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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인심’ 후했던 위유런, 쑹즈원·쿵샹시에겐 인색

淸山에 2013. 5. 26. 20:30

 

 

 

 

 

‘글씨 인심’ 후했던 위유런, 쑹즈원·쿵샹시에겐 인색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3>

김명호 | 제324호 | 20130526 입력

 

 

대륙 시절, 부총통에 선출된 경쟁자 리쭝런(李宗仁)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심계원장 위유런(오른쪽 둘째). 1948년 4월 29일, 난징. 다음날 감찰원장 임명 통보를 받았다. [사진 김명호] 

  

초서의 성인(草聖) 위유런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당장 생각나는 대로 몇 편만 소개한다.

위유런은 열한 살 때 왕희지(王羲之)의 아자첩(鵝字帖) 연습을 시발로 매일 붓글씨를 썼다. 청년 시절엔 북위(北魏:386∼557) 비첩(碑帖)의 장중함에 심취했다.

스스로 “중년에 들어서면서 초서에 흥미를 느꼈다. 처음 3년간은 하루에 한 글자만 수백 번씩 썼다. 한 일 자(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화선지를 대하면 정신이 들었다”고 할 정도로 중년 이후엔 초서(草書)에만 매달렸다.

현존하는 위유런의 작품은 대략 1만 점을 상회한다. 다작이다 보니 저명 서예가 선인뭐(沈尹默·심윤묵)의 조롱을 받았다. “위유런 원장은 글씨를 너무 많이 쓴다. 무슨 물건이건 희소가치가 있어야 한다. 장차 내 것보다 값이 덜 나갈 테니 두고 봐라.” 위유런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귀해야 가치가 있구나”라며 웃어 넘겼다. 아무리 도처에 널려 있어도 명품은 명품이기 마련,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선인뭐의 작품 값은 위유런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감찰원장 위유런은 집안에 경비원을 두지 않았다. 누구나 드나들게 내버려두고, 돌아갈 때는 글씨를 한 점씩 써줬다. 무턱대고 글씨를 선물하지는 않았다. 맘에 드는 사람에게만 써줬다. 사회적 지위나 직업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퍼스트 레이디 쑹메이링의 친오빠이며 중국의 재정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쑹즈원(宋子文·송자문)은 위유런의 글씨를 유난히 좋아했다. 당대의 명장(名匠)이 만든 부채를 구입하자 위유런을 관저로 초청했다. 차가 몇 순배 돌아가자 부채를 정중히 내밀며 몇 자 부탁했다. 위유런은 연금으로 행방이 묘연한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의 안위만 물으며 붓을 들지 않았다. 장제스의 동서 쿵샹시(孔祥熙·공상희)도 행정원장 시절 비슷한 꼴을 당하고 끙끙 앓은 적이 있다.

수도 난징(南京)의 푸즈먀오(夫子廟) 인근에 있는 찻(茶)집 여종업원의 청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맨 정신에 “옥으로 만든 주전자에 청춘을 담아 팔며 빗소리를 즐긴다”를 즉석에서 선물했다. 작품을 받아 든 여인이 날아갈 듯 절을 올리며 수염의 유래를 묻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은 가관이었다. “젊었을 때 신문기자를 한 적이 있었다.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돌아다니느라 깎을 시간이 없었다. 수염이 길다 보니 세수를 안 해도 표가 안 나서 편했다.” 위유런은 눈치는 없는 사람이었다. 젊은 여인이 “나도 수염 긴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세계적인 중국음식점 ‘鼎泰豊’도 위유런의 글씨다. 원래는 가짜를 걸어놨지만 사실을 안 위유런이 간판을 떼게 하고 ‘鼎泰豊油行’을 직접 써줬다.

