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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중세 유럽의 유대인

淸山에 2013. 6. 6. 21:31

 

 

 

 

 

 

제2장 중세 유럽의 유대인

 

1. 경제 활동

유대 역사에서 중세라 함은, 640년 아랍 - 이슬람의 통치 시대로부터 십자군 시대를 지나 문예 부흥과 종교 개혁을 거쳐 17세기 유럽의 변화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지위와 자치권을 위한 투쟁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슬람과 기독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 나가야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이 두 정복자들로부터 여러 가지의 고난과 박해를 받은 시기로 규정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삶 속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자치권을 보장받고 인정받으려는 노력과 함께 정치 · 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갔던 시기였다.

 

중세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경제 생활을 들 수 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가내 수공업과 무역업을 중심으로 차츰 커 나갔다. 특히, 기독교 세계 내에서의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유대인들의 재력을 바탕으로 한 지위를 확보해 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봉건 영토 내의 먼 지역으로 여행하여 새로운 상품을 소개하거나 들여옴으로써, 지역 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11 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대인들은 각 지역마다 지점을 두어 무역과 상업 활동을 체계적으로 해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온 가족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봉건 군주들조차 이들의 이러한 상업 활동을 인정하면서 많은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상업을 통하여 많은 돈을 번 유대인들은 이 돈을 일반인들에게 대여해 줌으로써 이자를 받는 금융 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들은 번 돈으로 금과 은을 사들였으며, 이러한 상업 활동이 순환적으로 계속되면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경제 활동은 종종 지방 원주민들로부터 오해와 미움을 사기도 하였으나, 여러 지역에서 금융과 상업에 관한 한 유대인들의 숙련된 활동이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 중세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매우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제국 내의 유대인들 가운데는 남녀 노예들을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이 많았으며, 이슬람의 스페인에서도 유대인들은 화려한 생활을 영위하였다.


 

2.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증오심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의 기본적인 태도는 중세 이전, 즉 후기 로마 제국 내에서 사실상 구체화되었다. 즉, 하나님의 유대인 선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 선택이 이미 기독교로 옮겨 왔다는 신학적 이해는 4세기 이후에 확대되었다. 교황 그레고리 1세(Pope Gregory Ⅰ, 590~604)는 유대인을 아직도 교회와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들로 보았으며, 유대인의 회당을 새로 건축하는 것 등을 금지시켰다. 같은 시기의 교부들도 역시 반유대적인 설교를 하였다. 나아가 7세기에 또 하나의 유일신 신앙을 가진 이슬람이 등장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종교적 태도는 원칙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이슬람의 스페인 안에서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당하였으며,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의 자녀들은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였다.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갈등과 투쟁 역시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이가 나빠지면서 서로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슬람의 정복은 이슬람 제국 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의 지위를 바꾸어 놓았다. 무슬림에게 있어서 유대인들은 단순히 이단일 뿐만 아니라 비신앙인이었다. 이른바 이슬람 신앙을 신봉하는 공동체인 움마(Umma)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모두 적이었다. 이슬람 안에서 탁월한 법과 실천 강령을 가지고 있던 수니파 교도들은 알리의 추종자들인 혁명적인 시아파 교도들보다 비교적 관용적인 사람들이었다. 1008년, 이집트가 시아파에 의해 점령되면서 이집트 내의 유대인들은 참수형에 처해지거나 광야로 추방당하는 등 심각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한편, 1096년에 라인란트 계곡에 집결한 십자군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시작하였다. 마인츠(Mainz)에서는 기독교 개종을 거부한 약 1000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하였으며, 1099년에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을 때에는 유대인들을 회당에 모아 놓고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슬람과 십자군에 의한 종교적 박해는 유대인들에 '순교자에 대한 기도(Kiddush Hashem)'를 낳게 하였다. 즉, 개종하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간 이들로 부르며, 이들을 위한 기도를 통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신앙적 구심력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가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유대인 박해가 계속되자 헨리 4세는, 강제로 개종한 모든 유대인들에게 본래 위치로 되돌아갈 것을 허락하여 많은 유대인 도시와 공동체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이러한 조처는 지속적이지는 못하였다. 유대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자신들을 보호해 줄 힘이나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할 희망을 찾지 못하게 되자, 학살에 반대하는 군사적인 행동을 감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다다랐다. 유대인들은 폭동을 일으켜 도시 밖에 성채를 구축하고, 그 안에 사는 비유대계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맞서 싸워 나갔다. 영국의 요크(York)에서는 이렇게 하여 고립된 유대인들이 포위를 당하여 견디지 못하고 모두 자결한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중세의 유대인들은 차츰 그 사회와 고립되어 가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면서 내면화되어 갔다. 경제적인 지위도 차츰 약화되어 갔다. 이때에 생겨난 새로운 종교 사상은 대부분 내재화, 신비화되어 갔다. 대표적인 집단 가운데 카라이트파가 있는데, 이들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의 종교 전통이나 제의, 탈무드 등을 거부하면서, 오직 토라와 유대인 간의 개별적이면서 직접적인 접촉을 강조하였다. 카라이트파의 지도자는 베냐민 벤 모세 알 나하벤디였다.

