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 배움/이스라엘 史

제8장 중동 평화 - 1. 세계의 화약고

淸山에 2013. 6. 6. 19:36

 

 

 

 

 

제8장 중동 평화

 

 

 

1. 세계의 화약고

 

 

국제 문제가 복잡하지 않은 것이 없겠으나, 으뜸 가는 것이 있다면 단연코 중동 문제일 것이다.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라고도 불릴 만큼 그 분쟁의 역사나 정도가 깊고 크다. 20세기 후반에만도 이 지역에서는 여섯 차례 이상의 큰 국제 전쟁이 일어났다. 최근에 일어난 걸프 전쟁과 이라크 전쟁도 이에 속한다.

 

 

야세르 아라파트

 

이 지역에서의 분쟁은 다른 지역의 분쟁의 원인과는 그 역사적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분쟁의 실질적인 원인은 영토 분쟁임에 틀림이 없으나, 지정학적으로 이 지역은 3개 대륙의 교량으로서 고대로부터 주도권 쟁탈의 싸움터였다. 또, 세계 3대 유일신 종교 -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 가 시작된 곳으로서, 그들 간의 깊은 신앙적 차이와 더불어 역사의 골도 상당히 깊다. 이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경우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또, 이들은 본디 유목 민족들로서, 이들이 형성해 온 문화와 오랜 전통 가운데 '피의 복수법'이 널리 행해지는 까닭에 서로 간 그칠 줄 모르는 보복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


1969년 2월,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창설되었으며 의장에 아라파트가 취임하였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의 해방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랍 - 팔레스타인의 대부분은 6일 전쟁 이후 요르단 영내에 거주하면서 게릴라 활동을 해 왔는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요르단에 자주 침입, 격전이 지속되자,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1970년 9월 17일 내전 상태에 돌입하였다.


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게릴라 '검은 9월단'은 요르단의 타르 수상을 카이로에서 암살하였다. 또, 1972년 5월 30일, 팔레스타인 게릴라는 일본 적군파를 시켜 텔아비브 공항을 공격하여 승객 다수를 사상케 하였다. 이를 계기로 요르단은 1972년 팔레스타인의 본부를 요르단에서 추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요르단은 주변 아랍국들로부터 심각한 비난을 받았으며 아랍 연맹에서 축출당하였다. 그 해 9월 5일,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촌을 급습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자, 이스라엘 선수들은 즉시 귀국하였다.

이어 '검은 9월단'은 미국 닉슨 대통령과 이스라엘 골다 메이어 수상의 회담에 반대하여, 1973년 3월 1일에 수단의 미국 대사관을 공격해서 미국 대사를 포함한 3명의 외교관을 살해하였다. 요르단에서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긴 PLO는 헤즈볼라를 중심으로 계속적인 테러를 자행해 오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수시로 레바논의 PLO 본부를 공격하여 말썽을 일으킨 바 있다. 그 후 PLO는 아프리카의 튀니지로 그 본부를 옮겼다.

한편, 1987년 12월에 가자 지구에서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시작된 제1차 인티파다(Intifada,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어린이와 부녀자를 앞세워 반이스라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고,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들은 아랍 - 팔레스타인들에게 발포하여, 2년 반 동안 약 1000여 명이 사살되었고, 20,000명 이상이 부상당하였으며, 15,000여 명이 감금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박해가 세계에 알려지고,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국제 여론이 일자, 1988년 팔레스타인 민족 평의회(PNC)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선언하고 아라파트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다음 해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제외한 회원국 절대 다수의 지지를 얻어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독립 국가'로 인정받았으며, 몇몇 국가에 대사관을 상설하고 '영토와 주권 없는 나라'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의 당면 과제는 최소한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을 회복하여 자치 정부나 독립 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3.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인과 전망

시온주의자들의 정책과 그 책임

1946년, 유대 철학자 마틴 부버는, 시온주의자들의 정책이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과의 지역 협정에 그 기초를 두지 않고 국제 협정에 두고자 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밸푸어 선언이 팔레스타인을 국제적 책략에 의해 '정복'할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는 해석을 받게 된다면, 시온주의에 대한 아랍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할 뿐 아니라, 아랍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유대인과 아랍인 양 민족의 상호 이해를 위한 모든 노력은 의심을 받게 되며, 이 노력이 유대인의 진정한 의도를 은폐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예견한 바 있다.

