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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子上疏 1 & 2

淸山에 2011. 10. 18. 04:20

 

 

 

 

 

 

 

*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갑자상소

* 集賢殿 副提學 崔萬理와 甲子上疏 : 南廣祐(인하대 명예교수:국어학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것은 세종 25년(1443년 癸亥)년 음력 12월이다.

그런데 이 훈민정음이 현재 한글 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표음 문자라고 칭송 되고 있음은 우리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우리 문화사상(文化史上)이 찬연히 빛날 금자탑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글을 칭송하는 나머지 적어도 2천 수백년 을 써왔을 한자(동방문자라고 주장하는 이도있음)우리의 전통 문화가 한자문화임을 잊고 우리말의70%가 한자어요,우리 한자고유음으로 父를 부로 母를 모로 읽는 사실등 어느모로 보나 한자는 한글과 함께 국자(國字)다 해야 옳고 한글과 한자는 새의 두날개 라고 하는 국한혼용론(國漢混用論)들의 주장이 진리임을  곰곰 씹어보고 생각해 봄직한데 그렇지 못하고 한자를 버리고 한글만 쓰면 된다는 주장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음은 유감이다.


이한글 전용론자들은 최만리를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괴수정도로 매도하여 그후손들이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위축되어 있다는 말이 들린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중대한 일이 아닐수 없다.

조상을 崇祖 해야할 敬祖사상에 상처를 주는 일로 해주최씨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대한 진상을 옳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崔萬理先生이 세종 26년(1444년 甲子) 2월20일 上疏를 올렸는데 이것을 諺文反對上疏(언문반대상소) 라고 호칭을 쓰는것은 재고 해야 된다는 心岳 李崇寧 先生의 主張(최만리연구 1962년 12월)은 옳고 갑자(甲子)이월상소(二月上疏)또는 甲子上疏라야 한다는 주장에 同意한다.


그것은 첫째로 훈민정음 창제는 이글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이미 상소가 있기전인 세종 25년(1443년 12월)에 끝난것이다. 만일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사후(事後)에 상소를 했겠느냐하는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고 책임자로서 집현전 학사들이 관여하고 있는것을 잘알고 있으면서 완성전에 반대할일이지 어째서 行次뒤의 나팔이란 말인가?


둘째로 이미 心岳 이 지적 하셨듯이 그의강직하고 예리한 성격은 척불상소(斥佛上疏)6회, 사직상소(辭職上疏)1회, 計7회, 세자섭정 또는 이정분권(이정분권)에 대한 반대상소 3회 등 옳다고 생각 하면 주저하지 않고 상소한 것인데 훈민정음 창제 자체에 반대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그대로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갑자상소를 언문 반대상소라고 함은 그 眞意가 잘못 파악 된것이다. 실제 상소문을 보면 언문에 관한것이 주이긴 하지만 운서(韻書)에 관한 부분이 있음을 주목할 일이다.

상소문을 살펴보면 -언문창작은....... 사대모화(事大慕華)의 정신에 어긋남이 없을것인가?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에는 각각문자가 있으나 이것은 다 이적(夷狄)의 일로 따질것이 못된다.


역대중국이 우리나라를 기자(箕子)의 유풍(流風)이 있다하고 文物禮藥이 中華에 비길 만한 것이있다. 이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夷狄(오랑캐)이 되려 함은 문명의 대루(大累)가아닐 것이가.

-이두에 의해 문자를 아는이가 매우 많아 흥학(興學)의 일조가 되나 우리가 처음부터 문자를 몰랐었다면 언문을 고식(故息) 수단으로 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언문 27자만으로 입신출세(立身出世)할수 있다면 사람들이 노심초사(勞心焦思) 성리학(性理學)을 익힐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수십년뒤에는 문자를 아는자 점멸(漸滅)하고, 언문으로 공무를 처리할수 있어도 성현의 도를 모르고 사리(事理)의 시비(是非)를 가리지 못한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하는것은 고금(古今)의 통환(通患)이다.언문은 신기한 일예(一藝)에 불과하다. 학(學)에있어 손(損)이 있고 치(治)에 있어 익(益)이 없다.

-형옥(形獄)에 있어 平 不平은 옥리(獄吏)에 딸린 것이지 언문 불일치(諺文不一致)에 있는것이아니다.


옥사(獄辭)를 평이(平易) 하게 하라는것은 신(臣)이 그 가(可)함을 알지 못하겠다.

-언문을 부득이 쓴다 손치더라도 재상(宰相) 이하 백료(白醪)와 도모하고 국인(國人)이모두 可하다고 하더라도 다시 삼사를 加해야 하고 제왕의 質 하고 중국에 대하여 생각하여 실행할것이다. 이제 군의(群議)를 들어보지 않고 이배십여인(吏輩十餘人)을 모아 고인이 이루어 놓은운서(韻書)를 고쳐서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인을 모아 이것을 박아 공포 하려한다. 천하후세(天下後世)의 공의(共議)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언문이 가령 유익한 것이라 하여도 육예(六藝)의 하나에 불과하다. 하물며 만가지 치도(治道)에일리(一利)가 없는데 정력을 허비하고 시간을 보내어 학문에 손(損)이 있어야 되겠는가? 이상 상소를 현재 시점,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사대(事大) 모화(慕華) 가명(假名) 등 수사의 매도가 있음직 하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친명외교(親明外交)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그연호를 쓰던때 임을 생각하면 최만리 개인에게 “사대, 모화, 가명”등의 수사(修辭)의 매도는 천만부당(千萬不當)하다. 훈민정음 창제 참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직해동 자습역 훈평서(直解瞳 子習譯 訓評序)에도 정음 약간의 자를 배워 익히면 한어(漢語)를 가통하게 되고 운학(韻學)을 가명(可明)하게되어 오히려 학흥(學興)에 조(助)로 사대정책의 구현에 도움이 된다라고 한것을 보면 사대(事大)라는 말은 당연지사로 쓰이던 恒用(항용) 투의 말인것이다.


오히려 당시의 사류(士流)들의 들끓는 여론을  당당하게 개진한 상소 였을뿐인 것이다.그러면  어째서 훈민정음 이 창제,반포 된후에 이러한 뒤늦은 상소로 세종의 심기를 편찮게 한것은 무슨까닭인가? 더욱이 그들은 언문의 창작을 지극히 신묘하다고 칭송하고 있는것이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 적극 찬성은 않았을지는모르나 적극적인 반대 의사는 없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상소중에 운서(韻書)를고쳐서 언문 을 부회하여 공포하려 한다는 대목이있다.한자음 개혁을 위험시 한것이 동기라고 본 心岳 의판단은 옳은 것이었다고 본다. 세종대왕은 운서의 연구가로서 한자음 개혁을 기도 했는데 세종25년에 훈민정음 창제가 끝나자 26년부터 운서(韻書) 事業(사업)으로 들어갔다.


1) 韻會諺解 刊行, 2) 洪武正韻譯訓刊行, 3)四聲通攷刊行, 4)東國正韻刊行 등 운회어해에서 동국정운에 이르는 운서의 번역 편찬의 4대 사업을 기도 한것인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26년 2월 16일에 운해언해간행 을 결정한것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을 창제후 용비어천가 를 국한혼용문(國漢混用文)으로 짓게하고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국주한종(國主漢從) 즉 한글은 큰글자로 쓰고 한자는 우 하측에 작게 쓴 것으로 하여 정음을 활용하게 한것은 훌륭한 업적 이지만은한자개혁을 꾀해 동국정운 간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 동국정운은 훈민정음 33자 모와 똑같이 33자모 였으며 훈민정음 창제 참여 인사와 거의 진용이 일치 한다는 점등으로 보아 훈민정음 창제 사업과 동시 진행 으로 보아야 할것 아닌가 한다.


이 한자음 개혁 기도는 세종의 실패작이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이미 고유 한자음으로 굳어진 터에 인위적으로 개혁을 꾀한 것이다.

現代音          漢字音


善(선)           (썬)


洞(동)           (똥)


迷(미)           (?)

이런 현실음과는 판이한 인위적인 개혁음이 성공할수는 없다. 이한자음은 성종 때까지 문헌에는 명맥을 유지하지만 폐기 되고 만다. 이것은 마치 해방후 남한에서 숱하게 조성했던 新語가 사라지게 된 운명이나 북한에서 64년부터 85년까지 한자어나 외래어 5만여 어휘를 순 우리말로 다듬었던 것인데 이것이 86년 북한 국어사정위원회 가 펴낸 다듬은 말에 따르면 2만 5천여개를 옛한자어와 외래어로 환원 시켰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하는것이 아닌가 하여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세종은 비공개리에 韻會諺解 의 준비를 하고 史輩 십여인 에게 어문 강습을 시키는가 하면刻字工10여인을 모아 2월 16일 회의전에 이미 운회언해용 의 활자를 제작중이었다는 것등은 바로 崔萬理의 甲子上疏 를 낳게 한것이 아닌가 하는 心岳의學究的 態度는 정당하다. 崔萬理의 甲子상소에 대하여 세종이 격노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韻書를 아느냐. 내가 韻書를 바로 잡지 못한다면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라는 말에서 漢字音 改新의 信念을 알수 있는데 이에서도 崔萬理上疏의 초점이 운서에 있음을 알수있게 한다.


세종의 훈민정음의 업적은 불후의 것이지만 漢字音 改新 의기도는 잘못된 것이었다. 이잘못된 한자음 개신을 막고저하는 충정에서 훈민정음이 바로 그한자음을 표기하는 문자로써 쓰임을 보고 훈민정음 까지를 싸잡아 깍아 내리는 遇를 범한것이다. 그런데 세종이 최만리 등이 “諺文을 新奇의 一藝”  云이라 한데 최만리는 “신등이 신기일예라고 한것은 특히 문세에 인한것이지 타의가 있어 그런것은 아닙니다.” 라고 한것을 보면 운서사업에 반대의사를 펴다보니 훈민정음을 폄하 한 결과를 빚은게 아닌가 하는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보인 현대음과 엄청난 괴리를 보인 동국 정운식 한자음은 폐기를 불가피 하게 한것으로 보이는데 세종 30년 10월 세종실록 권 122조에 (한자어생략) 보면 한자음 개신이 무모 하였음을 자인한 셈이요. 그러고 보면 최만리의 상소는 있음직한 것이었다.고 보는 정론이 아닐까한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최만리의 훈민정음 관견에서 훈민정음을 한글전용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1),언문을 통용하면 학문을 돌보지 않게 된다. 2),수십 년 후에는 한자를 아는이가 적게된다. 3),언문을 쓰고 한문을 모르면 성현의 무자를 알지못하여 사리에 어두워진다.


4),神奇一藝에 지나지 않음으로 학문에 손이 있고 정치에 익됨이 없다. 와 같은 대조를 이룬다. 참으로 신기한것은 최만리가 우려한 사태가 오늘날 한글 전용론자들에 의해 주도된 한글전용정책으로 빚어지고 있는것이다. 崔萬理 先生은 儒臣으로서 집현전최고 책임지인 부제학이었고 청백리 였다.


강직하고 용기 있는 분으로 세칭 언문반대상소를 올린 것은 한자음 개신을 꾀하며 音韻諺解刊行이 甲子上疏 직전인 2월 16일 에 결정된데 기인한 것으로 본 心岳 李崇寧 先生의 主張에 同意 한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것이 아님은 세종 25년 창제가 끝나 반포 할때 까지 反對상소를 한일이 어느文獻에도 찾을수 없음이 분명하고 漢字音改新작업에 반대 한것은 지극히 옳은 주장이었다. 사대 모화 등의 매도는 千萬不當 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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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集賢殿 副提學 崔萬理 公의 잘못된 評價에 대하여 : 朴成根(태백대학 교수)


오래전의 역사란 세월의 경과로써 어두워 졌으므로 진실을 알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명사들에 대한 아첨으로 흔히 사실이 흐려져 있기 때문이다. 평가 만해도 그렇다. 기준이 없이 어떤 일을 평가 하는것은 마치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 남들에게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사람이 “벌써 두시간이 지났다” 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한사람은 “45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고 말한다. 나는 내시계를 보면서 전자에게는  “당신은 권태에 빠졌소” 라고 말하고 후자에게는 “당신은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있군요” 라고 말한다. 실제로 시간은 한시간 반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더러 “당신에게 대해서는 시간이 잘 가지 않는구먼 당신은 시간을 제멋대로 시간을 재고 있는것 같소” 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 나는 코웃음을 친다. 그이들은 내가 시계를 가지고 판단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역사와 판단을 기준으로하여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최만리 공의 공과를 평가 해 보기로 한다.


세종대왕 께서 훈민정음 을 창제 반포 했을때 최만리공은 이를 강경하게 반대한 완고하고 고루한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그시대에 대한 명사들의 아첨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세종을 절대시, 신성시 하다 보니 그와 의견을 달리 했던 만리공이그런 음해를 받았던 것 같다.


최만리는 高麗時代에 海東孔子  文憲公 崔? 先生의 13세손으로 세종 즉위년, 1419년(己亥)에 문과에 급제하여 弘文館에 들어가 集賢殿 학사를 겸임 하였다.


세종 9년 1427년(丁未)에 는 校理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集賢殿 直提學을 거쳐 이듬해에集賢殿副提學 겸 知製敎經筵參撰官春秋, 世子侍講院左輔德 등의 官職 으로 승진 하고 세종21년, 1439년(己未)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 하였다. 또한 최만리는 집현전의 최고의 책임자로 그휘하에 성삼문, 신숙주등 신진 사류들과 함께 세종으로부터 한글 창제의 명을 받았었다.


세종26년,1444년(甲子) 훈민정음이 반포 되었고 2개월 후에 세종이 韻會諺解(운회언해)란

책을 만들어 한자음의 발음을 한글로 적게되는 동국정운식 표기를 발표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의문을 느낀 최만리는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의견도 들으시지 아니하시고...........

이를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오니 후세의 비난을 어찌 감당 하시겠나이까?

하며 6조의 이유를 들어 당시 집현전 학사들과 연명을 하여 새로운 한자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일로 인하여 세종의 노여움을 사서 의금부에 구금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곧 풀려나게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세종이 스스로 한자음의 정리는 무리였고 만리공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사실로 미루어  공께서 한글 창제를 반대 하신것이 아니라 새로운 한자음 의 표기 즉 동국 정운식 표기를 반대 하였다는 것이다.


공께서는 국가 문물정비의 중책을 담당한 개혁자요, 슬기로운 관리였고 사심없는 청백리 였다. 다시 말한면 공께서는 한글 창제를 반대 한것이 아니라, 현재 쓰이고 있는 한자음을 무시하고 중국식 원음에 가깝게 발음 하려는 새로운 개신 한자음에 대하여 반대한 것이다.


이는 당대의 선비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신진사류 등 당대의 선비들이 반대한 이유는 이조가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국가인데 이러한 언문을 이용하여 많은 불경들을 한글로 언해하면 이는 유교국가의 이념에 背馳(배치)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세조 때에 간경도감을 두어 많은 불경들을 언해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를 짐작 할 수가있다.


또한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한자음의 개혁 정책은 끝내 일반인과 유학사류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왕 자신이 철회 하고 만다. 또한 세종은 호불정책을 ?시하여, 궁중에 내불당을 설치 하는 등 국시에 어긋나는 일로써 유학자들의 우려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왕이 늦게나마 만리공의 주장이 옳았던것을 깨달은것 같다. 또한 최만리는 전래의 문물제도 가 잘못 운영 되었을 때에는 이를 직간 하는 신하로도 유명하다.

당시 궁중의 환관 들이 쓰는 軟脚烏沙帽(연각오사모)의 烏沙의 얽음새가 옛 제도에 어긋난다 주장하여 이를 바로 잡음 으로써 한말까지 조선 양반 사회에서 긍적적인 평가와 더블어 그의 소신있는 간언을 선비의 귀감이라 극찬하였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는동안 청렴 결백하여 약현(지금의 만리동) 밑에 누간 초옥에 살면서 평생의 좌우명으로 소학 외편에 나오는 “현명한 이가 재물을 가지면 곧 큰뜻을 해치며, 어리석은 이가 큰재물을 가지면 곧 그 과실을 더할뿐이다” 라는 말로 後孫들을 훈도 하였다.

“賢而多財則,  損其志,  愚而多財則,  益其過” (현이다재칙, 순기지, 우이다재칙, 익기과)

이로써 朝鮮 官僚 의 榮譽 라 할수 있는 淸白吏로 추존되었으며 후일 이분의 청빈의 정신을 흠모한 민중들에 의하여 최만리공이 살던 약현을 만리현이라고 불렀고 다시 이지명이 해방후 행정구역 개편시에 만리동이라는 이름으로 개명 되어 오늘에 까지 이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로보아 공의 뛰어난 학덕과 드높은 인품이 어떠 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1443년 해방후에 국어보급을 위한 朝鮮語學會 (한글학회의 前身)의 일원인 한글학자 金允經등이 세종의 한자음 개신에 대한 공의 반대 上疏(상소)를 잘못 해석하여 公을 한글창제 의 반대자의 대표로 매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그릇된 역사의 왜곡이란 말인가?


오늘날 우리사회는 부정과 부패와 그리고 패륜으로 얼룩지고 있다. 새삼 공이 그립다. 공과 같은 청백리가 그립다. 하루 빨리 모든이들이 공의 유덕을 본받아 부정부패가 없어지고 정직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왔으면 하는 소망 으로 이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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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萬理는 한글창제의 반대론자인가 : 오환일(유한대학교 교수)


최만리(1394?~1445:태조3년?~세종27년)는 세종때의 문신으로 역사에서 보기 드문 청백리로 뽑힌 분이다. 


공의 출생년대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그의 관력을 조급해 보면 조선 건국 초기인 1394년 (태조3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1419년 (세종 즉위년)에 중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집현전 박사로 관직에 진출한후 1439년(세종21년)에 1년간 강원도 관찰사로 외직에 부임 한것을 제외 하면 1445년(세종27년)운명할 때까지 집현전에서 봉직 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백련봉 기슭에 있으며 그곳에는 공의 후손인 해주최씨가 집성촌을 형성하여 세거 하고있다.

공은 황희 정승과 함께 청백리로서 우리 역사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한글 창제에 반대한 사대모화자(事大慕華者)로 매도 당하기도 한다. 공이 올린 상소(이른바 한글반대상소 라 칭하는것)의 실상을 밝히는것은 공의 업적을 바르게 이해 하고,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는 데 중요한 문제이다.


최만리를 한글 창제 반대론자로 보는것은 그가 144년(세종26년)2월20일 에 올린 上疏文(조선왕조 실록 103권 세종26년 갑자 2월)에서 비롯되었다. 통용 甲子上疏(갑자상소)라 하는 이 상소문의 내용은 먼저 언문을 제작하신것이 지극히 신묘하나 臣(신) 등이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심되는점이 있어 조심스럽게 그문젯점을 열거 하오니 살펴 허락해 주실것을 바란다고, 하면서6개항을 제시 하였다.


그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은 옛부터 선진문명을 자랑하는 중화권에 속해 사대 외교로 문물을 흡수 하면서 문화를 발전 시켰다. 이제 오랑캐들과 같이 독자적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다면 明(명)과의 외교 문제가 발생 할수 있고, 선진 문화권에서 이탈하여 학문이 쇠퇴하고, 정치에도 이익이 없다. 더구나 언문(운회언해를뜻함))창제는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일로  충분히 검토하여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인데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것이 아닌가. 또한 주상께서 안질 치료를 위해 초정리 약수터에 행차하여 행재소에서 까지 언문 연구에 골몰 하시는것은 옥체를 조섭 하는데도 이롭지 못하다. 여기에 聖學(성학)으로 왕재(군왕으로서 배워야할 일)를 연마할 동궁(후에 문종)이 文士(문사)의 六藝(육예)중 한가지에 불과한 언문 연구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최만리가 疏頭(소두)가 되어 집현전 학자 6명과 함께 올린 갑자상소는 언문창제 반대 상소가 아니라 언문 운회언해를 계획 한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당시 집현전 최고 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집현전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상주한것 이라 하겠다.

세종이 諺文廳(언문청)을 설치하고 음운과 문자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여 1443년(세종25년)에 마침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후 세종은 한글의 실용화를 실험하고 韻會諺解(운회언해)를위해 의사청에 집현전 학자와 동궁을 비롯한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9인이 모여 논의 하게 된다.


이때가 1444년(세종26년) 2월 16일 로 甲子上疏 를 올리기4일전이다. 때문에 甲子上疏를 올린 직접적인 동기는 의사청에서 韻會諺解를 계획한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최만리 등이 갑자상소를 올린 참뜻은 무엇일까?


公(공)도 집현전에서 27년간 봉직하면서 최고책임자인 부제학으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창제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그러한 그가 한글창제를 반대하려면 한글이 창제 되기전1443년(세종 25년)에 할 것이지 한글이 완성된 후 1년이 지난뒤에나 갑자상소를 올렸으니 이상소는 한글창제 반대상소라 할수없다. 마침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이 창제되어 明(중국)과의 사대외교문제, 중화문화와의 관계가 소홀해지고 학문 발전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던중 의사청에서 韻會諺解(운회언해)를 계획하자 한글창제와 같이 중대한 일이 신중히 처리 되지 못하는 점에 불만을 갖고 더욱이 왕의 옥체도 돌볼 겸, 동궁(문종)의 왕재수업도 충실히 할것을 강조 하면서 최만리가 집현전 학자들의 의견을 수합하여 疏頭(소두:상소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甲子上疏(갑자상소)를 올린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만리가 올린 甲子上疏(갑자상소)가 한글 반대 상소로, 최만리는 한글창제를 반대한 事大慕華者(사대모화자)로 널리 알려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일찍이 국어학자 김윤경은, 광복후에 우리 한글이 일제통치시에 온갖수난을 당하였고, 그이전 연산군 때도 탄압받아 널리 보급 되지 못하였으며 창제 초기부터 반대론자들에 의해 천시 당하였음을 역설하면서 한글 사랑과 보급에 더욱 힘쓰자는 취지를 강조 하다보니 갑자상소를 한글반대 상소로 잘못 해석 한데서 비롯 된것이다. 그후 역사학자 이병도, 국어학자 이숭녕과 남광우, 정치사학자 신복룡 등이 김윤경의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면서, 최만리의 갑자상소는 한글 반대상소가아니라 한자음 개신을 위한 音韻諺解(음운언해) 간행에 반대한 내용임을 밝혔다.


