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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통치 구조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1)(2)(3)(4)(5)

淸山에 2011. 10. 9. 15:07

 

 


 
 
 

일제 헌병은 저승사자, 한반도는 공포의 제국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5호 | 20110911 입력
일제 식민지 시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그 통치구조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일제가 시행했던 법률과 통치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식민지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일제의 법률과 통치구조는 모두 공포정치를 기초로 삼고 있었다.
일본군이 철도를 끊은 의병들을 학살하고 있다. 일제는 외국인인 한국인들에게 자국의 군법을 자의적으로 적용해 사형까지 시켰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식민통치 구조
① 헌병경찰 제도


일제 식민통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헌병경찰 제도였다. 군인인 헌병이 경찰업무도 맡는 제도였다.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직전 경찰권부터 빼앗았다.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강제병합 두 달 전인 순종 3년(1910) 6월 24일 총리대신 서리(署理) 겸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 병합 후 자작 수여)과 한·일 약정각서(韓日約定覺書)를 체결했다. 제1조는 “한국의 경찰 제도가 완비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 한국 정부는 경찰 사무를 일본국 정부에 위탁한다”는 것이었다.

1910년 9월 29일 반포한 조선총독부 관제(官制) 제2조는 “조선총독은 육해군 대장으로 충임(充任)한다”라고 규정해 조선총독은 군인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초대 통감 데라우치도 조슈(長州)군벌 출신의 현역 육군대장이었다. 그 3조는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례(直隷: 직속)하며 위임의 범위 내에서 육·해군을 통솔하며 조선 방비의 사무를 관장한다”고 규정했다. 총독이 군사지휘권까지 갖게 된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조선 방비의 사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가들로부터 식민지를 방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일제는 헌병에게 경찰업무까지 부여하는 헌병경찰 제도를 창안한 것이다.

헌병경찰 제도가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러일전쟁 때인 1904년 3월 일본이 한국 주차군(駐箚軍) 산하에 ‘한국주차헌병대’를 설치한 것이 그 시초였다. 1904년 2월 23일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일본 특명전권공사와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李址鎔: 대원군의 형 이최응의 손자, 병합 후 백작 수여) 사이에 이른바 한일의정서(議定書)가 체결되는데 하야시는 이때 이지용에게 1만원의 거금을 건넸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

1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 레닌에게 혁명자금을 전달하기도 한 그는 한국에서 숱한 학살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2 일제가 쓰던 형틀. 일제는 한국인에게 혹독한 태형을 실시해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한일의정서 제3조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는 미사여구인데, 제4조에서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군략상(軍略上) 필요한 지점을 정황에 따라 차지하여 이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일제는 자신들의 군사전략상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지점을 무단으로 차지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한국주차군사령관이 내리는 명령서가 한주참(韓駐參)인데, 러일전쟁 당시인 1904년 7월 2일자의 한주참 제259호는 군용전선·군용철도 보호에 관한 군율(軍律)이었다. “1. 군용전선·군용철도에 해를 입힌 자는 사형에 처함. 2. 정을 알고 범인을 은닉한 자는 사형에 처함. 3. 가해자를 체포한 자는 일금 20원을 상여(賞與)함. 가해자를 밀고하여 체포케 한 자는 일금 10원을 상여함……”이라는 것이었다.

일제가 부설한 군용철도나 군용전선을 끊는 것은 물론 항일 의병들이었다. 한주참 259호는 일본군이 한국인들을 무단으로 처형할 수 있다고 선포한 셈이었다. 또한 1904년 7월 주차군사령관 하라구치(原口兼濟)는 함경도에 자의로 군정(軍政)을 실시하면서 헌병들에게 치안경찰 업무도 무단으로 맡게 했다.

이렇게 무단으로 헌병경찰 제도를 실시하던 일제는 1910년 6월 대한제국으로부터 경찰권을 빼앗은 후 경시청(警視廳)을 폐지하는 대신 ‘통감부 경찰관서 관제’를 공포해 주차군 헌병대장에게 경찰총수인 경무총장(警務總長)을 겸임시켰다. 초대 주차헌병대장이 러일전쟁 당시 레닌에게 막대한 공작금을 전달했던 첩보전의 귀재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소장으로서 그가 경무총장을 겸임하면서 경찰권까지 손에 쥐었던 것이다.

각 도 헌병의 장(長)인 헌병 좌관(佐官)은 각 도 경무부장을 겸임했다. 1910년 9월 10일의 칙령(勅令) 제343호 조선주차헌병조례 제1조는 “조선주차 헌병은 치안유지에 관한 경찰 및 군사경찰을 관장한다”라는 것으로서 헌병이 경찰이 담당하는 치안 업무까지 관장한다는 뜻이었다. 제3조는 “헌병장교·준사관·하사·상등병은 조선총독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헌병으로) 재직하면서 경찰관의 직무를 집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조선총독부의 자료에 따르면 헌병경찰 배치를 완료한 1914년 전국의 헌병기관은 997개소, 경찰기관은 732개소로서 모두 1729개소에 달했다. 헌병이 1만1159명이고, 경찰이 5756명으로 모두 1만6915명이었다. 간부급이라 할 수 있는 경무부장(13명), 경무관(3명), 경시(36) 중에서 한국인은 경시 한 명뿐이었다.

반면 순사보 3067명과 헌병 보조원 4749명, 정탐 3000여 명 등 최하위직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헌병경찰 제도는 1910년 12월 16일 조선총독의 제령(制令) 10호로 발표된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라는 즉결심판권과 일란성 쌍둥이였다.

이에 따라 일본인 헌병분대장이 겸임하는 경찰서장은 재판을 거치지 않고 즉결 처벌을 할 수 있었다. ‘구류·태형·과료(科料)에 해당하는 범죄와 3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에 해당하는 범죄 또는 행정법규 위반’ 등이 ‘범죄즉결례’의 적용 대상이었다. 행정법규 위반까지 헌병분대장이 구류·태형·벌금으로 처벌할 수 있었으니 공포의 제국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태형은 한국인에게만 적용되었다.

