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응시했다. 밖에서 스며든 창백한 빛이 그녀의 어깨까지
이어졌다. 곡괭이를 내려찍는 둔탁한 소리와 삽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물에 담궈 둔 술병을 가져와요."
"게르마니아에서 가지고 온 것?"
"터져 버리기 전에 마셔야지. 그 대신 빈딩그가 준 술병을 담그고. 공습이 언제
있을지 몰라. 이런 탄산가스가 가득 찬 병은 쉽게 폭발하지. 집안에선 수류탄만큼이나
위험해. 잔은?"
"물 마시는 컵밖에."
"샴페인은 그게 어울려. 우린 파리에서 그렇게 했지."
"당신은 파리에도 갔었군요."
"전쟁초에 거기 있었지."
엘리자베스는 잔을 들고 그의 곁에 앉았다. 그는 천천히 뚜껑을 뽑았다. 샴페인이
컵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거품이 일었다.
"파리에선 얼마나 계셨죠?"
"약 2주일간."
"프랑스인들은 당신들을 증오하고 있었겠죠?"
"글쎄, 잘 모르겠는데. 우릴 환영하진 않았겠지. 난 그런 건 신경쓰지도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어. 다만 우리가 배운 사실만을 믿고 있었던 거야. 하루 속히 전쟁이 끝나
노천 카페의 양지에 앉아 이국의 포도주를 음미하고 싶었지. 그때 우리들은 아주
젊었으니까."
"젊었으니까? 마치 오래된 옛날 얘기를 하는 것 같군요."
"실제로 그렇게 생각되는 걸."
"그럼 당신이 늙었나요?"
"아직 젊지. 하지만 그 시절에 비하면 무척 늙은 것 같아."
엘리자베스는 창가에서 흔들리는 빛 한가운데로 컵을 치켜들었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컵을 흔들며 거품이 이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녀의
어깨에 파도치는 긴 머리카락, 잔등에서 부드럽게 이어진 척골의 선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는 없다. 이 사람은 옷을 벗고 있을 때는 이 방도,
루젤 부인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사람 역시 바깥의 공포, 잠들지 못하는 밤, 지금
막 발굴하려는 사자들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우연이나 공허, 무의미한
세계의 인간이 아니다. 이미 그렇지는 않다.
"나도 당신과 함께 파리에 가보고 싶어요."
"전쟁이 끝나면 갈 수 있겠지."
"프랑스인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줄까요?"
"그럴 거야. 파리는 조금도 파괴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다른 나라처럼 많이 파괴되지는 않았어. 곧 끝나버렸으니까."
"그렇지만 증오를 받을 만한 것을 파괴했는지도 모르죠."
"그럴지도 모르지.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면 여러 가지를 잊게되니까. 프랑스들도
우리를 증오할 수 있지."
"다른 나라로 가고 싶어요. 전혀 피해가 없는 나라로."
"그런 나라는 거의 없을 걸. 아직 마실 것이 있나?"
"네, 아직도 많이. 또 어디에 갔었지요?"
"아프리카에."
"아프리카에도? 당신은 많은 걸 보셨겠군요."
엘리자베스는 두 개의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그레버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술 때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지만 모두 무의미하게만 들렸다.
"또 다른 나라에도?"
돛단배였다. 강물에 둥둥 떠 있는 돛단배를 구경한 것은 어디였을까?
"네덜란드에도 갔었지. 그것은 전쟁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어. 운하에 배가 다니고
있었어. 그 배는 돛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소리를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나갔어."
"네덜란드. 우린 전쟁이 끝나면 그곳에 갈 수 있어요. 코코아를 마시고, 빵과
네덜란드산 치즈를 먹고, 해가 질 무렵의 돛단배도 구경할 수 있을 거에요."
그레버는 그녀를 보았다. 먹는 것. 전시 중에 인간의 행복은 먹는 것과 결부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네덜란드엔 갈 수 없겠지요."
