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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넘어서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7)(8)(9)(10)(11)

淸山에 2011. 10. 9. 14:53

 

 

 

 
 
 

“무릎 꿇고 종이 될 수 없다” … 이상룡 일가도 집단 망명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0호 | 20110807 입력
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들려는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미래를 만든다. 나라가 망했을 때 과거를 반성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그런 나라를 건설하는 데 인생을 바친 사람들을 역사는 선각자로 기억한다. 그들에 의해 미래는 보다 정의로워진다.
이상룡의 고택인 안동 임청각. 이상룡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을 팔면 고성 이씨 문중에서 되사기를 반복했던 유서 깊은 종가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⑦ 안동 유림들


1911년 1월 5일 경상도 안동.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은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에 절했다. 그는 망명 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서 “행장을 수습하여 호연히 문을 나서니, 여러 일족들이 모두 눈물을 뿌리며 전송하였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미 만 쉰둘의 나이였다. 그의 집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은 고성 이씨 12세손으로서 영산(靈山)현감을 지낸 이명(李<6D3A>)이 지었는데, 이상룡 망명 후 일제가 독립운동의 정기를 끊는다며 그 앞을 철길로 갈라놓았다. 그만큼 그의 망명이 영남 유림에 준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는 서사록에서 “작년(1910) 가을에 이르러 나라 일이 마침내 그릇되었다…. 아직 결행하지 못한 것은 다만 한 번의 죽음일 뿐이다”라고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의했다. 안동 하회마을과 상주를 거쳐 1월 12일 새벽 2시 추풍령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탔다. 9세손은 학계 일각에서 단군세기(檀君世紀)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고려 말의 문신 행촌(杏村) 이암(李<5D52>:1297~1364)이다. 이런 집안 전통 때문인지 이상룡도 역사에 밝았다.

이상룡. 이상룡은 내각책임제 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총리)을 역임한 저명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서사록에서 “하물며 만주는 우리 단군 성조(聖祖)의 옛 터이며, 항도천(恒道川:횡도촌)은 고구려의 국내성에서 가까운 땅임에랴? 요동은 또한 기씨(箕氏:기자)가 봉해진 땅으로서 한사군(漢四郡)과 이부(二府)의 역사가 분명하다…. 어찌 이역(異域)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훗날 한사군 지역이 한강 이북이라고 왜곡하는데, 이상룡은 마치 그런 사실을 예견했다는 듯이 한사군을 만주 요동에 있었다고 지적했고, 우리 영토라고 바라보았다. 이상룡의 망명도 조직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아들 이준형(李濬衡:1875~1942년 자결)이 쓴 이상룡의 일대기인 선부군유사(先父君遺事)는 “(1910년) 11월에 황만영·주진수가 경성으로부터 와서 양기탁·이동녕의 뜻을 전달하면서 만주의 일을 매우 자세히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만주로 건너갈 계획을 결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회영·이동녕 등이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로 결정한 만주 횡도촌에 합류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이상룡의 손자며느리인 허은 여사는 구술 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시영씨 댁은 이 참판 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허은 여사는 13도 의병연합부대의 군사장이었다가 1908년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한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의 집안 손녀였다. 집단 망명의 선이 안동까지 닿았다는 뜻이다. 추풍령에서 기차를 탄 이상룡은 12일 오후 8시12분 서울에 도착했으니 서울까지 열여덟 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서사록은 1월 13일 “아침에 우강(雩岡) 양기탁(梁起鐸)이 내방했는데, 초면에도 정성스럽고 극진한 모양이 벗이나 다름없다”고 묘사하고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주필 양기탁과 이상룡은 초면이지만 잘 아는 사이였다. 이상룡은 1909년 2월 안동경찰서에 구인돼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신문을 받다가 석방된 후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만들었다. 선부군유사는 “몇 달이 못 돼 지회에 가입한 사람이 거의 수천 명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대한협회가 1909년 일진회와 제휴하는 등 친일 성격을 띠어가면서 안동지회와 충돌했다. 이준형의 선부군유사는 “이때(1909년) 적신(賊臣)의 무리들이 사법권을 일본 정부에 양도했는데, 드디어 경성의 대한협회에 편지를 보내 그 침묵하고 있는 것을 꾸짖고, 또 경성의 협회가 적당(賊黨)과 연합한 것이라 하여 위원을 파견해 논쟁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상룡은 서사록에서 양기탁에게 “경회(京會:대한협회 본회)는 경회 자신일 뿐이었습니다. 그 득실이 지방의 지회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하자 양기탁이 “예, 예”하며 아무 말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상룡은 신의주에 도착해 압록강의 상황을 보고 “일인이 장차 강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으려고 돌기둥을 이미 벌려 세웠다”며 “만약 이 다리가 한번 낙성되면, 연경(燕京:북경)이며 여순(旅順)이며 하얼빈 등지가 모두 하룻길이 될 것이다. (일본) 국력의 부강함이 두려울 뿐 아니라 그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큰 야욕이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뛰어난 역사가답게 이후 일본의 만주 및 중국 본토 침략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룡 자신은 이런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상룡은 “어떤 경우에도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한다(熊魚取舍)’는 것은 예로부터 우리 유가(儒家)에서 날마다 외다시피 해온 말이다”고 말했다. 맹자 ‘고자(告子)’에서 “물고기(魚)와 곰 발바닥(熊掌)을 모두 먹고 싶지만 둘 다 가질 수 없을 때는 곰 발바닥을 갖는다”고 말하고, “생명과 의리를 모두 취할 수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것이다”고 덧붙인 것처럼 선비는 실리 대신에 의를 택한다는 뜻이다.

