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08

淸山에 2011. 9. 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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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원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제 부모님의 새 주소를 알 수 있을까 해서."
  "여기선 모릅니다. 2층의 배달과로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레버는 지붕이 절반밖에 없는 2층으로 올라갔다. 무너진 천장사이로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바라볼 수 있었다.
  "새로운 주소는 없습니다."
  창가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대꾸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소포를 하겐가로 배달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신 구역의
배달부에게 알아볼 수는 있습니다."
  "그 배달부는 어디에 있죠?"
  여자는 시계를 보았다.
  "지금 구역을 돌고 있어요. 오후 4시경에 들르면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모르겠는데 배달부가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모르겠지요. 배달부도 우리에게 주소를 묻고 가니까. 그래도 배달부에게
알아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야 안심할 수 있대요. 사람들이란 대개
그렇지 않아요?"
  "아마도."
  그레버는 소포를 들고 층계를 내려왔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3주일 전에 발송한
것이었다. 전선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곳에서는 빨리 도착한 것이다. 그는
거리에 선 채로 소포를 풀어 보았다. 안에는 건과자가 한 봉지, 모사양말이 한 켤레,
담배, 그리고 어머니의 편지가 들어 있었다.
  그는 편지를 읽어보았다. 주소의 변경 사항이나 공습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는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거리로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주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막막했다.
  그는 빈딩그를 찾아가기로 했다.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들어오게." 알폰스가 맞이했다.
  "지금 막 최고급의 술을 마시려던 참이었어."
  빈딩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친위대원 한 사람이 루벤스 그림 아래에 있는 커다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누런 얼굴과 블론드 머리의 빼빼 마른 남자였다.
  "하이니야." 알폰스가 정중하게 소개했다.
  "하이니! 이쪽은 내 친구인 에른스트, 특별휴가로 소련의 전선에서 돌아왔지."
  하이니는 몹시 취해 있었다.
  "소련의 전선이라!" 그는 중얼거렸다.
  "나도 갔었지. 여기보단 재미가 좋았어!"
  그레버는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빈딩그를 보았다.
  "하이니는 벌써 한 병 해치웠어. 집이 폭격 당했어.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집이 폭삭
무너졌지."
  "방이 넷이야." 하이니는 소리를 질렀다.
  "가구는 모두 새것이었어. 피아노도 그렇고. 참 멋있는 피아노였지."
  "하이니는 반드시 피아노의 원수에게 복수를 할거야." 알폰스가 말했다.
  "자자, 에른스트. 자넨 무엇을 들겠나? 하이니는 코냑을 마시고 있지만 보드카도
있고 퀸메르도 있지. 자네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다."
  "난 필요 없어. 단지 뭘 좀 알아낸 게 있는지 궁금해서 들렀어."
  "아직 새로운 소식은 없어. 자네 부모님께서는 이미 시내에서 떠나셨다고 봐야 해.
아마 어디론가 이동중일 거야. 요즘 사정은 잘 알겠지. 개새끼들의 폭격으로 통신이
거의 마비되었어. 회복되려면 며칠 걸려야 돼. , 한 잔만 하라구."
  "좋아, 보드카를 약간."
  "보드카?" 하이니가 투덜거렸다.
  "우린 보드카를 놈들의 아가리 속으로 퍼붓고 불을 질러버려야 해. 놈들을
화염방사기로 만들어 버린 적이 있었지. 어린것들이 깡충깡충 뛰는 꼴이라니 얼마나
웃었던지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어. 그때의 소련은 참 재미있었는데."
  "뭐라고?" 그레버는 물었다.
  하이니는 묵묵부답으로, 오직 정면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화염방사기!"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걸작이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레버는 빈딩그에게 물었다.
  "하이니는 여러 가지 일에 관계하고 있었다. 보안부에 있었으니까."
  "보안부, 소련에서 말인가?"
  "그렇지. , 한 잔 더 하게."
  그레버는 술병을 들었다. 맑은 액체가 철렁철렁 흔들렸다.
  "보드카는 몇 도나 될까?"