최만리는 세종때 명재상 황희와 함께 우리역사에 특기할만한 淸白吏(청백리)로서 국가를 위해 충심으로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세종도 그의 직간이 충성심과 愛民思想(애민사상)에 본뜻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기에 특별히 총애하면서 어려운 정사에는 항상 의논할 만한 충신 으로 여겼다. 그의 갑자상소도 잘못 알려진 한글반대 상소가 아니며 韻會諺解(운회언해) 에대한 의견을 개진한것이요, 신중하게 언어정책을 추진하여 문화발전, 明(명)과의 외교문제, 왕의 건강 문제, 동궁(문종)의 학업 등 고려 할것 을 諫言(간언)하는 것으로 충성심에서 올린 글이다. 때문에 세종도 그의 본뜻을 이해 하고 형식적으로(군왕의위엄?) 하루 의금부에 감금 하였다가 곧바로 석방하여복직 시킨 것이다. 갑자상소가 한글반대 상소라면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한글 창제를반대한 갑자상소를 용납 했겠는가?


그래서 갑자상소는 한글 반대 상소가 아니요 오히려 충성심 에서 올린 直諫 () 임이 분명 하므로 갑자상소와 최만리에 관한 잘못된 평가는 즉시 시정되어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올바르게 애국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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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백리의 표상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 본문: KBS 역사의라이벌(1995년 5월) 청백리의 표상 최만리 에서 발췌 (구성:권당, 감수:허명)


집현전은 주로 經書()文籍()을 다스리며 옛것을 고중하고 임금과 왕세자의 講論을 ()맡아 국가경영과 왕권을 보우하는 최고의구심체로서 이곳에 참여 하는 것을 당시 선비 사회에서는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최만리(이하 존칭 생략)는 27년을 집현전에서만 임금을 보필하는 경직에 보직하였음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人品()學德()을 구비 하였는가를 알수 있다.


최만리는 집현전에 봉직한 관계로 대민 부서를 거치지 않했기 때문에 不義에 ()휩싸일 기회도 없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청렴결백한 관리로서 세종조에 선정된 淸白吏 ()15人중 ()두번째로 뽑혔다.


이렇듯 세종조에 여러 청백리가 있었기에 조선조 역대에 문화와 치적이 가장 뛰어났으니 지금도 본받을 일이다.  


세종 21년 공이 42세때, 강원도에 民亂이 ()일자 세종이 가장 신임 하는 최만리를 강원도 ()()使()(무능한 관원 을 내치고 유능한 관원을 올려씀)로 임명 했다. 그때 외직으로 나갔을 뿐 늘 세종대왕 을 보필하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재직 하였다(당시에는 대제학이란 직책은 명예직이었음)


세종은 경연에 임하여 탄식하시기를 최만리가 강석의 우두머리에 있을 때에는 강언 하는것이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외직으로 나가 있으니 그누가 좋은 계책을 진언하며 나의 잘못을 바로 잡겠는가? 하시며 즉시 최만리를 소환 하여 다시 부제학으로 임명 하시었다.


세상에서 최만리는 순부와 같이 강론을 잘한다는 평이 있어 여러 직책을 맡지 아니하고 ()()()에서 右文()()()에 전임하여 世子()에게 經書()史書()를 열성으로 강의 하였다. 그리하여 세자이신 문종 께서는 덕이 높고 어질고 효성스러워 철인의 덕에 부합되었으며, 정의로 나아감에 있어 군주로서의 도를 올바르게 실천 할수가 있었다.


세종은 역사상 가장 추앙 받는 賢君으로서 ()학덕있는 신하를 잘 등용하고 집현전 이라는 국가 최고 기관의 장으로 청백리 최만리가 있음으로 해서 더욱 그발자취가 빛나고 있는것이다. 최만리가 세종 대왕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세종께서 즉위한 해에 文廣科에 급제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학자로서 최만리를 세종이 총애한것은 평생토록 집현전을 떠나지 못하게 한것을 보더라도 알수가 있거니와 조선조 500년 동안 왕이 신하와 함께 침석에드시면서 까지 경륜을 나눈 사람으로는 세종과 최만리,그리고 고종과 곽종서 뿐이다.


다음에 그의 가장으로서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세종 21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 하면서 가족에게 아무런 배려도 없이 5남 1녀를 夫人 중화 양씨 에게 부탁하고 무아봉공의 한마음 으로 떠났다


당시 장남 은 14살,막내는 한살이었으며 이 외동 따님은 후에 德水李氏 의석(宜碩)에게 출가 하여 후손으로 이이(李珥) 율곡(栗谷) 있다. 그러나 어찌 이헤어짐이 부인과의 여영 이별인줄 상상인들 했겠는가? 부인은 남편의 인품을 잘아는지라 현모양처 로 아무런 불평도 없이 시조부 (한성윤) 께서 마련 해놓은 진위현 여척동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에 가솔을 이끌고 이거 하였다. 남편이 외직으로 나가 있을동안에 행여 주위에 누가 될것을 우려 하여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과 갑자기 농사 를 짓는다는것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5남 연(堧)을 출산 하면서 산후가 좋지 않았던 부인 양씨는 이듬해에 3월 4일 6남매를 남겨둔채 쓸쓸히 생을 마치고 만다.


장자의 나이 15세에 부인이 세상을 버리니 눈을 어찌 감겠는가. 그러니 외지에 있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세종이 최만리를 총애한 일화가 실록에 있다. 최만리는 간혹 술을 마시고 거나한채로 내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에 세종께서 공에 경계하기를 경은 비록 술을 많이들기를 좋아하여 어지러울 정도까지 마시지 않는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몸을 해칠까 염려되니 술을 반드시 세잔으로 절제하기 바라오 하셨다.


공은 그뒤로 시를짓고 선비들과 노니는 장소에 가서도 석잔의 술만 들고 그만 마시는것을 통례로 하여 어명을 어기지 않았다. 그뒤에 세종께서 이러한 사실을 듣고절제함이 너무 심하구나 하시고 곧 공부(工部)에 명하여 은술잔을 만들어 공에게 하사하였다. 이에 그는 말하기를 이것을 어찌 감히 자손에게 사적으로 물려 줄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본관에 보관 하여 주상의 은혜를 선양 하여야 할것 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백년후에 최만리의 외증손인 율곡이 부제학이 되어 이술잔으로 술을 마시며 감격 하였다한다.는 일화도 있으나 그은잔은 아깝게도 임진왜란 때에 소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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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불쌍하게 태어났다 : 문학박사 황재순(시교육청 장학사)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불쌍하게 태어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글은 세종 시절에 어떤 실패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당시 세종의 개인적인 꿈은 한자의 한국식 발음을 모두 중국식 발음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중국의 한족이 몽고족인 원나라를 몽고로 쫓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는데,

명나라에서는 그동안 몽고족에 의하여 망가진 한자 발음을버리고 한족 고유의 한자 발음을 되찾고자

"운회(韻會)"라는 책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이라는 책을 펴 낸 바 있다.

세종은 그것이 부러웠고 이 기회에 우리도 모든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바꾸어 국제화, 세계화에 앞장서고 싶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 두 책을 우리 말로 번역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표시해 낼 수 있는 발음기호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존의 한국식 발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한자만으로는 새로운 발음을 표시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이 직접 집현전으로 가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발음기호의 제작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부탁한 까닭으로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도 안 되어 있다.

당시에 집현전 책임자는 부제학 최만리였다. (대제학으로 정인지가 있었으나 당시 집현전 대제학은

겸직이었고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제 집현전의 업무는 하지도 않았다)


당시 최만리는 조선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선비이자 학자였다.

공직생활 20 여년을 아무 이권도 없는 집현전에서만 근무한 진정한 선비였다. (중간에 사또로 한 번 발령 난 적이 있으나

집현전 일이 많아서 6개월 늦게 부임해서는 6개월 만에 집현전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있다)


당시에 발음기호 즉 한글 개발 작업은 최만리 지휘하에 착착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귀신인 최만리가 그 일을 모를 리가 없고 세종의 신임 또한 두터웠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종합해 보건대

최만리가 한글 개발 실무팀의 대장이었음이 분명하다.


최만리 이하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이 새로운 옥편에 사용할 발음기호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였고,

세종의 속셈이 우리 나라의 한자 발음을 명나라 한족의 중국어 발음으로 바꾸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최만리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발음기호를 하나하나 만들어 갔고,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이 되었다.

이 때만 해도 이 글자가 얼마나 대단한 글자인지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세종도 최만리도 그저 이 글자가 나중에 다른 책을 쓰기 위한 소도구 정도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날짜를 기록해 둔 사람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날짜도 없이 12월 기록 맨 끝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약 한 달 뒤에 세종은 중국식 한자발음 사전에 해당하는 "운회'라는 책의 대대적인 번역사업 계획을 발표한다.

세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편찬위원 명단에 올랐다.


여기에 최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이 발끈하였다.

오랫 동안 써 오던 우리 나라식 한자 발음을 버리고 왜 중국식 발음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

당시 집현전 학자의 상당수가 세종의 새로운 음운정책에 반대하였고 세종에게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상소문을 써서는 최만리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걸 보고 이번에는 세종이 발끈하였다. 그렇게 믿었던 최만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당장 그 일당을 잡아서 가두라 하였다. 그 때가 저녁 나절이었다.


최만리에게 직접 하문한 내용은 바로 이 한 마디였다.


"운(韻)에 대해서 뭘 아시오?"


<<중국어에서 운이란 발음에서 모음부분 이하를 말하는 것으로(산, 간, 만 발음에서의 [an] 발음) 한시를 쓸 때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며, 중국 본토 발음인가 사투리 발음인가 하는 것을 가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은 이 기회에 정말 한자 문화권의 후진성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고,

최만리는 갑작스러운 발음 변동에 대한 대규모 혼란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최만리는 "지금까지 힘들게 만들었던 그 발음기호들이 겨우 이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하면서

홧김에 발음기호(한글)에 대한 비판도 몇 마디 곁들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어 최만리가 한글창제 반대의 선봉에 섰다느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글 창제과정에서는 아무도 반대한 사람이 없었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위 상소문은 한글 창제 한참 뒤에 나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세종은 사무실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고, 최만리, 신석조, 정창손,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들은

의금부 감옥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세종은 이들을 거의 다 석방하였다.

대학자들을 마냥 가두어 둘 수는 없었다.

여기서의 하위지는 나중에 사육신의 한 명이 된다.

정창손만을 파직시킨 것으로 보아 이 상소문의 책임 집필자는 최만리가 아니라 정창손일 가능성이 많다.

이 정창손은 나중에 영의정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는 대정치가가 된다.


그러나 최만리는 단단히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임금과는 일 못하겠소"


사표를 내고는 출근도 안 하고 집에 콕 박혀서는 아프다면서 생전 나오지도 않았다. 세종은 다급해졌다.


"집현전 부제학 자리는 항상 비어 있소. 언제든지 나오고 싶을 때에 나와 주시오"


최만리는 끝내 안 나왔고, 그로부터 1년 반인가 뒤에 세상을 뜬다.


최만리는 집현전 장기근속자답게 엄청 가난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존경했다.

세종조 청백리가 모두 15명인데 최만리가 서열 두 번째로 올라 있다.

세종 시절 청백리의 첫째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한성부윤 "정 척"이라는 분이었고

최만리 다음 서열로 청백리에 오른 분은 그 유명한 "황 희" 정승이다.

청백리에 오른 최만리는 역대 왕들의 위패가 있는 종묘에서 세종과 함께 모셔지고 있다.


그러나 해주 최씨 최만리는 어느 한글학자의 한번 실수로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다.

그 한글 학자는 일제시대의 일본학자 "고쿠라 진페이"가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최만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최만리는 억울하다. 최만리 후손 해주 최씨는 조만간 최만리 복권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최만리가 한글창제팀장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최만리에 대한 상세한 논문은 이미 1950년대에 이숭녕 박사에 의해서 두 편인가 발표된 것이 있다.


그런데 기존의 선입관들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여 아직도 많은 국사 책에서

한글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만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최만리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비판하고 있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부터 빨리 고치는 일이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쁜 최만리"가 들어갈 뻔 하였으나 마침 그 때 필자가 교과서심의위원으로 있던 때여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다행히 뺄 수 있었다.


세종의 소원이었던 한자발음의 중국화 정책은 최만리를 숭배하는 많은 선비들의 외면으로 실패로 끝났다.

세종의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의 한자발음이 중국어의 한자발음과 같아졌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어의 정확한 발음을 귀로 확인하기 위하여 요동으로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족 출신 관리를 만나려고

요동으로 열 몇 번이나 출장 갔다 온 성삼문만 엄청 고생했다.(성삼문의 출장 목적은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으로서는 애써 만든 발음기호까지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어린 백성이... " 어쩌고 하는 서문을 붙여서 백성용 글자로 반포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최만리 사후 1년 반 뒤의 일이었다. 이 글자들의 명칭은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배우기가 너무너무 쉬워서 별도의 교육기관이 없이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훈민정음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수천 년 전에 만든 지구상의 모든 글자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최신 모드로 만들어진 글자가 바로 우리 나라 한글이다.

어찌 우리 한글을 아주아주 옛날에 만든 다른 나라의 구식 글자와 비교할 수 잇겠는가?


너무 쉽게 만든 것도 탈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수치로 생각하였고 모든 국가의 공식장부에서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그래서 서민들과 여자들 사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전승되었다.


여자들끼리만 전승되던 한글은 연산군의 모친 윤비가 죽는 데에 크게 공헌을 세웠다고 하여

효자 연산군에 의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도 있다.


어쟀든 조선 시대의 공식 문자는 여전히 한자로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글이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승격되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글을 우리 나라의 공식 글자로 승격시키는 데에는

1890년대에 일본의 힘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일본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에 그리 해 준 것은 아니고,

우리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중국과 떼어 놓겠다는 전략적 필요성이 그 이유였고,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서민들의 힘을 강화시켜 기존 우리 양반들의 발언권을 축소시켜 놓자는 것이 또다른 이유였다.


물론 그 전에 신부나 목사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평등과 자유"라는 무기를 들고 우리 나라 서민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하여 서민들의 글자인 한글을 사용한 성경을 보급한 것도 때늦은 한글 발전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글 성경 때문에 우리 나라의 민심이 적지 않게 흔들렸고 그 빈틈을 일본이 적절히 잘 활용한 셈이었다.

이 때 일본이 조금만 더 약하게 나왔다면 우리나라도 저 동남아나 아프리카처럼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 나라에 독립협회도 만들어 주고 독립문도 세우게 하고 독립신문도 창간되게 하여

신문사 윤전기용 한글 활자를 무제한 제작하여 우리 나라에 보급하였다.

<<1890년대만 해도 "독립"의 개념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우리도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라는 개념이었다.

일본은 이 때에 우리 나라에 심어 준 "독립정신" 때문에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덕분에 우리 나라는 갑자기 한글시대로 급속하게 변해 갔다.

한글 창제 450년만에 맞이한 때늦은 한글시대의 새로운 주인공은 최남선, 이광수 등 중인계급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1940년대 초에 내선일체인지 뭔지 때문에 3, 4년간 한글을 안 써도 되게 해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 앞으로 조선 사람들을 절대로 차별대우하지 않겠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도 좋고, 국어를 일본어를 써도 좋다.

그러니까 완전히 일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말이다. 어때? 좋지? 근데말이야...

이제 완전히 일본 사람 되었으니  젊은 놈들 우리 일본 군대에 좀 보내 줄래?... 라는 속셈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러니까 이상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면


한글은 세종의 잘못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고, 최만리는 억울하며,

일본의 침략준비 수순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재탄생하였으나.

그 품질은 가장 최근 모드로 만든 것이니만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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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만리는 歷史의 죄인인가     -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

 

역사란 결국 인간들이 살아간 흔적이라고 한다면 인물사는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분야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문중(門中)과 학파의 이해 관계, 시대적 상황에 의해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특히 어떤 인물을 숭모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다른 인물을 깎아 내리는 비교사적 필법(筆法)은

인물사를 빗나가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사를 되돌아보면, 영광에 못지 않게 오욕의 역사도 적지 않은데

그 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이 너무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의 문자를 빌려쓴 데서 비롯된다. 글자란 단순히 글을 쓰는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중국의 문화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저들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를 살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한문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글로 풀어 쓸 수 없음을 측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명군(明君)이자, 현자(賢者)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글의 역사를 얘기할 때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그 밑바닥에 깔고 이론을 전개한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최만리(崔萬理)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역사에 의하면 그는 한글 창제에 반대했고,

이 사실로 인해 ‘역사의 죄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과연 그럴 만한 인물일까?

 

최만리는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옛 문헌인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그는 해주(海州) 최씨의 시조인 해동공자 최충(海東孔子 崔沖)의 12대 후손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최하(崔荷) 였다고 한다. 

그는 세종이 왕위에 등극한 1419년에 진사시 을과에 합격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본시 학문이 높았던 최만리는 과거 합격과 더불어 벼슬이 올라 집현전에 들어가 박사(博士)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1439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잠시 임금의 곁을 떠났다가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서울로 돌아와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늙어서 고위직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고 청백리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무능하거나 부덕했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443년이 저물어 갈 무렵, 세종은 오랜 노력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이듬해 연초가 되자 최만리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세종실록’ 갑자년(1444) 2월 20일(庚子)자에 실린 그의 상소문을 읽어보면

우리가 그의 진심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신하보다도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사업을 대단한 업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소의 첫머리에서 ‘한글을 창제한 왕의 업적이 지극히 신묘해 사리를 밝히고 지혜를 나타내심이

천고에 뛰어난 업적’이라고 경하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상소를 이어가면서 몇 가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한글을 쓰노라면 한문을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장차 중국의 예법을 모르게 될 것이니

그 점이 걱정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최만리에게 두 가지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한글을 쓰게 되면 한문을 쓰지 않게 되리라는 것은 생각이 지나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로부터 560년이 지난 지금도 한문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고,

또 그들의 주장이 잘못 됐다고만 볼 수 없다면, 당시 최만리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을 크게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또 한 가지, 그가 중국의 제도(예법)를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부분은 비난을 받을 만하다.

한글의 창제가 중국의 제도를 버리는 것도 아니려니와 중국의 제도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국가의 운명을 바꿔 놓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중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걱정한 것은 그가 한때 총명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그런 식의 사고에 대해 최만리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상소가 합소(合疏·여러 명이 연명한 상소)였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한글 창제가 집현전의 고유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동궁(진평대군·晉平大君)과 함께 집현전의 몇몇 소장 학자들만이

국사를 논의하는 의사청(議事廳)에 불려가 한글창제 일을 처리한 데 대해 최만리는 불평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음운학상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 사이의 견해차에 대한 설명인데 이는 최만리 자신도 한글 창제에 참여했던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당연히 할 말을 한 것이므로 그를 탓할 일은 못된다.

끝으로 최만리의 상소에 담겨 있는 간절한 사연은 그가 세종대왕의 건강을 몹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면서 몸을 돌보지 않아 한글이 완성되었을 때 왕의 건강은 지극히 쇠약해지고

특히 시력이 나빠져 약수가 나오는 청주(淸州) 초정리에서 휴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종은 휴양을 떠나면서도 유독 한글 관계 자료만을 챙겨 떠나고자 했다.

최만리가 안타깝게 생각한 대목은 바로 이 점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때문에 병이 났고,

이제 그 때문에 휴양을 떠나면서 또 그 보따리만 들고 떠나려 하니 야속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만리의 실수랄 것도 없지만, 굳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의 사조였지,

그가 역사의 죄인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만리의 이 상소문은 마치 그가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것처럼’ 비난받고 있다.
아마도 최만리를 역사의 죄인으로 취급한 최초의 학자는 한결 김윤경(金允經·1894∼1969)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 문자 및(及) 어학사’(서울 조선기념도서출판관·1938)에서

‘최만리는 한글 창제를 반대한 저능아’(1946년 판·86쪽)라고 최만리를 비난했고, 그 평가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세종대왕을 찬양하고 최만리를 몰아붙이는 한글 숭모론자들은 더 나아가서

‘사대주의자들이 한글을 언문(諺文)이라고 비하했다’고 비난한다.

사실은 언문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도 세종이었고(‘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자),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만든 관청의 이름도 언문청(諺文廳·‘세종실록’ 28년 11월 8일자)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언문이 마치 한글을 비하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는 논리도 근거 없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훌륭한 분이었고 그를 기리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인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다른 인물을 상대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만리를 헐뜯는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공적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찬성했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공적이 낮아지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아마도 저승의 최만리는 자신의 뜻이 그토록 곡해된 데 대해 무척 원통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

* 세종과 최만리 : 디지털 한글박물관 (황선엽 : 성신여자대학교)

 

들어가며

1444년(세종 26)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상소로

인하여 최만리는 극단적 사대주의자이며 보수주의자로 비난 받았으며 반민족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하였다. 반면에 최만리는 성격이 강

직하고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추천된 사람이며 한글 창제의 협력자인바 그를 사대주의자 내지 반민족주의자로 비난하는 것은 사실

에 대한 오해와 현대적 편견의 소치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실록 등의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최만리는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최만리를 대표로 하여 올린 이른바 언문 창제 반대 상소문에 담긴 구체적인 주장은 무엇이며 나아가 그 주장들의 근거는 어떠한

것인지, 세종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주장을 꺾기 위해 어떻게 조치하였는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 1. 최만리는 어떤사람인가?

