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義는 구현되고 있는가
현존 권력에는 맞서고 前권력에 대해서는 따뜻한 시선을 견지해 온 月刊朝鮮은 당대의 권력에 굴종한 과오를 그 권력이 시체가 되었을 때 난도질로써 씻으려 하는 작금의 언론 풍토를 목도하면서 正義(정의)구현의 원칙과 저널리즘의 原点(원점)을 생각해 보았다. 침묵하는 다수의 온건한 생각이 봉쇄되고 과격한 일부세력의 거친 숨소리가 텔레비전 화면과 신문 지면을 거의 독점하는 가운데서 벌어지는 이른바 「역사청산」은 또다시 「恨(한) 많은 세력」을 남기고 말 것이다. 공평한 진실규명과 상식적인 法집행을 외면하면 당대의 敗者(패자)는 후대에 가서 늘 勝者(승자)로 되살아난다. 지금은 金泳三(김영삼)-全斗煥(전두환) 재대결의 공정한 게임 규칙을 확립할 때이다. 그리하여 과거와 오늘이 싸우다가 내일을 잃고 마는 악순환을 여기서 끊을 때이다.
盧泰愚(노태우) 전 대통령의 구속기소를 몰고 온 일련의 사건 흐름에서 최초의 한 방울을 떨어뜨렸던 기사는 1995년 6월호 月刊朝鮮에 실렸던 咸承熙(함승희) 변호사의 동화은행 수사 축소·은폐에 대한 폭로[金然極(김연극) 기자의 기사]였다. 이 기사를 기폭제로 하여 기자들과 정치인들의 6共 비자금에 집중적으로 파고들게 되었고 그런 시류 속에서 朴啓東(박계동) 의원의 결정적 폭로가 터졌다. 全斗煥 전 대통령의 감옥行을 몰고 온 12·12-5·18사건 再起(재기)의 과정에서도 月刊朝鮮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95년 9월호의 부록으로 공개된 「12·12사건 保安司감청 테이프」는 장군들의 긴박한 현장 육성으로써 12·12사건을 「군사반란」으로 자연스럽게 규정하도록 만들면서 신군부 사법처리 요구 운동에 기름을 부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月刊朝鮮 기자들은 全, 盧 두 전직 대통령의 구속에 대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정의는 구현되었다」고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데 문제의 본질이 있다. 공평한 진실규명에 입각한 상식적인 法적용은 정의구현의 2大 조건이다. 권력의 큰손이 검찰권에 개입하여 일반의 진실만 노출시키고, 다수 언론사가 앞장선 선전·선동의 바람이 일어나 상식을 휩쓸고 허문 다음 그 황폐한 心象(심상)에다가 法을 갖다 대었을 때는 정의구현 대신에 마녀사냥만 있을 뿐이다.
月刊朝鮮은 12·12사건, 비자금, 광주사태에 대한 공평한 진실규명을 지향해 왔다. 月刊朝鮮 기사가 5共 청문회 때 여야 국회의원 양쪽에 의해서 가장 많이 인용된 것도, 우리는 항상 사건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사건의 전체상을 그리려고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의 축적물들이 정의구현이 아니라 現代史(현대사) 파괴의 영상테러에 도용되는 작금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기자는 「차라리 특종을 하지 말았을 것을」하고 느낄 때도 있다.
서민의 정의감이 10·26 불렀다
月刊朝鮮은 지난 15년간 12·12사건을 우리 시대의 최대 정점으로 만드는 데 최대의 기여를 한 매체이다. 12·12사건을 금기의 章(장)에서 끌어낸 역사적 인터뷰(1987년 9월호 鄭昇和 증언)에서 12·12사건 녹음테이프 발굴까지 月刊朝鮮은 이 군사반란과 관련된 특종들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2·12사건의 뿌리는 그 두 달 전인 釜馬(부마)사태이다. 釜馬사태는 朴正熙(박정희) 철권통치에 대한 최초의 시민적 저항이었다는 의미가 있다. 중산층이 主流(주류)인 도시의 서민층이 본격적으로 학생들과 합세하여 反정부 시위를 벌인 것은 朴正熙 시대 18년 중 이것이 최초이자 최후였다. 현지를 시찰한 金載圭(김재규) 당시 정보부장은 부마사태를 民亂(민란)으로 인식했다. 이런 인식이 8일 뒤 「유신의 심장을 향하여 야수의 마음으로」 방아쇠를 당기게 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10월16일 밤, 그때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였던 나는 부산 남포동 앞 대로에서 경찰 진압 트럭이 시위대의 손에 넘어가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불타오르는 현장에 있었다. 그 화염은 많은 시민들을 흥분시켰고 朴정권에 대한 공포감을 일순 마비시켰으며 카니발 같은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기자는 그 순간 문득 「아, 이 사태는 결국 계엄령을 부르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부산시민들과 학생들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내몬 것은 정의감이었다.
