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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유대인 대학살

淸山에 2013. 6. 6. 20:30

 

 

 

 

제5장 유대인 대학살

 

1.1920년대 독일에서의 반유대주의의 발흥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 황제의 퇴위, 공산주의 혁명의 위협, 굴욕적인 베르사유 조약, 그리고 서방 연합국에 지불해야 하는 엄청난 보상금 등이 독일인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배로부터 반유대주의의 선동은 중요한 정치적 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많은 단체들이 반유대주의 선동에 동조하였으며, 특히 독일 민족당(Deutsche - nationale Party)이 선두에서 이 일을 진행하였다. 이 당은 1920년에 66석에서 1924년에는 96석으로 의석수가 놀랄 만큼 증가하였다.

 

 

가장 극단적인 반유대주의자들이 이 당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일 민족 사회 노동당과 연합하여 당을 만들었으며, 이 당의 지도자가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의 독일의 대장이었던 루덴도르프의 지원을 받았으며, 곧 권력을 장악하였다. 독일에서의 반유대주의 정당들은 많은 출판물 등을 통하여 소위 '과학적인' 반셈족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이론은 전쟁과 위기를 경험한 이후 형성된 독일 내의 비합리적, 반민주적 무드를 반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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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Source=German Federal Archive (Deutsches Bundesarchiv)]

 

특히, 아시리아의 학자였던 델리체는 1920년에 출판한 『위대한 착각』이라는 에세이에서, '바벨(Babel)과 바이블(Bibel)'의 이론을 제시하면서, 성서는 바빌로니아 문화의 모방 이상의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유대인을 비도덕적인 범법자들로 보았으며, 그들이 말하는 신(神)은 단지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의 풍자에 불과한 것으로 멸시하였다. 또, 한스 구엔테르는 1922년에 출판된 『독일 국민의 인종적 기원』에서, 독일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잡종인 유대인과 비교하여 서술하였다. 그 밖에도 많은 반유대적인 소설이 나왔으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서 딘터의 『피를 거스른 죄』였다.


2. 반유대적 선동과 나치의 부상(浮上)

1929년의 세계를 휩쓴 대공황의 바람은 독일에도 불어닥쳤다. 이와 함께 좌 · 우파 간의 충돌이 잦아졌으며, 나치는 이를 틈타 정치적 세력을 구축하였다. 1930년의 선거에서 6천 4백만 명의 지지를 얻은 나치는 독일 연방 의회 하원(Reichstag) 107석을 확보하였다. 1932년 7월에 실시한 선거에서는 전 국민의 37%인 1400만 명의 지지를 얻어 230석의 하원 의원을 확보하여 단연 최강의 정권이 탄생하였다.

1933년 1월 30일, 정부를 이양받아 독일 수상이 된 히틀러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반대자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1933년 3월에 실시한 하원 선거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44%의 지지를 얻어 228석을, 같은 해 말에 다시 실시한 선거에서는 다른 정당들을 모두 해산시켜 버리고 나서 92%의 지지를 얻어 일당 독재의 길을 열어 놓았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계획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20세기의 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독일 내의 기생충 같은 유대인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것이었다. 즉, 이들의 슬로건은 '유대인을 처단하자.'라는 것이었다. 나치 정부는 유대인 지도자, 법률가 등을 체포하였으며, 유대인이 저술한 책을 불살랐고, 유대인의 상점과 공공 건물에 방화를 하였다. 특히, 율리우스 슈트라이커의 신문 「Der Stiirmer」는 셈족에 대한 폭력적인 공격을 찬양하였던 대표적인 언론이었다.

1935년 6월에 독일 의학 협회에서는 의학 잡지에 "유대인과 결핵균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유대인을 숨겨 주는 모든 이들에게 결핵 감염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독일인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박멸되어야 할 열등한 종자나 '해충' 또는 세균과 같은 것이어서 근절되지 않으면 조직을 파괴하고 독을 퍼뜨리는 생물체로 취급되었다.