"우리 군대는 그곳을 유린하고 아무 경고도 없이 노트르담을 파괴했으니까. 3 만
명의 사상자가 났어. 네덜란드에선 우리를 받아주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컵을 바닥에 힘껏 팽개쳤다.
"결국 아무 데도 갈 수 없군요! 우린 어째서 한낱 꿈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죠?
우린 갈 곳이 없어요. 우리는 감금됐으며 저주를 받았어요!"
그레버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바닥을
살펴보았다.
"불을 켜고 유리조각을 모아야 돼. 잠깐 기다려요. 우선 창문을 닫을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전등을 켜고 가운으로 몸을 가렸다. 방안이 밝아지자, 그녀는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나를 보지 마세요.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훌륭해. 당신 말이 옳아. 당신은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알고 싶어요."
그레버는 웃었다.
"그건 나도 몰라. 어쩌면 서커스가 적당할지도 모르지. 아니면 바로크식의
대저택이나. 강철로 만든 가구에 둘러싸여 있거나 천막 안에. 어쨌든 소녀의 방은
아니지. 난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당신을 보호해 주고 싶었어!"
"난 정말 보호를 받고 싶어요."
"모두들 그럴 거야. 우린 보호도, 원조도 없이 살아왔지."
그는 신문지를 바닥에 펼쳐놓고 유리를 쓸어모았다.
'전선, 다시 단축되다. 오레르 주변의 격전.'
그레버의 눈에 신문의 제목이 크게 확대되어 들어왔다.
그는 재빨리 신문지를 뭉쳐서 휴지통에 버렸다. 밖에서 수색대의 해머소리가 높게
들려왔다. 테이블 위에는 알폰스에게 받은 선물들이 늘어 서 있었다.
"이것을 정리해야지. 더 이상 보고싶지 않아요."
"어디에다?"
"부엌에. 루젤이 오기 전에 나머진 숨겨야 해요."
"내일 밤엔 많이 줄어 있을 거야. 루젤 부인이 앞당겨서 돌아오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레버는 깜짝 놀라면서 그녀를 보았다.
"내가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에 나 역시 놀라고 있어요."
"하루하루가 아니라 매시간마다 달라지고 있어."
"당신은?"
"나도 마찬가지야."
"그것이 좋은 현상일까요?"
"그래. 그렇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는 건가요?"
"그렇지."
엘리자베스는 불을 껐다.
"난 숨이 막힐 것 같아요."
그레버는 창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들어온 바람으로 인해 커튼이 춤을 추었다.
"달이 떴어요."
지붕 위에 잔뜩 부풀어오른 노오란 공이 걸려 있었다. 그레버는 두 개의 잔에다
코냑을 절반쯤 따랐다. 그 중에 하나를 엘리자베스에게 권했다.
"이번에는 이걸 마시기로 하지. 어두운 곳에서는 포도주 맛이 제대로 안 나."
달이 차츰 높이 떠오르면서 금빛을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렸다.
"우린 어떻게 될까요? 행복과 불행 중에서."
그레버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양쪽 다 해당되겠지. 이런 시대에는 당연할 거야. 행복만을 누리고 있는 건
동물밖에 없어. 아니, 동물의 행복도 완전할 순 없겠지."
"그런게 어떻든 상관없어요."
"맞아."
"중대한 일이 있기는 해요?"
"물론!"
그레버는 온 방안에 퍼지고 있는 싸늘한 빛을 느꼈다.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어."
16
일요일 아침이었다. 그레버는 하겐가에서 서성거렸다. 주위가 약간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물통이 없어지고 층계가 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의 통로는 벽을
돌아서 안마당으로 바뀌었고 안마당에서 사선으로 건물의 잔해를 향해서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작업반이 정리작업을 시작한 듯했다.
그는 몸을 움츠리고 입구를 통과하여 절반쯤 묻혀 있는 방으로 왔다. 그곳은 원래
이 집의 세탁실이 있던 자리였다. 거기서부터 낮고 어두운 통로가 이어졌다.
