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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파라과이로 이민 가려 했던가?

淸山에 2013. 5. 20. 06:35

 

 

 

 

 

 

우리는 왜 파라과이로 이민 가려 했던가?
돼지, 생선, 광석 등으로 연간 수출 5400만 달러를 기록하던 시절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51년 전인 1962년 한국은 5481만 달러를 수출하였다. 품목은, 돼지 147만 달러, 생선 345만 달러, 마른 생선 249만 달러, 조개류 181만 달러, 쌀 893만 달러, 김 75만 달러 등 식료품과 산 동물 수출이 2185만 달러였다. 生絲(생사) 396만 달러, 고령토 및 흑연광 등 광석 269만 달러, 重石(중석) 337만 달러, 철광 385만 달러, 豚毛(돈모) 99만 달러, 한천 132만 달러, 무연탄 274만 달러 등 가공도 하지 않은 자원 수출이 1937만 달러였다. 兩者(양자)를 합치면 4122만 달러로서 전체의 75%였다. 한국은 천연자원이 부족한데 그런 걸 끌어모아 수출까지 하고 있었다. 요사이 북한 실정과 비슷하다.
      
      수출에 고심하던 당시 상공부 공업국장 吳源哲(오원철)이 어느 날 부하 과장 방으로 갔다. 嚴 모 과장은 일본製(제) 세계지리 대사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뭘 하고 있소?"
      "이민 갈 나라를 고르고 있습니다."
      "좋은 나라를 골랐소?"
      파라과이가 좋을 것 같습니다."
      "이유는?"
      "白人만 사는 인구 400만 정도의 나라인데, 기후 人心이 좋고, 특히 소(牛)의 수가 인구의 몇배나 되니 굶을 걱정은 없겠습니다."
      
      당시 필자는 부산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이민 수속을 한다고 가족들을 데리고 사진관에 가서 서류용 사진을 찍었다. 당시 아버지가 목표로 정한 나라가 파라과이였다. 나는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 몰랐지만 한국보다는 무조건 좋은 나라일 것이라 확신하고, 출국의 날을 기다렸다. 부산항을 떠나 南美(남미)로 가는 이민선이 그렇게도 부러울 때였다. 천만다행으로 수속이 제대로 되지 않아 나는 아직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있다.
      
      파라과이는 아르헨티나, 브라질에 둘러싸인 內陸國(내륙국). 면적은 한반도의 두 배, 인구는 약 660만(백인과 현지인의 혼혈이 95%). 국민소득은 구매력 기준으로 5827달러, 한국의 약 20%이다. 貧富(빈부)격차가 심한데, 下位소득자 10%가 가진 자산이 0.5%이다. 삶의 질(HDI) 랭킹은 111등이다. 한국은 12등. 1954년부터 1989년까지 44년간 독재자 알프레도 스트로스너가 통치하였다. 박정희의 경제개발 성공 비결을 장기집권에 돌리는 이들이 많은데, 장기집권해도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한 독재자가 훨씬 많다.
      
      1964년 朴忠勳(박충훈)이 상공부 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한국의 수출 전략은 원료를 수입, 이를 가공한 공산품을 해외로 파는 방향으로 바뀐다. 이해 수출 목표는 1억 달러.
      그해 8월 국무회의에서 수출이 1억 달러를 돌파하는 날을 '수출의 날'로 제정하고 매년 기념하기로 의결하였다.
      <상공부 당국자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年末을 꼭 1개월 앞둔 11월30일, 우리나라의 수출이 사상최초로 1억 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11월 말 현재의 수출실적은 1억139만2000달러였다.>(吳源哲, '한국형 경제건설' 제1편)
      
      미국 CIA 통계자료에 의하면 2011년에 한국은 세계 6위의 수출국이 되었다. 약 5520억 달러, 즉 47년 전보다 5500배가 늘었다. 중국이 수출 1위국이고 이어서 독일, 미국, 일본, 프랑스, 한국 순이다.
      
      인간말종에 가까운 자들이, 수출입국을 지휘한 朴正熙의 功(공)을 지우려고, "미국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고 억지를 부리는 동영상을 만들어 어린 영혼들을 더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