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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이킹系

淸山에 2012. 6. 2. 13:21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이킹系


 
 노르만디 출신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 王家의 선조.
趙甲濟   
 


 즉위 60주년을 맞은 영국의 퀸 엘리자베스 女王의 王系圖(왕계도)를 보면 노르만디의 윌리엄公이 맨첨에 나온다. 2차대전 때 상륙작전으로 유명해진 노르만디는 프랑스 북쪽에 있는 땅이다. 강원도 면적에 인구는 약 340만 명이다.
 
  9세기 중반, 덴마크 및 노르웨이에서 내려온 바이킹들이 이곳을 점령하였다. 프랑스 왕은 이들을 몰아낼 힘이 약해 이 지역을 公國(공국)으로 인정해주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하였다. 노르만디라는 말은 북쪽에서 내려온 이들의 땅이란 뜻이다.
 
  1066년에 노르만디의 윌리엄公이 군대를 이끌고 영국으로 쳐들어가 하스팅 決戰에서 이겨 윌리엄 정복왕이 되었다. 그가 윌리엄 1세이다. 윌리엄公의 영국 점령은 영국의 進路(진로)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대사건이다. 노르만디 사람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었다. 이들은 先住民(선주민)인 앵글로-색슨족 귀족과 융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王家 및 귀족들의 先祖(선조)가 된다.
 
  노르만디 사람들이 쓰던 프랑스어가 英語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노르만디 사람들에 의하여 유럽 대륙의 로마-라틴系 문명이 영국에 많이 들어온다. 영국과 유럽을 이어준 것이다.
 
  윌리엄 1세와 후손들은 고향인 노르만디의 領有權(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중엔 프랑스의 왕자리까지 탐하게 된다. 15세기 프랑스-영국 사이 백년 전쟁의 불씨가 된 것이다. 노르만디 사람들의 主力은 바이킹이었지만 영국으로 쳐들어갔을 때는 同族(동족) 의식이 약했다. 한때는 영국 전체를 점령한 적이 있는 덴마크 바이킹 세력이 윌리엄 公의 영국점령에 가장 거세게 저항하였다.
 
  노르만디에 정착한 바이킹은 배를 잘 모는 전투의 귀신들이었다. 그들은 프로 戰士(전사)집단이었다. 소수의 정예 부대로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 왕국을 건설, 2세기에 걸쳐 이곳을 유럽의 가장 잘 사는 곳으로 만들었다. 지금의 시리아 海岸(해안) 지방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17세기 프랑스는 北美 대륙의 식민지 개척에 나서는데 이때 맹활약을 한 이들도 노르만디 출신들이었다. 海運기술에 기반한 바이킹들의 개척, 모험정신은 지금도 계속된다. 남극과 북극 탐험의 지도자인 아문젠을 낳은 노르웨이는 인구가 500만 명밖에 안 되지만 세계 最强의 상선대를 보유한 海洋强國(해양강국)이다.
 
  바이킹 사회는 평등하였다. 노예도, 귀족도 없었다. 모두가 동료였다. 지도자도 지배자가 아니라 동료중의 先任者(선임자)였다. 내각제 하의 수상을 장관중의 先任者란 의미에서 Prime Minister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바이킹의 후손들이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모범적인 복지제도를 정착시킨 것도 바이킹 사회의 전통적인 평등성과 관련 있다고 한다. 우리가 북한의 세습을 규탄하는 것도 세습 자체의 後進性(후진성)보다는 그 세습이 불평등을 심화시켰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윌리엄 王 이후 면면히 王家가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王들이 김일성 김정일처럼 臣民들을 굶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덴마크가 北歐의 무서운 覇者였을 때 
11세기 초 덴마크는 잉글란드, 스웨덴 일부, 노르웨이까지 지배하였다. 
뉴스일자: 2010년10월06일 21시51분  
 

 
趙甲濟   
 
 유럽의 현존 王家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덴마크 王家이다. 965년 덴마크의 해랄드王은 부하 바이킹들과 함께 原始(원시)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改宗(개종), 통일왕국을 만들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일부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자연히 동원력이 강해졌다. 그들은 잉글란드 정복에 注力하였다. 그 전 9세기 초부터 덴마크 바이킹들은 北海를 건너와 잉글란드를 공격하기 시작, 동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잉글란드 사람들도 이에 대응, 뭉치기 시작하였다. 알프레드 대왕이라 불리는 사람이 나타나 덴마크 바이킹들을 무찌르고 협상이 성립되었다. 잉글란드의 동부지방 통치권을 바이킹에게 주는 대신에 바이킹들은 잉글란드 왕에 충성을 바치고 기독교로 改宗하기로 하였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을 점령한 덴마크 바이킹과 프랑스 왕 사이에 맺어진 약속과 같은 조건이었다. 덴마크 바이킹에게 주어진 公國(공국)은 데인로(Danelaw)라고 불려졌다.
 
