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12

淸山에 2011. 9. 3. 16:14

 

  

**

 

 
 
총통께서 약속하셨어!"
  그는 흥분해서 테이블에 카드를 던졌다.
  "라디오를 틀어!" 두 다리가 없는 사내가 말했다.
  "음악을."
  뮤치히가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에선 불쾌한 금속성의 연설의 홍수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는 다이얼을 얼른
돌렸다.
  "그대로 둬!" 아놀드가 거칠게 말했다.
  "왜 그러지? 항상 듣는 연설인데."
  "그대로 두란 말야! 당의 연설이야. 열중한다면 나의 사정도 호전될 거야!"
  뮤치히는 한숨을 쉬더니 다이얼을 돌려놓았다. 승리를 예찬하는 연설자의 외침이 온
방안에 울려퍼졌다. 아놀드는 몹시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슈트크만이
그레버에게 눈짓을 하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그레버는 그에게 가까이 갔다.
  "조심하게, 슈트크만." 그레버가 속삭였다. 
  "난 이제 가야겠어."
  "무슨 좋은 일이라도?"
  "그런 건 아냐."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 있던 병사들의 눈길이 일제히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는 마치 발가벗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되도록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흥분한 불구자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그는 모두들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폴만에게 갔다. 노인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즉시 문을 열었다.
  "그레버, 자네였군?"
  "그렇습니다. 잠깐 여쭐 게 있어서 들렀습니다."
  "어서 들어오게.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가 없지."
  그들은 램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폴만이
피운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말인가?"
  그레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방은 이것뿐입니까?"
  "?"
  " 2, 3일 동안 어떤 사람을 숨겨야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가능할까요?"
  폴만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지명수배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를 찾아왔나?"
  "선생님 외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레버는 왜 폴만을 찾아왔는지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최악의 경우, 은신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게 누구지?"
  "제 약혼녀입니다. 그녀의 부친은 지금 강제수용소에 있습니다. 그녀도 혹시
체포될까 봐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요즘은 조심하는 게 상책이지. 필요하다면 이 방을 사용하게."
  "정말 감사합니다."
  폴만은 싱긋 웃었다.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다시 인사를 했다.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자네가 적당한 걸 뽑게."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책은 제게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일치되고 있습니까? 이 책들, 시나 철학이 돌격대나 강제수용소, 무고한
인간들의 대량 학살과 같은 비인도와 말입니다."
  "그건 절대로 일치할 수 없어. 그저 동시에 공존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여기 있는
책들을 저술한 사람들이 살아있다면 대부분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겠지."
  "그럴 겁니다, 선생님."
  폴만은 그레버를 응시했다.
  "자네, 결혼할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노인은 책 한 권을 뽑았다.
  "자네에게 줄 것이 없네. 이걸 갖고 가세. 읽을 필요가 없어. 그림이 있을 뿐이지.
좀처럼 책이 읽히지 않을 땐 그림만 뒤적이면서 밤을 새운 적이 있지. 그림과
시만으로도 램프에 석유가 있는 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어. 그러다가 불이 꺼지면
기도밖에 할 수 없었지만."
  "그렇군요."
  "난 자네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지. 자네가 한 말도 곰곰이 생각해 봤어. 하지만
그에 대한 해답은 없네."
  폴만은 주저하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믿음 하나만은 꼭 지니고 있어야 돼. 아니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하느님이야. 또 인간의 마음에 있는 선이지."
  "선생님께선 그것을 의심한 적이 없으십니까?"
  "물론 없지."
 
  그레버는 공장으로 갔다. 바람이 불면서 구름이 지붕 위를 흘러가고 있었다. 어두운
광장을 가로질러 일단의 군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배낭을 메고 있었다.
일선으로 귀대하는 도중이었던 것이다. 그는 파괴된 집의 정원에 솟아있는 잿빛
보리수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이 나무를 처음 대했을 때 느꼈던 잔뜩 부푼 생명의
소용돌이가 어깨와 근육으로 전해졌다. 이상하다 나는 폴만 선생님을 동정하고,
선생님은 나를 도울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생명의 환희를
느낀다.
    
 19
 
 "서류? 잠깐만 기다리시오."
  담당자는 안경을 벗으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러더니 창구와 실내를 구분하고
있는 벽을 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그것을 지켜보다가 주위를 살폈다. 출입구에는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문 옆으로 가 있어." 그는 살며시 말했다.
