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이 철도를 끊은 의병들을 학살하고 있다. 일제는 외국인인 한국인들에게 자국의 군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해 사형까지 시켰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① 헌병경찰 제도
일제 식민통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헌병경찰 제도였다. 군인인 헌병이 경찰업무도 맡는 제도였다.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직전 경찰권부터 빼앗았다.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강제병합 두 달 전인 순종 3년(1910) 6월 24일 총리대신 서리(署理) 겸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병합 후 자작 수여)과
1910년 9월 29일 반포한
헌병경찰 제도가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러일전쟁 때인 1904년 3월 일본이 한국 주차군(駐箚軍) 산하에 ‘한국주차헌병대’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였다. 1904년 2월 23일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 특명전권공사와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李址鎔: 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 병합 후 백작 수여) 사이에 이른바
1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 레닌에게 혁명자금을 전달하기도 한 그는 한국에서 숱한 학살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2 일제가 쓰던 형틀. 일제는 한국인에게 혹독한 태형을 실시해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
한국주차군사령관이 내리는 명령서가 한주참(韓駐參)인데, 러일전쟁 당시인 1904년 7월 2일자의 한주참 제259호는
일제가 부설한 군용철도나 군용전선을 끊는 것은 물론 항일 의병들이었다. 한주참 259호는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무단으로 처형할 수 있다고 선포한 셈이었다. 또한 1904년 7월 주차군사령관 하라구치(原口兼濟)는 함경도에 자의로 군정(軍政)을 실시하면서 헌병들에게 치안경찰 업무도 무단으로 맡게 했다.
이렇게 무단으로 헌병경찰 제도를 실시하던 일제는 1910년 6월 대한제국으로부터 경찰권을 빼앗은 후 경시청(警視廳)을 폐지하는 대신 ‘통감부 경찰관서 관제’를 공포해 주차군 헌병대장에게 경찰총수인 경무총장(警務總長)을 겸임시켰다. 초대 주차헌병대장이 러일전쟁 당시 레닌에게 막대한 공작금을 전달했던 첩보전의 귀재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소장으로서 그가 경무총장을 겸임하면서 경찰권까지 손에 쥐었던 것이다.
각 도 헌병의 장(長)인 헌병 좌관(佐官)은 각 도 경무부장을 겸임했다. 1910년 9월 10일의 칙령(勅令) 제343호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따르면 헌병경찰 배치를 완료한 1914년 전국의 헌병기관은 997개소, 경찰기관은 732개소로서 모두 1729개소에 달했다. 헌병이 1만1159명이고, 경찰이 5756명으로 모두 1만6915명이었다. 간부급이라 할 수 있는 경무부장(13명), 경무관(3명), 경시(36) 중에서 한국인은 경시 한 명뿐이었다.
반면 순사보 3067명과 헌병 보조원 4749명, 정탐 3000여 명 등 최하위직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헌병경찰 제도는 1910년 12월 16일 조선총독의 제령(制令) 10호로 발표된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라는 즉결심판권과 일란성 쌍둥이였다.
이에 따라 일본인 헌병분대장이 겸임하는 경찰서장은 재판을 거치지 않고 즉결 처벌을 할 수 있었다. ‘구류·태형·과료(科料)에 해당하는 범죄와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 또는 행정법규 위반’ 등이 ‘범죄즉결례’의 적용 대상이었다. 행정법규 위반까지 헌병분대장이 구류·태형·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었으니 공포의 제국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태형은 한국인에게만 적용되었다.
재일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의
1912년 12월 30일자 훈령(訓令) 제40호
사학자 문정창(文定昌)의
‘일본인들이 벌려놓은 형틀과 그 형편(刑鞭: 채찍)은 조선 왕조가 자국민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고대의 태형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달랐다. 형판(刑板)에 사람이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에 벌려놓고 두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牛陰莖: 소 음경으로 만든 매)은 끝에 납을 달아서 노출된 둔부를 치면 그 납이 살에 파고들어가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긴다. 매는 1차 80대가 보통이며 중도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때린다.”
오명천은 “맞은 사람은 절대 행보(行步)할 수 없고 사람의 등에 업혀 나오며, 죽으면 시체는 그 밤으로 행방불명이 된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헌병주재소에 끌려가서 태형을 맞다가 죽는 경우가 많자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1917년 1월 24일 경무총감부는 훈령 갑(甲) 4호로 “지금부터 구계(拘繫: 붙잡아 매어둠) 중에 사망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당해(當該) 경찰서의 장은 그 사망자의 성명, 본적, 주소, 직업, 사망 연월일·장소 등을 본적지 부윤(府尹) 및 면장(面長)에게 통지하라”고 명해야 했다. 2년 후에 발발하는 3·1운동은 이런 공포통치에 대한 전 민족적 저항이었다.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