  "상당히 도수가 높은걸. 70 퍼센트는 확실하겠지. 로스케놈들은 독한 술을
좋아하니까."
  알폰스는 웃었다.
  독한 술을 좋아한다 그렇게 도수 높은 술을 목구멍에 처넣고 불을 지른다면
확확 타오를 것이다. 그는 하이니를 보았다. 친위대의 보안부에 관한 얘기는
전선에서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하이니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보안부는 독일 국민에게 생활권을 마련해 준다는 구실아래 전방에서 한꺼번에
몇 천 명씩 학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시원찮은 건 닥치는 대로 섬멸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집단살육이 너무 단조롭지 않게 친위대는 여러 가지 끔찍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레버도 그 중의 몇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에게 여러 가지를
들었지만 화염 방사기는 처음으로 듣는 얘기였다.
  "왜 병만 노려보고 있지?" 알폰스가 물었다.
  "물어뜯지 않을 테니까 잔을 놓게."
  그레버는 가만히 술잔을 내려놓았다. 당장에 뿌리치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때, 한 잔 더 안 하겠어?" 알폰스가 물었다.
  그레버는 하이니를 보았다. 그는 잠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 사람, 아직도 보안부에 있나?"
  "아냐. 지금은 여기 있어."
  "여기라니?"
  "강제수용소의 대장이야."
  "강제수용소의?"
  "그럼. 한 잔만 더 하라구. 다음에 만날 땐 서로가 지금처럼 젊진 않을 텐데! 오늘은
달아나지만 말고 오래 놀다 가게."
  "." 그레버는 하이니를 보면서 대답했다.
  "난 이제 달아나지 않겠어."
  "겨우 철이 든 모양이군. 보드카를 한 잔 더 할까?"
  "퀸메르나 코냑을 줘. 보드카는 질색이야."
  하이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보드카는 안돼." 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건 너무 아까워. 보드카는 우리가 마시고 벤젠을 사용했지. 벤젠이 훨씬 잘
타지."
 
  하이니는 욕실에서 토하고 있었다. 알폰스와 그레버는 문 앞에서 있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떠 있었다.
  "하이니는 미친놈이야. 안 그래?"
  알폰스는 소년이 피에 주린 인디언 추장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공포와 찬탄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자는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만 미치광이 짓을 하는 거야." 그레버가
대답했다.
  "저 녀석은 한쪽 팔을 못 써. 그래서 정규군이 될 수 없는 거야. 1932 년에
공산당원들과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 당하고 말았지. 그 당시의 얘기를 들어보니까
정말 굉장했어."
  알폰스는 불꺼진 잎담배를 쭉쭉 빨았다. 하이니가 소련에서의 공명담을 떠 벌일 때
불을 붙였는데 너무 흥분해서 불이 꺼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참 멋있는 생각을 했어. 안 그래?"
  "너 역시 거기에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나?"
  빈딩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진 않아. 한 번쯤이라면 또 모르지. 그렇지만 난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냐."
  하이니가 창백한 얼굴로 문에 나타났다.
  "근무 개시!" 입에 거품을 물고 말했다.
  "이미 늦었다. 시작된 모양이야. 그 돼지새끼들의 코를 뽑아놓고 말아야지!"
  그는 정원의 오솔길을 쓰러질 듯이 걸어갔다. 비틀거리다가 대문 앞에서 모자를
똑바로 쓰고 어깨를 펴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KZ(강제 수용소)에서 저 손에 걸리는 놈은 혼이 빠져버릴 거야." 알폰스가
말했다.
  그레버는 눈을 치켜들었다. 그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나, 알폰스?"
  "놈들은 모두 조국에 대한 반역자야. 아무 죄도 없이 수용당한 게 아냐, 에른스트."
  "부르마이스터도 국가에 대한 반역자인가?"
  "그것은 사적인 문제지. 그리고 그 녀석에게는 별다른 일이 없었어."
  알폰스는 웃었다.
  "만약에 있었다면?"
  "그건 그 녀석 운이 나쁜 탓이지. 요즘엔 재수없게 걸려드는 게 얼마든지 있어.
