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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넘어서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2)(3)(4)(5)(6)

淸山에 2011. 10. 9. 14:42

 

 

 


 
 
“살아서 싸우리라” … 자결 대신 항일 택한 양명학자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25호 | 20110703 입력
 
 
1910년 망국 당시 광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집권당인 노론은 당론으로 매국에 앞장섰다. 전국의 많은 양반 사대부는 일제가 주는 은사금에 기뻐 날뛰었다. 의병은 1909년의 남한대토벌로 쑥대밭이 됐다. 그러나 그런 폐허 속에서 자신의 몸을 던진 일단의 사대부가 있었다.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의 성공회 성당, 1900년대 초에 건립됐다. 망명길에 오른 이건승은 온수리에 사는 신주현의 집에서 망명 첫날 밤을 보냈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②떠나는 사람들-강화학파
 
순종 3년(1910) 8월 22일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의 정식 명칭은 ‘일한병합조약(日韓倂合條約)’이었다. 합방(合邦)이 두 나라가 합친다는 뜻이라면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90CE>)가 고안한 병합이란 말은 강국이 약국을 삼킨다는, 일제의 시각이 그대로 담긴 말이었다. 이렇게 대한제국은 조선 개창부터 치면 51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일제가 정식으로 순종의 통치권을 빼앗은 날은 일주일 후인 8월 29일이었다. 그 일주일 사이에 있었던 조치는 크게 셋이다. 하나는 일제의 물적 수탈 기반을 만드는 것인데, 8월 23일 법률 제7호로 토지조사법(土地調査法)을 제정했다. 이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으로 막대한 국·공유지 및 신고 거부, 또는 누락 토지를 강탈한다. 둘째로 민중의 반발을 누르는 조치였다. 8월 24일에는 내각(內閣) 고시로 정치에 관한 집회와 옥외 대중 집회를 금지한다고 포고했다.
 
위반자는 구류 또는 과료(科料)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셋째가 지배층 회유였다. 8월 24일 대원군의 장남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을 이희(李熹)로 개명하고 흥친왕(興親王)으로 봉한 것을 비롯해 많은 벼슬아치를 승진시키고, 훈장을 주었으며, 이미 죽은 자에게도 벼슬을 추증하거나 시호를 내렸다. 민중 억압과 양반 사대부 회유가 일제의 한국 점령 키워드였다. 양반 사대부가 민중과 결합해 투쟁에 나서면 식민 통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조치를 완료한 8월 29일 드디어 일제는 순종으로부터 통치권을 양도받는 형식으로 대한제국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순종이나 고종 그 누구도 동의한 적 없는 불법 양위권 탈취였다. 같은 날 일왕은 병합 조서를 내리는데 여기에서도 대한제국 황실과 대신들, 양반 사대부들을 우대한다고 규정했다. 고종을 이태왕(李太王), 순종을 이왕(李王)이라 칭하고, 고종의 아들 이강(李堈)과 대원군의 장남 이희(李熹)를 공(公)으로 삼았다. 또한 고종·순종에게 전하(殿下)라는 경칭을 쓰게 했다. 고종과 순종을 대공(大公)으로 격하시키려 했던 이완용의 구상보다는 나은 대접이었다. 일왕은 이날(29일) 발령한 칙령 제318호에서 ‘한국이란 국호를 다시 조선이라 칭한다’고 환원시켰다. 황제국이었던 대한제국을 제후국으로 강등시킨다는 의미였다.
 
 1 조선총독부. 일제는 한국 강점 후 일본 헌법을 적용하지 않고 대권에 의해 통치한다고 규정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2 금책. 흥선대원군의 장남인 완흥군 이재면을 흥친왕에 봉한다는 내용의 금책. 

같은 날 칙령 319호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한다. 조선 총독을 두어 (천황의) 위임 범위 내에서 육군과 해군을 통솔하여 일체의 정무를 통할(統轄)하게 한다’고 규정했다. 일왕은 “(조선) 민중은 직접 짐(朕)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이 역시 사기였다. 한국민은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총독부 설치령은 이미 6월 3일 일본 내각회의에서 결정한 것을 추인한 데 지나지 않았다.
 
일본 내각은 6월 3일 ‘한국에 대한 시정방침(韓國に對する施政方針)’을 결정해 한국에는 일본 헌법을 시행하지 않고 대권(大權)에 의해 통치하기로 결정했다. 대권이란 헌법이 아니라 일왕의 자의에 의해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래서 천황에 직속된 조선총독이 대만처럼 일체의 입법·사법·행정권을 갖게 되었다. 일본 헌법을 적용하면 한국에서도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내각을 구성해야 했기에 총독제를 적용한 것이었다.
 
일왕은 8월 29일 “(한국) 백성이 그 울타리에서 편안치 못하니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여 민중의 복리를 증진함을 위한다”고 표방했지만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도 제외된 한국 민중은 객관적인 일제의 노예였다. 이날 일왕은 칙령 제327호에서 “조선에서 하는 임시 은사(恩賜)에 충당하기 위하여 정부는 3000만 환(<571C>)에 한하여 5분(分) 이자를 붙여 국채를 발행할 수 있다”고 정했다. 이는 황실령(皇室令) 제14호의 조선귀족령(貴族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조치였다.
 