 

1.1. 최만리의 생애

 

최만리(崔萬理)의 본관은 해주(海州)로 해동공자라 일컬어지는 최충(崔冲, 984-1068)의 12대손이며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崔滋,

1188-1260)의 6대손이다. 또한 그의 외동딸이 본관이 덕수(德水)인 이의석(李宜碩)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의석의 증손(曾孫)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이다. 즉 이이는 최만리의 외현손(外玄孫)이 된다. 최만리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419년(세종 1) 4월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한 것으로 보아 1390년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세종(1397-1450)보다 나이가 약간 많거나 비슷했을 것이

다. 과거에 급제한 최만리는 정9품인 정자(正字)라는 벼슬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수문전(修文殿), 집현전, 보문각(寶文閣)을 두었었는데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며 문신에게 관직만

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1420년(세종 2) 3월에 이르러 이 기관들 중 집현전만을 남겨 관사(官司)를 궁중에 설치하고, 다음의 표와 같

이 직제를 정하였다. 아울러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해 집현전의 관리로 임명하여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다음해인 이 때 최만리는 집현전의 정7품 박사에 임명되었다.

 

1420년(세종2)에 정해진 집현전 직제 

           명  칭

            품  계

           인  원

           비  고

     영전사(領殿事)  

           정 1 품

            2  인

        겸관(兼官)

     대제학(大提學)

           정 2 품

            2  인

     제 학 ( 提 學 )

           종 2 품

            2  인

     부제학(副提學)

           정 3 품

           10 인 

     직제학(直提學)

           종 3 품

      각 품에 2인을

     초과할 수 없음.

    (후에 증원 혹은

     감원되어 16인>

    22인>32인>20인>

        으로 변화)

        녹관(祿官).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도록 함.

     직 전 ( 直 殿 )

           정 4 품

     응 교 ( 應 敎 )

           종 4 품  

     교 리 ( 校 理 )

           정 5 품

     부교리(副校理)

           종 5 품

     수 찬 ( 修 撰 )

           정 6 품

     부수찬(副修撰)

           종 6 품

     박 사 ( 博 士 )

           정 7 품

     저 작 ( 著 作 )

           정 8 품

     정 자 ( 正 字 )

           정 9 품

 

1427년(세종 9)에 교리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랐으며 같은 해 7월에 세자[문종(文宗)]가 조현(朝見) 할 때의 서장관

겸 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으로 직제학 정인지(鄭麟趾)와 집의 김종 역시 같은 해 8월에 세종이 세자(世子)에게 전지하여 매일 주강(晝

講)할때 좌필선(左弼善) 정인지(鄭麟趾)와 우문학(右文學) 최만리가 번갈아 가며 고금의 유익한 말과 훌륭한 정치를 진술하고 민간의 일

을 들려주기도 하며 저녁에 이르러서야 나가게 하는 것을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고 한 기록이 보이는바 이때 최만리는 집현전 응교로

서 우문학을 겸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만리는 이후 수 년에 걸쳐 집현전 관리로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였던 듯하다. 1431년(세종 13) 10월 기사에 세자가 시종(侍從)한 지 오래

된 최만리와 박중림(朴仲林)이 들어와서 강(講)할 때는 스스럼없이 상당히 어려운 것을 묻는 데 비해 날마다 교대로 들어오는 나머지 관

원들에 대해서는 낯선 까닭에 세자가 부끄러워 머뭇머뭇하면서 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은 서연관을 겸관이 아

녹관으로 바꾸었는데 서연관은 녹관을 두어 오랫동안 그 임무만을 전담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최만리는

1432년(세종 14)부터 1435년(세종 17) 7월까지 세자 좌보덕(左輔德, 종3품)을 맡았는데 겸관이 아니므로 이 시기에는 집현전의 직책은 맡

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35년(세종 17) 7월에 이조(吏曹)에서 집현전의 기능이 임금 앞에서 글을 강론하는 것인바 서연관의 직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별도의 녹관을 둘 필요가 없이 집현전에 합칠 것을 주청하니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최만리는 세자 좌보덕에서 집현전 직제학으로

소속이 옮겨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436년(세종 18) 4월에 집현전 직제학 최만리를 초시의 대독관(代讀官)으로 삼았다는 기사

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438년(세종 20) 7월에 집현전 부제학에 오르고, 이듬해인 1439년 6월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1년

후인 1440년(세종 22) 7월에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1444(세종 26)년에 상소문제로 사직하기 전까지 계속 집현전 부제학으

로 남아 있었다. 사직하고 낙향한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년)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

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

 

1.2. 세종과 최만리의 관계

 

앞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최만리가 관직에 있었던 25년 간의 대부분을 집현전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집현전에 소속되지 않았던 기간

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던 1년 간과 세자의 서연관으로 겸직이 금지되었던 5년 간인데 이 중 세자의 서연관으로 있던 5년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형식상으로만 집현전 소속이 아니었을 뿐 실제로는 집현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종이 집현전에 무척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바 집현전이 새로 확장되던 때부터 붙박이로 근무한 최만리 또한 세종이 대단히

아끼는 신하였다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세종과 최만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해주 최씨 집안에 전해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참조할

수 있다.

최만리는 술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은 취한 채로 어전에 들어가 임금을 뵈었더니 세종이 만리를 걱정하여 “경은 몸을 생각하여 앞으로 세 

잔 이상씩은 마시지 마오.” 하였다. 이에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만리는 자신이 쓸 술잔을 스스로 크게 만들어 하루 세 잔씩만 마셨다. 후

에 세종이 만리를 접견할 때 술을 많이 마셨음을 알고 나무라기를 “경은 또 취기를 띄고 나왔으니 어떻게 된 것이오 ” 하니 옆에 있던 동

료가 말하기를 “만리는 어명대로 세 잔만을 마셨을 뿐입니다. 단지 스스로 큰 술잔을 만들어 마셨습니다.” 하였다. 이에 세종이 껄껄 웃으

며 “경이 왕명을 그토록 철저히 지킬 줄은 몰랐소.” 하고 바로 명하여 공관(工官)으로 하여금 큰 은 술잔을 만들게 하여 그 잔을 집현전 본

관에 갖다 두고 수시로 만리를 접대하게 하였다.

세종이 최만리에게 신문(新門) 밖의 저택을 하사하였다. 세상사람들은 이곳을 천 칸의 집이 들어설 만큼 넓다 하여 천간허(千間墟)라 불

렀으며 그 고개 이름을 만리현(萬理峴)이라 불렀다.

최만리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 이듬해(1445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세종은 만리가 가고 없는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항상 비워둔

채 언제나 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만리의 부음(訃音)을 듣고서는“대쪽같은 만리가... 결국은 죽었구나.” 하며 침식을 잊은 채 오랫

동안 슬퍼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최만리의 집안에서 전해오는 것이므로 최만리를 높이기 위해 상당히 윤색되었을 것이기는 하나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

고 보이지는 않는다.

첫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역시 가승(家乘)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세종이 최만리에게 하사한 은잔이 집현전[후에 홍문관]에 계속 남아 있

었는데 임진왜란 중에 없어졌다고 한다.

둘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현재 서울 마포구 공덕동과 중구 만리동2가 사이에 만리재[萬里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세종

이 최만리에게 하사한 집이 있던 곳이라 한다. 현재는 ‘마을 리(里)’자를 쓰고 있는데 위의 이야기가 맞다면 와전된 것이라 하겠다. ‘만리

동’이란 이름은 1946년에 일본식 지명을 고치며 ‘만리재’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 청파초등학교 뒷산에 만리창(萬里倉) 터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최만리가 탁지부(度支部) 외창(外倉)을 남대문 밖 연산강(燕山江) 위에 처음으로 세웠으므로 그 창고 이름을

만리창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최만리가 호조의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는 믿을 수가 없다.

셋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최만리 이후 집현전 부제학의 임명이 1448년(세종 30) 5월에 가서야 이루어졌음을 참고할 수 있다. 실록에 따르

면 정창손(鄭昌孫, 1402-1487)을 이 때 집현전 부제학으로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만리가 죽은 후 3년 후에야 집학전 부제학이 새로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세종이 최만리를 기다리기 위해 부제학 자리를 비워 놓았다기보다는 부제학에 임명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최만리가 집현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컸었음을 짐작게 한다.

 

1.3. 최만리가 올린 상소문들의 내용

 

실록에 따르면 최만리는 모두 14차례의 상소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3회의 상소는 일반 행정상의 과오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

다. 그 후 6차례는 세종의 불사(佛事)와 관련하여 척불(斥佛)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중간에 이 척불 상소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

상소를 한 차례 올렸다. 이후 3회는 세자의 섭정을 반대하기 위해 올린 것들이다.

최만리와 세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 있으나 세조실록에 보이는 기사를 더 참조할 수 있다. 세조가 공신들을 모아 놓고 연회

를 베풀다 필선(弼善) 정효상(鄭孝常)에게 이르기를 “문종이 세자였을 때, 서연관 최만리·박중림 등이 세자를 보익(輔翼)하며 하나라도

조그마한 과실(過失)이 있으면 문득 간(諫)하여 마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이 두 신하는 그 직책(職責)을 능히 다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제 그대들은 한번도 선한 말을 진달(陳達)하여 세자(世子)를 경계한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아첨(阿諂)함이 심하다 할 것이

다.”고 하였다 한다.

최만리는 문종이 스스럼 없이 대할 정도로 친했으되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주 엄한 스승이었다 할 것이다. 세자의 스승인 최만리는 세

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의 섭정을 시행하려 하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신하된 당연한 도리이며 비단 최만리만 이

러한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므로 그다지 특징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최만리의 청렴성을 확인시켜 준다

할 것이다.

최만리가 마지막으로 올린 것이 바로 문제의 언문 창제 반대 상소이다. 『연려실기술』이나 『대동야승』에는 『필원잡기』의 기사를 인

용하여 최만리가 환관의 복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되어 있는데 실록에 이러한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2.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와 세종의 처결

 

2.1.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의 배경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20여 년을 근무하여 집현전의 실질적인 최고 직책인 부제학을 맡고 있던 최만리는 왜 세종이 그토록 심

혈을 기울여 이루고자 하는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고 나선 것일까 그것도 창제가 다 이루어진 후 2달이나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는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1444년(세종 26) 2월 16일

에 세종이 한글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만리 등의 상소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실록에 실린 2월 16일 기사의 내용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1444년 2월 16일 기사에 따르면 세종은 집현전 학사 중 교리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

이개(李塏)와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강희안을 의사청(議事廳)에 나오도록 하여 한글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다. 또 동

궁[세자]과 진양대군[수양대군],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이 사업을 감독하여 관장하게 하였으나 모든 일은 임금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도

록 하였다. 상을 줌에도 후하게 하였으며 물자를 보급함에도 매우 우대하도록 하였다. 이상이 기사의 내용이다. 의사청이란 국가의 중대

사를 의논하는 장소이고 『운회』는 앞서 밝혔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말한다.

이 기사 내용을 통하여 세종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 사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자와 대군

들이 감독하게 하고도 일일이 세종 자신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였으며 특별히 상도 후하게 주고 물자 공급도 우대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사에서 ‘상을 줌에도 후하게 하였다[賞賜稠重]’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2월 16일 명령을 내리며 앞으로 일을

잘하란 의미에서 상을 후하게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상을 후하게 주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일반

적인 경우는 사업이 완료되고 나서 그에 따라 포상하는 법인바 이러한 예에 비추어 본다면 이 부분은 어느 쪽으로도 해석해도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록 기사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실록의 기사는 날짜별로 기록되며 일반적으로 그날 일어난

일을 기록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날 내지 상당 기간의 걸치는 사건임에도 하루치 기사에 몰아서 넣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해당

기사는 대개 사건이 시작된 날, 사건이 끝난 날에 실리게 되는데 간혹 사건이 진행 중인 중간 날에 실리기도 한다. 이는 실록이 왕의 사후 

수 년 내지 수 십년 치의 기록을 모아 간행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2월 16일의 이 기사 역시 그 날 하루 동안

에 벌어진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상당 기간에 걸친 일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뒤에서 살펴볼 최만리 등의 상소문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언급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즉 4일 뒤인 2월 20일에 올린 상

소에서 최만리 등은 “옛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치고 근거도 없는 언문으로 음을 달아 공장(工匠) 수십 인을

불러들여 이를 새겨서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의 운서를 고쳤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이 『고

금운회거요』의 번역이 가지는 특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것인데 2월 16일에 이 명령이 내려진 것이라면 불과 4일만에(실제로는

상소문을 준비하는 데 하루 내지 이틀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므로 명령이 내려진 직후일 것이다) 번역의 기본 방향이 잡히고 어느 정도 윤

곽이 드러나 있었다는 무리한 가정을 해야 한다. 더구나 새겨서 인쇄하여 반포하려 한다는 것은 이미 원고가 완성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

을 명확히 보여 준다 할 것이다.

따라서 2월 16일의 이 기사는 이 때 『운회』의 번역을 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이러한 명이 있었고 이날 원고가 상당히 완성되었

기에 불러 상을 내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회』의 번역을 명한 것은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데 이것은 아마 훈민정음의 창제 직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즉 1443년 12월에 이러한 명이 있었고 약 2달의 기간이 걸려 원고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2.2. 세종과 최만리 등의 논쟁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직전 김문(金汶),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河緯之), 부수찬 송처검(宋

處儉), 저작랑 조근(趙瑾)이 연명하여 이른바 언문 창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여기서는 실록 및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세

종과 최만리 등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과 최만리 등이 대화하며 논쟁을 벌이는 가상적인 장면을 설정하였다. 이해의 편

이를 위하여 말투도 가능한 한 현대적으로 구성하였다.

세 종: 내가 만든 훈민정음에 대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만리: 언문을 만드신 것이 지극히 신묘(神妙)합니다. 전하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발휘하시는 능력이 천고(千古)에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간곡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잘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종: 그대들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으니 말하도록 하라.

최만리: 우리 조선은 건국 이래로 정성을 다해 사대(事大)를 하였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는 중국의 제도를 따라 행하여 왔습니다. 이리하

여 이제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문명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언문(諺文)을 창작하

셨으니 보고 듣는 저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종: 훈민정음을 창작했다고 하는데 훈민정음은 완전히 새로 만든 글자가 아니라 모두 옛 글자에 근본을 두고 있다. 즉 글자의 형태는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지 않았느냐


최만리: 그러나 소리로써 글자를 합성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어긋나니 진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일입니다. 만약 이 언문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 이를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사대모화(事大慕華)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세 종: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정음을 만든 것은 사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의 제도를 가져다 쓰더라도 우리나

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꾸어 적용하지 않느냐 한자로는 우리말을 쉽게 또 정확히 적을 수 없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

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즉 이러한 우리의 실정을 고려하여 정음을 만든 것일 뿐이다. 나는 즉위한 이래 사대모화에 대해 조

금도 소홀히 한 일이 없고 이러한 사실은 황제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혹 모함하려는 자가 정음을 만든 것을 빌미로 문제를 삼는다면 우리

의 뜻이 사대모화에서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음을 밝히고 이것이 오로지 우리나라 백성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한

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최만리: 예로부터 9개 지역으로 나뉜 중국 안에서 기후나 지리가 비록 다르더라도 방언에 따라서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습니다. 오직 

몽고, 서하(西夏), 여진, 일본, 서번(西蕃)과 같은 무리만이 제각기 자기들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말

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옛 글에도 중국(中國)의 문화로서 오랑캐의 문화를 변화시킨다 하였지 중국의 문화가 오랑캐 문화에 의해 변화되

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대하여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을 간직하고 있어 예악

(禮樂)과 문물(文物)이 중국과 견줄 만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

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향기로운 명약인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쇠똥구리가 만든 쇠똥 덩어리를 취하는 격이라 할 것입니다. 이 어찌

문명에 있어 큰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세 종: 대개 음(音)의 같음과 다름은 그 자체로 같고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같음과 다름에 기인하는 것이며, 사람의 같음과 다름은 또

한 지방이 같고 다름에 기인한다. 즉 지세가 다르면 기후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면 사람들이 숨쉬는 것(발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

로 온 세상의 문자와 제도를 통일시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발음이나 말은 같아지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산하가

저절로 한 구획을 이루어 지리와 기후가 중국과 크게 다르니, 말소리가 어찌 중국어의 것과 서로 부합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즉 언어가 중

국과 다른 까닭은 당연한 이치이다. 즉 예악과 문물은 우리가 중국과 같아질 수 있으나 언어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

리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정음을 만드는 것이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 하는 그대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최만리: 신라의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는 비록 거칠고 촌스러우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다가 어조사를 적는 데 이

용하므로 한자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급 관리나 하인들이 이두를 익히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한문으로 된 여러 책을 읽

어서 한자를 대강이라도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이두를 사용하게 됩니다. 즉 이두를 사용할지라도 반드시 한자에 의거하여야만 뜻을 통할

수 있으니 이두 때문에 한자를 공부하여 알게 되는 사람이 상당히 많고 따라서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문자가 없어 끈을 묶어 의사소통을 하던 시대와 같다면 임시방편으로나마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

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올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임시방편으로 언문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좀 시일이 걸리더라도 중국

에서 통행하는 한자를 익히도록 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수천 년 동안 써오면서 문서나 계

약서 등을 작성하는 데 어떠한 장애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이두를 바꾸어 따로 속되고 무익한 글자를 만든단 말씀입니까

만일 언문이 통용되면 관리가 되려는 사람들이 오로지 언문만을 익히고 한자를 배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관리가 되려는 사람이

언문으로써 벼슬자리에 오를 경우 뒷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일을 보고 ‘27자의 언문으로써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힘

들여 성리학을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매우 적어질 것입니다. 비록

한글로써 능히 관공서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현(聖賢)의 문자를 알지 못하면 배우지 않고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사리(事理)의 시비를 따지는 데는 어둡고 헛되이 언문(諺文)에만 공을 드릴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쌓아왔던 학문[성리학]을 숭상하는 정책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 두렵습니다.

이전부터 써 오던 이두도 비록 한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님에도 식자층에서는 오히려 이를 속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 바꾸려고 하

는 형편인데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 전혀 관련이 없고 오로지 시장거리의 속된 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까 가령 언문이 예전부터 있었

던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문명한 정치를 이루려고 하는 때에 ‘여전히 언문을 인습적으로 그대로 사용하시겠습니까 ’ 하고 반드

시 이를 바로잡겠다고 논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래된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일반적인 폐단입니다. 지금의 이 언문은 하나의 신기한 재주에 불

과할 뿐입니다. 학문에 있어서는 손실만 가져오고 다스림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로움도 없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

아도 그 옳음을 알 수 없습니다.


세 종: 앞서 그대들이 이르기를 ‘정음은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성함에 있어서 모두 옛 것에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 또한 소리를 달리한 것이 아니냐 게다가 이두를 제작한 본래의 뜻도 바로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이두(吏讀)가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언문(諺文)도 또한 백성들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설총(薛聰)이 한 일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君上)이 한 일은 그릇되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또 언문을 제작한 것이 신기한 하나의 기예(技藝)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늙으막에 소일하기 어려워 책을 벗삼고 있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만을 좋아하여 정음을 만들었겠는가 그리고 또한 이는 사냥을 하며 매를 풀어 놓은 일 등과는 다르다. 그러니 그

대들의 말은 상당히 지나친 점이 있다.

최만리: 하나의 신기한 재주라고 말씀드린 것은 말을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이비 별다른 뜻이 있는 있어서 드린 말씀은 아닙니

다.


세 종: 또한 내가 하급 관리들을 선발하는 데 정음을 넣도록 하였으나 전적으로 정음만을 대상으로 시험 보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대과

(大科)의 경우에는 정음을 시험 과목에 편입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학문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대들의 주장은 너무 과장

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다스림에 있어 아무 이로움도 없다 했는데 이 또한 옳지 않다. 가령 형을 집행하고 죄인 다스리는 문서들을 이두

와 한문으로 써 왔는바 글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 글자의 차이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정음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적은 후 읽어 준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모두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

으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만리: 중국은 예전부터 말과 문자가 동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일이나 소송 사건에 있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매

우 많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힌 죄인 가운데 이두를 아는 사람이 직접 자신이 진술한 내용을 읽어 보고 그 내용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더라도 매를 견디지 못해서 승복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로 보건대 글의 뜻을 몰라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것이 아

님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언문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즉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리는가 그렇지 않은가

는 그 일을 담당한 관리가 어떠한 자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말과 글이 다르거나 다르지 않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문으로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저희들은 의심이 됩니다.


세 종: 내 일찍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률 조문을 몰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

겨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법률 조문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서 이를 이두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면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교한 적이 있다.
그때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말하기를 ‘백성 중 간악한 무리들이 법률 조문을 자세히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고려하여 두려워하

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일들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렇다면 백성이 알지 못하도록 내

버려 두어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이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서 범법한 자를 벌준다면,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느냐 더욱이 선대의 임금들께서 재판시에 법률 조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이 아니냐 ’ 하고 꾸

짖은 적이 있다. 그대들의 말은 허조의 말과 같다 하겠다.
죄인을 공정하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가 관리의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공정한 관리도 착오를 범하여 억울한 죄인을 만들 수 있

다. 죄인을 다스림에 정음을 사용하면 억울한 일이 다소라도 줄어들 것이다. 죄인을 다스릴 적에 문서를 정음으로 작성하여 들려 주면 억

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라는 것은 정음이 쓰일 수 있는 한 예일 뿐이다. 가령 만약에 정음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번

역하여 민간에 반포한다면 일반 백성들이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충신·효자·열녀가 많이 나오지 않겠느냐

정창손: 비록 언문으로 번역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그림으로 그려 삼강행실도를 반포하였으나 그 뒤에 충신·효자·열

녀가 많이 나온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삼강(三綱)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자질이 어떠하냐에 달린 것입니

다. 반드시 언문으로 그 책을 번역, 배포한 뒤라야만 사람들이 그러한 행실을 본받는다고 어찌 보장하시겠습니까


세 종: 그대의 말은 허조의 말보다 심하구나. 이것이 어찌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교화나 가르침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 사람의 자질도 교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지 않고 자질 탓만을 하는 것이 선비된 도리로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느냐 그대야말로 참으로 쓸모없는 속된 선비에 불과하다.