그는 성냥불로 앞을 비춰 보았다.
"거기서 뭐해?"
갑자기 등뒤에서 고함소리가 났다.
"빨리 나와!"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지만 어두워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지팡이를 짚은 사내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사내는 사복 차림에다 군용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소리를 질렀다.
"난 여기에 살던 사람이오. 그런데 당신은?"
"바로 내가 여기 살고 있어. 알았나? 물론 너 같은 건 여기 살 수도 없어. 무엇을
훔쳐내려고 왔나?"
"그런 소리하지 마라." 그레버는 지팡이와 군용외투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 부모님도 여기 살고 계셨고, 난 입대하기 전까지 여기 살았어. 알겠나?"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그레버는 사내의 지팡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그를 밀어내면서 통로를 빠져 나왔다.
그레버가 밖으로 나오자 한 여자가 어린애를 데리고 다가왔다. 그 뒤를 또 다른
사내가 곡괭이를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여자는 집 뒤에 세워져 있던 창고에서 나온
듯했다. 지팡이를 든 사내는 반대쪽에서 접근해 왔다. 그들은 그레버를 사이에 두고
섰다.
"왜 그래?" 곡괭이를 들고 있던 사내가 절름발이 사내에게 물었다.
"저 놈을 여기서 잡았어. 이 근처를 배회하는 게 수상쩍단 말야. 자기 부모가 여기
살고 있었다나."
곡괭이를 든 사내가 적의를 품은 웃음소리를 냈다.
"또 할 말이 있나?"
"없다." 그레버가 말했다.
"그런 건 갑자기 생각해 낼 수도 없겠지, 안 그래?"
사내는 곡괭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내가 셋 세는 동안 여기를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골통을 부셔놓을 테니까.
하나."
그레버는 측면으로부터 덤벼들면서 그에게 일격을 가했다. 사내가 맥없이 쓰러졌다.
그레버는 사내의 곡괭이를 빼앗았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시겠지. 자, 경찰을 부르고 싶으면 큰소리로 불러 봐!"
사내가 천천히 일어났다. 코밑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만 두는 것이 좋을걸." 그레버는 말했다.
"난 군대에서 격투하는 방법을 훈련받았어. 자네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야.
어서 말해 봐!"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저희들은 여기 살고 있어요. 그것이 왜 나쁜 일인가요?"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 난 부모님께서 여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
뿐이야. 그건 나쁜 일인가?"
"그럼, 그게 사실인가?" 지팡이의 사내가 물었다.
"물론이지! 도대체 여기에 훔칠 만한 것이라도 있단 말인가?"
"난 휴가로 돌아왔기 때문에 다시 가야 하오. 문 앞에 꽂아놓은 종이쪽지를 보았소?
'아버지와 어머니의 소식을 알고 싶습니다.' 라고 적혀 있는 것. 내가 쓴 것이오."
"그건 당신의 필적이었군." 절름발이가 말했다.
"물론이오."
"그렇다면. 당신도 짐작했겠지만 우린 폭격으로 집을 잃었소. 때문에 이곳에
형식적인 잠자리나마 마련했던 것이오."
"그럼, 정리도 당신들이 했소?"
"일부분이지. 모두가 일을 도와주었소."
"모두라니?"
"도구를 갖고 있는 친구들이오."
"시체가 나왔소?"
"아니오."
"정말!"
"그렇소. 전에는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린 한 구의 시체도 발견하지 못했어."
"내가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것이었오."
"그렇다면 남을 구타할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요." 여자가 말했다.
"이 사람은 당신의 남편이오?"
"그런 건 당신이 알 필요가 없잖아요? 남편이 아니라 오빠에요. 어머나 피를 흘리고
있네."
"코피정도야."
"입에서도 피가 나요."
그레버는 곡괭이를 들었다.
"이 사람은 이것으로 무엇을 하려고 했었소?"
"당신을 치려던 건 아니었어요."
"난 얻어맞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바보가 아니란 말이오."
