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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국제적 논의와 그 결정

淸山에 2013. 6. 6. 20:03

 

 

 

 

 

 

4.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국제적 논의와 그 결정

 

유엔이 제안한 팔레스타인 문제는 유엔이 관할해야 한다는 위임 통치권에 관한 안이 영국에 의해 거부되자,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유대인(17%), 아랍인(40%), 그리고 두 영국 지역(예루살렘과 네게브, 43%)으로 분할하여 영토 전체의 관할은 영국이 담당하고, 유대 및 아랍 지역은 자치로 하는 안이 제기되었다. 이 안은 영국 외무성의 모리슨과 런던 주재 미국 대사인 그래디에 의해 제안되었다 하여 '모리슨 · 그래디 안'이라 불린다.

 

이 안은 아랍인과 유대인 양측으로부터 거부되었다. 1946년 12월에 바젤에서 열린 제22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이 제안한 런던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고, 팔레스타인 아랍인들도 거부하였다. 결국 1947년 2월 14일에 영국 외무 장관 베빈은, 영국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 내의 두 민족 간의 화해에 관하여 관심이 없으며, 이 모든 문제를 유엔에 넘긴다고 발표하였다. 같은 해 5월에 시작된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소련의 대표 그로미코는 "자기 국가를 건설하려는 유대인들의 정신을 지지한다."라고 발언하였다. 여기서 안전 보장 이사회는 UNSCOP(유엔 팔레스타인 특별 기구)를 발족하여 11개 국가를 대표로 선출하였다. 이들은 각계의 많은 의견을 청취하고 8월 말에 다음과 같은 3가지 안을 만들었다.

 

(1) 7개 국가는 팔레스타인을 유대국가, 아랍국가, 그리고 유엔이 관리하는 국제 지역으로 분할하는 안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이 안은 아랍과 유대국가가 경제 연합으로 연결되도록 제안하였다. 이 안에 따르면, 유대국가의 영토는 예루살렘, 중 · 서부 갈릴리, 유대 - 사마리아 산지 및 유대 광야를 제외한 지역으로, 전 팔레스타인의 약 64%에 해당되었다.


(2) 3개 국가의 안으로는 유대 - 아랍 연방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3) 나머지 1개 국가는 두 제안에 모두 기권하였다.

 

 

미국은 (1)안에 찬성하였으며, 여기에 네게브를 유대국가에 덧붙이자는 제의를 하였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블록은 하나의 유대국가를 세우는 데 지지하였으며, 영국은 이 계획과 관련하여 곧 자국의 군대를 그 곳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알려 왔다. 급기야 1947년 11월 29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팔레스타인을 두 국가로 분할하여 독립시킨다는 역사적인 결정을 33:13으로 가결하였다. 영국은 1948년 2월 1일에는 유대인 이민을 위한 항구를 열고, 같은 해 8월 1일에 모든 군대를 팔레스타인 땅으로부터 철수시켰다.


5. 독립 전쟁

 

유엔의 결정이 있은 직후, 뉴욕의 유대인들은 거대한 환영 행사를 펼쳤다.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은 모든 교통이 두절되고,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새벽이 되도록 춤과 노래로 축제를 벌였다. 벤 구리온은 인터뷰에서, "2000년 동안의 어둠을 깨고 구원의 여명이 밝아 왔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러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가 열리는 동안, 아랍인들은 분할 계획에 전면 반대하고 나섰다. 유엔의 결정 직후부터 아랍인들은 유대인들의 자동차와 건물에 공격을 시작하였고, 주변 아랍 국가에서 소위 해방군이 들어와 공격을 지원하였으나 영국은 이를 묵과하였다. 이들은 해외의 유대인들에게도 공격을 하였다. 유대인들도 이에 맞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마을 입구에 초소를 세우고 경비를 강화하였다. 1948년 3월, 아랍인들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면서 예루살렘과 네게브, 서부 갈릴리의 통로가 차단되었다. 이때까지 약 1200명의 유대인들이 죽었다. 상황이 차츰 심각해지자, 유엔 미국 대표는 유엔의 결정을 취소하고, 다국적군이 통치하는 신탁 통치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주도권을 장악하기로 결의하고, 체코로부터 들여온 대량의 무기를 사용하여 4월 초 나흐숀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으로 통하는 길을 다시 열었다. 그러는 동안 키부츠 미쉬마르 하에멕은 아랍 해방군들에 의해 심하게 공격당하였다. 유대인들의 반격이 시작되자, 아랍인들은 공포에 질려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나 일부 지도자들이 이끄는 아랍인들은 끝까지 항거하였다. 예루살렘 근처 아랍 마을 데이르 야신은 여자와 어린이들을 포함하여 대량 도주가 행하여졌다.

