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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전두환) 斷罪는 正義를 구현하였나?

淸山에 2013. 5. 25. 06:41

 

 

 

 

 

全斗煥(전두환) 斷罪는 正義를 구현하였나?

 

釜馬사태-10·26-12·12-5·17-광주사태-5共비리 사건-

 

全斗煥 구속의 全과정 속에서 正義를 찾아 헤맨 月刊朝鮮의 記錄

趙甲濟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正義는 구현되고 있는가

현존 권력에는 맞서고 前권력에 대해서는 따뜻한 시선을 견지해 온 月刊朝鮮은 당대의 권력에 굴종한 과오를 그 권력이 시체가 되었을 때 난도질로써 씻으려 하는 작금의 언론 풍토를 목도하면서 正義(정의)구현의 원칙과 저널리즘의 原点(원점)을 생각해 보았다. 침묵하는 다수의 온건한 생각이 봉쇄되고 과격한 일부세력의 거친 숨소리가 텔레비전 화면과 신문 지면을 거의 독점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청산」은 또다시 「恨(한) 많은 세력」을 남기고 말 것이다. 공평한 진실규명과 상식적인 法집행을 외면하면 당대의 敗者(패자)는 후대에 가서 늘 勝者(승자)로 되살아난다. 지금은 金泳三(김영삼)-全斗煥(전두환) 재대결의 공정한 게임 규칙을 확립할 때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오늘이 싸우다가 내일을 잃고 마는 악순환을 여기서 끊을 때이다.


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기소를 몰고 온 일련의 사건 흐름에서 최초의 한 방울을 떨어뜨렸던 기사는 1995년 6월호 月刊朝鮮에 실렸던 咸承熙(함승희) 변호사의 동화은행 수사 축소·은폐에 대한 폭로[金然極(김연극) 기자의 기사]였다. 이 기사를 기폭제로 하여 기자들과 정치인들의 6共 비자금에 집중적으로 파고들게 되었고 그런 시류 속에서 朴啓東(박계동) 의원의 결정적 폭로가 터졌다. 全斗煥 전 대통령의 감옥行을 몰고 온 12·12-5·18사건 再起(재기)의 과정에서도 月刊朝鮮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95년 9월호의 부록으로 공개된 「12·12사건 保安司감청 테이프」는 장군들의 긴박한 현장 육성으로써 12·12사건을 「군사반란」으로 자연스럽게 규정하도록 만들면서 신군부 사법처리 요구 운동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月刊朝鮮 기자들은 全, 盧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에 대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정의는 구현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공평한 진실규명에 입각한 상식적인 法적용은 정의구현의 2大 조건이다. 권력의 큰손이 검찰권에 개입하여 일반의 진실만 노출시키고, 다수 언론사가 앞장선 선전·선동의 바람이 일어나 상식을 휩쓸고 허문 다음 그 황폐한 心象(심상)에다가 法을 갖다 대었을 때는 정의구현 대신에 마녀사냥만 있을 뿐이다.  


月刊朝鮮은 12·12사건, 비자금, 광주사태에 대한 공평한 진실규명을 지향해 왔다. 月刊朝鮮 기사가 5共 청문회 때 여야 국회의원 양쪽에 의해서 가장 많이 인용된 것도, 우리는 항상 사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사건의 전체상을 그리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의 축적물들이 정의구현이 아니라 現代史(현대사) 파괴의 영상테러에 도용되는 작금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기자는 「차라리 특종을 하지 말았을 것을」하고 느낄 때도 있다.
  
  서민의 정의감이 10·26 불렀다 
 
月刊朝鮮은 지난 15년간 12·12사건을 우리 시대의 최대 정점으로 만드는 데 최대의 기여를 한 매체이다. 12·12사건을 금기의 章(장)에서 끌어낸 역사적 인터뷰(1987년 9월호 鄭昇和 증언)에서 12·12사건 녹음테이프 발굴까지 月刊朝鮮은 이 군사반란과 관련된 특종들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2·12사건의 뿌리는 그 두 달 전인 釜馬(부마)사태이다. 釜馬사태는 朴正熙(박정희) 철권통치에 대한 최초의 시민적 저항이었다는 의미가 있다. 중산층이 主流(주류)인 도시의 서민층이 본격적으로 학생들과 합세하여 反정부 시위를 벌인 것은 朴正熙 시대 18년 중 이것이 최초이자 최후였다. 현지를 시찰한 金載圭(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은 부마사태를 民亂(민란)으로 인식했다. 이런 인식이 8일 뒤 「유신의 심장을 향하여 야수의 마음으로」 방아쇠를 당기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10월16일 밤, 그때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부산 남포동 앞 대로에서 경찰 진압 트럭이 시위대의 손에 넘어가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불타오르는 현장에 있었다. 그 화염은 많은 시민들을 흥분시켰고 朴정권에 대한 공포감을 일순 마비시켰으며 카니발 같은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기자는 그 순간 문득 「아, 이 사태는 결국 계엄령을 부르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부산시민들과 학생들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내몬 것은 정의감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朴正熙정권은 YH사건, 金泳三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국회의원 제명 등 잇따른 무리수를 두었다. 권력의 도구가 된 法과 정당, 그리고 어용화된 언론을 동원한 朴正熙의 强攻(강공) 드라이브는 군사작전처럼 일사불란했으나 서민들의 마음속에선 反感(반감)이 쌓여갔던 것이다. 이 反感을 분석해보면 장기 집권에 대한 싫증, 金泳三 제명에 대한 분노, 어용언론에 대한 증오, 그리고 물가폭등과 과중한 세금에 대한 상인층의 불만이 나타난다. 그런 여러 요인들이 통합된 하나의 표현은 「비열한 권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었다.
요즘처럼 자유선거가 있었다면 『좋다, 선거 때 혼내주겠다』고 벼를 수 있었겠지만 그런 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부산 사람들은 「화가 나서」 행동으로 나섰던 것이다. 釜馬사태 때 계엄군으로 투입된 것은 서울에서 급파된 공수부대였다. 그때까지 한국인들은 권력의 하수인 같은 검찰과 경찰보다는 국민의 군대인 국군에 대해서 아주 높은 친근감과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런 믿음을 배신한 것이 공수부대였다. 그들은 단순히 「겁을 준다」는 목적 하에서 무고한 행인들까지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다. 「대한민국에 이런 군대가 있었나」하고 기자도 놀랐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물샐 틈이 없이 계속되었던 民軍(민군)우호 관계에 최초의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우리 軍지휘부는 이 현상을 「문제」로서가 아니라 「성공사례」로 해석했다. 시위엔 공수부대를 풀어 조기에 강경진압하면 된다는 교훈, 그것을 여섯 달 뒤 광주에서 다시 적용했던 것이 民心을 모르는 우리 군 지휘부였다.

  
  鄭昇和 총장의 비극
 
  
  12·12사건, 5·17쿠데타, 광주사태뿐 아니라 최근 일고 있는 소위 역사청산 논쟁은 10·26사건과 朴正熙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서 起因(기인)하고 있다. 朴正熙란 巨木(거목)의 그늘 아래에서 이뤄지고 있는 정치 논쟁이고 권력투쟁이니, 한국은 아직도 朴正熙 시대라는 터널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朴正熙의 죽음을 「민주화의 好機(호기)」로 본 것은 대다수 국민과 공화당·유정회를 포함한 기성정당이었다. 「국가안보의 위기」로 인식한 것은 일부 국민과 全斗煥 장군 그룹이었다. 金載圭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사회에서는 朴正熙 격하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부에서는 鄭昇和(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노장·非정규 육사 출신들이 朴正熙 친위세력화한 하나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나회가 뿌리를 둔 것은 육사 11기 이후의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이었다. 이 집단은 朴正熙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강했다. 따라서 정치권과 사회에서 일고 있는 朴正熙 격하운동과 金載圭 미화 움직임에 대해서 불안 분노하고 있었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정규육사 출신들은 또 非정규육사 출신인 군상층부에 대해서 일종의 경멸감까지 갖고 있었다. 이런 장교들에게는 鄭昇和 총장의 10·26사건 당시 행적이 「지울 수 없는 의혹」으로 다가왔다. 신군부측에선 아직도 鄭昇和 장군이 그날 기회주의적 자세를 취해 결과적으로 金載圭를 도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의 판단은 확고하다 鄭昇和 장군은 그날 밤 거의 최선의 대응을 했다. 金載圭와의 공모는 물론 없었다. 초기에 정보 부족으로 다소 흔들렸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인간도 그런 엄청난 상황에서는 겪을 수밖에 없는 당황과 주저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선비 같은 장군」 鄭昇和 총장의 비극은 朴正熙 대통령이 피살되는 그 현장 가까이에 金載圭와 함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이 사실은 의혹으로 증폭됐다. 역사적 변동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고 인식이다.
정규육사 장교단의 인식은 「鄭昇和 장군이 의심스럽다」는 쪽이었다. 이런 의혹은 12·12사건 그날 밤 全斗煥 측에서 『이건 쿠데타가 아니야. 鄭昇和 장군을 10·26사건 수사와 관련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상사에 불과해. 그러니 육군본부측의 군출동 요구에 응해선 안 돼!』라고 설득할 때 많은 지휘관들이 납득하도록 만든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鄭昇和 총장이 10·26 직후 도의적 책임을 지고 계엄사령관직을 사임했더라면, 혹은 崔圭夏 대통령이 鄭장군을 교체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1987년에 鄭昇和 장군을 처음으로 인터뷰한 것이 계기가 돼 기자는 지금까지도 그를 가깝게 만나고 있다. 鄭장군은 6·25 때는 용감한 지휘관이었고 육군참모총장으로서는 오로지 본연의 임무에 헌신하여 駐韓(주한)미군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군인이다. 국내 정치엔 무관심했지만 그것이 비난의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좋은 군인이 역사의 敗者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역사에서 과연 正義가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話頭(화두)를 던진다.

 

 

 

 

 

 

 

 

 

 

 

 

 

 

 

12·12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 정권까지 잡게 되다 
 
12·12사건의 핵심은 「계획에는 없었던 쿠데타」, 즉 결과적 쿠데타라는 점이다. 군부의 패권을 잡기 위한 의도에서 수사차원의 강제연행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군사반란으로, 더 나아가서는 정권장악으로 발전한다. 요사이 신군부 출신들이 당시 合搜部(합수부) 수사과장이던 李鶴捧(이학봉)씨에게 『왜 그때 (鄭총장) 연행을 서툴게 하여 지금 까지 우리를 골탕먹이나』라고 불평을 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李씨는 『내가 실수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대통령이 나오지 않았나』라는 취지의 응수를 했다는 것이다. 이 농담은 진담이다.
 
그날 鄭昇和 총장 공관에서 총격 없이 조용하게 총장 연행이 이루어졌다면 全斗煥 장군과 하나회는 군부의 헤게모니를 잡는 데 만족하고 집권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공관에서의 총격과 崔圭夏 대통령의 결재거부, 그리고 陸本(육본) 측의 진압 움직임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편의 병력을 동원하고 국방장관을 끌고 다니며 崔대통령을 압박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쿠데타的 군사반란」이 돼버린 것이다. 12월12일 초저녁에는 군부의 한 실력자에 불과했던 육군소장 全斗煥도 13일 새벽에는 대통령까지도 눌러버린 最强者(최강자)가 돼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랐을 것이다. 그는 돌아갈 수 없는 反亂(반란)의 다리를 건넌 셈이었다. 살기위해서라도 정권을 향해 질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2·12사건의 10시간 동안 우리나라 權府(권부)와 軍部(군부)의 내장 프로그램이 바뀌어버렸다. 겉으로는 헌정질서와 명령계통 같은 하드웨어가 여전했으나, 그것을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는 全斗煥 그룹의 장악하에 들어갔다. 권력구조의 작동에 필요한 指示語(지시어)는 이제 합수부에서부터 발신되기 시작했다. 이런 2중 구조는 1979년 12월13일부터 1980년 9월1일 全斗煥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5·17 계엄확대, 국보위설치 같은 모든 중요한 사안은 崔圭夏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이루어졌다. 겉으로는 合憲的(합헌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全斗煥 그룹이 崔대통령을 협박한 흔적도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崔대통령은 자신이 신군부에 의해서 포위되고 고립되었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한 崔대통령휘하의 주요 참모 및 행정조직이 몽땅 신군부의 명령권 내지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신군부의 권력의지뿐 아니라 권력에 영합하려는 일부 한국인들의 적극적 추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保安司 정보처장으로서 신군부 집권과정에서 프로그래머役을 맡았던 權正達(권정달) 정보처장은 『12·12사건 뒤에는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권력이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를 실력자라고 생각해서 선을 대려고 몰려드는 이들이 끊이질 않았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권력의 풍향에 너무나 민감하게 대응하는 한국 기성세력의 자세가 신군부를 「권력의 신화」로 둘러싸게 했고 그 신화는 점차 실체로 변해갔다. 권력이란 것은 손에 잡히는 물건이 아니라 「누가 세다」고 하는 데 대한 다중의 동의인 것이다. 
  