신의주에 도착한 이상룡은 1월 25일 “저녁 먹은 후에 등불을 들고 (신의주) 정거장에서 기다렸다. 밤든 지 오래되자 과연 일행이 일제히 도착하는 것이 보인다”고 적고 있다. 맏아들 준형이 맨 앞에, 동생 이봉희(李鳳羲) 부자가 맨 뒤에 서서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신의주까지 온 것이다. 이상룡 일가도 이회영 일가처럼 집단 망명이었다. 이상룡이 사라진 후 경찰서에서 여러 차례 조사했고 준형은 경찰서까지 끌려가 조사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가는 1월 27일 발거(跋車:썰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데, 이상룡은 시상이 떠오른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삭풍이/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내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朔風利於劒/<51D3><51D3>削我肌/肌削猶堪忍/腸割寧不悲)” 내 살 도려지는 것보다 나라 잃은 슬픔에 더 애간장이 탄다는 시다. 이상룡은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호연히 나는 가리라(此頭寧可斫/此膝不可奴/…/爲誰欲遲留/浩然我去矣)”라며 비장한 결의로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현에 도착해 이윤수의 객점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1월 29일에 마차 두 대를 사서 횡도촌으로 떠났다. 수레 안에 담요를 깔고 온몸에 이불을 둘러야 할 정도로 추웠는데 이상룡은 “어린 것들이 연일 굶다 못해 병이 날 지경이었다. 좁쌀 두어 되를 사고 솥을 빌려 밥을 지어 먹이니 그 괴로운 상황을 알 만하다”고 적고 있다.

서사록은 2월 7일자에 “냇물을 따라 가다가 10여 리쯤에서 산기슭이 트이고 시야가 넓어진다. 멀리 숲 사이로 지붕 모서리가 들쭉날쭉 보이니 그곳이 항도천(恒道川:횡도촌)임을 알겠다”고 적고 있다. 국외독립운동 근거지 횡도촌에 비로소 도착한 것이다.

횡도촌에는 먼저 망명한 정원하·이건승·홍승헌 같은 강화학파와 이회영 일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룡은 도착 당일 “오후에 김비서장(金賁西丈)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고 적고 있는데, 그가 먼저 망명한 처남인 백하 김대락(金大洛:1845~1914)이었다. 김대락은 만 예순다섯의 노구로 이상룡보다 이른 음력 12월 24일 고향 안동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넜다. 김대락은 가족은 물론 식민의 땅에서 후예를 낳을 수 없다는 뜻에서 만삭의 손자며느리도 동행시켰다.

이상룡이 “이 노인(김대락)이 일전에 증손자를 본 경사가 있어 한편 위로하고 한편 하례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망명길에서 낳은 아이를 식민지 땅이 아닌 중국에서 낳아서 통쾌하다는 뜻의 쾌당(快唐)으로 짓고, 둘째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기몽(麒夢)으로 지었다. 안동의 평해 황씨 황호(黃濩:1850~1932) 일문도 집단 망명에 가담했다.

김대락은 횡도촌에서 학교를 열어 후학들을 길렀는데, 이상룡 일가는 학교 한 칸을 빌려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룡은 서사록 2월 9일자에 “임석호·조재기가 나중에 도착했는데, 그 편에 양기탁이 붙잡혀 갇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전하고 있다.
동토의 조선에서는 105인 사건이란 광풍이 불고 있었다.

 

 

 


 
 

대역 사건, 105인 사건 … 日, 반제 세력 탄압에 혈안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1호 | 20110814 입력
105인 사건에서 검거된 사람들이 공판정에 끌려가고 있다. 일제는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과 무관학교 건설을 분쇄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⑧ 우울한 기운


1910년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민중세력에도 불행한 한 해였다. 1910년께 일본 정계는 크게 두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는 육군과 번벌(藩閥)세력을 대표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중심 세력인데 가쓰라 다로(桂太郞)가 대표였다. 다른 하나는 온건파인 이토 히로부미 세력으로서 그 후계자인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는 입헌정우회(立憲政友會)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가쓰라와 사이온지가 번갈아 수상으로 집권하던 시대를 가쓰라·사이온지(桂園)시대라고 부른다. 제1차 가쓰라 내각은 1901년 6월∼1906년 1월,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은 1906년 1월∼1908년 7월 사이였다. 러일전쟁이나 한국 강점 등은 모두 가쓰라 내각 때 자행된다.

일제의 한국 침략 배경에는 경제적인 목적이 강했다. 1907년께 일본에서 경제공황이 발생하자 야마가타 세력은 군비 확장 및 해외 식민지 개척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 온건파인 사이온지 내각의 하라 다카시(原敬) 내상(內相)이 야마가타의 군비 확장 요구를 거부하면서 두 진영의 대립이 노골화되었다.

1 고토쿠 슈스이. 아나키스트인 고토쿠는 ‘일왕 암살 모의’라는 모호한 혐의로 동지 11명과 함께 사형당했다. 2 안창호. 3 양기탁 수형기록표.
청일전쟁 후 일본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면서 부작용도 심해졌다. 그 결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두하면서 1901년 5월에는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가타야마 센(片山潛), 고토쿠 슈스이(行德秋水) 등이 사회민주당을 결성했다. 사회민주당은 하루 만에 강제 해산되지만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사상은 계속 확산되었다. 일본에는 다수의 러시아 혁명가들이 차르의 압제를 피해 망명해 있었는데, 이들을 통해서도 러시아의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운동과 허무당 활동이 전해졌다. 1902년 도쿄대 학생이던 게무야마 센타로(煙山<5C02>太<90CE>)가 근세 무정부주의(近世無政府主義)를 펴내는데, 이 책 때문에 아나키즘이 동아시아에서는 암살·폭동에다 모든 정부 조직을 반대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었다.