재일사학자 강덕상(姜德相)의 헌병정치하의 조선(憲兵政治下の朝鮮)에 따르면 범죄즉결례로 처벌된 한국인은 1911년에 1만8100여 명, 1913년에는 2만1400여 명이나 되었다. 한마디로 식민통치에 조금이라도 불만을 표시하면 헌병대에 끌려가 무지막지한 태형을 당하게 되어 있었다. 일본 내의 정령(政令) 위반은 1개월 이하의 구류나 20원 미만의 벌금이었지만 식민지에서는 3~5배나 엄격했다.

1912년 12월 30일자 훈령(訓令) 제40호 태형 집행 심득(心得: 준칙)은 태형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제1조는 “수형자를 형판(刑板) 위에 엎드려 눕히고 양팔과 두 다리를 형판에 묶은 다음 바지를 벗기고 둔부(臀部: 궁둥이)를 태(笞: 매)로써 강타한다”는 것이었다. 제2조는 “형장(刑場)에 음료수를 준비하여 수시로 수형자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기절할 경우 끼얹는다는 뜻이다. 제12조는 “집행 중에 수형자가 호규(號叫: 울며 부르짖음)할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젖은 수건으로 그 입을 막는다”는 것이었으니 얼마나 혹독한 형벌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학자 문정창(文定昌)의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상)에는 항일운동가 오명천(吳明川)의 증언이 나온다.

‘일본인들이 벌려놓은 형틀과 그 형편(刑鞭: 채찍)은 조선 왕조가 자국민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고대의 태형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달랐다. 형판(刑板)에 사람이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에 벌려놓고 두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牛陰莖: 소 음경으로 만든 매)은 끝에 납을 달아서 노출된 둔부를 치면 그 납이 살에 파고들어가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긴다. 매는 1차 80대가 보통이며 중도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때린다.”

오명천은 “맞은 사람은 절대 행보(行步)할 수 없고 사람의 등에 업혀 나오며, 죽으면 시체는 그 밤으로 행방불명이 된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헌병주재소에 끌려가서 태형을 맞다가 죽는 경우가 많자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1917년 1월 24일 경무총감부는 훈령 갑(甲) 4호로 “지금부터 구계(拘繫: 붙잡아 매어둠) 중에 사망한 자가 있을 경우에는 당해(當該) 경찰서의 장은 그 사망자의 성명, 본적, 주소, 직업, 사망 연월일·장소 등을 본적지 부윤(府尹) 및 면장(面長)에게 통지하라”고 명해야 했다. 2년 후에 발발하는 3·1운동은 이런 공포통치에 대한 전 민족적 저항이었다.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는 조선통치사 논고(論稿)에서 일제의 헌병경찰 제도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강력한 경찰제도는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것으로 조선 통치의 성공 여부는 오로지 그 운영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고 평가했다. 앞의 오명천은 “이때 일본 경찰들의 주요 취체(取締) 사항은 ‘1) 언어를 조심해서 사용하지 않는 것[言語不審], 2) 거동을 조심해서 하지 않는 것[擧動不審], 3) 일본인들에 대한 욕설’ 등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일본인 순사들에게 조금이라도 불경(不敬)하거나 일본인들과 언쟁을 하다가는 태형을 맞게 되는데, 세상 물정 모르는 촌사람들이 시장에서 일본 순사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매를 맞고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서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다고 전하고 있다. 폭력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을 식민통치의 근간으로 삼은 것이다.

 

 

 

 
 
 

고리대금과 비싼 소작료 악용 … 토지·가옥 ‘합법적 강탈’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6호 | 20110918 입력
특정 정치행위의 본질을 보려면 경제 분야를 주목해야 한다. 온갖 명분과 미사여구에 가려진 진실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일제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감행하면서까지 대한제국을 차지하려 한 본질적 이유는 영토 획득과 경제적인 이득을 노린 것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동척(東拓)은 일본이 별다른 자본금을 들이지 않고 한국의 토지를 강탈하기 위해 세운 국책 회사였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식민통치 구조
② 토지 획득


일본은 1904년 기를 쓰고 러일전쟁에서 승전해 대한제국을 차지하게 됐지만 경제구조로 볼 때 식민지가 절실한 상황은 아니었다. 일본 자본주의는 과잉 생산된 상품과 잉여 자본을 유통시키기 위한 식민지가 필요할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군사력만 이상(異常) 비대한 기형 구조였다. 그러니 결국 군사력으로 식민지의 토지를 빼앗는 원시적 자본 축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1904년 5월 각의(閣議)에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편입시키기 위한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결정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권 확보가 주요한 내용으로 들어갔다. 대한시설강령에서 일본은 “현 시점에서 조약상 거류지 외 1리 내의 토지를 임차 내지 소유할 수 없으므로 내지에서 전연(田烟:토지)을 소유해도 그 권리가 명확하지 않아 자본가가 불안을 가지고 투자를 주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1 1910년 무렵의 남대문 거리. 2 2대 통감 소네 아라스케. 3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 이기용.
그러면서 “농업자본가를 위해 한국의 내지를 개방시킬 수단으로 두 가지 방책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관유황무지(官有荒蕪地)를 개간하는 방법으로 차지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유지도 일본인이 사거나 영구대차권처럼 사실상 일본인이 차지하는 것을 한국 정부가 인정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외피라도 남아 있는 한 이는 쉽지 않았다. 대한제국 정부는 외국인에게 토지를 파는 문제만큼은 강경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대한제국 정부는 광무(光武) 9년(1905) 4월 29일 형법 제200조 5호로 외국인에게 토지를 매매하는 행위를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 법은 “일체의 전토(田土)·삼림(森林)·천택(川澤)·가옥(家屋)을 외국인에게 몰래 팔거나 혹 외국인에게 붙어서 차명(借名)으로 속여서 팔거나[詐認] 혹 차명으로 속여서 파는 자에게 그 정(情)을 알면서도 고의로 판 자는 교수형에 처하고 멋대로 허락한[擅許] 해당 관원도 같은 죄로 처벌한다”고 규정했다. 백성들이 외국인에게 토지를 몰래 팔거나 중개하면 사형에 처하고 이를 허락한 관료도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었으니 일본인의 토지 소유 확대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부터였다. 일본은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와 강화협상을 체결하고 두 달 뒤인 11월에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이듬해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다. 통감은 대한제국 황제가 아니라 일본 천황에게 직속된 친임관(親任官)이었다.

