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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시온주의의 태동과 이념

淸山에 2013. 6. 6. 21:05

 

 

 

 

 

 

제1장 시온주의의 태동과 이념

 

 

시온주의(Zionism)라는 용어는 19세기 말 나단 번바움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이다. 그는 1890년 4월 1일자 잡지인 「Selbstemanzipation」에서 시온주의를 '에레츠 이스라엘을 향한, 과도기에 설치한 민족적, 정치적 시온주의자 정당'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시온주의를 정치적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그 후 시온주의의 아버지인 헤르츨은 『유대국가(Der Judenstaat)』(1896)에서 이 개념을 재천명하였다.

 

 

현대 시온주의의 아버지인 헤르츨은 1860년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야콥은 의류 상인이었으며, 전통적인 유대 종교 가문 출신이었다. 그 곳에서 고등 학교를 졸업한 헤르츨은 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비엔나로 옮겼으나, 로마법 전공을 위해 법학부에 등록하였다. 1884년, 그는 그 곳에서 박사 학위를 마친 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비엔나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반유대주의자들의 유대인에 대한 폭력 사건을 경험하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또, 헤르츨은 1887년에 베를린의 한 신문에 '반유대주의가 개인의 문제가 아님'을 밝히는 글을 기고하였다.

 

1891년 10월, 헤르츨은 정치, 문화 운동의 중심지인 파리의 신자유 언론(Neue Freie Presse)사에서 수년 간 근무하였다. 그는 이 곳에서 많은 새로운 정신을 배웠다. 특히, 그는 유럽의 반유대주의와 급진적인 사상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었다. 1893년, 그는 교황의 알현을 신청하면서, 만일 교황이 반유대주의 추방을 위해 힘써 준다면 많은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겠다는 제안을 준비할 정도였다. 그러나 교황은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는 이 일을 포기하고 큰 꿈을 꾸며 유토피아를 그려 보았다. 그는 당시 유대인 박애주의자였던 바론 폰 히르시를 만나, "당신은 많은 돈을 가진 유대인이요, 나는 정신을 가진 유대인입니다."라며 제휴를 건의하였다. 당대의 부자인 로스차일드는 그에게 500프랑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1894년 7월에 발생한 드레퓌스 사건은 그에게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다. 유대인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아무런 증거도 없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반유대주의 여론에 떠밀려 사형이 구형되었다. 당시에 에밀 졸라 등 프랑스의 지성인들이 재판의 부당함을 고발하면서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헤르츨은 36세가 되던 1896년 2월에 『유대국가』를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과 함께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이상적인 유대국가 건설을 꿈꾸며 이미 실질적인 기본 구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시온주의의 궁극적 목표는 단연코 '유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의 선언은 "우리의 첫 과제는 지구 한 모퉁이에 우리의 상당한 요구를 충족시킬 만한 영토를 차지하여 국제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독립 국가로서의 주권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도덕적이고 합법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운동일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오랫동안 열망해 오던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사상과 그의 사상 사이의 간격을 강조하였다. 그는 환상적인 이상 국가를 꿈꾸고 있다기보다는 과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가능성을 그 출발로 삼고 있다. 반유대주의라고 불리는 박해의 총체적 경험은 유대인들에게 유토피아의 꿈보다는 현실의 고통에서 이해되는 해방이 더 크고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진 힘이란 곧 유대인들이 경험한 비참함 그 자체이다."라고 말하였다. 재정도 없이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은 곧 유대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의 자유와 행복, 그리고 영광은 유대국가의 건설을 통하여 이룩할 수 있다는 사상을 젊은이들이 확신하고 보다 많이 선전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의적 노력을 강조하였다.