이 책은 아나키즘에 반대하기 위해 쓰여졌다지만 거꾸로 사회주의자들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고토쿠 슈스이(1871~1911)는 1901년에 쓴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란 글에서 제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왕성하도다. 이른바 제국주의의 유행이여. 기세가 요원의 불길과 같으니 세계 만방 모두 두려워 그 발 아래 엎드리고 그를 찬미하고 숭배하여 떠받들지 않는 자가 없다…우리 일본에 이르러서도 일청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이래로 상하 모두 이를 향해 열광하는 모양이 마치 고삐 풀린 사나운 말과 같다… 아아, 제국주의여! 유행하는 그대 세력은 우리 20세기를 적광(寂光)의 정토(淨土)로 만들려고 하는가, 아니면 무간(無間) 지옥으로 떨어뜨리려고 하는가.”

한국에서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것은 민중의 지지라도 받았지만 일본은 달랐다. 고토쿠는 러시아와도 비전론(非戰論)을 주창하는데, 1903년 만조보(滿朝報)가 전쟁 찬성으로 돌아서자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무교회주의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와 함께 퇴사해서 평민사(平民社)를 차리고 평민신문을 창간했다. 고토쿠는 평민주의, 평화주의, 사회주의의 기치 아래 반전활동에 나섰고, 평민신문은 “우리는 어디까지나 전쟁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목청을 드높였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한국 지배론이 본격화하자 “기요모리(淸盛)의 갑옷이 드디어 법의(法衣)의 소매에서 다 나왔다. 마각을 드러냈다”고 비난했다. 평민신문은 1905년 1월 64호로 폐간되었고, 금고형을 받은 고토쿠는 석방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07년 11월 3일의 천장절(天長節:일왕 생일)에 샌프란시스코의 일본인 사회주의자들이 ‘암살주의’라는 제목을 붙인 ‘메이지 천황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재빨리 메이지 일왕을 만나 사이온지 내각이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자 단속에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메이지는 요코다(橫田) 대심원장(대법원장), 마쓰무로(松室) 검사총장, 하라(原) 내상을 불러 주의를 촉구했다. 1908년 6월 도쿄 간다(神田) 금휘여관(錦輝館)에서 열린 야마구치 요시조(山口義三)의 출옥 환영식이 ‘적기사건(赤旗事件)’으로 번지면서 사이온지 내각은 퇴진하게 된다.

야마구치는 1907년 3월 평민신문에 일본의 봉건적 가족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부모를 걷어차라(父母を蹴れ)’를 발표했다가 1년2개월간 복역하고 석방되었는데, 환영식에서 ‘무정부공산(無政府共産)’ 등을 새긴 적기(赤旗)를 흔들다가 경찰과 충돌해 13명이 기소되었다. 사이온지 내각은 총사직하고 제2차 가쓰라 내각이 출범했다. 사이온지 내각이 야마가타 같은 원로들에게 독살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가쓰라 내각은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 일망타진을 노렸다.

1910년 3월 기계직공이던 미야시타 다기치(宮下太吉)가 폭발물 취체(取締) 위반혐의로 체포되면서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이 시작되었다. 가쓰라 내각은 이 사건을 천황 암살 모의사건이라면서 수백 명의 아나키스트·사회주의자를 검거했다. 가쓰라 내각 출범 직후인 1908년 10월부터 시행(1947년 삭제)된 형법 제73조는 “천황·천황태후·황후·황태자 또는 황태손에 위해를 가하거나 또는 가하려고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직접적인 위해뿐만 아니라 예비 음모도 처벌하는 규정은 오직 ‘사형’ 하나뿐이었다. 형법 제73조는 최고재판소인 대법원에서 재판하는 단심제였다.

대역사건을 심의한 검사 고야마 마쓰기치(小山松吉)가 일본 사회주의운동사에서 원로 모(某)씨가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사형을 구형하라고 압력을 넣었다고 전한다. 원로 모씨는 야마가타로 추측되는데, 1911년 1월 18일 열린 재판에서 쓰루조 이치로(鶴丈一<90CE>) 재판장은 고토쿠 등 2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중 12명은 무기로 감형되었지만 불과 일주일 후인 1월 24일 고토쿠(41), 모리치카(31·농업), 오이시(45·의사), 니미우(33·편집자), 우치야마(38·승려) 등 11명이 사형당했고, 다음 날 간노스가(31·기자)가 또 사형당했다.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은 적기사건으로 투옥 중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목숨을 건졌을 정도였다. 사형당한 간노스가가 “이 사건은 아나키스트의 음모라기보다는 검사의 손으로 만들어진 음모라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고 할 만큼 가쓰라 내각의 자국민 살해였다.

이런 ‘대역(大逆)사건’의 조선총독부판(版)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사건’이었다. 1910년 11월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과 배경진·박만준 등은 만주에 군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황해도 송화의 신석효, 신천의 이완식 등으로부터 자금을 모금하다가 민모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이것이 안악사건(安岳事件)인데,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확대되었다. 1910년 11월 2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105명이 기소돼 통칭 105인 사건으로 불린다. 600여 명이 검거되는데, 대부분 신민회원들이었다. 서울의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 평북의 이승훈(李昇薰), 평양의 안태국(安泰國), 황해도의 김구(金九) 등이었다.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는 이때 갖은 고문을 당하고 세상을 떠났다. 1911년 7월 ‘양기탁·임치정·주진수·안태국 등 16명의 보안법 위반 판결문’은 일제가 왜 이 사건을 조작했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서간도에 단체적 이주를 기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히 자력(資力) 있는 다수 인민을 동지(同地:서간도)에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고 촌락을 만들어 신영토로 삼고… 학교 및 교회를 배설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문무(文武) 쌍전(雙全) 교육을 실시하여 기회를 타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구(舊)한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신영토)와 무관학교 설립 저지가 ‘데라우치 암살 미수사건’을 조작한 이유였음을 말해주는 판결문이다. 대한매일신보 1911년 7월 23일자는 안명근은 무기징역, 주진수·양기탁·안태국·임치정 등은 징역 2년형을 받았다고 전한다.