대한제국의 심장부를 접수한 통감부는 토지 소유 확대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1906년 11월 토지가옥증명규칙(土地家屋證明規則)을 반포해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를 합법화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자본력이 우세한 일본인들은 흉년이 들어 토지값이 폭락하면 싼값에 사들일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농지 가격이 일본에 비해서 헐값인 데다 전호(佃戶:소작인)에게 경작시킬 경우 도조(賭租:소작료)가 수확량의 50% 이상이었으니 꿩 먹고 알 먹는 구조였다.

토지가옥증명규칙과 쌍둥이 법이 그해 12월 반포된 토지가옥 전당집행규칙(土地家屋典當執行規則)이었다. 일본인들이 고리대로 빚을 놓아 제때 갚지 못하면 전당 잡은 가옥이나 토지를 빼앗을 수 있게 한 법이었다. 이 두 법에 의해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는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토지 확대에 대한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1908년 2월 대리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79B0>荒助)가 외무대신 하야시(林董)에게 보낸 통감부 비밀보고(機密統發) 205호가 이를 말해준다. 소네는 보고서에서 ‘각지에서 폭동(의병)이 봉기해 아직까지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이때, 한국정부가 내지에서 외국인들의 토지 소유 금지 제도를 폐지했을 때 일반 인민들의 오해를 자초하거나 간악배들에게 우둔한 인민들을 선동시키는 구실을 제공할 우려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토지·가옥 매매에 대한) 공적인 포고와 통고는 적당한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보류……(해야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 확대가 농토를 신앙처럼 여기는 한국 농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의병에 가담케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보류 조치들은 의병이 진압될 때까지 한시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 삼아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면서 조선 통감은 한국수비대 사령부의 병력을 사용할 수 있는 군사권, 1년 이하의 금고형과 200원 이내의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는 사법권, 행정 사무 집행 후 한국 정부에 통보하는 행정권까지 갖게 되었다. 조선통감이 3권을 장악하자 통감부는 1907년 7월 ‘국유미간지(國有未墾地) 이용법’을 발포했다. 개간이란 명목 아래 일본인들이 국유지를 차지할 수 있게 한 법이었다. 주요 조항들은 다음과 같다.

1. 국유미간지, 즉 민유지가 아닌 원야(原野:미개척 벌판)·황무지·초생지(草生地:풀이 난 물가 땅)·소택지(沼澤地:습한 풀밭) 및 간사지(干瀉地:간조 때 바닥이 드러나 보이는 땅)를 대부 받을 자는 농상공부 대신에게 출원하여 허가 받아야 하며, 대부 기간은 10년을 초과할 수 없다.

1. 대부받은 자는 농상공부 대신이 정하는 대부료를 납부해야 하고 농상공부 대신은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이를 감면할 수 있다.

1. 대부를 받은 자가 예정 사업에 성공했을 경우 농상공부 대신은 그 토지를 불하 또는 대여할 수 있다.

1. 본법(국유미간지 이용법) 및 시행세칙 규정에 의거한 처분은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 법의 핵심은 일본인들이 황무지를 대부 받아 10년 내에 개간에 성공하면 소유권을 인정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법에 의거한 처분은 통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통감부의 뜻대로 처리되게 만들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대한제국의 토지 강탈에 나선 것이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이하 동척) 설립이었다. 그 전에도 일본인들은 대창(大倉)·동산(東山)·촌정(村井)·웅본(熊本)농장 등을 설립해 토지를 차지해왔지만 동척(東拓)은 차원이 달랐다.

동척(東拓)은 개인 소유 회사가 아니라 1908년 3월 일본 의회에서 특별법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공포하고 설립한 회사였다. 동척의 주요 대상지가 한국이었으므로 일제는 이 법을 대한제국에 실시할 것을 강요했고, 순종은 재위 1년(1908) 8월 26일 동양척식주식회사법을 비준할 수밖에 없었다. 동척법은 “토지를 개척하고 주민을 이주하는 사업을 경영할 목적으로 설치하여 본점을 서울에 두고 지점을 일본 동경과 그 밖의 지역에 둔다”고 규정했다.

동척은 대한제국의 토지를 확보하고 일본인들을 이민시키기 위한 회사였다. 동척의 영업과목은 “1)농업 2) 토지의 매매 및 대차(貸借:임대차) 3)토지경영 및 관리 4)건축물의 축조와 매매 및 대차 5)한국과 일본 이주민의 모집 및 분배 6)이주민 및 농사짓는 사람에 대하여 토지 개척과 이주에 필요한 물품의 공급과 그 생산물과 획득한 물품의 분배 7) 토지 개척과 주민 이주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 등이었다. 단적으로 식민지 농업개발회사였다.

이 법은 ‘총재(總裁) 1인은 일본인으로 일본국 정부에서 임명하고 부총재(副總裁) 2인은 한국인과 일본인 각 1인’으로 임명하고, 임원의 ‘3분의 2는 일본인으로 임명한다’고 규정했다. 동척의 초대 총재 우사가와 가즈마사(宇佐川一正)가 1908년 12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조슈(長州)군벌 출신이란 점은 군사적 폭압에 기대지 않고서는 운영할 수 없는 수탈 회사라는 뜻이었다. 민영기(閔泳綺:망국 후 남작 수여)가 한인 부총재였다. 창립자본금 1000만원은 1주당 50원으로 모두 20만 주였는데, 6만 주는 한국 정부에 토지로 구입하게 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논 1만2523정보, 밭 4908정보를 비롯해 도합 1만7714정보를 출자했다. 일본 왕실은 500주, 일본 왕족은 1000주, 한국 왕실은 1700주를 배당받았다. 나라를 빼앗으면 한국 정부 출자 토지는 고스란히 일제가 차지하게 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와 왕실, 일본 왕실에 배정한 6만7700주를 제외한 13만2300주를 일본과 한국에서 공모했는데 일본에서는 응모주수가 공모주수의 35배에 달하는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한국 내 응모주수는 공모주수의 1.9%에 불과했다.