예를 들면 폭탄에 맞은 사람들이지. 이 도시에도 오천은 돼. 모두 강제수용소에 있는
인간들보다 훌륭한 인간들이지. 그러니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책임도 없어. 내 책임도 아니고 네 책임도 아냐."
  참새들이 잔디 한가운데에 있는 수영장을 향해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중의 한
마리가 물에다 날개를 적시고 있었다.
  알폰스는 그것에 매혹이라도 된 듯이 꼼짝도 않고 있었다. 하이니 따위는 이미
잊어버린 얼굴이었다.
  그레버는 그의 만족스럽게 보이는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정의와 동정이 영원히
절망적이라는 것, 항상 이기주의와 무관심과 공포심에 부딪쳐서 난파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임이란 건 그리 간단한 게 아냐, 알폰스." 그는 우울했다.
  "그렇지만 에른스트, 심각해지지 말게!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면 돼.
그것도 명령을 받지 않고 한 행동에 대해서만."
  "우리가 포로를 총살할 때는 반대의 말을 하지.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는 거라고."
  "포로를 총살한 적이 있나?" 빈딩그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레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질은 예외야. 그건 불가피한 예외야." 빈딩그가 말했다.
  "무엇이든 불가피한 예외다." 그레버는 딱딱하게 말했다.
  "자신이 하는 건 무엇이든지. 우리가 적국의 도시를 폭격할 때는 전략상의 필요
때문이야. 그러나 그들이 하는 건 비열한 죄악이지."
  "맞았어! 제법 그럴듯한 생각을 하는데." 알폰스는 교활하게 웃었다.
  "그것이 바로 정치라는 거야. 정의라는 것은 독일 국민에게 있어서 유용한 것이야.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야. 우리에게 책임은 없어."
  그레버는 문득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하이니를 발견했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겼고
보도와 접한 모래땅 위에 노랑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고 있었다. 100 미터 앞에서
하이니는 모퉁이를 돌았다.
  그레버는 모래 위를 걷고 있었다. 모래는 발자국소리까지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약에 누군가가 하이니를 처치하고 싶다면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가 된다. 한 명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다. 거리는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모래 위를 소리없이 접근할 수 있다. 하이니는 조금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때려
죽이거나 목졸라 죽이면 된다. 총을 쏘면 너무 소리가 커서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하이니 따위는 얼마든지 교살할 수 있다.
  그레버는 걸음이 빨라졌다. 알폰스는 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하이니에게 보복을 가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럴 만한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누가 복수하든 절호의 기회이다. 하이니는 없어져야 할 인간이다.
  그레버는 손에 식은 땀이 흘렀다. 갑자기 온몸이 확확 달아올랐다. 어느 새
하이니를 30 미터 정도 따라잡고 있었다. 아직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모래
위를 잽싸게 뛰어가면 일 분 이내로 깨끗하게 처치할 수 있다. 하이니를 찌르고
그대로 달아나면 된다.
  갑자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대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어째서 나는 이렇게 말려들어야만 했던가? 단순히 우연으로
시작된 일이 강박관념으로 변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가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것,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잊고 싶었던, 그가
했거나 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복수다. 그의 혼란된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는 내가 잘 모르는 인간이다. 나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은 인간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아버진 하이니의 희생자 중에서 한
사람이 아닐까?
  그는 하이니의 등을 잔뜩 노려보았다. 목이 말랐다. 어디선가 개가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그는 섬찟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너무 취했다. 그만두자. 하이니 따위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살금살금 앞으로 나갔다.
  그는 미처 단안을 내리지 못한 채 하이니 가까이 접근해 있었다. 그때 맞은 편의
대문에서 한 여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렌지색 블라우스를 입은 그 여자의 손에는
시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레버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레버는 우뚝 서 버렸다. 일시에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여자는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여자는 친숙한 어조로 인사를 했다.
  그레버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등 뒤에서 여자의 발자국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눈앞에는 폐허가 전개되고 하이니는 벌써 다음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거리에는 다시 인적이 끊긴 상태였다.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한가하게 걸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왜 나는
달려가지 않는 것인가? 아직도 기회는 있다. 그러나 이미 틀려버렸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여자는 아마도 나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안된다.