대역사건으로 일본 내 아나키즘·사회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크게 위축되었다.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는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자금으로 평남 안태국 15만원, 평북 이승훈 15만원, 황해도 김구 15만원, 강원도 주진수 10만원, 경기도 양기탁 20만원 등을 모금하기로 결정했다고 전하는데 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만주 횡도촌에 망명가들이 도착해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꺼우리 몰아내 달라” … 망명객 급증에 중국인들 두려움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2호 | 20110821 입력
수천 년 동안 왕정이었던 나라가 망국 직후부터 민주공화제 건설을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삼은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지향했던 선각자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숱한 갈등에 시달리는 현재의 대한민국이 문제 해결을 위해 더듬어 보아야 할 역사다.
추가가에서 바라본 대고산, 대고산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거쳐 결성된 경학사는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 중 하나가 된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⑨ 건국의 뿌리


횡도촌에 모인 망명객들이 국외 독립운동의 또 다른 기지로서 주목한 곳이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였다. 현재는 삼원포(三源浦)라고 부르는데 작은 강물 세 줄기가 합쳐 흐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삼원보에서 서쪽으로 3~4㎞ 떨어진 곳이 추가가(鄒家街)였다. 추씨 성의 중국인들이 대대로 집단 거주하는 마을로 추지가(鄒之街)라고도 불린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에서 이석영·회영 일가, 그리고 다섯째 이시영이 “장구(長久)히 유지도 하고 우리 목적지를 정하여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 양성하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면서 1911년 정월 28일에 횡도촌에서 유하현 추가가로 가서 3간 방을 얻어 두 집안이 머물렀다고 전한다. 이곳이 이회영·이동녕 등이 남만주 사전 답사 때 무관학교 설립지로 점 찍은 곳이었다. 추가가는 마을 앞으로는 너른 농지가 펼쳐져 있고, 마을 뒤로는 600여m 높이의 대고산(大孤山)과 소고산(小孤山)이 있으며, 그 뒤로 산들이 연달아 있어 유사시 대피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

그러나 추가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먼저 정착을 하려면 토지를 구입해야 했는데 현지인들의 반발이 심했다. 망명객들의 집단 이주 규모가 현지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은숙은 추가가의 어른인 순경 노야가 유하현에 이렇게 고발했다고 전한다.

“전에는 조선인이 남부여대(男負女戴)로 산전박토(山田薄土)나 일궈 감자나 심어 연명하려고 왔는데, 이번에 온 조선인은 살림차가 수십 대씩이고, 짐차로는 군기(軍器)를 얼마씩 실어오니, 필경 일본과 합하여 우리 중국을 치려고 온 것이 분명하다. 빨리 꺼우리(高麗·조선인을 지칭)를 몰아내 달라.”

추씨들은 또 종회(宗會)를 열어 “한국인에게 토지나 가옥의 매매를 일절 거부하고, 한국인들의 가옥 건축이나 학교 시설도 역시 금지하며, 한국인과의 교제도 금지한다”고 결의했다. 이 때문인지 중국 군경 수백여 명이 한인들의 숙소를 급습해 조사하기도 했다. 이회영이 필담(筆談)으로 일제의 첩자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러 ‘형제지국’에 왔다고 전하자 그냥 돌아갔으나 그 후에도 가옥과 전답은 팔지 않았다. 권상규(權相圭)가 쓴 석주 이상룡의 행장(行狀:1943년)에도 비슷한 상황이 전한다.

“이때 한인(韓人)의 이사하는 수레가 길에서 이어지니 토착인들이 크게 놀라서 서로 와전된 소문을 퍼뜨렸으니, 심지어 대한(大韓) 황자(皇子)가 경내로 들어왔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에 청(淸)나라 관리가 각 지역에 엄한 경계를 내렸고, 군대를 보내서 수비하게 했으며, 또 가옥 빌려주는 것을 금하여 사람들 대부분이 노숙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린 한인 망명객들은 ‘변장(變裝)운동’을 전개했다. 이상룡의 행장에 “동지들과 머리를 깎고 옷을 바꾸어서 토착인들과 함께 섞였으며, 상룡(相龍)이라고 개명했다”고 전하는 대로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 국적도 취득하자는 운동이었다. 본명 이상희(李象羲)를 이상룡으로 개명한 것도 변장운동의 일환이었다. 다른 이가 서신을 보내 머리를 깎고 중국 옷을 입은 것을 비난하자 이상룡은 “머리카락은 작은 몸[小體]이고 옷은 바깥을 꾸미는 것[外章]인데, 일의 형편상 혹 바꿀 수도 있는 일입니다.… 큰 일을 하려는 자가 어찌 자잘한 것에 얽매여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면 중국인들과 충돌하면 곤란했다. 그래서 십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한 것이었다.

한인들은 유하현에 입적(入籍)과 토지매매를 요청하는 한편 이회영과 이상룡의 아우 이봉희(李鳳羲)를 대표로 동삼성(東三省) 총독에게 보내 입적과 토지 매매 허용을 요구했다. 동삼성 총독에게 낸 청원서에 “우리들은 나라를 떠나 이주해온 후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맹세한 무리들입니다. 대개 저 원수놈들과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이회영과 이봉희는 동삼성 총독 조이풍[趙爾豊:조이손(趙爾巽)]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면담에 실패했다.

