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 배움/이스라엘 史

4. 제2차 세계 대전과 유대인 게토

淸山에 2013. 6. 6. 20:19

 

 

 

 

 

4. 제2차 세계 대전과 유대인 게토

 

나치 독일이 중부 및 동부 유럽을 점령하면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독일과 똑같은 피해를 받았다. 유대인의 강제 이주를 주장하는 선동이 크게 일어났으며, 폴란드에서는 1937년에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에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수십만이 넘는 유대인 수용소 안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지자, 국제 연맹은 이 일을 주관하는 국제 연맹의 대표로 제임스 맥도널드(그는 후에 이스라엘의 미국 대사가 되었다.)를 선정하여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불과 2년 후에 국제 연맹이 깨지면서 그 일을 더 이상 담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아가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하자, 독일과 소련 사이에 거주하는 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히틀러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나치는 보다 조직적인 유대인 억압 정책을 펴 나갔다. 1939년 10월 말부터 독일 점령지 폴란드 내의 모든 유대인들에게는 노란 바탕의 다윗의 별 배지를 달도록 하는 법령이 시행되었으며, 그 해 12월에는 14세부터 60세까지의 모든 유대인 남자는 2년 동안의 강제 노동을 위해 입영되었다.

 

1939년 11월과 12월에 모든 유대인들은 도시의 특정 구역인 게토(Ghetto)로 이주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첫 게토는 1940년 2월에 로지에 세워졌으며, 1940년 11월에는 바르샤바 게토가 세워졌다. 1941년 10월에는 게토 밖에서 발견되는 유대인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1940년 4월과 6월 사이에는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가 차례로 점령되었다. 500,000명의 유대인이 다시 히틀러의 수중에 들어갔다. 모든 유대인들은 특별한 도장이 찍힌 유대인 등록증을 소지하고 다녀야 했으며, 이때 비유대계인으로서 유대인 증명서를 발급받은 사람만도 40,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러시아를 공격하고 있는 동안, 독일군은 행동대(Einsatzgruppen)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이들의 목적은 점령 지역 안에 있는 유대인과 집시를 처형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1941년 10월 10일, 6개 독일 사단에 명령이 하달되었다. "동부에 있는 군인들은 단순한 전사가 아니요, 민족 이념의 가차 없는 수행자이어야 한다. ······ 그러므로 모든 군사들은 인간 이하의 유대인들에게 복수할 것을 명하는 바이다." 이때부터 루마니아, 헝가리, 러시아, 독일 등에 있던 유대인들은 무차별 학살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게토에서의 통치는 독일에게 있어서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우선 유대인들을 감독하고, 앞으로 멸종시키기 위해 한 곳으로 집중시킴과 동시에 얼마 동안 경제적 착취를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대규모의 게토에서는 군사 물자를 만들기도 하였고, 작은 곳에서는 도로 건설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음식만이 제공되었을 뿐, 인간적인 삶의 모습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1940년, 폴란드에 설치된 여러 게토의 유대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며, 예배와 교육 등 종교 행위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 음악과 연극 활동을 하였고, 카페와 나이트 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얼마간의 활동마저 1941년 중반에 와서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게토 안에서의 기아와 질병, 전염병의 만연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 갔으며, 생존을 위한 초인적인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화장터만이 그들이 가는 길이었을 뿐이었다.

 

1942년 1월 20일, 나치 회의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반세 회의(Wannsee Conference)로 명명되었다(베를린 회의가 열린 곳의 거리 이름). 이 회의에는 SS 단원과 비밀 경찰의 지도자인 하이드리히, 뮐러, 그리고 아이히만 등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유럽에 남아 있는 1100여 만 명의 유대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놓고 계획을 세웠다. 마지막 해결 방안은, 흩어져 있는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을 어느 정도 밀집되어 있는 동유럽으로 모아서, 그들이 죽기 전까지 유대인의 정신을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이 일은 곧 착수되어, 곳곳에서 유대인 강제 추방 및 이주가 계속 실시되었다.

 

게토 안에 강제 이주된 유대인들은 나름대로 저항 운동을 계획하고, 무기를 사들여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첫 게토 안에서의 소요는 바르샤바 게토의 젊은 유대인들에 의해 일어났다. 모르드개가 이끄는 청년단원들은 1943년 1월 18일, 경비원을 무찌르고 탈출에 성공하였다. 독일 나치는 이 일에 대한 보복으로, 1943년 4월 19일에 군대를 게토 안에 보내어 파괴와 살상을 자행하였다.