최만리: 무릇 일을 이루고 공을 세움에 있어서는 빠른 시일 안에 서둘러 마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래의 국가의 조

치들은 모두 빨리 이루는 데에만 힘을 쓰고 있으니 이는 다스리는 근본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비록 언문이 부득이하여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들로부터 아래로는 하급 관리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함께 상의

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혹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시행하기 전후에 백성들에게 충분히 그 뜻을 거듭 설명한 다음 다시 세 번 더 생각하여 역대 제왕들

의 다스림에 비추어 보아도 어긋남이 없고 중국과 상고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에 성인(聖人)이 다시 태어나 이를 보더라도 의심

스러운 바가 없는 다음에야 비로소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사람의 뜻을 널리 묻지도 않고 하급 관리 10여 인에게 명하

여 정음을 익히게 하며 또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쳐서 황당한 언문을 붙여서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서

이를 새겨서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 천하와 후세의 공론이 어떠하겠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청주(淸州) 초수리(椒水里)에 행차하심에 있어 올해 흉년이 든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간략하게 시행

하도록 하셨는바 전에 비하여 10 중 8,9정도를 생략하시고 전하께 아뢰어야 할 공무(公務)도 모든 것을 대신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언문은 국가의 긴급한 일도 아니고, 부득이한 기한이 있는 일이 아님에도 어찌 행재소(行在所)에서까지 급하게 서두르시어 전하의 옥체

를 조섭해야 할 시기에 번거롭게 하시는 것입니까 저희들은 더욱 그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 종: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는가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는가 우리나라의 한자음은 마땅히 중국의 음과

부합되어야 할 것이나 오랜 세월 동안 말해지는 사이에 자음과 모음이 저절로 어음에 이끌렸으니, 이것이 곧 한자음이 역시 따라서 변한

까닭이다. 비록 그 음은 변했더라도 청탁이나 사성은 예전과 같을 수 있을 것인데 일찍이 그 바른 것을 전해 주는 책이 없다. 그래서 어리

석은 스승이나 일반 선비들이 반절법도 모르고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모르고 혹은 글자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음으로 하고,

혹은 앞 시대에 임금의 휘자이기 때문에 피하던 것으로 인해서 다른 음을 빌려 쓰기도 하고, 혹은 두 글자를 합해서 하나로 하기도 하고,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도 하며, 혹은 전혀 다른 글자를 빌려 쓰기도 하며, 혹은 점이나 획을 더하거나 덜며, 혹은 중국 본토음을 따르고

혹은 우리 나라 음을 따라서 자모와 발음, 청탁,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 만약 내가 이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

잡겠는가

최만리: 예전 선비의 글에 이르기를 ‘무릇 모든 신기하고 보기 좋은 일들이 선비의 뜻을 빼앗아 간다. 편지 쓰기는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까

운 것이나 전적으로 이것만을 좋아하면 이 또한 저절로 뜻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동궁께서는 비록 덕성을 많이 성취하셨지만

아직은 성학(聖學)에 깊이 마음을 써서 모자라는 점을 더욱 닦아야 하 것입니다. 언문이 설사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단지 선비의 육예

(六藝)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치도(治道)에는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인데 동궁께서 이 일에 정신을 쏟고 마음을 기울여 날을 마

치고 시간을 보내니 이는 실로 현재 시급히 닦아야 할 학문에 손해가 됩니다.

세 종: 내가 나이 들어 국가의 서무(庶務)는 세자가 맡아서 하는 까닭에 비록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마땅히 참여하여 결정하는데 하물며

정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해야겠느냐

최만리: 공적인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동궁께서 참여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리 급박하지 않은 일에까지 하

루 종일 마음을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 종: 정음을 만드는 일이 어찌 국가의 공적인 일이 아니란 말이냐 그대들과 더 이상 말하기 어렵다. 어찌 생각이 이리 다를 수 있단 말

이냐

최만리: 저희들이 모두 보잘 것 없는 재주를 가지고 외람되게도 전하를 모시고 있으므로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감히 담고만 있을 없어 이

에 삼가 가슴속에 가진 생각을 다 아뢰어 전하의 어지심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세 종: 그대들이 나를 가까이서 시종하므로 나의 뜻을 명확하게 알 것인데도 이같이 행동하니 이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으냐 또한 이전에

김문(金汶)은 말하기를 ‘언문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다’ 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반대로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무리에 포함되어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내가 그대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정음에 관한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금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답하고 궁지에 몰리면 말을 교묘하게 바꾸어 응답하니 그대들에게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하옥시켜라. 또 의금부에

서는 김문이 전후에 태도를 바꾸어 말하게 된 사유를 조사하여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할지 결정하도록 하라.


세종은 그리고 그 다음날 이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속된 선비라는 꾸지람을 들은 정창손은 파직시키고 처음에는 정음 제정이 좋다

고 하다가 나중에는 반대를 하여 말을 바꾼 김문에게는 벌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창손도 얼마 후 다시 복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앞

서 살펴보았듯이 최만리에 이어 부제학에 오른다. 김문의 죄는 의금부에서 조사하여 보고한 바로는 장(杖) 100대를 맞고, 소금을 굽거나

쇠를 만드는 등의 노역을 3년 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노역은 시키지 않고 장(杖) 100대도 직접 매를 맞지 않고 돈을 내어 속죄하도

록 한 것이었다. 최만리는 다음날 석방되어 복직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살다가 다음해에 작고하였다.

 

2.3. 최만리 등의 상소에 대한 평가

 

최만리 등 같이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정음 제정의 반대 사유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명

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주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국가적 이념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난하

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사대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세종과 최만리 등이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최만리 등을 사대주

의자로 몰아 세우는 것은 역사적 몰이해에서 빚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앞서 보았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번역하여 한글로 음을 달아 펴 내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

다. 급작스럽게 운서를 바꾸어 편찬하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

을 바로잡겠느냐고 하였다. 『고금운회거요』에 어떠한 한자음을 붙였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다음 해인 1447년에

간행된 『동국정운』의 한자음과 거의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최만리 등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바꾸어 중국 운서에 맞추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국정운식으로 한자음을 개신하려는 세종의 정책은 실패하였으니 최만리 등의 주장이 옳

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을 놓고 최만리는 한글 창제의 협력자이며 그 상소는 한글 창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한자음의 개정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다소의 무리가 있다. 상소문에 분명히 이두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언문을 만들어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서두에서 한글은 지극히 신묘한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금에 대한 예우의 말이고 또 이

말이 훈민정음의 정인지서에도 그대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가지는 의의는 최만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나 사료의 부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다수이다. 최만리 등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상소를 올림으로써 그 상소의 내용을 통

해 간접적이고 부족하게나마 당시에 한글 창제를 둘러 싸고 벌어졌던 여러 사실들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최만리 등의 상

소가 없었다면 1443년 12월조 말미의 훈민정음 창제 기사와 같이 한글 창제 초기의 상황에 대해 극히 소략한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한글의 대한 반대 상소문을 통해 최만리 등은 후대의 한글 연구에 있어 소중한 사료를 남겨 주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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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甲子上疏에 대한 올바른 理解 : <전 교육부 연구관(교육과정 및 교과서 연구.집필.심의관) 삼육대학교 강사. 문인. 최향섭>

 

현재 영어 文明圈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 유통의 速度 전쟁에서 알파벳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문자는 한글뿐이며 한글은 미래의 문자라는 것이 세계 어문학계의 公論이다. 이는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문자를 언제, 누가, 어떻게 개발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있다는 것은 한글의 자랑이다.

그러나 한글 창제 당시 절대적인 漢字 文明圈에서 문자의 독자적 變革은 得失을 헤아리기 어려운 엄청난 문화의 충돌과 혼란이 예상되므로 이는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는 여과 과정이 필요했을 것인데 이러한 절차가 미흡한 실정을고려하지 않고 조급히 시행하려는 데서 많은 학자들의 중론을 모아 갑자상소를 통하여 論爭이 벌어진 것은 누구라도 시대적 當爲性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갑자상소 후 4년, 그리고 한글 반포 불과 2년 뒤인

 

1. 세종30년 10월 세종실록 122조에 동국정음을 시도한 한자음 改新 기도는 현실과 판이한 것이어서 세종도 실패를 자인한 것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언어는 각각 지역의 역사적 물적 환경의 독특한 관습과 풍속에 의해 생성 발달 되는 것이어서 남의 말을 우리의 발음법으로 완벽히 전수할 수 없기 때문이었으며 그것은 현재 우리가 외국어 교습에 원어민 교수를 채용하는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2. 갑자상소는 한글 반대상소가 아니었다.

기록으로 보더하도 한글은 세종 25년에 이미 만들어졌고 갑자상소는 세종 26년에 올렸으니 갑자상소가 한글 제정을 반대 했다는 김윤경의 논지는 시기적으로 조리에도 맞지 않는다. 이는 한글 반대가 아니라 한글 시행상의 문제점을 학자의 입장에서 토론한 것으로 이를 김윤경이 한글 반대로 烙定한 것은 군주의 공을 극찬하기 위하여 충신들을 비하한 것으로 과장과 편견을 나타내고 있는 실수였다.

 

3. 한글의 實效支配 기능의 時代的 경향을 살펴보면 이는 더욱 확실해 진다.

한글은 반포 이후 역대 왕조 수백 년 간의 왕조실록과 공적 기록문서에서 철저히 배제 되어 왔으며 세종 이후 한번도 과거에 출제되지 못하였다. 이는 우리 고유의 말에 지식을 담아 공유하는데 있어서 한글이 漢字 文明을 抑制할 만한 力量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므로 당시 갑자상소에서 제기한 학자들의 우려는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종 이후에 언문청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한 채 어떤 임금이나 학자도 한글을 이어받는 사업을 지속하지 않았음은 소리글로 만은 당시의 지식 기반을 충족시키기에는 불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5백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리가 50~60%에 가까운 한자 어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론할 여지가 없다. 본래 語文이란 文物의 변천과 함께 生滅하는 것이어서 시대적 實效支配 기능을 重視하지 않고는 연구의 正論에 達할 수가 없다.

따라서 김윤경은 語文이 생명체와 같이 用不用的 기능과 그 實用度에 따라 地域과 時代를 지배하는 것이어서 단기간에 제도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다는 것에 주목하고, 한글이 지식적 實效支配에 수백 년 간 독자적으로 성취하지 못한 문제점과 원인을 보다 비중 있게 밝혔어야 했다. 

 

4. 김윤경이 갑자상소를 들어 최만리를 사대주의자로 매도하고 개인적으로 폄하한 것은 당시의 국론과 국가의 손익을 모르는 자의 맹목적이고 사치한 修辭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東西의 선진 문물이 들어오는 경로는 90% 이상이 중국을 통한 것이었으니 중국어문에 의존도가 높았음은 지정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 현실적 역학 관계를 사대주의라는 말로 폄하하는 것은 나라의 생존 전략을 헤아리지 못하고 언어적 이상주의에 치우쳐 현실을 호도하는 자의 사치한 異說일 뿐이다.

본래 문명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듯이 후진 문명이 선진 문명에 흡수되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며 이로서 역사적으로 전 세계가 지식과 문명간의 충돌을 겪으면서도 장점을 공유하며 공존하는 열린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 날에도 문화적 독립주의라는 理想國家는 地上에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영어문화권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 할 것이다. 

 

5. 김윤경의 王朝史觀과 臣民史觀에 입각한 낡은 論旨는 民衆史觀의 입장에서 새롭게 수정되어야 한다.

김윤경이 일제 治下에서 한글의 위대성을 밝히고 찬양하고 보전하려한 것은 훌륭했으나 당시 국론을 일부 학자의 사대주의라는 용어로 비하한 것은 역사 인식의 큰 과오였다.

또한 한일 합방 이후 일본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離間하여 조선을 일본천황에 복속시키려 하는 臣民史觀의 정략을 펴고 있었으며 이를 반영하고 있는 일본 사학자 고쿠라 신베이의 야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군주를 극찬하는데 급급하여 갑자상소를 올린 주체들을 사대주의자로 낙인찍고 개인적으로 폄하한 것은 한글학자로서 지켜야 할 민족 주체성을 잃은 비합리적이고 부적절한 劇的인 贊批論이며 이런 論旨는 한글연구의 가치중립적 견지를 이탈한 것으로 한글연구의 목적과 本質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윤경은 세종 이후 수백 년간의 역대 왕조에서 스스로 한글을 배제한 것은 무슨 主義로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최만리는 집현전의 首長으로서 많은 학자들의 중론을 대표하여 한글 시행상의 문제점을 上疏한 것이었으며 인간적으로 최만리는 장차 임금을 가까이서 보필할 인재를 뽑고자 특별히 실시한 세종 등극시에 장원을 하였던 책무감으로 다년간 경연을 이끌었으며 세종과 동연배로서 군신관계 이상의 각별한 情理로 신임을 받던 충정과 공로로 청백리에 首選된 용기 있고 올곧은 학자였다.

결론적으로 자랑스럽고 훌륭한 한글 창제의 과정은 이를 주도한 세종의 위대한 업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문 연구의 본질상 세종 혼자서 이루었다는 김윤경의 論旨는 비합리적이며 당시 집현전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수십 년간 헌신한 연구의 總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한글이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배제 되었던 이유와 문제점을 밝히지 못하고 日帝治下의 臣民史觀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 사학자의 논문을 왕조사관의 입장에서 거름 없이 인용하여 갑자상소를 한글 반대의 사대주의로 비하하며 군주찬양의 신화적 서술에 치우친 김윤경의 논지는 바로 잡아야할 것이다.

한글의 史的연구는 君主의 공적에 덮혀 버린 수많은 학자들의 피땀 어린 공로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혀서 당시 수준 높았던 어문 연구 과정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民衆史觀의 객관적 입장에서 더 중요하다.

따라서 일제하에 기술한 김윤경의 논문을 근래에도 분별없이 인용하는 것은 한글 연구에 비판과 진전이 없는 부끄러운 큰 오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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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宗大王의 學問과 思想 - 第2部 崔萬理 硏究

  - 이숭녕(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국어학 박사, 1908. 6. 7~1994. 2. 2)

 

   종래의 국어학사, 특히 훈민정음 창제를 중심으로 한 고찰에서 최만리가 대표가 되어 세종 26년(甲子) 2월 20일 세종에게 올린 한 상소문을 가지고, 그들을 한글 반대론자로 규정하여 문화사상 유래없는 죄인시함에서 필자는 국어학사의 태도론으로 이에 여러모로 의아심을 품어 온 터이다.

   그것은 최만리 개인의 연구도 없이 또는 상소문의 배경도 고찰함이 없이 또는 그 상소문의 내용의 분석과 객관적 가치 판단도 없이 흡사 당시의 중대 사건과도 같이 논란함에서 어딘지 3 ·1운동 뒤의 학풍에서 보는 바 문화애호의 감정론이 이 같은 결과를 낳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학문하는 태도'란 주어진 사실을 주어진 그대로 고찰하여야 하나 한 인간의 고찰에는 그의 생애와 사상의 고려가 앞서야 하며, 한 사건에 있어서는 그 사건의 배경, 시대성, 그 사회적 경향 여부가 정당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만리의 상소문을 다루는 것을 보면 그 상소문 이외에 아무런 자료의 연구도 없이 오직 감정적인 'moral'관에서 誇大한 가치판단을 내리고도 한 점의 의아심도 없는 양 선전하고 있음은 적어도 학문하는 태도를 벗어 난 것이라고 단정한다. 이 원고는 이러한 것을 시정코져 '崔萬理 硏究'를 들고 새로운 시도를 제시하려 한다.

   최만리 문제가 처음으로 학계에 등장한 것은 1920년 소창진평(小倉進平, 오구라 신페이) 박사의 <朝鮮語學史> 66~72쪽에서 실록의 기사인 상소문의 전문과 그 사후 처리의 기사를 소개한 것이라고 본다. 물론 야사에는 약간의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세한 소개는 소창 박사의 상기 저서가 최초의 것이었다.

   그러나 소창 박사도 오직 소개에 그쳤을 따름이지 최만리 개인의 연구와 상소문의 배경의 언급이 전연 없었다. 그러면 이 상소문이 3 ·1운동 뒤에 과대 선전된 이유는 무엇인가 추측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시대적 성격 때문이라고 본다.

   첫째, 1920년이 3 ·1운동 직후라 한국 문화에 관한 것이라면 과대 선전함으로써 민족적 자각을 자극코져 하는 시대풍조에서 민족문화의 상징인바 훈민정음이란 일종의 '神聖不可侵'의 사업과 대립된 최만리의 상소문은 한마디의 말로 이르자면(可謂) 文化反逆 이라는 가혹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객관적 고찰의 여유도 없었고, 그럴만한 학풍도 조성되지 못한바 민족적 감정에서 문화를 가치판단하려는 시대적 특이성에서 최만리의 소개는 지극히 불리한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1920년대의 국어학계는 학적 수준도 낮았고, 특히 자료의 빈곤에 고민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등장된 신기한 자료에 대하여 자료의 샘플링을 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자료를 다루는 것도 익숙치 못하였다고 본다. 즉, 자료의 빈곤으로 최만리의 상소문은 훈민정음 제정에서 다시없는 자료로 중요시되고 자료의 검토를 모르는 데서 중대 사건으로 誇大評價되고,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 선전되므로 감정적 'moral'관에서 학문과는 별도로 이용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감정적 'moral'관에서 다루어진 최만리론을 예시하여 보기로 한다.

 

김윤경 저 조선문자급어학사, 86쪽

   이 최만리 따위와 같은 고루하고 부패한 저능아도 출연되었던 것입니다. 모화환에 중독된 가명인(假明人, 가짜 명나라 사람)의 추태요, 발광이라고 보아 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만 역사상에 영구히 씻어 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이지를 끼치어 놓게 됨은 그를 위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습니다.(이하 생략)

 

   이것은 3 ·1운동 뒤의 감정이 여실히 표시된 것인데, 최만리는 淸白吏요 重試에 급제되어 집현전을 20여 년 이상 지켜온 강직한 인물임을 안다면 오늘날 '최만리'관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상소문의 배경에는 적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사건은 아무런 사회적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이며, 그러한 사고법이 당시 士類의 통념이라고 보고, 이 정도의 상소는 실록에서 흔히 나오는바 특기할 것이 못되는 사건이며, 당사자의 처벌은 국어학사의 자료적 가치를 높이는 요인이 못됨을 말하여 둔다. 따라서 이 사건은 국어학사에서 각주에 부기하면 충분할 것이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것이 못됨을 지적하여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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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jeouldae/2705526 ****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와 갑자상소

* 集賢殿 副提學 崔萬理와 甲子上疏 : 南廣祐(인하대 명예교수:국어학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것은 세종 25년(1443년 癸亥)년 음력 12월이다.

그런데 이 훈민정음이 현재 한글 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쓰이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표음 문자라고 칭송 되고 있음은 우리의 자랑이 아닐수 없다. 우리 문화사상(文化史上)이 찬연히 빛날 금자탑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글을 칭송하는 나머지 적어도 2천 수백년 을 써왔을 한자(동방문자라고 주장하는 이도있음)우리의 전통 문화가 한자문화임을 잊고 우리말의70%가 한자어요,우리 한자고유음으로 父를 부로 母를 모로 읽는 사실등 어느모로 보나 한자는 한글과 함께 국자(國字)다 해야 옳고 한글과 한자는 새의 두날개 라고 하는 국한혼용론(國漢混用論)들의 주장이 진리임을  곰곰 씹어보고 생각해 봄직한데 그렇지 못하고 한자를 버리고 한글만 쓰면 된다는 주장을 고집하는 이들이 있음은 유감이다.


이한글 전용론자들은 최만리를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괴수정도로 매도하여 그후손들이 부끄러움을 느낄 정도로 위축되어 있다는 말이 들린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는 중대한 일이 아닐수 없다.

조상을 崇祖 해야할 敬祖사상에 상처를 주는 일로 해주최씨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대한 진상을 옳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崔萬理先生이 세종 26년(1444년 甲子) 2월20일 上疏를 올렸는데 이것을 諺文反對上疏(언문반대상소) 라고 호칭을 쓰는것은 재고 해야 된다는 心岳 李崇寧 先生의 主張(최만리연구 1962년 12월)은 옳고 갑자(甲子)이월상소(二月上疏)또는 甲子上疏라야 한다는 주장에 同意한다.


그것은 첫째로 훈민정음 창제는 이글 첫머리에서 밝혔듯이 이미 상소가 있기전인 세종 25년(1443년 12월)에 끝난것이다. 만일 최만리가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사후(事後)에 상소를 했겠느냐하는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 최고 책임자로서 집현전 학사들이 관여하고 있는것을 잘알고 있으면서 완성전에 반대할일이지 어째서 行次뒤의 나팔이란 말인가?


둘째로 이미 心岳 이 지적 하셨듯이 그의강직하고 예리한 성격은 척불상소(斥佛上疏)6회, 사직상소(辭職上疏)1회, 計7회, 세자섭정 또는 이정분권(이정분권)에 대한 반대상소 3회 등 옳다고 생각 하면 주저하지 않고 상소한 것인데 훈민정음 창제 자체에 반대의사가 있었다면 어째서 그대로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갑자상소를 언문 반대상소라고 함은 그 眞意가 잘못 파악 된것이다. 실제 상소문을 보면 언문에 관한것이 주이긴 하지만 운서(韻書)에 관한 부분이 있음을 주목할 일이다.

상소문을 살펴보면 -언문창작은....... 사대모화(事大慕華)의 정신에 어긋남이 없을것인가?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에는 각각문자가 있으나 이것은 다 이적(夷狄)의 일로 따질것이 못된다.


역대중국이 우리나라를 기자(箕子)의 유풍(流風)이 있다하고 文物禮藥이 中華에 비길 만한 것이있다. 이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夷狄(오랑캐)이 되려 함은 문명의 대루(大累)가아닐 것이가.

-이두에 의해 문자를 아는이가 매우 많아 흥학(興學)의 일조가 되나 우리가 처음부터 문자를 몰랐었다면 언문을 고식(故息) 수단으로 쓰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언문 27자만으로 입신출세(立身出世)할수 있다면 사람들이 노심초사(勞心焦思) 성리학(性理學)을 익힐 필요가 있겠는가.


