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 배움/이스라엘 史

제4장 서구 세계의 반유대주의

淸山에 2013. 6. 6. 21:11

 

 

 

 

 

제4장 서구 세계의 반유대주의

 

1. 가장 오래된 증오

1879년 독일의 빌헬름 마르(Wilhelm Marr)가 처음으로 사용한 반유대주의라는 용어는 "유대인은 천성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악하며 열등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태도와 행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유대인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하루 아침에 탄생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의 역사는 유대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된 것으로, 그것은 2000살도 넘은 늙은 망령이다. 어느 날 갑자기 괴물처럼 출현한 돌연변이가 아니다. 반유대주의는 끈질긴 생명력과 놀랄만한 유연성과 뛰어난 융통성을 가지고,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를 관통해 오늘날까지 살아 활동하고 있다.

 

실제로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폭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Holocaust)조차 아주 작은 미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미워하기라는 날줄과 미움받기라는 씨줄로 얽힌 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발전하고 변형돼 온 반유대주의의 변이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오랜 진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인류가 탄생했다는 가설보다 더 복잡하다. 최근 자연 과학이 발견한 복잡계(complex system) 이론에 따르면, "북대서양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태평양에서 거대한 태풍을 만들 수 있다." 소위 반유대주의라는 이름이 낳은 인류 최대의 비극도 따지고 보면 유대인에 대한 보잘것없는 기억과 대수롭지 않던 편견이 낳은 역사상 가장 '오래 된 증오(the Longest Hatred)'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반유대주의가 태어난 곳은 신화가 지배하던 그리스 · 로마의 땅이었고, 그것이 젖을 먹고 자란 곳은 절대 신앙을 자랑하던 기독교 천년 왕국이었으며, 마침내 '위대하고 순수한 피'를 가진 아리안의 독일에서 '악의 꽃'을 피웠다. 그리스 · 로마인이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유대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이번에는 기독교도가 말하였다. "너는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말하였다. "너는 살 권리가 없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아주 먼 옛날 어떤 사람이 그릇된 생각(misconception), 즉 '유대인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 편견은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 즉 '유대인은 다 나쁜 놈'이라는 고정 관념을 만들었다. 위험한 편견과 집단적 기억은 '유대인 없는 세상에서 살면 좋겠다.'라는 하나의 이미지와 신앙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신앙은 객관성을 띤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하며 기구화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는 하나의 사실(a fact)과 하나의 이미지(an image) 사이에서 작용한다. (그래서 반유대주의는 실체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허상으로 보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다.) 예를 들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이라는 생생한 인물을 통해 구현된 유대인의 이미지는 모든 유대인을 샤일록처럼 이해하고 해석하게 만듦으로써 유대인을 악마화한 사회의 기억을 영속화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오랜 세월 동안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인간의 기억이라는 유전자 속에 흡수, 저장되어 있다가 적절한 사회적 온도와 문화적 습도를 갖춘 정치적 토양과 만나면서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괴물 - 이 괴물은 시대마다 모양을 달리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 로 탄생하여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다. 어느 날 그 같은 신앙을 가진 콧수염 달린 이가 나타나,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미명하에 유대인을 모두 멸절(滅絶)시켰다. 해충(害蟲)에 약을 치듯이.


 

2. 반유대주의의 다양한 얼굴들

 

반유대주의의 출발은 디아스포라 세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독특한 신앙 - 유일신 신앙과 삶의 방식, 즉 까다로운 음식법과 안식일, 타 민족과의 결혼 금지 등 - 때문이었다. 유대인의 남다른 생활 방식과 외양(外樣)은 다수의 비유대인들의 눈에 거슬릴 만큼 독특한 것이었으며, 다수의 외집단에 협력하지 않는 소수의 내집단의 배타적 태도라 하여 눈총을 받았다.1)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사제 마네토(Manetho)와 아피온(Apion), 그리스의 몰론(Apollonius Molon)과 로마의 타키투스(Tacitus) 등은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을 지적한 이들이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자신의 책 『역사』(5.5)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유대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오직 증오심과 불화만을 드러내고, 따로 앉아 식사하고, 따로 잠을 자고, 색욕이 강한 종족이면서도 외국 여인들과는 성교를 금하며, 그들 사이에는 법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이다.

