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아시아는 유사 이래 처음 맞는 새 질서를 맞이했다. 무엇보다 무주공산 중원에서 1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더 이상 외세 개입을 걱정하지 않고, 장개석과 모택동이 통일의 진검 승부를 펼칠 수 있었다. 중원의 100년 천하대란은 1949년 장개석이 대만으로 탈출함으로써 완결되었다. 해군이 없었던 모택동은 발을 두어 번 구르고 자금성에서 천자(天子)의 대관식을 가졌다.
모택동도 맥아더가 동조(東條 도죠)의 무릎을 분질러버리지 않았으면 통일은 꿈도 못 꾸었다. 만주의 관동군과 중원의 일본 원정대는 장개석의 계란과 모택동의 모래에게 바위요 철벽이었다. 제갈공명이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소수의 날랜 병력을 이끌고 조조의 백만 대군을 주머니 속의 공깃돌처럼 갖고 놀았다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희망 섞인 소설이듯이, 모택동이 1만2,000km 대장정 기간 동안 16자 전법(戰法)으로 마치 장개석의 대군을 전투 때마다 골탕 먹였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중국공산당이 지어낸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 대장정이 끝나자 30만 군대가 고작 3만 명밖에 안 남았다. 더군다나 모택동이 실지로 거느린 군대는 패잔병 8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은 그가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여 대파국 일보 직전에 있었던 것이다. 모택동을 살려 준 것은 역설적으로 일본이었다. 장개석 군대가 아무리 부패했다고 할지라도 최후의 일격을 가하면 모택동은 초패왕 항우가 될 신세였지만, 때마침 일본이 풍신수길의 350년 해묵은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 대작전을 개시했던 것이다.
1937년 일본군이 만주에 이어 중원을 장악하러 나섰던 것이다. 현대전은 군인의 압도적 숫자나 맨손으로 총알도 날려버리겠다는 불퇴전의 정신력이 아니라 과학기술(기관총 한 정이면 5천 명을 상대할 수 있음)과 물자(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동시에 물리친 가장 큰 요인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이기 때문에, 장개석과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손을 잡았지만, 아시아의 전쟁기계 일본군에게 도무지 상대가 안 되었다. 일단 쫓겨난 후에 살살 약을 올리는 게 고작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작전이었다. 모택동은 일본과 싸우는 척하면서 세력을 급격히 늘려서 1937년 9만 명의 군대를 1945년 91만 명으로 불렸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인도 아삼의 레도(Ledo)에서 중국의 곤명에 이르는 도로를 닦고 히말라야의 하늘을 가로질러 도합 80만 톤의 무기와 식량을 중국에 공급했다. (소련에게는 450만 톤을 공급했다.) 인류 최대의 작전이라는 노르만 상륙에 퍼부은 물자가 57만 톤(차량 15만 대)이었으니까, 그 양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고문단을 파견하여 36만 명에 이르는 알파 부대를 만들어 이들을 일본군 못지않게 현대화시켰다. 이들의 전술과 화력이 곤명을 탈취하러 몰려온 일본군을 어렵지 않게 물리침으로써, 더군다나 맥아더가 필리핀을 탈환하여 거기서 바로 중국으로 물자를 공수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본군이 마침내 보급선을 단축하기 위해 양자강과 북경 사이로 집결하게 만들었다. 미국에게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바람에 모택동이 어부지리의 가장 큰 몫을 취했다. 미군의 엄중한 감시 하에 일본군이 물러가자마자, 그 외곽에 머물던 모택동이 중원의 노른자위인 양자강 이북과 북경 사이에 재빨리 똬리를 튼 것이다. 미국이 퍼준 80만 톤의 무기와 보급품과 식량과 의약품도 속속 모택동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어쨌거나 곧 마왕에게 7천만이 학살당하거나 굶어 죽을 운명이었지만, 그 당시는 민심을 얻은 덕분이었다. 장개석과 싸울 때는 지주를 몰아내고 농민에게 나눠준 농지는 공산화되자마자 인민공사란 이름으로 몰수하여 농민을 깡그리 국가 농노로 전락시킴으로써 모택동은 농민을 가장 악랄하게 배반했다. 중국의 농민은 지금도 경작권만 있을 뿐 소유권이 없어 가족이 전원 고향을 떠나는 순간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에 도시에 일하러 나가도 자녀나 아내나 부모는 고향에 남겨 둘 수밖에 없다.
