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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십자군 시대

淸山에 2013. 6. 6. 21:44

 

 

 

 

제3장 십자군 시대


성지가 이슬람에 의해 지배되던 때, 중세 유럽에서는 세속 군주와 성직자 사이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가고 있었다. 세속 군주들은 지배권을 강화함으로써 봉건적인 정치 구도를 깨뜨려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로 나아가려 하였으며, 성직 매매 등 교회 안의 부패를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성직자의 임명권까지 차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교황권을 강화하고, 교회의 일에 대한 세속 군주의 개입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렇게 해서 확립된 교황의 권위는 1095년, 교황 우르반 2세에 의해 소집된 십자군(十字軍) 운동의 시작으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그리스도교도 왕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주님의 적들에게 칼날을 돌립시다. 그 신성한 땅과 도시를 구합시다."라고 연설하였다.

 

십자군의 목표는 예루살렘 성지 탈환과 기독교 왕국의 재건이었다. 십자군은 1097년 7월 도릴라이움(Dorylaeum)에서 투르크 군대를 격퇴하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넜다. 이듬해 6월 안디옥을 탈환하였다. 람레를 거쳐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모습을 처음으로 드러낸 것은 1099년 6월 7일이었다. "하늘을 향해 손을 올리고 무릎을 굽혀 땅에 입을 맞췄다." 볼드윈(Baldwin of Bourg)과 탕크리드 장군은 베들레헴을 정복하고 남쪽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투르크의 수중에 놓여 있지 않았다. 1098년 이집트의 파티미드 왕조가 도시를 이미 점령하고,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에 대비해 튼튼한 성벽을 쌓아 두었다.


프랑크 군대는 70년 로마의 티투스가 공격을 개시한 대로 북쪽에 진을 쳤다. 노르망디의 로버트가 다마스쿠스 성문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동쪽 첫째 번 구역을 맡았다. 그리고 프란다스의 로버트가 그의 오른쪽을,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탕크리드가 욥바 성문 맞은편의 서쪽을 맡았다. 마지막으로 레몽(Raymond of Toulouse)이 남쪽이 보이는 서쪽 언덕에 배치되었다.

 

1099년 6월 13일 첫 번째 공격은 많은 희생을 내고 실패로 돌아갔다. 사닥다리를 타고 성벽에 올라 사라센과 육박전을 펼친 결과였다. 한동안 십자군은 빵과 마실 물이 공급되지 않아 고전하기도 하였다. 7월 15일 정오 공성기(攻城機)를 이용한 새로운 방식의 공격이 성공적으로 펼쳐졌다. 탕크리드가 가능한 한 포로들을 체포하라고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후와 저녁이 되자 십자군들은 자신의 힘을 통제할 이성을 상실하고 이슬람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포학한 학살을 무자비하게 자행하였다. 도시는 시체와 피로 가득 찼다. 이러한 학살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역사적 간격을 크게 벌려 놓았으며, 유대인들에게는 '순교자'에 대한 경외심을 낳게 함으로써 외적인 정치적 압력을 내적인 신앙심으로 견고히 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유대인들은 회당 문을 닫고 스스로 불을 질렀다. 무슬림 역사가 이븐 알 - 칼라니시에 따르면, 유대인 역시 프랑크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라틴 자료에 의하면 그 날 저녁 유대 지도자들은 아나스타시스(부활) 교회로 가서 울었다. "그들은 피 묻은 곳에서 깨끗한 새 옷을 걸치고 맨발로 걸어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밟고 지나간 거룩한 곳을 바라보며 울었다. 그리고 발치에 서서 한 지점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성전산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노예로 팔려 가거나 추방되었다.