회사라는 이름의 수탈 기구를 한국인들은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가 동척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한국인들의 이런 시각이 가미된 것이었다. 동척(東拓)은 일본이 한국을 어떻게 지배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였다.

 

 


 
 

총독부, 토지조사 ‘함정’ 파놓고 한반도 땅 40% 약탈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7호 | 20110924 입력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서구인들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매매한 것과 마찬가지 행위였다. 1910년 당시 일본 자본주의는 식민지가 필요하지 않았다. 일본이 아직 봉건성을 탈피하지 못했으므로 식민지 획득보다는 내부 발전에 전력을 집중해야 할 때였다.
일제가 토지조사를 위해 측량하는 모습. 일제는 근대적 토지소유 관계를 정립한다는 명분으로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해 막대한 토지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독립기념관 소장]
식민통치 구조
③ 토지조사 사업과 토지 강탈


1908년 일본의 대한제국·만주·대만에 대한 수출입 품목을 보면 일본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를 진단할 수 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한 품목은 쌀(44.4%)이고 다음이 콩(大豆·31.1%)이었다. 만주에서는 1위 콩깻묵(大豆粕·62.5%), 2위 콩(27%)이었다. 대만에서는 1위 쌀(41.5%), 2위 사탕(砂糖·38.7%)이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가장 많이 수출한 품목은 면포(綿布·18.7%)였고 다음이 면사(綿絲·9.2%)였다. 만주에는 면포(12.8%)·목재판(10.6%)이었고, 대만에는 목재판(10.4%)·면포(9.6%)를 가장 많이 수출했다. 일본 전체의 1913년 수출입 품목을 보면 수출 1위는 명주실(生絲·29.8%), 2위 면사(11.2%), 3위 견직물(6.2%)이었다. 같은 해 수입은 면화(32%), 철류(鐵類·7.8%), 기계류(7.0%) 순이었다.

일본은 해외에서 원료인 면화와 그것을 가공할 기계를 수입해 1차 가공을 거쳐 되파는 초기 자본주의 국가였다. 본국의 자본을 식민지에 투자하거나 생산품의 독점적 시장으로서 식민지가 아니라 낙후된 일본의 내지(內地) 개발이 더 시급한 상황이었다. 1910년 일본의 연평균 노동쟁의는 10여 건이고, 참가 인원도 100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은 전쟁과 더불어 성장하는 전형적인 국가 주도의 군산(軍産)복합체 자본주의 국가였다. 일본의 자본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 와중에 급속도로 발전해 1918년께 노동쟁의 건수가 500여 건, 참가인원이 7만여 명에 달하게 된다.

1 공출을 강요하는 포스터. 일제는 1940년대 전시 식량을 비축한다는 명목으로 공출을 강요하지만 그 전부터 조선의 쌀을 수입해 갔다. 2 조선의 토지매매문기(1673). 한상세란 인물이 김계남의 부인 김소사로부터 토지를 매입한다는 문서인데 손도장까지 찍은 위조 불가능한 문서였다.
식민지에 투자할 자본이 없으니 ‘자본 없는 자본 형성’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자본 없는 자본 형성이란 자본을 투자해 그 이윤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나 산림·광산·어장 같은 원시적 자본을 빼앗는 자본 축적 형태를 뜻한다. 한국 강점 초기에 일본에선 한국 투자에 대한 안내서가 많이 출간되었는데 ‘소자본을 가진 자는 자금업을 하는 게 가장 좋은 장사’라고 쓰여 있었다. 담보로 잡은 토지를 빼앗는 고리대금업의 천국이란 뜻이다.

이렇게 민간과 조선총독부 모두 조선의 토지에 눈독을 들였다. 일제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근대적 토지소유제도로 대체한다는 미명 아래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대대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실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강제합병 이전부터 황실 및 국유 재산에 큰 관심을 기울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 퇴위를 강요하던 1907년 7월 4일 일제는 이미 ‘임시 황실 소유 및 국유재산 조사국[臨時帝室有及國有財産調査局]’을 출범시켰다. 일찌감치 황실 및 국유재산을 점찍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강점 1년6개월 전인 1909년 2월 일본흥업은행으로부터 1000만 엔을 토지조사 비용으로 승인받고, 이듬해 1월에 ‘토지조사사업계획’을 수립했다. 그해 3월에는 토지조사국 관제를 공포하고 강점 일주일 전인 8월 23일 ‘토지조사법’을 공포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조선총독부 시정연보(施政年報) 서문에서 “토지조사는 지세(地稅) 부담을 공평하게 하고, 지적(地籍)을 명확히 하여 그 소유권을 보호하고, 그 매매·양도를 간첩(簡捷: 간단하고 빠름)하고 확실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표방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황실 및 국유 토지를 빼앗아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지세(地稅)를 늘려 조선 통치자금으로 삼는 데 있었다.

토지 강탈에 목적이 있었으므로 조선 전래의 토지소유제도는 봉건적인 것으로 부인해야 했다. 조선의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田) ‘양전(量田)’조항은, “모든 토지는 6등급으로 나누어 20년마다 한 번씩 다시 측량한 뒤 토지대장을 만들어 본조(本曹: 호조)·본도·본 고을에 각각 보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토지 매매의 기한[賣買限]’조는 “토지와 가옥의 매매는 15일을 기한으로 하되 변경시키지 못하며 모두 100일 이내에 관청에 보고하고 확인서[立案]를 받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조선 후기 노론 일당독재가 계속되면서 토지대장에서 누락시킨 은결(隱結)이 늘어났지만 대부분의 토지는 조선의 이런 토지제도에 따라 관리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런 토지소유 관계를 봉건적이라고 무시했다.