3000만 환의 거금으로 황실과 귀족으로 봉한 자들과 매국 대신들, 그리고 각지의 유력한 양반 사대부들에게 은사금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대원군의 장남 이희, 순종의 장인 윤택영 같은 왕실 인사들, 총리 이완용과 조중응 같은 매국 대신들은 물론 지방의 일부 유력한 양반 사대부들도 일제가 하사할 은사금을 기다렸다. 작위와 은사금은 10월 7일 내려졌다. 대한제국은 완전히 멸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보름 전쯤인 1910년 9월 24일 새벽. 이건창의 동생인 경재(耕齋) 이건승(李建昇)은 선조들의 위패가 있는 강화도 집의 가묘(家廟)로 올라갔다. 할아버지 충정공(忠貞公) 이시원(李是遠)의 위패가 있는 곳이었다. 이시원은 소론계 인사로서는 드물게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에까지 올랐지만 고종 3년(1866)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자 78세로 자결한 인물이었다. 막내 희원(喜遠)에게 집안일을 맡기고 동생 지원(止遠)과 음독한 후 담소하며 죽어갔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건승이야말로 자결의 길을 택하기 좋았다. 선조들의 뒤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먼저 간 자식 뒤를 따를 수 있었다.
 
이건승이 을사년(1905) ‘황현에게 보낸 편지(與黃梅泉書)’에서, “지난해에 아들이 죽고 금년 봄에 며느리마저 죽어 늙은 부부는 눈물만 흘리며 서로 마주보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토로했듯이 고종 41년(1904) 8월 외아들 석하(錫夏)가 후사마저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며느리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건승은 “저는 공(公)적으로 근심스럽고 분노하지만 죽지 못하고, 사(私)적으로도 참혹한 독을 겪었지만 죽지 못했습니다”라고 한을 토로했다. 그러나 맥 놓고 질긴 목숨을 이어간
것은 아니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건승,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1855~1925), 문원(紋園) 홍승헌(洪承憲:1854~1914) 세 사람의 소론계열 양명학자는 목숨을 끊기로 약조하고 간수를 준비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간수를 발견해 엎어버렸다. 그러자 정원하는 자결하기 위해 칼을 집으려 했다. 가족들이 먼저 칼을 잡는 바람에 정원하는 칼날을 잡았다. 정원하의 손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가족들은 통곡하면서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놓았다가는 목이나 팔목을 그어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칼날을 잡은 한쪽 손이 불구가 되었다. 그렇게 을사년을 살아남아 경술년(1910)을 맞이한 것이다.
 
이후 세 선비는 다시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매천 황현의 자결 소식을 듣고도 따라 죽지 않았다. 매천에게는 매천의 길이, 자신들에게는 자신들의 길이 있다고 여겼다. 세 번이나 약사발을 입에 댔다 떼었다는 매천의 길보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살아서 일제에 맞서는 선비의 길이었다.
 
9월 24일 새벽! 이건승은 그 길을 떠났다. 집을 나섰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걸음걸음마다 되돌아보며 마을문을 나선다(步步回頭出洞門)”는 시를 남겼다. 이웃 동네 마실이라도 가듯 대지팡이 하나 짚은 단출한 차림이었다. 일경(日警)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걸어서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 사는 신주현(愼周賢)의 집에 도착했다. 온수리 언덕 위에는 영국 성공회에서 세운 성당이 우뚝 서 있었다. 그날 저녁 이건창의 아들이자 유일한 혈육인 이범하(李範夏)가 이불을 들고 찾아왔다.
 
돌아오기 힘든 길을 떠나는 삼촌에게 이불 가지나마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었다. 201년 전인 숙종 35년(1709) 하곡 정제두(鄭齊斗:1649∼1736)가 스스로의 유배지로 강화를 선택하고 입도(入島)한 이후 줄곧 지켜왔던 선비들의 처신이었다. 주자학과 노론이 주류인 세상에서 비주류로 일관했지만 양반 사대부임에는 틀림없었다. 선비의 도리, 지배층의 도리를 다해야 했다. 황현이 죽기 전 강화도 이건창의 묘소를 참배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9월 26일 이건승은 강화 승천포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개경으로 올라갔다. 개경에는 사헌부 집의와 홍문관 시강(侍講) 등을 역임한 원초(原初) 왕성순(王性淳)이 있었다. 왕성순은 이듬해(1911) 중국 상해에서 황현의 유고 문집 매천집(梅泉集)을 간행하고, 김부식·박지원 등 고려와 조선의 문장가 10인의 문장집인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9214>)를 1921년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에서 발행하기도 하는 창강 김택영의 문인이었다. 개경의 양명학자 왕성순 집에서 이건승은 홍승헌을 기다렸다. 홍승헌은 보재 이상설의 고향이기도 한 충청도 진천에서 주변을 정리하고 올라오기로 약조했다.
 
 
 

 

 
 

 만주 망명한 이건승·홍승헌, 독립운동 씨앗 뿌리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26호 | 20110710 입력
주류가 잘못된 시대에는 그에 맞서는 한 개의 작은 씨앗이 중요하다. 그런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면서 잘못된 시대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열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온 생애를 걸고 망명했던 소수 사대부들의 결단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민국 건국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이건창 생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에 있다. 이건창과 생시에 교유했던 양명학자들은 황현처럼 자결하거나 정원하·홍승헌·이건승처럼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③ 만주 횡도촌


1910년 9월 26일 강화도에서 개성의 원초 왕성순의 집에 도착한 이건승은 진천에서 문원(紋園) 홍승헌(洪承憲)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개성은 상해 북방 남통(南通)으로 망명한 창강 김택영의 고향이었고, 왕성순은 김택영의 문인이었다. 양명학자 김택영은 먼저 배를 타고 남통으로 망명하면서 고려·조선의 문장가 9인(김부식·이제현·장유·이식·김창협·박지원·홍석주·김매순·이건창)의 글을 모은 구가문(九家文)을 왕성순에게 주었다. 왕성순은 1914년 여기에 김택영의 글을 더해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9214>)를 만들고 그 서문에 “창강(滄江) 김택영 선생이 개성에서 우뚝 일어나 고문(古文)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고 칭송했다. 청나라의 학자이자 개혁정치가였던 양계초(梁啓超)도 이 책에 “한 나라의 국민성은 문학으로 나타난다”는 내용의 서문을 썼다.

