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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온주의 운동의 지역 연맹과 활동

淸山에 2013. 6. 6. 20:48

 

 

 

 

 

 

3. 시온주의 운동의 지역 연맹과 활동

 

 

유대인들의 해방운동 확산

러시아

러시아는 시온주의 운동의 본산지라고 여겨질 만큼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러시아의 시온주의자들은 헤르츨이나 울프슨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러시아의 법적 테두리 안에서 그들의 활동이 제한받았기 때문에 건설적인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1905년 이후에 시온주의자들 중의 일부는 러시아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으며, 보다 많은 에너지를 이 운동에 사용하였으나 1905∼1906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큰 억압을 받게 되었다.

 

독일 

독일에서의 시온주의 운동은 러시아와 같은 장애는 없었다. 1897년, 첫 연맹 회의가 쾰른에 세워진 이래, 울프슨, 보덴하이머 같은 지도자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세겔의 지불인'이라 불리는 시온주의 운동 기금의 기부자들은 1901년의 1300명에서 1914년에 8000명으로 늘어났다. 이 숫자는 미국, 러시아 다음으로 많은 숫자였다. 블루멘펠트는 독일의 설득력 있는 지성인으로서, 시온주의 운동 밖에서 저명한 사람들의 지원을 이끌어 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1909∼1911년까지 독일 연맹의 비서였으며, 후에는 세계 기구의 비서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에서의 시온주의 운동은 이 운동에 연합한 소수에 비해 다수의 반대자들이 있었다. 적어도 당시 독일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비해 반유대주의 현상이 매우 적었다. 독일이 법치 국가로서, 정당한 법의 절차 없이는 어떤 시민도 체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블루멘펠트가 모든 시온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준비하라고 선전하였을 때, 유대인들은 그가 인위적으로 독일 유대인들의 뿌리를 뽑으려는 정책을 시행하려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독일에서는 적어도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시온주의자들의 이상이 그렇게 매력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영국 

헤르츨은 항상 영국을 특별히 중요한 나라로 강조해 왔다. 그가 1895년 9월, 런던의 한 작은 유대인 협회에서 유대국가 건설에 관한 그의 이상을 발표하고, 1896년 7월에 유대 군중과 처음으로 만난 이래, 그는 런던을 그의 외교 무대로 삼아 왔다. 물론 처음에 로스차일드나 다른 영국계 유대인들은 헤르츨의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러나 헤르츨의 제자들은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들은 영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헤르츨 이전부터 영국에서는 '시온을 사랑하는 자들(A Lover of Zion)'의 운동이 몽테피오리나 몬테규, 아비그도르 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일을 위하여 플라톤적인 애정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허버트 벤트비치나 쟁윌 같은 이들은 1897년에 '마카비 순례단'을 조직한 자들이었다. 1898년에는 앨버트 골드스미스가 주동이 되어 영국 시온주의 연맹을 결성하였다. 이 운동에 협조하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동유럽에서 막 건너온 사람들로서, 몽테피오리, 코웬, 그린버그 등이 헤르츨의 협조자였으며, 그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정치적 시온주의자들로 남아 있던 자들이었다.

영국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이 운동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냉담하였고, 어떤 이들은 비판적이기까지 하였다. 우간다 제안 부결(제7차 시온주의 총회, 1905) 이후 지방주의자(Territorialists)들의 운동이 약화되자, 이들은 오히려 지방주의를 찬성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간다 제안을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는 전단계로 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 운동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헤르츨을 지지하는 자들과 이념을 달리하는 자들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어, 1909∼1910년에는 급기야 아무도 이 연맹을 이끌어 갈 의장을 뽑지 못할 정도였다. 1912년 이후에 젊은 지도자들 - 시몬, 벤트비치, 샤커, 시에프, 마크 등 - 은 1904년 이래 맨체스터에 살고 있던 당대의 지도자 바이츠만과 함께 이 운동의 재개를 선언하였다. 이것이 '맨체스터 시온주의 학파'이다. 이로써 과거의 낡은 갈등은 사라지고 새로운 연합 운동이 시작되었다. 1914년에는 영국 시온주의 연맹이 모두 50개의 지부를 가지게 되었다.

 

미국

헤르츨이 시온주의 운동을 제창한 이래, 미국은 거의 이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은 더 이상 미국계 유대인들에게는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한 희망의 터전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고트헤일와 펠센탈 등 몇몇 유대인들만이 이 일에 동참하여 1898년 7월에 뉴욕에 연맹을 세웠다. 또, 1917년에는 당시에 미국에 있던 여러 단체들 - 히브리어 회화 클럽, 유대 교육 협회, 회당 기구 등 - 과 제휴하여 미국 시온주의 기구를 세웠다. 이 시온주의 기구는 유럽과의 지리적인 거리로 말미암아 얼마간 독자적인 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 운동은 주로 미국 동부가 중심이 되었다. 24세에 연맹의 의장이 되었던 랍비 스테판 와이즈, 팔레스타인에 일찍이 이주하여 살던 랍비 유다 마그네스, 그리고 물리학자였던 해리 프랜드발트, 연맹의 의장이 된 리처드 고테일 등이 중심 인물들이었다.

유럽에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미국 연맹은 브랜다이스가 주도해 나갔다. 그는 미국 법관 중에서 가장 존경받던 인물로서, 후에 미국 대법원장에 선출된 자였다. 그는 본래 유대인의 생활이나 문학, 전통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환경에서 성장한 자였으나, 유대인의 자기 동일성을 되찾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즉, 그가 시온주의 운동에 가담하게 됨으로써, 시온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곧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미국의 시온주의 운동이 브랜다이스에 의해서만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레빈은 유대 교육의 촉진을 위해 일한 자로, 아바 힐렐 실버, 엠마뉴엘 뉴먼과 주축을 이루어 '헤르츨 - 시온 클럽'을 만들기도 하였다.

1912년, 시온주의 여성 기구인 '하다사'가 설립되어 "팔레스타인에는 유대 기관과 기업을 세우고, 미국에는 시온주의의 이상을 촉진한다."라는 취지문을 선언하였다. 이 여성 운동은 오랫동안 헨리에타 쫄드가 이끌어 왔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나치의 학정에서 살아남은 젊은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청년 이민단(Youth Aliya)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1905년 7월, 요하네스버그에서는 남아프리카 시온주의 연맹이 탄생하였다. 이 곳은 20년 동안 계속된 운동의 결과로 4000명의 회원과 60개의 지부를 가지게 되었다. 이 연맹은 처음부터 헤르츨이나 울프슨에 대한 지지도가 매우 높아 1906년에 이 곳을 방문한 울프슨은 가장 열광적인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이 곳에서의 두드러진 결과 가운데 하나는, 유대 공동체 밖에서 시온주의 운동을 위한 매우 중요한 인물을 얻은 것이었다. 밀너와 스무츠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밸푸어나 로이드 조지처럼 시온주의 운동의 결정적 과오들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

결론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여전히 소수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널리 퍼져 나갔다. 카이로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로도스 섬에서도, 불가리아나 피지 섬에서도 시온주의 연맹이 세워져 활동하였으며, 캐나다, 튀니스, 스위스 등지에서도 시온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유대 민족 기금이 만들어져 세계로부터 작은 기금들을 모으는 일도 이때 시작되었다. 시온주의 운동은 잘 정돈되어 갔으며, 유대인 세계에 차츰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