 알프레드가 죽은 뒤 잉글란드와 덴마크는 다시 전쟁으로 들어갔다. 10세기 전반 잉글란드는 덴마크 바이킹들을 내몰고 失地(실지)를 수복하는 듯하였으나 덴마크 本國에서 원정군을 보냈다. 덴마크의 스벤 왕(해랄드왕의 아들)은 北歐(북구)의 强者(강자)였다. 그는 1014년에 잉글란드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 카누트는 大王으로 불린다. 1017-1035년 사이 카누트 대왕은 지금의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일부, 그리고 영국(잉글란드)으로 국성된 大帝國(대제국)을 다스리는 사람이었다.
 
 카누트 대왕과 그의 아들이 죽자 잉글란드를 다스리던 덴마크 바이킹은 잉글랜드의 王位를 알프레드王의 후손 에드워드에게 물려주었다.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죽자 노르웨이의 해롤드 할드라다 왕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고 싶어서 1066년 원정군을 보냈다. 이때 도버 해협 건너 노르망디 公國의 윌리엄公(그 또한 덴마크 바이킹의 후손)도 왕이 되고싶어 잉글란드를 공격하였다. 영국 귀족을 대표한 색슨族 출신 해롤드는 먼저 노르웨이 원정군을 스탬포드 다리에서 맞아 전멸시키고 노르웨이 해롤드 王까지 죽였다. 잉글란드軍의 다음 상대는 노르망디 원정군이었다.
 
 하스팅스에서 벌어진, 세계사적 의미를 가진 決戰(결전)에서 노르망디 원정군이 이겼다. 잉글랜드 군대는 너무 지쳐 있었다. 잉글랜드는 덴마크 바이킹으로부터 협공을 받고 무너진 것이다.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은 영국을 지배하는 윌리엄 1세 王으로 변신하였다. 지금 영국 王 엘리자베스 2세는 윌리엄 1세의 후손이다.
 
 야만적인 덴마크 바이킹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文明化하고 통일王權을 만들어 오늘날 영국과 덴마크의 原型(원형)이 되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유목민족인 몽골-투르크族처럼 해양민족인 바이킹도 戰士집단의 힘으로 여러 나라를 부수고 여러 나라를 만든다. 유목민족과 해양민족은 인류역사의 주먹이고 지배민족이었다.
 
 잉글랜드를 노르망디 출신 바이킹 후손들에게 빼앗긴 덴마크는 그 뒤 500년간 北歐 최강국의 자리를 유지하였다. 1397년엔 덴마크 왕국의 섭정이던 마그레타 왕후가 눈부신 외교전으로 '칼마르 연방'이라고 불리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연방국을 만들고 아들 에릭으로 하여금 세 나라 王을 겸하게 하였다. 형식상으론 세 나라가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되었으나 덴마크 중심으로 일이 이뤄졌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스웨덴은 연방을 탈퇴하였다가 덴마크로부터 혼이 난 뒤 복귀하는 일을 되풀이하였다. 스웨덴은 덴마크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을 벌인 끝에 1523년 연방에서 최종적으로 탈퇴,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200년간 덴마크(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여섯 차례 전쟁을 하게 된다. 前後(전후) 300년에 걸친 덴마크와 스웨덴의 힘겨루기는 18세기 초에 들어 상호존중과 평화공존으로 결착을 본다. 노르웨이는 덴마크가 약해지자 스웨덴 속국으로 넘어갔다가 1905년에 독립하였다. 핀란드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던중 스웨덴이 러시아에 굴복한 뒤엔 러시아 식민지로 넘겨졌다가 공산혁명 직후 독립하였다.
 
 지난 1000년간 北歐에서 覇者(패자) 자리는 덴마크-스웨덴-러시아로 바뀌었고 노르웨이와 핀란드는 종속변수였다. 힘의 관계가 바뀔 때마다 전쟁과 혁명과 建國이 이뤄졌다. "전쟁이 없으면 국민국가는 만들어지지 않고, 혁명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이뤄지지 않는다"는 공식이 적용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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