  "저기서 기다려. 내가 모자를 들면 즉시 폴만에게 가. 나도 곧 따라갈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망설였다.
  "가라니까!" 그는 재촉했다.
  "어쩌면 그 늙은이가 누군가를 부르러 갔는지도 몰라.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혹시 나에게 물어 볼 말이 있는지도 몰라요."
  "그런 건 바로 알게 돼. 그럼 당신이 잠깐 밖에 나갔다고 말 할게."
  그는 창가에 서서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방긋
웃다가 이윽고 사람들 속에 묻혀버렸다.
  "쿠루제양은?"
  그레버는 뒤로 돌아섰다. 담당자가 자리에 앉고 있었다.
  "곧 옵니다. 그런데 일은 제대로 되고 있습니까?"
  담당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결혼할 계획이요?"
  "가급적 빨리 할 생각입니다. 제 휴가가 거의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즉시 결혼할 수도 있습니다. 군인인 경우에는 간단하고 신속합니다."
  그레버는 그가 들고 있는 서류를 보았다. 담당자는 싱긋 웃었다. 갑자기 그레버는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서류는 다 갖추어졌습니까?" 그는 말하면서 모자를 들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잘 되었소. 그런데 쿠루제양은 어디에?"
  그레버는 모자를 창구에 놓고 뒤돌아 서서 엘리자베스를 찾았다. 출입구에는
사람들로 북적댔기 때문에 좀처럼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순간 창구에 놓은 모자에
생각이 미쳤다. 모자는 두 사람만의 신호였었는데,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급히 말했다.
  "곧 데려오겠습니다."
  그는 재빨리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문 밖의 기둥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모든 게 잘되었어, 엘리자베스."
  그들은 창구로 돌아왔다. 담당자는 그녀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당신은 보건 고문이신 쿠루제씨의 따님이 맞습니까?"
  "."
  그레버는 심호흡을 크게 했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알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제 아버지 소식을 들으셨나요?"
  "그런 건 아니오. 당신도?"
  "."
  담당자는 안경을 벗었다. 근시의 파란 눈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희망을 잃지 마시오." 그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부디 행운을 빕니다. 당신이 제출한 서류는 내가 직접 처리했소. 당장이라도
결혼할 수 있소. 모든 건 내가 주선해 드리지요."
  "오늘 오후에 하겠어요."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2시라도 괜찮겠어요?"
  "그렇게 합시다. 장소는 국민학교 운동장이오. 지금은 거기에 호적과가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그들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지금 당장하면 안 돼? 그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텐데."
  엘리자베스는 미소를 지었다.
  "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어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2 15분 전에 데리러
오세요."
  그레버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정말 간단하게 끝났어. 난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조마조마 했었지! 어째서
그렇게 겁을 먹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버지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조심하는 건 바보라고 생각하셨어요.
지금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면서. 하지만 바로 그런 일을 당하고 말았어요.
우린 운이 좋았을 뿐이죠."
  그레버는 거리를 걷다가 '옷 수선' 이라고 써 붙인 가게를 발견했다. 캥거루처럼
생긴 남자가 앉아 군복을 깁고 있었다.
  "이 바지의 얼룩을 뺄 수 없겠소?"
  주인은 고개를 들었다.
  "여긴 수선하는 곳이지, 세탁소가 아닙니다."
  "그건 알고 있소. 다림질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당신이 지금 입고 있는 옷 말입니까?"
  "그렇소."
  주인은 투덜거리면서 일어나더니 바지에 묻은 얼룩을 자세히 살폈다.
  "피가 아니라 기름이오. 벤젠으로 쉽게 뺄 수 있소."
  "그렇게 잘 알면 직접해 보시오. 이건 벤젠으로는 어림도 없소."
  "그럴지도 모르겠소. 나보단 당신이 더 잘 알 테니."
  주인은 커튼 뒤로 가서 헌 바지와 흰 셔츠를 가지고 나왔다.
  "얼마나 걸리겠소? 결혼식에 입을 옷이오."
  "한 시간이면 충분하오."
  그레버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럼, 한 시간 후에 오겠소."
  주인은 난처하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로 알았던 것
같았다.
  "내 옷이 훌륭한 보증이 될 것이오. 난 도망가는 게 아니오."
  "당신의 군복은 국가의 것입니다. 좌우간 다녀오시오. 그 동안 이발이나 하시오.