10월 초하루 진천의 홍승헌이 왕성순의 집에 도착했고, 같은 날 이건승의 종제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1861~1939)과 조카 범하도 당도했다. 원래는 이건방도 망명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모두 떠나버리면 조선 양명학을 계승할 사람이 없었다.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기에 누군가는 식민의 땅에라도 살아남아서 양명학을 전수해야 했다. 이미 생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승은 을사년(1905) 가족들의 저지로 자결에 실패한 후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다가, “내가 비록 방 안에서 말라 죽은들(瘦死) 무슨 이익이 있으랴”면서 의연히 일어나 학교를 건립했다고 회고했다. 그 학교가 이건승이 1906년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설립한 계명의숙(啓明義塾)이었다. 자결이 단기전이라면 저항은 장기전이었다. 학문으로 민족의 뿌리를 지키고, 교육으로 먼 미래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이건방은 남아야 했다. 그 덕분에 일제 식민사학을 비롯해 일제에 들러붙은 학문 자세를 허학(虛學)이라고 비판했던 위당 정인보 같은 학자들이 그 문하에서 배출될 수 있었다.

10월 2일 밤 이건승과 홍승헌은 개성 성서역에서 신의주로 올라가는 경의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왕성순과 이건방, 조카 이범하는 만주로 떠나는 두 선비를 배웅했다.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심정은 같았다. 열차에 몸을 싣고 먼 북방으로 떠나는 홍승헌은 전통 명가 출신의 사대부였다. 선조의 부마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후손이자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5대 종손이었다. 홍양호는 영조 40년(1764) 일본에 가는 통신사(通信使) 일행에게 벚나무 묘목을 부탁해 서울 우이동을 벚꽃 경승지로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홍승헌의 조부 홍익주(洪翼周)는 충청도 진천현감을 역임하면서 진천에도 터를 잡았다. 진천이 강화도와 함께 조선 양명학의 한 반향(班鄕)이 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건승·홍승헌보다 조금 늦게 망명하는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망명일기인 서사록(西徙錄)에서 홍승헌을 홍 참판이라고 부르고 있다. 홍승헌은 고종 27년(1891) 현재의 검찰총장 격인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같은 해 종2품 이조참판을 역임했기 때문이다.

이상설 생가 및 생가 마을. 충북 진천읍 산척리에 있다. 홍승헌의 조부 홍익주와 정원하의 부친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으며 양명학의 반향이 되었다. 이상설도 양명학을 공부했다.
이건승·홍승헌은 10월 3일 밤 신의주 종점에서 하차했다. 일제가 만주 망명을 막기 위해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어서 쉽게 도강할 수 없었다. 두 망명객은 사막촌(四幕村) 주막에 몸을 숨긴 채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사막촌 주막은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지사들의 비밀 거처였다.

만주에는 이미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가 망명해 기다리고 있었다. 정원하도 홍승헌 못지않은 명가 출신이었다. 현종 때 우의정을 역임한 정유성(鄭維城)이 8대조, 강화학의 비조(鼻祖)인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가 6대조다. 조부 정문승(鄭文升)은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까지 올랐고, 부친 정기석(鄭箕錫)도 지평현감과 안성군수 등을 역임했다. 정원하가 어린 나이에 진사과에 합격했을 때 지금의 서대문에서 반송방(盤松坊:아현동·현저동 부근) 집까지 축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을 정도로 축복받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 정기석이 진천에 터를 잡으면서 진천에 살았던 정원하도 고종 19년(1882) 사간원 대사간, 승지, 대사헌 같은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나라의 운명이 요상하게 돌아가면서 정원하는 벼슬을 집어던진다. 벼슬을 그만둔 정원하는 선조의 고향인 강화도로 들어가 홍승헌·이건창 형제 등과 양명학을 강론했다.

이건창은 ‘난고(亂藁)’라는 시의 서문에서 정원하와 홍승헌은 진천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강화도 하현(霞峴:하곡)에 도착해 처음 대화를 나누었다고 전하는 것을 비롯해 자신의 문집인 명미당집(明美堂集) 곳곳에 두 사람과의 우정과 학문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건승은 황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형(先兄:이건창)께서 살아계셨으면 의(義)를 어느 곳에 두었을지 알 수 없지만 하늘이 준 수명대로 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이건창도 살아있었다면 정원하·이건승·홍승헌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을 인물이었다. 나라를 빼앗기자 정원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망명을 결심했다.

이건승·홍문헌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은 몸은 죽고 정신이 사는 길이고, 현실에서는 죽고 역사에서는 사는 길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광복(光復)은커녕 그 조짐도 찾기 어려웠다. 왕실 일부와 집권당 노론이 조직적으로 매국에 나선 나라였다. 일본군은 ‘남한대토벌’이란 작전명으로 호남을 중심으로 삼남 일대의 의병들을 그물 치듯 살육했다.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광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 불가능의 길이 성현들의 글을 읽은 인간 세상 식자(識者)의 길이었다. 정원하에겐 떠나기에 앞서 처리할 일이 남아 있었다. 어린 손녀들의 혼처를 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15세 장손녀를 생전의 약조대로 이건창의 장손자 이덕상(李德商)에게 출가시키고 12세 손녀는 옥천군 청산리 조동식(趙東式)의 집안으로 시집 보냈다. 모두 세교(世交)가 있던 소론가 집안이었다. 정인보의 제자인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열두 살, 아니 열한 살 어린 신부가 문의(文義)현 대원산(大圓山)에서 청산리까지 신행길 가마에서 내리는데 하도 어리고 키가 낮아서 연지곤지 찍고 종종걸음으로 서서 걸어 나오더라”는 일화를 전해준다. 이렇게 주변 정리를 마친 정원하가 가장 먼저 압록강을 건넌 것이다. 이미 만 55세의 장년이었다.

