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사회/파헤친 歷史

왜 박 전 대통령 죽이라 했는지, 남에서 살아보니 알겠더라고

淸山에 2011. 10. 10. 18:00

 

 
 
 

“왜 박 전 대통령 죽이라 했는지, 남에서 살아보니 알겠더라고”

[중앙일보]입력 2009.10.24 03:01 / 수정 2009.10.24 03:33

박정희 노렸던 무장공비 김신조 41년 전 ‘공비 루트’에 서다

북악산의 호경암 바위에 박힌 총탄 자국은 41년 세월이 무색하게 뚜렷했다. 17일 호경암을 찾은 김신조씨가 총탄 자국을 가리키고 있다. [오종택 기자]
서울 성북구와 종로구 경계에서 시작돼 성북천 발원지로 이어지는 1.9㎞의 등산로. ‘북악산 김신조 루트(Route)’로 불리는 이 등산로는 41년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됐었다.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31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감행했다. 김신조 루트에 위치한 호경암에서 공비 3명이 사살당했다.

북악 골프연습장 앞 산책로 입구의 파란색 철문은 비무장지대(DMZ)를 연상케 한다. 그래서 김신조 루트는 ‘서울 속 DMZ’라 불렸다. 24일 그 철문이 열린다. 김신조 루트, 정식 명으로 ‘제2북악스카이웨이 제2코스’가 민간인에게 개방되는 것이다.

개방을 일주일 앞둔 17일, 목사가 된 김신조(67·서울성락교회)씨와 그 길을 찾았다. 그는 그 길에서 남한 생활 41년과 기억 저편의 북한에 대해 얘기했다. 오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다. 서울 성북구청은 수도방위사령부와 협의를 거쳐 군용 순찰로를 등산로로 개조했다. 이날 답사에는 지난 2년 동안 군 당국과 등산로 개방 협의를 했던 서찬교 성북구청장이 동행해 산책로 상태와 안전시설을 점검했다. 다음은 김 목사와의 일문일답(※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

-목사께서 닫은 길이 41년 만에 열렸습니다.

“나는 이 길로 퇴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내가 이 길을 따라 도망쳤다면 동료처럼 저 세상 사람이 됐을 겁니다.”(※당시 무장공비들은 청와대 앞 교전에서 패한 뒤, 삼삼오오 흩어져 퇴각했다. 김 목사는 인왕산을 넘어 도망치다 홍제동에서 붙잡혔다.)

-당시 습격 사건이 영화 ‘실미도’에서 재연돼 화제가 됐습니다.

“내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나랑 닮았더라고. 그런데 실미도에서의 (한국군)훈련량은 너무 적어요. 그래 가지고 김일성 죽였겠나….”

-68년 생포 당시 ‘김신조식 훈련’이 화제가 됐었지요.

“특수부대에서의 훈련은 ‘생존’에 관한 것이었지. 해발 1000m 이상 되는 산에 혼자 들어가 살아남는 훈련이었어요. 그런 훈련을 받는 10만 명의 요원 중 최정예 31명을 모아 124부대를 만든 겁니다. 청와대로 보내기 위해서요.”

등산로를 20여 분쯤 올랐을까, 호경암이 눈에 들어왔다. 높이 3m가 넘는 바위 중간쯤에 지름 5㎝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다. 구멍은 총격의 흔적이었다. 호경암에 서면 멀리 여의도에서 김포까지 눈에 들어왔다. 김 목사가 바위에 난 총탄 자국을 만졌다.

“카빈이나 M-16 소총으로 쏜 거 같은데…, 세월의 풍파 때문에 구멍이 좀 커졌겠지.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이렇게 살아 있으니….”

-북에 있는 가족이나 동료와 연락이 닿은 적이 있나요.

“부모님이 인민재판에서 공개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형제들은 어찌됐는지 전혀 모르고. 몇 년 전인가, 국정원에서 ‘얼굴을 알아보겠느냐’고 사진을 가져왔어요. ‘청와대 습격 사건의 동지’였어. 별 4개를 달았더군. 배가 잔뜩 나왔더라고.”(※김 목사는 북으로 도주한 동지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정보당국은 그 인물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측근인 박재경 인민무력부 부부장으로 파악하고 있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어떻게 보십니까.

“당시 난 김일성이 왜 박 대통령을 죽이려는지 몰랐어요. 살아보니 알겠더라고. 가난한 나라가 부자가 되는 게 두려웠을 게야. 경제가 살면 돈이 들어오고, 무기를 살 것 아닌가. 김일성이 볼 때 남한 공산화를 위해서는 박 대통령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본 거겠지. 난 박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남파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존경하게 됐어요.”

-한국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두고 평가가 엇갈립니다.

“고도 경제성장의 업적은 인정해야지요. 요즘 경제는 위기고, 북한은 끊임없이 도발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이념적 대립과 빈부격차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고요. 이런 때일수록 사회를 바로잡고 미래를 보여주는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정치가 바로 서야지요. 남한 사회가 분열되면 김정일을 돕는 셈입니다.”