만약에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일을 저질렀을까? 무엇인가 다른 구실을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는 하이니가 돌아간 십자로에 당도했다. 하이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
모퉁이에서 하이니는 다시 나타났다. 하이니는 거리 한 가운데에 서서 친위대 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침내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집배원이 한쪽
모퉁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바로 앞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나온 남자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끝났다. 그레버는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내 안에서 갑자기 빠져나간 것은 무엇인가? 나는
냉정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레버는 신문을 사서 국방군 발표를 읽어보았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휴가기간만은 전쟁을 잊고 싶었던 것이다. 전선이 계속 후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신문에 소개된 지도로 지금 자신이 소속된 연대가 있을 만한 위치를 대강 알
수 있었다. 신문만으로 자세한 사항까지 알 수는  없었다. 국방군 발표는 군단의 일만
보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고국에 오고 나서 전우들을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기억은 돌덩어리가 되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지면으로부터 고독이 소리 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황 뉴스는 그레버가 소속돼
있는 연대의 치열한 전투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독은 소리도 없고
색깔도 없었다.
  그때 바구니를 가슴에 안은 여인이 그의 어깨에 부딪쳤다.
  "당신은 눈이 없어요?" 여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입니다." 그레버는 꼼짝 않고 서서 대답했다.
  "그러면 어째서 물러서지 않죠?"
  그는 침묵을 지켰다. 그는 자기가 왜 하이니를 미행했었는지 깨달았다. 그것은 그가
일선에서 항상 느꼈던 암흑 같은 거였다. 자기가 단 한 번도 대답할 용기가 없었던
의문, 수없이 회피해 왔던 절망이었다. 그것이 마침내 그를 궁지로 몰았던 것이다.
그는 지금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심을 굳게 했다. 폴만! 프레젠버어그는 폴만을 찾아가보라고 했다. 그것을 잊고
있었던 거이다. 폴만을 찾아가서 가슴속에 묻었던 이야기를 나누자.
  "바보!" 무거운 바구니를 안고서 여자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걸어갔다.
 
  얀프라츠는 절반 정도가 파괴되어 있었다. 나머지 부분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창문이 약간 부서졌을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청소를 하거나 취사를 하면서
그날 그날의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 반대쪽은 건물의 정면이 붕괴되면서 산산이
파괴된 방의 치부를 전부 보이고 있었다. 방에는 전투가 끝난 뒤 찢어진 깃발처럼
갈기갈기 떨어져 나간 융단이 늘어져 있었다.
  폴만의 집은 파괴당한 쪽에 위치해 있었다. 위로부터 층계가 내려앉으면서 입구를
메워버린 그 집은 사람이 살고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레버는 돌아서다가
집 앞에 널려있는 벽돌더미 위에 사람이 다닌 흔적을 발견했다. 그것을 따라서
들어가자 벽돌을 양쪽으로 밀어내고 파괴되지 않은 뒷문까지 통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문을 두드리자 조심스럽게 열렸다.
  "폴만 선생님." 그레버는 반갑게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는 에른스트 그레버입니다.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아아, 그래? 그런데 무슨 일로 왔나?"
  "한 번 찾아 뵙고 싶었습니다. 저는 지금 휴가중입니다."
  "나는 이미 학교를 그만두었다." 폴만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파면당했다는 것도 알고 있겠군. 나는 이제 학생들을 만나지 않고
또 그럴 권리도 없네."
  "저는 이제 학생이 아닙니다. 저는 군인입니다. 소련에서 돌아왔습니다.
프레젠버어그가 선생님께 안부를 전해달라고 해서 들렀습니다."
  노인은 그레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프레젠버어그? 그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나?"
  "열흘 전까지는 살아 있었습니다."
  폴만은 여전히 그레버를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들어 오게."
  그레버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복도를 지나고 부엌처럼 보이는 곳을 빠져나와서
짧은 통로를 걸었다. 폴만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문을 열고 큰소리로 말했다.