그는 재빨리 곡괭이를 벽돌더미 속으로 던져버렸다. 모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가 곡괭이를 가리키며 벽돌더미 위로 기어올라갔다. 여자가 얼른 아이를
붙잡았다. 그레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가건물 옆에 놓인 물통이 눈에 띄었다. 나무로
된 층계는 훌륭한 장작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가가 폐허를 정리하면서 가건물을 세운
것이다. 그들은 지금 분명히 벽돌더미 속에서 긁어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물려주신 양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이는 건강해 보였다. 이렇게
죽음은 극복되었으며 폐허더미 위로 다시 꽃이 필 것이다.
"빨리도 해치었군."
"머리 위에 지붕이 없을 때는 동작이 빨라야지." 절름발이가 대꾸했다.
그레버는 그만 돌아가기로 했다.
"혹시 고양이를 못 보았소? 흑백의 반점이 박혀있는 고양이인데."
"우리 로오자인걸." 아이가 말했다.
"아냐!" 여자가 깜짝 놀라며 경계를 했다.
"우린, 고양이 같은 건 구경도 못했어요."
그레버는 그대로 돌아섰다. 가건물 속에는 다른 인간들도 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짧은 시간에 그토록 많은 일을 해치울 수가 없다. 아마도 의용단들도
협력했을 것이고 또 한 밤에는 강제 수용소의 죄수들이 정리작업을 위해 시내 도처에
파견되고 있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레버는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은 거리로 나왔다. 상점에는 대형 진열장의
유리조차 깨끗했다. 멍청하게 걷고 있던 그는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가
자기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유령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 한 발자국만 더 내밀면 금세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존재했었던
기억만이 남을 듯이.
그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간신히 두
눈동자만 툭 튀어나와 있을 뿐, 얼굴의 형태는 창백한 빛으로만 남아 있었다. 싸늘하고
야릇한 공포가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그것은 공황이 아니며 끔찍한 혐오도 아니었고
도망에로의 절박한 부르짖음도 아니었다 그것은 만성적이면서도 비개인적인
공포, 눈에 보이지 않고 냄새도 없는 진공의 세계에서만 볼 수 있는 공포였다.
그는 거리에 서 있었다. 도대체 뒤에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 만약에 내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무엇이 남게 되는가. 그것은 무다. 몇 명의 사람들, 부모님이
살아있다면 그들과 약간의 친구, 그리고 엘리자베스 그들만이 기억 속에 잠시
머물다가 없어질 것이며 그것조차 얼마나 오랫동안 남을 것인가는 미지수이다.
"에른스트." 그의 이름이 들린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목발을 한 사내가 거기 서 있었다. 하겐가에서 만난
절름발이 사내다! 그때 지나가던 자동차의 불빛이 그 사내의 얼굴을 비췄다가
사라져갔다. 그는 절름발이가 아니라 동급생이었던 뮤치히였다.
"칼! 너였군 그래. 네가 여기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벌써 반년이나 되었어."
그들은 서로의 모습을 보았다.
"설마 이런 꼴이 되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 뮤치히가 말했다.
"무엇을?"
뮤치히는 목발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바로 이것 말이야."
"그래도 넌 지옥에서 빠져 나온 셈이야. 난 다시 돌아가야 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 만약에 전쟁이 2, 3 년 더 계속된다면 운 좋은
셈이지. 그러나 6주일만에 끝나버리면 굉장한 불행이야."
"어떻게 6주일만에 끝날 수 있지?"
"난 다만 만약에 그렇다면."
"물론 그렇겠지."
"언제 한 번 들르지 않겠나? 벨그만도 함께 있어. 두 팔을 잃었지."
"지금 어디들 있나?"
"시립병원의 절단자 병실에 있어. 거긴 전부 우리가 점령했지. 한 번 오라구."
"알았어. 곧 찾아갈게."
"정말? 모두들 말은 잘 하지만 한 녀석도 얼굴을 안 내민다."
"난 정말이야."
