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기술을 소련에 넘긴 간첩 이야기
역사를 바꾼 푹스
1945년 7월21일, 항복한 독일의 古都(고도) 포츠담에서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과 함께 회담을 하고 있던 트루먼 미국 대통령 앞으로 기다리던 보고서가 들어왔다. 原爆(원폭)개발 맨해튼 프로젝트 지휘관 글로브 장군이 보낸 電文이었다.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있었던 核실험에 대한 보고였다. 33m 철탑 위에 장치한 핵폭발장치를 터뜨렸더니, 화염은 버섯구름처럼 치솟아 고도 3000m에 달하였다. 수천 t의 모래, 쇠조각이 상공으로 말려 올라갔다. 먼지 구름은 상공 12km까지 솟았다. 섬광은 280km 떨어진 곳에서도 볼 수 있었고, 160km까지 폭음이 들렸다.
파괴력을 실험하려고 폭발장소에서 약800m 떨어진 곳에 철근 구조물을 시멘트로 단단히 고착시켜 세워 놓았다. 이 철 구조물은 뿌리가 뽑히고 휘어지고 산산조각이 났다. 철근콘크리트 건물도 핵폭발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사흘 뒤 이 정보를 스탈린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매우 파괴력이 강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고 했다. 스탈린은 '일본에 대하여 그 폭탄을 썼으면 좋겠다'라고만 했고, 新武器(신무기)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자는 주문을 하지 않았다. 미국측은 차분한 스탈린의 반응을 보고는 이 사람이 핵폭탄의 역사적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誤判이었다. 스탈린은 뉴멕시코의 핵개발 연구소에서 일하는 스파이를 통하여 핵개발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날 스탈린은 애써 무관심한 것처럼 행동하였을 뿐이다. 역사를 바꾼 核스파이는 클라우스 푹스라는 영국 과학자였다.
그는 1911년에 독일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라이프치히 대학의 신학 교수였다. 그는 킬 대학에 다닐 때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다. 敵의 핵 개발을 돕는 것과 같은 어머어마한 간첩질은 이념적 소신을 가진 자가 자진하여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푹스도, 뒤에 설명하는 로젠버그 부부도 그러하였으니 한국도 그럴지 모른다.
푹스는 나치가 집권하자 탄압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 量子力學(양자역학)을 전공하여 실력으로 에딘버러 대학 교수가 되었다. 그는 1942년부터 영국의 原爆(원폭) 개발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미 푹스는 소련군 정보총국(GRU)과 접선하고 있었다. 푹스를 소련 스파이 조직에 소개시켜준 사람도 독일 공산당원이었다.
푹스는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였으니 소련에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1943년 푹스는 미국에 건너가 미국의 원폭개발계획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플루토늄 폭탄의 핵심 기술인 內爆(내폭)장치 개발에 종사하면서 정보를 소련의 첩보기관에 제공하였다.
로젠버그 부부 간첩
푹스는 미국이 原爆에 이어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하자 수소폭탄의 이론적 개념을 적어 소련측에 주었다. 戰後(전후) 그가 제공한 정보 중에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의 핵물질 생산량에 대한 통계였다. 당시 미국은 한 달에 100kg의 우라늄과 20kg의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 정도의 생산량을 가지고는 1950년을 前後(전후)한 시점에서 미국이 핵무장한 소련을 상대로 핵전쟁을 일으킬 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소련은 1949년에 핵실험 성공). 이런 판단이 한국전쟁에도 영향을 끼쳤다. 스탈린은 미군이 한국전에서 핵무기를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모험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스탈린은 이때 미국의 핵 능력에 대하여 또 다른 루트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첩보기관 및 외무부 안에는 킴 필비 등 네 명의 간부가 소련을 위하여 일하는 간첩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도널드 매클레인은 미국과 영국의 핵 공동 개발 프로젝트에서 영국측의 창구였다. 예컨대 당시 미국, 영국, 캐나다는 ‘통합정책조정기구’를 만들어 핵무기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기구 회의에는 푹스도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이 기구의 공동 사무총장 중 한 사람이 매클레인이었다. 두 사람의 고급 간첩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를 토대로, 스탈린은 맥아더가 한국전에서 原爆(원폭)을 쓸 수 없을 것이란 판단을 하였다고 한다. 이런 판단이 모택동의 중공군 파견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푹스야말로 세계 역사를 바꾼 간첩이란 이야기를 듣는다.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은 당시 소련의 암호를 해독하는 베노나(VENONA) 작전을 통하여 푹스를 의심할 만한 단서를 얻었다(영국 정보기관 MI 6의 미국측 연락관 킴 필비는 이 암호해독 작업에 대하여 소련에 알려주었으나 소련측은 이 정보를 활용하면 필비의 정체가 들통 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른 척하였다고 한다). 영국 방첩기관은 1950년 푹스를 신문하여 범행을 자백 받았다. 푹스는 징역 14년을 선고 받고, 9년을 복무한 뒤 풀려나 東獨(동독)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중국의 물리학자들에게 원폭 기술을 가르쳐주어 1964년에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도록 도왔다. 그는 동독에서 과학원 회원으로 선출되고 원자력 기술 연구소 책임자로 근무하는 등 좋은 대접을 받다가 동독이 붕괴되기 한 해 전 사망하였다.
