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의 집 앞에 다섯 살 가량의 여자아이가 한 명 서 있었다. 그 아이는 갓난애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레버는 뛰어가다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어서 방공호로 돌아가!" 그는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가셨지? 넌 왜 혼자 있지?"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레버는 경비원이 자신을
향해서 무슨 말인가를 외치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레버도 욕설을 퍼부었지만 자신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경비원은 몸짓을
하면서 계속 소리를 지르고, 그레버는 두 손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마치 유령의
무언극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경비원은 한쪽 손으로 그를 잡으려고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아이를 안으려고 했다.
그레버가 그를 뿌리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완전히 무중력 상태가 되더니 하늘을
향해 마음껏 뛰어오를 수 있을 것같이 발이 땅끝에서 떨어졌다. 문이 활짝 열린 옷장
같은 게 선사시대의 새처럼 그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력한 선풍이 그를
사로잡고 빙빙 돌렸다.
그레버는 화염을 잔뜩 마셨다. 폐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그는
길바닥에 쓰러져서 머리를 땅에 대고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윽고 머리가 파열할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고개를 들었다. 잿더미가 된 집으로부터 빠져나온 층계 위에
계집애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갓난애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폭풍에 떠밀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떻게 공장이 있는 광장까지
당도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공장은 피해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공장의 오른쪽에 새로운 폭탄 구멍이 하나 생겼을 뿐이었다.
공장의 공습 경비원이 그를 가로막았다.
"내 아내가 여기 있어!"
그레버는 소리를 질렀다.
"제발 들어 가게 해줘!"
"여긴 통행금지야! 방공호는 저쪽 끝에 있어."
"국가에서 금지 안 한 것이 있나? 비켜줘! 그렇지 않으면."
경비원은 안마당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철근 콘크리트의 토치카가 있었다.
"기관총과 감시대다! 들어 가고 싶으면 들어가! 이 얼빠진 놈아."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었다. 기관총은 안마당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감시대라고!" 그는 흥분해 있었다.
"그따위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다음엔 변소에도 감시대를 배치해야 될 거야.
여긴 죄수라도 가두었단 말인가? 군용외투 공장에서 무얼 감시하겠단 말이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들이 있어."
경비원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선 군용외투만 만들지 않아. 그러니까 노동자만 있는 게 아니라구. 어떤
군수공장이나 강제수용소의 죄수들을 2--300 명씩 부려먹고 있어. 알겠나?"
"알았어. 그럼 여기 방공호는 어때?"
"방공호가 어떤지 내가 알게 뭐야? 난 밖에서만 근무해."
"방공호는 안전한가?"
"물론이지. 자, 이만 꺼져버려! 누구도 밖으로 나올 수 없어. 저 사람들이 벌써 너를
목격했어. 사보타주를 선동하는 자를 감시하는 거야."
폭격은 멎었지만 지상에서는 계속해서 고사포를 발사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광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방공호가 열리지 않아서 광장 한쪽 끝에 새로 생긴 폭탄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구덩이 속은 화약 냄새로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는
가장자리로 기어 나와서 공장을 노려보았다.
'여기는 전쟁의 방식이 다른데.' 그는 생각했다. 일선에서는 각자가 자신만 걱정하면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제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있으며 또한 혼자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당하고 있다. 그는 다섯 살짜리 계집애의 시체를 떠올리고
자신이 본 수많은 시체들을 떠올리고 부모님을 떠올리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이런 일을 빚어낸 인간들에게 증오를 느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악취가 풍기는 지상으로 부드러운
눈물처럼 떨어졌다. 비는 지면을 때리고 다시 튀어 오르면서 사방을 점점 어둡게
했다. 그때 제2의 폭격기 편대가 하늘에 나타났다.
마치 누군가가 가슴을 두 쪽으로 잘라내는 것 같았다. 굉음이 머리를 마비시키더니
공장의 일부가 부채꼴처럼 펼쳐진 불꽃 앞에서 까맣게 되어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레버는 거대하게 치솟고 있는 불꽃을 노려보았다. 그는 다시 공장의 정문으로
달려갔다.
"넌 왜 또 왔어?"
"공장에 폭탄이 명중한 걸 모르나?" 경비원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알아. 어디야? 혹시 외투부가 아닌가?"
"외투는 훨씬 뒤야. 바보 같은 녀석!"
"그게 정말인가? 내 아내는."
"네 아내고 뭐고 다 방공호로 피신했어. 부상자와 시체만 남아 있지. 자, 방해하지
말고 빨리 가!"
"모두 방공호로 피신했다면서 어째서 사상자가 생겼지?"
"강제수용소에서 온 놈들이야. 그들은 방공호에도 들어갈 수 없어. 그들을 위해서
특별 방공호라도 만들어야 하나?"
"아니."
"이제는 날 혼자 있게 해줘. 그래도 군인인데 겁쟁이로군! 폭격은 이미 끝났어."
그레버는 머리를 들었다. 고사포만이 여전히 포효하고 있었다.
"한 가지만 물어 볼게. 외투부가 무사한 지를 알고 싶어. 나를 들여보내 주든지
자네가 알아봐 주게. 도대체 당신은 결혼도 안했나?"