  "어서 들어오게. 나는 자네를 경찰로 오해했지."
  그레버는 깜짝 놀라서 그를 보았다. 비로소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폴만 선생은
누군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큰소리로 말한 것이다.
  방에는 녹색의 갓을 씌운 작은 석유램프가 켜져 있었다. 창문은 모조리 부서졌지만
창 밖에는 벽돌을 높이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이 보이지 않았다. 폴만은 방
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제야 자네를 알겠네. 밖은 햇빛이 너무 강해서 말야.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햇빛에 눈이 부셔. 여긴 석유램프만으로 충분해. 그러나 석유가 부족해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지."
  그레버는 그를 자세히 보았다. 폴만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더라고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방안에 있으니까 딴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벽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폴만은 그레버의 시선을 쫓았다.
  "나는 그래도 운이 좋았어. 책은 전부 끌어냈거든"
  "저는 오랫동안 책을 본 적이 없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거의 아무 것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책은 무거워서 배낭에 지고 다닐 수 없지."
  "머리 속에 넣고 다니는 것도 힘에 겨웠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과 너무 동떨어져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폴만은 부드러운 불빛을 통해서 그를 보고 있었다.
  "자네는 왜 나를 만나러 왔지, 그레버?"
  "프레젠버어그가 꼭 방문하라고 하던데요."
  "자네는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나?"
  "그 친구는 내가 일선에서 믿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선생님을 뵙고 얘기를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그레버는 노인을 보았다. 이 노인에게 배우던 시절이 아득하게 멀리 느껴졌다. 그는
갑자기 자기가 다시 학생이 되어 개인생활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마어마한 장서로 가득하고 절반은 벽돌 속에 묻힌 이 작은 방안에서, 파면 당한
소년시대의 은사 앞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과거에
있었던 친절, 관용, 학식을 새롭게 구현하고 있었다. 창밖의 벽돌더미는 현재가 과거를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저는 과거 10 년 동안의 죄악에 내가 어디까지 관계되어 있는가를 알고 싶습니다."
  폴만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는 책을 한
권 꺼내 펼쳐보다가 도로 제자리에 놓았다. 이윽고 그레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을 해도 목을 잘려."
  "일선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간들이 살해됩니다."
  폴만은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죄악이란 건, 전쟁 말인가?"
  "전쟁을 일으킨 온갖 것들입니다. 거짓과 압제, 불법과 폭력입니다. 그리고 전쟁과
전쟁을 하는 방법입니다. ^36^예 수용소, 강제 수용소, 비전투원의 대량학살을
자행한."
  폴만은 오로지 침묵만을 지켰다.
  "저는 제 눈으로 직접 목격을 하고 여러 가지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또한 전쟁이
패배할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전쟁을 계속하는 건 다만
정부와 당과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이 좀 더 권력을 연장해 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뿐입니다."
  폴만은 역시 묵묵히 있었다.
  "자네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군?"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전부터 알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또 일선으로 가야하는군?"
  "그렇습니다."
  "무서운 일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다시 가야만 합니다. 저는 정말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폴만은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무슨 뜻이지?" 그는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그 뜻은 선생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저희들에게 종교를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전쟁에 패한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36^예와 살인자,
강제 수용소와 친위대의 대량학살과 비인도적 행위를 중지시키기 위해선 전쟁에
패해야 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2주일 후에는 다시 일선으로
가서 전투에 가담하게 된다면, 도대체 저는 어디까지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폴만의 얼굴이 회색으로 변하며 핏기를 잃어갔다. 그러나 눈동자만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 눈빛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는 기억해 낼 수
없었다.
  "자네는 다시 가야만 하는가?" 마침내 폴만이 물었다.
  "물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교수형이나 총살을 당할 것입니다. 아니면
탈주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즉시 체포될 것입니다. 탈주를 막기 위한 경찰망과
스파이망은 철통과 같습니다. 성공한다 해도 어디에다 몸을 숨길 수 있단 말입니까?
나를 숨겨 주는 사람은 총살당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제 부모님께도
보복을 가할 것입니다. 죄가 아주 가벼워도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고 거기서 죽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선으로 복귀해서 총알을 피하지 말까요?