 

게토 안에서 유대인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으나, 이 사건으로 약 7000명의 유대인들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저항은 비알리스토크, 민스크, 코브노 등지에서도 일어났다. 이러한 투쟁이 승리를 희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게토에 유대인을 수용하여 한꺼번에 유대인의 정신을 말살할 수 있다는 독일의 계획에 일침을 가한 상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게토 분포 지역

 

 


게토로 이동하는 유대인들

 

 


게토

 

 

5. 최종 해결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인의 박해는 식을 줄 몰랐다. 그들은 계속하여 전 중 · 서부 유럽의 유대인들을 괴롭혔다. 그들은 길가에서, 집에서, 발견되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냈다. 베를린에서는 수십만의 유대인이 정처 없이 떠났으며, 프랑스에서는 13,000명의 유대인들을 체포하여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냈다. 네덜란드과 슬로바키아, 그리스의 살로니카에서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살상당하였다. 특히, 헝가리 내에 살던 유대인은 가장 큰 멸종의 위기를 경험하였다. 당시 유럽에 살고 있던 약 1100여 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절반이 넘는 600여 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

 

최종 해결은 러시아와 동유럽의 반유대주의의 자생적 폭력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3제국에 의해서 고도로 조직화된 방법으로 저질러진 것이었다. '냉혹한' 조력자들과 빳빳한 제복을 입고 철십자 완장을 찬 수천 명의 고급 관료들과 독일 산업가, 법률가, 의사, 엔지니어, 회계사, 은행가, 사무원, 철도 공무원,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의 협조와 조력으로 이룩해 낸 업적이었다. 이 파괴의 기계 장치는, 역사가 파울 힐버그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한 대로, 나치 독일같이 잘 조직화된 사회와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가진 나라, 그리고 SS 같은 완전한 지배가 가능한 전체주의적 방법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대량 학살의 과업은 하인리히 히뮬러가 최고 사령관으로 있는 SS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임무였으며, 그것은 곧 "우리(독일인)를 파멸시키려는 이 민족(유대인)을 파멸하라."라는 독일인의 도덕적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대량 학살은 묵시 문학적 '이상주의'의 행위로 정당화되었으며, 그것은 새로운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의 영웅을 창조하는 거룩한 의무에 봉사하는 일이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야말로 유대인을 완전히 비인격화하고 서서히 비인간화하는 데 가장 성공적이었다. 끊임없는 선전 책동으로 보통의 독일인의 눈에 유대인을 사회적 부랑자, 전적인 국외자로 보이게 함으로써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수백만의 독일인들은 조직적으로 유대인은 비겁한 겁쟁이요 성적 타락자요 더러운 착취자요 위험한 혁명가요 궁극적으로는 해로운 유인원이라고 교육받았다.

 

이러한 종류의 왜곡된 인간상은 SS의 신조로 자리잡았으며, 유럽에서 인종적 가치를 재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퍼져 나갔다. 이러한 역사적 · 지구적 과업의 완성은 유대인과 유대화된 유럽인의 멸절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병약해진 기독교와 썩은 마르크시즘으로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전쟁은 항상 두 선민, 즉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지구적 헤게모니 장악을 위한 세계를 전망하는 전쟁이었다.

 

홀로코스트라는 엄청난 일이 가능했던 것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념적 · 신비적 · 비합리적 특성이 그의 비범한 정치 기술과 절대적인 권력, 고도로 훈련된 군대와 산업과 결합된 결과였다. 히틀러의 종말론적 세계관에서 볼 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이야말로 세계사의 열쇠이자 독일, 유럽 문명, 백인 아리안의 미래와 직결된 일이었다. 반유대주의는 히틀러가 1945년 베를린에서 스스로 생을 끝낼 때까지 붙잡고 있던 정치적 신조의 기반이었다.

