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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중동 평화 - 4. 중동 평화 회담과 전망

淸山에 2013. 6. 6. 19:28

 

 

 

 

 

제8장 중동 평화

 

 

4. 중동 평화 회담과 전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최초의 평화 협상은 1978년 9월에 조인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그 결실을 맺었다. 1976년 1월 유엔 총회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제242호를 토대로 하여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가 제출하고 PLO가 지지한 '점령지에서의 두 국가 해결안'을 두고 논의하였으나, 이스라엘은 회의 참석을 거부하였고, 미국도 레바논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PLO의 테러 활동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 안을 거부하였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

 

그러나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중재하고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이스라엘의 베긴 수상이 참여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웨스트 뱅크와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를 수립한다는 포괄적인 협상과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위치한 시나이 반도의 장래와 평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는데, 시나이 반도로부터의 이스라엘 철수, 비무장화, 군비 축소, 감독 기구 설치 등 상당히 구체적인 사항에 합의하였다.

 

이 협정에서 팔레스타인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것이 곧 독립 국가로 가는 첫 단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웨스트 뱅크와 가자 지구를 합법적으로 요르단과 이집트 영토로부터 분리시켜 이스라엘의 관할하에 둘 수 있다는 이집트의 동의를 얻은 셈이었다. 그 대가로 이집트는 1982년에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았으나, 이스라엘은 점령지 내에 엄청난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함으로써 이 지역의 평화 정착에 새로운 걸림돌을 만들어 버린 셈이 되었다.

 

한편, 1991년 1월 15일 자정을 기해 시작된 걸프 전쟁은 중동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 주었다. 먼저, 걸프 전쟁은 중동의 아랍국가들의 분열을 가져다 주었다. 이라크의 침략에 대한 입장이 아랍국가들 사이에서 양분되었으며, 특히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아랍 제국의 군사력은 전후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축으로 바뀌었으며, 아랍 연맹의 방향이 각 아랍 국가의 국제적 이해 관계에 따라 분열된 셈이다. 특히, 시리아의 국제적 지위, 전후 미국과의 관계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중동의 변화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걸프 전쟁 당시 PLO의 아라파트 의장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면서 심각한 재정난과 정치적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판단은 팔레스타인의 전적인 지지를 얻어 왔던 아라파트의 정치력에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에 소련의 붕괴로 말미암아 민족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실상 그 설득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지위가 변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중동에서의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동 진출의 교두보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걸프 전쟁으로 말미암아 다중 외교를 선택한 미국은 이스라엘의 국내 문제와 관련하여 외교적 입장을 바꾸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이 걸프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미국이 러시아로부터 이스라엘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정착을 위해 지원하기로 한 300억 달러의 지급을 이스라엘 내의 아랍 - 팔레스타인의 법적 지위 문제를 지적하면서 중단한 사실이다. 여기에 걸프 전쟁 참가 당사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로 날아든 이라크의 스커드 미사일은 이스라엘 국민들로 하여금 언제까지나 군사적 힘의 우위를 통하여 자국의 안보가 유지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교훈적으로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다.

 

걸프 전쟁 이후 이러한 국제 관계의 변화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인식 전환을 계기로 1991년 11월, 미국과 프랑스가 중재하고 소련이 후원하여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 팔레스타인 대표단이 참여하는 국제 평화 회의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렸다. 6일 전쟁 이후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요르단의 대표단에 포함되었음.)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이 평화 회의는 5년간 워싱턴 등지에서 계속되었지만 팔레스타인 과도 자치 정부 수립을 주내용으로 하는 직접 협상은 서로 간의 입장 차이로 결렬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팔레스타인의 귀향 권리법'이 걸림돌 중의 하나였다.

 

한편, 1992년 6월 24일에 치러진 이스라엘 총선으로 협상이 중단되고, 선거에서 샤미르가 이끄는 보수 집권당인 리쿠드당이 패배하여 물러나면서, 소수 정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출범한 노동당은 평화 협상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노동당의 당수이자 총리인 라빈과 외무 장관인 페레스는 점령지 내의 아랍 - 팔레스타인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꾸준히 주장해 왔기 때문이다. 라빈 총리는 1992년 9월 2일, 국민들에게 점령지 포기를 강력히 호소하면서, '성서에 나와 있는 이스라엘의 영토 전부를 장악하겠다는 희망을 버려라.'라고 촉구하였다. 라빈 총리는 이 날 연설을 통해 '대이스라엘 건설에 관한 종교적 환상을 떨쳐 버려야 할 것'이라고 역설하고, 이스라엘은 중동 평화 회담에서 아랍측과 타협책을 강구해 나가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국력이란 영토의 크기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신념과 사회, 경제, 국방 체제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능력 여하에 달린 것'이라고 지적하고, 앞으로 9개월 내에 점령지 내의 팔레스타인 자치 문제에 관한 합의가 나올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이러한 현직 수상의 발언은 1964년 당시 레비 에시콜 수상의 「르 몽드」지와의 회견에서,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는 고대 팔레스타인의 20%에 불과하다."라는 발언과 크게 대조를 이루어 주목을 받았다.