그것이야말로 자살행위입니다."
  시계가 울렸다. 방에 파묻힌 고요를 둔탁한 음향이 망령과 같이 깨뜨렸다.
  "또 다른 방법은 없냐?"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구로 만드는 겁니다. 대부분은 발각이 됩니다. 처벌은
탈영의 경우와 마찬가지입니다."
  "본국으로 전근할 수는 없나?"
  "안됩니다. 저는 무척 건강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 해도 제 의분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사무실에 있다고 해서 공범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게 아닙니까?"
  "그렇지." 폴만은 두 주먹을 쥐었다.
  "죄악." 마침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악이 어디서부터 오고 어디서 끝나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다. 모든 곳에서
시작되지만 어디서나 끝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공범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하느님뿐이지."
  그레버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하느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원죄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을
테니까. 원죄는 수천 세대에 걸쳐 확대된 공범입니다. 그렇지만 개인으로서의 책임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만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의 그늘에
숨어서 안심하고 있을 수 만은 없습니다."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강제야."
  그레버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도교 시대의 순교자들은 압제에 굴복하지 않았다." 폴만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우리는 순교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공범은 어디까지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까?
보통 영웅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언제 살인자가 되는 겁니까? 명분이 목적을 믿지 않을
때 입니까? 그 부분은 무엇입니까?"
  폴만은 고뇌에 찬 눈초리로 그레버를 응시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말할 수 있지? 그것은 너무나도 책임이 커. 나는 자네를
위해서 그것을 결정할 수 없네."
  "모두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레버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왜 항상 질문의 화살만 던지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이 노인을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노인에게 그가 일찍이 강의한 것과 나
혼자서 터득한 것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폴만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면직 당하고 체포의 불안과 싸우면서 책에서나마 위로를 받고 있다. 오늘도
내일도 폐허더미에 숨어서 램프 곁에 앉아 있는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답을 구하는 건 결정을 회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실은 스스로를 향해서 질문한 것입니다. 타인에게 먼저 묻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폴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에게는 질문할 권리가 있어. 공범!" 그는 갑자기 말했다.
  "공범이라고 하지만 자네가 무엇을 알고 있나? 자네들은 아직 어려서 스스로를
판단할 수 있기도 전에 거짓으로 중독 되고 말았어. 그렇지만 우리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도 잠자코 있었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태한 마음? 무관심일까?
이기주의? 절망이라고 할 것인가? 자네는 내가 이 일에 대해서 모른 척한다고
생각하나?"
  그레버는 폴만의 눈동자를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그가
총살한 소련인 포로의 눈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모자를 들었다.
  "그레버, 벌써 가려고 하나? 자넨 어떻게 할 생각인가?"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볼 시간이 아직 2주일이나 있습니다. 순간 순간 생사의
기로에 있던 거에 비하면 아주 긴 시간입니다."
  "또 오게. 출발하기 전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해 주게."
  "약속해겠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지." 폴만이 중얼거렸다.
  그레버는 벽돌로 가려진 창가의 책과 책 사이에 작은 사진이 있는 것을 보았다.
자기와 같은 또래의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었다. 폴만에게 외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 것도 묻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프레젠버어그에게 내 안부도 좀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말한 대로 그 친구에게도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제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게 프레젠버어그에게 도움이 됐을까?"
  "아닙니다. 아마 더욱 곤란했을 겁니다."
  폴만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자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그러나 변명에 지나지 않는 답변은 하고
싶지도 않았어. 그런 답은 얼마든지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모두가 입만 살아서
그럴듯하게 속이고 있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까?"
  폴만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회에서는 멋있게 하고 있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마라.'
이 말에 대해서는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라는 말이 가장
적절하지. 이것만 있으면 어떠한 연극도 해낼 수 있지."
  그레버는 싱긋 웃었다. 폴만의 신랄한 입담이 아직 살아있었군. 폴만은 그를 보았다.
  "자네는 침착하게 웃고 있군. 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 않지?"
  "저는 지금 부르짖고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들리지 않을 뿐입니다."