토지조사 사업의 가장 큰 문제는 수조권(收租權)을 무시한 데 있었다. 세금을 거두는 권리인 수조권이 왕실 또는 국가기관에 있는 토지가 공전(公田), 개인에게 있는 토지가 사전(私田)이었다. 그런데 수조권은 국가에 있지만 실제로는 경작자가 대대로 세습하는 사유지인 민전(民田)이 상당했다. 일제는 이런 다양한 형태의 토지소유관계를 무시하고 단순하게 왕실·관청에서 세를 거두었으면 국유지, 개인이 세를 거두었으면 사유지라는 이분법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상당수 사유지가 국유지로 돌변해 조선총독부 소유가 되었다.

신고제를 채택한 것도 제도의 맹점을 이용해 토지를 가로채려는 간계였다. 토지조사령 제4조는 “토지 소유자는 조선총독이 지정하는 기간 내에 그 주소, 씨명(氏名) 또는 그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地目), 자번호(字番號: 땅의 번호), 사표(四標: 사방 경계 표시), 등급(等級), 지적(地籍), 결수(結數)를 임시 토지조사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신고방식이 대단히 복잡할 뿐만 아니라 관습적인 토지소유의 경우 이런 문건을 만들기 어려웠다.

일부 친일 성향의 사대부들과 모리배들은 이런 토지는 물론 마을의 공유지도 자신의 소유라고 신고했는데, 조선총독부는 이들을 식민통치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특혜처럼 인정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반면 식민통치체제를 거부하는 반일 사대부나 양민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신고를 거부하면 조상 전래의 토지를 빼앗길 상황이었다. 전라도 장성에 거주하던 변만기(邊萬基)는 봉남일기(鳳南日記)에서 ‘토지조사 사업 때 친일파들의 농간으로 조상 전래의 집과 토지를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황주 변씨 문중은 종회(宗會)를 열고 공동으로 대처해 끝내 피탈(被奪)을 모면했다’고 전하고 있다.

양반 사대부들도 토지를 빼앗기는 판국이니 일반 상민들이야 말할 것이 없었다. 소유지의 사방에 세우는 푯말이 사표(四標)로서 이른바 ‘총독부 말뚝’이었다. 면장·이장 등의 입회 아래 토지를 답사해서 사방에 세워야 했는데, 친일 모리배가 사표를 세웠는데 항의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대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그래서 대일 항쟁기 때 ‘총독부 말뚝’이란 용어는 무리하게 남의 것을 차지하려는 욕심 많은 자들에 대한 야유로 널리 사용되었다.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한다는 이 사업 과정에서 황실·관청 소유 토지는 물론 신고에서 누락된 토지, 수조권은 국가에 있었지만 사실상 개인 소유였던 토지들이 대부분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관습적 소유관계와 마을 공동 산이 많았던 임야의 경우 더욱 넓은 면적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갔다.

1918년 11월 2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총독부는 토지조사사업의 성대한 종료식(終了式)을 거행했는데, 이 사업으로 조선총독부가 차지한 토지와 임야가 전 국토의 40%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였다. 9만9400여 건의 토지소유권 분쟁 중 65%에 달하는 6만4500여 건이 국유지에서 발생했다. 조상 전래로 내려온 사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

토지조사 사업을 거치며 많은 자작농이 전호(佃戶: 소작농)로 전락했다. 토지조사 사업 결과 자가(自家) 경작과 전작(佃作)을 겸하는 반전호(半佃戶) 농가, 순수한 전호(佃戶)를 합친 비율이 전체 농가의 77%에 달했다. 약 3%에 불과한 전주(田主)층이 77%의 전호(佃戶)를 지배하는 수탈 농업 자본주의 사회가 형성되었다.

가장 큰 전주(田主)는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였다. 토지조사사업이 끝날 무렵인 1918년께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는 설립 당시의 1만7000여 정보에서 7만4000여 정보로 4배 이상 늘었으며, 지배하는 전호(佃戶)가 15만여 명에 달했다. 토지조사 사업에는 지세(地稅) 수입을 늘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그 결과 과세지 총면적이 424만9000여 정보로서 종래의 286만7000여 정보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났고, 지세는 내국세 총액의 약 40%에 달하게 되었다.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으로 조선총독부의 재산을 대거 늘리고 세입도 대폭 확충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둔 것이다.

토지조사 사업이 끝난 이듬해 전 민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일제의 폭력적인 토지수탈 사업에 대한 전 민족적 반감이 팽배했고, 이것은 3·1운동에 일반 민중이 대거 참가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교육권 뺏은 일제, 민족사학 1217곳 중 1175곳 퇴출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8호 | 20111001 입력
우리 사회의 문제 가운데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부분들은 일제 식민정책에 그 뿌리가 있는 경우가 많다. 교육 문제도 그중 하나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세운 관학(官學)이 현행 한국 교육시스템을 주도하는 기형적 뿌리는 일제 식민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결과다. 사학(私學)의 설립·운영에 대해 엄격한 제한을 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한국학생 교육 장면, 일제는 ‘조선교육령’에서 충성스럽고 양순한 신민을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규정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식민통치 구조
④ 교육 장악


일제는 대한제국 강점 후 한국사·한국어·한국지리에 관한 지식을 위험하게 보았다. 조선총독부관보(官報:1910년 11월 19일)경찰월보(月報:1910년) 등에는 총독부에서 판매를 금지시키거나 압수한 서적의 목록이 나오는데, 초등 대한역사(大韓歷史) 대동역사략(大東歷史略) 같은 역사서와 국문과본(國文課本) 같은 국어 관련 서적이 들어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은 1920년 출간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일제는) 우리의 역사·국어·국문을 힘써 금지시키고 있다. 학교 교사인 최창식은 국사를 저술하고 보자기에 싸서 감추었을 뿐 수업 때 자료로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일본인의 정탐에 걸려 금고 1년형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최신대한신지지(最新大韓新地誌) 같은 지리서들도 금서였다. 한국인들이 한국사·한국어·한국지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 식민통치가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 교육시스템을 철저하게 장악해야 했다.

