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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끝나자… 생존 고민에 빠진 英왕실

淸山에 2012. 6. 8. 16:57

 

 

 

 

 

축제 끝나자… 생존 고민에 빠진 英왕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진) 이후에도 왕실을 생존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다.’(시사주간 타임 최근호)

 

 

즉위 60주년을 기념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5일 나흘간의 일정을 마쳤다.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화려하고 성대한 축전이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영국 왕실의 깊은 고민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국 왕실은 그동안 시대 변화에 맞춰 ‘생존’하기 위해 힘겨운 노력을 해왔으며 앞으로도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 왕실 폐지론 넘기 위해 왕조 개명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7월 17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조부인 조지 5세는 왕조 이름을 ‘삭스코부르크 고타’에서 ‘윈저’로 바꾼다고 선언했다. 극단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왕실에 대한 반감이 높아져 왕실의 존폐가 위협을 받자 왕실의 생존을 위해 결단을 내린 것이다. 기존 왕조의 뿌리 중 일부가 독일계여서 거부감이 있는 가운데 1차 대전이 터지자 왕실이 적대국인 독일의 친인척 왕가를 지원한다는 의심까지 받자 왕실은 왕조 개명은 물론이고 러시아 독일 등과의 ‘혈연’ 관계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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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故 다이애나 비 조카딸 ‘...PLAY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한 에드워드 8세가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여성 월리스 심프슨과 ‘세기의 결혼’을 할 때도 왕실은 위기를 겪었다. 왕실에 대한 일반인의 존경심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찰스 왕세자가 1996년 다이애나비와 이혼하고 이듬해 다이애나비가 비극적 죽음을 맞을 때도 일반인의 왕실에 대한 실망이 매우 커 지지도가 낮아졌다.

 

○ 세금 내고, 정치엔 침묵하고

영국 왕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용 요트를 없애고 여왕 개인 재산에 대한 과세에 동의하는 등 긴축 조치를 묵묵히 수용해왔다. 여왕은 왕실 소유 부동산 임대료 수익의 15%를 개인 소득으로 받는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왕실에는 약 70억 파운드의 재산이 있으며 올 3월 기준 1년간 2억3500만 파운드의 임대 소득을 올렸다.

 

여왕은 조부 조지 5세로부터는 ‘봉사하는 왕실’의 자세를, 부친 조지 6세로부터는 ‘균형과 품격을 잃지 않는 여왕’이 되어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병원이나 사회복지시설 등을 방문해 격려하는 등 봉사 이미지를 심으려 한 것은 조지 5세와 부인 메리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영국 언론인 앤드루 마르 씨는 최근 저서 ‘다이아몬드 퀸’에서 “영국 왕실의 자선과 봉사 활동은 사실 왕조의 생존을 위한 정치적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여왕은 즉위 후에는 노동당 보수당 정권을 거치면서도 현실 정치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신중함을 견지했다. FT는 ‘목석처럼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이 영국 정국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요인이라고 전했다.

 

○ 부인에 누가 될까봐 고국을 외면한 필립 공

여왕의 남편 필립 공의 조부는 덴마크 왕족으로, 그리스가 오스만튀르크제국에서 독립한 후인 1862년 그리스의 ‘조지 1세’ 왕으로 옹립됐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정변이 일어나 필립 공은 아버지와 함께 그리스를 탈출해야 했다. 해외를 떠돌던 시절 필립 공의 부모가 이혼하고 필립 공의 여자 형제 4명은 나치에 협력한 독일 왕족과 결혼했다. 필립 공은 영국 왕실 해군에 입대해 근무하다 영국 국적을 얻은 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결혼했다. 원래 활달한 성격인 필립 공이 나서지 않고 여왕 재임 기간 중 한 번도 그리스를 방문하지 않은 것은 왕실의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필요한 잡음이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