그러자 이회영은 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를 만나 해결하기 위해 북경으로 향했다. 원세개는 1882년의 임오군란 때 북양(北洋)함대 제독 정여창(丁汝昌)이 이끄는 청군(淸軍)의 일원으로 조선에 온 적이 있었다. 청국 대표로 부임했던 27세 때는 가마를 탄 채 입궐하고, 국왕 알현 때도 기립하지 않아 많은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체류 때 원세개는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더구나 원세개는 일제에 빼앗긴 한국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회영은 원세개를 만날 수 있었다. 이회영의 설명을 들은 원세개는 적극 협조를 약속하고 비서 호명신(胡明臣)을 대동시켜 동삼성 총독을 방문하게 했다. 원세개 총리의 친서를 받은 동삼성 총독은 자신의 비서 조세웅(趙世雄)을 이회영에게 딸려 보냈고, 회인(懷仁)·통화(通化)·유하(柳河) 세 현장에게 이주 한인들과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회인·통화·유하현의 세 현장은 다음과 같은 동삼성 총독의 훈시를 게시하였다.

“만주 원주민들은 이주하여 오는 한국인들과 친선을 도모하고, 농업·교육 등 한국인들의 사업 일체에 협력할 것이다. 서로 간에 분쟁을 야기하거나 불화를 조성하는 일체의 언동을 절대 삼가라. 만일 지시를 위반한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이런 훈시문이 게재되자 이은숙의 회고대로 3성의 현수(縣守)들의 눈이 휘둥그레져 이후로는 한국인을 두려워해 잘 바라보지도 못하게 되었다. 드디어 현지인들과의 갈등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동아일보 1920년 8월 2일자는 “봉천성 삼원보에 자치국(自治國)”이란 기사에서 ‘이천 호의 조선 민족이 모여 한족회가 다스리며 소중학교 교육까지 시키는 작은 나라를 이뤘다’고 보도했다. 또한 삼원보는 1919년 3월 12일 만주 최초로 만세시위가 일어나는데, 모두 이때 뿌린 씨앗들이 개명한 것이었다. 이주 한인들은 입적과 토지 취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한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했다. 1911년 4월께 대고산에서 이동녕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고 노천 군중대회를 열었는데, 아들 이준형(李濬衡)이 쓴 이상룡의 일대기인 선부군 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처음 추가가에 경학사를 조직했는데, 공의(公議)로 부군(府君:이상룡)을 사장(社長)으로 선출했다. 적의 앞잡이가 염탐할까 염려하여 대고산(大孤山) 속에 들어가 노천(露天)에서 회의를 열었다. 부군이 경학사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였는데, 말과 기색이 강개하여 청중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일제가 이른바 105인 사건 판결문에서 “다수의 교육 있는 청년을 모집하여 동지(同地:서간도)로 보내어 민단(民團)을 일으키고 학교 및 교회를 배설하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설립하고…”라고 바라본 대로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한 민단을 조직한 것이다. 경학사는 낮에는 농사를 짓는 ‘개농주의(皆農主義)’와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표방했다. 이상룡은 “아아! 사랑할 것은 한국이요, 슬픈 것은 한민족이로구나”로 시작하는 경학사 취지서를 통해 경학사가 나아가야 할 바를 밝혔다.

부여의 옛 땅은 눈강(嫩江:송화강 지류)에 달하였은즉 이곳은 이국의 땅이 아니요, 고구려의 유족들이 발해에 모였은즉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동포들이 아닌가. 더구나 16세기 화란(네덜란드)은 서반아(스페인)로부터 독립하여 부흥했으니 옛날에도 사례가 있는 것이다.

만주를 선조들의 옛 강역으로 보는 역사인식 속에서, 네덜란드처럼 독립할 것이라는 미래의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천 군중대회의 결과로 경학사를 건설했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었다. 대고산에 모인 망명객들의 출신을 따지면 왕정 복고를 추진하는 복벽주의(復<8F9F>主義)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들은 왕정을 배격하고 민의에 의한 민단 건설이란 민주공화제의 씨앗을 뿌렸다.

채근식이 무장독립운동비사에서 경학사에 대해 “동삼성(東三省) 한국 혁명 단체의 효시”라고 높이 평가하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훗날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가 되는 김학규도 “동삼성 한국 혁명 결사의 개시이자 동북 한국 혁명운동의 선성(先聲)이자 효시(嚆矢)”라고 높이 평가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망국 이듬해 망명객들이 노천 군중대회를 열고 조직한 경학사는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정체의 뿌리였다.

 

 

 


 
 

구국사업과 교육 … 단군의 땅에 세운 ‘독립군 사관학교’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3호 | 20110827 입력
모든 열매에는 씨앗을 뿌린 사람과 가꾼 사람의 꿈과 노력이 담겨 있다. 결정적 시기에 독립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건설한 망명객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또한 척박한 땅, 혹독한 추위 속에 단련된 씨앗들은 언 땅을 뚫고 나올 때를 기다렸다.
신흥무관학교는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으로 구성된 교관들로부터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았다. 또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를 교재로 국사 교육을 철저히 했다. [그림=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미대 교수]
절망을 넘어서
⑩신흥무관학교


결정적 시기에 일본을 무력으로 구축하고 나라를 되찾는 독립전쟁을 전개하려면 먼저 독립군을 양성해야 했다. 이관직(李觀稙)은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서 신민회 시절 이회영이 김형선·이관직·윤태훈에게, ‘멀지 않은 장래에 만주 지방에서 독립군을 양성해야겠으니 해산된 군인 가운데 애국자들에게 만주로 건너가도록 권해 줄 것을 미리 부탁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또한 같은 책에서 “(이회영) 선생은 신흥군관학교 설립을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제창한 주인공이었다. 선생의 학교 설립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초로 군사 교육의 계획에 참여한 사람은 김형선·이장녕·이관직 등 세 사람이었다”고도 회고했다.

이관직 자신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부위(副尉)로 있다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된 인물이니 신빙성 있는 이야기다. 이상설과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방략을 정한 이회영은 독립군을 훈련시킬 교관들로 해산 군인들을 주목했다.