 

헤르츨은 반유대주의자들의 표어인, "우리는 우리를 초청한 국가의 국민으로 살면 충분하다. 우리는 그들이 없으면 굶어 죽게 될 것이다."라는 주장에 관하여 비판하면서, "이러한 동화를 강요하는 발상은 유아적인 오류이며, 나아가 우리 유대인들은 우리의 주인이 되어 줄 국가를 요청한 적이 없다."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구습에 의존하지 않은 새로움을 창조해 나갈 것을 역설하였다. 유럽 사회에서의 유대 문제를 해결하여 나가기 위해 그가 제시한 방법은 다음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산업 혁명 이후 노동자는 생산의 도구로 전락되어 기계에 종속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은 문명보다 우위의 존재이다. 이러한 문명을 초월하는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전기의 발명으로 새로운 빛을 얻은 것같이, 빛으로 인간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 가지 문제가 바로 유대인 문제이다. 이 문제는 우리들 자신만의 문제라기보다는 억압받는 다른 존재들을 위한 문제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문제는 사회적, 종교적 문제라기보다는 문명 국가들과 더불어 정치적으로 풀어 나가야 할 민족적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박해와 압제는 우리 유대인들을 멸종시키지 못했다. 지구상의 어느 민족도 우리와 같은 고통과 투쟁을 겪지 않았다. 강한 유대인들은 박해가 멈출 때 우리의 줄기를 다시 회복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우리의 복장, 관습, 전통, 그리고 언어를 되찾는 외적인 일치뿐 아니라, 느낌이나 태도에서도 동일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다른 민족들과의 잡혼에 의하여 유대인의 의식을 없애려는 억압을 받아 왔다. 유대인들의 경제적 지위나 군사 · 행정적인 힘, 또는 부의 축적이 반유대주의의 논리였으나, 이러한 주장 중 그 어느 것도 논리적 타당성이 없다. 다윈의 채색 기능이나, 기독교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정치 · 경제적 압력 등은 장소마다 지역마다 하나의 억압 논리였다.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논리로 전개시켜 나가는 인위적 반유대주의는 죄이다.

 

아무도 재벌이나 힘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민족을 이식(移植)하기에는 힘이 부족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큰 꿈을 결코 포기한 적이 없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 지금이 바로 그 꿈을 영향력 있는 사상으로 변화시키기에 적절한 시간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곧 실현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사랑스러운 전통(습관)을 희생시키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시 되찾을 것이다. 우리의 옛 집은 새 것이 준비되기 전에는 포기되지 않을 것이다. 자포자기는 가난을 가져오며, 번영은 부를 만들어 줄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이란 개인 재산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람인데, 우리는 먼저 사상적 안정을 도모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하며, 나중에 유대인 정착 은행인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물질적 본능을 자극하여 시온주의 운동에 동참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1897년, 제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그는, '여기 나는 유대국가를 세웠노라.'라고 선언하면서, "빠르면 5년, 늦어도 50년 안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그는 이 운동을 세속적인 복고 운동과 관련시키거나, 국수적인 종교 운동과 연계하려는 것을 강하게 배격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인본주의와 제정 분리를 주창하였다. 그는 이 운동을 오직 '땅이 없는 백성, 백성 없는 땅'의 논리로 해석해 나갔다. 1901년, 그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팔레스타인에로의 유대인 이민에 관하여 토의하고자 하였다. 그 해 5월, '시온주의자의 자격으로가 아닌 유대인의 대표, 그리고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의 자격'으로 입국을 허락받아 이 문제를 제의하였으나, 술탄 황제는 구체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헤르츨은 그 후 오스만 제국의 빚 3000만 파운드를 갚아 주기 위한 모금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나, 오스만 제국으로 이민을 오면 시민권을 얻게 해 주겠다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었다. 그는 계속하여 오스만 제국에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는 위험하지도,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였고, 오히려 산업이나 충성심에 있어서 유익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는 1902년, 예루살렘에 대학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나, 오스만 제국은 오히려 젊은 세대가 고등 교육을 통하여 위험하거나 급진적인 사상 등 '건강하지 못한 정신'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았다.

 

1902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헤르츨은 그의 외교적 활동의 중심지를 런던으로 옮기게 된다. 영국에서는 유대인 이민에 관한 대중들의 의견이 대체로 좋은 편이었다. 헤르츨은 계속해서 로스차일드가(家)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903년에는 영국 정부로부터 "왜 우간다 제안(Uganda Proposal)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우간다 제안이란 영국이 시온주의 지도자에게 제안한 것으로, 아프리카의 우간다 땅에 독립 국가를 세우라는 제안이었다. 우간다는 풍부한 자원과 설탕 및 면의 생산지로서 유럽인들에게는 아프리카의 노른자라고 일컬어지던 땅이었다.

