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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세계 제1차 세계대전과 시온주의 운동

淸山에 2013. 6. 6. 20:44

 

 

 

 

 

제3장 세계 제1차 세계대전과 시온주의 운동

 

 

하임 바이츠만

 

하임 바이츠만(1874∼1952)은 현대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며, 시온주의 기구의 의장을 역임한(1920∼1931, 1935∼1946) 바 있는 과학자였다. 그는 1874년 11월 27일, 러시아 핀스크 근처의 모텔이라는 마을에서 목재상을 하는 오제르 바이츠만의 15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서와 히브리어 문법을 배웠으며, 11세 때 그가 남긴 편지에서, "왜 우리는 우리를 연민의 눈초리로 쳐다보며 무덤이나 제공하는 유럽의 왕에게 의지해야 하는가? 유대인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영국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결국, 우리는 시온으로 가야 한다. 유대인이여, 우리 함께 시온으로 가자!"라고 쓰고 있다.



그는 과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핀스크에서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어렵게 되자, 1892년에 독일로 건너가 다름슈타트 폴리테크닉에 입학하였다. 그 곳에서 두 학기를 공부한 그는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공과 대학에서 생화학을 전공하였다.

그는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시온주의 지성인들 - 나흐만 시르킨, 레오 모츠킨, 레빈 등 - 을 만나게 된다. 그 때는 시온주의의 이념 논쟁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로써, 유대 민족주의의 문화와 정신을 가장 잘 말해 주고 있던 때였다. 1897년 제1차 시온주의 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1898년 제2차 회의에는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해에 그는 박사 학위를 마치고, 첫 화학 특허품을 발명하여 팔기도 하였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27세 되던 1901년에 제네바 대학의 조교가 되었다.

그의 삶은 학문과 시온주의 운동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곧 시온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헤르츨이 외적인 노력, 즉 창조적인 사회적 변화를 꾀하려는 것에는 거의 개의치 않는, 외교적인 노력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헤르츨이 오스만 제국 정부로부터 허가장을 얻기 위해 유럽의 고관들을 만나러 다니는 동안, 그와 그의 동료들은 히브리 문화를 선전하였고, 그들이 발행하는 잡지 「Eine juedische Hochschule」에는 시온주의자들의 정신적 본부 및 과학적 보루가 될 히브리 대학을 세울 것을 제창하기도 하였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국가만이 아니라 문화적 중심이 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1903년, 우간다 논쟁으로 인하여 시온주의 운동에 균열이 생기자, 그는 사실상 헤르츨의 반대 입장에 섰다. 1904년,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과학자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 그는 헤르츨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1905년에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제7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확대 상임 위원회의 위원에 선출되어, 시온주의 운동에 보다 구체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베라 바이츠만과 결혼하였다.

 

밸푸어

1906년에 그는 우연히 당시 영국 외상이던 아서 제임스 밸푸어를 맨체스터에서 만나, 시온주의자들의 이상을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밸푸어는 늘 시온주의자들이 왜 우간다 제안을 거부하였는지에 관하여 수수께끼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며, 전혀 현실을 모르는 결정을 한 반(反)우간다주의자들을 만나보고 싶었던 차였다. 밸푸어가 젊은 바이츠만에게 왜 우간다 제안을 거부했는냐고 묻자, 그는 밸푸어에게 "만일 내가 당신에게 파리를 제안한다면, 당신은 런던을 포기하겠는가?"라고 되물었고, 이에 밸푸어는 "결코 그렇지 않다. 런던은 내 조국의 수도가 아닌가?"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바이츠만도 "예루살렘은 런던이 늪지였을 때 우리나라의 수도였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밸푸어가 시온주의자들의 꿈에 사로잡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07년에 열린 제8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바이츠만은 정치적 시온주의자들과 실용적 시온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 종합적 시온주의를 제창하여, 그동안의 갈등을 하나로 연합하는 작업을 이룩하는 데 주축을 이루었다. 학문적으로도 그는 맨체스터에서 명성을 떨쳤으며, 1914년에는 하이파에 세워진 공과 대학(Technion)에서 독일어 대신 히브리어로 강의하도록 하는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히브리어가 당시에 과학을 위한 언어로는 많은 제약이 있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으나, 유대인의 뿌리를 단절시키는 독일어 강의를 적극 반대하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바이츠만을 유대 역사의 변두리로부터 중심으로 옮겨 오게 하였다. 적어도 1916년까지 바이츠만은 영국 정부 내에서 시온주의에 대한 지지를 얻어 내지는 못하였다. 영국이 시온주의를 지지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가를 정확하게 계산할 수는 없으나, 대체로 영국이 미국의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때라고 볼 수 있다. 즉, 미국 대통령 윌슨의 친구이기도 했던 대법원장 브랜다이스가 시온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은 미국과 더불어 팔레스타인을 프랑스의 손에 넘겨주지 않도록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기 시작하였다.