 

기독교 세계는 그리스 · 로마 시대가 만들어 놓은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 분리주의와 사회적 반감을 거의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토대 위에 새로운 신학적 편견과 차별을 쌓아 올렸다. 그것은 1세기 후반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유대교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누가 하나님의 합법적인 상속자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논쟁 과정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을 살해한 자'라는 교회의 고정 관념이 자리하기 시작하였다.2)

 

이러한 신학은 기독교 교부(敎父)들에 의해 일차적으로 복음서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그 근거를 찾아 발전시켜 나갔다. 교부들은 '육을 따르는 이스라엘'은 버림받았으며, 젊은 기독교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언약의 진정한 상속자인 '참 이스라엘'이라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낡은 선택과 옛 약속은 파기(破棄)되었으며, 이제 교회가 새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아 '새로운 이스라엘'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교리가 그것이다. 교부들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교회의 박해가 가시화되었다.

 

388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폭력 사태는 유대교 회당에 방화가 일어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와 박해의 정도는 '야만적'이지는 않았다. 결정적인 변화는 유대인 대량 학살을 몰고 온 제1차 십자군 원정(1096년)을 통해서였다.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 부용의 고드프루아(Godefroi de Bouillon)는 그리스도의 피값을 이스라엘에 갚자며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살려 두지 말 것"을 명령하였고, 유대인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한 십자군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일을 감행하였다. 십자군의 잔인한 대량 학살은 유대인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3)

 

각주

1.1) 여기에 반유대주의의 '보편성'이 자리한다. 즉, 사회 ·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반유대주의를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으로, 여기서 미움은 타문화의 환경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소수자의 문제로 일반화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타문화 속에서 살아온 여러 민족 중에서 왜 유독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항구적(恒久的)이며, 심지어 유대인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조차 극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 '특수성'이 자리하게 된다. 또, 유대인에 대한 반감의 정도가 모든 나라와 문화에서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설득력을 잃게 된다.


2.2) 사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주장이, 실제로는 몇몇 유대인만이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세대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죽인 자'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들을 어떤 정치 · 종교적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공격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떤 사실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단순화시킬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이며, 더욱 심각한 것은 여기에 개입된 정치적 목적이다.


3.3)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까지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신학적인 이유보다는 역사적인 경험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3.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이다"

 

 

십자군 운동은 유대인의 불신앙과 낮은 사회적 지위를 일깨움으로써 사회적 이탈과 지적 회의에 빠진 중세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우월한 지위와 신앙을 입증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꾀하려 했던 것이다. 이로써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이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탄생한 것이다. 본래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였던 이 명제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법으로 확정되었다. 중세 대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조차 유대인은 죄로 말미암아 '영구적인 노예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확증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기독교인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곧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복음서 27:25)라고 말한 자들이라며, 그리스도를 처형자의 손에 내줌으로써 벌받을 짓을 한 유대인들이야말로 기독교인의 노예일 뿐이라 강조하였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은 특별히 정해진 복장 - 둥근 모자를 쓰거나 옷에 노란색 유대 배지를 달게 하였다. - 을 하고 다닐 것을 성문화하였으며, 유대인의 교회 출입 금지와 기독교 명절에는 거리를 걸어다니는 것조차 금지하였다.

 

이러한 때에 영국 노리치에서 일어난 한 기독교 소년의 살해 사건(1144년)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축제인 유월절에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인 무교병을 기독교인의 피에 찍어 먹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성체(聖體)를 모독한 유대인'에 대한 파문으로 이어져 핍박과 추방을 불러일으켰다. 사실상 이러한 판타지는 당시 중세 유럽의 흡혈귀 전설 및 민담과 연결하여 중세의 미술, 음악, 문학, 성극, 설교 등을 통해 정형화해 나갔으며, 아울러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결정된 화체설(化說) - 성례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입에 들어가는 순간 예수의 진짜 살과 피로 변한다는 중세 기독교의 교리 - 등과 결합하여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1347~1360년에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흑사병은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라는 소문을 낳으면서 성난 군중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게 하였다. 이제는 '신을 살해한' 유대인의 이미지에 악마의 뿔과 꼬리를 단 셈이다.