 


 

3. 법적 지위


 

중세 유대인의 지위는 항상 세속 정부의 인가(認可)에 의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은 항상 자신들의 자치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중세 사회에서 유대인들이 받은 정치 · 종교적 대우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는 만만치 않았다. 서부 유럽의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돈을 빌려 주는 일에 종사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교회와 제국, 교황과 황제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고조되면서, 유대인의 종교적 지위를 위협하는 교황의 입장과 유대인의 경제적,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려는 황제의 노력이 상호 교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요한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이 유대인의 경제력과 그들의 대부(貸付) 행위였다. 돈이 많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돈을 빌려 주게 함으로써 그들의 법적 지위를 보장해 주거나, 심지어 죄를 지은 유대인들에게 면죄부가 되도록 해 준 경우도 있었다. 이는 중세 봉건 제도하에서 농노들은 봉건 군주에게 충성하고, 봉건 군주는 농노들을 보호해 주는 형식의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황제의 행위는 적어도 교황의 눈에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더구나 교부 시대부터 교회는 예수를 살해한 유대인을 가인처럼 인식해 왔다. 황제의 지위마저도 결정지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된 교황은 유대인들을 억압하였다. 중세 유럽 사회에서 유대인에 대한 실질적인 법적 차별은 없었으나, 관습과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증오와 박해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폭력적인 저항뿐이었다.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기독교 어린이들을 살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살상은 유대인들을 더 큰 곤경에 처하도록 하였다. 1286년, 뮌헨에서는 "유대인들이 기독교 어린이들을 잡아다가 그 피를 뽑아 마신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 사실을 글자 그대로 믿었다. 급기야 황제 프레드릭 2세는 사제들을 불러 이 사실을 조사하도록 명령하였고, 여러 지역에 걸쳐 조사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387년에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서도 그 배경으로 삼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4. 종교 사상


 

중세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징조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말경이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지도 체제는 귀족적인 계급 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토라 연구에 있어서 전문적인 지식층이 이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권위와 역할은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러한 지도 체제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적 박해 속에서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형태의 체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형식의 지도 체제와 사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지도력의 권위를 주장하고 나선 사람은 일명 마이모니데스라 불리는 모세 벤 마이몬(Moses Ben Maimon, 1135~1204)이었다. 스페인에서 추방당하여 이집트로 건너가 유럽에서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제도를 발견한 그는, 과거의 제도를 거부하고 보다 강력한 정신적 지도자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는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만을 강조하고, 탈무드 학교에서 많은 돈을 받고 가르치는 것을 비판하고 나섰다.

 

철학자이자 의사이며 법전 편찬자였던 그는 합리주의자로서 전통과 신앙을 이성과 철학을 바탕으로 설명해 나가면서 전통적인 유대 사상을 수정해 나갔다. 그는 유대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려 하였으며, 유대 상류 사회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특히, 그는 명확하게 체계화된 철학으로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을 설명하였다. 그는 메시아의 인성을 강조하였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다 사회적인 성격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주의 철학으로 설명된 유대 신앙은, 아직까지 이성적인 사고에 익숙하지 못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메이르 벤 하레비(Meir Ben Todros Ha - levi Abulafia)1)와 메나헴 벤 솔로몬(Menahem Ben Solomon Hameiri)은 마이몬의 합리주의적 태도와 해석에 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그의 이론을 반박하였다. 특히, 마이몬의 육체의 부활을 거부하는 해석과 합리적 · 알레고리(allegory)적 해석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그는 '헬라의 지혜'와 모세의 토라는 결코 종합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마이몬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유대교의 밀의적(esoteric)이며 신비적인 교리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두 학파 간의 갈등과 논쟁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았다. 15세기까지 계속된 이 논쟁은, 결국 두 학파의 주장은 상호 보완적이며, '이성과 신앙은 길을 밝히는 두 개의 등불'이라는 결론으로 어느 정도 매듭을 짓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해와 차이, 두 입장은 여전히 유대인의 문화와 종교적 전통 속에 깊게 흐르는 두 줄기의 물줄기가 되었다.

 

각주

 

1.1) 1280년, 메이르 벤 하레비는 한 '목소리'에 이끌려, 교황 니콜라스 3세를 개종시키기 위해 로마로 갔다. 니콜라스 3세는 매우 완고했기 때문에 그를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방해 없이 수리아노로 도피하였고, 거기서 교황이 전날 밤에 중풍으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로마로 돌아 온 그는 한 달간 감옥에 갇혔으나, 그 후 풀려났다.

 

 

5. 유대인의 재이주(再移住)

 


중세 유대 문화의 중심지와 이주(移住)


 

많은 박해 속에서, 유대인들은 힘들고 위험한 곳으로부터 새롭고 안전한 삶의 거처를 찾아 떠나야 했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 세계로, 기독교 세계에서 또 다른 기독교 세계로, 서쪽으로부터 동부나 북부로 이주해 갔으며, 주로 도시로부터 소도시나 시골로, 유럽의 주요 국가로부터 변방의 국가로 이동하였다. 서부 유럽에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동부나 북부 유럽으로 이주해 나갔으며, 주로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 등지로 옮겨 갔다.

 

특히, 스페인의 가톨릭 지도자들은 1391년부터 1492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 스페인 내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추방하였으며,1) 이들은 또다시 고향을 잃은 자들처럼 처참하게 쫓겨 가야만 하였다.

 

추방된 유대인들은 주로 한 곳에 집단적으로 정착하면서, 스스로 자신들에게 있어서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형태의 정착 운동을 벌여 나갔다. 나아가, 이 시기에 쫓겨난 많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로의 복귀를 서둘렀다. 순례단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들 가운데는 은행가나 상인들이 많이 있어서, 팔레스타인의 경제에 부합되어 이주가 용이하였다.


각주
1.1) 최근 유대 연구가들에 따르면,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가 바로 이 시기에 추방된 유대인이었다는 주장이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지금까지 신대륙 발견의 동기로 새로운 상업 해상로를 개척하기 위한 왕실의 지원과 순수한 신앙을 찾아 나선 퓨리탄의 행위만이 강조되었으나, 만일 이 주장이 사실로 인정된다면 당시 기독교 세계 내에서의 유대인의 문화적, 사회적 역할이 강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