1911년 음력 4월 유하현 추가가에서 노천 군중대회를 열어 경학사를 결성한 망명객들은 무관학교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횡도촌에 망명했던 안동 유림 김대락은 망명기록인 서정록(西征錄) 1911년 5월 14일(양력 6월 10일)자에 “가서 학교를 보았는데 마침 이날 하오에 개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날이 신흥무관학교 개교일인데, 이 학교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元秉常)은 “1911년 봄(음력 5월께)에 이역황야의 신산한 곁방살이에서나마 구국사업으로 일면 생취(生聚: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음), 일면 교육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내걸고 출발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신산한 곁방살이’라고 표현한 것은 현지인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서 개교했기 때문이다. 신민회(新民會)의 ‘신(新)’자와 다시 일어난다는 ‘흥(興)’자를 붙여 교명을 지었지만 처음에는 중국인들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라고 불렀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군사력의 열세였다. 나라를 되찾는데도 군사력이 가장 중요했다. 조선의 군사력은 순조 2년(1802) 1월 노론 벽파 영수인 영의정 심환지가 정조가 창설한 장용영을 해체시키면서 결정적으로 약화된다. 그 후 조선군은 지방 민란 하나 변변히 제압하지 못하는 약졸(弱卒)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 서구 열강이 밀려들자 위기감을 느낀 고종은 재위 33년(1896) 1월 11일 칙령 제2호로 ‘무관학교관제(武官學校官制)’를 반포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무관학교 학도 모집령에 따르면 무관학교생의 수학기간은 1년이고, 식사와 의복은 국비이며, 약간의 용돈까지 제공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한 달 뒤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년 후인 고종 35년(1898) 4월 군부대신 이종건(李鍾建)이 무관학교 재건을 주청하자 칙령 11호로 ‘무관학교관제’가 다시 반포되었다. 그해 6월 200명 정원에 1700명이 지원하는 열기 속에서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 이때는 재학기간이 1년6개월로 늘었다. 고종은 재위 36년(1899) 6월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대원수(大元帥)로서 군대를 통솔하는데, 고종 37년(1900) 1월 장연창(張然昌) 등 128명의 원수부 졸업시험 통과자는 참위로 임관되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하는데 이들의 행적은 군대 해산, 망국 등의 국난을 겪으면서 친일파와 항일 무장투쟁가로 극명하게 갈린다. 동아일보 1920년 4월 30일자에 따르면 1회 졸업생 대표였던 보병 대위 장연창이 서훈을 받는 것처럼 일부는 망국 후에도 일본군으로 복무했다. 반면 김창환, 이관직, 신팔균, 이장령, 이세영 같은 무관학교 출신들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독립군을 양성했다.

무관학교 출신들 중 일부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는데, 이들의 행적도 마찬가지였다. 주일 공사가 1902년 6월 20일 의정부 찬정(贊政) 겸 학부대신 민영소(閔泳韶)에게 보낸 일본 유학생 현황에 대한 조회에는 박영철(朴榮喆)·김응선(金應善)이 관비 유학생으로 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라고 나오는데, 이 둘은 모두 친일에 가담한다. 반면 같은 일본 육사 출신이지만 김경천(金擎天)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고, 나중소(羅仲昭)는 훗날 북로군정서에서 세운 사관양성소의 교성대장(敎成隊長)으로 독립군을 양성한다.

처음 신흥무관학교가 추가가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한 것은 중국인들이 토지·가옥 매매를 거부한 데 따른 임시방편이었다. 이회영·이상룡 등의 당초 계획은 정식으로 토지를 매입해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때 이회영과 의형제까지 맺게 된 원세개(袁世凱)의 비서 호명신(胡明新)이 이회영에게 “형이 토지를 사서 뜻하는 바를 이루어야 하겠는데, 기왕 돈 주고 토지를 살 것 같으면, 하필 추가(鄒哥)는 여러 십대를 누리고 살던 땅이라 팔기를 아까워하니, 다른 데 가서 정하는 것이 어떻겠소?”라면서 합니하(哈泥河) 강 근처 토지를 권유했다.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비사에 따르면 신민회가 평북·평남·황해·강원·경기 등 5도에서 총 75만원의 학교 설립자금을 조달하기로 계획했지만 ‘데라우치 총독 암살 모의사건(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사실상 붕괴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 학교 설립자금을 제공한 인물은 이관직이 “(이회영) 선생의 학교 설립 요청에 의해 그 설립 및 유지비를 최초로 제공한 사람은 선생의 형인 이석영이다”고 회고한 것처럼 둘째 이석영이었다. 이관직은 “그가 만일 학교 설립 자금을 내놓지 않았다면 우당 선생의 오랜 소원이던 군관학교도 설립하기 어려웠을 것이다”고 회고하고 있다.
현재 광화(光華)라는 이름으로 바뀐 합니하는 추가가보다 훨씬 험한 요지였다. 동남쪽으로는 태산준령인 고뢰자(古磊子)가, 북쪽에는 청구자(靑溝子)의 심산유곡이 펼쳐져 있으며, 남서쪽에는 요가구(鬧家溝)의 장산 밀림이 둘러싸인 천혜의 요지로서 파저강(波<7026>江) 상류 합니하 강물이 반원을 그리며 압록강을 향해 흘렀다.

1912년 음력 3월부터 교사·학생들이 일심으로 신축 공사를 시작했는데 원병상은, “삽과 괭이로 고원 지대를 평지로 만들어야 했고, 내왕 20리나 되는 좁은 산길 요가구 험한 산턱 돌산을 파 뒤져 어깨와 등으로 날라야만 되는 중노역이었지만, 우리는 힘드는 줄도 몰랐고 오히려 원기왕성하게 청년의 노래로 기백을 높이며 진행시켰다”고 회상했다.