이건승과 홍승헌이 신의주 사막촌에서 강물이 얼기를 기다리던 10월 7일 일제는 76명의 왕족과 사대부들에게 작위와 은사금을 수여했다. 이른바 ‘합방공로작’이었다. 다음날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각 지방장관에게 내려 친임관(親任官)·칙임관(勅任官) 등의 대한제국 전 관료와 양반·유생들에게 ‘은사공채(恩賜公債)’를 주었다.

유림(儒林)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은 자서전 벽옹칠십삼년회상기(<8E84>翁七十三年回想記)에서 “그때에 왜정(倭政)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고 전하고 있다. 김창숙은 “나는 혹 이런 자들을 만나면 침을 뱉으며, ‘돈에 팔려서 적에게 아첨하는 자는 바로 개돼지다. 명색 양반이라면서 효자 열녀 표창에 끼어든단 말이냐?’라고 꾸짖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 늘 “나라가 망하기 전 사대부가 먼저 망해서/양정에 춤추는 자들 대부분 최가, 노가더라(亡國先亡士大夫 梁庭舞蹈半崔盧)”라는 시구를 읊으며 통곡했다고 말했다.

이 시는 매천 황현의 ‘형저기우(荊渚騎牛)’인데 당(唐)나라가 망했는데 귀족인 최씨, 노씨들이 양(梁)나라에 붙은 것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노론 유력 가문 출신들이 매국에 앞장선 것을 비판하는 황현의 시가 김창숙 같은 지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매국에 앞장선 이들의 것이었다.

12월 초하루 새벽 이건승과 홍승헌은 중국인이 끄는 썰매에 몸을 싣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 대안 안동현(현재 단동) 구련성(九連城)에서 이국의 첫 밤을 보냈다. 이튿날 새벽 두 선비는 북상길에 올랐고 12월 7일 첫 목표지인 횡도촌(橫道村)에 도착했다. 흥도촌(興道村), 항도촌(恒道村)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 정원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올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서전서숙 세운 이상설 … 백성들의 복, 사대부의 영예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27호 | 20110717 입력
1905년의 외교권 박탈은 사실상 대한제국의 종말이었다. 1907년의 군대 해산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도, 군대도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국왕은 순종이었지만 모든 주요 직책은 매국 친일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춥고 긴 동토(凍土)였다.
만주 용정촌에 있던 서전서숙.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작업의 일환으로 이상설이 1906년에 건립한 학교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④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국내에서는 더 이상 숨쉴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국외로 나가 독립운동 근거지를 만들자는 구상이 나왔다. 국외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군대를 만들어 결정적인 시기에 국내 진공작전을 펼쳐서 나라를 되찾자는 ‘독립전쟁론(獨立戰爭論)’이었다. 이 운동을 따라가다 보면 공통적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1867~1932)이다.

이 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다. 첫 번째는 을사늑약 직후이고, 두 번째는 망국 직후이다. 이회영의 평생 동지였던 독립운동가 이관직(李觀稙)은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서 “1906년 여름 (이회영) 선생은 광복운동의 원대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만 행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이상설·유완무·이동녕·장유순(張裕淳) 등과 심심밀의(深深密議) 해서 광복운동을 만주에서 전개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건설할 적임자로 손꼽힌 인물이 바로 이상설이었다. 이회영과 함께 활동했던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였던 이정규(李丁奎)는 우당 이회영 약전(略傳)에서 ‘이회영이 이상설을 해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을 지도할 인물로 추천했다’고 전한다. 이관직은 이상설 자신이 “내가 재주 없는 사람이지만 만주에 나아가 운동을 열고자 한다”고 자청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이회영) 선생이 성(城:서울) 모퉁이에서 만리절역(萬里絶域: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홀로 떠나는 지우(知友:이상설)를 전송했다”고 말했다. 이때 이상설의 나이 만 서른여섯이었다. 그가 1917년 망명지 연해주(沿海州) 니콜리스크(雙城子)에서 만 47세의 나이로 병사했을 때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통곡하고 두고두고 아쉬워한 것은 이유가 있다. 명실상부한 국사(國士)였던 그를 제쳐두고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노선 투쟁과 자리다툼을 벌이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1 이상설이 의병장 출신의 이승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한. 2 유인석의 초상화.
망명 당시 이상설은 대한제국의 고관을 역임한데다 국제적 시야까지 갖추고 있었다. 양명학의 한 반향(班鄕)이었던 충북 진천군 덕산면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동부승지 이용우(李用雨)의 양자로 서울로 올라와 이회영과 같은 동네에서 자랐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일화는 많다. 10대 때 신흥사(新興寺)에서 학우들과 합숙하면서 수학·영어·법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는데, 위당 정인보는 “통역 정도는 오히려 얕은 데 속해서 스승 없이 영어에 능통하였다”라고 회고했다.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는데, 선교사 헐버트에게 배웠다고 전해지는 것은 회화일 것이다.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은 “이상설은 모든 분야의 학문을 거의 독학으로 득달했는데 하루는 논리학에 대한 문제를 반나절이나 씨름하다 못 풀고 낮잠을 자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풀었다고 기뻐한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정인보의 제자인 강화학파 민영규 교수는 “보재와 치재(恥齋:이범세)가 사랑채 뒷방에 몸을 숨기고 왕양명(王陽明)을 공부하며 하곡(霞谷:정제두) 등 강화소전(江華所傳)을 읽고 있었다”고 전하는 대로 소론가 자제답게 양명학을 공부했다. 이건창(李建昌)이 24세의 이상설을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뒤를 이을 대학자로 지목한 것은 조선의 학문 전통을 바탕으로 양명학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흡수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정인보가 “조정에서는 그(이상설)를 물에 뜬 돛대로 생각했고, 선비들은 주석(柱石)으로 의지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스물여섯의 나이로 관제 개혁 전의 성균관 대사성에 해당하는 성균관 관장에 올랐다. 이건창이 “(이상설은) 나라의 부유함의 상징이요, 백성들의 복이요, 사대부의 영예”라고 말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상설은 자신의 영달보다 나라의 앞날을 더 앞세우면서 고난의 인생길에 접어들게 된다. 1905년 정2품 의정부 참찬이던 이상설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머리를 돌에 찧어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 광경을 때마침 백범 김구가 목도하고 백범일지에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 가면서 울부짖었다”라고 썼다. 을사늑약 체결 후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1906년 4월 18일 양부(養父) 이용우의 제사를 지낸 후 망명길에 나선다. 이관직은 이상설의 망명 행로에 대해 “웃는 얼굴로 선생(이회영)을 이별하고 인천항에 이르러 중국인 상선에 올라 상해로 잠항(潛航:배에 숨어서 바다를 건넘)하여 거기서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해 용정촌에 안착했다”고 묘사했다.