스탈린은 화가 하늘에 닿았다. 러일전쟁 패전으로 빼앗겼던 만주를 잽싸게 접수했지만,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바로 달려가 토끼 몰이하듯이 관동군을 사로잡고 접수했지만, 모택동의 중원 통일 기념으로 바로 돌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미국과 영국과 인도의 신 3국 간섭 때문이었다. 대신 스탈린은 몽골과 북한을 접수하고 돌려주지 않았다. 스탈린은 북한의 청년을 모아 4개 사단을 만들었다. 최고의 무기를 쥐어 주고 5년에 걸쳐 맹훈련시켜 강군으로 만든 다음, 스탈린의 백골난망(白骨難忘) 은총에 개처럼 말을 잘 듣는 소련군 대위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모택동도 통일하자마자 스탈린의 제의에 따라 얼씨구나, 중국 공산당에 가담하여 국민당과 싸운 역전의 용사 조선인으로 구성된 3개 호랑이 사단을 김일성에게 돌려주었다. 이들 7개 사단에게 무기는 스탈린이 넉넉히 대 주었다. 특히 한국에는 한 대도 없었던 탱크 242대! 그리고는 소련군은 싹 빠져 나갔다.
평화! 자주! 훈련도 무장도 안 된 오합지졸을 두고 순진하게도 트루먼은 이에 화답하여 미군을 철수했다. 평화! 자주!
트루먼은 친절하게 1950년 1월 애치슨라인까지 한반도 바깥으로 싹 그어 주었다. 다행히 트루먼은 김일성이 스탈린과 모택동을 등에 업고 남침하자 속았음을 바로 깨닫고 미군을 한반도로 급파했다.
1951년 3월에서 1953년 7월 사이에 한반도에서 미국이나 중공이나 서로 한 뼘의 땅도 빼앗지 못하고 팽팽하게 맞서서 무익한 살상을 계속했다. 스탈린이 뒤에서 계속 물자를 대 주며 둘 다 망하라고 악마의 미소를 지으며 싸움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가 죽자 바로 미완의 평화가 찾아왔다.
스탈린의 의도와는 달리 미국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공산당의 실체를 똑똑히 알았다. 평화 무드에서 깨어나 5대양을 확실히 장악했다. 또한 시장경제는 공전의 호황을 거듭했다. 중국도 약해지지 않았다. 똘똘 뭉쳤다. 미국과 소련 누구도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굳이 중국의 인민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모택동은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1억 정도는 언제든지 잃을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연안의 산업시설을 모조리 머나먼 사천으로 뜯어갔다. 죄 없이 수천만이 맞아 죽고 죄 없이 수천만이 굶어 죽었지만, 공산당에 맞서는 자는 한 줌도 안 되었다.
모택동은 황제를 넘어 신의 반열로 올라섰다. 이건 4천 년 중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중국의 새 통일 왕조도 여느 왕조처럼 군사란 외적인 강제력만으로는 절대 유지될 수 없었다. 반드시 사상이란 내적인 응집력이 있어야 했다. 이 사상은 칼이 아니라 붓을 든 사람만이 제공할 수 있었다. 새 황제는 필수적으로 새 왕조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사상가를 영입해야 했다. 때로는 통일의 일등 공신인 장군을 내쫓고 사상가를 영입해야 했다. 위대한 사상가가 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함으로써, 비로소 새 왕조는 국민으로부터 자발적인 충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모택동은 군사력만 장악한 게 아니라 바로 이 사상도 지배했다. 그 자신이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다. 옳든 그르든 누구도 그와 논쟁해서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냥 황제가 아니라 신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일찍이 레닌이 그런 위치에 잠시 올라선 적이 있지만, 일찍 죽음으로써 모택동과 같은 신의 반열에는 오를 수 없었다.
중국의 새 황제는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에 맞서 원자탄을 개발하고(1964), 인공위성을 쏘아올린(1970) 것으로 초근목피의 생활은 감수할 만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반인반신(半人半神) 마왕 모택동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중국은 터무니없는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났다. 불과 30년 만에 군사대국 러시아와 경제대국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강대국으로 올라섰다. 미국의 경제 호수 5대양을 아시아의 4룡처럼 공짜로 사용한 덕분이었다.