  崔圭夏 대통령의 시국인식 
 
1979년 12월12일∼1980년 9월1일 사이의 이 기간을 金泳三 정부는 쿠데타라고 못 박았다. 지난 1995년 7월18일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검찰부가 발표한 「5·18관련 사건수사결과」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앞에서 본 일련의 조치들(전국계엄확대·國保委 설치 등)이 外形的(외형적)으로는 비록 崔圭夏 대통령의 國事行爲(국사행위) 또는 그 집행행위의 外觀(외관)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實質(실질)에 있어서는 朴正熙 대통령의 예기치 않은 死亡(사망)으로 초래된 권력의 공백기에 12·12사건으로 軍의 주도권을 장악한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제5공화국이란 새 正權(정권)을 창출해 나가는 과정에서 전국 비상계엄이라는 특수상황을 이용하여 국군보안사령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중앙정보부장서리, 국보위 상임위원장의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입안, 추진한 정치적 성격의 행위들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일련의 조치 과정은 全斗煥 보안사령관이 그가 장악하고 있던 軍을 배경으로 하여 새로운 正權과 헌법질서를 창출해 나간 정치적 變革(변혁) 과정에 해당된다고 할 것이다>
 
검찰의 고민스러운 성격규정은 정확하다. 쿠데타라고 보기에는 대통령을 협박한 증거가 없다. 그러나 합헌적으로 보기에는 全斗煥 장군의 월권이 심하다. 「대통령의 소극적 동의에 의한 군부의 정권장악」이란 이상한 현상을 쿠데타로 보느냐, 쿠데타的 사건으로 보느냐, 合憲的 정권이양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법률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영역, 즉 힘의 관계 하에서 이루어질 성질이다. 지금은 권력을 쥔 金泳三 정부가 쿠데타로 규정, 그 수괴인 全 전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낸 상황일 뿐이다. 여기서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崔圭夏 대통령의 시국 인식이 시간이 흐를수록 全斗煥 장군과 비슷해져갔다는 점이다.
‘3金씨’로 대표되던 당시의 정치세력과 계엄령 하에서도 파업·시위를 감행했던 학생·노조 등에 대한 대통령의 시각은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당시 정치권은 崔대통령의 우유부단을 경멸했는데 崔대통령도 정치권을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생각이 그를 신군부 쪽으로 밀어붙인 것으로 보인다. 崔대통령이 1980년 6월12일에 발표한 「국가기강 확립에 관한 담화」 중에서 그는 신군부와 비슷한 시국관을 보였다. 「일부 정치세력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독점물인 양 내세우면서 국민간의 분열과 대립을 초래할 무책임한 言動(언동)을 하는가 하면, 사회불안 요인을 오히려 자극함으로써 무질서와 혼란을 가중시킨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쿠데타라면 가장 큰 피해자여야 할 崔 전 대통령은 지금껏 한번도 全斗煥 측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고 있다. 1995년 여름에 全斗煥 전 대통령 측이 검찰에 답변서를 제출할 때는 그 초안을 연희동 측으로부터 받아서 검토한 적이 있을 정도로 崔-全 두 사람이 지금껏 가까운 것도 이 사건을 쿠데타로 판단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되는 부분이다.
  
  3金도 5·17에 공동책임 져야 
 
「세계 역사상 가장 긴 쿠데타」로 불리기도 한 이런 희한한 정권장악 과정은 12·12사건의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신군부는 朴正熙처럼 확고한 개혁의지와 비전을 가지고 주체집단을 조직한 다음 정권을 장악한 것이 아니었다. 거의 우발적으로 쿠데타의 길을 가게 되었다. 12·12 그날 밤 저질러 놓은 상황이 너무 엄청났고, 그 상황이 그들을 정권 쪽으로 강박해간 면이 강하다. 전두환 장군은 崔대통령으로부터 정권을 인수하라는 통보를 받고 나와 노태우 당시 보안사령관을 불러 『내가 대통령이 되려고 이렇게 한 것이 아닌데 이를 어쩌면 좋으냐』고 말했다고 한다(盧 전 대통령 증언). 전두환 장군은 대통령이 된 뒤에도 한동안은 청와대 집무실의 그 의자에 앉아 있기가 송구해서 소파에 주로 앉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전두환 장군의 이런 미안함과 주저는 10·26 이후 국민들의 염원이 민주화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에서도 연유한다. 군부의 재등장은 민주화라는 대세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것을 그도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1979년 12월13일∼1980년 5월17일 사이에 우리나라의 정치세력이 슬기롭고 단호하게 대처했더라면 군사정권의 재등장은 저지될 수도 있었다는 가정이 부분적으로 성립한다. 3金씨 그중에서도 金泳三, 金大中(김대중) 씨가 단합하여 사회 각 부문의 욕구분출을 통제하면서 민주화 쪽으로 여론을 주도해 갔더라면 과연 신군부가 집권할 수 있었을까. 기자는 신군부의 집권은 불가능했으리라고 판단한다.  
許和平(허화평) 의원(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도 같은 견해를 나타냈다. 「그래도 결국은 신군부가 집권했을 것이다」고 믿는 의견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3金씨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신군부의 집권은 그것대로 책임을 물어야 하며 3金씨가 단합 못한 책임은 또 그것대로 따져야 하는 것이다. 3金씨 중 쿠데타 기획의 경험자인 金鍾泌씨는 가장 정확하게 신군부의 집권 공작을 읽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崔대통령 정부나 全斗煥 세력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야권의 두 金씨와 연대하여 군부의 재등장을 막아보려는 적극적 자세를 보이지 않은 채 다소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다.
金泳三 당시 신민당 총재는 10·26사건을 결과한 것은 자신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는 확신 아래서 신민당을 민주화 세력의 정통이라 내세우고 金大中씨와 재야세력을 흡수통합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한편, 군부의 등장說에 대해선 3金씨 중 가장 안이한 판단을 했다. 金大中씨는 군부의 등장을 우려하면서도 재야세력을 활용하여 가장 도전적인 입장을 취했다. 재야·학생 세력을 결집, 활성화시킴으로써 군부의 집권의지를 꺾으려 하지 않았나 하는 추리를 가능하게 한다.

 

 

 

 

 

 

 

 

 

 

 

 

중산층은 왜 침묵했나 
  
  이때의 상황을 돌이켜 볼 때 金泳三, 金大中 두 사람이 왜 강자인 신군부를 主敵(주적)으로 삼지 않고 崔圭夏-申鉉碻(신현확·당시 총리) 민간정부만 집중적으로 공격했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신군부의 등장을 단호하게 경고하면서도 崔圭夏 민간정부에게는 협조하는 자세를 취했더라면 崔대통령을 全斗煥 편에서 떼어내어 신군부를 고립화시킬 수도 있지 않았을까. 崔圭夏정부로 하여금 신군부와 협조하도록 만든 것은 양金씨의 너무 가혹한 정부비판이 대통령 및 각료들로 하여금 「저런 사람들보다는 군인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도록 만든 때문은 아닐까. 당시 崔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S씨는 이렇게 말했다.
 『崔대통령이 취임하면서 1년 정도를 잡고 이듬해 봄에 정부를 이양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참아주어야 했어요. 결국 양쪽의 정치 일정이란 것이 몇 달 차이밖에 안 나는 것 아닙니까(기자 注·金泳三 총재는 1979년 11월 초 「3개월 이내에 헌법개정, 그후 2개월 내에 대통령 선거」를 주장). 양金씨가 정치일정 단축을 자주 조급하게 주장하니 혼란에 빠진 겁니다. 내각에선 양 金의 행태를 크게 우려했습니다. 정권이양이 이사가는 정도는 아닐 텐데 몇 달을 못 참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어요.』
양金의 분열, 계엄령 하 학내시위 격화, 노사분규, 사북사태, 학생들의 가두 진출로 이어진 대혼란을 기다린 것은 신군부였고, 불안해진 것은 중산·서민층이었다. 부마사태 때 도심으로 몰려나온 학생들에게 콜라 사주고 담배 던져 주었던 부산 광복동·남포동의 상인들은 1980년 봄에 와서는 『생업에 지장이 있으니 시위를 자제해달라』는 호소문을 내기에 이른다. 金泳三-金大中씨의 분열은 행정부 뿐 아니라 민주화를 바라던 중산층까지도 등을 돌리게 했다. 광주를 제외하고는, 1980년 5월의 학생시위에 시민들의 응원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야당세력과 학생들은 군부-행정부-중산층이란 우리 사회의 主流로부터 분리되고 고립되었다. 중산층이 학생편을 든 부마사태, 2·12총선, 6월사태는 정치적 변화를 몰고 왔지만 중산층이 외면한 1980년 봄, 그리고 1991년 봄(姜慶大 치사사건)의 시위는 좌절되었다. 경제발전에 의해 巨大(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한 중산층이 국론분열이나 정치투쟁의 최종 심판자 역할을 한다는 것은 한국정치의 제1원리인 것이다. 5·17 후 15년, 이제 당시의 피해자였던 3金씨는 당시의 가해자였던 全, 盧 두 전직 대통령과 崔圭夏 당시 대통령을 심판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요사이 3大 방송은 金泳三 대통령이 5·17의 최대 피해자인 것처럼 강조하면서 그에 의한 全, 盧 단죄가 역사의 정의인 것처럼 보도(혹은 선전)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오늘날의 3金씨는 5·17의 피해자이면서 공동책임자이기도 하다 불의의 기습으로 정권을 빼앗긴 5·16 당시의 張勉(장면) 총리에게 우리가 그 무능함과 비겁함을 따져왔다면, 12·12사건으로 이미 예고된 쿠데타를 사전에 막지 못하고 敵前(적전) 분열로써 민주화의 기회를 8년이나 늦추어버린 3金씨, 특히 양金씨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 양金씨가 全, 盧 두 사람을 단죄한다는 의미는 보기에 따라서는 공동책임자들끼리의 책임전가로 해석될 소지도 있는 것이다. 최소한 역사와 국민 앞에 송구스러운 마음을 갖고서 단죄의 칼을 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자격 있는 사람에 의한 단죄인가 하는 문제는 正義구현 여부를 가름하는 핵심적인 사항이다.
  
