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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디아스포라의 유대 사회와 문화

淸山에 2013. 6. 6. 21:34

 

 

 

 

 

제1장 디아스포라의 유대 사회와 문화


성전 멸망 이후 유대인들의 삶은 총체적으로 '떠돌이 생활' 그 자체였다. 제1차 성전 멸망으로부터 시작된 유랑의 세월은 바빌로니아를 중심으로 한 근동 지방을 비롯하여 이집트, 북아프리카로 이어졌으며, 제2차 성전 멸망과 이어 계속된 제2차 유대 반란은 로마 세계 전체로 유대인을 분산시켰다. 그 후 비잔티움 제국의 유대인 박해와 무슬림의 추방은, 유대인들을 스페인을 비롯한 동유럽과 서유럽 지역에 이르기까지 확산시켜 놓았다.

 

이들 디아스포라(Diaspora)1)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과 어느 정도의 교류를 가지고 있었으나, 차츰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지위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지위보다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커 갔다.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는 예루살렘으로의 귀향이 하나의 이상이요 꿈이었다. 열강들의 영토에서 자신들의 법적, 종교적 지위가 약화되면 될수록, 시온에 대한 그들의 갈망은 더욱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이 한 쪽에서는 서서히 식어가면서 디아스포라의 신학을 정리해 나갔다. 즉,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문화와 전통 속에서 고유한 유대교의 전통을 어떻게 재해석해 나가며 정착해 나가느냐 하는 현실적인 삶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정립해 갔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속해 있는 문화에 차츰 동화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다른 한편 타문화를 거부하며 박해와 죽음까지도 감내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다양한 디아스포라의 삶은 각 지역의 정치적 변화와 문화적 변동과 더불어 그 방향을 결정해 나가야 했으며, 이러한 삶의 방식은 적어도 현대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각주

1.1) 디아스포라(διɑσπορɑ)라는 용어는 본디 그리스어로, '이산(離散)'을 의미한다. 이 말은 히브리어 '갈룻()', 즉 강제로 분산된 유대인들의 역사를 설명하는 용어이다. 제1차 성전 멸망(586 B.C.E.) 이후 시작된 '이산'은 현대 이스라엘의 독립(1948년)에 이르기까지 약 2500여 년의 기간을 통칭한다.


 

1. 유럽의 유대인 - 아슈케나지

아슈케나지(Ashkenazi, 복수형은 아슈케나짐)는 성서에서 야벳의 자손 중 고멜의 후예이다(창세기 10:3, 역대지상 1:6). 지금의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 북부에 모여 살던 이들은 커다란 왕국을 이루며, 바빌로니아를 치기도 하였다(예레미야서 51:27). 바빌로니아 탈무드에 나오는 고메르(Gomer)는, 비록 그 이름이 북서부 시리아의 게르마니카를 가리킨다 하더라도, 바로 게르마니아(Germania)를 묘사하고 있다(cf. b. Yoma 10a). 이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하였는지에 관해서는 불분명하지만,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에서 이 용어는 북서부 유럽 및 동부 및 남부 유럽에 정착하여 살던 유대인 공동체를 총괄적으로 묶어서 부르는 이름이 되었다.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 살던 유대인들이 아슈케나지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아슈케나지의 문화적인 뿌리는 남부 이탈리아와 북부 프랑스였다. 12세기 야콥 벤 메이르 탐(Jacob Ben Meir Tam)은 아슈케나지의 문화를 일으켰다. 특히, 이 지역의 유대인들은 전통적이고 근본적이며, 엄격한 유대 사상과 관습 등을 지켜 나갔다.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다양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 이들은 외적인 영향보다는 내적인 전통을 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특히, 성서와 탈무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 나갔다. 이들에게 있어서 연구의 주된 관심사는 할라카적인 원리를 찾으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성서의 주석적인 활동이었다. 아슈케나지의 이와 같은 노력과 전통은 유대교의 학문적 전통의 뿌리가 되었다.

 

15∼16세기 서유럽의 유대인들이 동부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이 보헤미아, 모라비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지로 옮겨 갔다. 그들은 히브리어와 독일어를 합성하여 자신들이 고안해 낸 이디시어(Yiddish)를 사용했으며, 이 언어를 사용하여 많은 제의시(祭儀詩) 등을 창작해 나갔다. 15세기 스페인의 유대인 학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세파르딤)이 동유럽으로 이주해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아슈케나지의 인구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곳에서도 1648년의 폴란드 대학살 및 18세기 러시아의 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미국 등지로 흩어져 분산되어 갔다.


 

2. 아시아의 유대인 - 세파르디

역사적으로 세파르디(Sephardi, 복수형은 세파르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던 유대인의 후예들을 일컫는다. 이 단어는 히브리 성서 오바댜서 1장 20절에 나오는 단어로서, 스페인을 일컫는 라틴어 '히스파니아(Hispania)'와 동의어로 보고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세파르디는 아슈케나지가 아닌 모든 유대인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전승에 따르면, 유대인의 스페인 진출은 솔로몬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의 역사적 근거는 찾을 수 없으며, 다만 711년에 이슬람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할 때에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이 곳까지 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적, 언어적으로 스페인의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의 유대인들과 교류가 있었던 증거가 있으며, 바빌로니아에 버금 가는 문학과 철학 등의 창작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1148년, 알모하드의 박해 이후 스페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집중되면서 유대 공동체에는 적지 않은 압력과 박해가 가해졌다. 1391년 박해 때에 많은 유대인이 추방되거나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되었다. 또, 1492년에 유대인 추방령이 포고되면서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터키 등지로 떠나야 했으며, 이 칙령은 공식적으로 1968년까지 유효하였다.

 

적어도 중세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역사에서 세파르디의 인구가 아슈케나지와 비교할 때 약 십분의 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1) 그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의 문화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유대인의 새로운 전통을 많이 창출해 냈다. 또, 스페인어 또는 히브리어와 스페인어를 조화시켜 만든 라디노어(Ladino)로 된 성서 주석, 시, 드라마, 법전 및 신비주의 카발라 등 많은 문학 작품들을 생산해 냈다. 1553년에 라디노어로 쓰여진 페라라 성서(Ferrara Bible)가 가장 유명하다.


각주
1.1) 중세(c.1000~1492)의 유대인은 약 1650만 명에 이르며, 그중 약 1500만 명이 아슈케나짐이고, 150만 명 정도가 세파르딤으로 추정된다(Encyclopedia Judaica 14.1171).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