6.25의 피해가 가장 컸던 한국이 제일 놀라웠다. 일제는 북한 지역을 공업지대로 만들고 남한 지역을 농업지대로 만들었지만, 6.25동란이 끝난 후 30년 만에 완전히 역전되어 한국이 공업국가로 거듭나고 북한은 농업과 군수산업밖에 없는 저주의 땅으로 변했다. 다시 20년이 지나자, 미국의 잉여 농산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아령으로 근육을 키우던 한국이 떨치고 일어나 인구 3천만 이상에서 세계 9위 선진부국으로 탈바꿈했지만, 북한은 아프리카의 최빈국보다 가난하고 스탈린 치하의 소련 인민보다 자유와 인권을 모르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결정적 계기가 역설적으로 6.25였다. 대역전극의 감독과 주연은 6.25의 피 흘림을 통해 국가의 중추로 거듭난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1개 대대만 풀어도 전국을 장악할 수 있는 막강한 물리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문맹이 70%인 나라에서 전원(全員)이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애국심이 넘쳤고 장교는 외교부보다 미국 유학을 더 많이 다녀와서 서양의 합리주의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체득했지만, 가난이 몸서리쳐졌다. 문중의 족보가 이어주는 혈연의 조직밖에 모르던 나라에서 분대, 소대, 중대, 대대, 연대, 여단, 사단, 군단, 군으로 이어지는 60만의 조직을 알았다. 조직 생활과 조직운영을 통하여 3천만을 하나로 묶을 줄 알았다. 그들은 이승만으로부터 민주주의를 배운 4.19세대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을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더군다나 4.19에는 두 세력 자유민주와 인민민주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는데, 대한민국의 최대 권력집단은 민주당의 무능력과 파벌 싸움 탓에 바야흐로 공산주의에게 접수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은인자중하던 군인들이 1961년 5월 16일 한강을 건넜다. 무혈 군사혁명이었다. 저항세력은 없었다. “올 것이 왔구나!”
박정희는 한때 공산당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생명만 간신히 건졌다. 6.25 당시에는 군인이 아니라 육군 정보국 정보작전실의 문관이었다. 때마침 어머니 제사 때문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군인도 아니면서 총알이 쏟아지는 곳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덕분에 그는 다시 군인이 될 수 있었다. 6.25가 아니었으면 박정희는 평생 군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혁명 후 박정희는 사상이 통일되고 미군이 주둔하는 한 전쟁이 없다고 보고, 과감하게 경제개발로 방향을 틀었다. 경제가 발전하면 군사력은 단독으로도 얼마든지 북한을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실지로 그는 수출입국으로 경제를 눈부시게 발전시킨 후에는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경제자립과 군사자주의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노렸다. 그가 죽을 당시에는 이미 경제력은 북한을 압도했고 군사력도 북한에 일대 일로도 밀리지 않았다. 미사일도 세계 7번째로 개발하고 핵무기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의 최대 정적 김일성은 권력과 가문의 영광에만 집착하느라 경제보다 항상 군사를 우선시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스탈린과 모택동이 걸었던 대실패의 길을 똑같이 걸었다. 거짓과 공포와 폭력으로 2천만 한민족을 생존본능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는 인간 앵무새와 인간 벌레와 인간 톱니바퀴로 개조했다.
박정희가 가장 우려하던 일이 그의 사후에 발생했다. 현존하는 악의 배꼽 북한 공산당의 남침을 잊지 않고 제2 남침을 막으려면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는 안 된다. 월남 패망이 좋은 반면교사이다. 반공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여기에는 여야가 따로 없어야 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을 품으면, 공산독재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북한을 압도하는 경제력도 주한미군과, 월남에서 미군보다 잘 싸웠던 국군을 합한 군사력도 맥없이 무너진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사태는 반미와 반독재와 친북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반독재는 있었지만, 반미와 친북은 없었다. 반공을 국시로 삼는 박정희의 혁명공약 제1조는 철저히 지켜졌다. 김대중도 빨갱이로 지목되는 걸 가장 두려워했다. 여야가 아무리 싸우더라도 안보문제에서는 하나로 뭉쳤다. 그것이 광주사태로 급격히 와해되었다. 박정희 시대에 지하에 숨어 있던 이들이 일제히 민주와 민족의 깃발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대학은 해방구가 되었다. ‘광주민주화 운동’을 내세우는 대학생과 넥타이 부대에게 전두환은 최루탄만 쏘았을 뿐 사상적으로 전혀 대응하지 못했다. 그는 광주사태의 원흉으로 지목받았다. 미국은 방조 세력으로 매도되었다. 바야흐로 반공은 독재의 가면으로, 분단의 최대 걸림돌로 받아들여졌다. 광주는 신성불가침의 민주성지가 되었다. 누구든 그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가슴을 쥐어뜯고 재를 들어 스스로 머리에 뿌려야 한다. 학생과 민간인이 어떻게 38개의 무기고를 순식간에 접수하여 중무장할 수 있었는지, 왜 군인의 총인 M16보다 예비군 총인 카빈에 희생된 사람이 더 많은지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품는 순간, 사방에서 날아오는 돌에 맞아 개죽음을 당한다. 너무도 우습게도, 가장 악랄한 독재체제의 북한 고위층도 광주에 가면 옷깃을 여미고 전두환을 성토한다.