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한 유다 마그네스도 말하였다. "유대국가의 실현이 만일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력에 의하는 것 외에는 불가능하다. ······ 아랍인들에게 유대국가 소리를 하는 것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유대국가는 그 정의에 있어서, 유대인이 그 유대국가 내의 거주하는 타 민족을 통치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온주의자 야보틴스키 역시 이전부터 이러한 분쟁의 가능성을 예견하였다. "자국을 스스로 내놓을 국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의 경우에도 힘으로 강점당하지 않는 한 주권을 포기할 리가 없지 않은가?" 결국 그는 시온주의자들로부터 파문당하여 추방되고 말았다. 아인슈타인 역시 "시온주의는 권력이 아니라, 고결함에 목표를 둔 민족주의이다."라고 하여, 보다 평화 지향적인 국가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1897년 시온주의의 아버지 헤르츨이 선언한 "팔레스타인에 공법(公法)으로 보장되는 유대 민족을 위한 고향을 세운다."라는 시온주의 선언과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에서 유대국가의 건립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라는 선언 사이에는 분명한 상이점이 발견된다. 이처럼 처음부터 시온주의자들의 독립 운동은 팔레스타인의 분쟁을 태생적으로 잉태하고 있었으며, 그 책임 역시 그들에게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제국주의 분할 정책

여기에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와 팔레스타인국가를 각각 둔다."라는 1947년 11월의 유엔 결정은 결정적으로 팔레스타인의 영구 분쟁의 불씨를 낳고 말았다. 이들 열강들은 영국의 밸푸어 선언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처음부터 "비유대인들의 권리와 지위가 손상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입장이었고, 또 루스벨트나 트루먼 대통령도 "아랍과 유대, 두 민족에게 충분히 자문을 얻은 다음이 아니면 팔레스타인에 관한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을 것이며, 또 아랍측 이익에 반대되는 어떤 결정도 하지 않겠다."라고 확약하였던 바가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들 양자 간의 이해의 차이를 줄일 만한 어떠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두 민족 간의 상호 불신과 테러는 상황의 개선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오늘날 중동의 팔레스타인 문제는 영국 제국주의가 20세기의 시대적 특징인 식민지 해체 과정에서 그 끝맺음을 깨끗이 하지 못하고 남긴 몇 개의 유산 중 하나이며, 그 영향은 현재 중동 정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적 관심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라는 엠마누엘 주장은 설득력을 가진다.


생존권 투쟁과 인권

PLO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이스라엘을 보는 기본 입장은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시온주의 운동이란 다름 아닌 아랍 오리엔트에서의 제국주의의 목표와 결부된, 유대인 자본가의 이익을 위해 가혹한 시련을 겪은 민족의 감정을 이용하는 것이다. ······ 시온주의자들은 돈벌이와 제국주의적 정책을 위하여 자기 민족의 행복을 팔아먹은 것이다."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도 이집트 민중 세력 전국 회의에 제출한 헌장에서, "우리가 아프리카에 침투한 이스라엘 세력을 축출하려고 힘을 기울이는 것은, 바로 치명적이 될지도 모를 제국주의라는 암의 전파를 막기 위한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결국 갈등의 본질은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의 두 이데올로기가 대립하고 있는 것이지, 두 인종이 대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반유대주의 정책의 희생자들인 난민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느냐? 아니면 유대 민족 국가의 부활로 보느냐?에 따라 이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이나 다른 제국들의 자본가들과는 전혀 무관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들과 부분적으로 결탁하였음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결코 그들의 조종을 받은 자들로 규정될 수는 없다. 그들은 다만 "우리는 어디를 가나 국외자이다.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가자."라고 했던 것이다. 이들의 생존권 문제는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전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자기들의 오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귀향'이라는 꿈과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비어 있는 땅'을 찾아온 것이며, 그 곳은 그 시대에 영국의 식민지였을 뿐이다. 문제는 헤르츨의 선언과 밸푸어 선언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약 2000여 년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씻는 명예 회복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방랑과 수난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이다.

국가 없던 이스라엘의 흩어진 백성들의 생존권이 보호되어야 하듯이, 역시 팔레스타인에 나라 없이 살던 원주민들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들도 인간이며, 다른 인간과 마찬가지로 가정과 국가를 가질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수천 년 전체 조상들이 살았던 토지를 다시 소유하는 것은 정당하다."라고 말한다면, 지구상의 모든 식민지 통치자의 행위가 정당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1961년 1월,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서 개최된 공개 토론회에서 행한 역사가 토인비의 견해는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1947년, 유대인이 아랍인에게 취한 태도는, 나치스에 의한 600만 명의 유대인 대학살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 인간 생활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은, 예전에는 고통을 당한 사람들이 이번에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