 

이러한 시기에 기독교인의 머릿속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확고한 고정 관념으로 자리잡은 것은 바로 고리 대금업자의 이미지였다.1) 당시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또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면서도 길드에서 배척받았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원활한 경제 활동을 위해 유대인이 고리 대금업으로 손을 뻗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당시 교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왕실을 비롯한 일부 기독교 부자들은 유대인 고리 대금업자들과 거래하면서 서로 이익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이미 신을 살해한 무신론자로 낙인찍혀 있던 유대인들은 이제 가난한 이들의 돈을 빼앗는 흡혈귀로 묘사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토지 중심의 유럽 봉건 사회에서 반유대주의가 보다 사회 · 경제적인 성격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된다. 대중들의 마음속에 유대인은 점차 은행가, 환전가, 기독교의 땅에 침투해 기생하는 착취가 등 돈과 경제의 기수라는 이미지로 자리매김해 갔다. 이것이 유대인에 대한 중세의 고정 관념이었으며, 이것은 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유럽의 반유대주의사에서 운명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종교 개혁자 루터 역시 유대인에 대한 중세적 신화와 생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1543년에 쓴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에서 루터는 유대인을 우물에 독을 탄 자, 제의적 살해자, 고리 대금업자, 악마로 변신한 기독교 사회의 기생충 등으로 부르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정당화하였다.

 

첫째, 그들의 회당은 불태워져야 하며, 불태워지지 않은 것들은 먼지로 뒤덮어 아무도 타다 남은 찌꺼기나 돌멩이조차 볼 수 없게 해야 한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보여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기독교의 명예를 걸고 행해져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저주하고 모독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 둘째, 그들의 집을 부수고 파괴해야 한다. 회당에서 하는 짓을 거기서도 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큰소리치듯이 그들이 우리 땅의 주인이 아니라 가여운 포로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한 지붕 밑이나 한 마구간에 집시처럼 집어넣어야 한다.

 

셋째, 그들에게서 기도서나 탈무드 같은 우상 숭배와 거짓말과 불평을 가르치는 책들을 빼앗아 버려야 한다. 넷째, 랍비들에게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다섯째, 유대인은 귀족도 공무원도 상인도 아니기 때문에 도시 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하지 못하도록 유대인에게 여권 발급이나 여행 권한을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 그들을 집에 머물도록 하라. 여섯째, 고리 대금업을 중단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현금이나 금 · 은 같은 값어치 나가는 것들을 빼앗아 보관소에 넣어 두어야 한다. 그들의 재산은 고리 대금업을 통해 우리에게서 훔치거나 빼앗아 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악한 돈은 하나님의 축복과는 반대로 저주받은 것이어서, 다시 선한 용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

 

일곱째, 젊고 강한 유대인은 도리깨질, 도끼질, 괭이질, 삽질, 실톳대질, 물레질을 시켜, 아담의 자손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콧등의 땀으로 빵을 벌어먹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이방인(goyyim) 취급하여 우리의 이마에 땀을 흘리게 하고, 자신들은 게으름 피며 화롯불 곁에 앉아 능청을 떨고 있던 것이 타당하지 않았음을 보여 줘야 한다. ······ 우리는 교활하며 게으른 뼈들을 우리 제도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봉사하고 우리를 위해 일할 때, 우리의 아내와 자식과 종과 가축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 관대한 자비가 그들을 착하게 만들기는커녕 자꾸만 나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 ······ 요약하면 당신의 영토 안에 유대인을 가진 군주와 귀족들이여, 만약 내 충고가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면, 당신과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이 무거운 짐, 즉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지어다."

 

각주

1.1)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고리 대금업자라는 주장은, 실제로는 몇몇 유대인만이 고리 대금업을 하고 있을 뿐임에도 모든 유대인에게 '고리 대금업자'라는 꼬리표를 붙임으로써 그들을 사회 · 경제적으로 공격하려 했다는 것이다. 종종 이런 이데올로기적 망상과 정치적 음모는 객관적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것은 실제로 사회적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4. 더러운 피, 열등한 유대인

 

 