용정촌이 현재의 연길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인데, 이상설은 천주교 회장 최병익의 집을 매입해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연다. 북간도이면서 동만주에 속했던 용정촌은 북동쪽으로는 러시아령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로 국내와 통하는 교통 요지이고 무엇보다 교포들이 계속 이주하고 있어서 국외 독립운동기지로 적당한 장소였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 운동이 우리 역사에 끼친 중요한 업적은 좁은 반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대주의적 유학자들이 만든 쇄국은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깨져나갔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이야말로 국제화의 선구자였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상설이었다. 이상설은 1907년 4월 용정촌을 떠나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갔다가 1908년 8월에는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참석하고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는 등 세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유림(儒林) 출신 의병장들도 망명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강원도 춘천 출신의 유인석(柳麟錫)과 경상도 성주 출신의 이승희(李承熙)였다. 유인석과 이승희는 같은 유림이지만 사상적 배경은 조금 달랐다.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유인석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1792~1868)의 문인이었는데, 이항로는 이(理)를 기(氣)보다 높이는 ‘이존기비(理尊氣卑)’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편안해지나 기가 주가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지고 천하가 위태로워진다고 보았다. 이런 심전주리설(心專主理說)은 대외적 관점에서 이(理)를 명나라·소중화(조선)로 대치하고, 기(氣)를 일본·서양으로 대치하면 강력한 침략 저항 논리가 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국내적인 관점에서 ‘이’가 양반계급으로 대치되고 ‘기’가 일반 백성으로 대치되면 다시 성리학 체제로 회귀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항로가 고종 3년(1866) 대원군이 철폐한 만동묘(萬東廟:명 신종·의종의 사당) 복설을 청한 것이 그의 이런 사상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이승희는 영남 유림의 거두였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의 아들이었다. 이진상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주자)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심(心)과 이(理)를 별개로 본 것과 달리 심(心)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주장했다.

심즉리설은 조선의 주자학자들이 이단으로 몰았던 왕양명의 주요 사상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양명학자로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상으로는 양명학에 동조했던 셈이다. 이진상의 학맥인 한주학파에서 면우(<4FDB>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 회당(晦堂) 장석영(張錫
英:1851~1929), 심산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다. 이승희의 문집인 한계유고(韓溪遺稿) 연보는 이승희가 을사오적 참수 상소를 올렸다가 대구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렀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 때는 경상도 성주 국채보상회(國債報償會) 회장을 역임한 개신유학자였다고 전한다.

이승희는 1908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함북 사람 김(金) 감리(監理)의 집에 거주할 때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상설을 만난다. 한계유고 연보는 그가 1909년 러시아령 연추(延秋)를 거쳐 그해 겨울 동가강(冬移住) 밀산부(蜜山府)로 이주했다면서 “선생(이승희)이 보재(이상설)와 상의해 황무지를 매입하고 먼저 한기욱(韓基昱)의 집에 들어가 우거하면서 한인들에게 입주해 개간할 것을 청하니 비로소 100여 호가 되어 한흥동의 규약(民約)과 학사(學舍)를 설치하고 마을 이름을 한흥(韓興)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렇게 망국 이전 만주 용정촌에 이어 한민족이 흥하는 터전이란 뜻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한흥동(韓興洞)이 개신 유림과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교육·군대·돈·조직 … 선각자들은 망국 때 광복을 준비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28호 | 20110723 입력
누군가는 뒤에 오는 세대를 위해 씨를 뿌려야 한다. 또 누군가는 미래를 위해 거름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꽃을 피운 미래 세대는 자신을 위해 씨를 뿌리고 거름이 되었던 선조들을 나라의 건국 정신으로 삼는다. 몸은 비록 죽었어도 희생자의 정신은 그렇게 역사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추가가로 가는 길. 우당 이회영은 남만주에 있는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를 국외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사진가 권태균 제공]
절망을 넘어서
⑤ 독립방략


1908년 여름.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두만강을 건넜다. 목적지는 블라디보스토크. 대한제국의 형체는 남아 있었지만 외교권과 군대가 해산된 나라는 종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망국을 기정사실로 여긴 이회영은 나라를 되찾을 방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상설을 찾아갔다. 대한제국 보병 부위였던 이관직(李觀稙:1882~1972)은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서 이상설이 이회영에게 세계 정세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전한다.

베델 묘비. 서울 양화진에 있다. 비문은 원래 장지연이 지은 것이었으나 일제가 파괴해 1964년 다시 세워졌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에 쌍철(雙鐵:복선)을 부설하고, 만주와 몽고의 국경에 많은 군대를 배치하며 군함과 병기를 서둘러 제조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일본에 대한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동양 진출에 장애가 되자 그 세력을 좌절시키려 하고 있고, 중국 또한 왜적을 원수 보듯 미워하며 절치부심(切齒腐心)하고 있으니 중국이 비록 약하지만 4억 인구를 쉽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설은 “조만간 동양에 다시 전운(戰雲)이 일 것”이라면서 “모든 국력을 저축하여 준비하다가 좋은 기회를 잡아 의로운 깃발을 높이 들면 조국 광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설은 시대를 너무 앞서나갔다. 이상설이 말한 국제 정세, 즉 일본과 미국·중국·러시아가 충돌하는 정세는 1930~1940년대에야 조성된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토의 끝에 네 가지의 운동방침을 정했다.
“1, 지사들을 규합하여 국민 교육을 장려할 것. 2,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할 것. 3, 비밀 결사를 조직할 것. 4, 운동자금을 준비할 것.”

