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 배움/이스라엘 史

제3장 유럽의 변화와 유대인 공동체(2.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유대인의 법적 지위)

淸山에 2013. 6. 6. 21:18

 

 

 

 

 

 

2. 전체주의 국가에서의 유대인의 법적 지위

 

중세 유럽 사회는 기본적으로 각 사회 단체 간의 협력 및 정치 ·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절대 군주 국가를 강화시킨 중앙 집권주의자와 전체주의자는 이러한 중세의 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특히, 독일에서는 각 단체와의 협력이 유대 공동체의 자치력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절대 권력의 집중은 유럽에서의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상실하게 하였다.


 

· 동유럽의 유대인들

 

이 시대에 폴란드는 왕정이 기울고 대신 귀족 계층의 세력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지위는 왕보다는 귀족 계층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었다. 유대인들은 주로 대지주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고용 효과를 누리고 있는 자들로서, 다른 계층(사제, 도시 중간층 및 소작농)의 비판으로부터 유대인들을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이들로부터 당하는 시달림 또한 고달픈 것이었다. 사유 재산이 없었던 유대인들은 대지주의 땅에서 살았으며, 그 때문에 공민(公民)과 지주 사이의 갈등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폴란드의 사제들은 유대인 박해의 배후 세력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교회 예배 참석을 강요하였으며, 반유대 시위에 학생이나 도시 불량배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까지 고문과 잔악한 박해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1740년대와 1750년대에는 거의 매년 종교적 광신주의자들의 피의 모독이 있었다. 최악의 사건은 1768년 폴란드 귀족 사회의 반대 단체와의 충돌이었다. 젤렌즈니악이 이끄는 깡패들이 동부 폴란드를 장악하였으며, 그들 중 일부는 우만(Uman)의 중요한 한 성채를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과 귀족들을 살해하였다. 이때 처형된 사람은 20,000여 명으로 그중에는 수천 명의 유대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이 시대의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의 지위는 매우 보잘것없었으며, 전체주의자들의 태도는 거의 중앙 집권적인 통치의 힘을 위하여 소수 민족이나 단체들의 자치적 힘을 거의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계몽된 전체주의자들은 소수 민족을 변형 또는 개량시켜 이용할 목적으로, 그들의 인권을 존중하면서 유대인들의 통합을 꾀하였다.

 

 

근대 유럽의 유대인 인구 분포

 


 

· 계몽주의의 결과와 프랑스 혁명

 

 

16세기의 종교 개혁으로 인한 변혁만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유럽의 변화는 전체주의의 몰락과 개인주의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개인의 양심과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었으며, 이는 곧 유대인들이 법적 지위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중세의 종교 및 사회 조직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인식된 유대인들의 자리매김은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통하여 이룩된다. 프랑스 혁명은 평민들의 귀족들에 대한 불만과 계몽주의 혁명 사상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

 

계몽 사상은 17세기에 시작된 과학자들 - 갈릴레오, 뉴턴, 데카르트, 호이겐스, 파스칼 등 - 에 의해 이룩된 과학 혁명과 사회 과학자들 - 로크(사회 계약론), 콩도르(낙관주의), 애담 스미스(자유 방임론), 루소(자연법, 교육, 인간 불평등 기원론), 볼테르(이신론) 등 - 에 의한 인간의 이성 발견을 기본 원리로 하고 있다.

 

1789년 8월 말, 루이 16세의 삼부회(三部會)가 사라지고 프랑스 국민 의회가 발족하였다. 국민 의회는 인권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공포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어떤 인간도 자신이 신앙으로 인하여 침해받지 아니한다." 이보다 조금 앞선 1786년, 미국의 버지니아에서 선포된 종교 자유를 위한 헌장에서도 역시, "모든 인간은 어떤 종교의 예배, 장소, 시역에 강요받지 아니하며, ······ 어떤 종교적 입장이나 신앙에 의한 고통에서 배제된다. 모든 인간은 종교 문제에 있어 그들의 입장을 지키기 위해 논쟁하거나 고백하는 것은 자유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이와 같은 선언이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즉각 이 개념이 실천, 시행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프랑스 혁명의 정신과 목적을 반영하는 추상적인 원칙 - 다양한 부분의 관심, 전통 개념과의 상호 균형 - 의 선언일 뿐이었다. 저절로 이러한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 나폴레옹과 유대인

1793년, 국왕인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도덕 공화국을 세운 자코뱅파가 대중들의 지지를 얻기에는 그들의 이상은 너무 추상적이고, 그 실천은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1795년 가을, 불만에 찬 파리 시민들이 봉기했을 때, 국민 의회를 위기로부터 구출해 준 나폴레옹은 해방의 원칙을 지키려는 자들과 이를 반대하는 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충돌을 계기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급기야 1799년,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중앙 집권적인 군주제를 부활시키면서 황제에 등극하였다.

 

그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함으로써, 유럽 전역에 걸쳐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그러나 프랑스의 팽창주의는 여러 나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이탈리아 등지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1812년,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여 엘바 섬에 유폐됨으로써 그의 팽창주의는 막을 내렸다.

 

한편, 유대인에 관한 문제는 알자스 · 로렌 지방의 주민들이 유대인들에게 빚 문제를 제기하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프랑스 국민 의회에 상정되어 유대인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려고 하자, 이 법이 평등원칙에 위배된다면서 거부되었다. 나폴레옹은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1년 동안 유대인의 안전에 대하여 토의할 기구를 두도록 하였으며, 동시에 유대인 저명 인사 의회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1806년 7월에 이 기구가 설치되어, 유대인들에게 제기된 12개의 질의서의 내용 - 일부다처 및 이혼에 관한 유대인들의 의견,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 유대 자치 기구의 권위 문제, 유대인들의 고리 대금업과 직업 문제 등 - 을 토의하였다. 이 의회는 1807년 2월에 대(大) 산헤드린으로 개편되어, 이 문제를 토의한 후 9개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나폴레옹에 따르면, 이 결의안은 프랑스 안에서 '모세 종교의 조직'을 발표한 것이었다.

 

그러나 1808년 3월에는 유대인들의 지위를 규제하는 두 칙령이 공표되었다. 하나는 프랑스 안에서 공동체의 계급적 조직을 규제하며, 모든 개인 또는 단체의 일은 파리에 있는 중앙 감독원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불명예 선언으로 불리기도 하는 칙령으로, 유대인에 대한 모든 대부(貸付)를 통제하고, 무역 거래를 위해서는 특별 허가를 받아야 하며, 아울러 다른 지역에서 프랑스의 북동 지역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이와 같은 변화된 조처는 다른 전체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국가 안에서 유대인을 통합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으며, 동시에 국가를 종교보다 우위에 두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영향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다시 게토(Ghetto)로 돌아갔으며,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동등권은 국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폴레옹에 의해 수여된 것이다."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요약하면, 17∼18세기 유럽의 정치 · 사회적 변화는 유대인들의 법적 지위에 서서히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유대인들에게도 전적인 동등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권력의 개입과 함께 인정된 것이며, 동시에 그들의 목적에 이용되었다. 절대 군주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 · 경제적 이익을 위하여 이 일을 진행시켰으며, 유대인들을 '통합'하고 '개혁'하려는 의도가 컸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대한 조항들은 상황에 따라 자주 바뀌거나, 그 시행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17∼18세기 말까지는 적어도 유대인들의 완전한 법적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도기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