이렇게 되면 수십년뒤에는 문자를 아는자 점멸(漸滅)하고, 언문으로 공무를 처리할수 있어도 성현의 도를 모르고 사리(事理)의 시비(是非)를 가리지 못한다.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하는것은 고금(古今)의 통환(通患)이다.언문은 신기한 일예(一藝)에 불과하다. 학(學)에있어 손(損)이 있고 치(治)에 있어 익(益)이 없다.

-형옥(形獄)에 있어 平 不平은 옥리(獄吏)에 딸린 것이지 언문 불일치(諺文不一致)에 있는것이아니다.


옥사(獄辭)를 평이(平易) 하게 하라는것은 신(臣)이 그 가(可)함을 알지 못하겠다.

-언문을 부득이 쓴다 손치더라도 재상(宰相) 이하 백료(白醪)와 도모하고 국인(國人)이모두 可하다고 하더라도 다시 삼사를 加해야 하고 제왕의 質 하고 중국에 대하여 생각하여 실행할것이다. 이제 군의(群議)를 들어보지 않고 이배십여인(吏輩十餘人)을 모아 고인이 이루어 놓은운서(韻書)를 고쳐서 언문을 부회(附會)하여 공장(工匠) 수십인을 모아 이것을 박아 공포 하려한다. 천하후세(天下後世)의 공의(共議)가 과연  어떠하겠는가.


-언문이 가령 유익한 것이라 하여도 육예(六藝)의 하나에 불과하다. 하물며 만가지 치도(治道)에일리(一利)가 없는데 정력을 허비하고 시간을 보내어 학문에 손(損)이 있어야 되겠는가? 이상 상소를 현재 시점,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사대(事大) 모화(慕華) 가명(假名) 등 수사의 매도가 있음직 하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친명외교(親明外交)로 명나라의 책봉을 받고 그연호를 쓰던때 임을 생각하면 최만리 개인에게 “사대, 모화, 가명”등의 수사(修辭)의 매도는 천만부당(千萬不當)하다. 훈민정음 창제 참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직해동 자습역 훈평서(直解瞳 子習譯 訓評序)에도 정음 약간의 자를 배워 익히면 한어(漢語)를 가통하게 되고 운학(韻學)을 가명(可明)하게되어 오히려 학흥(學興)에 조(助)로 사대정책의 구현에 도움이 된다라고 한것을 보면 사대(事大)라는 말은 당연지사로 쓰이던 恒用(항용) 투의 말인것이다.


오히려 당시의 사류(士流)들의 들끓는 여론을  당당하게 개진한 상소 였을뿐인 것이다.그러면  어째서 훈민정음 이 창제,반포 된후에 이러한 뒤늦은 상소로 세종의 심기를 편찮게 한것은 무슨까닭인가? 더욱이 그들은 언문의 창작을 지극히 신묘하다고 칭송하고 있는것이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 적극 찬성은 않았을지는모르나 적극적인 반대 의사는 없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상소중에 운서(韻書)를고쳐서 언문 을 부회하여 공포하려 한다는 대목이있다.한자음 개혁을 위험시 한것이 동기라고 본 心岳 의판단은 옳은 것이었다고 본다. 세종대왕은 운서의 연구가로서 한자음 개혁을 기도 했는데 세종25년에 훈민정음 창제가 끝나자 26년부터 운서(韻書) 事業(사업)으로 들어갔다.


1) 韻會諺解 刊行, 2) 洪武正韻譯訓刊行, 3)四聲通攷刊行, 4)東國正韻刊行 등 운회어해에서 동국정운에 이르는 운서의 번역 편찬의 4대 사업을 기도 한것인데 세종실록에 의하면 26년 2월 16일에 운해언해간행 을 결정한것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을 창제후 용비어천가 를 국한혼용문(國漢混用文)으로 짓게하고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국주한종(國主漢從) 즉 한글은 큰글자로 쓰고 한자는 우 하측에 작게 쓴 것으로 하여 정음을 활용하게 한것은 훌륭한 업적 이지만은한자개혁을 꾀해 동국정운 간행을 하게 되었는데 이 동국정운은 훈민정음 33자 모와 똑같이 33자모 였으며 훈민정음 창제 참여 인사와 거의 진용이 일치 한다는 점등으로 보아 훈민정음 창제 사업과 동시 진행 으로 보아야 할것 아닌가 한다.


이 한자음 개혁 기도는 세종의 실패작이다. 한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이미 고유 한자음으로 굳어진 터에 인위적으로 개혁을 꾀한 것이다.

現代音          漢字音


善(선)           (썬)


洞(동)           (똥)


迷(미)           (?)

이런 현실음과는 판이한 인위적인 개혁음이 성공할수는 없다. 이한자음은 성종 때까지 문헌에는 명맥을 유지하지만 폐기 되고 만다. 이것은 마치 해방후 남한에서 숱하게 조성했던 新語가 사라지게 된 운명이나 북한에서 64년부터 85년까지 한자어나 외래어 5만여 어휘를 순 우리말로 다듬었던 것인데 이것이 86년 북한 국어사정위원회 가 펴낸 다듬은 말에 따르면 2만 5천여개를 옛한자어와 외래어로 환원 시켰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하는것이 아닌가 하여 매우 흥미롭다.


 그런데 세종은 비공개리에 韻會諺解 의 준비를 하고 史輩 십여인 에게 어문 강습을 시키는가 하면刻字工10여인을 모아 2월 16일 회의전에 이미 운회언해용 의 활자를 제작중이었다는 것등은 바로 崔萬理의 甲子上疏 를 낳게 한것이 아닌가 하는 心岳의學究的 態度는 정당하다. 崔萬理의 甲子상소에 대하여 세종이 격노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韻書를 아느냐. 내가 韻書를 바로 잡지 못한다면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라는 말에서 漢字音 改新의 信念을 알수 있는데 이에서도 崔萬理上疏의 초점이 운서에 있음을 알수있게 한다.


세종의 훈민정음의 업적은 불후의 것이지만 漢字音 改新 의기도는 잘못된 것이었다. 이잘못된 한자음 개신을 막고저하는 충정에서 훈민정음이 바로 그한자음을 표기하는 문자로써 쓰임을 보고 훈민정음 까지를 싸잡아 깍아 내리는 遇를 범한것이다. 그런데 세종이 최만리 등이 “諺文을 新奇의 一藝”  云이라 한데 최만리는 “신등이 신기일예라고 한것은 특히 문세에 인한것이지 타의가 있어 그런것은 아닙니다.” 라고 한것을 보면 운서사업에 반대의사를 펴다보니 훈민정음을 폄하 한 결과를 빚은게 아닌가 하는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보인 현대음과 엄청난 괴리를 보인 동국 정운식 한자음은 폐기를 불가피 하게 한것으로 보이는데 세종 30년 10월 세종실록 권 122조에 (한자어생략) 보면 한자음 개신이 무모 하였음을 자인한 셈이요. 그러고 보면 최만리의 상소는 있음직한 것이었다.고 보는 정론이 아닐까한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최만리의 훈민정음 관견에서 훈민정음을 한글전용이라는 말로 바꾸어 보면, 1),언문을 통용하면 학문을 돌보지 않게 된다. 2),수십 년 후에는 한자를 아는이가 적게된다. 3),언문을 쓰고 한문을 모르면 성현의 무자를 알지못하여 사리에 어두워진다.


4),神奇一藝에 지나지 않음으로 학문에 손이 있고 정치에 익됨이 없다. 와 같은 대조를 이룬다. 참으로 신기한것은 최만리가 우려한 사태가 오늘날 한글 전용론자들에 의해 주도된 한글전용정책으로 빚어지고 있는것이다. 崔萬理 先生은 儒臣으로서 집현전최고 책임지인 부제학이었고 청백리 였다.


강직하고 용기 있는 분으로 세칭 언문반대상소를 올린 것은 한자음 개신을 꾀하며 音韻諺解刊行이 甲子上疏 직전인 2월 16일 에 결정된데 기인한 것으로 본 心岳 李崇寧 先生의 主張에 同意 한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것이 아님은 세종 25년 창제가 끝나 반포 할때 까지 反對상소를 한일이 어느文獻에도 찾을수 없음이 분명하고 漢字音改新작업에 반대 한것은 지극히 옳은 주장이었다. 사대 모화 등의 매도는 千萬不當 한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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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集賢殿 副提學 崔萬理 公의 잘못된 評價에 대하여 : 朴成根(태백대학 교수)


오래전의 역사란 세월의 경과로써 어두워 졌으므로 진실을 알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명사들에 대한 아첨으로 흔히 사실이 흐려져 있기 때문이다. 평가 만해도 그렇다. 기준이 없이 어떤 일을 평가 하는것은 마치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이 남들에게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사람이 “벌써 두시간이 지났다” 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한사람은 “45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고 말한다. 나는 내시계를 보면서 전자에게는  “당신은 권태에 빠졌소” 라고 말하고 후자에게는 “당신은 시간 가는줄 모르고 있군요” 라고 말한다. 실제로 시간은 한시간 반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더러 “당신에게 대해서는 시간이 잘 가지 않는구먼 당신은 시간을 제멋대로 시간을 재고 있는것 같소” 라고 말하는 이들을 향해서 나는 코웃음을 친다. 그이들은 내가 시계를 가지고 판단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역사와 판단을 기준으로하여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던 최만리 공의 공과를 평가 해 보기로 한다.


세종대왕 께서 훈민정음 을 창제 반포 했을때 최만리공은 이를 강경하게 반대한 완고하고 고루한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그시대에 대한 명사들의 아첨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세종을 절대시, 신성시 하다 보니 그와 의견을 달리 했던 만리공이그런 음해를 받았던 것 같다.


최만리는 高麗時代에 海東孔子  文憲公 崔? 先生의 13세손으로 세종 즉위년, 1419년(己亥)에 문과에 급제하여 弘文館에 들어가 集賢殿 학사를 겸임 하였다.


세종 9년 1427년(丁未)에 는 校理로서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集賢殿 直提學을 거쳐 이듬해에集賢殿副提學 겸 知製敎經筵參撰官春秋, 世子侍講院左輔德 등의 官職 으로 승진 하고 세종21년, 1439년(己未)에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 하였다. 또한 최만리는 집현전의 최고의 책임자로 그휘하에 성삼문, 신숙주등 신진 사류들과 함께 세종으로부터 한글 창제의 명을 받았었다.


세종26년,1444년(甲子) 훈민정음이 반포 되었고 2개월 후에 세종이 韻會諺解(운회언해)란

책을 만들어 한자음의 발음을 한글로 적게되는 동국정운식 표기를 발표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의문을 느낀 최만리는  “이제 많은 사람들의 의견도 들으시지 아니하시고...........

이를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오니 후세의 비난을 어찌 감당 하시겠나이까?

하며 6조의 이유를 들어 당시 집현전 학사들과 연명을 하여 새로운 한자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일로 인하여 세종의 노여움을 사서 의금부에 구금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곧 풀려나게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세종이 스스로 한자음의 정리는 무리였고 만리공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이사실로 미루어  공께서 한글 창제를 반대 하신것이 아니라 새로운 한자음 의 표기 즉 동국 정운식 표기를 반대 하였다는 것이다.


공께서는 국가 문물정비의 중책을 담당한 개혁자요, 슬기로운 관리였고 사심없는 청백리 였다. 다시 말한면 공께서는 한글 창제를 반대 한것이 아니라, 현재 쓰이고 있는 한자음을 무시하고 중국식 원음에 가깝게 발음 하려는 새로운 개신 한자음에 대하여 반대한 것이다.


이는 당대의 선비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신진사류 등 당대의 선비들이 반대한 이유는 이조가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건국된 국가인데 이러한 언문을 이용하여 많은 불경들을 한글로 언해하면 이는 유교국가의 이념에 背馳(배치)되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세조 때에 간경도감을 두어 많은 불경들을 언해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이를 짐작 할 수가있다.


또한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문자를 만들어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한자음의 개혁 정책은 끝내 일반인과 유학사류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왕 자신이 철회 하고 만다. 또한 세종은 호불정책을 ?시하여, 궁중에 내불당을 설치 하는 등 국시에 어긋나는 일로써 유학자들의 우려와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왕이 늦게나마 만리공의 주장이 옳았던것을 깨달은것 같다. 또한 최만리는 전래의 문물제도 가 잘못 운영 되었을 때에는 이를 직간 하는 신하로도 유명하다.

당시 궁중의 환관 들이 쓰는 軟脚烏沙帽(연각오사모)의 烏沙의 얽음새가 옛 제도에 어긋난다 주장하여 이를 바로 잡음 으로써 한말까지 조선 양반 사회에서 긍적적인 평가와 더블어 그의 소신있는 간언을 선비의 귀감이라 극찬하였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는동안 청렴 결백하여 약현(지금의 만리동) 밑에 누간 초옥에 살면서 평생의 좌우명으로 소학 외편에 나오는 “현명한 이가 재물을 가지면 곧 큰뜻을 해치며, 어리석은 이가 큰재물을 가지면 곧 그 과실을 더할뿐이다” 라는 말로 後孫들을 훈도 하였다.

“賢而多財則,  損其志,  愚而多財則,  益其過” (현이다재칙, 순기지, 우이다재칙, 익기과)

이로써 朝鮮 官僚 의 榮譽 라 할수 있는 淸白吏로 추존되었으며 후일 이분의 청빈의 정신을 흠모한 민중들에 의하여 최만리공이 살던 약현을 만리현이라고 불렀고 다시 이지명이 해방후 행정구역 개편시에 만리동이라는 이름으로 개명 되어 오늘에 까지 이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다. 이로보아 공의 뛰어난 학덕과 드높은 인품이 어떠 하였던가를 가히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1443년 해방후에 국어보급을 위한 朝鮮語學會 (한글학회의 前身)의 일원인 한글학자 金允經등이 세종의 한자음 개신에 대한 공의 반대 上疏(상소)를 잘못 해석하여 公을 한글창제 의 반대자의 대표로 매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그릇된 역사의 왜곡이란 말인가?


오늘날 우리사회는 부정과 부패와 그리고 패륜으로 얼룩지고 있다. 새삼 공이 그립다. 공과 같은 청백리가 그립다. 하루 빨리 모든이들이 공의 유덕을 본받아 부정부패가 없어지고 정직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사회가 왔으면 하는 소망 으로 이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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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萬理는 한글창제의 반대론자인가 : 오환일(유한대학교 교수)


최만리(1394?~1445:태조3년?~세종27년)는 세종때의 문신으로 역사에서 보기 드문 청백리로 뽑힌 분이다. 


공의 출생년대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그의 관력을 조급해 보면 조선 건국 초기인 1394년 (태조3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는 1419년 (세종 즉위년)에 중광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집현전 박사로 관직에 진출한후 1439년(세종21년)에 1년간 강원도 관찰사로 외직에 부임 한것을 제외 하면 1445년(세종27년)운명할 때까지 집현전에서 봉직 하였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백련봉 기슭에 있으며 그곳에는 공의 후손인 해주최씨가 집성촌을 형성하여 세거 하고있다.

공은 황희 정승과 함께 청백리로서 우리 역사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한글 창제에 반대한 사대모화자(事大慕華者)로 매도 당하기도 한다. 공이 올린 상소(이른바 한글반대상소 라 칭하는것)의 실상을 밝히는것은 공의 업적을 바르게 이해 하고,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는 데 중요한 문제이다.


최만리를 한글 창제 반대론자로 보는것은 그가 144년(세종26년)2월20일 에 올린 上疏文(조선왕조 실록 103권 세종26년 갑자 2월)에서 비롯되었다. 통용 甲子上疏(갑자상소)라 하는 이 상소문의 내용은 먼저 언문을 제작하신것이 지극히 신묘하나 臣(신) 등이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심되는점이 있어 조심스럽게 그문젯점을 열거 하오니 살펴 허락해 주실것을 바란다고, 하면서6개항을 제시 하였다.


그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조선은 옛부터 선진문명을 자랑하는 중화권에 속해 사대 외교로 문물을 흡수 하면서 문화를 발전 시켰다. 이제 오랑캐들과 같이 독자적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다면 明(명)과의 외교 문제가 발생 할수 있고, 선진 문화권에서 이탈하여 학문이 쇠퇴하고, 정치에도 이익이 없다. 더구나 언문(운회언해를뜻함))창제는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일로  충분히 검토하여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인데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것이 아닌가. 또한 주상께서 안질 치료를 위해 초정리 약수터에 행차하여 행재소에서 까지 언문 연구에 골몰 하시는것은 옥체를 조섭 하는데도 이롭지 못하다. 여기에 聖學(성학)으로 왕재(군왕으로서 배워야할 일)를 연마할 동궁(후에 문종)이 文士(문사)의 六藝(육예)중 한가지에 불과한 언문 연구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내용이다.


최만리가 疏頭(소두)가 되어 집현전 학자 6명과 함께 올린 갑자상소는 언문창제 반대 상소가 아니라 언문 운회언해를 계획 한것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어 당시 집현전 최고 책임자인 부제학으로서 집현전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상주한것 이라 하겠다.

세종이 諺文廳(언문청)을 설치하고 음운과 문자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여 1443년(세종25년)에 마침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후 세종은 한글의 실용화를 실험하고 韻會諺解(운회언해)를위해 의사청에 집현전 학자와 동궁을 비롯한 수양대군, 안평대군 등 9인이 모여 논의 하게 된다.


이때가 1444년(세종26년) 2월 16일 로 甲子上疏 를 올리기4일전이다. 때문에 甲子上疏를 올린 직접적인 동기는 의사청에서 韻會諺解를 계획한것과 깊은 관계가 있다.


최만리 등이 갑자상소를 올린 참뜻은 무엇일까?


公(공)도 집현전에서 27년간 봉직하면서 최고책임자인 부제학으로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창제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그러한 그가 한글창제를 반대하려면 한글이 창제 되기전1443년(세종 25년)에 할 것이지 한글이 완성된 후 1년이 지난뒤에나 갑자상소를 올렸으니 이상소는 한글창제 반대상소라 할수없다. 마침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이 창제되어 明(중국)과의 사대외교문제, 중화문화와의 관계가 소홀해지고 학문 발전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던중 의사청에서 韻會諺解(운회언해)를 계획하자 한글창제와 같이 중대한 일이 신중히 처리 되지 못하는 점에 불만을 갖고 더욱이 왕의 옥체도 돌볼 겸, 동궁(문종)의 왕재수업도 충실히 할것을 강조 하면서 최만리가 집현전 학자들의 의견을 수합하여 疏頭(소두:상소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甲子上疏(갑자상소)를 올린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만리가 올린 甲子上疏(갑자상소)가 한글 반대 상소로, 최만리는 한글창제를 반대한 事大慕華者(사대모화자)로 널리 알려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일찍이 국어학자 김윤경은, 광복후에 우리 한글이 일제통치시에 온갖수난을 당하였고, 그이전 연산군 때도 탄압받아 널리 보급 되지 못하였으며 창제 초기부터 반대론자들에 의해 천시 당하였음을 역설하면서 한글 사랑과 보급에 더욱 힘쓰자는 취지를 강조 하다보니 갑자상소를 한글반대 상소로 잘못 해석 한데서 비롯 된것이다. 그후 역사학자 이병도, 국어학자 이숭녕과 남광우, 정치사학자 신복룡 등이 김윤경의 잘못된 해석을 비판하면서, 최만리의 갑자상소는 한글 반대상소가아니라 한자음 개신을 위한 音韻諺解(음운언해) 간행에 반대한 내용임을 밝혔다.


최만리는 세종때 명재상 황희와 함께 우리역사에 특기할만한 淸白吏(청백리)로서 국가를 위해 충심으로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세종도 그의 직간이 충성심과 愛民思想(애민사상)에 본뜻이 있음을 익히 알고 있기에 특별히 총애하면서 어려운 정사에는 항상 의논할 만한 충신 으로 여겼다. 그의 갑자상소도 잘못 알려진 한글반대 상소가 아니며 韻會諺解(운회언해) 에대한 의견을 개진한것이요, 신중하게 언어정책을 추진하여 문화발전, 明(명)과의 외교문제, 왕의 건강 문제, 동궁(문종)의 학업 등 고려 할것 을 諫言(간언)하는 것으로 충성심에서 올린 글이다. 때문에 세종도 그의 본뜻을 이해 하고 형식적으로(군왕의위엄?) 하루 의금부에 감금 하였다가 곧바로 석방하여복직 시킨 것이다. 갑자상소가 한글반대 상소라면 세종이 심혈을 기울여 추진했던 한글 창제를반대한 갑자상소를 용납 했겠는가?


그래서 갑자상소는 한글 반대 상소가 아니요 오히려 충성심 에서 올린 直諫 () 임이 분명 하므로 갑자상소와 최만리에 관한 잘못된 평가는 즉시 시정되어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올바르게 애국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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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백리의 표상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 본문: KBS 역사의라이벌(1995년 5월) 청백리의 표상 최만리 에서 발췌 (구성:권당, 감수:허명)


집현전은 주로 經書()文籍()을 다스리며 옛것을 고중하고 임금과 왕세자의 講論을 ()맡아 국가경영과 왕권을 보우하는 최고의구심체로서 이곳에 참여 하는 것을 당시 선비 사회에서는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최만리(이하 존칭 생략)는 27년을 집현전에서만 임금을 보필하는 경직에 보직하였음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人品()學德()을 구비 하였는가를 알수 있다.


최만리는 집현전에 봉직한 관계로 대민 부서를 거치지 않했기 때문에 不義에 ()휩싸일 기회도 없었을 뿐 아니라 평생을 청렴결백한 관리로서 세종조에 선정된 淸白吏 ()15人중 ()두번째로 뽑혔다.


이렇듯 세종조에 여러 청백리가 있었기에 조선조 역대에 문화와 치적이 가장 뛰어났으니 지금도 본받을 일이다.  


세종 21년 공이 42세때, 강원도에 民亂이 ()일자 세종이 가장 신임 하는 최만리를 강원도 ()()使()(무능한 관원 을 내치고 유능한 관원을 올려씀)로 임명 했다. 그때 외직으로 나갔을 뿐 늘 세종대왕 을 보필하는 집현전 부제학으로 재직 하였다(당시에는 대제학이란 직책은 명예직이었음)


세종은 경연에 임하여 탄식하시기를 최만리가 강석의 우두머리에 있을 때에는 강언 하는것이 매우 많았는데 지금은 외직으로 나가 있으니 그누가 좋은 계책을 진언하며 나의 잘못을 바로 잡겠는가? 하시며 즉시 최만리를 소환 하여 다시 부제학으로 임명 하시었다.