"그래 우린 무척 재미있게 지내. 적어도 우리 방에 있는 녀석들은 모두가
그렇지."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미 3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친구였다.
"그럼 잘 가, 에른스트."
"칼, 너도."
두 사람은 굳은 악수를 나누었다.
"넌 지베르트가 죽은 걸 알아?" 뮤치히가 물었다.
"아니, 전혀!"
"6주일 전이었지. 그럼 라이너는?"
"라이너? 난 정말 몰랐어."
"라이너와 링겐. 그들은 같은 날 아침에 죽었지. 브류닝은 머리가 돌았고, 홀만도
죽었어. 넌 전혀 모르고 있었군."
"몰랐어."
"벨그만이 소식을 들은 모양이야. 그럼, 조심하게 에른스트! 우릴 잊지 말고 꼭 찾아
주게."
뮤치히는 다리를 절뚝거리면서 반대쪽으로 갔다. 죽은 사람들에 비하면 자기의
불행은 아무 것도 아니다 불행이 확실히 가벼워졌겠지. 그레버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쪽 다리를 무릎 위에서 절단 당했다. 뮤치히는 전쟁이 나기 전,
동급생들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단거리 선수였다.
그레버는 그를 동정해야 할지, 부러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뮤치히의 말은
옳았다.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정해진다.
그가 돌아서자 엘리자베스는 흰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타올을 터번처럼
머리에 돌려서 감은 그녀의 자태는 무척 아름다웠다.
"난 일주일 분의 목욕물을 다 써 버렸어요. 아마 루젤 부인이 잔소리를 할
거^36^예요."
"멋대로 하라지. 그 여잔 목욕물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거야. 참다운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목욕을 자주 안 해. 그들에게 청결은 유대인적인 악덕이야."
그는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회색으로 변한 하늘과 폐허,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마주 보이는 창가에서 한 남자가 하품을 하고 있었다. 피아노 소리에 섞여서
발성연습을 하는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양장점의 거울 앞에서
느꼈던 공포와 의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과연 뒤에 남는 건 무엇일까?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완전한 나의 것일까?
그녀를 만나서 사랑한 시간은 짧다. 나는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야 한다. 몇 년 후,
그녀는 나를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는 창가에서 몸을 돌렸다.
"엘리자베스, 우린 결혼해야 돼."
"결혼한다구요! 왜죠?"
"왜냐고? 우린 서로를 안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며칠 후에 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해. 우린 진정으로 서로를 원하는 가도 모르고 있고, 또 그걸 알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결혼해야 돼."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우리는 너무 고독하기 때문인가요?"
"아니."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만은 아니지."
"그럼?"
그는 그녀의 호흡이 고르게 되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젖가슴이 잔뜩 부풀어올랐다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녀의 팔과 손목은 내 것이 아니듯이 그녀의 생각과 생활도 나
자신과 같을 수도 없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어째서
갑자기 결혼할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녀가 알 수 있을까?
"만약에 결혼한다면 당신은 루젤 부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지. 군인의
아내로서 보호를 받게 되니까."
"그래요?"
"물론이지."
그녀의 쏘는 듯한 눈길을 느끼자 그레버는 멋쩍은 생각이 들었다.
"다소 도움이 될 수는 있을 거야."
"그런 건 결혼의 이유가 될 수 없어요. 루젤 부인 따위, 조금도 겁나지 않아요.
결혼이라고요? 그럴 시간이 어딨죠?"
"왜 없지?"
"서류와 허가증과 아리아인의 혈통증명서, 건강진단서 그런 걸 다 만들려면
몇 주일이나 걸려야 해요."
몇 주일. 그녀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지껄였다. 그때 나는 또 어디에 있을까?
"군인은 달라. 전시의 결혼은 특별 대우를 받지. 하루 이틀이면 끝나. 막사에서
얘기를 들었어."
