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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과 그 과정

淸山에 2013. 6. 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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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과 그 과정

 

1.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유대인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의 모든 유대인들은 벤 구리온이 제2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제안한, "히틀러와 싸우자."라는 연설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히틀러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유대 군사력을 위한 조직을 제안하였으며, 또 전쟁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으나, 영국 정부는 이들이 팔레스타인에 남아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한편, 1940년 여름 팔레스타인 보병대의 발대식이 있자 영국군은 이들에게 매우 협조적이었다.

 

1941년 4월, 로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이 이집트 국경까지 이르자, 영국은 유대인을 영국 군사 본부에 배치하여 정보 활동 등을 시켰다. 3000명 이상의 유대인 남녀가 이 일에 참여하였다. 이르군(Irgun)이 영국에 협조하기 시작한 셈이다. 1941년 5월, 이라크에서 알리가 이끄는 신나치 혁명이 일어나자, 이들이 그 곳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942년 봄, 로멜 장군의 독일군이 다시 이집트 국경에 재진격했을 때 5000명의 유대인들이 영국군에 지원하여 영국군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다.

 

1942년 4월, 바이츠만은 미국을 방문하여 뉴욕의 빌트모어에서 가진 유대 지도자들과의 회합에서, '시온주의 운동의 정치적 활동'을 위한 기초를 내놓았다. 후에 이를 '빌트모어 계획'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안의 내용은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대규모의 유대인 이민의 문을 열 것, 이민을 포함한 국가 발전을 위한 모든 관련 업무를 유대 기구(Jewish Agency)로 통합할 것, 팔레스타인에 유대 독립 국가 설립을 요구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빌트모어 계획은 1942년 11월, 시온주의 대표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한편, 팔레스타인의 영국 식민지 정부는 차차 유대인들의 반란을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들은 '국가 안의 국가'라는 논리로 유대인들의 활동에 민감하였고, 유대인의 자위대인 하가나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1943년 4월, 영국은 드디어 유대 신병 보충대를 비롯한 여러 기구들과 지역을 수색하여, 유대인들이 불법으로 소지하고 있던 많은 무기를 압수하였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면서 많은 유대인은 반영국 감정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영국에 맞서기 시작하였다. 반영국 활동은 이르군(Irgun)과 레히, 그리고 이스라엘 자유 투사회에 의해 시도되었다. 레히의 창설자 슈테른은 이 일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알려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지지를 얻지 못하자 단독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결국 1942년 2월, 영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르군은 그들이 전쟁 중에 수행한 영국군과의 정책적 협조 관계를 강조하면서 그들의 활동을 유지하였으나, 결국 1943년에 정책을 바꾸어 '정복자 영국에 대항하는 혁명 운동'을 선언하였다. 이들은 영국 정부의 경찰서, 방송국 등에 공격을 가하였으며, 요인을 암살하는 일도 감행하였다.

 

1944년 11월 5일, 두 명의 행동 대원에게 영국의 중동 국장 모인경이 이집트에서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영국은 이에 맞서 저항을 스스로 중단하든지, 아니면 힘에 의해 중단할 것인지를 선택하도록 선언하였고, 이어 시온주의 운동 기구는 이르군에게 이 일을 중단할 것을 명령하는 결의를 하였다. 결국 약 250명의 이르군 대원들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에리트레아로 유배되었다.

 

2.시온주의 기구와 영국 정부 사이의 관계 악화

 

이러한 여러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영국 정부는 1944년 9월 유대 여단 설치 결정을 발표하였다. 이 여단은 군사 조직으로, 그 해 연말에 계획되어 있던 이탈리아 공격을 위한 사전 준비의 일환으로 알려졌다. 약 25,000명의 병력이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 결정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의 군사력 강화라는 측면과 유럽의 유대인들과의 접촉 가능성을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4년 10월, 미국 시온주의 기구에 보낸 서한에서, "팔레스타인에 유대 자유 민주 국가 건설을 지지한다."라고 말하였으며, 1945년 2월에 있은 얄타 회담 이후 사우디아라비아의 왕 사우드를 만나 이 결정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영국 처칠의 연립 내각은 유대국가 건설을 지원할 것과 팔레스타인에서 다수의 유대인이 정착하는 문제에 지지를 선언하였다. 1944년, 노동당의 결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준비해 주지 않으면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의 집이 세워질 희망이 전혀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 독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온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하나의 반가운 초청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랍을 밀어 내고 유대인들을 이주시킵시다. ······ 아랍은 다른 넓은 영토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작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을 밀어 낼 것을 주장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1945년 7월 총선에서 영국의 노동당이 재집권하였으나, 여전히 이민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유대 기구는 즉각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요청하였으나, 외무 장관 베빈은 그 해 11월,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책을 발표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 모두를 위한 영국의 이중 의무'를 거듭 천명하였다.

 

이러한 영국의 선언은 팔레스타인이 유대인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으며, 유대인 난민들에게 유럽에서 재건을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이츠만은 10월, 런던에 건너가 베빈 장관을 냉대 속에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그는 정부의 이 같은 백서는 유효하다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 해 9월, 전후 처음으로 런던에서 열린 제21차 세계 시온주의 총회에서 랍비 실버는, "우리의 제안이 다시 거부된다면, 우리는 어떠한 무기를 동원해서라도 우리의 뜻을 이루겠다."라고 연설하였으며, 그는 바이츠만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유대국가이지 영국 정부의 허가장이 아니다."라고 강력히 건의하였다.

 

한편, 베빈 장관은 팔레스타인 문제와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토의할 영미 심의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여, 1946년 1월 7일에 워싱턴에서 영국과 미국의 동수(同數)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유대인들의 토지 거래 금지법을 무효화시켰으며, 영국의 위임 통치권을 유엔이 인수하는 것도 제안되었다. 이로부터 차차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진일보를 내딛었다.


3.불법 이민

 

전후 영국 정부는 여전히 유럽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민 오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학살의 생존자들은 이민의 문이 열리도록 계속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수용소를 나온 일부 유대인들은 서유럽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기도 하였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를 희망하였다.

 

1946년 4월, 두 척의 배가 불법 이민자를 싣고 이탈리아 항구 라스페치아(La Spezia)를 떠나려고 하자, 영국은 압력을 가하여 이 배를 억류하였다. 그 배 안에 있던 모든 유대인들은 석방될 때까지 단식 투쟁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이 유대인의 승리로 끝나자 더 많은 이민자가 이주를 희망하였으나, 영국은 계속하여 이민을 방해하고 금지하였다. 또, 불법 입국자를 잡아 텔아비브에 수감하였다.

 

1947년 7월, 프랑스를 떠난 엑소더스(Exodus)호는 4500명의 이민자를 싣고 떠나 하이파항에 도착하였다. 영국은 이 배의 정박을 방해하며 발포를 하여 수 명의 사상자를 냈다. 영국은 이들을 되돌려보내기로 결의하였으나, 이민자들은 끝까지 싸웠다.

 


엑소더스호

 

 

1945년부터 독립할 때까지 약 70,000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불법으로 이민해 왔으며, 이들 가운데 약 5000명은 체포되어 키프로스 섬으로 되돌려보내졌다. 이들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