  광주에서 5일간 느꼈던 점
 
 
기자는 1980년 5월23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에서 그 유혈사태를 취재했고, 그 뒤에도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그 현장에서 기자가 본 광주사태의 본질과 요점은 이러했다.
경상도 출신인 기자는 그곳에서 취재를 하는 데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지역감정이 광주사태의 중요한 원인은 아니란 느낌이 왔다. 계엄당국이 광주사태의 본질을 지역감정 쪽으로 돌린 것은 사실의 왜곡이다.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난 것은 공수부대원들의 과격한 진압에 대한 거의 동물적인 분노 때문이었다. 『어찌 인간이 이럴 수가』하는 분노가 정의감으로 승화된 것이다.
신군부에 의한 金大中씨의 연행도 한 촉발요인이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金大中 석방』을 요구하는 구호는 다른 구호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리가 낮았다(최근 검찰조사에서도 金大中씨가 광주사태를 조종했다는 說은 부정되었다).
『全斗煥 타도!』란 구호 뒤에는 『金日成은 오판 말라!』는 구호가 따랐다. 시민들이 간첩으로 의심 가는 시위자를 붙들어 계엄당국에 넘겨주기도 했다. 광주사태의 기본이념은 反共·민주화였다.
이른바 「시민군」은 軍紀(군기)를 비교적 엄정히 잡아 시민들에 대한 피해는 최소화되었다.
20사단의 광주 재진입작전은 희생자를 최소화한, 효율적인 것이었다.
기자는 5월27일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탈환된 직후, 구경나온 시민들 중에서 경상도 말을 하는 청년을 한 사람 알게 되었다. 그는 전남도청 2기동대 소속 전투경찰관(상경)인 南모씨였다. 경북대학교 정외과 2학년에 다니다가 입대했다고 했다. 그는 5월21일 전남도청을 지키다가 시위대가 몰려오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달아났다. 다행이 고마운 아저씨 집에 숨어들어 7일간 지냈다는 것이었다. 南상경을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부동산업을 한다는 50代 초반의 광주 아저씨는 아내와 함께 기자를 맞아들이더니 푸짐한 점심대접을 해주면서 『제발 지역감정 치원에서 이 사태를 보지 말라』고 부탁했다.
南상경도 『공수부대원들이 몽땅 경상도 군인들이란 얘기도 틀렸고, 광주시민이 경상도가 밉다고 일어났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니다』고 역설하면서 과잉진압의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기자는 광주사태를 취재하고 부산에 돌아와 광주시민들을 옹호하는 발언들을 하고 돌아다녔다. 그때 부산의 일부 지역에선 경상도 사람들이 광주에서 당했다고 전라도 사람이 갖고 있는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軍警(군경)사망자 27명의 문제 
 
1985년 7월초 月刊朝鮮은 광주사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 南상경을 찾아내 다시 만났는데 대우그룹에서 일하고 있었다. 南씨는 『지금도 저를 살려주신 그분을 찾아뵙고 있다』면서 「광주 아버님」이란 표현을 했다. 그때 취재차 다시 광주에 내려가 보니 광주사태 사망자 유족들과 부상자들에 대한 정보당국의 감시와 탄압이 응어리를 더욱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月刊朝鮮은 이 특집에서 취재기자 좌담회 기사를 실었다. 그 때 月刊朝鮮部에서는 기자 이외에도 吳効鎭(오효진), 趙南俊(조남준) 기자가 광주사태 취재경험자였다. 당시는 안기부의 언론탄압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공수부대」라는 말 대신에 「계엄군」이란 표현을 써야 했다.
기자는 이 좌담회 기사에서 과잉진압을 설명하기 위해서 정부 측 통계를 나열했다.
『계엄사가 발표한 통계를 보면 144명의 시민 측 사망자 가운데 18%인 26명이 타박상 두부손상 자상으로 숨진 것으로 돼 있고, 23.6%인 34명이 19세 이하라는 겁니다. 14세 이하 사망자도 5명이고, 65세 노인도 있습니다.』
이 좌담회에서 月刊朝鮮 기자들은 그때 쟁점이 돼 있던 사망자수에 대해서 2000명說을 배척하고 200명說이 더 정확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대목으로 해서 月刊朝鮮은 다소 곤욕을 치렀으나 결국은 정확했음이 밝혀졌다. 광주사태 사망자 2000명說은 이 사태에 대한 과장이 5共 때 널리 퍼져 있었고 지금껏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광주사태를 목격하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욱 과장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서울지검의 1995년 7월 발표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사망자는 193명이다. 민간인은 166명, 군인 23명, 경찰관 4명이다. 이 통계에서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별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부분은 군경 사망자 27명이다. 요사이 여권과 일부 언론은 「광주학살」이란 표현을 쓰는데 군경사망자 27명이란 숫자는 「학살」이란 단어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학살」이란 용어는 보통 非무장의 사람들을 무장집단이 일방적으로 죽이는 것을 가리키는 데 광주사태에선 <민간인 6 對 군경 1>의 비율로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학살」 은 非과학적 표현이다. 군인 사망자 23명중 12명은 상호 오인사격에 의한 사망자로서 시민 측의 공격에 의한 순수 군경 사망자는 15명이다.
1988년 民和委(민화위) 증언에서 蘇俊烈(소준열) 당시 全南北(전남북) 계엄 분소장은 『민간인 사망자의 검시 결과 군인이 사용한 M16 총탄으로 죽은 시민은 45명이었다』고 말했었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민간인 사망자 45명 對 군경 사망자 15명」즉 3대1의 비율이 된다. 기자가 시민측 입장에서 바라보던 광주사태를 공수부대 입장에서 취재하기로 한 것은 1988년에 접어들어 민주화의 물결에 따라 언론자유가 만개하기 시작할 때였다. 광주사태 8년째가 되는 그 해 5월29일 오전 눈부시게 화창한 봄날 국립묘지 29묘역의 「광주사태 전사자 묘비명」 앞에는 30代 청년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모두 광주사태 부상자들이었다.
20사단 출신 李明珪(이명규)씨는 5월27일 새벽 광주로 진입하다가 「시민군」과의 교전에서 피격돼 팔에 부상을 입었다. 공수11여단 출신인 金東哲(김동철)·慶箕萬(경기만)씨는 5월24일에 보병학교 교도대의 오인사격으로, 金殷鐵(김은철)·裵東煥(배동환)씨는 5월21일에 광주시내에서 철수할 때 시민군의 총격을 받고 가슴과 팔에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동료들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올해는 더욱 쓸쓸한 것 같다』고 했다. 정오까지 기다려도 더 나타나는 사람이 없어 추모회는 다섯 명의 참석자로 그야말로 조촐하게 끝났다. 1980년 중반까지는 특전사와 육본에서 신경을 써주고 화환도 보내주곤 했는데 그 뒤로는 참배객도 수백 명에서 수십 명으로, 다시 수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열흘 전 광주 망월동 묘역에 모여들었던 수만 인파에 비해서 이곳은 더욱 쓸쓸해 보였다. 국가와 軍이 먼저 그들을 버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수부대원의 시각 
 
기자는 광주사태 현장에선 저승사자같이 보였던 공수부대원들을 그 뒤 수십 명 만났다. 악귀 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가 그렇고 그런 한국인이었다. 평균적 한국인보다도 오히려 더 순진하고 우직한 사람들이었다. 『무엇이 이들을 그토록 잔혹하게 만들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서 취재한 결과는 1988년 7월호 月刊朝鮮에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란 제목의 기사로 실렸다. 공수부대의 시각으로 본 광주사태는 기자가 시민 측 입장에서 경험했던 사태와는 크게 달랐다. 광주사태의 출발점이 된 공수7여단의 광주투입. 申佑植(신우식) 당시 여단장은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2개 대대를 31사단에 배속시키고는 지휘계통선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31사단장이 직접 우리 여단의 대대장을 지휘하게 되었다. 과잉진압 운운하는데 군인은 명령대로 하는 존재이고, 그때의 시위가 불법행동이었음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李熺性(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은 民和委에서 『광주사태의 발단은 계엄군이 전국 31개 대학에 진주, 평정을 회복시켰는데 유독 전남대학교에서만 投石(투석)으로써 도전하였으므로 강경진압에 나서게 되었다』고 증언, 사태의 원천적 책임을 학생들의 「불법시위」로 돌렸다. 7여단 35대대 3중대장이었던 朴炳洙(박병수) 대위는 전북 김제 사람이었다. 기자가 취재차 만났을 때 그는 부평에서 한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이 가장 많았다』면서 『대학에 진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둑판과 배구공을 갖고 놀러가는 심정으로 이동했다』 고 말했다. 시위진압 기구로는 사과탄과 진압봉이 전부였고, 방석모·방패·최루탄 발사기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학생이 돌을 던지니까, 우리도 강하게 나간 것입니다. 시위대가 군인이 나타났는데도 흩어지지 않으니 기분이 상합디다. 동료들이 돌을 맞아 다치니 부하들이 흥분했어요.』
충분한 시위진압 장비 없이 투석에 노출되자 공수부대는 더욱 가혹한 진압으로 나왔다. 이 과잉진압이 백주의 도심에서 衆人環視(중인환시) 속에 벌어지니 시민들도 흥분했다. 이런 감정의 상승작용이 광주의 비극으로 치닫게 된 원인이 됐다.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를 통해서 기자는 그때까지 견지해왔던 시각과 인식을 크게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물을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느냐가 가치판단에 거의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새삼 실감하였다. 공수부대도 시위대와 시민들에 대하여 대단한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11여단의 副지역대장 金泰龍(김태룡)씨(1988년 당시 40세·회사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곳에서 부상당해 한쪽 다리를 못 쓰고 있다. 광주시민이나 우리나 같은 피해자다. 차라리 진상조사가 철저히 됐으면 좋겠다. 너무 군인들만 몰아붙이는데, 나는 내 부하가 시위대의 APC장갑차 돌진에 의해 치여 죽는 것을 목격했었다. 우리는 광주로 갈 때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어떤 선입견 없이 진압에 임했다. 공공건물을 불태우고, 군인에게 돌을 던지고, 동료가 다치니까, 아무리 부하를 말려도 강경 진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압봉 하나밖에 없는데 그런 식으로 진압하지 않으면 우리가 돌에 맞아 죽을 판인데…. 우리 부대에는 전라도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이 지리에 밝아 더 열심히 진압에 나섰다.』
당시 11여단의 대대장이었던 한 현역대령은 『부하들이 군중 속에서 고립되어 실탄을 달라고 무전으로 수십 번 호소해왔다. 나는 참모장에게 실탄지급을 허용해 달라고 건의했는데 참모장이 선무에 주력하여 좀 참아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화가 치밀어, 「야 이 xx야, 네가 현장을 모르니까 그따위 소리하는 모양인데」라고 상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발포지시는 없었다 
 
발포는 상부 지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1988년 7월호 月刊朝鮮의 기사를 일부 인용한다.

<5월21일 오전 공수부대는 수십만으로 불어난 광주시민들에 의해 코너로 몰리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조선일보 사회부 취재일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오전 10시54분 : 땅을 파고 통곡하는 군인들의 모습 보임. 『왜 이런 식으로 우리 동료가 다쳐야 하느냐』며 흔들림. 무장 데모군중이 사방에서 군을 포위하고 압축하는 상황에서도 낮에는 실탄을 회수. 이에 대해 『탄환을 달라』고 아우성도. 군은 부상병이 생겨도 사방이 포위돼 응급치료와 수송을 못해 더욱 자극되는 듯」
5월21일 오후 1시쯤 전남도청 앞에서는 수십만의 시위군중과 약 1200명의 7, 11여단 병력이 대치하고 있었다. 금남로를 맡은 11여단의 3개 대대 병력은 분수대 앞에 APC장갑차 한 대를 세워놓고 그 장갑차를 믿고서 횡대로 서 있었다. 시민과 공수부대원 사이의 거리는 10여 미터도 되지 않았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였다. 시민 측에서는 이날 새벽 아세아 자동차에서 빼앗은 장갑차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빼앗은 카빈·실탄 등으로 무장한 이들도 있었다. 도청앞 광장에서는 헬리콥터가 자주 내렸다가 떴다가 하면서 서류 등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팽팽한 대치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장갑차 때문이었다.
11여단 소속 통신병 慶箕萬(우기만)씨의 증언.
『우리 등 뒤에 있던 APC에 누가 화염병을 던졌는지 불에 타기 시작했다. 우리 대열은 불을 끄려고 뒤로 물러났다. 이때를 틈타 시민 측에서 장갑차와 버스를 앞세우고 돌진해 왔다. 우리는 도청 쪽으로 달아났다. 실탄이 없었기에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시민 측 장갑차 한 대가 우리 공수부대 대열에 돌진, 두 명이 깔리는 것이 보였다. 나중에 보니 11여단의 권용문 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공수부대 대열의 뒤쪽에 있었던 전투경찰 南東成(남동성) 상경은 이렇게 기억했다.
『장갑차와 함께 버스가 돌진해 왔는데 한 장교가 권총을 빼들더니 운전사를 향해 사격을 했다. 운전사가 맞았는지 버스는 분수대 근방에서 멈추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이 버스를 향해서 사격을 했다. 한 장교는 M16을 들고 나오더니 엎드려 쏴 자세로 사격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동료가 치여 죽는 장면을 목격한 공수11여단의 한 하사관은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고, 누구든지 죽여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더라』고 실토했다>
 
1988년까지는 鄭雄(정웅) 31사단장(1988년 당시 평민당 국회의원)은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반대한 義人(의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기자의 취재 결과 그는 과잉진압 부대인 공수부대 5개 대대를 자신의 지휘권 下로 배속 받았으므로 지휘 책임을 모면하기가 어렵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鄭鎬溶(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내려간 것은 사실이지만 鄭雄씨의 주장대로 공수부대에 대한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는 없었다. 
  