 

1948년 4월 중순과 5월 중순 사이에 하가나는 하이파, 티베리아, 사페드 등을 정복하고, 5월 13일에는 텔아비브 위성 도시인 욥바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4월 13일 예루살렘에서는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히브리 대학이 있는 스코푸스 산으로 가던 의사와 간호사가 탄 버스가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아 모두 죽은 사고가 발생하였다. 유엔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전쟁을 막는 데 성공하지 못하자, 1948년 4월 16일, 안전 보장 이사회를 열어 이 상황에 관하여 토론을 했다. 이때, 유엔은 자신들의 결정을 곧 수행할 것을 토의하였으나, 영국이 유엔 대표들의 입국을 거부하고 나서는 바람에 아무런 새로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폐회되었다.


6. 독립 선언


1948년 5월 14일(금) 오후 4시, 텔아비브 박물관에서는 '하티크바〔Hatiqva, '희망'이라는 제목의 국가(國歌)〕'가 불려진 후, 벤 구리온이 독립 헌장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읽고 있었다. "우리는 유대인의 역사적이며 본질적인 권리와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세울 것을 선언한다."

 

 

독립 전쟁(1947~1949)으로 얻은 영토

 

 

이스라엘 독립 선언문

 

이 선언은 15분도 채 걸리지 않았으며, 건국의 지도자들이 알파벳 순서대로 서명하였다. 임시 국민 의회는 이스라엘 정부를 비준하였으며, 독립 선언 직후 미국과 소련 정부로부터 사실상 인정도 받았다. 그 날 자정을 1시간 남겨 둔 시간에 영국 식민지 대표는 하이파항을 떠났고, 다음 일요일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으로 하임 바이츠만이 선출되었다.

 

그 날 밤, 5개국의 아랍 연합군은 이스라엘에 공격을 개시하였고, 여기에 참전한 이집트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 서한을 보내, '이집트는 유엔에 의해 인정되는 도덕적이고 원칙적인 국가 재건을 위하여' 팔레스타인에 들어간다고 알려 왔다. 이들은 주로 네게브의 유대인 마을들을 공격, 고립시켜 곤궁에 빠뜨렸다. 레바논은 말키야와 카데쉬 납달리 쪽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시리아는 제마와 샤르 하 - 골란을 점령하고 갈릴리 호수 옆 엔게디까지 공격해 왔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모두 격퇴하였다.

 

이스라엘 군대는 계속해서 라투룬을 경과하여 예루살렘 구도시로 진격하였다. 구도시의 유대인 지역에 오랫동안 고립당해 있던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아랍인들은 라투룬 도로를 차단하여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공급되는 식량과 물을 차단하였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수상과 국방상을 겸임한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방위군을 창설하였으며, 6월 1일에 이르군은 해체되고 이들이 모두 방위군에 편입된다고 선언하였다.

 

독립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유엔은 중재자로 스웨덴 사람인 버나도트를 파견하여 휴전을 제안하였다. 그는 1947년 11월 29일 유엔의 결의를 지켜 줄 것을 이스라엘측에 요구하였다. 즉, 전쟁 중에 점령한 네게브를 돌려 주고, 하이파항은 국제항으로 둔다는 안을 제안하였으나, 이 안은 얼마 후 아랍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아랍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침략하였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에 더 많은 영토를 내주게 되었다. 임시 휴전이 끝나던 7월 9일부터 10일 동안에 이스라엘은 나사렛을 점령하였고, 갈릴리와 룻다와 람레를 점령하였다.

 

제2차 휴전은 안전 보장 이사회의 노력으로 시작되어 협상에 들어갔다. 버나도트는, 이스라엘이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과 아랍 난민들을 안전하게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버나도트는 이에 반대하고 나선 레히 그룹의 이스라엘 청년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살해되었다. 이 사이에 이스라엘은 다시 네게브를 공격하여, 이집트로부터 고립되어 있던 많은 정착지들을 재확보해 나갔다. 1949년 1월 7일에는 홍해와 소돔과 엔게디에 이르는 사해를 점령하였다.

 

1949년 1월 12일에 유엔의 중재 대행자로 번치가 부임하여 협상을 재개하였다. 이집트는 2월 14일에 네게브를 이스라엘에 내주는 대신 엘아리쉬 - 아부 알제일라 선과 가자 지구를 차지하기로 동의하였고, 레바논은 3월 23일에, 트랜스요르단과는 4월 3일에, 그리고 시리아와는 7월 20일에 각각 휴전에 조인하였으나, 이라크는 끝내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영국이 위임 통치하던 서부 팔레스타인 영토의 약 80%를 차지하게 되었으나, 여전히 중동의 안보와 평화는 불안하기만 하였다.

 

결론적으로, 시온주의자들의 꿈인 이스라엘의 국가 건설은 시온주의 창시자인 헤르츨의 예언대로 50년 만에 이룩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 예언가의 꿈은 완성되었으며, 유럽에서의 수없는 박해와 대량 학살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땅과 주권을 가진 새로운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약 2000여 년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과거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와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씻는 명예 회복으로 받아들였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소유했던 토지를 빼앗기고 그 땅에서 쫓겨남으로써 새로운 방랑과 수난이 시작된 식민주의의 결과로 이해되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