 

정복한 영토는 재빠르게 재편되고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 부용의 고드프루아의 형 볼드윈 1세(1100~1118)는 트랜스요르단의 일정 부분을 지배하여 강력한 왕국을 세우고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 새 라틴 총대주교가 비잔티움 고위 성직자를 대신한 것이다. 라틴 교회는 예루살렘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아르메니아 교회, 콥트 교회, 시리아 교회 등 소수 종파들의 최고 종교 관할권을 비롯하여, 십자군에게는 '그리스인'으로, 무슬림들에게는 '루미(Rumi)', 즉 '로마인'으로 알려진 비잔티움 주교와 성직자들이 차지하고 있던 주요 성당을 장악하였다. 라틴의 등장과 함께 교회의 서열도 바뀌었다. 비잔티움 예루살렘의 총대주교가 키프로스에서 죽고 프랑크 다임버트(Frank Daimbert)가 예루살렘 대교구의 총대주교가 되었으나, 1101년 라틴 교회가 아나스타시스(부활) 교회의 성직자 관저를 차지하고 교회의 이름도 성묘(聖墓) 교회라 불렀다.

 

볼드윈 왕은 팔레스타인에 머물던 대부분의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회당과 사원을 파괴하였다. 또, 곳곳에 기념 교회와 요새 등 많은 건축물들을 남겼다. 이때 지은 건축물이 아부고쉬, 아스글론, 악고, 가이사랴, 티베리아, 헤브론, 예루살렘, 님루드 등에 아직까지 남아 있다. 십자군의 진출로 유럽의 많은 기독교 순례자들이 이 곳 성지를 방문하였다.

 

볼드윈 2세(1118~1131)는 라틴 왕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그는 총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무거운 세금을 가볍게 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의 시장에 야채와 과일이 넘쳐 흐르게 하였다. 또, 예루살렘의 인구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이마드 알 - 딘 젠기(Imad - al - Din Zengi)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이 알레포에 쳐들어와 도시를 장악하고, 1144년에는 에데사를 함락시켰다. 그 피해는 워낙 커서 서구에까지 알려졌고 1147년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는 제2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성묘 교회 앞뜰

 

 

성 베르나르(Saint Bernard, 1090~1153)가 이끄는 제2차 십자군 원정(1147~1149)은 처음부터 실패였다. 제1차 원정에서 돌아온 전사들은 자신들에 대한 라틴 국가들의 처우에 불만을 가지고 있어 동조하지 않았다. 제1차 십자군 전사들은 수니파의 지원을 받고 있던 바그다드 젠기의 후계자 누르 알 - 딘(Nur al - Din)의 팽창을 심각한 위협으로 보았으나, 제2차 십자군 전사들은 시아파의 다마스쿠스의 아메리 1세(Amery Ⅰ, 1162~1173)를 공격하였으나, 결국 1148년 다마스쿠스 정복은 실패하고 전사들은 고국으로 돌아갔다. 볼드윈 3세(1144~1162)가 아스글론을 점령하였으나 누르 알 - 딘의 공격이 재개되자, 결국 1154년 아메리 1세는 누르 알 - 딘의 진군을 막지 못하고 다마스쿠스를 새 주인에게 넘겨 주고 말았다. 새 주인은 '십자가에 의해 오염된 예루살렘을 정화하기 위하여' 설교단(minbar)을 바친 자였다.

 

1174년 누르 알 - 딘이 죽자 살라딘(Saladin)이라 알려진 그 유명한 쿠르드 출신의 장군 살라 - 알 - 딘 - 유수프(Salah - al - Din - Yusuf, 1174~1193)가 시아파를 누르고 통일된 시리아와 이집트를 상속받아 다스렸다. 살라딘은 유능한 지배자였고, 헌신적인 이슬람교도였으며, 훌륭한 전략가였다. 문둥병 왕 볼드윈 4세의 영웅적인 행위에도 불구하고 살라딘의 왕국은 우세를 지켜 나갔다. 1187년 7월 무능력한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1129~1194)이 이끄는 기독교 군대가 티베리아 호수 서쪽 언덕의 하틴의 뿔(Horns of Hattin)에서 한낮의 열기 속에 벌어진 야전(野戰) 전투에서 유례 없는 재앙을 겪고 괴멸하였다.