결혼한다면 이발을 해야겠소."
  "그런 것 같군요."
  그레버는 밖으로 나와 이발관으로 갔다. 바짝 마른 여자가 혼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남편은 일선에 있지요. 그래서 제가 대신 맡고 있어요. 앉으세요."
  "이발을 하고 싶소."
  "전 솜씨가 좋답니다. 세발도? 고급 비누가 조금 남았어요."
  ", 부탁하오."
  여자는 제법 솜씨가 있었다. 이발을 하고 나서 비누와 타올로 머리를 깨끗이 한
다음에 빗질을 했다.
  "머릿기름을 바를까요? 프랑스제의 브리양딘느죠."
  그레버는 깜박깜박 졸다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냄새는 어떻소?" 그레버는 알폰스의 욕실용염제를 떠올렸다.
  "그야 물론 머릿기름 냄새겠죠."
  그레버는 병을 들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기름이 썩은 냄새 같은 게 풍기고 있었다.
승리의 시대는 이미 아득한 옛날이 되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머리는 짧게 깎지 않은 부분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좋소. 약간만."
  그는 계산을 마치고 수선하는 집으로 갔다.
  "아직 이릅니다." 주인이 말했다.
  그레버는 잠자코 자리에 앉아 주인이 다림질하는 것을 구경했다. 일시에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파리가 날아다니고 아이론은 수증기를
만들어냈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주인은 그레버에게 바지를 건네주었다. 바지의 얼룩은 거의 지워져 있었다.
  "좋소!" 그레버는 흡족했다. 바지에서 벤젠 냄새가 났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발은 어디에서 했소?"
  "일선으로 출정한 군인의 아내가 했소."
  "마치 자신이 깎은 것 같군요. 잠깐 기다리시오."
  주인은 가위로 대충 손질을 했다.
  ", 이만하면 괜찮군."
  "얼마요?"
  주인은 사양했다.
  "내고 싶거든 1000 마르크를 내시오. 아니면 한 푼도 안 받겠소. 결혼 선물로
생각하구려."
  "고맙소. 꽃집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겠소?"
  "슈피헤른가에 한 집 있습니다."
 
  꽃가게는 열려 있었다. 두 명의 여자 손님이 화환 값을 흥정하는 중이었다.
  "이건 생화이기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한 사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점원을 보았다.
  "그렇지만 터무니없군! , 밖으로 나가지. 다른 가게로 가서 싸게 사야겠어."
  "사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여점원이 빈정거렸다.
  두 여인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밖으로 나갔다. 여점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그레버를 보았다.
  "손님께서도 화환을 원하시나요? 아니면 관에 덮으실 건지? 보시다시피 꽃은 얼마
안되지만 무척 아름답게 만들어졌지요."
  "난 조화는 필요없소."
  "그러면?" 여점원은 깜짝 놀랐다.
  "꽃이 약간 필요한데."
  "? 백합이 있지만."
  "그것 말고. 결혼식에 사용할 것이오."
  "결혼식에는 백합이 적격이죠. 백합은 무구한 처녀의 상징이랍니다. 요즘엔 꽃을
좀처럼 구할 수 없어요."
  "그렇겠군요. 혹시 장미는 없소?"
  "장미라뇨? 이런 계절에 무슨 장미가 있어요? 지금 온실은 야채만 재배해요."
  그레버는 진열대를 유심히 보았다. 마침내 스와스치카 모양의 화환 그늘에서
황수선화 한 다발을 발견했다.
  "이걸 주십시오."
  여점원은 황수선화에 물을 뿌렸다.
  "죄송하지만 신문지에 싸서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포장지가 없거든요."
  그레버는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곧 꽃이 거북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꽃을 든 자신을 향해 흘낏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꽃을 밑으로 해서 꽃다발을
들다가 나중에는 겨드랑이에 끼고 걸었다. 꽃을 싼 신문지에는 노란꽃 옆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사내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국민재판의 의장이었다. 그는 기사를
읽어보았다. 네 사람이 독일의 승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처형됐다는 기사였다.
그들의 목을 작두로 내리쳤다 그레버는 신문지를 막 구겨서 던져버렸다.
  호적과는 국민학교의 운동장에 있었다. 그곳은 등산용 로프의 끝이 벽에 매여서
울타리를 만들고 있었다. 로프 사이에는 히틀러의 초상이 걸렸으며 그 밑에는
스와스치카가 있었다.
