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인천의 역사를 찾아서

淸山에 2012. 5. 28. 19:02

 

 

 

 

 

▲ 고려사에서 인천은 왕의 고향으로 40년 도읍으로 기록되고 있다. 현재 강화도에는 대몽 항쟁의 도읍지의 황궁 고려궁지터가 자리하고 있다./사진·자료제공=인천시 역사자료관·인천학연구원

 

잠든 인천의 정체성을 깨우다-2030년 역사 깃든 백제의 수도 …

 

고려왕실의 고향
 
미추홀, 기원전 1세기부터 존재 … 내년'인천 정명 600돌'
40여년간'대몽 항쟁의 상징'·강화'팔만대장경'탄생지 
    
 

2. 인천의 역사를 찾아서

 

잊혀진 인천의 고대사와 고려왕도의 역사가 깨어나고 있다. 최근 종영된 한국방송(KBS)의 광개토대왕에서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 관미성이 고구려에 점령되는 장면이 나왔다.

 

강화 교동 관미성은 고대 백제의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하며, 중국 왕조와의 무역을 주도해온 고대 해양 무역, 군사적 요충 도시로 묘사되고 있다. 현재 문화방송(MBC)에서 방영중인 고려 고종 19년(1232년)때 무신 정권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무신'에서 강화 천도와 대몽 항쟁이 본격적으로 그려질 예정이다. 최근들어 감춰진 인천의 역사가 조금씩 조명받고 있다.

 

2013년은 '인천 정명' 600년이 되는 해이다. 2012년은 인천(仁川)의 원류 비류 백제의 도읍이 된지 20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2030년이 깃든 비류 백제의 수도 미추홀을 기억 못하며, 인천의 고대사가 잠들어 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인천의 역사를 깨워 인천의 정체성을 찾는 몫은 이제 시민들의 몫으로 다가오고 있다.
 

 ▲ 인천 무역기지의 역할을 했던 능허대의 옛모습.

 

▲미추홀(彌鄒忽), 매소홀(買召忽) 그리고 인주(仁州)


2013년은 인천(人川) 정명(定名) 60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 지역이 인천이라는 지명으로 불린 것은 조선 태종대(14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태종전까지 인천은 역사서에 인주(仁州), 미추홀(彌鄒惚), 매소홀(買召忽), 소성(邵城), 경원(慶源)로 불렸다.

 

고려시대 인주로 불리던 것이 태종대 행정 개편을 실시하면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인천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조선시대 태종은 인구와 면적에 따라, 군이나 현에 고을 주(州)자 들어간 지명을 산(山)이나 천(川)으로 고치게 했다. 개칭된 날은 10월15일이다. 현재 시민들은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시민의 날로 제정하고 매년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미추홀(彌鄒惚)이라는 다소 어려운 한자의 이름을 사용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역사적 유래는 이렇다. 미추홀은 삼국시대 초기 백제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비류(沸流) 백제의 도읍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구려에서 내려온 소서노와 비류 일행이 기원전 18년 미추홀에 도착한 것이지, 비류 일행이 미추홀을 세운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정설이다. 그럼 미추홀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미추홀은 소서노, 비류 일행이 도착하기 전 기원전 1세기부터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천과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해양 세력이 신석기, 청동기 시대를 거치며 기원 전 1세기 경에 '미추홀'이라는 부족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다는 추측을 낳고 있다. 이 세력이 비류 일행과 연합해 새로운 나라인 백제를 건국했다는 이야기다. 백제 건국은 국가를 건국할 만큼의 강력한 부와 문화가 이미 이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한다.

 

현재 미추홀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볼 수 없지만, 현재까지 미추홀의 중심 유적으로 지목돼 온 곳은 남구 문학산 일대이다.

세종실록지리지, 동사강목, 여지도서, 경기읍지 등 문헌지도에서 문학산성을 비류와 연결시켜 이 산성이 '비류의 성'이라는 인식이 정착하게 됐다. 미추홀이라는 이름은 장수왕 63년(475년) 때 한강유역을 확보한 고구려에 의해 '매소홀(買召忽)'이라는 이름으로 변한다. 통일신라에는 소성(邵城)현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다. 경원(慶源)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최대 문벌 귀족이었던 인주 이씨 가문과 연관이 깊다. 918년부터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까지, 인천에 본거지를 둔 인주 이씨의 세력이 가장 막강했다. 경원은 이들 가문을 칭해 '경사의 원천'이라는 지역을 염두해 두고 당시 사람들은 인천을 경원으로 불렀다.
 
  
▲ 인천부지도

 

▲고려왕조의 고향, 도읍의 고장 인천


신라 말, 고려 초는 강력한 부를 축적한 호족의 시대였다. 그 중 개경과 강화 일대를 무대로 해상 무역을 통해 강력한 부와 군사력을 키운 왕건이었다. 또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호족 세력이 바로 인천의 인주이씨(仁州李氏), 부평이씨(富平李氏) 그리고 강화위씨(江華韋氏)였다.

 

고려시대 인천은 7명의 왕의 고향이라고 불리는 '7대 어향(御鄕)'이라고 불렸다. 고려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80여년(1047~1126) 동안 인주이씨는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시 고려왕실의 고향 역할을 했다. 인천은 고려 문종·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 7대 왕의 외가 또는 왕비의 친정이었다. 어(御)자는 그 당시 임금만 사용할 수 있었다. 어향이라고 할때 '왕의 고향'을 의미하지만, 7대 동안 인천이 왕실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칠대 어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인천은 고려 후기에는 40여년 동안 대몽 항쟁의 상징이었다. 고려 고종 19년 1232년 고려조정과 무신 정권은 몽고와의 결사 항전을 위해 300년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한다. 이 당시 개경 조정과 백성 30만 명이 한꺼번에 강화도로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고려 조정의 강화 천도는 궁궐, 관아 및 성곽의 축조라는 대역사를 가져왔다. 특히 인구의 급증과 대규모 토목공사는 원 강화주민들의 수탈과 고통으로 이어졌다. 갑자기 늘어난 인구의 식량 조달은 강도(江都)시대 조정의 심각한 과제였다. 전쟁으로 인해 전국에서 조세 징수가 어렵게 되자 식량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강화 본도와 교동의 간척 사업이었다.

 

강화도 마니산과 교동도 화개산 정상에서 강화도와 교동도를 내려다 보면, 섬과 섬 사이의 간척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현재 강화도와 교동도의 쌀 생산량은 인천 인구 280만명을 1년 동안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생산되고 있다. 이 당시 고려조정은 국민적인 결집을 위해 무려 16년 동안 부처님의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조성하는 대역사를 이뤄냈다.

 

하지만 40년간의 대몽항쟁 강도의 역사는 고려 조정의 항복으로 비참하게 끝을 맺었다. 몽골은 화의의 조건으로 출륙 환도와 함께 항쟁의 상징인 강화산성(내성)과 외성을 헐어버릴 것을 요구했다. 결국 고종 46년(1259) 6월 내성과 외성이 헐리게 됐던 것이다. 현재는 성 터만 남아있다.

 

고려사에는 '강화의 내성(內城)을 헐기 시작하였다. 몽골 사절의 독촉이 너무 심하여 모든 영부(領府)의 군사들이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 울면서 말하기를, "이럴 줄 알았으면 성을 쌓지 않았던 것이 나았다"하였다, 거리의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012년 05월 21일 (월)  

인천일보/노형래기자 trueye@i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