탈북자단체 자유북한군인연합(대표 임천용)은 북한이 광주에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예비역 대령 지만원은 <<솔로몬 앞에 선 5.18>>에서 그들의 주장만이 아니라 2005년에 공개된 수십만 페이지의 5.18수사록을 샅샅이 연구하고 북한의 영화와 책을 뒤져서 북한이 5.18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론한다.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성역에 작은 돌을 던졌다.
북한군 개입과 무관하게 5.18 세력은 만장일치로 6.15세력이 됨으로써, 6.15의 후순위 당사자와 그 일방적 물주로 전락함으로써 자의든 타의든 김정일이 주창하는 선군정치의 트로이 목마 역할을 담당하게 이르렀다. 이제는 너무 깊숙이 들어와 발을 뺄 수가 없다. 김영환이나 강길모처럼 386운동권의 ‘김일성 만세’ 과거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순간, 구제불능 미치광이로, 민족 반역자로 매도된다. 북한과 한국의 친북좌파로부터 동시에 공격 받거나 메아리 없고 그림자 없는 존재가 된다.
두 악마적 외세를 등에 업은 6.25 남침으로 300만을 학살한 북한 김일성의 원죄는 가물가물 어릴 적 화상인 양 아련하게 잊히고, 거의 동시에 중무장한 민간인과 군인의 싸움에서 200여 명이 희생된 5.18 광주사태는 바로 어제 잘린 팔다리에서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 생생하니 전두환(최초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미궁), 나아가 대한민국의 원죄로 자리매김했다. 누구든 광주의 피 묻은 깃발을 흔들면 학계도, 문화계도, 정치계도 일제히 숙연해져서 대신 참회하고 대한민국 50년 현대사를 성토하는 붉은 양탄자를 깔았다.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털끝만한 의심도, 지극히 당연한 사실관계 확인도 신성모독으로 여겨졌다. 그것을 객관화하려는 어떤 시도도 바로 냉전적 수구적 사대주의적 반민족적 독재향수적 구제불능으로 매도되었다. 전두환과 광주사태 진압 공수단에게는 오직 저주와 분노와 증오와 적대감과 전쟁이 있을 뿐이었다. 북한 주민이 김일성 동상과 김일성 초상에 바치는 절대적인 충성과 흡사했다.
6.25의 핏속에서 5.16이 탄생했듯이 5.18의 붉은 양탄자 위에서 6.15 남북공동선언이 등극했다. 그 후 남북관계의 주도권은 경제력과 민주화와 군사력과 국제위상과 상관없이 북한으로 넘어갔다. 민주당이나 민노당은 100%, 한나라당도 90% 6.15를 유일한 현실적 대안으로 긍정한다. 악을 선과 같은 위상으로 끌어올려, 결국 막무가내 악(惡)이 다소곳 선(善)의 주인 행세를 하도록 멍석을 깔아 준 6.15를 긍정한다. 5.16은 독재, 5.18은 민주, 6.15는 민족화해, 이런 공식이 황소의 고삐처럼 20세기 후반 세계적 경이(驚異) 대한민국을 옭아매고 있다. 자연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보다 극악한 북한인권에 대해서는 6.15 정신에 입각하여 한국인은 그저 먼 산을 쳐다보거나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심지어 김대중이 갖다 바친 5억불(드러난 것만)로 북한과 한국의 햇볕파가 길길이 뛰며 부정하던 핵무기를 개발해도 천하태평이다. 민족의 핵이라며 엷은 장지문 뒤에서 히죽히죽 자랑스러워한다.
김정일은 이제 수확하는 일만 남았다. 대한민국은 스스로 사상적으로 무너졌다. 독재를 미워한다며 독재의 독재를 찬양하거나 방조함으로써 스스로 노예의 길을 걷고 있다. 적이 오기 전에 이미 스스로 무너진 당시 세계 최고 부국이자 세계 최대 인구 대국이었던 송과 명이 만리장성 저 너머에서 몽골과 만주의 말발굽 소리만 듣고도 천자(天子)의 금성철벽 성문을 활짝 열고 옥새를 갖다 바쳤듯이, 이제는 반공이라면 콧방귀도 안 뀌는 나라에서 6.25 때에 비교해서 뒷걸음뿐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세계 유일 세습 공산주의에게 수십억 불을 갖다 바치고도 이산가족의 자유왕래는커녕 편지 한 통, 전화 한 통, 전자우편 한 통 자유로운 왕래를 요구하지 못하고 하루 속히 멀리서 진군나팔이 울리기만 기다린다. 이제 평화통일이, 아마 평화적 적화통일이겠지만, 남북통일이 어느 날 도둑처럼 올 것이라고 대북 전단 한 장 못 날리는 대통령이 앞장서서 북을 둥둥 울린다. 중도실용 아침이슬 뻐꾸기는 아마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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