  두 사람은 기다려야만 했다. 그들 앞엔 중년의 병사가 여자와 함께 서 있었다.
여자는 가슴에 돛단배 모양의 브로치를 달고 있었다. 남자는 몹시 흥분해 있었으나
여자는 침착하게 행동했다. 여자는 우리는 공모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엘리자베스를
보고 싱긋 웃었다.
  "결혼 증인." 호적과 서기가 말했다.
  "당신의 결혼 증인은 어디 있소?"
  병사는 어리둥절했다. 처음부터 증인은 없었다.
  "전시 결혼에는 증인이 필요없다고 생각했소." 이윽고 그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형식은 갖춰야 합니다."
  병사는 그레버를 돌아보았다.
  "어떻습니까? 좀 도와주지 않겠소? 서명만 하면 됩니다."
  "좋습니다. 그럼, 당신들은 우리의 증인이 되어 주시오. 나도 증인이 필요하단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걸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잊지 않았다면 당연한 것이오." 서기가 아니꼽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병사들의 말투에서 모욕감을 느낀 것 같았다.
  "당신들은 총도 없이 전쟁터에 나갑니까?"
  병사는 서기를 노려보았다.
  "그건 얘기가 다르잖소. 증인은 총하고는 다르오!"
  "그런데 증인은 있습니까?"
  "여기 있는 나의 전우와 부인이 증인이오."
  서기는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레버를 보았다. 그는 아마도 문제를 간단히 처리하는
게 재미없는 모양이었다.
  "신분증을 가지고 있소?" 그레버에게 물었다.
  "물론. 우리도 결혼을 할 거요."
  서기는 느릿느릿 서류를 들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그레버의 이름을 호적부에
기입했다.
  "여기에 서명하시오."
  네 사람이 각각 서명을 했다.
  "총통의 이름으로 축하드립니다." 서기는 병사와 병사의 아내에게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그레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의 증인은?"
  "여기 있소." 그레버는 두 사람을 가리켰다.
  서기는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만 증인이 될 수 있소."
  "그건 왜 그렇죠?"
  "당신들은 아직 독신이죠? 하지만 저들은 이미 결혼이 성립된 부부입니다. 증인으론
독립된 두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내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레버는 관리의 말이 사실인가, 아니면 생트집을 잡는 것인가 판단이 서지를
않았다.
  "증인이 되어 줄 사람이 없겠소? 혹시 사무원이라도?"
  "이런 직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서기는
냉정하게 말했다.
  "증인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습니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그러오?"
  그들에게로 다가와 묵묵히 듣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물었다.
  "결혼 증인이라면 내가 서 주겠소."
  그는 엘리자베스 옆에 섰다. 서기는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신분증이 있소?"
  "물론 있지."
  중년 남자는 재빨리 신분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던졌다. 서기는 그것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하이 히틀러! 친위대 대장님!"
  "하이 히틀러!" 친위대 연대장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연극은 그만해 둬. 알았나? 군인에게 그런 태도로 굴다니, 넌 도대체
뭐지?"
  "알겠습니다, 연대장님! 저 죄송하지만 여기 서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레버는 친위대 연대장인 힐테브란트가 자기의 증인이 됐음을 알았다. 첫 번째
증인은 크로츠 공병이었다. 힐테브란트는 그레버 부부와 악수를 나누고 크로츠
부부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서기는 교수형 집행을 위에서 늘어뜨린 것 같은 로프 뒤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
두 권을 꺼냈다. 그는 지극히 사무적으로 말했다.
  "국가의 선물입니다."
  서기는 힐테브란트의 뒷모습을 흘겨보고 있었다. 
  "사복을 입고 있으니 알아 볼 수가 있나."          
  두 부부는 평행봉 앞을 지나서 출구로 갔다.
  "당신은 언제 출발하시죠?" 그레버는 공병에게 물었다.
  "내일입니다." 크로츠가 대답했다.
  "우린 국가에 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전사를 하더라도 적어도 마리의 걱정은
조금 덜 수가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크로츠는 배낭의 끈을 풀었다.
  "덕분에 무사히 결혼식을 마쳤습니다. 여기 브른스윅크 소시지가 있습니다.
받으십시오. 난 농촌 출신이라 이런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실은 서기에게 줄
생각이었는데 생각해 보십시오! 저런 녀석에게 줄 수 없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놈들에게 호의를 베풀 필요는 없습니다!" 그레버는
소시지를 받았다.
