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 배움/이스라엘 史

제7장 현대 이스라엘의 정책과 중동 전쟁

淸山에 2013. 6. 6. 19:56

 

 

 

 

 

제7장 현대 이스라엘의 정책과 중동 전쟁

 

1. 이민 정책


신생 이스라엘을 지탱해 주고 있는 두 요소는, 첫째가 대량 이민이고, 둘째가 아랍으로부터의 끊임없는 도전이다. 전자가 이스라엘의 성격을 다윈 사회로 규정하는 요소라면, 후자는 이스라엘의 안보 의식을 보다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 이스라엘은 약 100여 개 국가로부터 이민해 온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은 각각 역사적, 종교적, 정서적 뿌리는 함께 하고 있지만, 언어와 삶의 양식 및 습관은 달리하고 있는 공동체이다.

 

유대인 이민자들은 대체로 아슈케나짐(Europeans)과 세파르딤(Orientals)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 지금까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있지 않은 아랍국가들로부터의 끊임없는 도전과 생존의 위협 속에서, 이들은 개인의 생존권과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생존권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회적 관심은 공동체의 생존과 통합의 문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흩어짐'은 하나님의 심판이요, 다시 '모음'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신학적 사상이 구약 성서 시대부터 있었다(이사야서 66:18 등). 이 사상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이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2000년 동안의 디아스포라의 삶이 히틀러의 대학살로 끝나면서 더욱 간절한 희망으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희망은 그들의 꿈인 팔레스타인에로의 자유로운 귀향이 보장되면서 더욱 체계적으로 수행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50년에 귀향법(the Law of Return)을 제정하고, 이민부를 두어 이 일을 전담하게 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의 이민 정책은 다산(多産) 정책과 함께 인구 증가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며, 1989년 소련의 몰락 이후 약 백만 명 가량의 새 이민자와 더불어 이디오피아 등에서 대량 이민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나가고 있다.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분포도

 

 

2. 안보 문제와 제2차 중동 전쟁

1947년 11월 29일, 유엔의 결정 이후 이스라엘은 신생 독립 국가로 탄생하였으나, 아랍은 이러한 결정에 동의하지 않고 이스라엘 국가 건설에 반대하였다. 아랍은 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유엔의 결정을 위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최근 일부 국가들의 입장 변화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아 왔다. 그러나 1950년 4월, 벤 구리온 수상은 요르단 국왕 압둘라와 평화 협정을 위한 비밀 접촉을 가졌다. 많은 아랍국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협상의 가능성을 찾아 나갔으나, 그 해 7월 20일에 압둘라 왕은 예루살렘 올리브 산에서 아랍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1951년 봄에는 시리아와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시리아는 접경 지대에 산발적인 공격을 해 왔으나 이스라엘은 이를 격퇴하였다. 1956년 7월 26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한 재정 확보를 명목으로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운하를 봉쇄하여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을 통제하는 한편, 이스라엘 상선을 강제로 나포하기도 하였다. 계속되는 이집트와의 산발적인 충돌은 1956년 10월 29일, 시나이 캠페인으로 번져 제2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100시간 만에 공수 부대와 탱크를 앞세우고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에 이르렀다. 또, 많은 무기와 6000명의 이집트 포로를 잡았다. 당시의 국방상은 벤 구리온이었고 참모 총장은 샤론이었다. 11월 3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즉각적인 정전을 요구하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하여, 영국 및 프랑스 연합군을 파견하여 이집트를 공격, 11월 7일 휴전을 성립시켰다. 소련과 미국은 이스라엘에게 점령지 반환을 위하여 압력을 가했으며, 기름 공급 협정을 취소하였다. 이스라엘은 1957년 11월 7일,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와 협정하여 시나이 반도를 포함한 가자 지구를 이집트에 되돌려주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국경의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그 영향은 이스라엘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적 식민 정책주의 국가로 낙인이 찍히게 되었으며, 이집트의 대통령 나세르는 아랍 국가들로부터 정치적인 승리로 인한 영웅적 지지를 얻어 냈다. 물론 이스라엘은 군사적 우위를 통한 안보의 가능성을 확인하였으며 열강들과의 외교적 관계가 밀접해졌다는 이익을 얻었으나, 아랍국가 역시 이를 계기로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맹을 탄생시켰다.