  검찰이 밝힌 사실관계가 가장 정확 
 
1995년 7월에 발표한 5·18사건 관련 수사 결론에서 서울지검은 기자의 이상 취재 결론과 거의 일치하는 판단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1995년 9월호 月刊朝鮮에 全文게재).
첫째, 검찰은 공수7여단의 광주투입은 정권장악에 필요한 유혈사태를 유발하기 위한 음모였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둘째, 發砲(발포)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거나 광주시민들의 公憤(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판단했다.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發砲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받은 공수부대 將校(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自衛(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지휘권 二元化(이원화)는 없었다. 일련의 부대운용에 관한 지휘를 31사단장(鄭雄)과 戰敎(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되었다.
넷째, 헬기 기초소사의 증거는 없다.
다섯째, 全斗煥 합수본부장과 盧泰愚 수경사령관은 광주사태 진압작전에 직접 관여한 증거가 없다. 광주사태 진압은 보안사령부가 아닌 계엄사령부의 전권 하에서 이루어졌다.
여섯째, 5월21일에 광주지역에 투입된 20사단은 광주가 무장시위대의 손에 넘어간 뒤 광주 재진압작전에 참여했을 뿐 문제의 과잉진압과는 무관하다.
일곱째, 약 20명의 무고한 시민이 광주시 외곽에서 공수부대에 의해 오인사격 및 보복사격을 당해 사망했다. 기자는 적어도 사실관계에 관한 한 검찰의 이 조사결과가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검찰의 「공소권 없음」 결정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검찰이 밝힌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反論(반론)이 별로 없었다.
광주사태에 대한 재수사가 실시되어도 검찰이 269명의 관련자를 조사, 이미 확정한 사실관계는 뒤집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구를 무슨 죄명으로 기소하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최근 언론과 여권은 광주사태의 책임을 全斗煥 당시 합수본부장에게 물으려고 하는데 직접적인 연결성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언론은 또 朴俊炳(박준병) 당시 20사단장을 광주사태 진압 책임자로서 구속할 것이라는 한 여권 소식통의 말을 검증 없이 그대로 보도했다.
20사단의 2개 연대는 광주가 무장시민들에게 넘어간 뒤 계엄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광주 외곽에 도착했고, 27일 재진입작전 때 광주의 서구를 제외한 전지역을 장악하는 작전을 했을 뿐이다. 과잉진압이나 학살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무장시민군과 교전한 것밖에는 없다. 그런 20사단의 사단장을 구속한다는 것은 무장시민군에 대한 무력진압 자체를 불법화하는 것을 뜻하며 군의 존재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아마도 朴의원이 金泳三 대통령의 직접 만류를 뿌리치고 自民聯(자민련)으로 옮겨간 데 대한 괘씸한 마음을 이런 식으로 기자들에게 흘린 것이 검증 없이 보도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사태에 대한 초보적인 지식만 있어도 범하지 않을 실수를 저지른 기자들과 그런 미숙한 기자를 이용한 정치인들은 결과적으로 국가와 국군을 무력화시키려는 작당의 공범관계인 셈이다. 대통령의 결단을 전폭적인 응원이라 믿고 일부 기자들과 정치인들이 벌이는 마구잡이식 보도와 선동, 그리고 음모는 그 자체가 또 다른 보복을 부를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自重自愛(자중자애)할 때이다.

 

 

 

 

 

 

 

국가와 군대의 존립근거를 건드리는 민감한 사안 
 
광주사태의 과잉진압을 문책대상으로 삼는다면 우선 공수부대의 지휘자인 31사단장 鄭雄씨가 사법처리 대상이 된다. 검찰이 지휘권 二元化는 없었다고 했으므로 鄭鎬溶 의원의 사법처리는 불가능하다. 요사이의 보도대로라면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신군부의 당시 실세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야 일부 국민이 만족할 것인데, 鄭雄씨를 처벌하면 또 어떻게 될지….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과잉진압을 처벌대상, 무장한 시위대에 대한 정상적인 진압 작전은 합법적으로 판단하여 면책하는 것이 현재의 사실관계로서는 합리적 선택인 것 같다. 진압행위 자체를 불법화해버리면 합법적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들어진 군대를 거세해버리는 결과가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선량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무기를 들어도 군대가 진압을 꺼리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특히 연대장이 대대장 등 실병 지휘관을 처벌하면 상황에 따라 상관의 명령을 거부해도 좋고 그래야만 후세에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기회주의적 사고방식을 확산시킬 수 있다. 광주사태를 관용으로 해결하는 데도 반대가 많지만 응징으로써 정의를 세우자는 논리도 실제에 적용할 때는 국가와 군대의 존립근거와 관계되는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게 된다는 점에 고민거리가 있는 것이다. 
 
鄭총장을 물고문한 업보 
 
기자는 1980年代에 5공화국의 출생과정을 취재하면 할수록 12·12사건이야말로 일련의 사태에서 뿌리에 해당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작가 千今成(천금성)씨가 신군부의 지원 하에서 썼지만 출간이 금지되었던 「12·12사건 秘錄(비록)」의 초고는 이 사건과 관련된 기초적인 사실들을 담고 있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사적인 文書(문서)였다. 全斗煥의 시각을 반영한 이 문서에 대응할 만한 최초의 기사는 1987년 9월호 月刊朝鮮에 실렸던 「鄭昇和증언 : 10·26과 12·12」였다.  
이 인터뷰를 통해서 기자를 신뢰하게 된 鄭 전 총장은 기자에게 구술 녹음테이프 16개(30시간 분)를 넘겨주었다. 12월12일 연행되었다가 내란방조죄로 유죄확정 판결을 받고 1980년 여름에 출소했던 鄭장군은 자신의 恨을 녹음테이프에 담아 두었던 것이다. 『내가 온갖 치욕을 참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언젠가는 국민들에게 진실된 증언을 하기 위해서다』라는 대목도 있었다. 기자는 이 녹음테이프를 정리하며 「12·12사건 鄭昇和는 말한다」는 회고록으로까지 출판사에서 출간되도록 하였다. 이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기자가 이를 부드득 갈면서 화가 났던 대목이 있었다. 鄭장군은 다소 처연한 목소리로 이렇게 녹음을 두었다.
 
<내가 갇혀 있던 건물 옆에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다. 2층으로 끌고 가더니 어느 방에 들어가는데 그 방이 보기에 고문하는 방인가 싶었다. 그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긴 철제의자에 앉히더니 거기다가 비끌어 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놈들이 나를 고문하려는 구나 직감하면서 주위에 있는 5∼6명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날 고문을 할 모양인데 내가 육군대장으로서 너희들에게 고문당할 수는 없다. 고문당하기 전에 내 예비역 편입원을 써놓고 당해도 당해야겠다.』
그중 한 명이 『그런 것 안 써도 이미 예편되었으며 참모총장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두 명이 나를 의자에 비끌어 매며 머리를 뒤로 잡아 젖히고 여러 명이 소리를 꽥꽥 지르고 위협을 하며 분위기부터 살벌하게 만들더니 곡괭이 자루인 듯한 몽둥이로 내 허벅지 위를 치고, 정강이를 치고, 목뒤를 치기도 하며, 마치 미처 날뛰는 것처럼, 서로가 격려라도 하는 것처럼, 신명이 난 듯 교대로 치며 무조건 나더러 『바른대로 말해, 이 자식, 김재규하고 공모했지. 다 알고 있는데 이 자식, 거짓말해야 소용없어』하며 마구 날뛰었다. 그러한 고문은 견딜 수 있었으나 머리를 젖히고 얼굴에 물수건을 씌운 다음 주전자 물을 계속 얼굴 위에다가 들어붓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내가 6·25 때 죽어야 했을 것을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군사반란의 지휘자를 낙선시키려고
 
合搜部 측에선 물고문 사실을 부인하고 있지만 기자는 鄭장군의 인격에 비추어 그의 증언이 진실이라 믿고 있다. 장교는 私益(사익)이나 영리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國益(국익)을 수호하는 직업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직업과는 다른 의무를 하나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을 기꺼이 수행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장교의 명예심은 거국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재판에 넘어가도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현역 대우를 받고 군복을 입을 수 있다. 그런데도 신군부는 鄭총장을 마치 절도범 다루듯 하였다.
오늘날 그들이 받고 있는 갖은 모욕·모함·선동·비난의 출발점은 鄭총장에 대한 비열한 대우일 것이다(그들은 鄭총장에게 죄수복을 입혀 법정에 서게 했고 사진을 찍어 언론에 선전했다). 全斗煥 대통령이 힘이 있었을 때 12·12사건 敗者측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위로하고 배려했더라면 그 뒤의 사태전개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느낌을 기자는 갖고 있다.
12·12사건에 대한 신군부 측의 당시 발표문에 따르면, 또 신군부 측 인사들의 주장에 따르면 鄭昇和 측 경비병들이 먼저 합수부 수사요원들에게 발포, 12·12사건이 유혈사태로 치닫는 원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기자는 1987년에 鄭昇和 총장공관의 당시 당번병·관리주임을 만나 당시 상황을 들었다. 합수부 요원들이 비무장 상태의 鄭총장 부관·경호장교를 등 뒤에서 먼저 쏜 것이 확실했다. 1994년 검찰조사에서도 그렇게 밝혀졌다. 신군부는 비열한 행동을 비열하게 조작·발표한 것이다. 1987년 大選(대선)을 앞두고 기자는 盧泰愚 후보를 「군사반란의 주모자」로 단정하는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신군부 인사들을 인간적으로 증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6·29선언이후 언론자유는 상당히 확대되었으나 「군사반란」이란 표현은 기자의 영역 밖이었다.
기자는 격문 같은 글을 써 통일민주당 선거 대책본부의 핵심 참모에게 건네주면서 수십 만 장의 팸플릿으로 만들어 뿌리면 盧후보를 낙선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선동했다. 그 며칠 뒤 기자는 그 사식 원고가 언론사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자의 교정 필적을 알아본 어느 선배기자가 나한테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金泳三 후보 측근은 그 원고를 여러 부 복사하여 가자들에게 돌린 모양이었다. 기자는, 왜 그런 무모하고 신의 없는 짓을 했는지, 왜 그 자료는 끝내 인쇄물로 되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다.
이 무렵 회고록 「12·12사건 鄭昇和는 말한다」가 인쇄소에서 제판작업을 막 끝낸 직후 정보형사에게 발각돼 필름이 압수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자는 책이 출간될 수 없다면 鄭장군이 기자회견을 갖고 책 원고를 공개하도록 해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300페이지 책의 寫植(사식)본을 수십 부 복사하여 「거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경찰이 필름을 돌려주었다. 이 무렵 鄭昇和 장군은 통일민주당에 부총재로 영입되어 大選운동기간 중 12·12 반란을 부각시키려고 애썼다. 鄭柄宙씨(정병주·12·12 당시 육군헌병감)도 기자회견을 갖고 과거의 상관을 도왔다.  
이 두 람은 張泰玩씨(장태완·당시 한국증권전산 사장)를 합류시키려고 애썼으나 張씨는 거절하고 신병치료차 渡美(도미)했다. 기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사람은 鄭柄宙씨였다. 12·12사건 때 부하에게 총격을 당해 팔을 다쳤고 비서실장(김오랑 소령)을 잃었던 그는 신군부 측의 회유를 거절한 채 분노를 가슴에 묻고 등산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그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신군부의 핵심이 특전사 출신들이고 거의가 자신의 부하들이었는데, 그들에게 직설적으로 욕을 하는 것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오히려 『鄭鎬溶이는 참 의리 있는 친구요』라면서 기자를 말리는 입장이었다. 鄭柄宙씨는 1989년 초에 변사체로 발견됐는데,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지만 타살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억지와 생떼가 활보하는 中世사회 
 