"물론 했지. 나도 아내 때문에 마음이 조마조마해."
"그러면 알아봐 주게. 그렇게 한다면 당신 아내는 무사하게 될 거야."
공습원은 그레버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넌 머리가 돌았나? 네가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냐?"
공습원은 전화가 있는 사무실로 들어갔다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전화를 해봤어. 외투부는 무사한 모양이야. 다만 강제수용소에서 온 자들이
직격탄을 맞았다더군. 넌 결혼한 지 얼마나 되었지?"
"5일."
경비원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그렇다면 얘기가 다르잖아."
이제 끝났다. 시내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하고 온통 불바다로 변해 있었다. 빨간 불,
노란 불, 하얀 불, 붕괴된 건물 위로 쥐처럼 살살 기어 다니는 불. 하늘을 향해
타오르는 불, 불이 된 시체와 부상자. 사람이 집에서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와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곤두박질친다. 살이 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 퍼진다.
"인간 횃불이다." 그레버의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어떻게 할 수도 없어. 그대로 타버리는 거야. 살은 물론이고 뼈까지 모두 타버리는
거야."
"어째서 끌 수 없지?"
"전부 진화하려면 한 사람당 한 개씩의 소화기가 있어야 해. 비록 그것을
갖춘다해도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저 악마와 같은 약품은 모든 걸 태울 수 있지."
"살려줄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빨리 죽여 주는 게 낫겠군."
"그런 짓을 하면 살인죄로 교수형을 받을 뿐이야. 미친 듯이 달릴 때 쏠 때면 쏴
보라구."
그레버는 그 남자를 보았다. 철모를 쓴 남자는 대부분의 이가 빠져나가서 입 주위가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럼,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으란 말인가?"
"이론적으론 그렇지. 아니면 담요를 덮어서 불을 꺼야지. 하지만 누가 모포를 들고
다니겠나? 그리고 자기 몸에 불이 붙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딨어."
"그야 물론. 그런데 대체 당신은 뭐야? 방공단인가?"
"난 시체 운반대야. 물론 부상자도 운반하지. 아, 겨우 마차가 왔군."
버는 말 한 마리가 불길 사이로 수레를 끌고서 허둥대는 것을 보았다.
"구스타프, 잠깐만!" 사내가 외쳤다.
"더 이상 마차가 들어 올 수 없어. 여기서부터 날라야지. 들것을 갖고 왔나?"
"두개야."
그레버가 사내의 뒤를 따라가 보자, 벽돌더미 뒤에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도살장은
차라리 질서정연하다. 여기서는 인간의 육체가 갈가리 찢어진 채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시체에 걸려 있는 헝겊조각들.
한쪽에는 어린애들의 시체가 난잡하게 널려져 있었다. 아이들은 튼튼하지 않은
방공호에 피신했다가 폭격에 맞은 것이다. 산산이 흩어진 손과 발, 멋대로 흐트러진
책가방. 아! 죽은 고양이 앞에는 새까맣게 그슬린 시체가 있었다. 시신은 남녀의
구별을 도저히 식별할 수 없었다. 성기는 물론이고 가슴까지 불에 타서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았다. 금반지가 하나가 타 들어간 손가락에서 반짝 빛났다.
"눈." 한 사람이 괴성을 질렀다.
"눈동자가 타 버리다니!"
시체는 마차에 자꾸만 쌓여갔다.
"린다." 여자가 들것 뒤에 따라오면서 부르짖었다.
"린다! 린다!"
태양이 나오면서 비에 젖은 거리를 비추고 쓰러지지 않은 나무들은 녹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비가 그친 뒤의 햇빛은 신선하고 더욱 강렬했다.
"이런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누군가가 말했다.
그레버는 뒤돌아보았다. 적색 모자를 쓴 우아한 여인이 아이들의 시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절대로! 언제까지나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경비차가 왔다.
"자, 저리들 가! 여기 서 있으면 안돼. 빨리들 가라구!"
그레버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었다. 도대체 무엇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
전쟁이 끝나면 용서해야 할 것과 용서받지 못할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집은 무사했으나 앞집에 소이탄이 떨어져서 지붕에 불이 붙고 있었다.
문지기는 거리를 서성거렸다.
"어째서 불을 끄지 않지?" 그레버가 물었다.
문지기는 시내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가리켰다.
"어째서 저것은 끄지 않지?" 이번에는 문지기가 반문했다.
"물이 없나?"
"물은 약간 있어. 그러나 수압이 약해. 도저히 물줄기가 지붕까지 올라갈 수 없어."
거리에는 의자, 슈트케이스, 새장에 넣은 카나리아, 그림, 옷, 보따리 등이 너절하게
널려 있었다.
"아래층까지 불이 옮겨 붙을까?" 그레버가 물었다.
"소방대가 빨리 안 오면 그럴 수도 있지. 다행히 바람이 잠잠하군. 우리는
수도꼭지라는 수도꼭지는 모조리 틀어 놓고 불길을 막고 있지만 더 이상은 도리가
없어. 그건 그렇고 잎담배는 어떻게 되었지?"