바이츠만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 영국의 승리를 예견하였다. 전쟁 초반, 독일이 우세할 때도 그는 이러한 예견을 바꾸지 않았다. 스위스에서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즐기고 있을 때, 전쟁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곧 영국으로 돌아와 친구들에게, 자기들에게 매우 희망적인 기회가 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당시 「Manchester Guardian」지의 편집장이며, 동유럽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비극과 팔레스타인에로 향한 그들의 메시아적 꿈에 관해 바이츠만으로부터 많은 설명을 듣고 시온주의에 끌려 들어왔던 스콧은 바이츠만에게, 당시의 재무 장관이었던 로이드 조지를 만날 것을 권하였다.

1915년 1월, 바이츠만은 헤르츨 시대에 시온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던 로이드 조지를 처음으로 만났다. 바이츠만은 "그는 매우 종교적인 분이었다. 그와 당시 다른 동료들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결코 꿈만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성서를 믿고 있었으며, 시온주의는 성서가 표현하고 있는 하나의 사상이라고 말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힘을 얻은 바이츠만은 외무 장관 그레이와 「Manchester Guardian」지의 군사 평론가인 허버트 시데보탐 등과 연쇄 접촉을 통하여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17년, 몇몇 영국계 유대인들과 의회 의원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국회 의장 조지와 외상 밸푸어는 그 해 11월 2일, 그 유명한 밸푸어 선언
(Balfour Declaration)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선언이야말로 유대인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되었다. 이 선언은 유대인을 위한 권리 장전(Bill of Rights)이었다. 이 선언이야말로 국제법이 시온주의자들의 꿈을 처음으로 인정해 주는 사건이었으며, 2000년 동안 잃어버린 조상들의 '약속의 땅'을 다시 찾는 역사적 선언이었다. 역사가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가장 위대한 외교적 업적'이라며 바이츠만의 역할을 평가하고 있다.

 

벨푸어 선언문

 

1918년, 그는 영국 정부로부터 시온주의자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팔레스타인에 파견되었다. 앞으로의 정착과 국가 발전을 구상하며, 그 계획을 추진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영웅 알렌비 장군은 그를 환대하였으나, 영국 총독부는 바이츠만의 낙관적인 미래에 대해 다소 부정적이었다. 그것은 아랍 민족주의의 세력이 큰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이츠만은 즉각 아카바로 건너가 아랍 민족주의의 대표인 에미르 파이살을 만났다. 이때, 영국 정부는 아랍 대표에게 그들에게도 팔레스타인이 아닌 시리아나 이라크 쪽에 독립 국가를 만들어 줄 것을 약속하였다. 파이살은 이러한 내용에 동의하는 계약서에 서명하였다. 그러나 파이살은 시리아나 이라크에 있는 그의 연맹들로부터 그와 같은 결정에 동의를 얻어 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바이츠만에게 이 약속을 취소할 것을 통보하였다.

1920~1930년대에 바이츠만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일하였다. 그는 1921년에 열린 제12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새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몽테피오리(유대 종교적 민족주의자)나 울프(반시온주의 단체인 '공동 위원회'를 이끄는 저널리스트)가 적극적으로 시온주의를 반대하고 나섰다. 이들은 유대교를 '추상적인 종교 원리를 수집해 놓은 종교'라고 보았고, 또 "유럽의 유대인들은 유럽 사람들의 동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시온주의 운동은 잘못된 이상주의자들의 오도된 헛된 꿈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주로 프랑스계 유대인들로서, 외교계에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던 무서운 적들이었다. 또, 인도의 외무 장관이었던 몬터규도 내각 안에서 시온주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영국 의회 내에서 유일한 유대인 의원으로서, 밸푸어 선언에 관한 토의에서 유대인을 오직 종교적으로만 이해함으로써, 유대인들을 위한 정치적 독립을 강하게 반대하였던 사람이었다. 시온주의가 지나치게 유대인의 전통적인 가치를 무시하는 세속적인 운동이라는 것이 이들이 시온주의 운동을 반대하는 이유였다. 바이츠만은 이들과도 협상해야 했다. 그러나 종교적 민족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공리와 원칙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울프는 팔레스타인 안에 있는 유대인들의 완전한 종교적 자유와 평등권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이민갈 경우에 그들이 살게 될 도시와 마을에 완전한 편의 시설까지를 요구하였다. 이들과의 협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당시 영국 정부 안에는 대체로 두 그룹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는, 유대 팔레스타인 건설을 반대하는 정치가 또는 고관들로서,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를 위해서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진 자들과, 다른 하나는 전반적으로 시온주의 사상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으나, 팔레스타인이 영국 보호령이 되려는 계획에 끼어들어 책임을 지는 것을 꺼려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 일을 프랑스나 미국과 함께 협의하는 안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에 외교, 군사 전문가들을 팔레스타인이 영국 제국의 방위에 중요한 지역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로이드 조지는 친시온주의 정책가의 대표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1905년, 그의 도움으로 맨체스터에서 시온주의 지도자를 처음으로 만난 밸푸어도 또 다른 지원자였다. 이때, 밸푸어는 유대인들이 가진 독특한 애국심을 알게 되었으며, 왜 유대인들이 우간다로 가는 것을 거부하였는지를 이해하였다고 회술하고 있다. 1915∼1916년에 두 번째로 그를 만난 바이츠만은, 영국이야말로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집을 짓겠다는 유대인들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수 있는 후원자임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를 잘 아는 측근들에 따르면, 밸푸어는 강심장을 가진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타고난 냉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이츠만과 그의 생각에 관해서는 늘 경의를 표하였다. 또, 밸푸어는 성서를 살아 있는 실제라고 믿었다.