1987년 12월16일 大選에서 盧泰愚 후보를 당선시킨 일등공신은 金泳三·金大中 두 후보였다. 두 사람은 정권이 눈앞에 보이자 1980년 봄에 이어 또 다시 분열했다. 두 사람이 단합했더라면 盧泰愚비자금사건이 생길 이유도, 이제 와서 全 전 대통령이 새삼 감옥에 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선진국 같았으면 양金씨는 정계를 물러나야 했겠으나, 지역감정 구도는 두 사람에게는 늘 피난처가 돼 주었다. 金大中 평민당 총재는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13代 大選 개표과정에 컴퓨터 부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재개표는 요구하지 않았다. 선거개표과정과 컴퓨터에 대한 초보적 상식만 가져도 웃고 치워버릴 이 억지는 놀랍게도 그 뒤 상당기간 사실인양 살아서 꿈틀거리면서 사회를 어지럽혔다. 어느 언론기관도 딱 부러지게 컴퓨터 부정설은 거짓이라고 못박아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 말에 컴퓨터 부정설 같은 허위가 맞아죽지 않고 대낮을 활보할 수 있는 나라는 중세암흑기에 있어야 할 나라일 것이다. 그런 억지를 봉쇄할 용기가 없는 지식인 사회는 권력남용과 선전·선동 앞에 서면 작아져 버린다. 오늘날 이 땅을 휩쓸고 있는 선정적 분위기는 바로 이 컴퓨터 부정설을 용인한 지식인의 비겁성과 닿아 있는 것이다. 月刊朝鮮과 기자는 1987년 大選결과에 승복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것은 곧 盧泰愚 정부를 정통성 있는 정부로 인정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6·29선언에 이은 大選을 통해서 국민은 「12·12사건의 주모자」를 대통령으로 뽑음으로써 적어도 5共, 6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타협적 선택을 한 것이다. 5, 6共의 정통성을 전면 부정하는 사람들은 盧대통령을 뽑은 36%의 투표자들을 무시하는 오만한 者들이다. 더구나 이 선거에서 金泳三 후보는 12·12를 부각시켜 「군정종식」을 구호로 걸었으나 패배했다. 이는 12·12사건이 정치적으로 일단 심판을 받았음을 뜻한다.
6共출범 이후 記者는 5共비리 취재에 몰두하게 되었다. 특히 全斗煥 대통령의 정치자금 부분을 깊게 파고들었다. 1988년 5월호 기사 「全斗煥의 인맥과 금맥」, 1989년 1월호의 「全斗煥 잔금 139억 원의 비밀」은 全斗煥 정치자금의 모집·관리·사용에 대한 심층보고서였다. 1989년 1월호 기사에서 기자는 全斗煥 정치자금의 총규모를 약 6600억 원으로 추산해냈다. 이 기사는 야당에서 지금도 全斗煥측을 공격할 때 활용하고 있다. 

 

 

 

 

 

 

 

 

 

 

 

 

 

현존권력과의 관계 하에서만 正義는 구현된다
 
記者는 全斗煥 전 대통령의 과오를 폭로하는 기사도 많이 썼지만 그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오해·과장·조작을 밝히는 글도 많이 썼다. 사실에 충실하게 기사를 쓰다가 보면 결과적으로 때로는 불리하게, 때로는 유리하게도 되는 법이다. 의도를 갖고서 미리 설정된 방향으로 사실을 조작하고 꿰맞추어 가는 버릇을, 月刊朝鮮은 선정적 보도가 판치는 시대에도 피하려고 애썼다. 記者가 쓴 기사는 5共청문회 때 질문의 근거로 많이 활용되었다. 하지만 기자는 全斗煥 측을 과장된 文法(문법)으로써 난도질하는 기사나 청문회가 결코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5共시절 안기부의 압력과 맞서 가면서 한 줄의 진실이라도 더 지면에 반영하려고 바득바득 댔던 때가 더 정의를 구현하고 있었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정의란 것은 현존권력과의 관계下에서 구현되는 것이다. 이미 시체가 돼버린 前권력에 아무리 칼을 근사하게 꼽아보았자 복수나 한풀이는 될지언정 정의의 구현은 아니란 생각이 소신으로 되었다. 현존권력, 쉽게 말하면 현직 대통령과는 늘 긴장관계를 유지하되 전직 대통령에 대해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것이 月刊朝鮮의 正義감정이 되었던 것이다.
5共 때는 鄭昇和 장군 측 사람들과 친했던 기자는 6共 때는 許和平(허화평), 張世東(장세동) 같은 신군부 측 인사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신군부의 시각으로 12·12사건이나 5·17, 광주사태를 바라보면서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인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양쪽과 다 친해진 관계로 해서 기자는 똑같은 사실을 놓고도 인식·해석하는 방식이 정반대가 되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자신이 개입되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아주 객관적이고 냉철할 수 있으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에 대해선 절대로 객관적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9년 月刊朝鮮 6월호에 기자는 「6·29선언, 全斗煥 작품이다」는 題下(제하)의 기사를 썼다.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가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뜻을 거슬러 감행했다고 알려졌던 6·29선언이 실은 全斗煥 대통령이 먼저 발상하고 盧대표를 설득하여 수용하도록 한 거대한 정치쇼였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는 또 全斗煥 당시 대통령이 1987년 大選때 약 1500억 원의 선거자금을 모집, 盧후보를 지원했고 퇴임 때는 550억 원의 잔금을 盧대통령에게 인계했다고 보도했다. 全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면서 국가에 헌납한 139억 원도 사실은 청와대에서 50억 원을 보태서 만든 돈이라는 사실도 폭로했다. 이들 내용은 그 뒤 모두 사실로 확인되었다.
현존 권력의 가장 아픈 급소를 강타한 이런 종류의 기사가 공개될 수 있었다는 점은 盧泰愚 대통령이 언론자유를 얼마나 신장시켰는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6共 때는 어느 기자도 기사와 관련해서 정보기관에 불법적으로 연행되지 않았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관한 한 金泳三 정부 때보다 盧泰愚 정부 때가 훨씬 좋았음을 많은 기자들은 체험 사례로써 증언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때처럼 지금 한국 언론이 金泳三 대통령의 급소, 예컨대 14代 大選자금문제를 과감하게 보도할 수 있겠는지 자신이 없다. 金泳三 대통령은 야당총재 시절에 자주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만드는 자유다』라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언론자유의 후퇴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아부者의 완장 
 
1988∼1989년 사이의 5共비리 보도 선풍 때 기자가 발견한 또 하나의 언론풍토는 5共시절 권력에 아부했던 언론사·언론인들일수록 全斗煥 죽이기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지금도 비슷한 현상이 3大방송을 중심으로 하여 되풀이되고 있다. 죽은 권력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김으로써 前정권시절의 어용을 면책 받으려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요사이 全斗煥 죽이기, 金泳三 높이기에 앞장서고 있는 상당수의 언론인들은 옛날에 金泳三 죽이기, 全斗煥 높이기에 발 벗고 나섰던 인물이다. 현직 대통령에겐 아부를, 그가 전직 대통령이 되는 순간부터 돌멩이를 던지는 언론의 행태는 그 책임의 일부가 권력으로 언론자유를 눌러놓은 대가를, 그리고 검찰과 언론사 社主(사주)를 통해 진실을 덮어버린 그 앙갚음을 퇴임 뒤에는 몇 배로 당하는 것이다.
「남자다움」이란 기준으로 얘기한다면 현존권력과 정정당당히 맞서고 그 권력의 퇴장 뒤에는 화해하는 것이 사나이다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현직 대통령부터 권력의 힘을 빌지 않고 당당한 승부를 벌여야 한다. 金泳三 대통령이 盧·全 양 전직대통령 구속 사태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재임기간에는 검찰과 언론의 힘을 빌려 大選자금 문제를 덮을 수 있을지 모른다. 퇴임 뒤에는 반드시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 그때는 오히려 불공평하게 당할 가능성이 있다.
「전직 대통령」이란 자리는 집안의 할아버지와 비슷하다. 아무 것도 생산하지는 않지만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한 국가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이다. 金泳三 대통령 시절에 와서 전직 대통령 세 사람이 모두 불행하게 되고 망가져 버린다면 이 상처를 복원하는 데는 또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1989년 12월16일의 「5共청산 大妥協」 
 
1989년 12월16일자 한국일보 1면 톱의 통단컷 제목은 「5共청산 大妥協(대타협)」이었다. 15일 밤 청와대에서 열린 盧泰愚 대통령-金大中 평민당 총재-金泳三 민주당 총재-金鍾泌 공화당 총재 사이의 6시간 회담에서 5共청산 문제를 연내에 종결짓고 1990년대를 화합의 분위기로 맞아들일 것에 대하여 완전히 합의했다는 보도였다. 11개 합의사항도 발표되었다. 백담사에 은둔 중이던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국회로 불러내 1회에 한해 증언을 듣고, 鄭鎬溶 의원을 광주사태 해결 차원에서 공직에서 사퇴시키며, 광주시민 명예회복·보상법을 제정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 다음날 金大中 총재는 『이번 회담결과로 광주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보는가』란 기자 질문에 대해서 『우리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金泳三 총재는 『내년부터 5共청산회의를 안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정치권이 그 넉자를 쓰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다. 1989년 12월31일, 갈등의 1980년대를 청산하는 마지막 통과의례의 희생물처럼 국회의 5共비리-光州특위 연석회의장에 끌려나온 全斗煥 전 대통령은 온갖 모욕과 욕설을 다 받아야 했다. 참의원 회의실에서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全斗煥 전 대통령의 증언을 듣기 위해 기자도 2층 방청석에 자리 잡았다. 1盧3金의 약속대로 한 시대의 아픔을 총괄적으로 마무리하는 그 역사적 자리에 있고 싶었던 것은, 기자의 개인적 삶의 궤적이 全斗煥과 유관하게 그려졌기 때문이기도 했다(기자는 全斗煥 권력에 의해 두 번 해직되었다). 기자의 다소 감상적 기대는 구역질나는 정치쇼에 의해 능욕되고 말았다.
이날 야당 국회의원들은 全 전 대통령을 상대로 엄정한 질문을 통해 역사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자세가 아니라 누가 전직 대통령에게 더 많은 창피를 줄 것인가 하는 경쟁을 벌였다. 全 전 대통령의 답변서 낭독을 다 듣고 질문을 하도록 돼 있었는데 답변서 낭독 도중에 야당 의원들이 뛰쳐나와 욕설과 삿대질을 해대는 바람에 일곱 차례나 停會(정회)가 되었다. 급기야는 全斗煥 전 대통령의 증언대를 향해 盧武鉉(노무현) 의원(민주당)이 명패를 던지는 작태까지 벌어졌다. 全 전 대통령은 밤 12시 직전 기자들을 대기실로 불러 낭독을 못다 한 답변서를 15분 정도 읽고 서둘러 차에 올랐다. 평민당 의원 및 보좌관들이 몰려나와 『죽여라』고 고함치면서 全 전 대통령을 1990년대로 보내버렸다.
기자는 연출자의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저질연극을 구경하면서 1980년대의 마지막 날을 보낸다는 것이 억울해 못 견딜 지경이었다. 국회를 나오는 길로 순복음교회로 직행하여(기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새해맞이 예배에 참석, 그 더러운 1980年代의 탁한 공기를 날려 보냈다고 믿었던 것이다. 