 

 

 

유대-사마리아 점령 지역 및 가자 지구 내의 유대인 정착촌

 

노동당의 이러한 신(新)사고는 단순히 중동의 평화 정착뿐 아니라, 나아가 평화 정착 후 아랍 세계의 기름과 이스라엘의 고도 산업 · 기술의 결합을 통한 중동 경제의 블록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미래 지향적인 사고였다. 페레스는 말하기를,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단순한 정치적 평화가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한 아랍의 기름과 이스라엘의 고도의 첨단 기술이 연합한 세계 경제의 중심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여 왔다. 그는 이미 블록 경제의 중요성을 예언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내의 많은 극우 세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페레스는 냉전 종식이 중동 지역에 가져다 준 환경 변화 속에서, "팔레스타인에게 좋은 일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나쁜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좋은 것은 팔레스타인에게 있어서 나쁜 일이다."라는 불신과 편견에서 벗어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중동의 새로운 평화 정착이야말로 양 대립 당사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신념 아래, 과거의 "팔레스타인과는 어떠한 협상도 하지 않는다."라는 정책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 비밀리에 접촉하였다. '영토와 평화의 교환'을 슬로건으로 대팔레스타인 평화 정책을 주창한 라빈은 오슬로에서 진행된 양측 대표단의 꾸준한 비밀 접촉 결과,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대표는 워싱턴에서,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역사적인 중동 평화안에 서명하게 되었다.

 

이 날 체결된 오슬로 평화 협정 - 잠정적인 팔레스타인 자치 원칙 선언 - 에 의하면 팔레스타인 자치는 3단계로 나누어 진행하되, 1단계는 가자와 여리고를 우선 자치 지구로 정하고 5년간 제한적으로 실시하며, 2단계는 요르단 강 서안의 7개 도시에서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자치 의회 총선을 실시하여 자치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3단계에서는 자치 정부의 최종적 성격과 예루살렘의 지위 문제를 확정짓고, 해외 망명한 팔레스타인의 귀향권 및 국경과 이스라엘군의 최종적인 배치, 그리고 점령 지역 내 이스라엘 정착촌 처리 문제 등을 해결하도록 되어 있었다. 아라파트 의장은 PLO 창설 이래 최초로 이스라엘의 주권을 인정하고 두 민족 간의 공존과 평화를 추구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 날 서명식에는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 장관과 압바스 PLO 집행 위원이 양측을 대표해서 평화 선언문에 서명했으며, 라빈 이스라엘 수상과 아라파트 PLO 의장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등 중동 평화를 위해 노력해 온 전직 대통령 등 약 3000여 명의 참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악수를 교환하며 평화를 다짐하였다. 이 협정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구소련의 해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백 공존 등과 더불어 현대사의 기적으로 불릴 만큼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었다.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자치안에 관한 평화 협정

 
 
평화의 행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로마의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으로 이어졌다. 바티칸 시국과 이스라엘은 1993년 12월 30일, 국교 정상화를 포함한 상호간의 포괄적인 관계를 규정한 기본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은 단순히 정치적 수교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지난 2000년간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대립과 갈등 관계를 청산하는 대전환점으로 이해될 만한 것이었다.

 

1994년 초에는 보다 적극적이고 포괄적인 중동 평화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특히 요르단과의 협상 노력은 놀라운 속도로 진행되면서 7월 25일 워싱턴에서 양국 간의 전쟁 종식 선언을 하게 되었고, 이어 10월 26일에는 평화협정으로 발전하였다. 이 협정을 축하하기라도 하듯 오슬로에서는 1994년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 장관과 함께 PLO의 아라파트 의장이 공동으로 수상하게 되었음을 발표하였다. 온통 평화의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노벨 평화상(1994년)을 수상한 아라파트(PLO 의장),

페레스(이스라엘 외무 장관), 라빈(이스라엘 수상)

 
 
요르단과의 평화 협정 조인식을 며칠 앞둔 10월 19일, 텔아비브에서 유대인이 탄 버스가 이슬람 과격파 테러 단체인 하마스의 폭탄 테러를 당하여 22명의 사망자와 48명의 부상자를 낸 참사가 벌어졌으며, 동시에 PLO 내부의 과격파의 폭력적 시위 등 평화 무드에 찬물을 끼얹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평화의 행진은 막지 못하였다.