-북한과의 긴장은 계속됩니다. 얼마 전 ‘임진강 댐 방류 사건’으로 인명 피해가 났습니다.

“일단 건드려 보고, 그 다음의 반응을 보는 전술이지. 그런데 남한에서는 피해 보고 나서도 ‘괜찮으니 그래도 협력하자’는 식으로 나오면, 그건 북한에 말려드는 거예요. 대북 정책에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사건이 재발이 안 되지요 .”

-요즘 국민들의 안보의식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6·25 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젊은이도 많다고 하잖아요. 제 이름도 그렇고, 대한항공 폭파 사건의 김현희도 그렇고 점점 잊혀져 갑니다. 자신이 먼저고 이웃과 국가는 나중이 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무장공비 김신조가 목사가 된 사실에 많은 사람이 놀랐습니다.

“나 혼자 붙잡힌 뒤 중앙정보부 주선으로 건설회사에 들어갔어요. 12년 다니다 나왔습니다. 교회에 나가게 된 건 순전히 마누라 덕분이지. 81년인가, 마누라가 자기 소원이니 교회 한번 나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마누라 생일(4월 30일)에 가봤는데, 마음이 편해져서 계속 나가게 됐지.”

-목사가 된 결정적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80년대 반공교육 많이 했잖아. 초등학생이던 애들이 집에 오더니 ‘아빠 이름이 교과서에 나온다’고 너무 싫어하더라고. 그땐 안기부(국정원의 전신)와 경찰의 감시원들이 늘 근처에 있었어요. 정부기관에서 전화가 오면 아이들의 목소리와 태도가 싸늘하게 변하곤 했지. 그 모습을 보고 ‘김재현’으로 개명을 했지. 그러곤 이사를 가서 새로 시작했어. 남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목사의 길을 택했고요.”(※김 목사는 1남1녀를 두고 있다. 딸이 73년생, 아들이 75년생이다.)

-정부 감시원이 지금도 근처 에 있을까요.

“없는 거 같아. 김영삼 정부까지는 분명히 있었고, 김대중 정부부터는 주변에서 인기척이 사라졌어요. 감시원이 사라지면서 나도 ‘이제 남한 사람이구나’ 하고 느꼈어요.”

산행을 마친 뒤 김 목사는 “이처럼 경치가 좋은 곳을 못 오게 해서 미안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마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41년 전의 김신조였으면 15분이면 충분할 거리를 1시간이나 걸었구먼.” 

이현택 기자

 

 

 


 


*
 

“5·16은 근대화 혁명이라고 국내학자들도 이젠 인정합니다”

[중앙일보]입력 2009.10.24 02:21 / 수정 2009.10.24 03:33

9년3개월 박정희 최장수 비서실장 김정렴

김정렴씨는 좌골신경통 때문에 집에서도 지팡이를 짚는다. 그는 “박 대통령 기념관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자질 못해 신경통이 도졌다”고 말했다. [김경빈 기자]
‘비서실장 9년3개월’은 전 세계 대통령제 국가에서 찾기 어려운 장수 기록이다. 대통령의 신임에 김정렴은 열정적인 보필과 철저한 자기 관리로 보답했다. 재임 중 그에겐 조그마한 잡음도, 부패도 없었다. 보필은 박 대통령 사후에도 계속됐다. 30년 동안 그는 공직도, 돈 버는 자리도 맡지 않았다. 지금 맡고 있는 박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직이 전부다. 그는 박 대통령의 업적과 인간적인 면, 그리고 한국의 경제개발사를 소개하는 책 6권을 내는 데 여생을 바쳤다.

지난 20일 김씨의 서울 청담동 자택. 거실엔 액자 2개가 놓여 있다. 박정희·육영수의 사진인데 부부가 서명해서 선물한 것이다. 김씨는 “나는 혁명 동지도 아닌데 대통령께서 ‘김정렴 동지’라고 쓰셨다”고 좋아했다.

-가장 충격적인 일은 아무래도 육 여사 피살 아닙니까.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여사님이 문세광의 총에 맞았습니다. 수술을 했지만 출혈이 심해 여사께서 운명하셨습니다. 주치의와 함께 제가 보고를 드리자 대통령께서는 둘째 딸 근령씨와 지만군을 껴안고 대성통곡을 하셨습니다. 그런 대통령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김씨는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마구 눈물을 흘렸다. 그러곤 일어나 티슈박스를 가져왔다.)

-최근 ‘리서치 앤 리서치’ 조사에서 ‘나라 발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전직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압도적인 1위(75.6%)로 꼽혔습니다. 2위 김대중은 12.9%, 3위 노무현은 4.4%였고요. 다른 조사에서도 대개 그렇습니다. 이제는 평가가 제대로 되는 건가요.

