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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30년 전쟁: 광주사태 루머와의 투쟁記(1)

淸山에 2013. 5. 23. 13:14

 

 

 

 

 

나의 30년 전쟁: 광주사태 루머와의 투쟁記(1)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지난 5월22일 서울 근교 대학교에 강연하러 갔더니 문교부 高官 출신의 총장이 물었다.
       "광주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 맞죠?"
       "아닙니다. 거짓말입니다. 믿지 마세요.
       이 분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믿고싶었던 것이다.
       그날 밤 TV 조선 인터뷰에 나가서 북한군 개입설의 황당함을 설명한 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조작을 지적하였다.
       "북한군 개입설보다 더한 왜곡입니다.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가 무릅쏴 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들을 향하여 집중사격하는 장면은 완전한 조작입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는데 20대 여성 직원이 나에게 말하였다.
       "저도 그 영화를 보고 울었는데, 정말 사실이 아닙니까?"
       나는 "아, 광주는 아직 계속되고 있구나. 아직도 믿고싶은 것만 믿는 사람들이 많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이들이 많구나"라는 實感을 했다. 1980년 5월 이후 33년간 내가 기자로서 한 일 중 하나가 광주사태와 관련된 루머와 싸우는 일이었다는 식으로 정리도 되었다.
      
      
       나는 1980년 5월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에서 그 유혈사태를 취재했고, 그 뒤에도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경상도 출신인 기자는 그곳에서 취재를 하는 데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지역감정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아니란 느낌이 왔다. 계엄당국이 당초 광주사태의 본질을 지역감정 쪽으로 돌린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난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과격한 진압에 대한 거의 동물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신군부에 의한 金大中씨의 연행도 한 촉발요인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金大中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는 다른 구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리가 낮았다(그 뒤 검찰조사에서도 金大中씨가 광주사태를 조종했다는 說은 부정되었다). 

     


       『全斗煥 타도!』란 구호 뒤에는 『金日成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가는 시위자를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 주기도 했다. 무장 시위대의 교도소 습격사건, 무기고 탈취, 기관총 사격, 장갑차와 차량 돌진 등으로 계엄군을 몰아낸 뒤 광주를 장악한 이른바 「시민군」 지휘부는 軍紀를 비교적 엄정히 잡아 약탈 등의 피해는 최소화되었다. 

     


       20사단의 광주 탈환 작전은 희생자를 최소화한, 효율적인 것이었다. 기자는 5월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탈환된 직후, 구경나온 시민들 중에서 경상도 말을 하는 청년을 한 사람 알게 되었다. 그는 전남도청 2기동대 소속 전투경찰관(상경)인 南모씨였다. 경북대학교 정외과 2학년에 다니다가 입대했다고 했다. 그는 5월21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私服으로 갈아입고 달아났다. 다행히 고마운 아저씨 집에 숨어들어 7일간 지냈다는 것이었다. 南상경을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부동산 사업을 한다는 50代 초반의 광주 아저씨는 부인과 함께 기자를 맞아들이더니 푸짐한 점심대접을 해주면서 『제발 지역감정 치원에서 이 사태를 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南상경도 『공수부대원들이 몽땅 경상도 군인들이란 얘기도 틀렸고, 광주시민이 경상도가 밉다고 일어났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고 역설하면서 과잉진압의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기자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부산에 돌아와 광주시민들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때 부산의 일부 지역에선 경상도 사람들이 광주에서 당했다고 전라도 사람이 갖고 있는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군경(軍警)사망자 27명의 문제
      
       1985년 7월초 月刊朝鮮은 광주사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 南상경을 찾아내 다시 만났는데 대우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 南씨는 『지금도 저를 살려주신 그분을 찾아 뵙고 있다』면서 「광주 아버님」이란 표현을 했다. 그때 취재차 다시 광주에 내려가 보니 광주사태 사망자 유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한 정보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응어리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月刊朝鮮은 이 특집에서 취재기자 좌담회 기사를 실었다. 그 때 月刊朝鮮部에서는 기자 이외에도 吳효진, 趙南俊 기자가 광주사태 취재경험자였다. 당시는 안기부의 언론규제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공수부대」라는 말 대신에 「계엄군」이란 표현을 써야 했다.  

     


       기자는 이 좌담회 기사에서 과잉진압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부측 통계를 나열했다.
       『 계엄사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144명의 시민측 사망자 가운데 18%인 26명이 타박상 두부손상 자상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고, 23.6%인 34명이 19세 이하라는 겁니다. 14세 이하 사망자도 5명이고, 65세 노인도 있습니다』

     


       이 좌담회에서 月刊朝鮮 기자들은 그때 쟁점이 돼 있던 사망자수에 대해서 광주발 2000명說을 배척하고 정부의 191명說이 더 정확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대목으로 해서 月刊朝鮮은 광주에서 불매운동을 당하였지만 결국은 정확했음이 밝혀졌다.
       서울지검의 1995년 7월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93명이다. 민간인은 166명, 군인23명, 경찰관 4명이다. 이 통계에서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부분은 군경 사망자 27명이다. 軍警 사망자 27명이란 숫자는 「학살」이란 단어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기자가 시민측 입장에서 바라보던 광주사태를 공수부대 입장에서 취재하기로 한 것은 1988년에 접어들어 민주화의 물결에 따라 언론자유가 滿開하기 시작할 때였다. 광주사태 8년째가 되던 그 해 5월29일 오전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앞에는 30代 청년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광주사태 부상자들이었다.  

     


       20사단 출신 李明珪(이명규)씨는 5월27일 새벽 광주로 진입하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공수11여단 출신인 金東哲(김동철)·경기만(慶箕萬)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金殷鐵(김은철)·裵東煥(배동환)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동료들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났다.1980년 중반까지는 특전사와 육본에서 신경을 써주고 화환도 보내주곤 했는데 그 뒤로는 참배객도 수백명에서 수십명으로, 다시 수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열흘 전 광주 망월동 묘역에 모여들었던 수만 인파에 비해서 이곳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국가와 軍이 먼저 그들을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수부대원의 시각
      
       기자는 광주사태 현장에선 저승사자같이 보였던 공수부대원들을 그 뒤 수십명 만났다. 악귀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그렇고 그런 한국인이었다. 평균적 한국인보다도 오히려 더 순진하고 우직한 사람들이란 느낌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서 취재한 결과는 1988년 7월호 月刊朝鮮에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란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공수부대의 시각으로 본 광주사태는 기자가 시민측 입장에서 경험했던 사태와는 크게 달랐다. 광주사태의 출발점이 된 공수7여단의 광주투입. 申佑植(신우식) 당시 여단장은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2개 대대를 31사단에 배속시키고는 지휘계통선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31사단장이 직접 우리 여단의 대대장을 지휘하게 되었다. 과잉진압 운운하는데 군인은 명령대로 하는 존재이고, 그때의 시위가 불법행동이었음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