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미술 시장 16년째 빙하기
[중앙일보]
한·중 미술품 세계 경매 분석 1996년 70억 낙찰 조선백자 지금까지 그 가격 그대로 중국 최고가 도자기 973억원
한국 미술품이 세계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16년째 정체 상태로, 날아가는 중국 시장에 비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란 얘기도 나온다. 본지가 전 세계 주요 경매에서 다뤄진 한·중 미술품 거래 현황을 집계한 결과 한국 미술에선 1996년 뉴욕 크리스티에서 거래된 철화백자 운룡문 항아리(鐵花白磁雲龍文壺)가 1위를 기록했다. 841만 7500달러로 당시 환율로 70억원대, 아시아 미술품 거래 사상 최고가였다. 우리 1인당 국민소득이 16년간 1.7배 늘도록 미술 시장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셈이다.
#1. 5일 홍콩 소더비 경매장. 중국 명(明)대 청화백자 매병(梅甁)이 2160만 달러(약 258억원)에 팔렸다. 추정가 1300만 달러(약 153억원)를 훌쩍 넘기며 명대 도자기로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홍콩 소더비는 이번 경매의 성공으로 연 낙찰액 10억 달러 시대를 열었다. 그 원동력은 세계 경제위기에도 최고가의 미술품을 사들인 중국 부자들이었다.
#2. 지난달 19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 경매장. 자코메티(1901∼66)의 조각 ‘아네트X’가 14억원에 팔리자 200여 명이 모여 있던 장내엔 박수가 터졌다. 그러나 “계속해서 고미술로 넘어가겠습니다”는 경매사의 안내에 관객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추정가 10억원으로 고서적 분야 기록 경신이 기대됐던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서간첩은 유찰됐다. 장내엔 70여 명만 남아 있었다.
반면 중국 고미술은 상승세다. 지난해 11월 청(淸) 건륭제 때의 ‘길경유여(吉慶有余)’ 무늬 도자기가 런던 베인브리지 경매에서 973억원대에 팔린 것이 1위다. 96년의 우리 철화백자보다 14배 비싸다. 송(宋)대 서화가 황정견(黃庭堅·1045~1105)의 글씨(773억원대) 등 10위까지가 2010년 5월∼2011년 6월까지 1년 새 만들어졌다. 이런 추세 속에 지난 5일 홍콩에서 신기록이 또 나왔다.
한국 미술품이 그 희소성과 가치에 비해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시장의 수치로 확인됐다. 한창 비상 중인 중국 시장에 비하면 빙하기에 비견된다. 한국 미술이기에 저평가되는 것, 열기가 식은 한국 시장에선 사봐야 값이 오르지 않을 거라는 암울한 전망이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미술정보 윤철규(서울옥션 전 대표) 대표는 “90년대까지 동양 도자기 중 가장 비싼 것이 한국 것이었지만 다 옛날얘기가 됐다”며 “18세기 전후 왕실에서 쓰던 대형 용항아리들은 극도로 귀한데도 제값을 못 받고 있다”고 말했다.
서진수 미술시장연구소장은 “제 집에서도 대접 못 받는 더메스틱 디스카운트(domestic discount)가 문제다. 미술 시장의 붐은 자국 컬렉터(수집가)가 사들이는 데서 시작된다”며 “중국 미술은 고평가, 우리 미술은 저평가돼 있다고들 하지만 그게 바로 공개 시장의 데이터로 나타난 따끔한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권근영 기자
◆청화백자 운룡문 항아리(靑畵白磁雲龍文壺)= 코발트계의 청색 안료로 여의주를 희롱하며 구름 속을 나는 용을 그린 백자. 국내외 미술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팔린 한국 고미술품 상위 10점 중 5점이 청화백자, 그중 세 점이 운룡문 항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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