유대인의 피가 세례를 통해서도 깨끗해 질 수 없는 유전적 결함을 안고 있다는 최초의 주장은 15세기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평생을 유대인 개종을 위해 살아온 도미니크회 소속의 수도사 페레르(Vincente Ferrer)가 처음으로 제기한 소위 '나쁜 피(mala sangre)' 이론은, 비록 그것이 나치의 인종주의와는 성격이 달랐지만, 그동안 지속돼 온 종교적 반유대주의를 축소시키는 대신 새로운 형태의 '인종적' 반유대주의를 탄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고상한 혈통을 가진 '순수한' 기독교인과는 달리 '더러운 피'를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하더라도 대학, 성직 및 공직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으며, 결국 1492년 페르디난도 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칙령에 따라 모든 유대인이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이 중세 기독교의 가치관을 붕괴시키고 세속주의와 개인주의를 새로운 사회 가치로 환원시키면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원칙이 세워짐과 동시에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종교적 차별이 수그러드는 듯하였다. 소위 계몽주의자들의 종교적 관용 이론은 "모든 인간은 종교에 의해 판단되지 않으며 국가에 대한 유용성에 의해 판단된다."라는 중상(重商) 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유대인이 사는 곳마다 상업과 무역이 넘쳐나며 유럽의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인정되면서 '신을 살해한 백성'이라는 전통적인 증오심도 점차 누그러들었다. 여기에 멘델스존이나 레싱 같은 유대인 계몽주의자들은 긍정적인 유대인의 이미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나 합리주의자들과 급진적인 이신론(理神論)자에게 있어서 유대교는 여전히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원시적인 종교이며, 초자연적인 유일신을 신봉하는 유대인은 미신에 가까운 오류투성이의 구약 성서를 믿는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존재였다. 근대 철학의 대가들 - 볼테르, 바우어, 바그너, 뒤링, 드홀바흐, 피히테, 칸트, 루소 등 - 조차 사상의 진보와 갱신과 자유의 이름으로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존속시켰다.

 

영향력 있는 프랑스 학자 에른스트 르낭은 인류의 거대한 진보를 가로막고 서 있는 유대 지식인의 배타적인 경향과 광신주의를 지적하면서, 인류 문명의 사다리의 맨꼭대기에 자리잡은 인도 · 유럽인 또는 '아리안'과 대조되는 인종적인 개념인 '셈족'이라는 말을 대중화시킨 최초의 사상가였다. 르낭은 셈족에게는 창의성이 떨어지고, 규율 감각이나 독립적인 정치 조직을 수용할 능력이 모자란다고 보았다. 그래서 '셈족'은 신화, 서사시, 과학, 철학, 소설, 합성 예술, 시민 생활이 없다고 보았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복잡성이나 뉘앙스, 획일성에 대한 배타적 감정 등도 없다고 여겼다. 그는 셈족을 '인간 본성의 열등한 집합체'라고 단정하였다. 르낭은 '셈족'의 결점을 창의성이 결여된 편협하고 원시적인 고대 히브리인에게서 추정하였다.

 

한 마디로 17~18세기 유대인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태도는 이중적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관용 이론이나 중상 이론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한 인간으로 또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평가함으로써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 집단을 정치적으로 '국가 안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유대인을 선천적으로 열등해 개량이 요구되는 존재로 보았다. 이로써 중세 기독교가 만들어 낸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는 세속화되었다. 중세 기독교가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改宗)시키려 했다면, 근대의 계몽된 유럽 사회는 유대인을 개량(改良)시키려 하였다.

 

 

 

5. 중부 유럽의 반유대주의 운동

 

 

19세기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낭만주의, 반자본주의, 민중 민족주의, 서구의 진보적 민주주의에 대한 미움 등이 결합해 폭발한 이데올로기였다. 뛰어난 유대인들 - 마르크스,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카프카, 말러, 쇤베르크, 비트겐슈타인 등 - 의 존재가 배제된 현대 유럽 문화는 상상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탄생시킨 근대성(modernity)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독일의 급진적인 지식인 루게는 유대인의 반역사적이고 '화석화된' 종교와 그들의 '착취적인' 성격을 지적하면서, 기독교 부르주아 사회가 유대적인 풍조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였다. 음악가 바그너는 『음악에서의 유대교』(1850)에서 유대교의 정신을 진보가 아닌 데카당스나 예술적 퇴보와 동일시하였다.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고비노는 『인종 불평등론』(1853)에서 유대인에 의한 정신적 · 육체적 오염으로부터 순결한 유럽 문명을 지켜 내야 한다는 '맑은 피' 이론을 제창하였다. 바그너의 사위였던 체임벌린은 종교는 문화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우월한 아리안과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열등한 유대인 사이의 명백한 인종적 불평등을 인식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종론을 정치학으로 끌어올린 그는 『19세기 유럽 문화의 토대』(1899)에서 아리안의 순수성을 회복하는 것을 정치적 목적으로 설정하여 훗날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 즈음 빌헬름 마르가 출판한 『독일주의에 대한 유대교의 승리』(1879)에서 '반유대주의'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고안해 냄으로써 셈족과 아리안족 간의 영원한 인종적 갈등의 기초를 세웠다. 그는 유대인이 신(新) 독일의 폐허 위에 자신들의 예루살렘을 건설한 이래 독일주의는 상실되었다며, '사회의 문제는 곧 유대인 문제'라며 반유대인 연맹 결성을 촉구하였다.