 

십자군이 입은 방어용 갑옷은 무릎까지 내려왔고 무릎 아래의 다리와 양 손은 별도의 사슬 갑옷으로 보호하였다. 원뿔형 투구는 안면 쪽에 틈이 있어 내다보고 숨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군마 역시 덮개로 된 쇠미늘 갑옷으로 보호되었다. 따라서 십자군 중장기병의 기동성은 무척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사라센의 주력은 궁기병이었는데, 십자군 기병들보다 가볍게 무장했고 말은 더 빠르고 몰기가 쉬웠다. 궁기병은 활 외에도 작고 둥근 방패와 짧은 창과 검과 곤봉을 소지하였다. 사라센의 경장기병의 우수한 기동성은 적시에 적을 급습하곤 하였다.

 

살라딘은 십자군을 거의 패퇴시키고 1187년 말경에는 거의 모든 라틴 왕국의 영토를 수중에 넣었다. 예루살렘은 이미 10월에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자비로운 대우를 받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즉시 제3차 십자군 원정대를 보내자는 설교가 확산되었고 '바바로사(Barbarossa)'로 일컬어지는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Frederich I, 1122~1190)가 1189년 독일에서 군대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그의 군대는 성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아시아에서 사라센에 의해 학살되고 말았다. 1191년 십자군 원정에서 프랑크 군대는 팔레스타인 해안의 악고와 욥바를 재점령하였으나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Richard Lion Heart)는 예루살렘 정벌을 주저하였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 이후의 십자군 원정은 타락상을 보였다.

 

13세기에도 십자군 원정은 계속되었다. 122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 1194~1250)는 욥바에서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 기독교인을 위한 촌락을 되찾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방어가 불가능한 열린 도시로서 사라센의 첫 번째 공격으로 패하고 말았다(1244). 이후 불행한 십자군을 이끈 프랑스의 왕 생 루이스(Saint Louis, 1226~1270)는 필연적인 종말을 약간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1249). 이집트의 술탄 베이바르(Beibars)가 프랑크에게 거친 일격을 가하였다. 1291년 성 요한이 이끄는 십자군의 마지막 숨은 악고에서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약 200년간의 라틴 왕국의 역사는 동방에서 이렇게 덧없이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이 통치하던 기간에 세워진 수많은 건축물들은 아직까지 예루살렘의 구도시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1099년 십자군의 대학살과 지배 이후 다시금 기독교인의 도시가 된 예루살렘에는 라틴계와 여러 다양한 종파에 속한 동방 계의 혈통이 친밀히 이종 교배되었으며, 특히 아르메니안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무슬림의 지위는 주인에서 종으로 완전히 뒤집혔다. 그들의 모든 건축물은 빼앗기고 모스크는 대부분 교회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비타협적인 행동은 새로 들어오는 십자군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십자군과 정착민 사이에 적대감이 생겨 서로 친교하기를 꺼려하였으며, 서로 다른 의식 구조는 기사단에 대한 법규를 만들어 낼 정도였다.

 