 

같은 해 11월 2일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열린 중동 · 북아프리카 경제 회담에서 이 지역의 경제 블록화를 선언하고, 평화와 함께 경제 발전을 위한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제 세계는 경제 발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무한 경쟁 시대로 진입하면서 평화를 최소한의 필요 조건으로 인식함에 따라 중동 평화의 갈 길에 더 이상의 후퇴란 있을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갔다. 이러한 변화는 그 해 9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요르단 서안 일부 지역에 대한 자치 지구 선언 가조인식을 가지면서 평화의 꽃망울을 터뜨리려 했다.

 

그러나 1995년 11월 4일 이츠하크 라빈이 같은 민족의 강경파 젊은이의 총탄에 쓰러지면서 중동 평화에 커다란 위기가 닥쳐왔다. 라빈의 죽음은 중동 평화는 물론 세계 평화를 위한 노력에 치명타를 입혔다. 페레스가 그의 뒤를 이었으나 라빈의 빈 자리를 채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슬로 평화 과정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수립되고 가자와 요르단 서안에서 일부 이스라엘군이 철수하는 등 1단계 과정은 진행되었으나, 평화 과정을 반대하는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등 팔레스타인 과격 단체에 의한 테러와 유혈 사태가 계속되고, 이스라엘 민족주의자 강경파 역시 반발이 거세어져 갔다.

 

1996년 실시된 조기 총선에서 강경 우파인 리쿠드당의 베냐민 네타냐후가 집권하자 오슬로 평화의 행진은 기우뚱거리기 시작하였다. 네타냐후는 힘의 논리를 바탕으로 한 이스라엘의 안보 우선 정책을 밀고 나갔다. 미국의 압력으로 1997년 3월까지 이스라엘군이 요르단 강 서안 7개 도시에서 철수하게 되며, 또한 1998년 10월 와이밀스 협정에 의해 이스라엘군이 요르단 강 서안 점령 지역의 13.1% 지역에서 추가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측은 PLO 헌장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 조항을 삭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와이밀스 협정의 집행 과정에서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 내 강경파가 반발하면서 1998년 12월 내각 불신임안이 통과되었고, 1999년 5월 조기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노동당의 에후드 바라크 총리가 승리하여 집권함으로써 라빈의 뒤를 이은 노동당의 평화 정책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2000년 5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측은 요르단 강 서안에서 6.1%를 추가 철수하기로 합의하고, 그 집행을 완료하였다. 1993년 오슬로 평화 협정이 공식 출범한 이래 요르단 강 서안 및 가자 지구의 42%가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의 직접적인 혹은 부분적인 관할로 이양된 것이다. 그러나 오슬로 평화 과정의 마지막 3단계에서 양측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자치 정부의 최종적 성격 확정, 동예루살렘의 지위, 해외 망명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 국경 확정, 이스라엘군의 최종적인 배치, 점령 지역 내 이스라엘 정착촌 처리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난해한 문제 앞에서 협상은 아슬아슬한 위기를 맞이하곤 하였다.

 

2000년 7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말 팔레스타인 자치 3단계 최종 지위 협상을 타결시키기 위하여 캠프 데이비드에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와 PLO 아라파트 의장을 초청하여, 가자 지역 전체와 요르단 강 서안의 94~96% 지역에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창립하고, 요르단 강 주변에 이스라엘의 안보 국경 유지를 허용하며, 팔레스타인의 수도를 동예루살렘으로 정하고, 성전산에 대한 최소한의 주권 유지 및 팔레스타인 난민의 제한적인 귀향 허용, 그리고 이스라엘과 관련된 모든 분쟁의 종식을 주내용으로 하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바라크 총리와 아라파트 의장은 클린턴의 중재하에 7월 11일부터 25일까지 2주 동안 밀도 있는 협상과 강도 높은 대화를 벌였으나 양측의 현격한 입장 차이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최종 지위 협상이 결렬된 가장 큰 장애 요인은 동예루살렘, 특히 성전산에 대한 주권 문제였다. 지금까지 이 문제는 양측 모두에게 민감한 금기와 같은 사안이었다. 그러나 바라크 총리는 동예루살렘 문제에 관하여 의제 상정조차 거부하던 입장에서 한 발 물러나 동예루살렘 주변부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대한 자치권 이양 및 행정적인 관할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양보해 갔다. 양측은 과거의 입장에서 볼 때 상호 파격적인 양보를 이끌어 냈으나 입장 차이를 좁히는 데는 실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당수가 2000년 9월 28일 1000여 명의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성전산을 기습적으로 방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라서 이 곳의 주권을 양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샤론의 성전산 방문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격렬한 항의로 이어졌고, 이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쏜 총격으로 팔레스타인 주민 6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요르단 강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의 제2차 인티파다로 번져 나갔으며, 팔레스타인 과격파의 폭탄 테러 공격이 재개되었다. 시위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카타르 등 인근 아랍국가의 위성 방송 보도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다.1)