 

2. 벨푸어 선언

 

시온주의 운동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인하여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대규모 운동으로 바뀌어 갔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중요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발발 당시 베를린에 있던 시온주의 집행부는 2명의 독일계, 3명의 러시아계, 1명의 오스트리아계 시민권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시온주의 세계 기구는 기능을 전혀 수행할 수가 없었다. 시온주의 총회도 역시 제11차 회의(1913) 이후 제12차 회의(1921)가 열릴 때까지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시온주의 기구는 전쟁에 관하여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태도를 지킨다는 약속은 하였지만 실제로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전쟁 중에 각각 '자기의 조국'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유대국가 독립을 위해 어떤 결단이 유리한가? 하는 질문 사이에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이 문제는 전쟁 이후에도 상당히 많은 진통을 겪게 하는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독일 시온주의자들은 독일을 위한 애국심을 강조하여, 젊은 회원들에게 조국을 위해 군대에 입대할 것을 요청하였다. 독일은 세계의 정의와 질서와 진리를 위해 싸우므로 러시아, 영국 및 프랑스는 이들의 부속물로 여겼다. 오펜하이머는 "이 전쟁은 거룩한 것이요, 단지 자위적인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 슈트라우스는 "강한 독일이 압제자들을 해방시킬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전적으로 독일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위고 주커만은 전쟁터에서 오스트리아의 국기를 보며 숨지는 것이야말로 숭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자신이 얼마 후 전사하였다. 엘리아스 아우에르바흐는 전쟁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의 하이파로부터 독일로 돌아가 군의관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유대인들이 많이 결집되어 있던 동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은 러시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서부 러시아에서는 유대인들에 대한 보다 많은 박해가 있었으며, 그들을 해외로 추방하기도 하였다. 러시아나 폴란드 지역의 시온주의 지도자들도 독일이 필연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을 믿고 있었다.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동유럽의 유대인들에게는 보다 많은 박해가 예상될 것이며, 반대로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들은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하임 바이츠만, 아하드 하암, 야보틴스키, 루텐버그, 노르다우 등은 일방적으로 독일만을 응원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나 반대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독일파였다.

독일 연맹의 전 의장이었던 보덴하이머는 독일 외무 장관을 만나 '러시아 유대인 해방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해 줄 것을 건의하여 1914년 허가를 얻었다. 이 위원회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계몽과 독일이 서부 러시아를 점령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유럽 유대인들의 정치적, 문화적 자치권 운동은 폴란드와 발트 국가들의 민족 운동의 목적과 갈등을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또, 이 운동은 오히려 러시아 정부로 하여금 1914∼1915년에 반유대 조치의 명분을 주게 되었으며, 결국 보덴하이머는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유대 민족 기금'의 의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중립을 지키기 위한 모임이 모츠킨의 주도로 1914년 12월 코펜하겐에서 모였을 때 바이츠만이 제안한 의견 - 전쟁 중에 시온주의 집행부의 기능을 잠정적으로 중지하고, 이 일을 미국에 양도하자는 안 - 이 부결되었고, 대신 본부는 베를린에서 런던으로 옮긴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결정을 할 권한이 있느냐 하는 반발과 함께, 이러한 결정 자체가 집행부를 보다 무기력하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결정은 곧 전쟁 중 집행부는 어떤 국가의 행정부와도 협상할 수 없다는 것을 결의한 셈이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영국의 승리는 곧 시온주의의 승리이다."라는 바이츠만의 생각은 맞았다. 1914년 12월, 오스만 제국은 전쟁에 참가하였고, 그는 런던에서 많은 정치가들과 접촉하였다. 곧 영국에서 중요한 친시온주의 선언이 준비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 나왔다. 드디어 1917년 11월 2일, 영국 정부는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런던은 세계 시온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베를린은 이 권한을 양도하여야 했다. 영국은 독일과 오스만 제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규모의 이민의 문을 열 것과, 그 곳에 정치 · 문화적 자치권을 인정하는 이와 유사한 발표를 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밸푸어 선언은 시온주의 운동의 다양한 힘을 하나로 묶게 해 주었으며,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만장일치로 통일시켜 주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