 

 

 

 

 

 

 

 

 

 

 

 

 

 

金潤煥 증언 : 『金泳三 총재가 盧대통령이 나서서 全斗煥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는 데 감동』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었던 근거는 盧대통령이 1990년 1월1일 신년사에서 과거사 문제의 종결을 선언했고, 金泳三 총재도 「5共청산을 통해 심화되었던 사회 각 부문의 긴장과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정치적 계기를 마련할 것」을 다짐하였기 때문이다. 1월4일자 朝鮮日報 사설도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5共문제에 매달리기엔 90년대의 과제들이 너무나도 많다. 과거는 이정도로 마무리 짓고 이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곧 진정한 5共청산의 길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5共청산을 이 정도로 마무리하자는 것이 당시 정치권과 국민의 합의였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며칠 뒤 金泳三 총재는 5·16 쿠데타 세력의 대표자 金鍾泌 총재, 5·17세력의 대표자 盧泰愚 대통령과 손잡고 3黨합당을 결행했다. 3당합당은 이른바 5공청산을 바탕으로 하여 이뤄진 것이었다. 이 민자당 정권에서 金泳三 대표는 盧泰愚 대통령과 동거하면서 국정을 이끌었다. 6共후반기의 잘잘못에 대해서 두 사람은 공동책임자이다. 金泳三 대통령에 의한 6共청산은 자신을 먼저 부정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3당합당의 막후 조정자였던 金潤煥씨(김윤환·現在 신한국당 대표)는 1994년 8월호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1989년 1월에 차남 賢哲(현철)씨 집으로 가서 金泳三 총재를 만났습니다. 3당통합을 제의했더니 金총재의 반응은 이랬어요. 「잘 알았다 그러나 5共청산도 하지 않고 어떻게 민정당과 손잡나. 盧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됐나. 全斗煥씨가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全斗煥씨를 살려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아무리 정치판이지만 사람이 신의를 지켜야지, 全斗煥를 살리려면 모든 것을 걸고 중간평가를 하는 수밖에 없지 않나. 나 같으면 그렇게 하겠다.」 나는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1990년 1월 경제개발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보수대연합이란 민자당이 창당되었을 때 대한민국의 그 누가 그 5년 뒤 5共청산이 다시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다른 사람도 아닌 金泳三 대통령에 의해서 全斗煥 전 대통령이 감옥으로 가는 사태를 꿈에라도 짐작이나 했을까. 더구나 5共문제 마무리에 합의했던 金大中·金鍾泌 총재까지도 金泳三 대통령보다도 더 강경한 처벌방식(특별검사제 도입)을 주장하였으니 우리는 혹시 타임캡슐을 타고 1980年代로 돌아간 게 아닐까(최근 JP는 태도 완화). 1992년 大選 때도 12·12, 5·17, 광주사태는 쟁점이 되지 않았었다. 金大中 후보는 故 朴正熙 대통령의 묘소에까지 참배, 역사와의 화해를 선언했다. 金泳三 후보는 민자당 內 경선에서 이기자 全斗煥 전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었다.
 
우리의 일곱 대통령을 위한 변호 
 
月刊朝鮮은 大選의 해인 1992년에 대통령과 관련된 두 권의 책을 펴냈다. 하나는 5共청와대의 통치사료담당 비서관이었던 金聲翊(김성익)씨가 쓴 「全斗煥 육성증언」, 다른 한 권은 1993년 신년호 별책부록으로 만든 「한국의 대통령」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에는 「우리의 일곱 대통령 李承晩(이승만), 尹潽善(윤보선), 朴正熙, 崔圭夏, 全斗煥, 盧泰愚, 金泳三 이야기」란 副題(부제)가 붙었다. 기자는 부제를 붙이면서 잠시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의 대통령이 일곱 명, 더구나 생존한 전직 대통령이 곧 세 사람으로 늘겠구나 하는 든든함과 안도감.
이 책은 金泳三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바로 그 다음날 시중에 나와 기록적 판매량을 보였다. 이 책의 머리글에서 기자는 月刊朝鮮식 대통령觀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月刊朝鮮은 그동안 「대통령은 국민들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담긴 기사들을 주로 써왔다. 그런 시각을 한번 바꾸어 「국민들도 대통령의 고독과 고민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고, 이 책에 그런 시각이 투영돼 있다. 즉, 국민과 대통령은 서로 마주보아야 하는 사이라는 얘기다.>
 
이런 記者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역사는 요동치며 흘러갔다. 金泳三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북한에 대해서는 「어떤 이념이나 우방보다도 민족이 더 중요하다」면서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나라 안을 향해서는 한국병의 병소를 「도려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대조적인 태도는 그 뒤 국정운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북한(안보·외교·이념문제 등) 및 現代史 관련정책


미전향사상범 李仁模(이인모) 노인 무조건 송환, 北核(북핵)문제에선 對北(대북)유화정책, 굴욕적 쌀 北送(북송), 제86우성호 및 安承運(안승운) 목사 납북에 속수무책, 金日成(김일성) 사망에 金대통령은 『정상회담 성사 안 돼 아쉽다』고만 논평, 태극기 강제 하강사건, 비너스호 선원 억류에 굴욕적인 對北사과, 사회주의 지향의 운동권 출신이 여권 깊숙이 진출, 국사교과서에서 대구공산폭동을 항쟁으로 美化하기도, 日帝잔재 및 前정권의 상징물 제거 차원에서 옛 중앙청과 역대 대통령 집무실 철거, 훈령조작사건 때 3급 비밀문서를 야당의원에게 누출시킨 혐의자(현직각료)를 적발하고도 계속 重用(중용), 「임수경 밀입북사건의 배후총책」이라고 안기부가 발표했던 윤한봉씨를 일체의 신문절차 없이 입국 허용, 국무총리는 물론이고 안보수석 포함 차관급 중 42%가 군대 안 갔다온 사람…. 
 
對內정책
하나회 숙청, 민자당에서 金鍾泌 제거, 12·12를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 『5·16은 역사를 후퇴시켰다』, 文民(문민)정부 강조, 정부의 정통성을 4·19-광주사태-6월 사태의 연장선상에 설정, 「5000년 썩은 역사」 云云, 훈령조작사건 때 電文(전문)유출자는 보호하고 對北강령론자 李東馥(이동복)씨는 면직, 전직 대통령 두 명 구속
….

이런 양대 정책흐름의 성격을 보수층 일각에선 「北韓과 좌익에 대해선 온건하고 보수·우익에 대해선 가혹하다」는 평을 하고 있다. 한 12·12 관련자는 『어떻게 된 게 우리를 공격하는 데 앞장서는 이들은 군대 안간 사람들뿐인가. 군대 기피는 부패보다도 더 나라에 유해하다』고 까지 말했다.
金泳三 대통령은 과거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부정적 과거」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金대통령은 『나는 지금부터 돈을 안 받는다』고 선언하며 결백을 과시한 뒤 司正(사정)드라이브를 시작했는데 여기에 공평성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과거문제로 따진다면 金대통령을 필두로 하여 돈으로부터 결백을 주장할 정치인은 거의 없는 데 무슨 기준으로 감옥 보낼 사람과 봐줄 사람을 결정하느냐는 것이다. 그 기준은 권력을 쥔 쪽에서 결정하는 것이고, 그러니 저절로 金泳三 대통령을 도왔던 사람, 현 정권에서 힘 있는 정치인들은 법을 빠져나와 버렸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검찰의 권위가 손상 받게 되었다. 관용이 없는 과거지향적 司正은 공평성이 결여된, 즉 正義가 없는 사정이 돼버릴 소지를 안고 있었다. 과거지향식 司正은 또 필연적으로 거의 모든 정치인들을 권력기관에 의해 약점 잡힌 사람들로 만들게 되었다. 이런 정치판에선 논리나 정책대결이 될 리가 없다. 여당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훤히 아는 대통령에게 굴종하고 야당의원들은 억지, 트집, 또는 음모로써 공세적 방어를 할 수밖에 없으니 國事는 늘 뒷전이고 정치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 돼버린다.

 

 

 

 

 

 

 

 

 

 

결투-문화가 없는 사회의 모습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사태의 출발점은 말[言] 事故(사고)였다. 1993년 봄 黃寅性(황인성) 총리가 야당국회의원의 질문에 대해서 『12·12를 불법으로 볼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 며칠 뒤 청와대에서 12·12사건을 쿠데타적 사건으로 해석하는 발표문을 내놓으면서 12·12사건에서 연유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이 힘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역사를 해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단죄까지 하겠다는 태도가 오늘의 상황을 만든 결정적 因子(인자)였다. 신군부와 맞섰던 鄭昇和 장군측이 12·12사건을 형사고발함으로써 최초의 불씨를 만들었다. 이어서 호남 및 재야세력이 5·17, 광주사태 관련자를 고발하였다.
기자는 鄭昇和 장군에게, 12·12의 피해자들이 역사적 사건을 법률로써 시비하려는 자세는 기자의 정의감정에 비추어 좋지 않게 생각된다는 뜻을 전했다. 鄭장군은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들이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라고 했다. 月刊朝鮮은 12·12사건 및 하나회 관련 기사를 통해서 정치군인들의 실상을 알리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해왔으나 1993년 8월호에선 처음으로 12·12사건의 敗將(패장)들을 비판했다[崔普植(최보식) 기자-「12·12사태의 패장들이 져야할 역사적 책임은 무엇인가」].
이 기사는 「막강한 무력을 갖고도 치밀한 계획도 없는 소수의 合搜部 측 기습을 받고 어이없이 손을 들어 민주화의 기회를 놓치게 만든 敗將들은 역사 앞에서 어떤 책임을 져야하나」라고 질문했다. 최보식 기자는 「崔圭夏대통령을 보위하지 못한 책임, 수경사령관이 자신의 부대를 장악하지 못한 책임, 陸本지휘부가 진압병력의 동원을 포기한 책임, 계엄사령관이 合搜部의 계획을 사전에 탐지하지 못한 책임,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차장이 지휘권을 포기한 책임」을 물었다. 한국은 결투의 전통이 없는 사회다. 따라서 당대의 승부에 승복하지 않고 후세에 가서 前代의 승부는 새로 가려진다. 이것이 이른바 한국식 「역사청산」의 핵심이다.
당대의 승자는 후대에 가서 패자가 되고 당대의 패자가 역사의 승자가 되는 이런 청산방식에서 경계해야 할 것은
①패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일과
②부적격자가 소위 역사청산의 칼자루를 잡는 일이다.
 
다수의 침묵 속에서 자라난 처벌요구 운동

12·12, 5·17, 5·18 이 1995년의 말에 와서 다시 나라를 뒤흔들 정도의 이슈가 되리라고 믿었던 국민은 1993년 당시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몇 차례의 여과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역사의 章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던 다수 국민들이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불씨는 서서히 자라 번지기 시작했다. 처벌요구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그 세력의 일거수일투족을 친절하게 보도해온 대다수 언론이었다. 광주사태를 가장 감수성이 강한 청소년 시절에 겪고 1980년대의 캠퍼스를 호흡하면서 체질적으로 反 全斗煥이 된 30代기자들은 이제는 돌 대신에 활자와 화면을 통해 全斗煥 세력에 복수할 수 있는 위치에 포진하고 있었다. 다수 간부 언론인들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명분에 눌려 관련자 처벌을 지지하는 쪽으로 신문과 방송을 끌어갔다. 그래도 金泳三 대통령과 민자당 검찰은 「심판은 역사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헌법재판소는 검찰의 12·12사건 기소유예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보수세력은 시종 침묵하였다. 『다 지나간 사건인데… 대통령이 막아주겠지』하는 생각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서 全斗煥·신군부 처벌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지는 않았다. 이런 조건하에서 金泳三 대통령의 대변신이 일어난 것이다. 그동안 5·18 관련자 처벌 요구는 주로 민주당, 국민회의, 재야세력, 좌익세력, 호남지역민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金大中 지지도가 가장 높은 그룹이기도 하다. 5·18 관련자 처벌운동에 반대한 세력은 金대통령을비롯, 안기부·군·검찰·경찰 등 공안기관을 위시하여 非호남세력, 중산 보수층이었다. 1992년 大選 때 金泳三 지지도가 높았던 세력이다. 5·18 처벌로 선회함으로써 金泳三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기반을 버리고 金大中씨의 지지기반을 향해 뛴 셈이 되었다. 이것은 고뇌어린 윤리적 결단이었던가, 아니면 大選자금 공개 공세를 면하고 金大中 총재를 치기 위한 이기적 발상인가.
 