2000년 9월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엘 - 악사 인티파다는 1987년부터 1991년 사이에 일어난 제1차 인티파다와는 그 양상이 사뭇 다르다. 1차 인티파다가 우발적이고 비조직적이며, 여자와 어린이를 앞세운 돌멩이 투척으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다면, 엘 - 악사 인티파다의 경우에는 파타당의 전사 조직 탄짐(Tanzim)과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 강경파들에 의한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무장 군사 투쟁이 강화되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조처 또한 보다 강경해졌다. 길을 잃고 팔레스타인 자치 지구로 잘못 들어간 이스라엘 군인 2명이 예루살렘 북부 도시 라말라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자, 이스라엘군은 라말라와 가자의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청사를 헬리콥터와 미사일을 동원하여 공격하였다. 1967년 6일 전쟁 이후 요르단 서안에 대한 최대의 이스라엘 군사 작전이었다. 이러한 테러 공격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낳는 최악의 유혈 충돌 사태로 이어졌다.

 

2001년 2월 6일 실시된 이스라엘 총리 선거에서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당수는 총 투표자의 63%를 득표하며 37%에 그친 에후드 바라크에 압승을 거두고, 3월 총리에 취임하였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팔레스타인 점령 지역에 대한 포기의 대가로 유혈 테러가 종식되고 안보와 평화를 기대하였던 이스라엘 국민들이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는 증거였다. 샤론 정부의 주요 정책 지침에는 "국가 안보를 구축하고 폭력과 테러에 확고하게 대처하여 국민의 안전을 보장한다."라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본 정책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중동의 불안정한 형세 속에서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세계 무역 센터의 테러 공격은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테러의 배후를 둘러싼 미국과 영국의 판단은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 세력의 거점인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고, 이어 이들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한 '악의 축' 국가 중 하나인 이라크에 무력 침공함으로써 새로운 국제 질서의 변화를 주도해 나갔다.

 

2003년 3월에 개시된 이라크 전쟁을 계기로 전세계 여러 나라들의 시민들은 초강대국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하고, 1000만 명이 동시에 모이는 대규모 반전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세계화하고 있는 반미주의는 중동 문제를 바라보는 국제 사회의 시각을 바꾸어 놓기 시작하였다. 즉, 중동 문제에 대한 일차적 책임은 이스라엘 샤론 정부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지나친 강경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미국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인 친이스라엘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고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중동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은 언제나 일방적으로 이스라엘편을 들고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으면서, 반미주의와 더불어 이스라엘에 대한 세계 여론의 비판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거세어지고 있다.

 

2004년 11월 11일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이 사망하였다. "예루살렘에 묻어 달라."던 그의 희망은 이스라엘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장례식은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치러지고, 시신은 라말라와 자치 정부 청사 광장에 안장되었다. 후계자로는 마흐무드 압바스가 지명되었으며, 그는 2005년 1월 9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수반으로 당선되었다. 예측 가능하지 않은 중동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할 뿐만 아니라,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수많은 문제들 때문에 언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완전한 평화가 이룩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평화란 힘의 우위만으로는 정착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협상과 타협만이 대안임을 인정할 때 평화를 향한 행진은 계속될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각주
1.1) 2000년 9월 말에 시작된 엘 - 악사 인티파다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아랍측의 언론 매체들은 한 팔레스타인 소년이 아버지의 품에서 이스라엘 군인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을 위성 방송을 통하여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전세계 시청자들에게 생생하게 전하였으며, 반면에 이스라엘 및 서구의 언론들은 성난 팔레스타인들에 의해 잔인하게 린치당하는 두 명의 이스라엘 예비군의 모습을 전송하여 이스라엘 시청자들을 분노하게 함으로써 양측의 감정을 자극하고 서로 강경하게 대처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