3.뉘른베르크법과 독일계 유대인의 반응

 

 

나치 정권이 들어선 첫 2년은 그런 대로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독일인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동정을 샀으나, 1935년 9월 15일에 제정된 뉘른베르크법의 선언은 모든 유대인들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시켜 버렸다. 이 법에 따르면, 독일 안에서 정치적 권리는 아리안족의 혈통을 가진 자만이 가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같은 날 하원에서는, '독일인의 혈통과 명예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통과되어, 독일 국민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은 비유대인과 결혼할 수 없는 조항, 45세 이하의 비유대인만을 가정부로 둘 수 있다는 조항, 그리고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조항 등을 두었다. 이 법은 '유대인'을 '3대 조(祖) 내에 유대인의 피가 섞여 있는 사람'으로서 규정하고 있다.

뉘르베르크 인종법은 인종 분리, 경제 활동에서 유대인 배제, 국가 내의 시민 사회 및 시민권에 관한 나치당의 강령 및 독일의 전통적인 반유대주의를 실현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아직 독일 유대인의 삶에 대한 의지와 제도, 그들의 경제적 생존 토대까지 완전히 분쇄하지는 못하였다. 일련의 반유대주의 법률이 제정되고, 재산 몰수, 전반적인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8년까지 독일 내에 거주하던 유대인 중에서 1/3가량이 독일을 떠났으며, 이때부터 '노랑 배지'를 달게 되었다. 시온주의 신문인 「Jiidische Rundschau」는, "이를 영광으로 알고 노랑 배지를 달아라. 다윗의 별을 단 모든 유대인들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라고 쓰고 있다. 많은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독일 내의 유대인들의 고통에 동참하려는 운동을 유럽 각처에서 벌였으며, 이러한 나치의 박해는 유대국가 독립 운동에 부흥을 가져다 주었다.

1938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독일에 살고 있는 350,000명의 유대인과 함께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던 190,000명의 다른 유대인들에게 법적 식별, 토지 몰수, 강제 이주, 그리고 대량 멸절을 위한 강제적 집단 거주 등의 조처를 취해 나갔다. 그 해 4월, 독일 영토 내에 살고 있는 5000마르크 이상의 재산을 가진 모든 유대인들은 신고를 하도록 하였으며, 7월에는 모든 유대인의 의사 자격증을 박탈하였고, 9월에는 변호사의 자격증도 박탈하였다. 8월에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식 이름을 더하였으며, 모든 유대인 여자의 이름에는 '사라'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1938년 11월 7일, 나치에 의해 독일로부터 폴란드로 추방된 부모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던 젊은 유대 청년인 그린츠판이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 침입하여 독일 참사관 한 명을 암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나치로 하여금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를 촉진시켰다. 11월 9일 밤, 400여 개의 유대인 회당과 7500여 개의 가게가 불타거나 파괴되고, 100여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3만 명 가량의 유대인이 체포되었으며, 유대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 - 깨진 유리의 무수한 파편들이 아침 햇살에 수정처럼 빛을 발한 것에서 유래했으며, 어둠 속에서 저질러진 만행을 역설적으로 말해 준다. - 이라 불리는 이 날은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의 신호탄이었다.

1939년 6월, 모든 유대인은 유대인 민족 연합회에 가입되어 게슈타포의 특별 조직에 의해 감시를 받았다. 이 일을 담당한 자는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이러한 나치 독일의 감시와 통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41년 10월 31일, 유대인 이민이 철저히 금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1939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150,000명의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났으며, 100,000명의 유대인들도 전쟁 발발 전까지 오스트리아를 빠져 나갔고, 30,000명의 유대인이 이민 금지 발표 이전에 더 탈출하였다.

 

 

 

노랑 배지를 단 유대인들

 

 


유대인 가게 봉쇄

 

 

수정의 밤(베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