인식의 폭이 그만큼 증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