세상에서 최만리는 순부와 같이 강론을 잘한다는 평이 있어 여러 직책을 맡지 아니하고 ()()()에서 右文()()()에 전임하여 世子()에게 經書()史書()를 열성으로 강의 하였다. 그리하여 세자이신 문종 께서는 덕이 높고 어질고 효성스러워 철인의 덕에 부합되었으며, 정의로 나아감에 있어 군주로서의 도를 올바르게 실천 할수가 있었다.


세종은 역사상 가장 추앙 받는 賢君으로서 ()학덕있는 신하를 잘 등용하고 집현전 이라는 국가 최고 기관의 장으로 청백리 최만리가 있음으로 해서 더욱 그발자취가 빛나고 있는것이다. 최만리가 세종 대왕과 같은 해에 태어나 세종께서 즉위한 해에 文廣科에 급제한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학자로서 최만리를 세종이 총애한것은 평생토록 집현전을 떠나지 못하게 한것을 보더라도 알수가 있거니와 조선조 500년 동안 왕이 신하와 함께 침석에드시면서 까지 경륜을 나눈 사람으로는 세종과 최만리,그리고 고종과 곽종서 뿐이다.


다음에 그의 가장으로서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 세종 21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 하면서 가족에게 아무런 배려도 없이 5남 1녀를 夫人 중화 양씨 에게 부탁하고 무아봉공의 한마음 으로 떠났다


당시 장남 은 14살,막내는 한살이었으며 이 외동 따님은 후에 德水李氏 의석(宜碩)에게 출가 하여 후손으로 이이(李珥) 율곡(栗谷) 있다. 그러나 어찌 이헤어짐이 부인과의 여영 이별인줄 상상인들 했겠는가? 부인은 남편의 인품을 잘아는지라 현모양처 로 아무런 불평도 없이 시조부 (한성윤) 께서 마련 해놓은 진위현 여척동 (경기도 평택시 도일동) 에 가솔을 이끌고 이거 하였다. 남편이 외직으로 나가 있을동안에 행여 주위에 누가 될것을 우려 하여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어린 자녀들과 갑자기 농사 를 짓는다는것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5남 연(堧)을 출산 하면서 산후가 좋지 않았던 부인 양씨는 이듬해에 3월 4일 6남매를 남겨둔채 쓸쓸히 생을 마치고 만다.


장자의 나이 15세에 부인이 세상을 버리니 눈을 어찌 감겠는가. 그러니 외지에 있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세종이 최만리를 총애한 일화가 실록에 있다. 최만리는 간혹 술을 마시고 거나한채로 내전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에 세종께서 공에 경계하기를 경은 비록 술을 많이들기를 좋아하여 어지러울 정도까지 마시지 않는다고는 하나, 아무래도 몸을 해칠까 염려되니 술을 반드시 세잔으로 절제하기 바라오 하셨다.


공은 그뒤로 시를짓고 선비들과 노니는 장소에 가서도 석잔의 술만 들고 그만 마시는것을 통례로 하여 어명을 어기지 않았다. 그뒤에 세종께서 이러한 사실을 듣고절제함이 너무 심하구나 하시고 곧 공부(工部)에 명하여 은술잔을 만들어 공에게 하사하였다. 이에 그는 말하기를 이것을 어찌 감히 자손에게 사적으로 물려 줄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본관에 보관 하여 주상의 은혜를 선양 하여야 할것 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백년후에 최만리의 외증손인 율곡이 부제학이 되어 이술잔으로 술을 마시며 감격 하였다한다.는 일화도 있으나 그은잔은 아깝게도 임진왜란 때에 소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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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불쌍하게 태어났다 : 문학박사 황재순(시교육청 장학사)

                                                                                         

한글은 태어날 때부터 불쌍하게 태어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글은 세종 시절에 어떤 실패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다.


당시 세종의 개인적인 꿈은 한자의 한국식 발음을 모두 중국식 발음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중국의 한족이 몽고족인 원나라를 몽고로 쫓아내고 명나라를 세웠는데,

명나라에서는 그동안 몽고족에 의하여 망가진 한자 발음을버리고 한족 고유의 한자 발음을 되찾고자

"운회(韻會)"라는 책과 "홍무정운(洪武正韻)"이라는 책을 펴 낸 바 있다.

세종은 그것이 부러웠고 이 기회에 우리도 모든 한자 발음을 중국식으로 바꾸어 국제화, 세계화에 앞장서고 싶었다.


그래서 세종은 이 두 책을 우리 말로 번역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표시해 낼 수 있는 발음기호 같은 것이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존의 한국식 발음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한자만으로는 새로운 발음을 표시해 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종이 직접 집현전으로 가서 개인적으로 새로운 발음기호의 제작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부탁한 까닭으로 승정원일기에는 기록도 안 되어 있다.

당시에 집현전 책임자는 부제학 최만리였다. (대제학으로 정인지가 있었으나 당시 집현전 대제학은

겸직이었고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실제 집현전의 업무는 하지도 않았다)


당시 최만리는 조선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선비이자 학자였다.

공직생활 20 여년을 아무 이권도 없는 집현전에서만 근무한 진정한 선비였다. (중간에 사또로 한 번 발령 난 적이 있으나

집현전 일이 많아서 6개월 늦게 부임해서는 6개월 만에 집현전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있다)


당시에 발음기호 즉 한글 개발 작업은 최만리 지휘하에 착착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집현전 귀신인 최만리가 그 일을 모를 리가 없고 세종의 신임 또한 두터웠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종합해 보건대

최만리가 한글 개발 실무팀의 대장이었음이 분명하다.


최만리 이하 집현전의 학자들은 세종이 새로운 옥편에 사용할 발음기호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하였고,

세종의 속셈이 우리 나라의 한자 발음을 명나라 한족의 중국어 발음으로 바꾸는 데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은 최만리의 지휘하에 순조롭게 발음기호를 하나하나 만들어 갔고,

드디어 1443년 음력 12월에 완성이 되었다.

이 때만 해도 이 글자가 얼마나 대단한 글자인지 그 진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세종도 최만리도 그저 이 글자가 나중에 다른 책을 쓰기 위한 소도구 정도로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어디에도 날짜를 기록해 둔 사람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날짜도 없이 12월 기록 맨 끝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약 한 달 뒤에 세종은 중국식 한자발음 사전에 해당하는 "운회'라는 책의 대대적인 번역사업 계획을 발표한다.

세자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편찬위원 명단에 올랐다.


여기에 최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집현전 학자들이 발끈하였다.

오랫 동안 써 오던 우리 나라식 한자 발음을 버리고 왜 중국식 발음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 불만의 요지였다.

당시 집현전 학자의 상당수가 세종의 새로운 음운정책에 반대하였고 세종에게 정식으로 상소문을 올리기로 하였다.


그래서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상소문을 써서는 최만리의 이름을 맨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걸 보고 이번에는 세종이 발끈하였다. 그렇게 믿었던 최만리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당장 그 일당을 잡아서 가두라 하였다. 그 때가 저녁 나절이었다.


최만리에게 직접 하문한 내용은 바로 이 한 마디였다.


"운(韻)에 대해서 뭘 아시오?"


<<중국어에서 운이란 발음에서 모음부분 이하를 말하는 것으로(산, 간, 만 발음에서의 [an] 발음) 한시를 쓸 때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며, 중국 본토 발음인가 사투리 발음인가 하는 것을 가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종은 이 기회에 정말 한자 문화권의 후진성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고,

최만리는 갑작스러운 발음 변동에 대한 대규모 혼란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최만리는 "지금까지 힘들게 만들었던 그 발음기호들이 겨우 이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인가" 하면서

홧김에 발음기호(한글)에 대한 비판도 몇 마디 곁들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어 최만리가 한글창제 반대의 선봉에 섰다느니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분명히 말하지만 한글 창제과정에서는 아무도 반대한 사람이 없었으며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위 상소문은 한글 창제 한참 뒤에 나온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다.


세종은 사무실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고, 최만리, 신석조, 정창손, 하위지 등 집현전 학자들은

의금부 감옥에서 투덜투덜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세종은 이들을 거의 다 석방하였다.

대학자들을 마냥 가두어 둘 수는 없었다.

여기서의 하위지는 나중에 사육신의 한 명이 된다.

정창손만을 파직시킨 것으로 보아 이 상소문의 책임 집필자는 최만리가 아니라 정창손일 가능성이 많다.

이 정창손은 나중에 영의정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는 대정치가가 된다.


그러나 최만리는 단단히 화가 났다.


"당신 같은 임금과는 일 못하겠소"


사표를 내고는 출근도 안 하고 집에 콕 박혀서는 아프다면서 생전 나오지도 않았다. 세종은 다급해졌다.


"집현전 부제학 자리는 항상 비어 있소. 언제든지 나오고 싶을 때에 나와 주시오"


최만리는 끝내 안 나왔고, 그로부터 1년 반인가 뒤에 세상을 뜬다.


최만리는 집현전 장기근속자답게 엄청 가난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더 존경했다.

세종조 청백리가 모두 15명인데 최만리가 서열 두 번째로 올라 있다.

세종 시절 청백리의 첫째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한성부윤 "정 척"이라는 분이었고

최만리 다음 서열로 청백리에 오른 분은 그 유명한 "황 희" 정승이다.

청백리에 오른 최만리는 역대 왕들의 위패가 있는 종묘에서 세종과 함께 모셔지고 있다.


그러나 해주 최씨 최만리는 어느 한글학자의 한번 실수로 한글 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주모자로 오인되고 있다.

그 한글 학자는 일제시대의 일본학자 "고쿠라 진페이"가 쓴 논문의 일부를 확대 해석하여

최만리를 엄청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최만리는 억울하다. 최만리 후손 해주 최씨는 조만간 최만리 복권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의 자료로는 최만리가 한글창제팀장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기 때문이다.

최만리에 대한 상세한 논문은 이미 1950년대에 이숭녕 박사에 의해서 두 편인가 발표된 것이 있다.


그런데 기존의 선입관들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여 아직도 많은 국사 책에서

한글창제를 끈질기게 반대한 사람이 많은 것으로 되어 있다. 조만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현재 가장 시급한 일은 최만리라는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하며 비판하고 있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부터 빨리 고치는 일이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쁜 최만리"가 들어갈 뻔 하였으나 마침 그 때 필자가 교과서심의위원으로 있던 때여서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다행히 뺄 수 있었다.


세종의 소원이었던 한자발음의 중국화 정책은 최만리를 숭배하는 많은 선비들의 외면으로 실패로 끝났다.

세종의 정책이 성공했더라면 지금 우리나라의 한자발음이 중국어의 한자발음과 같아졌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어의 정확한 발음을 귀로 확인하기 위하여 요동으로 귀양 와 있던 명나라 한족 출신 관리를 만나려고

요동으로 열 몇 번이나 출장 갔다 온 성삼문만 엄청 고생했다.(성삼문의 출장 목적은 훈민정음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종으로서는 애써 만든 발음기호까지 버리기는 아까웠다.

그래서 "어린 백성이... " 어쩌고 하는 서문을 붙여서 백성용 글자로 반포하기로 하였다.

그것이 최만리 사후 1년 반 뒤의 일이었다. 이 글자들의 명칭은 훈민정음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다. 그러나 배우기가 너무너무 쉬워서 별도의 교육기관이 없이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었다. 이것이 훈민정음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수천 년 전에 만든 지구상의 모든 글자를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최신 모드로 만들어진 글자가 바로 우리 나라 한글이다.

어찌 우리 한글을 아주아주 옛날에 만든 다른 나라의 구식 글자와 비교할 수 잇겠는가?


너무 쉽게 만든 것도 탈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수치로 생각하였고 모든 국가의 공식장부에서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그래서 서민들과 여자들 사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전승되었다.


여자들끼리만 전승되던 한글은 연산군의 모친 윤비가 죽는 데에 크게 공헌을 세웠다고 하여

효자 연산군에 의하여 크게 낭패를 본 적도 있다.


어쟀든 조선 시대의 공식 문자는 여전히 한자로만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글이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승격되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한글을 우리 나라의 공식 글자로 승격시키는 데에는

1890년대에 일본의 힘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었다.


일본이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감동하였기 때문에 그리 해 준 것은 아니고,

우리 나라를 어떻게 해서든 중국과 떼어 놓겠다는 전략적 필요성이 그 이유였고,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서민들의 힘을 강화시켜 기존 우리 양반들의 발언권을 축소시켜 놓자는 것이 또다른 이유였다.


물론 그 전에 신부나 목사들이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평등과 자유"라는 무기를 들고 우리 나라 서민들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하여 서민들의 글자인 한글을 사용한 성경을 보급한 것도 때늦은 한글 발전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글 성경 때문에 우리 나라의 민심이 적지 않게 흔들렸고 그 빈틈을 일본이 적절히 잘 활용한 셈이었다.

이 때 일본이 조금만 더 약하게 나왔다면 우리나라도 저 동남아나 아프리카처럼

유럽이나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일본은 우리 나라에 독립협회도 만들어 주고 독립문도 세우게 하고 독립신문도 창간되게 하여

신문사 윤전기용 한글 활자를 무제한 제작하여 우리 나라에 보급하였다.

<<1890년대만 해도 "독립"의 개념은 "중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우리도 황제의 나라가 되었다"라는 개념이었다.

일본은 이 때에 우리 나라에 심어 준 "독립정신" 때문에 나중에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덕분에 우리 나라는 갑자기 한글시대로 급속하게 변해 갔다.

한글 창제 450년만에 맞이한 때늦은 한글시대의 새로운 주인공은 최남선, 이광수 등 중인계급의 후예들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1940년대 초에 내선일체인지 뭔지 때문에 3, 4년간 한글을 안 써도 되게 해 주는 해프닝도 있었다.

<< 앞으로 조선 사람들을 절대로 차별대우하지 않겠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어도 좋고, 국어를 일본어를 써도 좋다.

그러니까 완전히 일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 주겠다는 말이다. 어때? 좋지? 근데말이야...

이제 완전히 일본 사람 되었으니  젊은 놈들 우리 일본 군대에 좀 보내 줄래?... 라는 속셈에서 나온 조치였다.>>


그러니까 이상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해 보면


한글은 세종의 잘못된 정책의 부산물로 태어났고, 최만리는 억울하며,

일본의 침략준비 수순에 의하여 우리 나라의 공식적인 글자로 재탄생하였으나.

그 품질은 가장 최근 모드로 만든 것이니만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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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만리는 歷史의 죄인인가     -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

 

역사란 결국 인간들이 살아간 흔적이라고 한다면 인물사는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고 흥미로운 분야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문중(門中)과 학파의 이해 관계, 시대적 상황에 의해 전혀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특히 어떤 인물을 숭모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다른 인물을 깎아 내리는 비교사적 필법(筆法)은

인물사를 빗나가게 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리 민족사를 되돌아보면, 영광에 못지 않게 오욕의 역사도 적지 않은데

그 중에서 가장 마음 아픈 것이 너무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의 문자를 빌려쓴 데서 비롯된다. 글자란 단순히 글을 쓰는 수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중국의 문화까지도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저들의 중화주의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를 살게 됐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리 칭송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한문이 너무 어려워 백성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글로 풀어 쓸 수 없음을 측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명군(明君)이자, 현자(賢者)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한글의 역사를 얘기할 때 우리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그 밑바닥에 깔고 이론을 전개한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최만리(崔萬理)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역사에 의하면 그는 한글 창제에 반대했고,

이 사실로 인해 ‘역사의 죄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과연 그럴 만한 인물일까?

 

최만리는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옛 문헌인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그는 해주(海州) 최씨의 시조인 해동공자 최충(海東孔子 崔沖)의 12대 후손으로 아버지의 이름은 최하(崔荷) 였다고 한다. 

그는 세종이 왕위에 등극한 1419년에 진사시 을과에 합격함으로써 벼슬길에 올랐다.

본시 학문이 높았던 최만리는 과거 합격과 더불어 벼슬이 올라 집현전에 들어가 박사(博士)를 거쳐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1439년에는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잠시 임금의 곁을 떠났다가 이듬해 집현전 부제학이 되어 서울로 돌아와 세종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늙어서 고위직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고 청백리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무능하거나 부덕했던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443년이 저물어 갈 무렵, 세종은 오랜 노력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이듬해 연초가 되자 최만리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세종실록’ 갑자년(1444) 2월 20일(庚子)자에 실린 그의 상소문을 읽어보면

우리가 그의 진심을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어느 신하보다도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사업을 대단한 업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상소의 첫머리에서 ‘한글을 창제한 왕의 업적이 지극히 신묘해 사리를 밝히고 지혜를 나타내심이

천고에 뛰어난 업적’이라고 경하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상소를 이어가면서 몇 가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한글을 쓰노라면 한문을 사용하지 않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백성들이 장차 중국의 예법을 모르게 될 것이니

그 점이 걱정스럽다고 말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최만리에게 두 가지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선 한글을 쓰게 되면 한문을 쓰지 않게 되리라는 것은 생각이 지나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때로부터 560년이 지난 지금도 한문이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있고,

또 그들의 주장이 잘못 됐다고만 볼 수 없다면, 당시 최만리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을 크게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또 한 가지, 그가 중국의 제도(예법)를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 부분은 비난을 받을 만하다.

한글의 창제가 중국의 제도를 버리는 것도 아니려니와 중국의 제도로부터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국가의 운명을 바꿔 놓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중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걱정한 것은 그가 한때 총명을 잃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그런 식의 사고에 대해 최만리 혼자 책임질 일은 아니었다.
상소가 합소(合疏·여러 명이 연명한 상소)였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한글 창제가 집현전의 고유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동궁(진평대군·晉平大君)과 함께 집현전의 몇몇 소장 학자들만이

국사를 논의하는 의사청(議事廳)에 불려가 한글창제 일을 처리한 데 대해 최만리는 불평을 나타내고 있다.

셋째, 음운학상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 사이의 견해차에 대한 설명인데 이는 최만리 자신도 한글 창제에 참여했던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당연히 할 말을 한 것이므로 그를 탓할 일은 못된다.

끝으로 최만리의 상소에 담겨 있는 간절한 사연은 그가 세종대왕의 건강을 몹시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면서 몸을 돌보지 않아 한글이 완성되었을 때 왕의 건강은 지극히 쇠약해지고

특히 시력이 나빠져 약수가 나오는 청주(淸州) 초정리에서 휴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종은 휴양을 떠나면서도 유독 한글 관계 자료만을 챙겨 떠나고자 했다.

최만리가 안타깝게 생각한 대목은 바로 이 점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때문에 병이 났고,

이제 그 때문에 휴양을 떠나면서 또 그 보따리만 들고 떠나려 하니 야속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만리의 실수랄 것도 없지만, 굳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시대의 사조였지,

그가 역사의 죄인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만리의 이 상소문은 마치 그가 한글 창제를 ‘반대한 것처럼’ 비난받고 있다.
아마도 최만리를 역사의 죄인으로 취급한 최초의 학자는 한결 김윤경(金允經·1894∼1969)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 문자 및(及) 어학사’(서울 조선기념도서출판관·1938)에서

‘최만리는 한글 창제를 반대한 저능아’(1946년 판·86쪽)라고 최만리를 비난했고, 그 평가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다.

세종대왕을 찬양하고 최만리를 몰아붙이는 한글 숭모론자들은 더 나아가서

‘사대주의자들이 한글을 언문(諺文)이라고 비하했다’고 비난한다.

사실은 언문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도 세종이었고(‘세종실록’ 25년 12월 30일자),

한글을 보급하기 위해 만든 관청의 이름도 언문청(諺文廳·‘세종실록’ 28년 11월 8일자)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언문이 마치 한글을 비하하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는 논리도 근거 없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훌륭한 분이었고 그를 기리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적 인물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다른 인물을 상대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만리를 헐뜯는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공적이 높아지는 것도 아니고,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찬성했다고 해서 세종대왕의 공적이 낮아지는 것은 더욱 아닐 것이다.

아마도 저승의 최만리는 자신의 뜻이 그토록 곡해된 데 대해 무척 원통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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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과 최만리 : 디지털 한글박물관 (황선엽 : 성신여자대학교)

 

들어가며

1444년(세종 26)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상소로

인하여 최만리는 극단적 사대주의자이며 보수주의자로 비난 받았으며 반민족주의자로 낙인 찍히기도 하였다. 반면에 최만리는 성격이 강

직하고 청렴하여 청백리(淸白吏)로 추천된 사람이며 한글 창제의 협력자인바 그를 사대주의자 내지 반민족주의자로 비난하는 것은 사실

에 대한 오해와 현대적 편견의 소치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는 실록 등의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최만리는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살펴보고 최만리를 대표로 하여 올린 이른바 언문 창제 반대 상소문에 담긴 구체적인 주장은 무엇이며 나아가 그 주장들의 근거는 어떠한

것인지, 세종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들의 주장을 꺾기 위해 어떻게 조치하였는지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알아볼 것이다.

 

≫ 1. 최만리는 어떤사람인가?

 

1.1. 최만리의 생애

 

최만리(崔萬理)의 본관은 해주(海州)로 해동공자라 일컬어지는 최충(崔冲, 984-1068)의 12대손이며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崔滋,

1188-1260)의 6대손이다. 또한 그의 외동딸이 본관이 덕수(德水)인 이의석(李宜碩)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의석의 증손(曾孫)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이다. 즉 이이는 최만리의 외현손(外玄孫)이 된다. 최만리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1419년(세종 1) 4월

증광문과에 을과로 합격한 것으로 보아 1390년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세종(1397-1450)보다 나이가 약간 많거나 비슷했을 것이

다. 과거에 급제한 최만리는 정9품인 정자(正字)라는 벼슬로 관리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제도에 따라 수문전(修文殿), 집현전, 보문각(寶文閣)을 두었었는데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며 문신에게 관직만

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1420년(세종 2) 3월에 이르러 이 기관들 중 집현전만을 남겨 관사(官司)를 궁중에 설치하고, 다음의 표와 같

이 직제를 정하였다. 아울러 문관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해 집현전의 관리로 임명하여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임금의 자문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다음해인 이 때 최만리는 집현전의 정7품 박사에 임명되었다.