1 조선교육령 시안. 일제는 한국인이 설립한 대부분의 사립학교를 체제 위협 요인으로 봤다. 2 조선총독부 학무과장 구마모토 이케루요시. 동경제대사학과 출신을 학무과장으로 임명한 데서 일제의 검은 의도가 엿보인다.
구한말은 교육전쟁 시기이기도 했다. 항일인사 대부분은 학교 설립 경험이 있었다. 안중근은 1906년 황해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했고, 망국 직후 만주로 망명한 이상룡과 김동삼도 1907년 경상도 안동에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했다. 심산 김창숙도 1909년 경상도 성주에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설립했다. 협동학교는 백하 김대락의 사랑채를 확장한 것이고 성명학교는 기존의 청천서당을 활용한 것이다. 교육의 뜻이 중요했지 학교 부지나 교사(校舍)가 중요하지 않았다.

구한말에는 국가 차원에서도 각종 학교를 설립했다. 기존의 성균관과 사학(四學) 외에 1895년 갑오개혁 와중에 한성사범학교와 외국어학교 및 소학교 등을 설립했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1896년 6월에는 러시아어[露語] 학교를 개설했다. 또 각종 실업학교를 개설해야 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와 상공(商工)학교를, 이듬해 9월에 광공학교(鑛工學校)를 개설했다. 이런 관립학교 이외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배재·이화·숭실·양정학교 등도 있었다.

그러나 애국지사들과 지방유지들이 설립한 사립학교가 가장 많았다.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보호 및 병합(朝鮮の保護及倂合)은 ‘1908년 경성 시내에 약 100여 개의 사립학교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5000여 개, 20만여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면서 “서당의 수는 만(萬)으로 헤아린다”고 덧붙이고 있다.

일제는 1906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한 후 사립학교 장악에 나섰다. 1908년 8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에게 칙령 제62호로 ‘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을 반포하게 했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때 사립학교가 각 군에서 설립되었는데 교과서를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술했으므로 나라가 망한 것을 분통하게 여겨 모두 비슷한 내용을 서술하였다…일본인들은 그것을 싫어하여 이재곤에게 그런 글을 쓴 사람을 제재하도록 칙령을 내렸다”고 ‘사립학교령’ 반포의 배경을 전한다.

‘사립학교령’ 제2조는 “사립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자는 좌(左)의 사항을 구비해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 ‘사립학교령’의 대표적인 독소조항은 제2조 학교의 재산에 관한 부분으로서 그 3항은 ‘학교 부지와 학교 교사(校舍)의 평면도’였고, 5항이 “기본 재산과 기부금에 대하여 증빙서류를 첨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큰 자본이 없는 사람은 학교를 설립할 수 없게 만든 것인데, 현행 대한민국 학교 설립 요건도 이와 비슷해 그 잘못된 뿌리가 ‘사립학교령’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제9조는 “사립학교의 설비, 수업 및 기타 사항에 대해서 부적당하다고 인정될 때 학부대신은 그 변경을 명령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또한 설립자, 학교장 및 교원의 이력서를 제출하게 해서 반일 성향 인사들을 교육에서 배제시켰다.

‘사립학교령’ 제8조는 “다음에 해당하는 자는 사립학교의 설립자, 교장 및 교원이 되지 못한다”는 것으로서 ‘금옥(禁獄) 이상의 형에 처했던 자’ ‘징계 처분을 받고 면관(免官)된 자 중에 1개년을 지나지 않은 자’ ‘교원 허가장을 환수 당하고 2년이 지나지 않은 자’ ‘성행(性行)이 불량하다고 인정되는 자’라고 폭넓게 규정했다. 반일 인사들은 물론 ‘성행이 불량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속했다. 제10조는 “다음 경우에 학부대신은 사립학교의 개폐를 명령할 수 있다”며 ‘1. 법령의 규정에 위배될 때. 2. 안녕 질서를 문란케 하거나 풍속을 괴란(壞亂)할 우려가 있을 때… 4. 학부대신의 명령을 위반할 때’라고 규정했다. 반일 비슷한 교육만 시켜도 강제 퇴출시키겠다는 의도였다.

더 큰 문제는 “기존에 설립된 사립학교도 모두 ‘사립학교령’ 시행일로부터 9개월 내에 본령 규정에 준해서 학부대신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제17조의 재심사 규정이었다. 기존에 설립된 모든 사학도 다시 인가를 받아야 했다. 서양 선교사들이 반발하자 조선통감부는 “서류 작성의 수고만 해달라”고 무마했다. 그 주요 과녁은 한국인이 설립한 사립학교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양 선교사들이 신청한 종교 사학 778개 교(校)는 모두 인가되었지만 한국인들이 신청한 1217개 교 가운데 42개 교만 인가하고 1175개 교를 불인가하거나 퇴출시켰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8년 12월 통감관저에서 열린 이듬해의 예산심의회에서 각 도에 1개씩 간이 실업학교를 설립하자는 학무대신 이재곤의 청에 “한국의 실업이 과연 실업학교 졸업생을 필요로 할 정도로 발전했는가?”라고 반대했다고 전한다. 실업학교를 통해 한국인 사업가가 배출될 것을 꺼린 것이다.

한국을 강점한 이듬해인 1911년 8월 23일 조선총독부는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을 반포하는데 제2조가 “교육에 관한 칙어의 취지에 기초한 충량(忠良)한 신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本意)로 한다”는 것이었다. 대일본제국에 충성하는 양순[忠良]한 신민을 기르는 것이 교육 목적이 되었다. 1911년 10월 20일에는 조선총독부령 제114호로 ‘사립학교 규칙(私立學校規則)’이 반포되면서 사학에 대한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대한제국 학부(學部)는 사라지고 조선총독부 산하 총무부·내무부·탁지부·농공상부·사법부의 5부 중에 내무부 소속의 일개 학무국(學務局)으로 격하되었다. 내무부 학무국 산하의 2개 과가 전체 교육사항을 관장했다. 학무국의 핵심인 학무과장은 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의 구마모토 이케루요시(<9688>本繁吉)였다. 구마모토는 나중에 대만의 학무국장으로 부임해 대만 식민교육을 총관장하는데 동경제대 사학과 출신을 조선총독부 학무과장으로 임명한 저의는 분명했다.