 

 

 

 

 

6. 유대인 대학살과 반응

유대인에 대한 나치 독일의 대학살은 유대인의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인 관점에서도 20세기 최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살상된 수에서뿐만 아니라, 그 고통 역시 인간사에 있어서 가장 큰 정신적 충격이었다. 현대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인하여, 보다 나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며 성취할 수 있다는 인간의 희망이 이 사건을 통하여 회의적으로 비쳐졌으며, 나아가 '세계의 정화'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행해진 가스 사용의 결과는 인간 역사에 엄청난 오점을 남겼다. 대학살은 유럽의 유대인들을 거의 몰살시켰으며, 특히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체코, 유고, 그리스 등지의 모든 유대인을 멸종시켰다. 그들의 절반만이 생존하게 되었다. 150만 명의 어린이들을 포함한 이 참극은 지구의 어떤 곳에서도 일찍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나치 전범에 대한 전후의 처리 문제에도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무관심하였으며, '소수의 의로운 이방인들'만이 이에 동조할 정도였다. 베를린의 가톨릭 사제였던 리히텐베르크는 유대인을 위해 공공연히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유대인들과 함께 수용소로 보내져 처형당하였으며, 비스바덴의 페인트공이었던 루이스 비르크는 '나치의 지도자들이 언젠가는 그들 손으로 부순 유대인들의 회당을 건설할 의무를 가지게 되리라.'라는 발언으로 1943년에 처형되었다. 또, 독일 고백 교회의 본회퍼 목사는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발각되어 종전(終戰) 직전에 처형되기도 하였다.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는 언제나 방관자가 있게 마련이던가?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이에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폴란드인들은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으나 유대인들을 돕지도 않았다. 특히, 독일 국교인 루터 교회는 확실히 반유대적인 태도를 견지하였으며, 유대인이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몇몇 사제들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이에 동조하거나, 신학적 정당성을 기초로 부추키기도 하였다.

 

독일의 가톨릭 교회 역시 나치의 유대인 정책에 관하여 큰 관심이 없었으며, 개별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1942년 12월, 박해받는 유대인에 대한 '엄숙한 선언' 안이 거부되었으며, 교황 피우스 12세는 결코 나치와 그의 행위를 정죄하지 아니하였다. 1943년, 독일 바티칸 시국 대사가 독일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공문에 따르면, "여러 경로를 통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교황께서는 유대인을 로마로부터 추방한 나치 독일에 대하여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적으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유럽 안에 있는 개신교도들이 아무리 가톨릭을 반대하는 선전을 한다 하더라도, 독일 정부와의 관계를 손상시키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러한 가톨릭의 공식 입장은 폴란드, 헝가리의 추기경들과 그리스 정교회의 대주교의 입장과 같은 것이었으며, 아무도 나치 독일과의 불화를 원치 않았다. 또, 나치의 핵심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유대인 문제'는 결국 사소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미국이 참전한 이후 유대인 대학살은 연합국의 승리라는 최상의 목표에 비해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유럽에서의 유대인 파멸

 


7.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다양한 입장과 해석들

 

* 인간학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

이 사건에 대한 유럽 유대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하나님의 뜻의 명시와 인간의 반역의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 사건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인간학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의 관계로 설명되어 왔다.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고난의 과정을 경험해 오면서, 이 질문에 관하여 오랫동안 숙고해 왔다. 특히, 성서의 가장 위대한 고난 문학 가운데 하나인 욥기는 바로 인간의 고난과 고통의 문제를 질문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적 대답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유대 지혜 문학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대학살은 '고난받는 종(이사야서 53장)'의 신학에서처럼 '무고한 대속적 피'로써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고난을 모두 무고한 자의 '대속적 고난'이라는 주제로 해석하게 되면, 인간이 경험한 역사를 통한 자기 반성이나 성찰의 기회를 상실할 위험이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역사 해석이 되고 만다. 이 주제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이기도 하여, 많은 종교가 이 주제에 관하여 각각의 대답을 시도하고 있다.

 

* 정치적 사건과 정치적 책임

'역사는 곧 인간의 책임'이라는 전제하에, 이 사건을 인간이 저지른 인간의 사건으로 보려는 시각으로 인간들의 정치적 책임을 강조하는 입장을 말한다. 그러나 이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의 세계인들의 반응은 대단히 지탄을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단적으로, 미국은 고통받는 유대인들에 대해 매우 냉담하였다. 1939년 4월의 「Fortune」지(誌)는 미국 상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보도한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미국의 이민 제한법을 넘어서서 유럽의 난민들을 받아들일 것인가에 관해 83%가 반대를, 8.7%가 찬성을, 8.3%가 무응답을 하였다.