그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朴正熙정권은 YH사건, 金泳三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국회의원 제명 등 잇따른 무리수를 두었다. 권력의 도구가 된 法과 정당, 그리고 어용화된 언론을 동원한 朴正熙의 强攻(강공) 드라이브는 군사작전처럼 일사불란했으나 서민들의 마음속에선 反感(반감)이 쌓여갔던 것이다. 이 反感을 분석해보면 장기 집권에 대한 싫증, 金泳三 제명에 대한 분노, 어용언론에 대한 증오, 그리고 물가폭등과 과중한 세금에 대한 상인층의 불만이 나타난다. 그런 여러 요인들이 통합된 하나의 표현은 「비열한 권력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었다.
요즘처럼 자유선거가 있었다면 『좋다, 선거 때 혼내주겠다』고 벼를 수 있었겠지만 그런 출구가 없는 상태에서 부산 사람들은 「화가 나서」 행동으로 나섰던 것이다. 釜馬사태 때 계엄군으로 투입된 것은 서울에서 급파된 공수부대였다. 그때까지 한국인들은 권력의 하수인 같은 검찰과 경찰보다는 국민의 군대인 국군에 대해서 아주 높은 친근감과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런 믿음을 배신한 것이 공수부대였다. 그들은 단순히 「겁을 준다」는 목적 하에서 무고한 행인들까지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다. 「대한민국에 이런 군대가 있었나」하고 기자도 놀랐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에도 물샐 틈이 없이 계속되었던 民軍(민군)우호 관계에 최초의 금이 가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런데 우리 軍지휘부는 이 현상을 「문제」로서가 아니라 「성공사례」로 해석했다. 시위엔 공수부대를 풀어 조기에 강경진압하면 된다는 교훈, 그것을 여섯 달 뒤 광주에서 다시 적용했던 것이 民心을 모르는 우리 군 지휘부였다.
鄭昇和 총장의 비극
12·12사건, 5·17쿠데타, 광주사태뿐 아니라 최근 일고 있는 소위 역사청산 논쟁은 10·26사건과 朴正熙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데서 起因(기인)하고 있다. 朴正熙란 巨木(거목)의 그늘 아래에서 이뤄지고 있는 정치 논쟁이고 권력투쟁이니, 한국은 아직도 朴正熙 시대라는 터널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朴正熙의 죽음을 「민주화의 好機(호기)」로 본 것은 대다수 국민과 공화당·유정회를 포함한 기성정당이었다. 「국가안보의 위기」로 인식한 것은 일부 국민과 全斗煥 장군 그룹이었다. 金載圭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면서 사회에서는 朴正熙 격하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부에서는 鄭昇和(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한 노장·非정규 육사 출신들이 朴正熙 친위세력화한 하나회를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하나회가 뿌리를 둔 것은 육사 11기 이후의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이었다. 이 집단은 朴正熙에 대한 충성심이 아주 강했다. 따라서 정치권과 사회에서 일고 있는 朴正熙 격하운동과 金載圭 미화 움직임에 대해서 불안 분노하고 있었다. 엘리트 의식이 강한 정규육사 출신들은 또 非정규육사 출신인 군상층부에 대해서 일종의 경멸감까지 갖고 있었다. 이런 장교들에게는 鄭昇和 총장의 10·26사건 당시 행적이 「지울 수 없는 의혹」으로 다가왔다. 신군부측에선 아직도 鄭昇和 장군이 그날 기회주의적 자세를 취해 결과적으로 金載圭를 도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기자의 판단은 확고하다 鄭昇和 장군은 그날 밤 거의 최선의 대응을 했다. 金載圭와의 공모는 물론 없었다. 초기에 정보 부족으로 다소 흔들렸다고 해도 그것은 어떤 인간도 그런 엄청난 상황에서는 겪을 수밖에 없는 당황과 주저의 수준을 넘지 않는다. 「선비 같은 장군」 鄭昇和 총장의 비극은 朴正熙 대통령이 피살되는 그 현장 가까이에 金載圭와 함께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이 사실은 의혹으로 증폭됐다. 역사적 변동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고 인식이다.
정규육사 장교단의 인식은 「鄭昇和 장군이 의심스럽다」는 쪽이었다. 이런 의혹은 12·12사건 그날 밤 全斗煥 측에서 『이건 쿠데타가 아니야. 鄭昇和 장군을 10·26사건 수사와 관련해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상사에 불과해. 그러니 육군본부측의 군출동 요구에 응해선 안 돼!』라고 설득할 때 많은 지휘관들이 납득하도록 만든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鄭昇和 총장이 10·26 직후 도의적 책임을 지고 계엄사령관직을 사임했더라면, 혹은 崔圭夏 대통령이 鄭장군을 교체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1987년에 鄭昇和 장군을 처음으로 인터뷰한 것이 계기가 돼 기자는 지금까지도 그를 가깝게 만나고 있다. 鄭장군은 6·25 때는 용감한 지휘관이었고 육군참모총장으로서는 오로지 본연의 임무에 헌신하여 駐韓(주한)미군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군인이다. 국내 정치엔 무관심했지만 그것이 비난의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좋은 군인이 역사의 敗者가 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역사에서 과연 正義가 구현될 수 있는가 하는 話頭(화두)를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