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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헤르츨 이후의 변화들

淸山에 2013. 6. 6. 20:55

 

 

 

 

 

제2장 헤르츨 이후의 변화들

 

 

헤르츨이 죽은 후, 시온주의 운동은 탯줄이 떨어진 것처럼 힘을 잃고 말았다. 생전에 그는 많은 비판과 공격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가 죽고 나자 생전에 그가 노력하였던 많은 일들 - 콘스탄티노플과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다니면서 이룩해 놓은 외교적 노력 - 은 허사로 돌아가게 될 위기에 처하였다. 역시 그는 위대한 예언자요, 통찰력 있는 지도자였음이 확인된 것이다. 우간다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으며,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있는 이 운동의 구심점은 없어졌다.

더구나 러시아 시온주의 운동의 문제는 더욱 일을 복잡하고 방향 없이 만들고 말았다. 이들의 운동은 러시아 차르 정권 밑에서는 불법적인 운동이었다. 차르 정권의 법적 제재로 시온주의 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따라서, 유럽의 시온주의 운동은 그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헤르츨이 죽은 얼마 후, 그가 남긴 일기를 묶어 출판하자는 제의가 나오자 노르다우는, "그의 일기를 출판하는 일은 헤르츨의 이름을 몰락시키는 일이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바보스럽고 사기꾼이었는지를 알게 해 줄 뿐이다."라며 반대할 정도였다.

1905년 7월, 바젤에서 열린 제7차 시온주의 총회에서는 우간다 제안이 공식적으로 부결되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실용적 시온주의자(practical Zionist)'의 의견이 수렴되었다. 이들은 "디아스포라의 현재적 상황 내에서 가능한 일을 하자."라는 실용주의적 입장에 서 있는 자들로서, 이러한 일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정치적 협상을 통한 총체적 완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유대인에 대한 정치적, 정책적 결정을 위한 노력보다 중요한 것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농업을 개발하고, 학교를 건설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헤르츨은 어떤 드러난 성공도 없이 20년 가까이 이들의 주장을 반대해 왔었다. 그는 늘 팔레스타인에 대규모의 개척만을 꿈꾸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동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적은 돈과 인력을 가지고 작은 규모의 개척지를 확보하면서 점진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 단지 자원을 낭비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정착자들의 안전이나 터키인들의 박해가 문제이긴 하지만.

헤르츨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보증을 받기 전에는 한 사람도, 1페니도 오스만 제국을 위해 쓸 수 없다."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큰 정치적 해결을 무조건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일괄 타결이라는 해결책을 얻기 전까지는 모든 프로젝트는 뒤로 미루어야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다른 실천적 작업(Gegenwartsarbeit) - 작은 규모의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일 등 - 을 진행하고 있는 많은 이들의 생각을 무효화시켰다. 이러한 '참여자'들도 물론 헤르츨의 원칙을 반대했던 것은 아니나, 적어도 '포괄적인 특허권'을 얻는 것보다 유대인의 현재의 위상을 보다 강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고 본 것이다.

이 문제는 제7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협상하여 그 종결을 보았다. "시온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에서 농업과 산업을 통하여 유대인의 지위를 공고히 해 나감을 원칙으로 삼는다."라고 선언하였다. 이 일을 위해 새로운 대표로 실용적 시온주의자인 바르부르크 교수, 우시쉬킨, 그리고 코간 번스타닌을 선출하였으며, 정치적 시온주의자 쪽에서 그린버그, 칸, 그리고 마르모렉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상임 위원회의 의장으로 울프슨이 선출되었다.

 

1. 다비드 울프슨

49세의 젊은 나이로 상임 위원회 의장이 된 울프슨은 시온주의 운동을 보다 젊게 이끌어 갔다. 그는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유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젊어서부터 시온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유대인들이 결코 시들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헤르츨은 그를 최고로 인정하여 후계자로 여겼었다. 그러나 그는 헤르츨이 죽은 후에 실용적인 시온주의를 제창하였다. 울프슨은 헤르츨의 사상을 모방하기 위해 언제나 최선을 다하였지만, 인격이나 능력면에서 헤르츨을 따라가지 못하였다. 울프슨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는 평범한 교육을 받은 인간이지, 능력, 판단력, 박력, 리더십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정당하지 못하였다. 비록 그가 지적인 원대한 계획이나 새로운 큰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초기 시온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환상을 많은 경우에는 필요한 평형을 유지해 나갔다. 그는 헤르츨이 이룩해 놓은 많은 접촉들을 지속하였다. 파리에서 로스차일드와 밤버리를 만났으며, 콘스탄티노플에도 두 번이나 갔다. 1907년 10월, 오스만 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오스만 제국이 새로운 재정 위기에 처해 있던 때였다.