 

그러나 헤르츨은 종이에 시나이 반도와 이집트, 팔레스타인과 키프로스를 그리면서 그 곳을 원한다고 하였다. 얼마 후, 헤르츨은 식민국의 의장인 헤레퍼드경을 만나 이 일을 상의하였고, 그의 식민지 비서인 체임벌린으로부터 영국령 지중해 남동쪽에 유대인 자치구를 두겠다는 생각에 원칙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응답을 받았다. 체임벌린의 계산은 이집트의 엘 아리쉬(Wadi el Arish)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영국이 제시한 엘 아리쉬 안에 대하여 헤르츨은 즉각, "우리는 이집트로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이 제안들 - 우간다 제안과 엘 아리쉬 안 - 은 모두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헤르츨은 영국 의회가 우간다냐? 팔레스타인이냐? 를 놓고 토의에 부치기도 전에 "우간다는 시온이 아니며, 시온이 될 수 없다."라고 분명히 선언해 버렸으며, "유대국가의 건설은 팔레스타인만을 목적으로 한다. 선조들의 땅을 향한 염원은 결코 변하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시온주의자들 가운데는, 우간다 제안을 받아들인 후 이를 전초 기지로 삼아 시온으로 가자는 단계론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노르다우는 "시온이야말로 최고의 이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달성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우간다를 통하여 올 것이다."라고 외쳤다.

 

제6차 시온주의 총회가 1903년 8월 23~28일 사이에 러시아의 바스레(Basle)에서 열려, 노르다우가 제안한 안을 상정하고 토의를 거친 후 표결에 부친 결과 찬성 285명, 반대 178명, 기권 98명으로 우간다에 특사를 파견하기로 결의하였으나, 회의 얼마 후 처음부터 이 안을 거부하던 동유럽의 한 젊은 유대인이 노르다우를 살해하려다 미수로 그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은 즉각 성명을 통하여 이 사건이 리더십에 대한 정치적 반란이 아님을 밝혔으나, 시온주의자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충격이 되었다. 이 사건은 시온주의 운동을 분열시킬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었다.

 

1903년, 헤르츨은 건강이 악화되면서도 러시아의 빅토르 엠마누엘 3세와 로마의 피우스 10세 교황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왕과 교황은, "우리는 이 운동에 호의적일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라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헤르츨은 제7차 시온주의 총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904년 7월 3일에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병상에서의 고통은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가 죽었다는 소식은 전 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노예의 속박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던 '새로운 모세'로 일컬어졌다. 그는 모세처럼 그의 조상들의 땅으로의 귀향이라는 야망을 불태웠고, 또 모세처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시온주의를 계획한 사람들은 그것의 찬연한 결말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는 자신의 말대로 가나안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였으나, 본디 정치적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죽기 얼마 전인 1902년, 반(半)정치 공상, 반(半)공상 과학 소설인 『낡고 새로운 땅(Altneuland)』을 출판하였다. 이 소설은 두 명의 내레이터가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여 현대 유대국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곳에 차차 인구가 늘어나고 현대 기술, 관개 기술을 갖춘 이상적인 국가가 만들어지게 되며, 모든 여자들은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고, 교육은 무료이며, 범죄자를 징벌하는 대신 재교육시키고, 관용이 법원의 원칙이 되며, 완전한 정교 분리를 갖춘 국가를 그리고 있다. "나그네가 집같이 느끼는 곳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그가 그린 국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의 환상은 분명히 지극히 낙관주의적이며, 계몽 사상으로 묶어진 발전적인 이상 사회를 그리고 있다. 또, 그의 이러한 환상은 사회주의 운동의 중요성이 무시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꿈은 정확히 그의 예언대로 50년 만에 이루어짐으로써 그에 대한 모든 비판이 멈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