 

1420년(세종2)에 정해진 집현전 직제 

           명  칭

            품  계

           인  원

           비  고

     영전사(領殿事)  

           정 1 품

            2  인

        겸관(兼官)

     대제학(大提學)

           정 2 품

            2  인

     제 학 ( 提 學 )

           종 2 품

            2  인

     부제학(副提學)

           정 3 품

           10 인 

     직제학(直提學)

           종 3 품

      각 품에 2인을

     초과할 수 없음.

    (후에 증원 혹은

     감원되어 16인>

    22인>32인>20인>

        으로 변화)

        녹관(祿官).

    경연관(經筵官)을

     겸임하도록 함.

     직 전 ( 直 殿 )

           정 4 품

     응 교 ( 應 敎 )

           종 4 품  

     교 리 ( 校 理 )

           정 5 품

     부교리(副校理)

           종 5 품

     수 찬 ( 修 撰 )

           정 6 품

     부수찬(副修撰)

           종 6 품

     박 사 ( 博 士 )

           정 7 품

     저 작 ( 著 作 )

           정 8 품

     정 자 ( 正 字 )

           정 9 품

 

1427년(세종 9)에 교리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랐으며 같은 해 7월에 세자[문종(文宗)]가 조현(朝見) 할 때의 서장관

겸 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으로 직제학 정인지(鄭麟趾)와 집의 김종 역시 같은 해 8월에 세종이 세자(世子)에게 전지하여 매일 주강(晝

講)할때 좌필선(左弼善) 정인지(鄭麟趾)와 우문학(右文學) 최만리가 번갈아 가며 고금의 유익한 말과 훌륭한 정치를 진술하고 민간의 일

을 들려주기도 하며 저녁에 이르러서야 나가게 하는 것을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고 한 기록이 보이는바 이때 최만리는 집현전 응교로

서 우문학을 겸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만리는 이후 수 년에 걸쳐 집현전 관리로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였던 듯하다. 1431년(세종 13) 10월 기사에 세자가 시종(侍從)한 지 오래

된 최만리와 박중림(朴仲林)이 들어와서 강(講)할 때는 스스럼없이 상당히 어려운 것을 묻는 데 비해 날마다 교대로 들어오는 나머지 관

원들에 대해서는 낯선 까닭에 세자가 부끄러워 머뭇머뭇하면서 말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세종은 서연관을 겸관이 아

녹관으로 바꾸었는데 서연관은 녹관을 두어 오랫동안 그 임무만을 전담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이후 최만리는

1432년(세종 14)부터 1435년(세종 17) 7월까지 세자 좌보덕(左輔德, 종3품)을 맡았는데 겸관이 아니므로 이 시기에는 집현전의 직책은 맡

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435년(세종 17) 7월에 이조(吏曹)에서 집현전의 기능이 임금 앞에서 글을 강론하는 것인바 서연관의 직책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별도의 녹관을 둘 필요가 없이 집현전에 합칠 것을 주청하니 이에 따르도록 하였다. 이에 최만리는 세자 좌보덕에서 집현전 직제학으로

소속이 옮겨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436년(세종 18) 4월에 집현전 직제학 최만리를 초시의 대독관(代讀官)으로 삼았다는 기사

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후 1438년(세종 20) 7월에 집현전 부제학에 오르고, 이듬해인 1439년 6월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가, 1년

후인 1440년(세종 22) 7월에 집현전 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1444(세종 26)년에 상소문제로 사직하기 전까지 계속 집현전 부제학으

로 남아 있었다. 사직하고 낙향한 이듬해인 1445년(세종 27년) 10월 23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

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

 

1.2. 세종과 최만리의 관계

 

앞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최만리가 관직에 있었던 25년 간의 대부분을 집현전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집현전에 소속되지 않았던 기간

은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던 1년 간과 세자의 서연관으로 겸직이 금지되었던 5년 간인데 이 중 세자의 서연관으로 있던 5년은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형식상으로만 집현전 소속이 아니었을 뿐 실제로는 집현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종이 집현전에 무척

애착을 가지고 있었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바 집현전이 새로 확장되던 때부터 붙박이로 근무한 최만리 또한 세종이 대단히

아끼는 신하였다는 추정을 해 볼 수 있다. 세종과 최만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해주 최씨 집안에 전해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을 참조할

수 있다.

최만리는 술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은 취한 채로 어전에 들어가 임금을 뵈었더니 세종이 만리를 걱정하여 “경은 몸을 생각하여 앞으로 세 

잔 이상씩은 마시지 마오.” 하였다. 이에 왕명을 어길 수 없었던 만리는 자신이 쓸 술잔을 스스로 크게 만들어 하루 세 잔씩만 마셨다. 후

에 세종이 만리를 접견할 때 술을 많이 마셨음을 알고 나무라기를 “경은 또 취기를 띄고 나왔으니 어떻게 된 것이오 ” 하니 옆에 있던 동

료가 말하기를 “만리는 어명대로 세 잔만을 마셨을 뿐입니다. 단지 스스로 큰 술잔을 만들어 마셨습니다.” 하였다. 이에 세종이 껄껄 웃으

며 “경이 왕명을 그토록 철저히 지킬 줄은 몰랐소.” 하고 바로 명하여 공관(工官)으로 하여금 큰 은 술잔을 만들게 하여 그 잔을 집현전 본

관에 갖다 두고 수시로 만리를 접대하게 하였다.

세종이 최만리에게 신문(新門) 밖의 저택을 하사하였다. 세상사람들은 이곳을 천 칸의 집이 들어설 만큼 넓다 하여 천간허(千間墟)라 불

렀으며 그 고개 이름을 만리현(萬理峴)이라 불렀다.

최만리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 이듬해(1445년)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세종은 만리가 가고 없는 집현전 부제학 자리를 항상 비워둔

채 언제나 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는데 만리의 부음(訃音)을 듣고서는“대쪽같은 만리가... 결국은 죽었구나.” 하며 침식을 잊은 채 오랫

동안 슬퍼하였다.

 

 

이상의 이야기는 최만리의 집안에서 전해오는 것이므로 최만리를 높이기 위해 상당히 윤색되었을 것이기는 하나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

고 보이지는 않는다.

첫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역시 가승(家乘)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세종이 최만리에게 하사한 은잔이 집현전[후에 홍문관]에 계속 남아 있

었는데 임진왜란 중에 없어졌다고 한다.

둘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현재 서울 마포구 공덕동과 중구 만리동2가 사이에 만리재[萬里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세종

이 최만리에게 하사한 집이 있던 곳이라 한다. 현재는 ‘마을 리(里)’자를 쓰고 있는데 위의 이야기가 맞다면 와전된 것이라 하겠다. ‘만리

동’이란 이름은 1946년에 일본식 지명을 고치며 ‘만리재’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 용산구 효창동 청파초등학교 뒷산에 만리창(萬里倉) 터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최만리가 탁지부(度支部) 외창(外倉)을 남대문 밖 연산강(燕山江) 위에 처음으로 세웠으므로 그 창고 이름을

만리창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실록에는 최만리가 호조의 벼슬을 하였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는 믿을 수가 없다.

셋째 이야기에 대해서는 최만리 이후 집현전 부제학의 임명이 1448년(세종 30) 5월에 가서야 이루어졌음을 참고할 수 있다. 실록에 따르

면 정창손(鄭昌孫, 1402-1487)을 이 때 집현전 부제학으로 임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최만리가 죽은 후 3년 후에야 집학전 부제학이 새로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세종이 최만리를 기다리기 위해 부제학 자리를 비워 놓았다기보다는 부제학에 임명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최만리가 집현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컸었음을 짐작게 한다.

 

1.3. 최만리가 올린 상소문들의 내용

 

실록에 따르면 최만리는 모두 14차례의 상소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처음 3회의 상소는 일반 행정상의 과오를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

다. 그 후 6차례는 세종의 불사(佛事)와 관련하여 척불(斥佛)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만 중간에 이 척불 상소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

상소를 한 차례 올렸다. 이후 3회는 세자의 섭정을 반대하기 위해 올린 것들이다.

최만리와 세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바 있으나 세조실록에 보이는 기사를 더 참조할 수 있다. 세조가 공신들을 모아 놓고 연회

를 베풀다 필선(弼善) 정효상(鄭孝常)에게 이르기를 “문종이 세자였을 때, 서연관 최만리·박중림 등이 세자를 보익(輔翼)하며 하나라도

조그마한 과실(過失)이 있으면 문득 간(諫)하여 마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도 생각하면, 이 두 신하는 그 직책(職責)을 능히 다하였다고

할 만하다. 이제 그대들은 한번도 선한 말을 진달(陳達)하여 세자(世子)를 경계한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아첨(阿諂)함이 심하다 할 것이

다.”고 하였다 한다.

최만리는 문종이 스스럼 없이 대할 정도로 친했으되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아주 엄한 스승이었다 할 것이다. 세자의 스승인 최만리는 세

종이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의 섭정을 시행하려 하자 적극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신하된 당연한 도리이며 비단 최만리만 이

러한 상소를 올린 것이 아니므로 그다지 특징적인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자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최만리의 청렴성을 확인시켜 준다

할 것이다.

최만리가 마지막으로 올린 것이 바로 문제의 언문 창제 반대 상소이다. 『연려실기술』이나 『대동야승』에는 『필원잡기』의 기사를 인

용하여 최만리가 환관의 복식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되어 있는데 실록에 이러한 내용은 실려 있지 않다.

 

2.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와 세종의 처결

 

2.1.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의 배경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집현전에서 20여 년을 근무하여 집현전의 실질적인 최고 직책인 부제학을 맡고 있던 최만리는 왜 세종이 그토록 심

혈을 기울여 이루고자 하는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하고 나선 것일까 그것도 창제가 다 이루어진 후 2달이나 지난 시점에서 말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하여는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1444년(세종 26) 2월 16일

에 세종이 한글로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최만리 등의 상소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실록에 실린 2월 16일 기사의 내용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1444년 2월 16일 기사에 따르면 세종은 집현전 학사 중 교리 최항(崔恒), 부교리 박팽년(朴彭年), 부수찬 신숙주(申叔舟)·이선로(李善老)·

이개(李塏)와 돈녕부주부(敦寧府主簿) 강희안을 의사청(議事廳)에 나오도록 하여 한글로 『운회(韻會)』를 번역하도록 명하였다. 또 동

궁[세자]과 진양대군[수양대군], 안평대군으로 하여금 이 사업을 감독하여 관장하게 하였으나 모든 일은 임금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도

록 하였다. 상을 줌에도 후하게 하였으며 물자를 보급함에도 매우 우대하도록 하였다. 이상이 기사의 내용이다. 의사청이란 국가의 중대

사를 의논하는 장소이고 『운회』는 앞서 밝혔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말한다.

이 기사 내용을 통하여 세종이 『고금운회거요』의 번역 사업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자와 대군

들이 감독하게 하고도 일일이 세종 자신에게 결재를 받도록 하였으며 특별히 상도 후하게 주고 물자 공급도 우대하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사에서 ‘상을 줌에도 후하게 하였다[賞賜稠重]’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2월 16일 명령을 내리며 앞으로 일을

잘하란 의미에서 상을 후하게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상을 후하게 주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일반

적인 경우는 사업이 완료되고 나서 그에 따라 포상하는 법인바 이러한 예에 비추어 본다면 이 부분은 어느 쪽으로도 해석해도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록 기사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실록의 기사는 날짜별로 기록되며 일반적으로 그날 일어난

일을 기록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날 내지 상당 기간의 걸치는 사건임에도 하루치 기사에 몰아서 넣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해당

기사는 대개 사건이 시작된 날, 사건이 끝난 날에 실리게 되는데 간혹 사건이 진행 중인 중간 날에 실리기도 한다. 이는 실록이 왕의 사후 

수 년 내지 수 십년 치의 기록을 모아 간행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2월 16일의 이 기사 역시 그 날 하루 동안

에 벌어진 일을 기록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상당 기간에 걸친 일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뒤에서 살펴볼 최만리 등의 상소문에 나타난 다음과 같은 언급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다. 즉 4일 뒤인 2월 20일에 올린 상

소에서 최만리 등은 “옛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치고 근거도 없는 언문으로 음을 달아 공장(工匠) 수십 인을

불러들여 이를 새겨서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의 운서를 고쳤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이 『고

금운회거요』의 번역이 가지는 특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것인데 2월 16일에 이 명령이 내려진 것이라면 불과 4일만에(실제로는

상소문을 준비하는 데 하루 내지 이틀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므로 명령이 내려진 직후일 것이다) 번역의 기본 방향이 잡히고 어느 정도 윤

곽이 드러나 있었다는 무리한 가정을 해야 한다. 더구나 새겨서 인쇄하여 반포하려 한다는 것은 이미 원고가 완성 단계에 있었다는 사실

을 명확히 보여 준다 할 것이다.

따라서 2월 16일의 이 기사는 이 때 『운회』의 번역을 명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전에 이러한 명이 있었고 이날 원고가 상당히 완성되었

기에 불러 상을 내린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회』의 번역을 명한 것은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데 이것은 아마 훈민정음의 창제 직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즉 1443년 12월에 이러한 명이 있었고 약 2달의 기간이 걸려 원고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2.2. 세종과 최만리 등의 논쟁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辛碩祖), 직전 김문(金汶),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河緯之), 부수찬 송처검(宋

處儉), 저작랑 조근(趙瑾)이 연명하여 이른바 언문 창제 반대 상소를 올렸다. 여기서는 실록 및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기록들을 토대로 세

종과 최만리 등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이를 위해 세종과 최만리 등이 대화하며 논쟁을 벌이는 가상적인 장면을 설정하였다. 이해의 편

이를 위하여 말투도 가능한 한 현대적으로 구성하였다.

세 종: 내가 만든 훈민정음에 대해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최만리: 언문을 만드신 것이 지극히 신묘(神妙)합니다. 전하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발휘하시는 능력이 천고(千古)에 뛰어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좁은 소견으로 볼 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어 간곡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부디 잘 판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종: 그대들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으니 말하도록 하라.

최만리: 우리 조선은 건국 이래로 정성을 다해 사대(事大)를 하였으며 모든 일에 있어서는 중국의 제도를 따라 행하여 왔습니다. 이리하

여 이제 우리나라는 중국과 같은 글을 쓰고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문명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언문(諺文)을 창작하

셨으니 보고 듣는 저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 종: 훈민정음을 창작했다고 하는데 훈민정음은 완전히 새로 만든 글자가 아니라 모두 옛 글자에 근본을 두고 있다. 즉 글자의 형태는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지 않았느냐


최만리: 그러나 소리로써 글자를 합성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어긋나니 진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일입니다. 만약 이 언문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 이를 두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사대모화(事大慕華)하는 데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세 종: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정음을 만든 것은 사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국의 제도를 가져다 쓰더라도 우리나

라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바꾸어 적용하지 않느냐 한자로는 우리말을 쉽게 또 정확히 적을 수 없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의 불

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즉 이러한 우리의 실정을 고려하여 정음을 만든 것일 뿐이다. 나는 즉위한 이래 사대모화에 대해 조

금도 소홀히 한 일이 없고 이러한 사실은 황제께서도 잘 알고 계신다. 혹 모함하려는 자가 정음을 만든 것을 빌미로 문제를 삼는다면 우리

의 뜻이 사대모화에서 조금도 어긋난 적이 없음을 밝히고 이것이 오로지 우리나라 백성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임을 자세히 설명한

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최만리: 예로부터 9개 지역으로 나뉜 중국 안에서 기후나 지리가 비록 다르더라도 방언에 따라서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습니다. 오직 

몽고, 서하(西夏), 여진, 일본, 서번(西蕃)과 같은 무리만이 제각기 자기들의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오랑캐들의 일이므로 말

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옛 글에도 중국(中國)의 문화로서 오랑캐의 문화를 변화시킨다 하였지 중국의 문화가 오랑캐 문화에 의해 변화되

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대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우리나라에 대하여 기자(箕子)의 유풍(遺風)을 간직하고 있어 예악

(禮樂)과 문물(文物)이 중국과 견줄 만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들어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

고 하니 이것이 이른바 향기로운 명약인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쇠똥구리가 만든 쇠똥 덩어리를 취하는 격이라 할 것입니다. 이 어찌

문명에 있어 큰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세 종: 대개 음(音)의 같음과 다름은 그 자체로 같고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같음과 다름에 기인하는 것이며, 사람의 같음과 다름은 또

한 지방이 같고 다름에 기인한다. 즉 지세가 다르면 기후가 다르고, 기후가 다르면 사람들이 숨쉬는 것(발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

로 온 세상의 문자와 제도를 통일시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의 발음이나 말은 같아지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산하가

저절로 한 구획을 이루어 지리와 기후가 중국과 크게 다르니, 말소리가 어찌 중국어의 것과 서로 부합될 수 있겠는가 그러한즉 언어가 중

국과 다른 까닭은 당연한 이치이다. 즉 예악과 문물은 우리가 중국과 같아질 수 있으나 언어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

리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고 정음을 만드는 것이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이라 하는 그대들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최만리: 신라의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는 비록 거칠고 촌스러우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다가 어조사를 적는 데 이

용하므로 한자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급 관리나 하인들이 이두를 익히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한문으로 된 여러 책을 읽

어서 한자를 대강이라도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이두를 사용하게 됩니다. 즉 이두를 사용할지라도 반드시 한자에 의거하여야만 뜻을 통할

수 있으니 이두 때문에 한자를 공부하여 알게 되는 사람이 상당히 많고 따라서 학문을 진흥시키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예전부터 문자가 없어 끈을 묶어 의사소통을 하던 시대와 같다면 임시방편으로나마 언문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것입

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올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임시방편으로 언문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좀 시일이 걸리더라도 중국

에서 통행하는 한자를 익히도록 하여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낫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이두는 수천 년 동안 써오면서 문서나 계

약서 등을 작성하는 데 어떠한 장애도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런 이두를 바꾸어 따로 속되고 무익한 글자를 만든단 말씀입니까

만일 언문이 통용되면 관리가 되려는 사람들이 오로지 언문만을 익히고 한자를 배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관리가 되려는 사람이

언문으로써 벼슬자리에 오를 경우 뒷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일을 보고 ‘27자의 언문으로써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힘

들여 성리학을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여길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수십 년 뒤에는 한자를 아는 사람이 매우 적어질 것입니다. 비록

한글로써 능히 관공서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성현(聖賢)의 문자를 알지 못하면 배우지 않고 담벼락을 마주 대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사리(事理)의 시비를 따지는 데는 어둡고 헛되이 언문(諺文)에만 공을 드릴 것이니 장차 어디에 쓸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쌓아왔던 학문[성리학]을 숭상하는 정책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까 두렵습니다.

이전부터 써 오던 이두도 비록 한자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님에도 식자층에서는 오히려 이를 속되게 여겨 이문(吏文)으로 바꾸려고 하

는 형편인데 하물며 언문은 한자와 전혀 관련이 없고 오로지 시장거리의 속된 말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닙니까 가령 언문이 예전부터 있었

던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이 문명한 정치를 이루려고 하는 때에 ‘여전히 언문을 인습적으로 그대로 사용하시겠습니까 ’ 하고 반드

시 이를 바로잡겠다고 논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오래된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일반적인 폐단입니다. 지금의 이 언문은 하나의 신기한 재주에 불

과할 뿐입니다. 학문에 있어서는 손실만 가져오고 다스림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로움도 없습니다. 저희들이 아무리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

아도 그 옳음을 알 수 없습니다.


세 종: 앞서 그대들이 이르기를 ‘정음은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성함에 있어서 모두 옛 것에 어긋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설총(薛聰)이

만든 이두(吏讀) 또한 소리를 달리한 것이 아니냐 게다가 이두를 제작한 본래의 뜻도 바로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만일 이두(吏讀)가 백성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언문(諺文)도 또한 백성들에게 편리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은 설총(薛聰)이 한 일은 옳다고 하면서 군상(君上)이 한 일은 그릇되다고 하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
또 언문을 제작한 것이 신기한 하나의 기예(技藝)일 뿐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늙으막에 소일하기 어려워 책을 벗삼고 있을 뿐이니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만을 좋아하여 정음을 만들었겠는가 그리고 또한 이는 사냥을 하며 매를 풀어 놓은 일 등과는 다르다. 그러니 그

대들의 말은 상당히 지나친 점이 있다.

최만리: 하나의 신기한 재주라고 말씀드린 것은 말을 하다 보니 말이 그렇게 나온 것이비 별다른 뜻이 있는 있어서 드린 말씀은 아닙니

다.


세 종: 또한 내가 하급 관리들을 선발하는 데 정음을 넣도록 하였으나 전적으로 정음만을 대상으로 시험 보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대과

(大科)의 경우에는 정음을 시험 과목에 편입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학문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대들의 주장은 너무 과장

된 것이라 하겠다. 또한 다스림에 있어 아무 이로움도 없다 했는데 이 또한 옳지 않다. 가령 형을 집행하고 죄인 다스리는 문서들을 이두

와 한문으로 써 왔는바 글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한 글자의 차이로 인하여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정음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적은 후 읽어 준다면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모두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

으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최만리: 중국은 예전부터 말과 문자가 동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다스리는 일이나 소송 사건에 있어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매

우 많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힌 죄인 가운데 이두를 아는 사람이 직접 자신이 진술한 내용을 읽어 보고 그 내용에 사실과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더라도 매를 견디지 못해서 승복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로 보건대 글의 뜻을 몰라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것이 아

님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언문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이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즉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리는가 그렇지 않은가

는 그 일을 담당한 관리가 어떠한 자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지 말과 글이 다르거나 다르지 않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문으로 죄인을 공정하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저희들은 의심이 됩니다.


