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극찬하는 한국 속 '신들의 정원'
*[김두규 교수의 國運風水(국운풍수)]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경기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내 태조 건원릉. / 조선일보DB
2009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조선왕릉, 그 가운데에서도 구리시 동구릉은 왕릉 중의 왕릉이다. 수려한 경관과 호젓한 산책로, 그 사이사이에 조성된 왕릉들의 아름다움에 외국인들도 찬탄해 마지않는다.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신들의 정원'이다.
동구릉이란 '한양(서울) 동쪽에 조성된 아홉 개의 능'이란 뜻이다. 이렇게 세계적인 '신들의 정원'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곳에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이 있다. 둘째, 동구릉은 500년에 걸쳐 조성된 왕릉이기에 다른 왕릉보다 완성도가 높다. 동구릉은 1408년 태조 이성계 안장 이후 1890년 신정왕후(조대비)가 안장되면서 마무리됐다. 셋째,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요인 가운데 하나가 풍수였다'는 유네스코 심사단의 평에서 알 수 있듯 천하의 명당에 자리했다. 산과 물은 곱고도 맑은 데다 그 사이로 살랑대는 바람 또한 쾌적하여 이곳을 방문했던 유네스코 심사단으로 하여금 '풍수가 바로 이런 것'이란 점을 실감케 했다.
조선조 500년 내내 왕릉 입지 선정에서 풍수지리는 절대 원칙이었다. 동구릉 매표소에서 표를 건네고 조금 걷다 보면 가장 먼저 만나는 수릉(綏陵)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보인다. '(수릉은) 처음 의릉(懿陵) 왼쪽 언덕에 장사했다가 풍수 논의가 있어 1855년 철종 때 이곳으로 옮겼다.' 그런데 안내판에 한 가지 내용이 빠졌다. 수릉의 주인 익종이 죽어 처음 묻힌 곳은 풍수상 '구천을 날아오르는 호랑이 형국(구천비호·九天飛虎)'의 길지로 알려진 곳으로 지금의 의릉(서울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옆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국세가 산만하여 마음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용마산으로 옮겼다(1846년). 그러다가 다시 이곳으로 옮긴다. 모두 풍수적 이유이다.
그렇다면 건원릉은 풍수상 어떤 땅일까? 태조가 죽어 안장된 직후 이곳을 찾은 명나라 사신 기보(祁保)는 이곳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까"라고 찬탄했다. 훗날 영의정 이항복이나 대학자 송시열도 길지임을 칭찬했다. 모든 물건이 그러하듯 땅에도 미추(美醜)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태조 이후 여러 왕이 길지를 찾다가 더 좋은 길지를 찾지 못해 건원릉 부근으로 속속 몰려들어 지금의 동구릉이 이루어졌음이 이를 방증한다.
왕릉에서 풍수를 따진 것은 중국·일본·베트남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들과 다른 조선만의 특징이 있었다. 왕릉은 권력을 쟁탈하거나 권력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태조의 건원릉에서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유릉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왕릉 풍수는 정치적이었다. 일종의 권력 풍수였다. 이러한 권력 풍수의 전통은 조선 개국 직후 태조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 사이의 풍수 싸움에서 시작된다.
그 첫 번째는 계룡산 천도를 둘러싼 이성계·무학대사 측과 이방원·하륜 측과의 권력 쟁탈전이었다. 이것은 건원릉 조성에서 정점에 이른다. 명분은 과연 그곳이 풍수상 길지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러한 풍수 논쟁으로 인해 조선의 국운이 달라진다. 계룡산에서 건원릉에 이르기까지 이를 둘러싼 풍수 싸움이란 무엇일까? 이 과정을 보면 조선이 태조의 나라인지 태종의 나라인지 알 수 있다. 다음에 계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