"당신은 거기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그렇진 않아. 오늘 아침에야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더군. 그렇지만 막사에선 이런
문제를 놓고 토론들을 하지. 휴가 나와서 많이들 결혼했어! 당연하지. 일선에서 돌아온
병사가 결혼을 하면 그 아내는 매달 수당을 받게 돼. 200 마르크나 되지. 그것을
고스란히 국가에 기부할 필요가 있나? 자기의 목을 내놓았다면, 자기의 권리는 왜
포기하지?"
"그리 생각한다면 그렇겠죠."
"내 말이 바로 그런 뜻이야." 그레버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세대주는 대부금을 받을 수도 있어. 1000 마르크는 될 거야. 당신은
결혼하면 외투공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에요. 그건, 또 다른 얘기죠. 공장에 가지 않는다면 하루 종일 집에서 무엇을
하죠?"
"그렇군."
순간 그레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도대체 놈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우리는 아직 젊으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우리들의 어버이가 일으킨
전쟁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린 곧 헤어져야 해. 결혼을 하면 떨어져 있어도 덜 외로울 거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나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고독이 반으로 줄지는 않아요. 우린 더욱 고독해질 거에요."
발성연습을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음계가 높아지자 소리가
갈라져서 듣기에 거북할 정도였다.
"나중에 취소할 수도 있어.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이혼을 해도 되지."
"그럼, 왜 결혼을 하지?"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어제와 몹시 다르군요."
"어떻게 다르지?"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만하기로 해요. 우린 지금 함께 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해요."
"당신은 결혼하고 싶지 않군."
"그래요."
그는 그녀를 보았다.
"난 모든 걸 선의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엘리자베스가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때때로 그것으로 난처해질 때가 있어요. 아직 술이 남았을까요?"
"매실주가 있지."
"폴란드산? 전리품이 아닌 것?"
"퀸메르가 한 병 있을 거야. 그건 독일제야."
"그럼, 그걸로 한 잔 주세요."
그레버는 부엌으로 가면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는 잠시동안 빈딩그의 선물
앞에 서 있다가 돌아섰다.
엘리자베스는 창가에 기대어 서 있었다.
"하늘이 회색으로 변했어요. 비가 올 것 같아요. 아이, 따분해!"
"따분해?"
"오늘은 우리의 첫 번째 일요일이고 우린 외출할 수도 있었는데, 교외는 이미
봄인걸요."
"나가고 싶나?"
"아니, 전 루젤이 집에 없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당신은?"
"난 아무래도 좋아. 내가 늘 생각하던 자연은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따뜻한
방이야. 난 지금 그곳에 있지. 당신은 밖으로 나가고 싶겠군. 극장에라도 갈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집에 있기로 하지. 밖에 있으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 버릴 거야."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다가가 그녀를 꼭 껴안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지?"
"아니에요."
"그럼 당신은 왜 눈물을."
그는 그녀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면서 창문 너머로 눈길을 돌렸다. 파괴된 집의
지하실로 통하는 방공호 속에서 전쟁놀이를 하는 아이들 몇 명이 눈에 띄었다.
"우린 조금도 슬퍼할 필요가 없어."
발성연습을 하던 가수가 다시 목청을 돋우더니 사랑의 노래를 미친 듯이 부르고
있었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노래는 불안정한 음성으로 계속
이어졌다.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세월이 가고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 몸은 그대를
사랑한다!"
"그래요. 우린 슬퍼하지 않아도 돼요." 엘리자베스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더욱 짙어지면서 한 곳으로 뭉치고
있었다. 그들은 불도 켜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레버는 단조로운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쯤 소련에서는 온갖 것들이 수렁
속에 빠지는 흙탕물의 계절이 시작됐을 것이다.
"그만 가야겠군. 루젤이 올 시간이야."
"상관없어요." 엘리자베스는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비가 오기 때문에 예정보다 빨리 오게 될지도 몰라."
"비가 오니까 오히려 늦을 수도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혹시 빗길에 차가 그렇다면 운이 좋은 편이지."
"당신, 박애주의자가 아니군요." 엘리자베스가 속삭였다.
