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로 청조(淸朝)를 타파하고 2133년에 걸친 황제 체제에 조종을 울린 신해혁명(辛亥革命)이 발생한 지 100주년을 맞는다. 중국은 아직도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으로 나뉘어 있지만 신해혁명의 주역으로 일컬어지는 쑨원(孫文)만큼은 중국과 대만 모두에서 극도의 추앙을 받는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으로부터는 ‘국부(國父)’로,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으로부터는 ‘혁명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양안 모두에서 떠받들어지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세계에서 길 이름으로 가장 많은 것도 쑨원의 다른 이름인 중산(中山)을 딴 중산로(中山路)다. 187개나 된다. 그에 대한 중국인의 절대적 존경심이 엿보인다. 그러나 혁명을 직업으로 삼았던 쑨원의 일생은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유상철 중국연구소 소장
실패한 혁명가인가
1866년 광둥(廣東)성 샹산(香山·현재의 중산시)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이 혁명의 길로 들어선 것은 28세 때인 1894년이다. 벗들과 어울려 시국을 개탄하는 데 관심이 컸던 그는 1894년 청조의 실력자 이홍장(李鴻章)에게 ‘인재양성, 산업진흥’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올린다.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 혁명가로서의 생애를 시작하는 것이다.
쑨원은 1911년 10월 10일 후베이(湖北)성 우창(武昌)에서 신해혁명의 봉기가 올랐을 때 현장에 있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 콜로라도주의 덴버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아침 식사를 하며 신문을 펼치다 우창 봉기를 알았다고 한다. 이후 부랴부랴 짐을 싸 중국으로 왔다. 쑨원 자신이 계획했던 첫 봉기는 1895년의 광저우(廣州) 무장 봉기다. 그러나 계획이 사전에 누설돼 해외로 도망가는 등 이후 신해혁명까지 10여 차례의 거사를 시도했지만 단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한 채 망명과 귀국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신해혁명 뒤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되기도 했지만 무력을 가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1925년 3월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날 때도 “혁명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노력하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혁명은 미완성’이었다. 쑨원은 중국의 독립을 위해 서구 열강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모순된 길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쑨원=중국’이라는 말까지 들으며 오늘날까지 양안 모두에서 숭상을 받는 것일까. 거기엔 쑨원 특유의 탁월한 리더십이 도사려 있기 때문이다.
저항의 리더십
중국에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우스개가 있다. 그러나 쑨원에겐 불의에 항거하는 저항의 정신이 흘렀다. 어려서부터 “나는 제2의 홍수전(洪秀全)이 되겠다”는 말을 했다. 홍수전은 반청(反淸)의 기치를 내걸고 1851년 태평천국(太平天國)을 세운 인물이다. 쑨원은 반만(反滿) 민중투쟁에서 자신을 홍수전의 후계자로 생각했다. 또 13세에 하와이에 유학하며 기독교를 믿게 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선 마을 수호신인 목상(木像)을 파괴해 동네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물론 가족은 목상을 복원하는 돈을 대느라 적지 않은 고생을 했지만. 결국 그는 이홍장에게 개혁을 요구하고 이게 좌절되자 바로 청조 타도의 길로 나서는 것이다.
학습의 리더십
저항의 정신만 있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폭력배로 떨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쑨원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하와이 유학 중엔 영문법에서 학교 전체 2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귀국한 뒤엔 의학을 공부했다. 의학이 인간의 고난을 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94년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의술로 사람을 구제하는 것보다 혁명으로 빈사의 중국을 소생시키는 게 선결 문제”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홍장에게 개혁의 글을 보내게 된 계기다.
그는 혁명자금을 모으고 거사를 계획하는 데 일생을 바쳤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연구하고 프랑스혁명을 공부하는 등 끊임없이 중국 혁명에 도움이 될 것을 학습했다. 주목할 것은 1896년 12월에서 1897년 6월까지 약 반년 동안 런던에 체류할 당시 59일간 박물관에 가 집중적으로 독서를 한 점이다. 이때 그의 유명한 삼민주의(三民主義) 구상의 기초가 다져졌다. 만년엔 레닌의 신경제정책을 공부하기도 했다.
선각의 리더십
쑨원의 깨달음 중 가장 중요하고, 그를 다른 혁명가들과 다르게 하며, 또 그를 신해혁명의 선구자로 올려 놓은 건 그가 주창한 삼민주의 때문이다. 쑨원은 영국에서 삼민주의 구상을 한 뒤 1905년 동맹회(同盟會) 창립 당시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자신의 삼민주의 주장을 내놓게 된다. 그는 삼민주의가 사회주의, 민족주의, 자유민주주의를 한꺼번에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또 다른 깨달음으로 대아시아주의(大亞洲主義)가 있다. 쑨원은 1924년 11월 28일 마지막 공개 강연에서 아시아 약소민족 사이의 대연합을 강조한 대아시아주의를 주장한다. 사실 연설의 핵심은 제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에 대한 경고였다. “(일본은) 서양의 패도(覇道)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인의를 바탕으로 하는 동양의 왕도(王道)를 지킬 것인가”라는.
