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무용 개척한 '곡마단 소녀'
[조선일보에 비친 '신문화의 탄생' ] [42] 김영철 디지털뉴스부 편집위원 이메일kyckhan@chosun.com
‘곡마단 소녀’에서 한국 근대무용의 개척자가 된 배구자양.
1926년 6월 5일 순종의 인산(因山)일이어서 장례 관련 기사가 지면을 도배한 가운데 배구자(裵龜子)라는 19세 '여배우' 소식이 큼지막하게 지면 중앙을 장식했다.
"아름다운 얼골이 한번 무대에 나타나기만 하면 만장 관중은 어린듯 취한 듯 입에 침이 말랏섯"던 "텬승(天勝) 일행 중의 화형녀우(花形女優)"가 경성으로 탈주했다는 소식이었다. 특히 그녀는 "고(故) 이등박문 공작의 수양녀로 세상의 이야이 거리를 만들든 유명한 배뎡자(裵貞子)의 족하 딸"이었다.
'천승일행(天勝一座)'은 '기술계(奇術界)의 대왕'이라 불리는 '천승'이 이끄는 마술과 무용, 음악, 연극 등을 공연하는 일본의 최고 인기 곡마단. 배구자는 여섯 살 때 이곳에 맡겨져 서양 무용과 노래 등을 익히고 미주 순회공연도 다녀왔다. 공연이 "이르는 곳마다 수만 관객을 뇌살케하야 렬광적 갈채를" 받아 '소텬승(小天勝)'으로 불리던(1928년 1월 3일자), 그녀의 '탈출'이니 떠들썩할 만도 했다.
그녀는 '탈출' 후 유학을 간다며 '고별 무도회'를 열었으나(1928년 4월 18일자), 유학 대신 이듬해 6월 서울 광희문 밖 문화주택에 '무용연구소(강습소)'를 차렸고, 곧 첫 무용 발표회를 가졌다.(1929년 8월 24일자) 한국 무용사에서 우리나라 근대 창작 무용의 기점으로 삼는 공연들이다. 이어 순회공연에 나서 '토 댄스(toe dance)' 등을 전국에 선보인 뒤(1929년 10월 24일자 등), 일본 순회공연에도 나서 대갈채를 받았다.(1930년 11월 2일자)
특히 무용연구소의 '연구생'들은 "대개 보통 교육을 밧은 점잔은 집 령량들뿐"이어서(1929년 9월 18일자), 기생이나 추던 춤이 이 시기 새로운 지위를 얻기 시작했다.
배의 첫 발표회를 본 기자 심훈(沈薰)은 "외국 사람의 것을 맹목적으로 흉내 내어서 것탈만을 뒤집어 쓸려고 들지 안코", 새로운 조선 무용을 창작하려는 독창적 태도를 높이 샀다.(1929년 9월 24일자)
그러나 곡예단 출신이어서인지 순수 무용보다 흥행에 더 신경을 썼기에 후일(1937년) 평론가 오병년(吳炳年)은 "배씨를 무용가로 대우하는 일은 오직 고소(苦笑)꺼리"라며 '유행가수적 예술가'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조선일보는 1937년 신년 무용계를 돌아보면서 '세계 수준에 육박'한 '축복바든 무용조선'의 3대 무용가로, 최승희와 조택원 그리고 배구자를 꼽았다.(1937년 1월 6일자)
후일 '한국 근대 무용의 효시'로 일컫는 그는 광복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계 미국인과 재혼, 무용과 인연을 끊고 살다 말년에 미국으로 이주, 현지에서 200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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