세 종: 내 일찍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률 조문을 몰라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

겨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법률 조문을 다 알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서 이를 이두로 번역하여 민간에게

반포하면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하교한 적이 있다.
그때 이조판서 허조(許稠)가 말하기를 ‘백성 중 간악한 무리들이 법률 조문을 자세히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고려하여 두려워하

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일들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내가 ‘그렇다면 백성이 알지 못하도록 내

버려 두어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이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서 범법한 자를 벌준다면,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느냐 더욱이 선대의 임금들께서 재판시에 법률 조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이 아니냐 ’ 하고 꾸

짖은 적이 있다. 그대들의 말은 허조의 말과 같다 하겠다.
죄인을 공정하게 다루는가 하는 문제가 관리의 자질에 달려 있는 것은 사실이나 공정한 관리도 착오를 범하여 억울한 죄인을 만들 수 있

다. 죄인을 다스림에 정음을 사용하면 억울한 일이 다소라도 줄어들 것이다. 죄인을 다스릴 적에 문서를 정음으로 작성하여 들려 주면 억

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라는 것은 정음이 쓰일 수 있는 한 예일 뿐이다. 가령 만약에 정음으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번

역하여 민간에 반포한다면 일반 백성들이 모두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충신·효자·열녀가 많이 나오지 않겠느냐

정창손: 비록 언문으로 번역하지는 않았을지언정 백성들이 알기 쉽도록 그림으로 그려 삼강행실도를 반포하였으나 그 뒤에 충신·효자·열

녀가 많이 나온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삼강(三綱)을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오직 그 사람의 자질이 어떠하냐에 달린 것입니

다. 반드시 언문으로 그 책을 번역, 배포한 뒤라야만 사람들이 그러한 행실을 본받는다고 어찌 보장하시겠습니까


세 종: 그대의 말은 허조의 말보다 심하구나. 이것이 어찌 이치를 아는 선비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 교화나 가르침이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 사람의 자질도 교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을 가르치지 않고 자질 탓만을 하는 것이 선비된 도리로

옳은 것이라 할 수 있느냐 그대야말로 참으로 쓸모없는 속된 선비에 불과하다.

최만리: 무릇 일을 이루고 공을 세움에 있어서는 빠른 시일 안에 서둘러 마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래의 국가의 조

치들은 모두 빨리 이루는 데에만 힘을 쓰고 있으니 이는 다스리는 근본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비록 언문이 부득이하여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는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들로부터 아래로는 하급 관리와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함께 상의

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설혹 모두 옳다고 하더라도 시행하기 전후에 백성들에게 충분히 그 뜻을 거듭 설명한 다음 다시 세 번 더 생각하여 역대 제왕들

의 다스림에 비추어 보아도 어긋남이 없고 중국과 상고하여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후세에 성인(聖人)이 다시 태어나 이를 보더라도 의심

스러운 바가 없는 다음에야 비로소 시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사람의 뜻을 널리 묻지도 않고 하급 관리 10여 인에게 명하

여 정음을 익히게 하며 또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운서(韻書)를 가볍게 고쳐서 황당한 언문을 붙여서 공장(工匠) 수십 인을 모아서

이를 새겨서 급하게 널리 유포시키려 하시니 천하와 후세의 공론이 어떠하겠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청주(淸州) 초수리(椒水里)에 행차하심에 있어 올해 흉년이 든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간략하게 시행

하도록 하셨는바 전에 비하여 10 중 8,9정도를 생략하시고 전하께 아뢰어야 할 공무(公務)도 모든 것을 대신들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언문은 국가의 긴급한 일도 아니고, 부득이한 기한이 있는 일이 아님에도 어찌 행재소(行在所)에서까지 급하게 서두르시어 전하의 옥체

를 조섭해야 할 시기에 번거롭게 하시는 것입니까 저희들은 더욱 그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세 종: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는가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는가 우리나라의 한자음은 마땅히 중국의 음과

부합되어야 할 것이나 오랜 세월 동안 말해지는 사이에 자음과 모음이 저절로 어음에 이끌렸으니, 이것이 곧 한자음이 역시 따라서 변한

까닭이다. 비록 그 음은 변했더라도 청탁이나 사성은 예전과 같을 수 있을 것인데 일찍이 그 바른 것을 전해 주는 책이 없다. 그래서 어리

석은 스승이나 일반 선비들이 반절법도 모르고 자모와 운모의 분류 방식도 모르고 혹은 글자 모습이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음으로 하고,

혹은 앞 시대에 임금의 휘자이기 때문에 피하던 것으로 인해서 다른 음을 빌려 쓰기도 하고, 혹은 두 글자를 합해서 하나로 하기도 하고,

혹은 한 음을 둘로 나누도 하며, 혹은 전혀 다른 글자를 빌려 쓰기도 하며, 혹은 점이나 획을 더하거나 덜며, 혹은 중국 본토음을 따르고

혹은 우리 나라 음을 따라서 자모와 발음, 청탁, 사성이 모두 변하였다. 만약 내가 이 운서(韻書)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

잡겠는가

최만리: 예전 선비의 글에 이르기를 ‘무릇 모든 신기하고 보기 좋은 일들이 선비의 뜻을 빼앗아 간다. 편지 쓰기는 선비의 일에 가장 가까

운 것이나 전적으로 이것만을 좋아하면 이 또한 저절로 뜻을 잃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동궁께서는 비록 덕성을 많이 성취하셨지만

아직은 성학(聖學)에 깊이 마음을 써서 모자라는 점을 더욱 닦아야 하 것입니다. 언문이 설사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단지 선비의 육예

(六藝)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치도(治道)에는 조금도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인데 동궁께서 이 일에 정신을 쏟고 마음을 기울여 날을 마

치고 시간을 보내니 이는 실로 현재 시급히 닦아야 할 학문에 손해가 됩니다.

세 종: 내가 나이 들어 국가의 서무(庶務)는 세자가 맡아서 하는 까닭에 비록 작은 일이라도 세자가 마땅히 참여하여 결정하는데 하물며

정음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이 이 일을 맡아서 해야겠느냐

최만리: 공적인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동궁께서 참여하여 결정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그리 급박하지 않은 일에까지 하

루 종일 마음을 쓰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세 종: 정음을 만드는 일이 어찌 국가의 공적인 일이 아니란 말이냐 그대들과 더 이상 말하기 어렵다. 어찌 생각이 이리 다를 수 있단 말

이냐

최만리: 저희들이 모두 보잘 것 없는 재주를 가지고 외람되게도 전하를 모시고 있으므로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감히 담고만 있을 없어 이

에 삼가 가슴속에 가진 생각을 다 아뢰어 전하의 어지심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세 종: 그대들이 나를 가까이서 시종하므로 나의 뜻을 명확하게 알 것인데도 이같이 행동하니 이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으냐 또한 이전에

김문(金汶)은 말하기를 ‘언문을 제작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 아니다’ 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반대로 불가하다고 주장하는 무리에 포함되어

있으니 어찌 된 일이냐 내가 그대들을 불러 이야기를 나눈 것은 정음에 관한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임금의 뜻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말로 답하고 궁지에 몰리면 말을 교묘하게 바꾸어 응답하니 그대들에게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부제학 최만리, 직제학 신석조, 직전 김문,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 부수찬 송처검, 저작랑 조근을 의금부에 하옥시켜라. 또 의금부에

서는 김문이 전후에 태도를 바꾸어 말하게 된 사유를 조사하여 어떤 처벌을 내려야 할지 결정하도록 하라.


세종은 그리고 그 다음날 이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였는데 속된 선비라는 꾸지람을 들은 정창손은 파직시키고 처음에는 정음 제정이 좋다

고 하다가 나중에는 반대를 하여 말을 바꾼 김문에게는 벌금을 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창손도 얼마 후 다시 복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앞

서 살펴보았듯이 최만리에 이어 부제학에 오른다. 김문의 죄는 의금부에서 조사하여 보고한 바로는 장(杖) 100대를 맞고, 소금을 굽거나

쇠를 만드는 등의 노역을 3년 간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노역은 시키지 않고 장(杖) 100대도 직접 매를 맞지 않고 돈을 내어 속죄하도

록 한 것이었다. 최만리는 다음날 석방되어 복직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하여 살다가 다음해에 작고하였다.

 

2.3. 최만리 등의 상소에 대한 평가

 

최만리 등 같이 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사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정음 제정의 반대 사유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명

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대주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국가적 이념이었으므로 그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비난하

는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입장에 선 것이다. 사대라는 입장에 대해서는 세종과 최만리 등이 전혀 다르지 않다. 따라서 최만리 등을 사대주

의자로 몰아 세우는 것은 역사적 몰이해에서 빚어지는 일이라 할 것이다.

최만리 등이 상소를 올리게 된 것은 앞서 보았듯이 『고금운회거요』를 번역하여 한글로 음을 달아 펴 내도록 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

다. 급작스럽게 운서를 바꾸어 편찬하려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그대들이 운서를 아느냐 하고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

을 바로잡겠느냐고 하였다. 『고금운회거요』에 어떠한 한자음을 붙였는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체로 다음 해인 1447년에

간행된 『동국정운』의 한자음과 거의 같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최만리 등은 당시의 현실 한자음을 바꾸어 중국 운서에 맞추려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를 표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국정운식으로 한자음을 개신하려는 세종의 정책은 실패하였으니 최만리 등의 주장이 옳

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을 놓고 최만리는 한글 창제의 협력자이며 그 상소는 한글 창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한자음의 개정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다소의 무리가 있다. 상소문에 분명히 이두만으로 충분한데 굳이 언문을 만들어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서두에서 한글은 지극히 신묘한 것이라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임금에 대한 예우의 말이고 또 이

말이 훈민정음의 정인지서에도 그대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최만리 등의 말이 아니라 인용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가지는 의의는 최만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많은 의문점들이 남아

있으나 사료의 부족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 다수이다. 최만리 등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상소를 올림으로써 그 상소의 내용을 통

해 간접적이고 부족하게나마 당시에 한글 창제를 둘러 싸고 벌어졌던 여러 사실들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최만리 등의 상

소가 없었다면 1443년 12월조 말미의 훈민정음 창제 기사와 같이 한글 창제 초기의 상황에 대해 극히 소략한 자료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한글의 대한 반대 상소문을 통해 최만리 등은 후대의 한글 연구에 있어 소중한 사료를 남겨 주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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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甲子上疏에 대한 올바른 理解 : <전 교육부 연구관(교육과정 및 교과서 연구.집필.심의관) 삼육대학교 강사. 문인. 최향섭>

 

현재 영어 文明圈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 유통의 速度 전쟁에서 알파벳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문자는 한글뿐이며 한글은 미래의 문자라는 것이 세계 어문학계의 公論이다. 이는 한글의 과학적 우수성을 입증하는 동시에 문자를 언제, 누가, 어떻게 개발하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있다는 것은 한글의 자랑이다.

그러나 한글 창제 당시 절대적인 漢字 文明圈에서 문자의 독자적 變革은 得失을 헤아리기 어려운 엄청난 문화의 충돌과 혼란이 예상되므로 이는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는 여과 과정이 필요했을 것인데 이러한 절차가 미흡한 실정을고려하지 않고 조급히 시행하려는 데서 많은 학자들의 중론을 모아 갑자상소를 통하여 論爭이 벌어진 것은 누구라도 시대적 當爲性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갑자상소 후 4년, 그리고 한글 반포 불과 2년 뒤인

 

1. 세종30년 10월 세종실록 122조에 동국정음을 시도한 한자음 改新 기도는 현실과 판이한 것이어서 세종도 실패를 자인한 것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언어는 각각 지역의 역사적 물적 환경의 독특한 관습과 풍속에 의해 생성 발달 되는 것이어서 남의 말을 우리의 발음법으로 완벽히 전수할 수 없기 때문이었으며 그것은 현재 우리가 외국어 교습에 원어민 교수를 채용하는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2. 갑자상소는 한글 반대상소가 아니었다.

기록으로 보더하도 한글은 세종 25년에 이미 만들어졌고 갑자상소는 세종 26년에 올렸으니 갑자상소가 한글 제정을 반대 했다는 김윤경의 논지는 시기적으로 조리에도 맞지 않는다. 이는 한글 반대가 아니라 한글 시행상의 문제점을 학자의 입장에서 토론한 것으로 이를 김윤경이 한글 반대로 烙定한 것은 군주의 공을 극찬하기 위하여 충신들을 비하한 것으로 과장과 편견을 나타내고 있는 실수였다.

 

3. 한글의 實效支配 기능의 時代的 경향을 살펴보면 이는 더욱 확실해 진다.

한글은 반포 이후 역대 왕조 수백 년 간의 왕조실록과 공적 기록문서에서 철저히 배제 되어 왔으며 세종 이후 한번도 과거에 출제되지 못하였다. 이는 우리 고유의 말에 지식을 담아 공유하는데 있어서 한글이 漢字 文明을 抑制할 만한 力量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므로 당시 갑자상소에서 제기한 학자들의 우려는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종 이후에 언문청이 있었으나 유명무실한 채 어떤 임금이나 학자도 한글을 이어받는 사업을 지속하지 않았음은 소리글로 만은 당시의 지식 기반을 충족시키기에는 불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5백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리가 50~60%에 가까운 한자 어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론할 여지가 없다. 본래 語文이란 文物의 변천과 함께 生滅하는 것이어서 시대적 實效支配 기능을 重視하지 않고는 연구의 正論에 達할 수가 없다.

따라서 김윤경은 語文이 생명체와 같이 用不用的 기능과 그 實用度에 따라 地域과 時代를 지배하는 것이어서 단기간에 제도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다는 것에 주목하고, 한글이 지식적 實效支配에 수백 년 간 독자적으로 성취하지 못한 문제점과 원인을 보다 비중 있게 밝혔어야 했다. 

 

4. 김윤경이 갑자상소를 들어 최만리를 사대주의자로 매도하고 개인적으로 폄하한 것은 당시의 국론과 국가의 손익을 모르는 자의 맹목적이고 사치한 修辭이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 東西의 선진 문물이 들어오는 경로는 90% 이상이 중국을 통한 것이었으니 중국어문에 의존도가 높았음은 지정학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런 현실적 역학 관계를 사대주의라는 말로 폄하하는 것은 나라의 생존 전략을 헤아리지 못하고 언어적 이상주의에 치우쳐 현실을 호도하는 자의 사치한 異說일 뿐이다.

본래 문명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을 막지 못하듯이 후진 문명이 선진 문명에 흡수되는 것이 자연적인 현상이며 이로서 역사적으로 전 세계가 지식과 문명간의 충돌을 겪으면서도 장점을 공유하며 공존하는 열린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 날에도 문화적 독립주의라는 理想國家는 地上에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영어문화권이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 할 것이다. 

 

5. 김윤경의 王朝史觀과 臣民史觀에 입각한 낡은 論旨는 民衆史觀의 입장에서 새롭게 수정되어야 한다.

김윤경이 일제 治下에서 한글의 위대성을 밝히고 찬양하고 보전하려한 것은 훌륭했으나 당시 국론을 일부 학자의 사대주의라는 용어로 비하한 것은 역사 인식의 큰 과오였다.

또한 한일 합방 이후 일본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離間하여 조선을 일본천황에 복속시키려 하는 臣民史觀의 정략을 펴고 있었으며 이를 반영하고 있는 일본 사학자 고쿠라 신베이의 야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군주를 극찬하는데 급급하여 갑자상소를 올린 주체들을 사대주의자로 낙인찍고 개인적으로 폄하한 것은 한글학자로서 지켜야 할 민족 주체성을 잃은 비합리적이고 부적절한 劇的인 贊批論이며 이런 論旨는 한글연구의 가치중립적 견지를 이탈한 것으로 한글연구의 목적과 本質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김윤경은 세종 이후 수백 년간의 역대 왕조에서 스스로 한글을 배제한 것은 무슨 主義로 일컬을 수 있을 것인가?

당시 최만리는 집현전의 首長으로서 많은 학자들의 중론을 대표하여 한글 시행상의 문제점을 上疏한 것이었으며 인간적으로 최만리는 장차 임금을 가까이서 보필할 인재를 뽑고자 특별히 실시한 세종 등극시에 장원을 하였던 책무감으로 다년간 경연을 이끌었으며 세종과 동연배로서 군신관계 이상의 각별한 情理로 신임을 받던 충정과 공로로 청백리에 首選된 용기 있고 올곧은 학자였다.

결론적으로 자랑스럽고 훌륭한 한글 창제의 과정은 이를 주도한 세종의 위대한 업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문 연구의 본질상 세종 혼자서 이루었다는 김윤경의 論旨는 비합리적이며 당시 집현전에서 수많은 학자들이 수십 년간 헌신한 연구의 總和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한글이 역사적으로 오랜 세월 배제 되었던 이유와 문제점을 밝히지 못하고 日帝治下의 臣民史觀을 반영하고 있는 일본 사학자의 논문을 왕조사관의 입장에서 거름 없이 인용하여 갑자상소를 한글 반대의 사대주의로 비하하며 군주찬양의 신화적 서술에 치우친 김윤경의 논지는 바로 잡아야할 것이다.

한글의 史的연구는 君主의 공적에 덮혀 버린 수많은 학자들의 피땀 어린 공로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밝혀서 당시 수준 높았던 어문 연구 과정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民衆史觀의 객관적 입장에서 더 중요하다.

따라서 일제하에 기술한 김윤경의 논문을 근래에도 분별없이 인용하는 것은 한글 연구에 비판과 진전이 없는 부끄러운 큰 오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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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世宗大王의 學問과 思想 - 第2部 崔萬理 硏究

  - 이숭녕(전 서울대학교 대학원장, 국어학 박사, 1908. 6. 7~1994. 2. 2)

 

   종래의 국어학사, 특히 훈민정음 창제를 중심으로 한 고찰에서 최만리가 대표가 되어 세종 26년(甲子) 2월 20일 세종에게 올린 한 상소문을 가지고, 그들을 한글 반대론자로 규정하여 문화사상 유래없는 죄인시함에서 필자는 국어학사의 태도론으로 이에 여러모로 의아심을 품어 온 터이다.

   그것은 최만리 개인의 연구도 없이 또는 상소문의 배경도 고찰함이 없이 또는 그 상소문의 내용의 분석과 객관적 가치 판단도 없이 흡사 당시의 중대 사건과도 같이 논란함에서 어딘지 3 ·1운동 뒤의 학풍에서 보는 바 문화애호의 감정론이 이 같은 결과를 낳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학문하는 태도'란 주어진 사실을 주어진 그대로 고찰하여야 하나 한 인간의 고찰에는 그의 생애와 사상의 고려가 앞서야 하며, 한 사건에 있어서는 그 사건의 배경, 시대성, 그 사회적 경향 여부가 정당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최만리의 상소문을 다루는 것을 보면 그 상소문 이외에 아무런 자료의 연구도 없이 오직 감정적인 'moral'관에서 誇大한 가치판단을 내리고도 한 점의 의아심도 없는 양 선전하고 있음은 적어도 학문하는 태도를 벗어 난 것이라고 단정한다. 이 원고는 이러한 것을 시정코져 '崔萬理 硏究'를 들고 새로운 시도를 제시하려 한다.

   최만리 문제가 처음으로 학계에 등장한 것은 1920년 소창진평(小倉進平, 오구라 신페이) 박사의 <朝鮮語學史> 66~72쪽에서 실록의 기사인 상소문의 전문과 그 사후 처리의 기사를 소개한 것이라고 본다. 물론 야사에는 약간의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세한 소개는 소창 박사의 상기 저서가 최초의 것이었다.

   그러나 소창 박사도 오직 소개에 그쳤을 따름이지 최만리 개인의 연구와 상소문의 배경의 언급이 전연 없었다. 그러면 이 상소문이 3 ·1운동 뒤에 과대 선전된 이유는 무엇인가 추측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시대적 성격 때문이라고 본다.

   첫째, 1920년이 3 ·1운동 직후라 한국 문화에 관한 것이라면 과대 선전함으로써 민족적 자각을 자극코져 하는 시대풍조에서 민족문화의 상징인바 훈민정음이란 일종의 '神聖不可侵'의 사업과 대립된 최만리의 상소문은 한마디의 말로 이르자면(可謂) 文化反逆 이라는 가혹한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객관적 고찰의 여유도 없었고, 그럴만한 학풍도 조성되지 못한바 민족적 감정에서 문화를 가치판단하려는 시대적 특이성에서 최만리의 소개는 지극히 불리한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1920년대의 국어학계는 학적 수준도 낮았고, 특히 자료의 빈곤에 고민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등장된 신기한 자료에 대하여 자료의 샘플링을 할 여유를 가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자료를 다루는 것도 익숙치 못하였다고 본다. 즉, 자료의 빈곤으로 최만리의 상소문은 훈민정음 제정에서 다시없는 자료로 중요시되고 자료의 검토를 모르는 데서 중대 사건으로 誇大評價되고,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 선전되므로 감정적 'moral'관에서 학문과는 별도로 이용되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의 감정적 'moral'관에서 다루어진 최만리론을 예시하여 보기로 한다.

 

김윤경 저 조선문자급어학사, 86쪽

   이 최만리 따위와 같은 고루하고 부패한 저능아도 출연되었던 것입니다. 모화환에 중독된 가명인(假明人, 가짜 명나라 사람)의 추태요, 발광이라고 보아 넘길 밖에 없는 일이지만 역사상에 영구히 씻어 버릴 수 없는 부끄럼의 한 페이지를 끼치어 놓게 됨은 그를 위하여 가엾은 일이라 하겠습니다.(이하 생략)

 

   이것은 3 ·1운동 뒤의 감정이 여실히 표시된 것인데, 최만리는 淸白吏요 重試에 급제되어 집현전을 20여 년 이상 지켜온 강직한 인물임을 안다면 오늘날 '최만리'관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상소문의 배경에는 적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사건은 아무런 사회적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이며, 그러한 사고법이 당시 士類의 통념이라고 보고, 이 정도의 상소는 실록에서 흔히 나오는바 특기할 것이 못되는 사건이며, 당사자의 처벌은 국어학사의 자료적 가치를 높이는 요인이 못됨을 말하여 둔다. 따라서 이 사건은 국어학사에서 각주에 부기하면 충분할 것이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것이 못됨을 지적하여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