위유런은 홍콩에 있는 외손자 류준이(劉遵義·유준의)를 총애했다. 류준이도 방학만 되면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서예와 독서를 가장 중요시했다. 생활은 평범하고 소박했다. 밥상에 국수와 만두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양복 입은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긴 전통복장에 헝겊으로 만든 신발만 신고 있었다. 홍콩으로 돌아갈 때마다 글씨를 한 점씩 써서 가방에 넣어주곤 했다. 1961년, 미국 유학 떠나는 날 통증을 무릅쓰고 비행장까지 나와서 나를 송별했다. 내 유학비용을 마련하느라 은행에서 돈 빌렸다는 말을 듣고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1964년 11월 10일 위유런이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총통 장제스가 성명(褒揚令)을 발표했다. “행동에 덕이 묻어났던 사람. 항상 꾸밈이 없고 온후했다. 일찍이 뜻이 맞아 함께 혁명을 고취했지만 깊이는 헤아릴 방법이 없었다. 위험에 처할수록 건필에 힘을 더해, 바람도 기개를 누르지 못했다.” 타이베이에서 가장 높은 관음산에 모시라며 장지(葬地)도 직접 물색했다.

등산 동호인들은 대륙을 그리워하던 위유런의 소원을 풀어주겠다며 모금에 나섰다. 해발 3997m 위산(玉山) 정상에 대륙을 향해 동상을 건립했다. ‘大陸可見兮, 不再有痛哭’(대륙을 볼 수 있으니, 다시는 통곡하지 않겠다)를 새겨 넣었다.

위유런 사망 20여 년 후 국·공 간의 묵은 원한이 풀리기 시작했다. “조국을 두 동강 낸, 못난 조상 소리들을 생각하면 진땀이 난다”던 위유런의 탄식은 기우(杞憂)였다. 양쪽이 만났다 하면 기업인, 학생, 정치가는 물론 심지어 건달들까지도 위유런의 ‘望大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대륙, 대만 할 것 없이 연말에 열리는 시 낭송에도 ‘望大陸’은 빠지는 법이 없다.

2006년,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이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위유런의 기념관 건립계획을 발표했다. 소식을 접한 홍콩 중문(中文)대학 교장 류준이는 학생 시절 타이완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가 써줬던 작품 20여 점을 푸단대학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기증했다. 상하이로 보내기 전에 중문대학 문물관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홍콩인들에게 조부의 작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보였다.

 

 

于右任肖像照 (Yu Yu-Jen’s photography) by  Yu Youren

 

 

 

 

 

 

 

 

 

 

 

중공멸망을 예시하는 4대징조

 

쉬루(許茹 : 중화권 시사평론가)

 

 

얼마 전 중화민국시기 감찰원장(한국의 감사원장에 해당)을 34년이나 역임한 정치가이자 유명한 서예가인 위유런(于右任) 선생의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 가지 악인(亡國三惡因)’이란 문장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 문장은 불과 100여글자에 불과한 짧은 문장이지만 당시 청나라가 멸망하는 3대원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의 내용이 기묘하게도 현재 중국의 상황과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진다.

 

 

이 문장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民窮財盡,社會破產,國家破產. 國有金,吝不與人,爲他人藏. 此其一. 善不能舉,惡不能退,利不能興,害不能除. 化善而作貪,使學而爲盜. 此其二. 宮中、府中、夢中,此哭中、彼笑中,外人窺伺中、霄小撥弄中,國際偵探金錢運動中,一舉一動,一黜一陟,墮其術中. 此其三.”

 

다시 말해 위 선생이 보기에 그 어떤 정권이든 상술한 3가지 조건을 충족한다면 절대적으로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중공정권은 이미 이 3가지 징조를 모두 충족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점에 대해 한번 분석해보자.