  눈부신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레버는 천천히 광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오랫동안
질질 끌다가 마침내 판결을 받은 죄인이면서도 그 판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간
같았다. 겨우 끝났다. 그는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휴가기간 동안 생각하기로 했던 것.
이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절망이었다.
  그는 폭탄으로 생긴 구덩이 옆에 앉아 있었다. 서서히 긴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허전해졌다. 그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레버는 눈을 떴다. 그의 앞에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파괴된 집
앞에 서 있는 보리수를 바라보았다. 보리수는 꿋꿋하게 서서 거대한 나뭇가지들을
벌려놓고 있었다. 그는 보리수 옆을 지나서 파괴된 집들로 이어진 거리를 걸었다.
그는 자기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간절히 원했다. 마치
휴전을 갈망하는 것처럼 밤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4
 
  "오늘은 최고급인 위이너 슈니설이 있습니다." 학이 말했다.
  "좋아." 그레버는 대답했다.
  "그리고 당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조리 갖고 와.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기겠어."
  "술은?"
  "그것도 당신 마음대로 해."
  웨이터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밖은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을 것이다. 2주일, 2주간의 생명. 보리수가 빛을 포착하는
것처럼 2주일 동안의 생명을 붙잡아야 한다.
  학이 돌아왔다.
  "오늘은 요하니스베르게르 카렌베르그를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것에 비하면
샴페인 정도는 소다수 같은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그것으로 가져 와."
  "알겠습니다. 신선한 야채 샐러드도 곁들이겠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의 최후의 만찬이다.' 그레버는 생각했다. 사형수, 2주일
동안의 식사. 그는 그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직 휴가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일들이 일어났었고 앞으로도 더 많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신문을 읽고 폴만과 이야기를 나눈 후, 그는 휴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의 눈은 학의 뒤를 쫒고 있었다.
  "당신의 친구 로이타씨는 참으로 고마운 분이군요. 덕분에 우리는 상류층의 인간이
되었어요."
  "엘리자베스, 우린 단순히 상류층이 아닌 그 이상이지. 우리는 모험에 뛰어든
기사야. 평화의 기사란 말야.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고 말았어. 단지
얼빠진 부르주아의 상징이었던 것이 지금은 위대한 모험이 되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된 것이죠."
  "우리가 아냐. 바로 시대지. 그러나 불평할 수 없는 것이 분명히 있지. 그것은
권태와 단조로움이야."
  그레버는 엘리지베스를 보았다. 그녀의 머리가 작은 모자 밑에 가려져 있었다. 마치
귀여운 사내아이 같았다.
  "단조로움. 그렇다면 당신은 오늘밤 신사복을 입을 예정이었지요?"
  "바꿔 입을 만한 데가 없었어."
  그는 돌격대장 알폰스의 집에서 갈아입을 생각이었지만 폴만과 이야기하다가 그대로
왔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갈아입어도."
  "당신 집에서? 루젤 부인이 있잖아?"
  "루젤 부인 따윈 문제가 안돼요."
  웨이터가 와인을 가지고 오더니 뚜껑만 열고 따르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리고 잔뜩 귀를 기울였다.
  "또 왔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순간 방안의 모든 소음을 죽이며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엘리지베스의 컵에 든 물이 찰랑거렸다.
  "가장 가까운 지하실이 어디지?" 그레버는 학에게 물었다.
  "호텔 안에 있습니다."
  "그곳은 호텔 손님의 전용 아닌가?"
  "당신도 손님이십니다. 지하실은 매우 견고합니다. 보통 지하실보다 안전하게
만들어졌지요."
  "알았어. 그건데 위이너슈니설은 어떻게 되지?"
  "그건 염려 없지만 지하실에서 드릴 수는 없습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잘 알지."
  그레버는 학의 손에서 술병을 빼앗아 잔에 가득 부어서 엘리자베스에게 주었다.
  "이것을 마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빨리 대피해요."
  "아직 시간이 있어. 저건 최초의 경보니까 아무 것도 아닐는지도 몰라. , 술이나
마셔. 조금도 겁낼 필요가 없어."