그 때, 그는 예루살렘이 아닌 팔레스타인에 5000명의 유대인 가족을 이주시키는 안(案)을 제출하였다. 그들은 오스만 제국의 신민(臣民)이 되어 군 복무를 할 것이며, 그 대가로 25년간의 세금 면제 혜택과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한 지역을 줄 것을 제안한 것이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빚을 갚기 위하여 2600만 파운드를 빌려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울프슨은 200만 파운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울프슨의 제안은 당시 시온주의 운동의 1년 예산이 4000파운드에 불과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무모한 것이었다.

1908년, 청년 투르크당의 혁명과 황제의 폐위 사건은 시온주의자들의 애국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커다란 변화는 많은 시온주의자들이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게 해 주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일을 위해 나설 사람이 없었다. 울프슨은 처음부터 아타투르크의 '청년 투르크당'과 협상을 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매우 망설이고 있었다. 1909년 6월 2일, 후세인과 협상하였으나 진전이 없었다. 그는 보다 큰 식민지를 팔레스타인에 만들고 있었다. 결국 다음 2년간은 협상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최종 통보를 받고 말았다. 오스만 제국 안에는 유대인 정착지를 만들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초기 시온주의자인 노싱은 결국 팔레스타인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노싱은 시온주의 운동과 결별하고 훗날 친독일 정보원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오스만 제국과 이탈리아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자, 시온주의자들의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오스만 제국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보다 많은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갔으며, 외국인이 땅을 매입하는 일이 보다 쉬워졌다. 「청년 투르크당(Jeune Turc)」지(誌)가 이탈리아를 공격하고 나서자, 유럽의 시온주의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어떤 편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적어도 시온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때까지도 국제 정치적 감각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체로 시온주의자들의 외교적 대상은 독일이었다. 런던의 「타임즈(Times)」지는 '시온주의는 단지 독일 외무부의 노리개'라는 기사를 실을 정도였다. 1906년,
하임 바이츠만처음으로 밸푸어를 만났다. 1912년 여러 시온주의 운동의 지도자들도 런던에 와서 영향력 있는 많은 정치가와 접촉하였다. 프랑스는 거의 매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고, 폴란드에서는 시온주의자들이 추방되었다는 뜬소문이 나올 정도였다. 1910년 러시아에서는 여러 명의 시온주의 책임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사무실은 불법 모금의 죄목으로 폐쇄되어야 했다. 러시아에서의 시온주의 운동은 러시아 혁명 이후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면서 반유대주의의 세력이 확산되어 갔다.

 

2. 종합적 시온주의

시온주의의 목적에 관한 토의는 오스만 제국에서의 혁명 이후에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울프슨은 다소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였으나, 1905년 제7차 시온주의 총회의 새 의장으로 선출된 노르다우는 오스만 제국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면서 외교적 노력을 통한 총체적 타결이 보다 현실성이 커졌다고 주장하였다. 상임 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된 울프슨은 7인 위원회를 두고, 각 지방 의장을 두었다. 런던에 그린버그를, 헤이그에 네덜란드의 은행가인 칸을, 파리에 마르모렉을, 베를린에 바르부르크를, 오데사에 코간 번스타인을, 그리고 에카테리노슬라프에 우시쉬킨을 각각 임명하였다. 이로써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실용주의자들과 정치적 시온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써 제8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바이츠만이 사용한 종합적 시온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팔레스타인 내의 정착 행위를 정치적으로 협상이 끝난 이후로 미루지 않는다."라는 결정을 하였다. 이에 따라 크고 작은 이주가 계속되게 되었으며, 나아가 여전히 큰 성취를 위해 노력하되, 이 목표는 실천적 노력에 의해 얻는다는 원칙을 정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1904년부터 1914년 사이 제2차 알리야(이민)로 불리는 기간에 약 35,000~40,000명 가량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갔다.

새 지도자가 된 바르부르크는 식물학 교수로서, 이 운동에 적(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농업 정착을 강조하였다. 레빈은 시온주의 세대의 교육가로서 가장 높은 덕망과 영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나훔 소콜로프는 가장 영향력 있는 문필가로서 자칭 바이츠만의 제자였고, 중요한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야콥슨은 콘스탄티노플의 시온주의 운동의 첫 대표자로서, 러시아에서의 시온주의 운동을 일으킨 자였으며, 1913년 제1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울프슨은 제11차 시온주의 총회(1913년 9월 2~9일)에서 "다음 총회에서 뵙자."라고 하였으나, 그에게는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얼마 동안 중단된 후, 제12차 시온주의 총회가 열리던 1921년까지 그는 살아 있지 못하였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14년 9월에 제2대 시온주의 운동의 의장은 죽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