우당 이회영.
이상설과 이회영이 세운 방략의 핵심은 ‘국내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와 광복군 양성 기지를 만들고, 그를 위한 운동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후 다양한 운동 노선이 나오지만 한국 독립운동의 방략은 대체로 이 틀 내에서 진행되었다.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론이 망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고, 광복군 양성이 ‘독립전쟁론’으로 이어진다. 194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양성했던 것도 이 노선의 연장선상이었다.

이회영의 집안은 삼한갑족(三韓甲族) 또는 삼한고가(三韓古家)로 불린 명문가였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10대조 이항복(李恒福)을 필두로 영조 때 영의정이었던 이광좌(李光佐)·이종성(李宗城) 등 모두 여섯 명의 정승과 두 명의 대제학을 배출했다. 소론 온건파인 완소(緩少)로서 노론 일당독재가 계속되던 조선 후기에도 탕평책을 명분 삼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이회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도 이조판서·우찬성 등을 역임했으니 삼한갑족이란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이 만든 ‘비밀 결사조직’이 신민회(新民會)였다.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서간도 시종기(西間島始終記:가슴에 품은 뜻 하늘에 사무쳐)에서 이회영이 “남대문 상동 청년학원 학감(學監)으로 근무하시니, 그 학교 선생은 전덕기(全德基:목사)·김진호·이용태·이동녕 씨 등 다섯 분이다. 이들은 비밀 독립운동(신민회)의 최초 발기인이시니, 팔도(八道)의 운동자들에겐 상동학교가 기관소(機關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회고했다. 상동교회 부설 상동 청년학원이 비밀결사 신민회의 산실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신민회는 상동교회 외에도 영국인 베델(Bethell E.T:裵說)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었던 양기탁(梁起鐸) 중심의 애국계몽운동 세력과 안창호(安昌浩) 중심의 서북·미주 지역의 신흥 시민세력 등도 결집한 비밀결사였다. 당초에는 신민회가 조직 차원에서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건설운동을 전개했다. 인원과 자금을 신민회에서 분담하기로 했다는 뜻이다. 1949년 공보처에서 발간한 채근식(蔡根植)의 무장독립운동비사(秘史)는 이렇게 적고 있다.

“1909년 봄에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는 신민회 간부의 비밀회의가 열렸으니… 이 회의에서 결정한 안건은 독립기지 건설 건과 군관학교 설치 건이었다… 간부 이회영·이동녕·주진수(朱進洙)·장유순(張裕淳) 등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에 적당한 지점을 매수케 하였다. 이회영은 남만주를 유력(遊歷:여러 곳을 돌아다님)하며….”

이회영·이동녕·장유순·이관식 등은 1910년 8월 초 신민회의 결의에 따라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했다. 이은숙 여사는 이때 이회영 등이 “마치 백지(白紙) 장수같이 백지 몇 권씩 지고 남만주 시찰을 떠났다”고 전하고 있다. 한반도와 지형이 비슷한 압록강 건너편 남만주(서간도) 일대에서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기 위한 도강(渡江)이었다. 이회영 일행이 남만주 일대를 답사하다가 약 한 달 후 귀국하니 나라는 완전히 망해 있었다.

이은숙 여사는 “이때 조선은 한일합방 당시라, 공기가 흉흉하여 친일파는 기세등등 살기(殺氣) 험악하고, 배일자(排日者:일본을 배척하는 자)는 한심 처량하지만 어찌하리오”라고 전하고 있다. 공포 분위기가 나라를 뒤덮은 동토(凍土)였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한국민을 일본 헌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다. 일왕의 위임을 받은 조선 총독이 제령(制令)으로 직접 통치하는 특별 지역이었다. 일왕의 칙령 제324호 1조는 “조선에서 법률을 요하는 사항은 조선 총독의 명령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명시했는데, 조선 총독의 명령이 제령이었다. 강제 합병 당일인 1910년 8월 29일자 ‘조선총독부관보(朝鮮總督府官報)’는 ‘조선총독이 발하는 제령은 조선총독이 서명하여 공포 연·원·일을 기입하여 공포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선거로 구성되는 의회가 아니라 조선 총독에게 입법권도 있다는 뜻이다. 역대 조선 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이 임명되었다.

과거 독립기관이었던 사법청(司法廳)은 총독부의 일개 부서인 사법부(司法部)로 격하되어 총독 산하에 두었다. 조선총독은 행정·입법·사법권을 모두 장악한 전제군주였다. 게다가 군인 신분의 헌병(憲兵)이 칼을 찬 채 경찰업무를 수행하는 헌병 경찰제도를 시행했다. 서울에만 외국의 시선을 의식해 경무총장(警務總長)을 두었을 뿐 각 도는 헌병대장이 경무부장(警務部長:지금의 도경국장)을 겸임했다. ‘조선총독부 관보’ 1910년 12월 16일자는 조선총독의 제령(制令) 10호인 ‘범죄즉결례(犯罪卽決例)’에 대해 싣고 있다. ‘범죄 즉결처분 사례’라는 뜻인데, 핵심은 경찰서장 또는 그 직무 취급자가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그리고 100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재판이 아니라 현역 군인인 헌병 경찰이 자의적으로 구속하거나 벌금형을 내릴 수 있었고, 태형(笞刑)까지 칠 수 있었다. 총독부의 행정명령을 어기면 재판 없이 구속되거나 벌금이 부과되고, 태형까지 맞아야 했다.