“아직도 멀었어요. 서거 후 10년 정도는 격하가 심했습니다. 신군부 정권이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3공 권력자들을 부정부패로 몰았습니다. 국민 사이에서도 독재만 부각됐고요. 오히려 외국에서 평가가 시작됐어요. 쿠데타에다 인권탄압 했다고 하는데 개도국 중에서 경제개발을 제일 잘했다고 하니 외국 학자들이 비결을 연구한 거지요. 세계은행을 중심으로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 연구 결과가 이어졌어요. 그런 것에 영향을 받아 국내 연구도 시작되긴 했는데 10년밖에 안 됐어요. 그러니 박 대통령 평가는 뚝 떨어졌다가 이제 겨우 중간쯤 올라온 겁니다.”

-특히 노무현 정권 때 폄하가 심했지요.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는 “박정희가 밥을 많이 지어놓았다고 하지만 후임 대통령들은 장작이 모자라 밥 짓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이백만 청와대 홍보수석은 “박 대통령이 고교 교장이라면 노 대통령은 대학총장”이라고 했습니다. ‘효자동 이발사’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에선 박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지요.

“노무현 정권 주변에 있는 위원회·연구기관 사람들이 좌파 아닙니까. 그 사람들은 어떤 도그마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독재를 했으니 연구할 가치가 없다’ 이런 생각 말이죠. 그런 좁은 생각에서 벗어나 공부를 크게 해야지요. 세계가 왜 박 대통령을 공부하겠습니까.”

-5·16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5·16 군사혁명은 근대화 혁명입니다. 단순히 권력을 잡기 위한 게 아니라 국가의 근대화를 위해서 혁명을 한 거란 애기죠. 좌파 교과서를 시정하기 위한 ‘교과서 포럼’에서 회원 모두가 5·16이 근대화 혁명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럼이 쓴 고교교과서 ‘한국 근·현대사’와 ‘한국 현대사’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9년3개월간 비서실장으로 중용했던 김정렴씨를 주일대사로 보내면서 1979년 1월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김씨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중앙포토]
-‘박정희 근대화 혁명’은 민중에 의한 게 아니라 지도자에 의한 혁명, 즉 ‘위로부터의 혁명’이라는 평가가 있질 않습니까.

“트림버거(Ellen Kay Trimberger)라는 미국 학자가 1978년에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 이란 책을 썼습니다. 시민사회가 채 성숙되지 않아 민주적 토론을 통해 일을 진행시킬 여유가 없을 때 위로부터의 지도가 불가피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분석한 거지요. 그는 네 가지 혁명을 꼽았는데 일본의 메이지 천황, 터키의 케말 파샤, 이집트의 나세르, 페루의 벨라스코 장군이지요. 일본 도카이 대학의 하야시 교수가 91년 『박정희의 시대: 한국, 위로부터의 혁명 18년』이란 책을 내면서 박 대통령을 다섯 번째로 꼽았습니다.”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어떤 모습이 가장 많이 떠오릅니까.

“항상 표정이 별로 없으세요. 웃음이나 미소도, 찡그리거나 화내는 것도 거의 없어요. 제가 일을 잘했다고 생각했을 때도 수고했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알았어’라고만 했죠. 그런 대통령이 기분이 좋아 많이 웃을 때가 있어요. 특보들하고 막걸리를 마실 때 새마을운동으로 여기저기가 이렇고 저렇게 좋아졌다는 얘길 들으면 아주 좋아하셨죠.”

-박 대통령은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하지요. 대표적으로 어떤 게 기억납니까.

“그때는 쌀을 아끼느라 혼식과 분식을 장려하지 않았습니까. 박 대통령은 아침밥엔 보리를 30% 섞었고 점심엔 칼국수를 드셨습니다. 저와 부속실장 등 본관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저는 점심때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집무실 책상에서 점심을 때웠지요.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배가 고파 참느라고 혼났어요. 비서들은 누룽지라도 찾으러 식당을 기웃거렸지요.”

-칼국수를 드실 때 공깃밥이라도 한 그릇 같이 드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쌀을 아끼려고 국수를 먹는데 어떻게 밥을 먹나요. 그리고 대통령께서 그렇게 하시질 않는데 제가 어떻게….”

-차지철 경호실장은 점심 때 스테이크를 즐겨 먹었다면서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차 실장이 자기 식당에 나를 여러 번 초대했지만 나는 한 번도 가질 않았어요.”

-개발 독재가 불가피했다고 하지만 권력이 남용된 것도 많지 않습니까.

“유신은 취지도 좋고 경제적으로 성공도 했지만 운용을 잘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라는 제도를 도입했는데 이 긴급조치를 발동할 필요가 없도록 사전에 잘 대처했어야 했는데 긴급조치만 믿고 안이하게 한 게 있어요. 불필요하게 권력이 쓰인 부분이 있는 거지요.”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허진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