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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시온주의 운동

淸山에 2013. 6. 6. 20:35

 

 

 

 

제4장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시온주의 운동

 

1. 영국 위임 통치하의 팔레스타인


제1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은 밸푸어 선언 직후에도 변화가 거의 없었다. 팔레스타인 내의 공식 언어는 영어와 아랍어였으며, 공식 언어로 히브리어가 첨가되는 것은 매우 귀찮은 일로 여겨졌다. 또, 팔레스타인에로의 이민은 여전히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918년, 시온주의의 공식 대표가 팔레스타인에 도착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정착촌(Yishuv), 보건소, 교육 기관, 도로, 항만 등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11개의 정착촌은 1918년 여름까지 모두 29개로 늘어났다. 이제 팔레스타인은 에레츠 이스라엘(Eretz Yisrael)로 불렸고, 청색과 흰색의 깃발, 공휴일로 안식일과 종교 절기가 정해지기도 하였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착지에 있는 젊은이들은 군사적 힘을 갖추기 의하여 1918년 2월에 1100여 명의 지원자가, 이집트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였다. 1919년부터 제3차 알리야(1919~1923)로 불리는 대규모의 이민이 시작되면서, 전쟁 당시 미국에 있었던 시온주의 지도자인 벤 구리온과 벤 츠비가 들어왔다. 벤 구리온은 당시 시온의 노동자들(Poalei Zion)과 청년 노동(Hapoel Hatzair)으로 나누어져 있던 노동 캠프를 하나로 연합하여 노동 연합(Ahdut Haavodah)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당시의 경제적 사정은 매우 어려웠으며, 영국 군정의 대표들과 시온주의 지도자들 사이에 종종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특히, 아랍인들의 공격은 유대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였다. 1920년 3월 1일, 아랍인들의 텔하이 공격에서 지도자 트럼펠더가 희생되었으며, 그 후 청년 자위대의 방어가 보다 본격화되었다.

 

2.국가 건설을 위한 투쟁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밸푸어 선언이 곧 국가 건설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다. 유대 기구는 먼저 영국이 통제하는 팔레스타인 발전 기구를 만든 후, 나중에 국가 연합이 관리하는 형태를 제안하였고, 바이츠만은 영국이 영국인의 국가인 것처럼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서둘러 보다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와야 한다고 맞섰다.

 

1919년 2월 27일에 유대인 대표들 - 바이츠만, 솔로코브, 우시쉬킨 등 - 이 모여 최고 연합 회의에 이민과 정착의 장려를 요청하였다. 이때 일부 지도자 중 레비 같은 사람은, 팔레스타인은 영토가 너무 좁아 수백만의 유대인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목표는 단지 팔레스타인 안에 자치 정부를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작가이며 지역주의자였던 쟁윌은 "유대 민족의 고향은 다수의 아랍인과 함께 사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이 당시까지만 해도 아랍인들의 방해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1919년 1월 3일에 있었던 바이츠만과 아랍 지도자 파이살과의 만남에서, "유대인은 아랍과 그 혈통이 매우 가까워 두 민족 사이의 갈등이 있지 않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하나이다."라며, "팔레스타인에 어떤 기구를 둘 때에는 반드시 1917년 11월에 영국 정부가 선언한 내용을 충실히 보장하는 선에서 모든 기준이 정해져야 한다."라고 하는 내용의 협의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협정에 대해 시리아 의회는 즉각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에서의 국가 건설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무효화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위임 통치를 하는 형태로 최종 결정이 되었다. 1920년 4월, 산레모에서 열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회합에서, 영국이 오스만 제국의 유산을 물려받아 통치하도록 결정하였다. 이 결정은 유대인들에게 보다 유리한 결정이었으나, 아랍 팔레스타인들에게는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셈이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지방 장관으로 친유대파 조지가 지명한 사무엘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국가 건설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정부는 1920년 11월 2일에 공식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위임 정부는 유대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밸푸어 선언을 수행하기 위해 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지방 장관인 사무엘은 이러한 일을 수행할 분명한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그의 주위에는 밸푸어 선언을 수행하는 것을 꺼려하며, 아랍인들의 요구를 들어 주도록 장려하는 군사 고문들이 있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로의 유대인 이민을 사실상 방해하였으며, 영국이 주는 기금보다는 시온주의 기구가 더 많은 발전 기금을 낼 것을 요청하였다.