1912년 12월 30일자 훈령(訓令) 제40호의 ‘태형 집행 심득(心得:준칙)’ 제1조에 따르면 “수형자를 형판(刑板) 위에 엎드려 눕히고 양팔과 두 다리를 형판에 묶은 다음 바지를 벗기고 둔부(臀部:궁둥이)를 태(笞:매)로 강타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제는 매국노들과 각지의 양반 사대부들에게 은사금을 주어 회유하는 한편 태형을 포함한 ‘범죄즉결례’로 일반 민중을 위협했다.

물론 은사금을 받고 기뻐 날뛰는 사대부가 있는 반면 이를 거부한 사대부도 있었다. 유학자 송상도(宋相燾)는 기려수필(騎驪隨筆)에서 원주의 변필환(邊弼煥)의 부인 이씨가 어려운 처지에서도 은사금을 거부한 사례를 전한다. 이장(里長)이 “이 돈을 받지 않으면 내가 일본 경찰에 죽는다”라고 하자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초개(草芥) 같은 목숨이 아까우냐?”고 크게 꾸짖었다는 것이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당시 왜적이 특히 선생을 엄중하게 감시하여 근역(槿域:무궁화 강역) 산하에 머리를 눕힐 곳이 없게 되었다. 또 생사를 함께하고 광복 운동의 길에서 손을 잡고 활동하던 동지 가운데는 왜적에게 붙어 작록(爵祿)을 받은 자도 있었고, 왜적의 압박이 두려워 낙심하고 귀가한 사람도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누구는 변절하고, 누구는 포기하더라도 누구는 이 일을 해야 했다. 뒤 세대를 위해서. 이회영은 남만주의 유하현 횡도촌(橫道村)과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를 독립운동 근거지로 삼았다.

이역 만주의 이 작은 마을들이 나라를 되살릴 터전이었다. 이회영은 집안의 세교(世交)를 통해, 교육사업 때 맺은 인맥을 통해, 그리고 신민회를 통해 만주로 망명할 동지들을 물색했다. 망국의 역사는 이렇게 광복의 역사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이회영 6형제, 광복자금 600억 들고 ‘가문의 이동’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제229호 | 20110730 입력
한 사회의 지배층이 권력이나 금력이 아니라 도덕성과 정신으로 일반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처럼 건강한 사회는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지배층의 존재는 그 사회의 가장 강한 힘이다. 게다가 온 가족이 모든 것을 바쳤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혹한 속 집단망명. 우당 이회영은 1911년 정월 6형제 일가족 60여 명을 이끌고 횡도촌에 도착했다. [그림=백범영 한국화가, 용인대 미대 교수]
절망을 넘어서
⑥ 일가 망명


여류 독립운동가였던 정정화는 자서전 장강일기(長江日記)에서 일제는 ‘독립운동은 상놈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선전했다고 전하고 있다. 일제가 수작자(授爵者)들과 양반들에게 막대한 은사금을 내린 데는 독립운동을 상민들만의 것으로 만들어 천시케 하려는 이런 교묘한 계산이 있었다. 정정화 여사의 이 말은 구한말 공조판서 등을 역임했고 남작의 작위를 받았던 시아버지 김가진(金嘉鎭)이 1919년 10월 상해로 망명한 뒤 일제의 선전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만 양반 사대부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나선 인물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사대부들의 횡도촌 집단 망명은 더욱 큰 가치가 있었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자서전 서간도시종기(西間島始終記)에서 “(이회영이) 안동현(지금의 단동)에서 오백 리 되는 횡도촌으로 가셔서 임시로 자리를 잡고, 석오(石吾) 이동녕씨 친족 이병삼(李炳三)씨를 그곳으로 먼저 솔권(率眷)해서 안정을 시키고, 앞으로 오는 동지의 편리함에 대한 책임을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상설·이회영·이동녕 등은 1906년 북간도 용정촌에 서전서숙을 설립했던 경험을 횡도촌 건설에 되살렸다. 이은숙 여사는 이회영이 이때 ‘이병삼에게 식량과 김장도 미리 준비하라고 부탁했다’고 전한다. 이런 준비를 마치고 귀국한 이회영·이동녕은 이은숙 여사가 “팔도에 있는 동지들께 연락하여 1차로 가는 분들을 차차로 보냈다”고 회고한 대로 집단 망명을 실행했다.

또한 이회영은 집안 형제들을 설득했다. 이관직의 우당 이회영 실기(實記)에는 이회영이 형제들에게 “지금 한·일 강제병합의 괴변으로 인하여 한반도 산하가 왜적의 것이 되고 말았다. 우리 형제가 당당한 명문 호족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라고 설득했다고 전한다. 이회영은 만주로 이주해 일제와 싸우는 것이 “대한 민족 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백사(白沙:이항복)공의 후손된 도리라고 생각한다”면서 함께 만주로 가자고 설득했다. 이회영은 6형제 중 넷째로서 위로 이건영·석영·철영이 있었고 아래로 시영(초대 부통령)·호영이 있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에 나섰던 명가 출신들에게는 봉건적 구습 타파에 앞장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회영은 첫부인 달성 서씨와 사별한 후 한산 이씨 은숙(恩淑) 여사와 재혼하는데 이 여사의 자서전 서간도시종기에는 “무신년(1908) 10월 20일에 상동 예배당에서 결혼 거행을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전통 명가 출신이 교회에서 혼인식을 올린 자체가 사건이었다. 이회영과 같이 활동했던 권오돈(權五惇)은 “(이회영이)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놓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고 전한다. 횡도촌에 합류하는 석주 이상룡(李相龍)의 연보인 선부군유사(先父君遺事)도 이상룡이 망명하기 전 “노비 문서를 다 불태워서 각각 흩어져 돌아가서 양민(良民)이 되게 했다”고 전한다.