승리자 프랑크는 모든 노력을 '거룩한 무덤'에 집중하였다. 1009년 알 - 하킴이 파괴한 교회가 1048년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은 여전히 파손된 채로 남아 있어 재건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며, 1149년 7월 15일에 새 교회가 봉헌되었다. 이 날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50주년 기념일이었다. 콘스탄틴 IX 모노마쿠스(Constantine IX Monomachus)에 의해 재건된 둥근 아나스타시스(부활) 교회는 개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덤을 끼고 도는 작은 건물을 새로 지었으며, 건물 전체는 비잔티움 전통을 따라 모자이크로 치장하였다. 그 작업은 그리스 예술가가 담당하였다. 부용의 고드프루아와 그의 세 명의 후계자들이 이 곳에 묻혔다. 오늘날까지도 상당 부분 십자군 시대의 건축물을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시대 교회의 아름다움을 모두 상상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라틴 왕의 통치하에 지어진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세 개의 건축물로는 성묘 교회 다음으로 다윗 성채에 지은 왕궁이 있다. 볼드윈 1세는 하람(성전산)에서 살았다. 볼드윈 2세는 하람을 기사단에게 넘겨 주고 성채에 왕궁을 짓고 거기서 살았는데, 그 곳에는 왕을 극진히 섬긴 아르메니안 신앙인들이 이웃하고 있었다. 그 당시 아르메니아 총대주교는 성 야고보(Saint James) 교회를 세웠다.

 

기사단은 성묘 교회 근처에 세워져 있던 성 요한의 형제 병원 자리를 군대 야영지로 삼았다. 기초가 파괴되고 옛 자리가 너무 비좁아 무리스탄(Muristan)을 개조해 넓혔다. 성 마리아 라틴 베네딕트회(12세기에 세워진 이곳은 오늘날 루터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가 이웃하고 있었다. 오늘날 무슬림 구역인 북동쪽 지역은 당시 기독교 시리아인들의 거주지였다. 성 아그네스 교회, 성 엘리아, 성 마가렛 교회 등이 들어섰다.

 

그러나 십자군 시대 가장 중요한 교회는 고대 베데스다 연못이 있었던 곳에 세워진 성 안나(Saint Anne) 교회였다. 볼드윈 1세의 부인 아르메니안 여왕 아르다(Arda)가 합류했을 때에는 아주 작은 종교 공동체의 센터였다. 여왕은 수도원에 거금을 기부하여 두 개의 교회를 짓도록 했으며, 1135년에 완공되었다. 하나는 옛 베데스다 연못 쪽에 지었으며, 다른 하나는 동굴 위에 지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그 곳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오늘날 성 안나 교회의 화려한 장식들은 파손되었으나 건물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십자군 시대의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도시 한복판에만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었다. 비잔티움 시대의 예배 처소마다 교회를 복구하거나 다시 치장하였다. 키드론 골짜기에 있는 성 구원 교회(Church of Holy Savior)가 겟세마네 바실리카를 대신하고, 처녀의 무덤(Tomb of the Virgin)이 여호사밧의 성모 마리아의 베네딕트 수도원이 되었다. (나중에 살라딘은 수도원 교회의 지하실 토굴을 없애고 거기에 왕비 멜리산데와 콘스탄스, 그리고 안디옥의 공주를 장례하였다.) 올리브 산꼭대기의 승천 교회 돔은 파괴된 임보몬(승천 교회)의 중앙에 재건되고, 도시의 북쪽에 성 스테반 교회와 성 나사로 교회를 다시 지었다. 성 나사로 교회는 나병 환자들의 부락이 되었다. 이 모든 교회들은 교단이나 수도회 혹은 왕자나 순례자가 증여하고 간 선물 등에 의해 유지되었다.

 