그레버는 창문을 때리는 빗줄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만약에 결혼하게 되면 난 일선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지."
엘리자베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 저와 결혼하겠단 생각을 했지요?" 그녀가 다시 속삭였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는 걸요."
"난 당신을 일 년 이상이나 알고 지냈어."
"어째서 일 년이나 되죠? 우리의 관계를 어린 시절부터 헤아릴 수는 없어요. 그건
옛날 얘기니까."
"지금 그런 식으로 날짜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냐. 내가 이곳에 도착한 지 거의
2주일이 돼. 이것은 일선의 15개월에 해당되지. 난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느낌이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난 그렇게 생각해 보진 않았어요."
"나 역시. 방금 깨달았어."
"언제?"
"당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비가 내리니까 어두운 방안에서 갖가지 상념이
떠오르더군."
"무슨?"
"인간이 자기 손을, 총을 쏘거나 수류탄을 던지는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뭐, 이런 생각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낮엔 왜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죠?"
"차마 할 수가 없었지."
"수당이라든가 대부금 얘기보다는 오히려 그게 나을 것 그랬군요."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결국 그게 그거야. 다만 표현 방법의 차이지."
그녀는 무엇인가 알아들을 수 없게 중얼거렸다.
"말이란 중요한 것이에요. 적어도 이런 문제에 있어서는."
"난 표현력이 부족해.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깨닫게 될 거야."
"시간!"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별로 없지요."
"없지. 어제는 많았어. 그러나 또 내일이 오면 어제는 시간이 많았었다고
생각하겠지."
"당신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고 있나요?"
"글쎄 그걸 알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들을 우린 함께 보내야해."
"그런데 왜 결혼하겠단 말을?"
"하지만 난 이미 당신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당신과 다른 사람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아마도 그러나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어. 그리고 나도 또한 지금에 와서 그런
생각을 할 수는 없고."
엘리자베스는 그의 팔에 안긴 채 고개를 그에게로 했다.
"당신은 차츰 의식이 뚜렷해지는군요. 이제 낮에 했던 말은 하지 않고 있어요. 물론
지금은 밤이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 때문에 난 일생 밤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럴 리는 없겠지."
"그래도 우린 역시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무엇을?"
"수당."
순간 그레버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럼, 당신은 결혼을?"
"우리가 일 년 동안이나 사귀어 왔다면, 결혼은 당연하잖아요? 거기에다 이혼도
가능하다니까."
그녀는 그에게 안겨서 편히 잠들었다. 그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었다.
17
"필요한 건 무엇이든지 갖고 가게." 빈딩그가 문 옆에서 말했다.
"내 집처럼 드나들란 말이야."
"알겠어."
그레버는 욕탕 안에서 서서히 온몸을 폈다. 한쪽 구석에 던져진 군복은 몹시
초라하고 더러웠다. 그 옆에 로이타가 빌려준 양복이 걸려 있었다.
빈딩그의 욕실은 벽을 녹색의 타일로 박고 자기의 니켈판으로 번쩍번쩍 빛이 나게
꾸며져 있었다. 소독제의 악취가 나는 막사의 목욕탕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프랑스제의 목욕용 타올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뜨거운 물은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그레버는 모든 잡념을 잊고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있었다.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것은 따뜻함이나 물, 지붕, 빵, 고요,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같이
극히 단순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남은 휴가를 전쟁 따위는 잊어버리고
행복하게 보내리라고 생각했다.
로이타의 말이 옳다. 휴가는 쉽게 오지 않는다. 그는 군복이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의자를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그런 다음에 욕실용염제를 한 움큼 집어 즐거운 듯이 탕
속에 뿌렸다. 그것은 전시의 사치이면서 동시에 한줌의 평화였던 것이다.
그는 몸을 말리고 나서 천천히 옷을 입었다. 군복 대신에 입은 신사복은 몹시
산뜻하고 가벼웠다. 그는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 보았다. 이대로 일선에
나타난다면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미숙한 젊은이가 깜짝 놀란 듯이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으로 성찬식에 참석하는 미성년자같군." 알폰스가 말했다.