윤리적 결단인가. 이기적 발상인가 
 
金泳三 대통령이 보수층을 배신했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에 金大中·金鍾泌 두 정치 지도자가 먼저 「1989년 12월15일의 5共청산 대타협」 약속을 깨고 全斗煥씨 등의 사법처리를 요구했던 사실을 잊어선 안 될 일이다. 金대통령의 변신에 불평을 하는 보수층은 그들부터 먼저 나서서 당당하게 『5·18 사법적 심판은 안 된다』고 말했어야 했다. 金東煥(김동환) 변호사 등 극히 일부 지식인들만이 그런 태도를 취했었다. 보수층은 그들이 선택한 대통령이 외롭게 버티고 있는데도 아무런 응원을 하지 않았으니 배신감을 느꼈던 이는 오히려 金泳三 대통령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金泳三 대통령은 혼자선 버틸 수 없었나. 그렇지는 않다. 헌법재판소가 5·18 관련자들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끝났다는 선고를 해 버리면 金대통령으로서는 한결 짐을 덜게 될 것이었다. 법치국가에서는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법에 의하지 않고는 처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견 불공평해 보이는 이런 원칙을 수용하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金대통령은 오히려 憲裁(헌재)의 선고를 이용해서 국민들에게 법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수 있는, 그리하여 金泳三 정부는 人治(인치)가 아닌 法治(법치)정부란 사실을 널리 알리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金대통령의 대변신을 윤리적 결단으로 보기엔 이 변신으로 상처받은 「윤리」가 새로 세워질 「윤리」보다도 더 크다는 지적이 있다.
1989년 12·15 대합의를 비롯해서 3당합당의 정신과 全斗煥 전 대통령과의 인간관계를 무시한다는 것은 국가지도자로서의 정직성과 신뢰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정직과 신뢰를 버린 대가로 살 수 있는 또 다른 윤리는 무엇일까. 金泳三 대통령 측에선 역사에 正義를 세운다는 것을 우선적으로 꼽았다. 역사에 정의를 세우려면 與小野大(여소야대)의 6共시절에 했어야 했다. 全斗煥 전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낼 때 한꺼번에 계산하여 그를 절간이 아닌 감옥으로 보냈어야 했다. 사형집행인의 실수로, 한 칼에 죽게 만들어야 할 사형수를 두 번, 세 번 찍는 것은 너무나 잔인한 일이 아닌가(옛날엔 사형집행의 실수로 죽지 않은 사형수는 살려주었다). 2년 前에 했던 율곡비리 수사를, 똑같은 사람을 상대로 하여 되풀이하고 있는 것도, 2년 전의 수사가 부실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검찰과 정치권이 자신들의 나태를 뒤늦게 깨닫고 『다시 한 번 하자』식으로 나온다면 그들의 과오에 기인한 대가를 국가와 국민이 매번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1995년 10월30일 밤 한 모범택시 운전사(52)는 승객인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3金씨가 힘이 셀 때인 6共의 여소야대 시절에 청문회를 열어 그렇게 닦달을 하고 백담사로 보냈으면 그걸로 끝내야지요. 그때는 뭘 해놓고 지금 와서 또 족치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全 전 대통령의 구속은 보복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어떻게 된 게 한국 사람들은 남이 못되는 것만 보고 좋아들 하는 민족이 됐는지…. 우리는 항상 李씨조선 당파싸움을 하는 식으로 살아가야 되는 모양이지요.』

 

 

 

 

 

 

 

 

 

 

 

 

 

 

 

남이 못되는 것만 보고 즐겨하는 민족 
 
충북 옥천이 고향이라는 이 운전기사를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욕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분의 말 한 마디-『우리민족은 남이 못되는 것을 보고 기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귓전에 남았다. 지난 두 달 동안 소환, 사법처리, 사전영장, 구속, 수감 같은 「잡아넣는」 것과 관계되는 기사가 신문의 1면 머리를 채우는 분위기 속에서 단죄, 처벌, 청산만 요구하는 목소리만 일색인데 용서하자는 가냘픈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金대통령의 대변신이 고뇌 어린 윤리적 결단이라면 對국민 발표부터 성실히 했어야 했다.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을 통해 「말씀자료」를 발표할 게 아니라 직접 발표했어야 했다. 국민들에게 대전환의 배경과 논리를 길게 설명하여 납득시켰어야 했다.
1994년 11월 검찰이 12·12사건에 대하여 군사반란이라 인정하면서도 기소유예처분을 내렸던 바로 그 때 대통령이 그 결정을 뒤집는 특명을 왜 내리지 않았는지, 1995년 5월에 검찰이 5·18 관련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을 땐 왜 묵인했는지, 바로 그때 역사를 바로잡았으면 혼란이 없었을 것을 왜 뒤늦게 정의를 세운다고 나섰는지를 국민에게 간곡히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의무가 있었다. 그 동안 金대통령의 소신만 믿고 따라다니면서 『12·12, 5·18은 역사의 심판으로 돌려야』, 『광주사태는 양면성이 있다』고 열심히 맞섰던 정부·여당·국군·안기부·검찰은 대통령이 사전 예고나 설명 없이 혼자서 오던 길을 되돌아가버리는 바람에 집단적으로 바보가 돼버렸다.
金대통령만 다수 언론에 의하여 영웅으로 추어올려졌고 검찰은 미아가 된 것이다. 최초의 발표문에는 5·17쿠데타와 5·18광주사태 관련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특별입법을 한다는 내용만 있었지 12·12사건을 수사한다는 구절은 없었다. 그런데 특별법이 통과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全斗煥 전 대통령을 12·12사건과 관련하여 조급히 구속시켰다. 특별법을 통과시킨 뒤 5·17 관련으로 수사한 뒤 구속시키자는 게 당초 발표문의 정신일 텐데 특별입법 없이도 구속이 되었으니 우리나라 검찰은 대통령의 의지만 뒷받침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공포를 주고 있다. 검사와 판사는 전직 대통령을 「도주자」로 몰아 잡범처럼 구속 수감했다.
한 경상도 村老(촌로)는 『이불 속에서 전직 대통령을 끌어내가는 식이 아니냐』고 흥분했다. 全斗煥 구속 이후 많은 사람들이 『金泳三 대통령은 전직이 되었을 때 또 어떤 대우를 받을까』 걱정하기 시작한 것은 民心의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金泳三 대통령은 1984년에 「나와 조국의 진실」이란 책을 냈다. 金正男씨(김정남·전 청와대 敎文수석비서관)가 구술을 받아 정리한 책이다. 이런 대목이 있다.
 
<즉흥적인 선택이란 그 대개가 첫째로는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 것이 십상이요, 둘째로는 고뇌를 거친 것이 아님으로 해서 시행착오적인 것이 될 위험이 그만큼 크다. 말하자면 즉흥적인 정책이란 비민주적인 발상에서 비롯되는 것이요, 또한 고뇌를 거치지 않는다는 얘기는 정책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없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어떠한 정책이든, 그것이 지도자가 그 정책의 선택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고뇌의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불쑥이요,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다. 지도자의 결단과 관련한 고민의 흔적이 국민에게 공개될 때, 국민의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할 때, 국민은 언제 어떻게 어떤 정책이 불쑥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힐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金泳三의 「돌아오지 못할 다리」 
 
盧泰愚 비자금이 폭로되고 金大中 총재가 먼저 20억 원 수수를 고백했을 때 金泳三 대통령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몇 갈래가 있었다. 가장 어려운 길은, 스스로도 盧泰愚 자금과의 관련부분을 털어놓은 다음 『자, 이것이 지난날 우리 정치의 실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취임 뒤 한 푼의 돈도 안 받고 있다. 이걸 계기로 깨끗한 정치가 가능한 제도와 풍토를 기성정치권이 만들어내자. 盧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 잔액은 몰수하되 구속기소는 그분의 국가적 기여와 우리나라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보류하자. 6共 때 2인자였던 본인도 이 문제에는 공동책임이 있다』고 나오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국민 앞에 스스로를 투척하는 일대 승부수가 되었을 것이다. 온갖 비난이 쏟아졌겠지만 결국은 다수 국민들의 상식과 관용이 金대통령을 지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金大中, 金鍾泌 총재도 큰소리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金대통령은 가장 쉬운 길-전면부정을 선택했다. 이 전면부정이 金대통령에게 「돌아갈 수 없는 다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12·12사건의 한 교훈은 신군부가 그날 밤에 저지른 일로 해서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지났고 살기 위해서라도 정권을 향해 돌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점이다. 金대통령도 똑같이 「자신에게 결벽 공언」을 보호하기 위해 검찰과 언론을 믿고 大選자금 이외의 다른 분야로 수사를 확대하고 5·18 관련자 처벌 쪽으로 돌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그렇다면 全斗煥 前 대통령은 프로그램에도 없었던 제물이란 얘기가 된다.
 
25년 만에 처음 보는 언론의 선전·선동기관화 
 
盧, 全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함으로써 한국검찰은 약점 있는 자에겐 가장 무서운 기관임을 증명했으나 동시에 대통령의 권력 앞에선 스스로를 부정·경멸하는 일도 할 수 있는 무력하고도 자존심 없는 기관임을 드러냈다. 검찰이 결정했고 헌법재판소가 그 정당성을 인정했던 12·12 기소유예 결정을 아무런 고민이나 사과 없이 하루아침에 취소했다. 국가 대사를, 초등학생이 지우개로 연필글씨를 지우듯 손쉽게 변경한다면 국민들은 예측 불가능한 삶을 살아야 한다. 朝鮮日報 등 몇 개 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도 사실보도와 정직한 논평이란 저널리즘의 원칙을 저버렸다.
1995년 12월8일 밤 9시 MBC 뉴스에서 앵커맨은 『오늘로 全斗煥씨의 단식은 6일째, 그러나 국민들의 시선은 차디찹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적어도 국민 한 명의 시선은 차갑지 않고 동정적이었으니. 그는 정직하게 말했어야 한다. 『…6일째, 그러나 나의 시선은 차디찹니다』 거의 모든 언론은 「모든 국민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모든 국민들」의 이름을 빌려와 全斗煥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 언론의 이런 철저한 선전 선동기관화는 기자 생활 25년 동안 단 한 번도(朴정권 하에서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현상이다.
이는 한국의 언론인들이 권력과 명분에 얼마나 약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KBS까지도 그 동안 공안기관이 친북세력 내지 친북인사로 규정했던 사람들을 등장시켜 신군부를 비난하고 金대통령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 사상 전쟁이 지금도 첨예하게 계속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사실상의 국영방송인 KBS가 그 이념전선을 스스로 허물고 있었다. 신군부가 저지른 惡行(악행)을 생각한다면 언론의 선동적 보도는 면책될 뿐 아니라 당연하다는 논리가 언론계를 휩쓸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린치[私刑]의 논리」이다. 내가 한 대 얻어맞았으니 때린 자를 붙들어 뭇매를 가하는 것은 正義라는 식이다.
이는 法治가 정착되기 한참 이전 미개시대의 논리이다. 全斗煥과 신군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징벌하는 오늘날 한국인의 인간적 존엄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정정당당한 법 집행과 냉철한 보도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시체가 된 지 오래인, 全斗煥 전 대통령을 다시 한 번 죽이기 위해 머리 좋은 검사와 기자들까지 정치인들의 들러리가 되어야 한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후세 교육을 위해서라도 全斗煥에 대한 응징은 절차와 예절을 따라서 엄정하고 상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한 조간신문(1995년 12월6일자) 사설의 두 문장만 인용해본다.
 
<…그럼에도 쿠데타 가담 세력과 그 일부 옹호세력들은 해괴한 논리로 조직적 반발과 저항을 서슴지 않는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려는 이런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불순한 언동이야말로… 시대착오적 책동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언어가 판치는 사회에서 과연 사람들의 심성이 비틀려지지 않고 배길까. 1995년 12월7일자 모든 조간엔 「全씨, 崔 前대통령 권총협박」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1면 톱 내지, 준톱으로 크게 보도됐다. 다음날엔 1단 기사, 또는 다른 기사에 붙은 꼬리로서 李亮雨(이양우) 변호사가 「권총협박」 운운한 사람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는 내용이 실렸을 뿐이었다.
저널리즘의 원칙을 설명할 때, 「동쪽에서 해가 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서쪽에서 뜬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내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우스개가 인용된다. 오늘날 한국 언론이 범하고 있는 가장 큰 실수는 金泳三 대통령의 코치에 대한 반론과 全斗煥 측을 옹호하는 견해를 반영시켜 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침묵하는 온건한 견해는 반영되지 않고 과격한 큰 목소리는 과잉 대표되고 있다.