  "이분 말씀이 맞습니다." 학이 말했다.
  "이런 귀중한 와인을 한 번에 마셔버리긴 아깝지만 이것은 특별한 경우니까."
  학은 창백한 얼굴로 억지 웃음을 지었다.
  "손님." 그는 그레버를 똑바로 쳐다봤다.
  "전에는 하늘에 대고 소원을 말했지만 지금은 저주하고 있습니다. , 큰일입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 마셔! 시간은 아직도 많아. 한 병쯤은 충분히 비울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술잔을 들더니 천천히 마셨다. 어떤 결연한 각오가 선 듯한
그러면서도 쫓기는 것 같은 몸짓이었다. 그녀는 컵을 놓고 싱긋 웃었다.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나도 이런 일엔 익숙해져 있어요. 보세요. 그런데 내 몸이
왜 이렇게 떨리지요?"
  "당신이 떨고 있는 게 아냐. 떨고 있는 건 당신이 지닌 생명이야. 그건 용기와는
관계가 없어. 용기는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때 솟아나는 거야. 그밖에는 모두
쓸데없는 허영이지. 우리에게 부여된 생명은 우리 자신보다 훨씬 이상적이지."
  "알겠어요. 내게도 나눠주세요."
  "저의 집에서는." 학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우리 애는 지금 폐병을 앓고 있습니다. 겨우 열한 살입니다. 마누라가 그애를
지하실로 데리고 내려갈 때마다 무척 애를 먹지요. 그래도 저는 마누라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여기를 떠날 수 없으니까."
  그레버는 다른 테이블에서 술잔을 집어다가 술을 가득 부어서 학에게 권했다.
  ", 우리 건배하자구. 고참병들의 사고방식은 모두 같지. 급할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라. 그렇지 않은가?"
  "입으로 말하긴 쉽지만."
  "맞았어. 우린 목석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니까. , 한 잔 쭉 들이켜 보세."
  "근무 중에는 술을 못 합니다."
  "이것은 특별한 경우야. 아까 당신이 말한 것처럼."
  학은 주위를 살피고 나서 잔을 받았다.
  "당신의 승진을 축하하는 뜻에서 건배를 해도 좋겠습니까?"
  "무엇을 축하한다고?"
  "하사관으로 승진한 것으로 축하하겠습니다."
  "고맙군. 당신은 너무 날카로운 눈을 가졌군."
  웨이터는 잔을 내려놓았다.
  "도저히 단숨에 마셔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최고급 술을 그렇게 할 순 없지요.
아무리 특별한 경우라 해도 말입니다."
  "과연 당신은 도사야. 그럼 그대로 가지고 가지."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엘리지베스의 잔에도 다시 와인을 따랐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냉정한가를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공습을
받을 때는 있는 대로 모조리 마셔버려야 돼."
  엘리자베스는 그의 군복을 쳐다보았다.
  "지하실에 장교들이 우굴우굴할 텐데 괜찮을까요."
  "그런 걱정은 마, 엘리자베스."
  "왜죠?"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지."
  "그러면 발각되지 않나요?"
  "쉽게 발각되지 않아. 남의 눈치를 보면 오히려 쉽게 발각되는 수가 있어."
 
  술 저장고의 일부를 시멘트로 보강해 방공호로 만들어 놓았다. 의자와 테이블이
여기저기 놓였고 바닥에는 융단이 깔려 있었다. 벽은 새롭게 흰칠을 하고 라디오까지
갖추었으며 식기 선반에는 술잔과 함께 술병이 놓여 있었다. 그야말로 일류호텔의
방공호다웠다.
  그들은 구석의 빈자리로 갔다. 손님들이 자꾸 몰려들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흰
야회복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는 등을 완전히 노출시키고,
양쪽 팔에는 번쩍거리는 팔찌를 하고 있었다. 잉어처럼 얼굴이 조잡스러운 사내가
부인의 바로 뒤에 붙어서 오고 웨이터와 그들의 조수가 나타나서 병을 따기 시작했다.
  "우리도 술을 가지고 올 걸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