"전혀 군인답지 않군. 갑자기 왜 그러지? 결혼이라도 하나?"
"물론이야." 그레버는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지?"
"자네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어. 전과는 달라. 전엔 빼앗긴 뼈다귀를 찾아헤매는 개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군. 그런데 정말로 결혼할 생각인가?"
"그럼."
"에른스트, 잘 생각해 봤나?"
"아니."
빈딩그는 당혹한 것처럼 그레버를 보았다.
"이미 몇 년 동안이나 심각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네."
알폰스는 잇몸까지 드러내고 웃더니 고개를 들어 냄새를 맡았다.
"무엇일까?" 다시 코를 벌름거렸다.
"자넨 욕실용염제를 사용했군!"
그레버는 손을 코에다 댔다.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는데?"
"자네는 모르겠지만 난 알 수 있어. 즉시 발산시켜야 해. 처음에는 잘 모르지만
점점 꽃 향기 같은 게 온몸에 퍼져. 코냑을 마시면 냄새가 사라질 거야."
빈딩그는 술병과 잔 두 개를 가지고 왔다.
"에른스트! 마침내 결혼을 하나? 진심으로 축하하네! 난 계속 독신으로 남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자네의 아내가 될 여잔 내가 만난 적이 있나?"
"아니."
그레버는 코냑을 들이켰다. 그는 결혼을 인정한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한 잔 더 하게. 매일 결혼할 순 없을 테니까."
"아니."
빈딩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도움이 필요하다면 이 알폰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도움이라니? 이런 건 간단히 끝나고 말 텐데."
"자넨 그렇지. 군인이니까."
"우린 전시의 결혼이니까 아무런 서류도 필요 없어."
"그러나 자네 아내는 다를 거야. 일을 서두르다 보면 알 수 있지. 만약에 너무 오래
걸리게 되면 내가 도와주겠어. 자네도 알겠지만 내 친구들 중에 게슈타포의 장교도
있으니까."
"게슈타포가 전시의 결혼과 무슨 상관이 있지?"
알폰스는 싱긋 웃었다.
"에른스트, 게슈타포가 관여하지 않는 건 하나도 없어. 자넨 병사라서 잘 몰라.
그러나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자네가 유대인 아가씨와 결혼하진 않을 테니까.
공산당원의 딸과 결혼하는 것도 아니겠지? 그렇지만 일단 조사하는 것이 규칙이야."
그레버는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만약에 조사가 시작되면
엘리자베스의 아버지가 강제수용소에 있는 사실이 알려질 것이다.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폰스, 그게 정말인가?"
빈딩그는 다시 잔에 술를 따랐다.
"물론. 그렇지만 조금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자넨 설마 자네의 고귀한 아리아인의
피를 야반적인 인간이나 국가의 적이 더럽히게 할 생각은 없겠지. 안 그래?" 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그것은 그래."
"에른스트! 전에 게슈타포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지? 너무 시간을 끌 것 같으면
그들이 도와줄 거야. 약간 압력을 가해야지. 그 녀석들은 거물급이야. 특히 리제는. 그
코안경을 낀 깡마른 친구말야."
그레버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주장으로 오늘 아침에 서류를
갖추기 위해 시청으로 갔다. 만약에 놈들이 그녀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면 그렇지만 날씨가 사나워지면 몸을 숨긴다는 것이 옛날부터의 관습이
아닌가? 만약에 게슈타포에게 발각된다면 아버지가 끌려갔다는 이유만으로
엘리자베스를 강제수용소로 보낼는지도 모른다.
그는 몸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만약에 놈들이 그녀를 조사하게 된다면
어떻게 할까?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른스트, 왜 그래? 자넨 아직 잔을 비우지도 않았군. 너무 행복에 겨워서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신의 농담에 만족해서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레버는 그런 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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