 

3. 외교정책

이스라엘은 독립 후, 1949년 5월 11일 유엔 총회에서 37:10, 기권 9표로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루살렘 문제는 정치적 분쟁의 씨앗으로 남아 있었다. 1949년 12월 9일, 가톨릭과 아랍이 주축을 이루어 예루살렘을 국제 도시화하자는 새로운 제안이 나왔으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고 수도로 재확인하자, 많은 나라가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등 압력을 가해 왔다.

 

또, 가장 어려운 문제는 블록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어떤 위치에 서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변 아랍국가에게 많은 무기를 제공해 주고 있는 나라는 영국이었다. 1950년 5월, 이스라엘은 소위 중동 국가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국경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강대국들의 무기 공급에 반대한다는 선언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3국 선언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강대국들과의 외교적 관계를 정상화시켜 나갔다. 냉전 체제에서 중국과 미국, 소련, 동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대사급 외교 관계의 길을 열어 놓았다.
 

 


이스라엘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

 우리나라와의 외교 관계는 1992년에 재개되었다.

 


4. 6일 전쟁과 그 이후의 변화

1961년, 아랍 연맹이 해산된 후 시리아는 계속적으로 국경 분쟁을 일으켜 오다가, 1963년 이스라엘이 추진하고 있던 물 공급 계획을 거부하고 나섰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시리아는 갈릴리 지역에 대한 산발적인 공격을 해 왔다. 1967년 4월 7일, 이스라엘은 기습적으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시리아가 보유하고 있던 미그기 6대를 파괴하였다. 소련은 즉각 이집트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라는 압력을 가하였으며, 5월 14일 이집트의 참모 총장 무하마드 파우지가 다마스쿠스를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 다음 날, 이집트의 2개 보병 사단이 시나이 반도에 배치되었고, 시나이 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에게 이스라엘과의 국경 지대에서 물러나 줄 것을 명령하였다.

 

17일,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는, 이집트가 평화를 유지한다면 유엔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하였고, 이를 받아들이자 곧 철수했다. 22일, 이집트의 나세르는 항구 에일라트를 봉쇄하였고, 23일에는 이스라엘의 외무 장관 아바 에반이 파리와 런던, 그리고 워싱턴을 각각 방문하여 외교적인 해결을 꾀했다. 5월 30일,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카이로를 방문하여 이집트 - 시리아 군사 협정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6월 4일, 이라크는 이에 가세하기로 하고 요르단 내에 군대를 들여보냈다. 이들의 표어는 "유대인을 지중해에 밀어넣자"라는 것이었다.

 
 


1967년 골란 고원의 시리아-이스라엘 군사 대치 상황

 

이스라엘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만이 무기 원조를 위해 협력하였다. 미국은 외교적 해결을 요구하는 입장이었고, 이러한 외교적 노력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랍국들은 차차 군사적 압력을 가해 왔다. 당시 레비 에시콜 국방상과 참모 총장이었던 이츠하크 라빈은 전략 수행을 위한 군사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함을 크게 염려하였고, 시민과 군대로부터 결정을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크게 곤경에 처해 있었다.

1967년 6월 5일 새벽 7시 46분, 이스라엘 전투기는 이집트 국경을 기습적으로 넘어 들어가 카이로 공군 기지에 배치되어 출동 준비가 완료된 수백 대의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및 이라크 전투기들을 요격하였다. 이로써 제3차 중동 전쟁(6일 전쟁)은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지상전에서 시나이 전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승기를 잡아 나갔으며, 특히 기갑 부대의 활동이 눈부셨다. 이집트나 시리아의 신예 소련제 탱크에 비하여 이스라엘의 탱크는 열등하였으나 군사들은 월등히 앞서 싸웠다.