 

영국의 위임 통치 지역(1921~1923)

 


여러 정치 단체나 민족주의 기구들에 속한 아랍인들은 영국의 정책과 유대인 이민에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러한 일은 영국 총독부의 군사 행정가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아랍인들은 예루살렘, 특히 구도시에서 많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살인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이 일에 맞서 젊은 자위 청년단을 조직하여 싸우던 야보틴스키는 영국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15년간의 형을 받고 복역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여러 시온주의자들 가운데는 독립적인 유대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이미 팔레스타인의 여러 지역에서 방어 의무를 수행하였다. 이들은 영국 정부에게 이들 스스로 유대 정착지를 방어할 수 있는 권한을 넘겨달라고 요청하였다. 결국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독립적인 유대 방어군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할 필요가 있을 때에 이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1921년 5월, 대규모의 아랍인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욥바의 이민 센터를 공격하여, 14명의 유대인을 살해하였으며, 다음 날도 43명의 유대인들을 살해하였다. 페타크 티크바도 공격하여 유대인들을 추방하였다. 유대인 자위대는 이에 맞서 정착지 방어에 나섰다. 폭동이 일어나자 영국 총독부는 유대 이민을 중지시켰고, 이에 맞서 유대 기구는 그들의 임무를 중단하였다. 임무의 중단은 영국 식민지 비서인 윈스턴 처칠이 이민 재개를 승낙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영국 총독부는 폭동을 조사한 결과 아랍인들의 공격 때문인 것으로 단정짓고, 몇몇 아랍인 경찰이 폭동에 참여한 것을 확인하였다. 유대 기구는 폭동이 일어날 경우 적절히 대응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들은 보다 조직적인 군사 훈련 기구를 두고 불법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 후 계속되는 아랍인들의 공격에 대해 하가나(Haganah, 자위대) 지도자들은 '공격에는 공격으로'라는 원칙을 하달하였다.

 

1921년 여름, 사무엘은 활동 보고서에서 아랍인들의 관심과 유대인들의 민족적 야망이 연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팔레스타인에 이룩하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야망은 현재의 거주자(아랍인)들의 권리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거주자의 권리'란, 유대국가 건설을 반대하는 모든 아랍인의 권리를 말한다. 이 정책이 나오면서 전 아랍인들의 반대 투쟁은 더욱 격렬해져 갔다. 이 결정은 예루살렘에서 아랍 민족주의를 이끌어 오던 후세이니를 더욱 자극한 셈이 되었다. 이들의 투쟁 목표는 아랍 민족 독립을 위한 열망과 유대국가 건설에 대한 증오와 우려였다. 아랍 지도자들은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땅을 매매하는 일을 엄격히 금지시켰다. 1921년 3월, 처칠이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였을 때 아랍 민족주의를 이끌던 후세이니의 아들 압둘라에게 요르단 강 동편을 그에게 줄 것을 약속하였다. 이 협상의 모든 내용은 다음 해 여름에 출판된 『처칠 백서』에 요약, 강조되었다.

