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사이클 선수인 황산웅(왼쪽)과 권익현이 런던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고 황산웅 선생의 아들인 황덕수 서울대(생명과학부) 교수가 소장 중이다.
고 이원순 선생이 직접 만들었던 여행 증명서의 일부. 지난달 등록문화재 제 491-1호로 등재됐다. [사진 문화재청]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길을 연 사람, 그 도움으로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사람. 그들에겐 빛 바랜 여행증명서(여권)가 있다. 두 권의 여행증명서는 64년 만에 런던에서 또다시 올림픽이 열리는 올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민국을 런던 올림픽으로 보내준 여행증명서는 고 이원순(1890~1993) 선생의 유품이다. 사실 이 여행증명서는 이원순 선생이 직접 만든 ‘사제(私製) 여권’이었다.
1945년 광복 후 체육계의 가장 큰 관심은 올림픽 출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한은 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신생 독립국 처지였다. 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선 국내에 올림픽 기구를 구성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얻어야 했다. 46년 7월 구성된 올림픽대책위원회는 당시 IOC 부위원장이던 에버리 브런디지(Avery Brundage)를 만나는 등 외교적 노력 끝에 올림픽 참가를 위한 ‘가(假)승인’을 받았다.
한국에서 런던으로 가는 동안 거쳤던 국가들의 스탬프가 여러 개 찍혀 있는 ‘황산웅 여행증명서’. [사진 황덕수 교수]
마지막 남은 관문은 IOC총회에서 올림픽 출전을 최종 승인받는 것이었다. 대책위원회는 47년 6월 스웨덴 스톡홀름의 제40차 IOC총회에 전경무 부위원장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5월 29일 전 부위원장이 일본 도쿄 부근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희망에 부풀었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에 대책위원회는 미국에 거주하던 이원순 당시 한인이민위원장에게 급하게 전문을 보내 대신 참석할 것을 부탁했다. 이원순은 스웨덴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한국 사람임을 증명할 여권이 없었다. 시간이 촉박한 이원순은 직접 타이핑을 해 여행증명서를 만들었다. 종이의 왼쪽 면에는 성명·주소·가족관계 등 신상을 적었고, 오른쪽 면에는 출입국 기록이 남아있다.
우여곡절 끝에 IOC총회에 참석한 이원순은 동아시아의 신생국이 왜 올림픽에 참가해야 하는가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그 덕분에 조선올림픽위원회(KOC)는 6월 20일자로 IOC 회원국 정식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비극과 한 사람의 노고가 대한민국의 사상 첫 올림픽 공식 참가로 빛을 본 것이다. 이원순 선생은 1948 런던 올림픽에 고문으로 참석했다.
이원순의 노력 덕에 가슴에 커다란 태극마크를 달고 런던 올림픽 사이클에 출전한 선수가 고 황산웅(1924~2012) 선생이었다. 당시 한국 사이클 선수단은 임원 1명(장일홍)에 선수 2명(황산웅, 권익현)으로 구성됐다. 비록 황산웅이 출전한 사이클 종목에선 입상하지 못했으나 복싱에서 한수안, 역도에서 김성집이 동메달을 획득했다.
서울에서 런던까지 18일간의 여정이 그대로 드러난 ‘황산웅 여행증명서’는 런던 올림픽 선수단의 런던 입성 장도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일본에서 시작해 홍콩·인도·이집트 등에 입국하며 찍은 스탬프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런던 올림픽에 참가한 임원 및 선수들의 명단과 예방접종 증명서 등도 첨부돼 당시의 힘든 여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원순 여행증명서’는 지난달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보존 처리 작업을 하고 있다. 런던 올림픽 때 황산웅 선생이 입었던 사이클복도 등록문화재 지정을 기다리고 있다.
64년 전 67명(임원 15명, 선수 52명)이었던 선수단 규모는 올해 350여 명으로 6배 가까이 커졌다. 목표도 금메달 10개, 종합순위 10위로 크게 높아졌다. 그 출발점은 1948년 가난한 신생국이라는 힘든 현실 속에서도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도록 이끈 선각자와 그 올림픽에 출전해 나라의 위상을 높인 사람들이었다.
올해 7월 28일(한국시간) 런던 올림픽 개막식 때 한국 선수단이 입을 단복은 1948년 당시 이원순이 입었던 단복을 재현한 것이다.
정종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