 

문장에 따르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첫 번째 악인은 백성인 가난해지고 사회와 국가가 파산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일으킨 원인은 정부가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면 극심한 빈부격차가 오히려 100년 전보다 더 심해졌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중국의 빈부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편이며 상위 0.4%의 부자들이 전체 국부의 70%를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99.6%의 인구가 겨우 30%의 부를 갖고 있을 뿐이다. 전형적인 중국 농촌가정의 하루 생활비는 2달러를 넘지 못하지만 부유한 가정에서는 럭셔리 승용차를 여러 대 보유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가난한 백성들은 학교를 다니지도 못하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으며 또 살 집마저 없다. 그럼에도 물가가 상승함에 따라 갈수록 많은 도시의 일반 민중들이나 화이트칼라 근로자들은 생계 문제로 시름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상실했다. 며칠 전 홍콩 중문대학 교수 란셴핑(郎鹹平)은 선양에서 한 강연에서 현재 중국의 경제상황이 아주 엉망이며 많은 사람들의 눈에 중공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하며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중공정부는 반드시 파산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위 선생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두 번째 악인으로 꼽은 것은 선량한 사람을 발탁하지 않고 악한 사람을 제지하지 못하며, 사회에 유리한 일을 추진하지 않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을 제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량한 사람도 탐욕스럽게 변하고 배운 사람이 도둑이 되도록 해” 탐오와 도적이 도처에 판치게 된다. 분명한 점은 이 모든 것을 조성한 원인이 제도적인 부패로 도덕의 타락을 초래했다는데 있다. 현재 중국의 상황이 바로 이렇다. 아울러 ‘진선인(眞善忍)’을 믿는 수천만 민중들을 탄압해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심지어 길에서 넘어진 노인을 부축해준 선량한 사람이 흑백이 뒤바뀐 법관에 의해 손해배상 판결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선량한 사람들이 바보취급을 받는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중국인들이 냉담해지고 있다. 최근 포산(佛山)에서 발생한 어린 웨웨가 뺑소니 사고를 당했음에도 18명이 되는 행인들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 한 사건은 그 극에 달한 것이다. 또 매일 술, 여자에 취하고 돈을 긁어모으기 급급한 각급 관리들이 자기 ‘백성들’을 돌볼 시간이 있겠는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세번째 악인은 정부 내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국가이익을 팔아먹고 경제를 이용해 외국 정치인들을 유혹해 자신의 부패한 통치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중국관리들의 행동거지 및 임면과 승진은 모두 금전이익에 의해 좌우된다. 지금의 중국이 언제 이렇지 않은 적이 있는가? 과거 장쩌민이 중공두목으로 있으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중국 북쪽 변경의 100여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영토를 팔아먹고 군대를 500km후퇴시켰다. 서방국가들의 인권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중공은 다년간 얼마나 많은 무역계약을 미끼로 서방정치인들을 매수해 배후에서 비밀교역을 맺었는가? 이런 예들을 찾자면 드물지 않다. 그렇다면 모든 것에서 돈을 우선시하는 중공정권이 과연 얼마나 더 유지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본다면 중공정권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3가지 악인 중 3가지 징조를 모두 갖췄으니 멸망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닌가? 위유런의 문장이 발표된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그토록 강력하고 번영을 누릴 것처럼 보였던 청나라정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중공은 과연 이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중공이 이상 3가지 멸망 징조를 갖춘 외에 또 한 가지 큰 징조를 갖고 있으니 바로 일찌감치 하늘의 뜻이 드러난 것이다. 2002년 6월 구이저우성 핑탕(平塘)현에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產黨亡)’이란 글자가 새겨진 신비한 바위가 발견되었다. 전문가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 바위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으로 인공적으로 새긴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하늘의 멸망계시를 받은 중공정권이 계속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이 구차한 목숨을 이어가는 것은 하늘이 사람들에게 각성하고 마지막으로 진상을 찾을 기회를 주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참고자료 : 위유런(于右任 1879-1964)은 산시(陝西)성 싼위안(三原)출신으로 자(字)는 유런(誘人)이다. 나중에 발음이 같은 유런(右任)으로 이름을 바꿨다. 중화민국 개국원로의 한 사람으로 일찍부터 동맹회 멤버였으며 중화민국이 건립된 후 정부 고위직을 역임했다. 특히 감찰원 원장을 34년이나 지냈으며 근대 중국의 저명한 서예가이기도 하다. 긴 수염으로 유명하다.

 

 

 

중문: http://www.epochtimes.com/gb/11/11/13/n3429385p.htm許茹-四大征兆預示中共滅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