 

이 정책 선언은 밸푸어 선언에 대한 위임 정부의 협력을 강조함과 동시에 아랍인들의 자치 기구 설치를 아울러 약속하고 있었다. 또,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에로의 이주는 국토의 경제적 수용 능력에 따라 허가될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이것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을 '영국이 영국인의 것인 것처럼 팔레스타인이 유대인의 것'이라는 원칙에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1929년에 발표된 파스필드 백서에서, 영국 정부는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을 각각 인정하였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아랍인들과 더불어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하였다. 특히 유대인은, 이 백서가 밸푸어 선언의 원칙과 맞지 않는다며 총독부를 비판하고 나섰다. 급기야 바이츠만은 이 백서가 유대 민족의 희망을 고갈시켰다는 시온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아 유대 기구의 의장직에서 사임하였다. 또, 1938년 11월에 발간된 백서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각각 다른 독립 국가 건설은 정치, 행정, 재정적으로 실천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들이 들고일어나자 1939년 5월에 선포된 백서에서는 "팔레스타인이 유대국가가 되는 것은 영국 정부의 정책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영국 정부는 10년 내에 하나의 독립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울 계획임을 천명하였다. 이 백서가 나오자, 1939년 8월 제네바에서 열린 제20차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 구리온은 영국 정부에 일체의 협조를 하지 않을 것을 제안하였다. 이 회의가 끝난 얼마 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독일의 유대인 박해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시온주의자들과 영국 정부 사이의 긴장은 유대국가 건설을 위한 과정에 중대한 장애를 가져왔으며, 영국 정부의 정책은 시온주의자들에게 있어 결코 동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온주의자들과 영국 정부의 갈등은 영국 정부로 하여금 팔레스타인에 두 민족의 생존권 보존을 위한 분할 계획을 가지도록 해 주었다. 즉, 지중해 연안, 갈릴리, 이스라엘 골짜기, 예루살렘, 베들레헴, 욥바를 포함한 지역에 유대인 국가를, 에브라임 산지, 유대 산지 및 네게브 지역에 아랍국가를 건설하는 계획이 세워지게 된다. 이 계획이 세워지면서 영국 정부는 아랍국가 건설로 예정된 지역의 땅을 유대인에게 매매하는 일을 금지시켰으며, 1938년 3월에는 유대인 이민을 연간 8000명으로 제한하기로 결정하였다. 유대 시온주의자들은 영국 정부의 이러한 제안을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있어서 '아랍 팔레스타인에서 소수의 유대인으로 남는 것보다 작은 유대국가 내에서 다수의 유대인으로 남는 것'이 보다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내외적인 변화와 갈등이 계속된 것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정착지는 계속 늘어 갔다. 정착촌의 인구는 10년 동안 160,000명으로 늘어났으며, 1929년의 조사에 따르면 110개의 농업 정착촌과 37,000명의 농업 종사자가 활동하였다. 1920∼1929년 사이의 이민자는 약 100,000명에 이르렀다. 그중 1925년에는 30,000여 명이, 1927년에는 2713명이 들어왔으나, 경제 사정이 악화되기 시작한 1928년에는 2178명이 들어왔으며, 오히려 2168명이 에레츠 이스라엘을 떠났다.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정착촌

 


한편, 230여 개의 학교에서 21,000여 명의 학생이 교육을 받았고, 예루살렘의 히브리 대학에는 약 200여 명의 학생이 있었다. 30,000여 명이 의료 보험의 가입자가 되었고, 사망률이 세계 최저를 기록하였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히브리어가 보다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히브리 대학을 비롯한 전 교육 기관의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히브리 문화의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이민은 더욱 급증하여 총 인구가 1933년에 250,000명이던 것이 1939년에는 500,000명으로 늘어났으며, 120,000명의 농업 종사자와 68개의 키부츠, 71개의 모샤브가 자리잡았다. 히브리 대학에 1000명의 학생이, 하이파에 세워진 공과 대학에 약 500명의 학생이 입학하여 연구하였다.


연도별 이민자 수

알리야연도이민자 수(명)

제1차 알리야

1882~1930

20,000~30,000

제2차 알리야

1904~1914

35,000~40,000

제3차 알리야

1919~1923

35,000

제4차 알리야

1924~1931

82,000

제5차 알리야

1932~1948

265,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