푹스를 신문한 영국과 미국 정보기관은 그가 해리 골드라는 미국 간첩을 통하여 소련측에 정보를 제공하였음을 알아내고 골드를 체포하였다. 골드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 原爆(원폭)연구소에서 기계 기술자로 일하던 그린글라스를 간첩으로 붙들었다. 그린글라스는 자신의 형부인 줄리우스 로젠버그가 누나를 통하여 자신을 포섭하였다는 진술을 하였다.
“핵 스파이는 살인범보다 더 악질”
율리우스 로젠버그는 유태인으로서 미국 청년 공산 연맹원이었다. 공산당원인 부인을 만난 것도 이 연맹 활동을 할 때였다. 1942년, 로젠버그는 미국 공산당 간부를 통하여 소련의 KGB 요원 세메노프에게 소개되었다. 로젠버그는 미국 통신부대의 레이다 기술자로 근무힌 적이 있었다. 세메노프는 로젠버그에게 부탁하여 더 많은 무기관련 기술자들을 간첩으로 포섭하도록 하였다. 로젠버그에게 로스 알라모스에 근무하는 처남을 포섭하도록 시킨 것도 세메노프였다.
이 사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과 미국의 공산당원들이 소련을 위하여 核(핵) 스파이 역할을 자진하여 수행하였다. 1941~1945년까지는 미국과 소련이 연합군이었으므로 소련을 돕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덜하였다.
1951년 4월 한국전이 한창일 때 로젠버그 부부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어빙 카우프만 판사는 준엄하게 논고했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나는 피고인들의 범죄가 살인보다 더 악질이라고 간주한다. 당신들은 러시아가 과학자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1년 먼저 핵실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벌여 5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생겼고, 백만 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고인들의 반역으로 피해를 볼지 모른다. 피고인들의 반역은 역사의 흐름을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바꿔 놓았다. 우리가 핵무기 공격에 대비한 민방위 훈련을 매일 하고 있다는 것이 피고인들의 반역에 대한 증거이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이 소련의 핵무기를 믿고 한국에서 침략전쟁을 벌였다는 논지이다. 1950년 무렵 핵 스파이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한국이다. 그 한국이 또 다시 북한의 핵무장을 도운 핵 스파이들로부터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세계의 좌익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나 로젠버그 救命(구명)운동을 벌였다.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주장, 유태인 탄압이란 주장이 난무하였다. 프랑스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사르트르, 아인슈타인, 교황까지도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로젠버그 부부는 1953년 6월19일에 전기의자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부인은 즉시 죽지 않아 의사들이 추가로 感電(감전)시켜야 했다. 로젠버그 사건을 둘러싼 논란은 공산권 붕괴 이후 그를 관리하였던 소련 요원의 증언, 소련 암호문 해독자료의 공개에 의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흐루시초르 소련공산당 서기장도 死後(사후) 공개된 자신의 회고담에서 스탈린으로부터 로젠버그가 소련의 原爆(원폭)개발을 앞당겨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