  "대신에 이것을 받아 주십시오. 결혼선물로 이것밖에 드릴 게 없습니다."
  "그건 저도 한 권 받았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이것으로 당신은 두 배나 행복해 질 것입니다. 한 권은 부인께
드리십시오."
  크로츠는 '나의 투쟁'을 들었다.
  "정말로 주시는 겁니까?"
  "제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집에 많으니까요."
  "그럼 감사합니다."
  그레버는 급히 엘리자베스의 뒤를 쫓았다.
  "난 알폰스 빈딩그에게 알리지도 않았어. 녀석을 증인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어.
돌격대장의 이름을 우리 이름과 나란히 하고 싶지 않더군. 그 대신 친위대 연대장이
증인이 되었지."
  그들은 마르크프트라츠를 가로질렀다. 마리 교회의 지붕 위로 비둘기가 날아다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한 만큼
행복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교외의 외딴 숲속 공지에서 뒹굴고 있었다. 빈터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고, 미풍이 가볍게 꽃잎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않았다.
  "저쪽에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치 마법에 걸린 숲 같군요. 아니라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나무라는 나무는 모두 은빛으로 빛나고 있어요. 당신에게도
보이나요?"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뭐죠?"
  "굉장히 얇은 알루미늄이야. 초콜릿을 싸는 은종이 같은 것이지."
  "숲에 가득 걸려 있어요. 어디서 생겨 났을까요?"
  "비행기에서 다발로 뿌렸지. 무선통신을 방해하려는 의도지. 은박지가 공중에서
날아다니면 전파를 교란시키니까."
  "어머나, 시시하군요. 내겐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보여요. 그런데 전쟁과 관련이
있다니! 우린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공지 주위의 수목에는 나뭇가지마다 은박지가 걸려 반짝반짝 빛났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며 그것은 평화의 축제가 되어 붕붕 떠다녔다.
  엘리자베스는 그레버에게 기댔다.
  "저 숲은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바라보기로 해요.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좋아."
  그레버는 외투 주머니에서 폴만에게 받은 책을 꺼냈다.
  "비록 신혼여행을 갈 순 없지만 스위스의 풍경이 가득 실려 있어. 전쟁이 끝나면
그곳으로 가서 우리의 보금자리를 꾸미는 거야."
  "스위스! 밤에도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곳이죠."
  그레버는 책을 펼쳤다.
  "지금은 그곳조차 어두워. 병영에서 들었는데 우리 정부가 요구한 모양이야.
등화관제를 하라는 최후 통첩을 받았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겠지."
  "그건 왜 그렇죠?"
  "스위스의 상공을 아군기만 통과한다면 상관이 없겠지. 그런데 지금은 적기도
통과하고 있거든. 폭탄을 가득 싣고 말야. 불빛이 있으면 위치가 드러나잖아."
  "그렇다면 틀렸군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해. 언젠가 전쟁이 끝나서 우리가 스위스로 가면, 그곳의
경치는 이 그림들과 똑같이 변함없지.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그림책이라면 결코 그럴
수가 없어."
  "독일의 책도 그렇겠죠?"
  "그래."
  그들은 스위스를 구경했다.
  "산뿐이군요. 스위스에는 산 말고는 없나요? 따뜻한 남쪽은 없나요?"
  "물론 있지! 여기가 스위스의 이탈리아야."
  "로카르노군요! 여기서 평화회의가 열렸었지요. 전쟁을 또다시 일으키지 않겠다고
결의를 한."
  "그랬었지."
  "그것도 오래 못 갔어요."
  "그래. 이 그림이 바로 로카르노야. 종려와 오래된 교회들, 마조레 호수도 있어.
이곳의 섬에는 진달래가 피었어. 태양이 빛나고 평화가 있는 곳이지."
  "! 거긴 어디죠?"
  "포르트론코라고 부르지."
  "좋군요." 엘리자베스는 즐거운 듯이 웃고 있었다.
  "우리 그곳을 꼭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가기로 해요."
  그레버는 책을 덮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빛나는 은빛이 눈을 가렸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안았다. 그녀는 숲 속의 풀과 섬세한 나뭇잎과 연약한 꽃잎이 되어
있었다. 나뭇잎이 차츰 크게 확대되면서 마침내 지평선을 덮었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바람이 멎더니 금세 어두워졌다. 멀리서 육중한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대포다 어디일까? 여긴 어딘가? 전선은? 그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근처에 포좌가 있을까? 사격 연습을 하는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움직였다.