같은 해 음력 6월 드디어 새로운 교사가 완성되었고, 100여 명의 이주민은 낙성식의 기쁨을 함께할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본과와 특별과가 있었는데 본과는 4년제 중학과정이었고, 6개월·3개월의 속성과는 무관 양성을 위한 특별과였다. 님 웨일스(Nym Wales)의 아리랑(Song of Arirang)에는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김산(본명 장지락)의 회고가 나온다.

“합니하에 있는 대한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열여덟 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산허리를 따라서 줄지어 있었다. 열여덟 살에서 서른 살까지의 학생들이 백 명 가까이 입학하였다…학과는 새벽 네 시에 시작하며, 취침은 저녁 아홉 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 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되었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게릴라 전술…한국의 지세, 특히 북한의 지리에 관해서는 아주 주의 깊게 연구하였다-‘그날’을 위하여. 방과 후에 나는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전략·전술·측도학(測圖學:지도 보는 법) 등의 이론과 보(步)·기(騎)·포(砲)·총검술·유술(柔術)·격검(擊劍) 등 전문적인 군관학교와 다를 바 없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특징 중의 하나가 철저한 국사 교육에 있었다.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가 국사 교재였는데, 만주를 단군의 옛 강역으로 기술한 사서(史書)였다. 무관학교 학생들은 “칼춤 추고 말을 달려 몸을 연마코/ 새론 지식 높은 인격 정신을 길러/ 썩어지는 우리 민족 이끌어 내어/ 새 나라 세울 이 뉘뇨/(후렴)우리 우리 배달 나라에/우리 우리 청년들이라/두팔 들고 고함쳐서 노래하여라/ 자유의 깃발이 떴다”는 교가를 힘차게 부르며 결전의 날을 준비했다.

합니하 심산유곡에서 노동과 군사훈련을 병행하는 젊은 청년들의 어깨 위에 빼앗긴 나라의 미래가 걸려 있었다.

 

 

 


 
 

청산리대첩·의열단 … 신흥무관학교, 일제를 떨게 하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34호 | 20110904 입력
빼앗긴 나라를 전쟁으로 되찾자는 독립전쟁론의 구체적 실현이 신흥무관학교 건설이었다. 기대했던 중·일전쟁이 불발하면서 전면적인 독립전쟁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이후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신흥무관학교가 있던 합니하. 중국 정부는 현재 이 지역에 대한 한국인들의 출입과 통행을 일절 금지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합니하의 강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겨울 풍경.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⑪ 독립전쟁론의 씨앗


1911년 12월 신흥무관학교는 제1회 특기생으로 김연(金鍊)·변영태(卞榮泰)·이규봉(李圭鳳)·성준식(成駿寔) 등 4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독립전쟁의 거대한 첫발을 뗀 것이다. 압록강을 건널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시련을 이겨내고서 뗀 첫발이었다.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영농 장면.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공부하면서 농사도 짓는다는 경학사의 방침에 따라 고된 노동도 즐겁게 받아들였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대장 원병상은 수기 신흥무관학교에서 “이 해 이주 동포들의 시련은 너무도 가혹하였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소위 수토병(水土病)이란 괴질이 이역의 개척 문턱에 접어든 우리에게 가경(可驚)할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경학사 사장 이상룡의 손부(孫婦)인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는 이때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다.

“그해 오뉴월이 되자 동네 사람들 모두가 발병했는데 ‘수토병’이라고도 하고 ‘만주열’이라고도 했다. 물 때문에 생긴 전염병 같았다…성산(性山: 왕산 허위의 형 허겸)의 처조카 송병기도 이때 사망했고 권팔도네도 하나 밖에 없는 애기를 잃었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많이 죽었다…망명 온 댓바람에 겪은 일이라 모두들 당황했다. 중국에 자리 잡은 지 두 달 만에 그랬으니까…특히 어린아이들의 죽음은 그 부모들 가슴에 못질을 한 것이다.”

이시영의 아들이자 신흥무관학교 교사였던 이규봉(李圭鳳) 남매도 세상을 떠났다. 원병상의 표현대로 “하늘이 무심”할 수밖에 없었다. 성인들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못해보고 세상을 떠난 데 대한 한(恨)이, 아이들은 성장하기도 전에 죽고 만 데 대한 한이 사무쳤다.

이상룡도 만주에서 겪은 일(滿洲紀事)이란 시에서 “반년 지나 벽질(碧疾:수토병)에 걸리니/신선술(군사훈련) 배우기 전 죽음만 쌓이누나”라면서 “악질이 사납게 만연해 거의 다 죽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었다. 원병상은 ‘임자(壬子·1912)·계축(癸丑·1913) 양년은 가뭄과 서리의 천재까지 겹쳐 농사도 치명적으로 실패함으로써 학교 운영도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여 주로 이석영(李石榮) 선생의 사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학생들을 미래의 전사로 교육하는 작업은 포기할 수 없었다. 1911년의 큰 흉작으로 경학사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서 해체되고 1912년 가을에는 새로운 한인 자치 조직인 부민단(扶民團)이 신흥무관학교와 같이 합니하(哈泥河)에 조직되었다. 지금의 통화(通化)현 광화향(光華鄕) 광화촌(光華村) 고려관자(高麗館子) 부근이다.

