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宋의 간첩, 한국의 從北 권력을 잡은 간첩이 애국자를 죽였다. 趙甲濟 요사이 軍 장교들이 많이 읽는 '宋의 눈물'(鄭淳台)엔 역사를 바꾼 간첩 이야기가 나온다.
12세기 초, 北宋은 金과 연합, 宿敵(숙적) 거란(遼)을 친 뒤엔 비밀리에 거란과 동맹, 金을 공격, 失地를 회복하려 하였다. 일종의 외교적 줄타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꾀는, 거란의 天祚帝(천조제)가 金에 붙들려 宋이 보낸 密書가 발각되면서 파탄나기 시작하였다. 배신당한 金은 宋을 징벌하기 위한 군대를 일으켜 宋의 수도 개봉을 포위하였다. 포위된 개봉에선 主戰派와 강화파가 서로 싸웠다. 宋이 굴욕적인 강화조건을 수락하자 金은 일단 포위를 풀고 물러났으나 宋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다시 남침하였다. 靖康 원년(1126) 11월, 金軍은 한 해에 두 번째로 황하를 渡河(도하), 개봉을 에워쌌다. 金軍의 격렬한 공격이 시작되자 開封城은 籠城(농성) 40일 만에 함락되었다. 재화를 약탈당하고, 부녀들은 끌려가 욕을 당했다. 세계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가 대번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金軍에 복무했던 燕京의 漢人들이 약탈의 안내역이었다. 역대 황제, 특히 徽宗의 콜렉션이었던 書畵·골동품 등은 인기 있는 약탈물이었다. 휘종과 흠종 父子는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金國이 필요로 하는 기술자·예술가 등 수천 명이 북쪽으로 끌려갔다. 이것을 중국사에서는 靖康의 變(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이렇게 宋왕조는 개국 167년 만에 멸망했다. 이 왕조를 중국史에서는 北宋이라고 한다. 北宋의 잔존세력은 양자강 남쪽으로 피란하여 南宋을 세웠다. 南宋엔 秦檜(진회)라는 權臣이 나타나 利敵행위를 하였다. 그는 1127년 北宋이 金에 멸망할 때 어사대장관(감찰원장 격)이었는데 포로가 되었다가 전향, 金軍에서 부역하다가 가족을 데리고 南宋으로 넘어왔다. 금나라 군인들을 죽이고 탈출하였다고 했으나 金이 간첩으로 써 먹기 위하여 살려 보냈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 그 眞僞(진위)는 알 수 없지만 남송의 재상으로 복귀하여 한 행동은 간첩질이었다. 문제는 간첩질이 늘 평화와 화해를 앞세운다는 점이다. 전쟁을 하기 싫어하는 황제에겐 달콤한 정책 대안이었다. 진회는 황제를 설득, '對金 햇볕정책'을 펴면서 主戰派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1140년과 이듬해 金軍은 올출 장군의 지휘하에 南宋을 치기 위하여 남하하였다. 이때 南宋軍은 여러 방면에서 金軍을 격파하였는데 그때마다 진회가 고종에게 아뢰어 이기고 있는 남송군을 철퇴시키고 勝將을 좌천시키거나 파면하였다. 올출은 진회를 이런 식으로 압박한다. "강경론자 岳飛를 죽이지 않으면 평화협상에 응하지 않겠다." 진회는 악비 父子를 역모로 몰아 죽였다. '宋의 눈물' 著者 정순태씨는 秦檜(진회)를 '金의 고정간첩'이라고 단정하였다. 진회는 제 명(65세)대로 살고 죽었는데 최후까지 利敵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한국의 한 從北派 거두의 일생 같다. 南宋의 영종 시절 대신 한탁주는 主戰論을 내세우고 1206년 金을 쳤으나 대패했다. 金은 이 침략사건의 책임을 물어 영종에게 韓의 목을 요구했다. 宋朝는 韓을 암살한 뒤 그 목을 상자에 넣어 金에 보냈다. 金은 韓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다. 일본의 중국사 大家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이렇게 평했다. <무력에 자신이 있었던 여진족의 국민주의는 敵國의 입장을 인정할 정도로 아량이 있었으나, 國力이 쇠퇴하여 敵國으로부터의 압력을 받고 있었던 南宋은 강력한 민족주의에 눈을 떴으나 이것은 단순히 신경질적인 적개심으로서만 발로되었다.> 宋은 경제적·문화적인 富國이었으나 지도층이 文弱, 경제력을 自主국방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끝내는 몽골에 망하였다. 돈으로 決死抗戰 정신을 만들지 못하고 돈으로 평화를 사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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