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의 고택인 안동 임청각. 이상룡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임청각을 팔면 고성 이씨 문중에서 되사기를 반복했던 유서 깊은 종가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
⑦ 안동 유림들
1911년 1월 5일 경상도 안동.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은 새벽에 일어나 가묘(家廟)에 절했다. 그는 망명 일기인
그는
|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아들 이준형(李濬衡:1875~1942년 자결)이 쓴 이상룡의 일대기인
“이시영씨 댁은 이 참판 댁이라 불렀다. 대대로 높은 벼슬을 많이 하여 지체 높은 집안이다. 여섯 형제분인데 특히 이회영·이시영씨는 관직에 있을 때도 배일사상이 강하여 비밀결사대의 동지들과 긴밀한 관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합방이 되자 이동녕씨, 그리고 우리 시할아버님(이상룡)과 의논하여 만주로 망명하기로 했다.”
허은 여사는 13도 의병연합부대의 군사장이었다가 1908년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한 왕산(旺山) 허위(許蔿:1855~1908)의 집안 손녀였다. 집단 망명의 선이 안동까지 닿았다는 뜻이다. 추풍령에서 기차를 탄 이상룡은 12일 오후 8시12분 서울에 도착했으니 서울까지 열여덟 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그런데 대한협회가 1909년 일진회와 제휴하는 등 친일 성격을 띠어가면서 안동지회와 충돌했다. 이준형의
이상룡은 신의주에 도착해 압록강의 상황을 보고 “일인이 장차 강 위에 무지개다리를 놓으려고 돌기둥을 이미 벌려 세웠다”며 “만약 이 다리가 한번 낙성되면, 연경(燕京:북경)이며 여순(旅順)이며 하얼빈 등지가 모두 하룻길이 될 것이다. (일본) 국력의 부강함이 두려울 뿐 아니라 그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큰 야욕이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뛰어난 역사가답게 이후 일본의 만주 및 중국 본토 침략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다.
그러나 이상룡 자신은 이런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워야 하는 운명이었다. 이상룡은 “어떤 경우에도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택한다(熊魚取舍)’는 것은 예로부터 우리 유가(儒家)에서 날마다 외다시피 해온 말이다”고 말했다.
신의주에 도착한 이상룡은 1월 25일 “저녁 먹은 후에 등불을 들고 (신의주) 정거장에서 기다렸다. 밤든 지 오래되자 과연 일행이 일제히 도착하는 것이 보인다”고 적고 있다. 맏아들 준형이 맨 앞에, 동생 이봉희(李鳳羲) 부자가 맨 뒤에 서서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신의주까지 온 것이다. 이상룡 일가도 이회영 일가처럼 집단 망명이었다. 이상룡이 사라진 후 경찰서에서 여러 차례 조사했고 준형은 경찰서까지 끌려가 조사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가는 1월 27일 발거(跋車:썰매 수레)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는데, 이상룡은 시상이 떠오른다.
“칼날보다 날카로운 삭풍이/차갑게 내 살을 도려내네/내 살 도려지는 건 참을 수 있지만/창자 끊어지는데 어찌 슬프지 않으랴(朔風利於劒/<51D3><51D3>削我肌/肌削猶堪忍/腸割寧不悲)” 내 살 도려지는 것보다 나라 잃은 슬픔에 더 애간장이 탄다는 시다. 이상룡은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이 무릎을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누구를 위해 머뭇거릴 것인가/호연히 나는 가리라(此頭寧可斫/此膝不可奴/…/爲誰欲遲留/浩然我去矣)”라며 비장한 결의로 압록강을 건넜다.
안동현에 도착해 이윤수의 객점에서 잠시 대기하다가 1월 29일에 마차 두 대를 사서 횡도촌으로 떠났다. 수레 안에 담요를 깔고 온몸에 이불을 둘러야 할 정도로 추웠는데 이상룡은 “어린 것들이 연일 굶다 못해 병이 날 지경이었다. 좁쌀 두어 되를 사고 솥을 빌려 밥을 지어 먹이니 그 괴로운 상황을 알 만하다”고 적고 있다.
횡도촌에는 먼저 망명한 정원하·이건승·홍승헌 같은 강화학파와 이회영 일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룡은 도착 당일 “오후에 김비서장(金賁西丈)이 계신 곳을 찾아갔다”고 적고 있는데, 그가 먼저 망명한 처남인 백하 김대락(金大洛:1845~1914)이었다. 김대락은 만 예순다섯의 노구로 이상룡보다 이른 음력 12월 24일 고향 안동을 출발해 압록강을 건넜다. 김대락은 가족은 물론 식민의 땅에서 후예를 낳을 수 없다는 뜻에서 만삭의 손자며느리도 동행시켰다.
이상룡이 “이 노인(김대락)이 일전에 증손자를 본 경사가 있어 한편 위로하고 한편 하례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망명길에서 낳은 아이를 식민지 땅이 아닌 중국에서 낳아서 통쾌하다는 뜻의 쾌당(快唐)으로 짓고, 둘째는 고구려 시조 주몽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기몽(麒夢)으로 지었다. 안동의 평해 황씨 황호(黃濩:1850~1932) 일문도 집단 망명에 가담했다.
김대락은 횡도촌에서 학교를 열어 후학들을 길렀는데, 이상룡 일가는 학교 한 칸을 빌려 거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룡은
동토의 조선에서는 105인 사건이란 광풍이 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