실천의 리더십
쑨원은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가였다. 청나라 말기 사상가인 옌푸(嚴復)가 무장 봉기를 꾀하는 쑨원에게 말한다. “중국 인민은 지식이 낮은 단계에 있어 공화혁명을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이에 쑨원은 “황하(黃河)가 맑아질 때까지 언제 기다립니까. 당신은 사상가이지만 저는 행동가입니다”라고 반발한다. 그는 혁명을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했다. 광저우 봉기 때는 의사로 번 돈을 모두 쏟아 부었고, 나머지 일생은 미국과 유럽, 동남아 등 세계 곳곳의 화인(華人) 사회를 누비며 혁명을 호소하는 데 바쳤다. 그의 정신은 ‘천하위공(天下爲公)’을 주장한 데서 잘 나타난다. 천하가 황제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닌 모든 이의 것이라는 이야기다. 레닌은 그런 쑨원을 가리켜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처녀다운 순진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했다.
끈기의 리더십
쑨원의 리더십 중 가장 두드러진 점으로 쑨원 연구의 대가인 해럴드 시프린은 끈질김을 든다. “쑨원의 업적을 특징 지운 것은 명석함이라기보다 끈질김이었다”는 평이다. 사실 쑨원은 뛰어난 사상가도 아니며, 뛰어난 혁명가도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31년의 혁명 기간 그를 계속 따라다닌 것은 실패와 좌절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거듭된 봉기 실패에도 그가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지막 눈을 감는 최후의 순간에 나온 그의 유언 역시 ‘혁명은 아직 미완성’으로 ‘단결해 분투 노력하자’는 것이었다. 이같이 일관되게 혁명을 추구하는 자세가 누적적인 효과를 자아내며 중국인들을 각성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평이다.
혁명의 전설이 되다
이처럼 저항의 리더십, 즉 문제 의식을 갖고 있고, 이에 대해 부단히 학습하며, 깨닫고, 행동하되, 그것도 아주 끈질기게 함으로써 쑨원은 마침내 중국 혁명의 전설이 됐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에서는 쑨원을 혁명의 아버지로 부르다 1940년부터는 정식으로 ‘국부(國父)’로 호칭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 정부도 그를 ‘혁명의 선구자’로 기리고 있다.
쑨원이 신해혁명 100년을 맞는 오늘날까지 모든 중국인의 존경을 받는 건 그가 주창한 삼민주의가 당파와 민족을 뛰어넘는 사상이었고, 또 그가 이루고자 했던 공화혁명(共和革命)의 목표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모든 백성의 삶을 발전시키고자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j칵테일 >> 네명의 부인
쑹칭링
쑨원과 쑹칭링(宋慶齡)은 1915년 결혼한다. 쑨원이 49세, 쑹칭링이 23세 때다. 쑨원은 원래 쑹칭링의 언니 쑹아이링( 宋藹齡)에게 마음이 있었다. 쑨원이 일본에 체류할 때 영어 비서가 필요하다고 해 출판재벌 쑹자수(宋嘉樹)가 자신의 큰딸을 보낸 것이다. 그러나 쑹아이링은 1913년 쿵샹시(孔祥熙)와 결혼한다. 이에 둘째딸 쑹칭링을 보내는데 쑹은 쑨원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쑨원을 따르기로 한다. 물론 쑹자수의 반대가 심했다. 나이차가 컸던 것이다. 그는 딸을 중국으로 소환한다. 하지만 유모의 도움을 받아 집을 탈출한 쑹칭링은 일본으로 가 쑨원과 결합한다. 당시 쑨원은 이전의 부인과 정식으로 헤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쑨원의 첫 부인은 마카오에 오래 살아 ‘마카오 부인’으로 불리는 루무전(盧慕貞)이다. 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쑨원은 또 홍콩 출신의 부인 천추이펀(陳粹芬)도 있었다. 그는 쑨원과 헤어질 때 “나는 출신이 한미하고 아는 바가 적어 스스로 물러나고자 한다. 쑨원이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쑨원은 또 일본에도 일본인 부인이 있었다. 슬하에 딸을 두었다. 쑹칭링은 쑨원의 네 번째 부인이자 마지막 부인이다. 쑹칭링, 천추이펀 사이에선 소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