 

1878년 루터교 설교가이자 기독교 사회 운동가당을 만든 슈퇴커는 유대계 독일인들이 언론 기관과 증권 시장을 점령하고 노동자 계급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반자본주의 정신과 전통적인 루터교 신학을 접목시켜 유대교를 비판하고, 이듬해 베를린 반유대주의 운동을 결성하여 반유대주의를 정치화한 인물이다. 이로써 독일은 반유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베를린 반유대주의 운동에 동참한 민족주의 역사가인 하인리히 트라이츠케는, 유대인들이 독일 문화와 사회에 동화되어 가는 것 자체를 독일 - 유대적 잡종(mongrel) 문화의 탄생이라 하여 거부하면서, '유대인은 우리의 불행'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독일 제2제국(1871~1918)시대에 이미 민족 해방주의 정치학, 증권 거래 자본주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가장 극단적인 주장을 한 사람은 뒤링으로서, 그는 유대 민족의 여러 성격을 공격할 뿐 아니라, 유대인 피에 대한 중상 모략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는 고대 히브리 민족이 행하던 인간 제사를 공동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야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면서, 이를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일 내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은 동유럽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지도자였던 아크사코프는 1881년에, "최근 유럽 문화를 주도해 나가는 독일에서 시작된 반유대주의 운동은 종교적 불관용, 미숙한 무지 등에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이것은 너무 뒤늦게 일어난 대중의 각성의 증거이다.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는 이 일을 주시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반유대주의의 첫 국제 회의는 1882년 말 드레스덴에서 열렸다. 이 회의의 결과는, 『유대인 때문에 위험하게 된 기독교 국가의 정부와 국민들에게 드리는 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문서는 모든 도시에 유대인과 투쟁하기 위한 위원회를 두도록 요청하고 있으며, 이 위원회는 '국제 기독교 동맹'으로 단일화하자고 제의하였다. 1883년에 열린 제2차 회의에서는 이 운동의 연합 이념으로 뒤링의 이론을 채택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 운동의 기초를 인종주의에 두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러시아에서의 반유대주의 운동은 알렉산더 2세 때까지만 해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1881년 혁명으로 죽고, 알렉산더 3세가 등장하면서 진보적 경향에 대한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들의 수가 차츰 늘어나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와 힘이 향상되자 러시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위협을 느끼게 된다. 급기야 1881년 4월 29일, 러시아의 남서 지방에서 반유대인 폭력 시위를 시발로 하여 엘리자베트그라드에서도, 키예프에서도, 5월에는 오데사에서도 연속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또, 살인과 약탈, 방화와 강간 등이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특히, 젊은 유대인들은 중학교나 고등 교육 연구소 등에서 교육받을 기회를 박탈당했으며, 정부는 반유대주의 신문을 발행했고, 반유대 정책을 정권 통치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1911년에 키예프에서 발생한 일들 중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제의의 목적으로 필요한 기독교인의 피를 얻기 위해 기독교 소년을 살해하였다."라는 이유로 멘델 베일리스가 구속된 사건은, 러시아 안에서 유대인들을 공식적으로 박해하는 보다 주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헝가리에서는 국회 부의장이었던 이소크치가 반유대 발언을 시작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의 추방을 주장하였다. 모든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 그 곳에서 유대국가를 세우도록 충고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돈(재정)과 말(언론)을 통제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추방을 선언하였다. 루마니아에서는 유대인들이 은행을 소유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고, 정부는 반유대주의 운동 단체들에게 재정적 후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럽 각지에서의 유대인 박해 운동은, 유대인들의 독립을 위한 이념 확립 및 국민 운동으로서의 시온주의 운동을 더욱 강하게 불러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새로운 반유대주의는 근대 유럽 세계에서 새 시대에 적합한 세속화된 옷을 입고 피어났다. 진보 · 자유 사상가들은 유대교의 불관용과 비역사적 아집 또는 유대인의 고립주의적 배타주의를 공격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을 '자본주의 정신'의 화신(化身)이라고 비난했으며, 민족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은 인류에게 퇴보를 가져다 주는 '외부인'과 '셈족' 혈통의 특성을 유감스러워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유럽 사회에서 영구적인 사회 불안과 혁명적인 전복을 꾀하고 있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