  "어디죠?" 그녀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여기를 폭격할까요?"
  "비행기소리가 아냐."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레버는 몸을 일으키고 귀를 기울였다.
  "저것은 포탄도, 대포도 아냐. 천둥소리야."
  "천둥이 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아요?"
  "그건 일정한 시간이 없어."
  이번에는 번갯불이 번쩍 빛났다. 인조의 폭풍우를 알고 있는 그들은 번갯불이
인공적이라고 생각했다. 천둥소리조차 비행기의 굉음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종려나무 밑으로 달려갔다. 머리 위로
나뭇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아득하게만 들렸다.
  그들이 숲속에서 벗어나자 지붕이 있는 전차의 정류장이 보였다. 정류장에는
친위대원 세 사람이 많은 사람들 틈에 섞여 있었다. 젊은 친위대원 한 사람이
엘리자베스에게 곁눈질을 했다.
  얼마 후, 비가 그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군. 어디로 갈까?"
  "오른쪽으로."
  그들은 어둠침침한 거리로 나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땅을 파고
있었다. 순간 엘리자베스는 긴장했다. 그녀는 노동자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옆을 걸어가면서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레버도 노동자들의 옷에 번호표가 붙어 있는 것을 알아챘다. 그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수인으로서 아무도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일만 했다. 두 사나이가 쓰러져서
매점 옆에 누워 있었다.
  ", 임마!" 친위대원이 소리를 질렀다.
  "이리 와! 접근은 금지다!"
  엘리자베스는 못 들은 척하고 더욱 서두르면서 수인들의 얼굴을 훑어갔다.
  "! 너 내 말이 안 들려?"
  친위대원이 욕설을 퍼부으며 다가왔다.
  "왜 그러지?" 그레버가 물었다.
  그레버는 뒤에 다른 친위대원이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분대장이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불러 세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우린 무엇인가 찾고 있었어."
  "무엇을? 빨리 말해 봐!"
  "여기서 브로치를 잃어버렸어. 다이아몬드가 박힌 돛단배인데 어젯밤 이곳을
지나가다가 떨어뜨린 게 분명해. 혹시 못 보았어?"
  "뭐라고?" 그레버는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갔다.
  "아무것도 못 보았어." 분대장이 대답했다.
  "정신이 없군!" 친위대원이 말했다.
  "신분증 있나?"
  그레버는 그를 쏘아보았다. 당장이라도 때려눕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친위대원은 스무 살이 채 안된 것 같았다. 슈타인브레너의 얼굴이 친위대원의 얼굴
위에 겹쳐졌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난 신분 증명서뿐만 아니라 대단히 훌륭한 증명서도 있지. 게다가 친위대 연대장인
힐테브란트는 내 친구다. 흥미가 있다면 보여주지."
  친위대원은 비웃었다.
  "그것뿐인가? , 총통은 작은 아버지시겠지?"
  엘리자베스는 대열의 끝에 당도해 있었다. 그레버는 천천히 시간을 끌면서 결혼
증명서를 꺼냈다 
  "잠깐 가로등 밑에 가 보게. 이걸 읽을 수 있겠지? 내 결혼 증인의 서명과 날짜를.
이제 알았겠지만 오늘이다. 또 물어 볼 것이 있나?"
  친위대원이 증명서를 자세히 살펴보자 분대장이 가까이 와서 어깨 너머로 살짝
엿보았다.
  "힐테브란트의 서명이군." 분대장이 인정했다.
  "알겠소. 그러나 이곳은 금지되어 있지요. 우리도 방법이 없소. 브로치는 정말
안됐지만."
  "정말 미안하게 됐소. 금지구역이라면 찾는 걸 포기하겠소. 어쨌든 명령은
명령이니까."
  그는 엘리자베스를 향해서 뛰어갔다. 분대장이 그레버 옆으로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혹시 브로치를 찾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어디로 전할까요?"
  "힐테브란트에게. 그게 제일 간단하오."
  "알겠습니다." 분대장이 예의를 지키며 말했다.
  "찾아보았나?"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그녀는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몽롱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제 잃은 브로치에 대해서 분대장님에게 얘기했어." 그레버는 급히 말했다.
  "만약에 찾게 되면 힐테브란트에게 전해주시겠데."