 

이집트에 대한 전투는 3일 만에 수에즈 운하 및 가자에 이르는 지역을 완전히 점령함으로써 끝났다. 수천 명의 이집트 군사를 포로로 잡았으며, 사막에서 포로들에게 물과 식량을 공급하는 일도 적지 않은 일이었다. 이집트 군대가 밀집 배치되었던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군대에게 있어서 스스로 쳐 놓은 하나의 죽음의 덫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이스라엘의 수상 에시콜은 유엔을 통하여 요르단에게 전쟁에 개입하지 말 것을 제안하였으나,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이를 거절하고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역을 공격하였다. 이에 맞선 이스라엘은 6월 7일, 예루살렘의 구도시를 탈환하고, 그 다음 날에는 요르단 강까지 점령하였다.

 

시리아는 갈릴리의 유대 마을을 공격해 들어왔다. 이스라엘은 즉각 골란 고원을 통하여 쳐들어갔다. 지형상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불리한 전투 지역으로 많은 희생을 남겼으나, 6월 9일에 이스라엘 방위군은 다마스쿠스로부터 불과 수십 마일 떨어진 쿠네이트라를 점령하였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이스라엘 군대의 기동성과 현대적인 군사 작전의 결과였으며, 또 아랍 군대의 허약함 때문으로 요약된다. 나세르가 6월 9일에 사임을 전격 발표하자 수많은 지지 군중들의 데모가 있었으며, 결국 사임 발표를 취소하는 정치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아랍국가의 군사적, 정치적 실패가 패배를 자초한 셈이다.

 

유엔은 1967년 11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유엔 결의(제242조)를 통과하여 중재를 시도하였다. 이 결정의 주요 내용은, "이스라엘은 6일 전쟁 이전의 군사 분계선으로 철수한다."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이때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하지 않고 있다.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

 

소련은 전쟁 발발 직후 이집트의 승리를 알려왔고, 이스라엘을 비난하였다. 이어 이스라엘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조건하의 휴전을 제안하였다가, 나중에는 무조건적인 휴전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소집을 미국에 요구하였으나,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입장이 달랐다. 미국은 팔레스타인의 영토 합방보다는 평화 정착에 관심이 더 컸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로 소련은 이집트에 더 많은 무기와 군사력을 제공하였으며, 이집트의 나세르는 1970년 8월, 미국이 제안한 휴전 안에 서명하였다.

 

이집트의 새 대통령이 된 사다트(나세르 대통령은 1970년 9월 28일 암살됨.)는 아랍국들에게 '이스라엘의 아랍 점령지 반환'을 선동하며 압력을 가하였다. 1972년에는 소련의 군사 고문단을 대거 받아들였으며, 보다 강력한 군사력을 키워 나갔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전쟁 패배로 당하는 그들의 정치적 궁지를 어떻게든 빠져 나와야만 했다. 드디어 1973년 10월 6일, 대속죄일(Yom kippur)에 기습적인 이스라엘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것이 욤 키푸르 전쟁이라 일컫는 제4차 중동 전쟁이었다.

 


모세 디얀 장군

시리아는 약 5개 사단 45,000명과 180여 대의 탱크, 300여 대의 공군기를 앞세우고 골란 고원을 공격하였다. 24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이들 전력의 절반을 파괴하였고, 다음 날에는 기선을 제압하고 공격을 밀어붙여 10월 13일에는 다마스쿠스 25마일 지점까지 접근해 갔다. 10월 14일에는 이스라엘 2개 탱크 부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내륙으로 진격하였으며, 17일에는 이스마일리아와 카이로를 잇는 도로를 차단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은 골다 메이어(1969년 3월 16일 취임)였으며, 국방상은 모세 다얀이었다.

소련은 이집트에 군사적 지원을 계속하면서, 미국의 국무 장관 헨리 키신저를 모스크바로 불러 휴전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소련의 군사 개입 가능성을 예측하고, 긴장 완화를 위하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10월 22일을 기하여 휴전을 결의하였다. 이 유엔 결의(338조)는 전쟁 이전의 상태로 물러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아랍국들은 더 이상 무력을 통한 변화의 가능성이 없음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집트와 요르단은 1973년 12월 21일에 열린 제네바 회담에 참석하였으며, 유엔의 결정에 따라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비무장 지대에 1250명의 유엔 감시군을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3차, 4차 중동 전쟁을 치르면서 외교적 손해를 많이 입게 되었다. 그동안 관계를 맺어 온 많은 나라와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