 

 

 

 

 

 

 

 

 

 

 

全斗煥은 한국인의 거울 
 
民心이 반전하고 있다. 全斗煥 전 대통령에 대한 거친 구속집행 이후 民心은 反YS性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구속시킴으로써 金대통령은 비장의 펀치를 날린 셈이 된다. 全 전 대통령은 한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욕은 다 먹었으니 이젠 더 당할 것이 없는 밑바닥 삶으로 떨어졌다. 더 떨어질 곳이 없는 상태는 비참의 극치이면서 또한 용기와 도전의 시작이 된다. 全 전 대통령이 죽기를 각오하고 단식을 하고 있다면, 그러다가 정말 사망한다면 한국인은 巨大(거대)한 심리변화를 겪을 것이다. 全斗煥이란 특이한 존재는 항상 인간적 흥미를 자극해 왔다. 그가 늘 話題(화제)의 대상이 돼 왔다는 것은 그가 재미있는 인간형이란 의미이다.
그의 매력은 솔직하고 담백한 성격이다. 「순 국산 土種(토종)」이란 말로 그의 성격을 평한 옛 부하도 있었다. 「토종 한국인」 全斗煥 전 대통령은 이제 모든 한국인들의 거울이 되고 있다. 全斗煥이란 거울을 통해서, 그에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알게 되고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되고 우리 한국인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만약 全斗煥 전 대통령이 사망하는 불행이 생긴다면 역사청산론자들의 입장에선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청산이 될 것이다. 갖은 비난과 욕설, 위선과 증오를, 지난 역사의 찌꺼기로서 감싸 안고 거창하게 쓰러지는 모습은 그들 청산론자들의 꿈일지도 모른다. 그 꿈이 이뤄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全斗煥에게 우리가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을 냉정하게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우리의 시선과 손가락이 金대통령 쪽으로 지향하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1996년 총선에서 평가받을 것 
 
언론의 선동성과 비례하여 보수층의 반감도 커지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여론에 끼치는 언론의 영향력은 제한적이다. 기자는, 언론의 일방적 보도를 비난하다가 『선거 때 보자』고 벼르면서 입을 닫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하고 있다. 두 전직 대통령 구속이 金대통령이나 신한국당의 득표강화로 연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투표성향의 결정적 인자인 지역구도는 아직도 요지부동이기 때문이다. 金潤煥 대표의 말대로 요사이 높아진 金泳三 지지율 중에는 金大中 지지표가 숨어 있고 선거 때는 이들이 金大中씨 편으로 돌아가버릴 것이라는 분석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대통령 중심제의 한계를 지적하고 내각제 개편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한 사람도 온전하지 못한 것은 그 인간의 결함보다는 제도의 결함 때문이라는 시각을 갖게 한다. 대한민국 검사는 대통령 한 사람뿐이란 얘기가 나오고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을 알면서도 고치는 것은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며, 강력한 대통령 밑에선 정치가 없어지고, 천문학적이 돈이 드는 대통령 직선으로 당선되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가장 부패한 정치인이 돼 버리며, 정보·수사권을 독점한 대통령 때문에 엘리트들이 권력 기생적 체질을 버리지 못하게 된다는 등등의 문제들이 이제는 일반 시민들도 공감하는 사항이 되고 있다. 
 
YS에 대한 결정적 폭로 
 
金泳三 대통령에 대한 결정적 폭로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최근 두 달 동안 金대통령이 쌓아올린 「5, 6共단죄」란 벽돌집은 겉으로는 강고한 것 같이 보이지만 대단히 불안정한 바탕위에 서 있다. 朴啓東 의원의 폭로 같은 결정적 폭로가 金대통령을 향해 터질 때는 이 벽돌집이 三豊(삼풍)백화점처럼 붕괴해 수많은 정치적 사상자가 발생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盧泰愚·全斗煥 비자금 수사를 통해서 검찰은 국민들이 양해하고 넘어갔던 大選자금·정치 자금 등 과거의 非理(비리)까지도 새삼 문제가 되도록 만들었다. 이 칼날이 盧, 全 두 사람을 벤 뒤엔 金대통령 쪽으로 향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컨대, 盧대통령을 파렴치범으로 만들었던 6共시절의 정치자금과 金泳三 대통령후보가 재벌회장들로부터 직접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또 일부 확인되기도 한) 엄청난 14大 大選자금 사이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金대통령이 받은 大選자금은 장차 공무원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에게 미리 주어놓은 「사전수뢰죄」에 해당될 수 있다고 보는 법조인도 있다. 大選자금에 대한 정보를 쥐고 있는 盧泰愚 전 대통령은 구속되기 전 가족에게 그 정보를 인계해주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 정보는 대단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으며 터질 때까지도 계속해서 일정한 위협력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지난 大選 때 金泳三 후보의 3大 모금책으로 알려져 있는 李源祚(이원조), 李龍萬(이용만), 금진호 세 사람의 입도 문제이다. 중립내각 안기부의 기조실장으로서 경북도민회 회장이 돼 金泳三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던 嚴三鐸(엄삼탁)씨의 입도 있다. 金泳三 대통령의 남은 大選자금이 그 뒤 어떻게 관리되었고 지금 어떻게 돼 있느냐 하는 의문도 언젠가는 풀려야 할 사항이다.
全斗煥 구속·특별입법의 진짜 동기가 大選자금 공개를 피하기 위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다수 국민들 사이에 정착되는 날에는 金대통령은 한국 보수층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다가오는 4월 총선에서 대패할 가능성이 높다. 金泳三 대통령이 치밀한 계획 없이 일을 벌여 수습도 어렵게 되고 장기적 혼란으로 빠져든다는 것이 확실해져 중산층의 입에서 『불안해서 못 살겠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총체적 위기 국면이 전개될 것이다. 大選 자금 문제와 이른바 역사청산 문제는 인간 金泳三과 정권의 본질적인 바닥을 드러내게 만들 것이다. 金대통령은 이념노선·역사관·의리 같은 총론적이고 인격적인 요소들이 뒤엉겨 있는 민감한 이슈를 만들었기 때문에 성패가 어디로 나느냐에 따라서 상처나 성취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차라리 전쟁이 났으면 한다 
 
12·12, 5·17, 5·18 사태의 주역은 군부였고 오늘날의 일대 소용돌이가 귀착하는 곳도 결국은 군대이다. 金泳三 대통령은 「선량한 군인들의 명예심을 더럽힌」 신군부를 처단하여 국가에 헌신하는 군대의 명예를 되찾아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하려면 아주 섬세한 손을 가진 외과의사가 필요하다. 「군부」라는 건물의 내력벽이었던 하나회를 허물 때는 봉을 세워가며 했어야 했고, 소수의 정치군인에 대한 비판이 전체군대에 대한 비판으로 혼동되지 않게끔 신경 썼어야 했으며, 무엇보다도 군대 안간 사람들이 역대 정부의 정통성을 허물고 군사文化(문화)를 비판하는 데 앞장서는 이 부조리의 극치를 저지해야만 했었다.
한 장교는 요사이의 군대사정을 이렇게 전했다.
『하나회 출신이 물러나니 소신 없는 장교들이 나타나 무사안일만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회」가 되었기 때문에 출세한 것이 아니라 뛰어났기 때문에 하나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과거의 군통수권자를 잡범 다루듯 하는데, 지금 군통수권자의 국방정책을 우리가 어떻게 병사들에게 교육시키겠습니까. 기동훈련을 하려고 나간 전차가 민간차량을 피해 다녀야 하고, 외출 나가면 술주정뱅이들이 「야 장교 이리 와 봐!」하고 시비를 거는 판입니다. 광주사태 진압에 관계한 현역 지휘관들의 명단을 언론에 공개하면 그 지휘관은 부하를 통솔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일부 장교들은 차라리 전쟁이라도 났으면 하고 기다리는 심경입니다. 그래야 군대의 가치와 고마움을 국민들과 정치꾼들이 알게 될 것이니까요.』
 
청산이 불가능한 全, 盧의 업적들 
 
金泳三 대통령은 『全斗煥 구속은 5, 6共 인맥과의 전면적 단절이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 언론은 몇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모든 惡의 근원을 全, 盧두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다. 全씨는 1989년에 백담사를 찾아온 불교신도들과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여러분들 중에는 전직 대통령이 어떤 꼴로 지내고 있는지 구경하려고 오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바깥에서는 재임 기간에 나쁜 짓만 한 사람이라고 저를 욕하고 있는데, 사람이 실수로써도 잘한 일 하나는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 식으로 말입니다.』 全, 盧 두 사람이 「소발에 쥐잡기」식으로 이룬 실적은 이미 수치로 나타나 있다.
1980∼1990년의 11년간(이 시기는 두 「군사반란 수괴」의 재임기간이다)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의 약 200개 나라 중에서 1위였다. 1980∼1989년 사이 한국의 공업 성장률은 연평균 12.4%로서 세계 5위였다. 朴正熙 시대인 1965∼1980년 사이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9.5%로서 세계 9위였다. 全斗煥씨는 경제성장 성적표에서 오히려 朴대통령을 앞질렀다. 서울올림픽은 이념의 벽을 부순 상징적 사건으로서 동구공산권의 붕괴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세계적 행사의 세기적 대성공은, 서울올림픽 유치를 결단했던 全대통령과 조직위원장으로 일했던 盧대통령을 빼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全대통령은 누가 뭐래도 평화적 정권이양을 하고 나온 최초의 군출신 대통령이다. 어찌 보면 평화적 정권이양은 반쪽만 성공했다. 권력자가 순순히 정권을 넘겨준 점에선 평화적이었으나 그 정권을 받은 편이 그를 백담사로 보냈다가 다시 감옥으로 보낸 점에서 「평화적」이란 표현이 걸맞지 않다. 盧대통령이 적기에 추진한 북방정책은 북한의 후방을 우회적으로 포위한 대전략이었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활동공간을 아시아 대륙으로 확장시킨 쾌거였다. 누가 뭐래도 그는 민주화를 실천한 대통령이었다. 위의 사실은 두 사람이 사형당한 뒤에도 지울 수 없는 역사의 기록이고 절대로 청산할 수 없는 역사 그 자체이다. 
 
全斗煥 가두어 놓고는 공정한 경기가 안 된다 
 
金대통령과 일부 국민들이 이왕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구속시키고 역사를 청산하겠다고 나섰으니 그 게임이라도 공정하게 해야 한다. 1989년 말에 끝났던 1차 게임결과를 몰수하고 재경기를 하게 되었다면 세 번째 경기를 또 다시 하지 않도록 이번에만은 공정하게 하자. 우선 全斗煥 전 대통령을 불구속 상태에서 이 게임에 임하도록 해야 한다. 근대 재판의 기본 규칙은 피고인과 검찰 사이의 공방전이 공정하게 이뤄지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증거인멸과 도주의 위험이 없는 전직 대통령, 유죄확정시까지는 무죄인의 대접을 받아야 할 한 시민으로서의 全斗煥씨를 가두어놓고,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정치재판·여론재판을 다해버린 이 재경기에 누가 승복하겠는가.
全斗煥씨가 오늘날 겪고 있는 수모의 근원은 15년 전 그가 鄭昇和 장군에게 가했던 모욕이다. 한 인간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것, 비굴해지도록 강압하는 것 이상의 惡行은 없다. 全斗煥 전 대통령을 구속한 사람들은 全斗煥씨를 「제2의 鄭昇和 총장」으로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全斗煥씨가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고 검사도 당당하게 구형하고, 판사도 당당하게 선고하면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의로 가는 大道無門(대도무문)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출처 : <1996년 1월호 月刊朝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