그가 남긴 구마모토문서(<9688>本繁吉文書)조선편(朝鮮篇)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데, 그는 강제 병합 직후인 1910년 9월 8일 총 12장으로 구성된 ‘교화의견서(<6559>化意見書)’를 비밀문서로 총독부에 제출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순량화(順良化)시켜야 한다면서 ‘철두철미하게 조선은 일본 민족의 발전을 위한 식민지로서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인 초등학교의 수업연한은 6년이지만 한국인 학교는 4년이었고, 중등학교도 일본인 학교는 5년이지만 한국인 학교는 4년이었다. 나라가 근대화되면 사학이 늘어나지만 일제 때는 거꾸로였다. 1908년 5000여 개였던 사립학교는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인 1910년 5월에 1973개 교로 줄었고, 1914년 5월에는 다시 1244개 교로 줄어들었다가, 1915년 5월에는 1154개 교로 다시 줄어들었다. 1907년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1912년 강제 폐교)와 김구가 교장으로 있던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1911년께 강제 폐교) 등이 이 과정에서 모두 폐교되었다.

일제 관학교육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은 서당으로 몰렸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1917)에 따르면 1911년의 서당 수는 1만6540개에 학생 수는 14만1604명이었는데, 1917년에는 2만4294개에 학생 수가 26만4835명으로 늘었다. 서당 재학생의 숫자를 세밀하게 파악할 정도로 일제는 서당 교육도 위험시했고 드디어 1918년 서당규칙(書堂規則)을 반포해 서당도 통제했다. 한국인들에 대한 교육 자체를 위험하게 본 것이 일제의 식민지 교육철학이었다.

 

 


 
 

유곽·공창 도입한 이토 … ‘색계’로 한국을 타락시키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9호 | 20111008 입력
일제는 우리 밤 문화도 크게 바꿔놓았다. 일제 침략사를 연구했던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처럼 일본은 조선의 밤 문화를 창기(娼妓)문화로 타락시켰다. 우리 사회가 술과 여자에 빠질수록 독립운동에 나서지 않을 것이란 계산도 한몫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을 많이 했다. 일본식 유곽 문화가 퍼지면서 기예 중심이던 조선의 밤 문화는 매춘 중심의 하급 문화로 전락했다. [백범영-백귀야행(百鬼夜行), 43×99㎝, 화선지에 수묵담채, 2011]
식민통치 구조
⑤ 공창(公娼)


대한제국은 1895년 갑오개혁 때 관기(官妓) 제도를 혁파했다. 이로써 관기는 국가의 예속에서 해방되어 자유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한 해 전인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관기 혁파는 무의미해졌다.

1894년 6월 해군 중장 이도(伊東祐亭)가 선발대를 이끌고 서울에 온 것을 필두로 일본군이 속속 진주하자 일본 거류민회는 묵정동에 대지 70평을 구입해 유곽(遊廓)을 만들었다. 군대 진주와 더불어 유곽을 만드는 일본군의 이런 전통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뿌리인 셈이다. 러일전쟁으로 일본군이 대거 증파되면서 이 유곽은 8300여 평으로 크게 확대된다. 이 유곽지대가 일종의 공창(公娼)지대였다. 공창이 확산되는 데 큰 공헌을 한 두 인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일진회의 송병준(宋秉畯)이었다.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종합월간지 개벽(開闢) 48호(1924년 6월호)는 경성의 화류계란 흥미로운 기사를 싣고 있다. 필자인 일기자(一記者)는 송병준을 색작(色爵), 이토를 색귀(色鬼)라고 표현하고 있다. 송병준이 망국 후 자작(子爵) 작위를 받았다가 1920년에 백작(伯爵)으로 승진한 것을 그의 엽색(獵色) 행각에 빗대 색작이라고 비꼰 것이다. 송병준은 1900년 10월 일본인 첩 가쓰오(勝女)를 시켜서 요릿집 청화정(淸華亭)을 열었다가 1906년에 개진정(開進亭)으로 확대했다. 충무로 2가의 개진정은 양식까지 제공하던 요릿집으로서 친일파들의 단골 회식장소였다.

이토는 1906년 3월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할 때 육군 소장 무라다(村田淳)와 해군 소장 미야오카(宮岡直記), 통감부 외무총장 나베시마(鍋島桂次郞) 같은 공식 수행원뿐만 아니라 4명의 화류계 여성들도 데리고 왔다. 도쿄 니혼바시(日本橋) 출신의 오카네(お柳), 표면상으론 이토의 전용 간호사지만 실제로는 정부였던 오류우, 비파(琵琶)의 명인 요시다 다케코(吉田竹子), 도쿄 신바시(新橋) 출신의 게이샤 사다코(條子)였다. 이토는 사다코를 4500원의 1년 출장 화대를 주고 데려왔는데, 당시 쌀 한 가마 값은 5원 정도였다. 그래서 주한 일본인들도 이토를 ‘풍류 통감’이라고 불렀다.

이토가 통감으로 부임하자 시모노세키 시절 이토의 이웃이었던 닛다(新田又兵衛)가 한국으로 건너와 남산동에 천진루(天眞樓)를 열었다. 천진루 연회에서 닛다는 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대장과 무라다(村田淳) 소장 사이에 앉아 ‘닛다(新田) 중장’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토는 “취해서 미인의 무릎을 베고 눕고, 깨어서 천하의 권력을 잡는다(醉臥美人膝,醒掌天下權)”는 한시(漢詩)를 지을 정도로 여자·술과 정치를 동일시했던 인물이었다.