 

홀로코스트 이후 더 이상 서정시는 쓸 수 없다고 말한 독일의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오 독일이여, 창백한 어머니여! 어떻게 당신은 이런 오욕 속에서 민중들 가운데 앉아 있나요?"라고 물으며, "독일이여, 부드러운 이마에 먹구름 낀 당신의 말없는 하늘에 무엇이 생겨나는가? 당신은 단지 유럽의 똥통일 뿐 ··· "이라 울부짖었다.


*종교적 주제로서의 사건

레비의 『가톨릭 교회와 나치 독일』과 아서 모르스의 『600만 명이 죽을 때: 냉담했던 미국인의 연대기』는 이 사건에 대한 세계의 침묵과 냉담함을 적고 있다. 특히, 이러한 태도를 가진 기독교 신학자들은 "유대인들은 결코 무고한 피를 흘린 것이 아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죄를 지었으며, 죄를 지은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 그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은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역사가 토인비는 그의 『역사의 연구』에서, "20세기 독일의 정신은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게 하는 볼록 거울이었다. 만일, 20세기의 독일이 괴물이었다면, 20세기의 유럽의 문명은 독일의 괴물을 만들어 낸 프랑켄슈타인이었다."라고 언급하였다.


*폭력의 근대적 성격

라울 힐버그는 독일의 인종 학살 계획이 수행되는 과정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효율성, 곧 냉엄하고 관료적이며 산업적인 효율성에 최초로 주목한 역사가였다. 그의 주장은 근대 전체주의 정권의 폭압 아래에서는 인간 대중이 상황에 따라 집단적인 또는 개인적인 도덕적 책임감을 방기하는 경향을 드러낸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을 넘어서려는 시도로 평가된다.

 

힐버그의 뒤를 이은 지그문트 바우만은 홀로코스트가 전체주의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산업 사회의 합리적 관료주의, 과학적 이데올로기, 탈개인화, 그리고 극단적인 기능적 전문화에 매몰된 근대적 생활 방식과 조직 문화가 저변에서 작용한 결과라고 표명하였다. 다시 말해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체계적이고 완벽주의적이며 동시에 철저히 근대적인 사회가 아니었다면 작동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냉정한 조직 체계와 그것의 최종 결과(가스실)가 바로 홀로코스트가 내포한 암울한 비인간적 폭력의 근대적 성격인 것이었다.


*화해의 가능성으로서의 몇 가지 변화들

1991년 1월 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세계 평화의 날' 선언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신앙)를 타인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자들을 경멸해서도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1962년 10월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타 종교와의 대화' 등 혁신적인 변화를 모색해 온 이래 이룩된 하나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이 선언에 앞서 1985년 6월에, 로마에 있는 유대인 회당을 로마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하여, 유대인을 '우리의 형제'라고 부르며 가톨릭 교회의 유대인 박해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고, 서로 간의 화해를 요청하였다. 1998년 3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교황청의 공식 입장 표명은, 그것이 비록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오랜 입장 차이를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1993년에 바티칸 시국과 이스라엘은 외교 협약에 서명하였다. 이는 2000년 동안의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간의 갈등을 정리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아직까지 독일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 일에 대한 화해의 악수를 건넨 적이 없다. 현재 독일과 이스라엘의 국제 관계는 1952년 9월 10일 이후 대사급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불편한 관계가 남아 있다. 독일은 이스라엘에 7억 2천만 달러를 피해 보상금으로 주었으며(현금이 아닌 물품으로), 4억 5천 마르크를 유대 기구에 지불하였다. 1970년 12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폴란드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애도를 표하고, 과거 나치 독일에 상처받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는 독일 총리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2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으나, 당시 독일인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독일 국민의 41%는 '적절했다', 48%는 '심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스라엘은 독립 이후, 예루살렘에 야드 바쉠(Yad Vashem)이라는 600만 학살 기념관을 건립하고, 나치 독일 시대에 자행된 각종 자료와 사진을 전시하여 국민들과 세계인들에게 비극적인 역사를 되돌아보게 해 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결코 이 사건을 과거의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이들에게 있어서 과거란 늘 현재요, 또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구호는 "용서는 하지만 망각하지는 않겠다."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