이상룡의 사돈이기도 했던 왕산(旺山) 허위(許蔿)도 마찬가지였다. 1908년 13도창의군 군사장(軍師長)으로서 의병들의 서울진공작전을 총지휘했던 허위는 1904년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자 제출한 10가지 개혁안 중에 아홉 번째가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신분제, 남녀차별 같은 봉건적 인습이 조선 사회를 낙후시켜 식민지로 전락시켰다는 뼈아픈 반성이 담긴 행위였다.

이정규는 우당 이회영 약전에서 “(이회영) 선생의 의견을 듣자 (형제) 모두가 흔연히 (망명에) 찬동하였다”고 전한다. 보통 봉제사(奉祭祀)를 위해 한 사람은 남았지만 이회영 형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식민의 땅에서 드리는 제사를 조상들이 흠양하지 않으리란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여섯 대가족의 망명 준비는 쉽지 않았다. 이은숙은 서간도 시종기에서 망명 준비에 대해서 이렇게 회고했다. “여러 형제분이 일시에 합력하여 만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비밀리에 전답과 가옥·부동산을 방매(放賣)하는데 여러 집이 일시에 방매를 하느라 이 얼마나 극난하리오. 그때만 해도 여러 형제 집이 예전 대가(大家)의 범절로 남종 여비가 무수하여 하속(下屬)의 입을 막을 수 없는 데다 한편 조사는 심했다.” 급매하다 보니 제값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일가가 전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40여만원으로 당시 3원 정도이던 쌀 한 섬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현재 돈으론 대략 600억원의 거금이 된다.

일가가 이런 거금을 마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둘째 석영의 동참이 결정적이었다. 이은숙 여사가 “영석장(潁石丈:이석영)은 우당 둘째 종씨(從氏)인데, 셋째 종숙(從叔) 댁으로 양자(養子) 가셨다. 양가(養家) 재산을 가지고 생가(生家) 아우들과 뜻이 합하셔서 만여 석 재산과 가옥을 모두 방매했다”고 전하는 것처럼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李裕元)에게 출계(出系)해 상속 받은 1만여 석의 재산을 내놓았던 것이다. 1911년 발생하는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의 자금 모금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이회영 형제의 재산이 주요한 ‘광복 자금’이 되었다.

이회영 일가는 가산을 급히 정리하고 서울을 떠나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은숙 여사는 “신의주에 연락기관을 정하여 타인 보기에는 주막(酒幕)으로 행인에게 밥도 팔고 술도 팔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타인 보기에는 주막’이 이건승·홍승헌 일행이 달포 이상 몸을 숨겼던 신의주 사막촌(四幕村)이었다. 이은숙 여사는 압록강 도강 장면에 대해 “국경이라 경찰의 경비가 철통같이 엄숙하지만 새벽 세 시쯤은 안심하는 때다. 중국 노동자가 강빙(江氷:얼어붙은 강)에서 사람을 태워 가는 썰매를 타면 약 두 시간 만에 안동현에 도착된다. 그러면 이동녕씨 매부 이선구(李宣九)씨가 마중 나와 처소(處所)로 간다”고 묘사했다. 압록강을 건넌 망명객들은 안동현에서 이동녕의 매부 이선구의 안내를 받아 횡도촌으로 향했다. 횡도촌에서는 이동녕의 친족 이병삼이 망명객들을 맞이했다.

이회영 일가는 워낙 대가족이었기에 여럿으로 나누어 각각 압록강을 건넜다. 이은숙 여사는 “우당장(이회영)은 며칠 후에 오신다고 하여 내가 아이를 데리고 떠났다. 신의주에 도착하여 몇 시간 머물다가 새벽에 안동현에 도착하니, 영석장(이석영)께서 마중 나오셔서 반기시며 ‘무사히 넘어 다행이라’ 하시던 말씀을 지금도 상상이 되도다”라고 회고했다. 이은숙은 “12월 27일에 (이회영이) 국경을 무사히 넘어 도착하시니 상하 없이 반갑게 만나 과세(過歲:새해 맞이)도 경사롭게 지냈으나 부모지국(父母之國)을 버린 망명객들이 무슨 흥분이 있으니요”라고 회고했다.

1910년에 나라는 빼앗겼지만 1911년 새해는 망명지에서 맞이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1911년 정월 9일 6형제 일가족 40~60명은 말과 마차 10여 대에 나누어 타고 안동현을 떠나 횡도촌으로 향했다. 이은숙은 “6~7일 지독한 추위를 좁은 차 속에서 고생하던 말을 어찌 다 적으리요. 그러나 괴로운 사색(辭色)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면서 “종일 백여 리를 행해도 큰 쾌전(快廛:큰 가게)이 아니면 백여 필이 넘는 말을 어찌 두리요. 밤중이라도 큰 쾌전을 못 만나면 밤을 새며 가는 때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렇게 6~7일을 달려 이회영 일가는 횡도촌에 도착했다.

횡도촌에는 먼저 도착한 정원하·홍승헌·이건승 같은 소론계 강화학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작은 마을 횡도촌에서 상봉한 것이었다. 강화학파의 행적을 추적한 서여(西餘) 민영규(閔泳珪) 교수는 강화학 최후의 광경에서 “두 행차가 서로 교차되는 순간, 응당 거기엔 억제되었던 감정의 폭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이건승이 남긴 망명 기록 해경당수초 3책 어느 구석에서도 그러한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다. 비정하리만큼 무장된 함구(緘口)가 있을 따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망국에 무한책임을 느끼는 선비들로서 망명지에서 상봉한 것을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또한 순탄하지 못할 앞날도 감정의 표출을 자제케 했다. 훗날 민족단일전선 신간회의 회장이 되는 월남 이상재(李商在)는 이회영 일가의 망명 소식을 듣고,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百世淸風)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라고 평했다. 그러나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에게는 이후에도 시련의 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