한편, 십자군은 하람(성전산)에 있는 두 개의 이슬람 사원을 파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즉각 자신들의 소유로 삼고 구조 변경을 단행하여 교회로 사용하였다. 십자군 시대의 기독교 성지 순례자들은 바위 사원을 솔로몬이 지은 '주님의 집(Templum Domini)'으로, 엘 악사 사원을 '솔로몬의 왕궁(Templum Solomonis)'이 있던 자리로 여겼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은 서방 세계의 성지 순례에 대한 열의를 일깨웠다. 예루살렘에 대한 열망은 불타오르고, 이 도시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은 드높아 갔다. 순례자들의 발길은 자꾸만 늘어갔으며, 와서 보고 배우며, 선물을 가져가는 일이 유행하였다. 그 결과, 유럽의 많은 교회는 성지에서 가져간 미심쩍은 성물(聖物)들로 넘쳐났다. 그러나 성지에서 온 모든 물건에 대한 이상한 애정이 도를 넘어 어떤 분별력 있는 사려나 비판이 결여되어 있었다. 비잔티움 기독교도들이 성지를 찾고 존경심을 표시한 까닭이 예수의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흔적을 찾아 이를 신학적인 견해에 반영하여 수정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예배와 시편 낭송과 설교가 성지 순례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비하여, 십자군 시대의 성지 순례는 매우 꼼꼼하고 건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순례는 짜여진 일정에 따라 안전하게 이루어졌으며, 기사단이 베두인의 약탈을 막아 주었다. 때로는 수도회마다 경쟁적으로 순례의 새로운 일정을 개발해 내기도 하였다. 또, 제5차 십자군과 함께 성지에 올라온 성 프랜시스는 순례자들의 신앙과 열의를 북돋워 주었다. 그들에게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은 서쪽(오늘날 욥바 문 근처의 다윗의 성채)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성 마리아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예수가 자기 어머니 마리아와 만난 곳을 지정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 고통당하던 예수를 기념하였다.

 

그러나 동방 교회의 전통은 안나와 가야바의 집 근처의 성전 북동쪽에서부터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다. 13세기 순례자들은 에체 호모(Ecce Homo)의 아치를 주께서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향하던 문이라고 확신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아치는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 세운 것이다.) 북아프리카 리비아의 구레네에서 올라온 시몬이 주님을 만난 곳과 베로니카의 베일에 얽힌 얘기와 관련된 장소도 이때쯤 확정되었다. 보다 많은 순례자들이 서쪽에서부터 시작하는 길보다 이 길을 많이 찾았다. 예루살렘이 이때보다 더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중요성이 인정되던 때도 없었다.

 

1187년 7월 4일, 살라딘은 프랑크 군대를 하틴의 뿔에서 제압하고 왕과 왕자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9월 20일 예루살렘은 다시 포위가 되자 기독교인들은 1099년에 벌어진 대량 학살에 대한 복수의 칼이 두려워 떨었다. 도시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발리안(Balian of Ghibilin)이 바위 사원을 파괴하고 도시를 황폐시키겠다고 협박하면서 마지막 필사적인 돌격을 해 오자, 살라딘은 공격을 중단하고 배상금을 받고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였다. 이 후 모든 라틴 성직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났다.

 

살라딘은 칼리프 오마르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이 건물을 보존한 것처럼 성묘 교회를 파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위 사원 위에 걸려있던 "십자가를 쳐 넘어뜨리자 프랑크족은 물론 무슬림까지 큰 울음을 터뜨렸다. 무슬림은 '알라는 위대하시다!'라고 소리쳤고, 프랑크족은 심히 괴로워 울었다. 서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 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여 약 200년간 예루살렘의 주인 노릇을 하던 십자군은 물러났고, 예루살렘은 더 이상 기독교도의 도시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였다.

 

적어도 십자군이 지배하는 세계 안에서는 유대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간에 자신들의 종교적 신앙을 지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살아 남기 위해서는 오직 개종만이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일부 유럽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도성을 만들고 외부로부터 방어하려 했으나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점차 유대인의 정치적·법적 지위는 쇠퇴해 가기 시작하였다.

 

십자군의 종교적 위세 속에서도 유대인만이 국교를 신봉하지 않는 자들의 대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교황과 황제와의 갈등 속에서 유대인은 언제나 교회 지도자들의 악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교회는 기독교 대중들의 유대인에 대한 폭력과 박해를 정당화하였다. 적어도 십자군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반기독교의 상징이었으며, 동시에 기독교에 있어서 유대교는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적이었다. 이러한 적개심으로 희생된 많은 유대인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죄 없는 희생양'이었으며, 동시에 십자군들에게 있어서는 '정당한 대가'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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