  "고맙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분대장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믿어 보십시오. 우리 친위대는 모두 신사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수인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것이 분대장의 주의를 끌었다.
  "만일 저 새끼들이 감추었다면 틀림없이 찾아내겠습니다." 분대장은 난폭하게
말했다.
  "놈들이 지쳐서 쓰러질 때까지 조사해보겠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여기서 떨어뜨렸는지, 그게 분명치 않아요. 어쩌면 숲속에서 잃었는지도 몰라요.
, 거기서 잃어버린 것 같아요."
  분대장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정말 숲속이 맞는 것 같군요." 그녀는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분대장의 웃음이 얼굴 전체로 퍼졌다.
  "물론 거기는 우리의 관할 밖입니다."
  그레버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뼈만 남은 수인 곁에 서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자마자 재빨리 방향을 바꾸면서 수인에게로 떨어뜨렸다.
  "감사합니다." 그는 분대장에게 말했다.
  "내일 숲속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찾게 될는지도 모르겠소."
  "하이 히틀러! 그리고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고맙소."
  그들은 묵묵히 걷고 있었다. 마치 홍학의 무리가 날고 있는 것처럼 진주조개와
장미빛이 어우러진 구름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전 정말 큰 실수를 했군요.
  "괜찮아. 그게 바로 인생이야. 궁지에서 빠져나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게 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신은 브로치와 힐테브란트로 저를 구해주셨어요. 당신은 훌륭한
거짓말쟁이군요."
  "그건 10 년 동안 조국이 내게 가르쳐 준 거야. , 집으로 돌아가지. 나는 이제
당신의 아파트로 옮길 권리가 있으니까."
  "저는 내일 공장에 나가지 않아도 돼요. 이틀 동안 휴가를 받았어요."
  "그런 말을 지금에서야 하다니!"
  "내일 아침까지 말하지 않을 작정이었어요."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 놀라게 하지 마! 부탁이야. 우리에겐 지금 그럴 시간이 없어. 우린 지금 단 일
분이 귀해. 이제부터 신혼의 기분을 만끽하는 거야. 아침식량은 충분한가?"
  "충분해요."
  "좋아. 내일은 요란하게 아침식사를 하기로 하지. 행진곡을 틀어놓고 말야. 그리고
루젤 여사가 도덕적 분개로 가슴이 탄다면 결혼 증명서를 내밀고 실망하는 꼴을
감상해야지. 그 여자가 친위연대장의 서명을 본다면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엘리자베스는 싱긋 웃었다.
  "그다지 심술궂게 굴진 않을 거에요. 그저께 당신에게서 받은 설탕을 전해주면서
당신이 훌륭한 남자라고 칭찬하던데요.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겠어요?"
  "난 모르겠는데. 아마도 매수되었겠지. 우리들의 조국은 지난 10 년 동안에 그것을
완전히 터득했으니까."
      20
 
  정오에 공습이 있었다. 구름이 잔뜩 끼고 마침 점심시간이었으므로 거리에는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그레버는 공습 경비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지하 방공호에
들어가도록 지시를 받았다. 처음에는 단순한 경보라고 생각했지만 최초의 폭발을
감지하는 순간, 재빨리 입구 가까이로 접근했다. 문이 활짝 열려지면서 그레버는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들어가!" 경비원이 밖에서 소리를 질렀다.
  "거리에 있을 수 있는 건 공습 경비원뿐이야!"
  "나도 경비원이다! 
  그는 공장을 향해서 달렸다. 엘리자베스를 만나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장이 폭격의 중요 목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길모퉁이를 돌았다. 그때 바로 앞에 서 있던 집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은 공중에서 산산조각으로 분해되어 폭음 속에서 사방으로
내려앉았다. 
  그레버는 도랑 속으로 뛰어든 다음에 손으로 귀를 막았다. 두번째의 폭발이 그의
뒤에서 작렬했다. 돌조각이 우박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면서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귀를 잡아당겼다. 다시 이마를 두들기며 의식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순식간에 거리는 온통 불꽃의 바다로 변했다.
  사람들이 공포에 들뜬 눈으로 입을 딱 벌린 채 그가 있는 쪽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결코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그들은 저마다 입과 귀가
막힌 사람들처럼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지르면서 그의 옆을 지나쳤다. 그 뒤를 의족을
한 사내가 이미 죽은 비둘기를 가슴에 안고 급히 달려오고 마지막으로 커다란 셰퍼드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