이상룡은 앞의 만주에서 겪은 일(滿洲紀事)에서 부민단 설립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부의 규모는 자치가 명분이고/삼권 분립은 문명국을 따른 것이네(政府規模自治名/三權分立倣文明)”라고, 3권 분립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이 독립운동의 목표임을 분명히 밝혔다. 무관학교 생도들은 학교 경영에 보태기 위해 중국인의 산황지(山荒地)를 빌려 밭을 일구기도 하고, 학교 건너편 낙천동(樂天洞)이라는 산턱에서 적설을 헤치며 나무를 해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원병상은 힘든 노동에도 아무 불평 없이 ‘이극(李剋) 교관의 함경도 사투리 섞인 산타령에 장단을 맞추어 즐겁게 노동했다’고 전하고 있다. 신흥무관학교의 교과 내용은 학과 10%, 교련(敎鍊) 20%, 민족정신교육 50%, 건설 20%의 비중으로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지를 아는 목적의식적 군대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상황은 열악했어도 의기는 드높았다. 1914년 조선총독부 시보 이마무라(今村邦) 등은 헌병 대위 오오타(太田淸松) 등과 함께 압록강·두만강 유역 교민들의 실태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한인 보조원 정(鄭)모씨를 시켜 신흥무관학교를 탐방케 했다. 정 보조원이 이씨 댁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벌어졌던 일이 국경지방 시찰 복명서(國境地方視察復命書)란 보고서에 실려 있다.

“야반에 생도 20여 명이 침소에 돌입하여 와서 혹은 치고 혹은 찌르며 매도(罵倒)하기를, ‘너는 어떤 연유로 일본인에게 사역되느냐. 빨리 가래 한 자루를 들고 우리들과 행동을 같이 하라. 우리들은 배우며 또한 갈으며 스스로 의식을 해결하고 있다. 너는 돌아가서 일본인의 수족이 되어 사는 것보다 깨끗이 이곳에서 죽지 못하겠느냐. 또한 살아서 돌아간다 해도 너의 생명은 장백부(長白府)를 무사히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며 마침내 감격에 벅차 체읍(涕泣)하고 호호(呼號)하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로써 그 일반(一班)을 엿볼 수 있으리라 사료된다.

스스로 감격에 벅차 울고 고함지르던 무관 생도들이었으니 전투만 벌어지면 당장 총 들고 달려갈 의기가 충만했다. ‘합니하 군교(哈泥河軍校)’로도 불렸던 신흥무관학교는 추가가와 합니하, 그리고 유하현 고산자(孤山子) 하동(河東), 통화(通化)현 쾌대무자(快大茂子) 등지에도 설치했던 본교 또는 분교에서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인물들이 된다. 졸업생들은 2년간 의무적으로 독립군에 편성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거나 각지에 파견되어 교원생활을 해야 했다.

교육열이 높았던 재만 한인 사회에서는 문무를 겸전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에 대한 요청이 쇄도했다. 그래서 압록강 대안인 서간도뿐 아니라 장백, 화룡, 연길, 왕청, 훈춘 등 두만강 대안의 북간도 지역까지 파견되어 교사로 근무했다. 무관학교 출신들은 낮에는 학과를 교육하고 밤에는 지방 청년들에게 군사 교육을 실시했다. 졸업생들이 파견된 지역은 유사시에 독립군으로 재편될 예비군이 즐비했다.

졸업생들은 1913년 3월 삼원보 대화사(大花斜)에서 신흥학우단을 결성했다. 신흥학우단은 교장 여준과 교감 윤기섭을 비롯해 제1기 졸업생들인 김석(金石)·강일수(姜一秀) 등의 발기로 조직됐다. 교원과 졸업생은 정단원이 되고, 재학생은 준단원이 되는 일종의 동창회 조직이었다. 신흥학우단은 첫째 강령이 “‘다물(多勿)’의 원동력인 모교의 정신을 후인에게 전수하자”는 것이어서 다물단(多勿團)이라고도 불렸다. 다물은 ‘고토를 회복한다’는 뜻의 고구려어로서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부민단과 신흥학우단이 1914년 통화현 제8구 소배차(小北<5C94>) 심산유곡에 건설한 것이 ‘백서농장’이었다. 무관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각 분·지교에 설치한 노동강습소 등에서 양성한 독립군 등 모두 385명이 모였는데, 명칭만 농장이었지 사실은 독립군 군영(軍營)이었다. 이상설이 이회영에게 “조만간 동양에 다시 전운(戰雲)이 일 것”이라고 예견한 것처럼 일본과 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 즉각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전면전을 전개하려고 조직한 것이다.

그런데 백서농장 출신이 쓴 것으로 추측되는 백서농압사(白西農壓史)는 ‘단기(檀紀) 4247년(1914) 중·일전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으나 중국 대총통 원세개의 야욕으로 굴욕적인 21개 조약이 체결되면서 우리가 생각했던 계획도 허사로 돌아갔다’라고 쓰고 있다. 1915년 1월 일본에 대해 산동성 내 철도 및 광산 이권과 만주에 조차지를 주고, 중국 연안의 섬·항구·만(灣) 등을 일본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21개 조항을 원세개가 받아들이면서 예견했던 중·일전쟁이 무산되었던 것이다.

3·1운동 이후에 부민단은 한족회(韓族會)로 확대 개편하면서 산하에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두는데 제1중대장 백광운을 비롯해 김철·김학규·오광선·현기전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견 간부진을 형성했다.

1919년 8월 북만주에서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조직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은 대한군정서의 요청으로 참모장의 요직을 맡았으며 소속 무관학교인 사관연성소에도 교관 이범석과 졸업생 김훈·오상세·박영희·백종렬·강화린·최해·이운강 등이 파견되었다. 1920년 10월 박영희·강화린·오상세·백종렬·김훈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중견간부로서 청산리 대첩을 치른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함께 일본 정규군 1200여 명을 사살한 청산리 대첩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들이 독립군을 지휘했기에 가능했던 전투였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시 파호문(巴虎門) 밖 중국인 반(潘)모씨의 집에서 결성되어 일제를 경악에 빠뜨리는 의열단도 신흥무관학교 동문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어둠의 동토를 박차고 압록강을 건넌 망명객들이 심은 독립전쟁의 씨앗이 각지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었다. (‘절망을 넘어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