임종국 선생이 밤의 일제 침략사에서 ‘일제는 한 손에 대포와 한 손에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고 말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비판적인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는 일본 통치하의 조선(日本 統治下の朝鮮:1971, 번역서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통치 해부)에서 “병합은 그 경과로 보더라도 일본군의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한국 상층의 일부를 매수해서 이루어진 것이 명백하다”라고 쓰고 있는데, ‘한국 상층 일부’를 매수하는 방법이 술과 여자였던 것이다. 이토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료들을 초청해 연회할 때 게이샤 한 명을 각각 앉혀 대접하게 했다. 일제가 경의선 부설권을 얻기 위해 내부대신 이재완(李載完:망국 후 자작 수여)에게 거금 5만원을 준 것도 이런 술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일본이 사실상 공창(公娼)을 허용하면서 조선의 기생들은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뉘게 된다. 그 유래는 분명치 않지만 갑오개혁 때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관에서 풀린 기생들이 자신들을 몸 파는 기생들과 구분하기 위해 나눈 것으로 짐작된다. 일패는 과거의 관기들로서 몸은 절대 팔지 않고 가무를 선보였던 예인(藝人)들이다. 이들 중에 생활고에 시달려 은밀하게 매춘도 하는 기생들이 이패였다. 이패를 ‘숨어 있는 군자’라는 뜻의 은군자(隱君子), 또는 ‘은근짜(慇懃-)’라고 불렀는데 그만큼 몸을 파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뜻이다. 삼패는 돈만 있으면 아무나 안을 수 있는 창부(娼婦)로서 세칭 가무 못하는 ‘벙어리 기생’이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기생은 대부분 3패에 속하는 저질들이었다. 이런 일본의 저질 밤 문화가 퍼지자 1908년 관기(官妓) 출신들이 한성(漢城) 기생조합을 만들었다. 한성 기생조합은 유부녀 기생들의 모임으로서 기예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 예인들의 조합이었다. 그러자 송병준이 평양 출신의 남편 없는 기생들을 주축으로 만드는 것이 다동(茶洞) 기생조합이었다. 기생조합의 명칭이 권번(券番)으로 바뀌면서 다동 기생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이 된다.

1929년도 조선은행 회사조합요록(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에는 1923년 창립한 경성권번이 자본금 2200원의 합자회사로 버젓이 등재되어 있는데 사업 목적은 ‘예기(藝妓)의 양성, 유흥업’으로 적고 있다. 일제가 공창제도를 버젓이 운영했다는 뜻인데, 경성권번의 대표 홍병은(洪炳殷)은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사무를 보던 인물이었다. 영·호남 출신 기생들이 주축인 한남(漢南)권번이 있었고 경화(京和)권번도 있었다. 경화권번은 조선권번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그 대표 하규일(河奎一)도 송병준의 대정권번에서 감독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송병준을 색작(色爵)이라고 부른 것은 이런 까닭이 있었다.

하규일이 송병준의 심복 안순환(安淳煥)과 충돌한 후 독립해서 차린 권번이 경화권번인데, 안순환의 이력도 특이하다. 경시통감(警視總監) 와카바야시(若林賚藏)가 2대 통감 소네(曾<79B0>荒助)에게 보낸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안순환은 궁중의 음식을 담당하는 전선사(典膳司) 상선(尙膳)으로 있으면서 이용구·송병준의 일진회에 가입한 자였다. 이런 안순환이 궁중에서 나와 1908년 12월 지금의 광화문 일민미술관 자리에 차린 요릿집이 한세월을 풍미하던 명월관(明月館)이었다.

일제 진출 이후 서울의 밤 문화는 이토 같은 색귀 통감과 송병준 같은 친일 색작 등이 주도하면서 과거의 기예(技藝) 중심의 품격은 사라지고 삼패 중심의 천박한 매춘으로 전락했다. 일패 기생들 중에는 애국자도 적지 않았다.

매천야록 1906년조는 미모에다 서예도 잘했던 진주(晋州) 기생 산홍(山紅)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이지용(李址鎔:망국 후 백작 수여)이 첩으로 삼으려고 하자 산홍은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비록 천한 기생일지라도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꾸짖어 구타당했다는 것이다. 이지용은 1904년 러일전쟁 때 외무대신 임시서리로 대한제국의 영토를 일본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허용하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해준 대가로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 1만원을 받았는데, 이때 산홍에게 주려고 한 돈이 1만원이었다는 뒷얘기도 있다.

주요한(朱耀翰)이 발행하던 동광(東光) 28호(1931년 12월호)에는 한청산(韓靑山)이 쓴 기생철폐론이 실려 있다. “옛날은 관기(官妓)라고 해서 군수 사또가 아니면 데리고 놀지 못하던 기생이 하루아침에 양반정치가 무너지고 섬 건너 양반정치가 된 뒤로 아주 철저히 민중화가 되어 이제는 개쌍놈의 아들이라도 황금만 가졌으면 일류 명기(名妓)를 하룻밤에 다 데리고 놀 수 있게 되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양반·쌍놈 등의 인식에는 문제가 있지만 예기 중심의 고급문화가 매춘 위주로 천박해졌다는 문제의식은 맞는 말이었다.

앞에 인용한 경성의 화류계는 “많은 권번을 일본인 또는 준(準)일본인이 경영한다. 그의 세력이 화류계에서까지 위대한 것은 참 주목할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진출해 전개한 사업은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이 주류였다. 임종국 선생은 1930년 무렵 한국인은 4만3700여 명에 한 명꼴로 기생이 있었지만, 일본인은 1400여 명에 한 명꼴로 서른 배 이상 많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기생철폐론은 “기생이 없어져도 내외 술집이 있고 카페가 있고 은군자(隱君子)가 있고 유곽(遊廊)이 있고 무엇이야 없으랴. 그러하나 공공연하게 사회가 허락하는 소위 요리관 교제만 없애도 우리 사회의 능률이 얼마나 증진되랴”면서 기생 철폐론을 주장했다.

술자리에 여자를 동석시키는 현재의 잘못된 밤 문화도 알고 보면 그 뿌리는 일제시대에 있다. 1919년 기생들이 3·1운동에 대거 동참한 것은 밤 문화까지 잠식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