"내일 꼭 갖다줄게."
그는 엘리자베스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방은 당장에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침실 앞 창문으로 루젤 부인이 허둥지둥하는 모습이 보였다.
루젤은 흰색 보퉁이를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나도 짐을 꾸려야지. 그래도 괜찮지?"
"물론이지." 문지기가 대답했다.
아파트의 문은 열려 있었다. 복도는 여러 가지 물건과 보따리들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루젤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옆을 지나갔다.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는 창가의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문이 꽉 닫힌 방안에서 바깥의
세계와 격리된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는 잠시 그대로 창가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침대 밑에서 슈트케이스 두 개를 찾아내고 무엇부터 꾸릴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엘리자베스의 옷부터 시작하기로 하고 옷장에서 당장 입을 옷 몇 가지를
꺼내고 내의와 양말을 챙겼다. 그 동안에도 밖에서는 사람이 부르짖는 소리와
갖가지의 소음이 들려왔다. 밖을 내다보았다. 소방대는 아직 당도하지 않았고 분주히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모피외투를 걸친 여자가 작은 상자를 안고
맞은 쪽의 폐허에 놓인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상자에는 소중히
간직한 보석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보석을 찾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금팔찌와 브로치가 나왔다.
두 채의 집이 서서히 타올랐다. 소방대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가옥들은 그다지
중요한 재산이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도 급한 군수품 공장이 불타고 게다가 시내
곳곳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가구와 물건들을 될수록 많이 끄집어냈다. 그들은 그것을 어디로 옮겨야
할 것인가 막막했다. 짐을 운반한 방법도 없지만 옮겨놓을 만한 장소도 없었다. 집
앞의 거리는 밧줄로 차단되고 그 양쪽에는 여러 가지 생필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어떤 가족은 식탁과 의자를 내놓고 둘러앉았고 또 다른 가족은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곳은 자기들의 영토라는 듯이 사람들의 통행을 막았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가죽으로 된 의자를 갖다 놓고 거기에 앉아서
슈트케이스와 다른 짐들을 지키고 있었다. 피해를 입지 않은 한 집에 짐을 맡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창문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른 곳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레버가 체념해 버리고 자리로 돌아오자 빵과 음식을 싼 꾸러미가 없어져 있었다.
그는 나중에서야 식탁에 둘러앉아 있던 가족들이 음식을 뻔뻔스럽게 먹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엘리자베스가 비상선을 돌파해서 불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도 뒤를 돌아다보았으나 그레버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문앞에 까만 물체가 서
있고 오직 머리카락만이 타오르듯이 붉게 빛났다.
"여기야!" 그는 다시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에게로 달려왔다.
"여기 계셨군요! 고마위요!"
그는 그녀를 힘껏 안았다.
"당신을 데리러 갈 수 없었어. 당신의 물건을 지켜야 하니까."
"저는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몹시 걱정했어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
그녀는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군. 난 당신만을 걱정하고 있었어."
그녀는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여기는 어떻게 되었죠?"
"지붕에 불이 붙었어."
그녀는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길 한쪽에 물통과 컵이 놓여 있었다.
그는 컵에 물을 따라서 엘리자베스에게 주었다.
"이것을 마셔!"
"이봐요! 그건 우리 물이에요!" 뒤에서 여자가 악을 썼다.
"컵도 우리 거야." 이번에는 사내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마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하고 나서 뒤돌아섰다.
"공기는 어때? 그것도 당신들 것인가?"
"이대로 돌려주세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아니면 통 속의 물을 저 사람들의 머리에 쏟아버리든지."
그레버는 컵을 그녀의 입술에 댔다.
"아냐, 마셔. 당신 줄곧 달려왔지?"
"그래요."
그레버는 물통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에게 소리를 지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가족 중의 한 명이었다. 그는 다시 물을 따라서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그들도 조용히 있었다. 이윽고 그레버가 뒤돌아서자 꼬마가 즉시 달려와서
컵을 식탁에 옮겨놓았다.
"치사한 것들!"
문지기가 식탁의 가족을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일어나서 길게 하품을 하다가
다시 누워 버렸다.
"여기 옷보따리가 있어. 모두 당신 옷이야. 당신 아버지 사진도 이 속에 있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가구도 꺼낼까?"
"다 타도록 내버려두세요."
"아직도 여유가 있는데?"
"그대로 두세요. 그러면 모든 게 끝나버릴 테니까."
"무엇이 끝나지?"
"과거가. 과거는 어쩔 수도 없어요. 다만 무거운 짐이 되어 우리를 억누르죠.
우리들은 모든 걸 새로 시작해야 돼요. 과거는 이미 타버렸어요."
"가구는 팔 수도 있어."
"여기서?" 엘리자베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에서 경매를 할 순 없어요. 보세요. 모두들 가구에 둘러싸여 있어요."
커다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루젤 부인은 우산을 펼쳤다. 꽃이 달린 모자를
꺼낸 여자가 그것을 쓰고 있다가 급히 벗어서 옷 속에 감췄다. 문지기가 잠에서
깨어나 재채기를 했다. 그레버는 그의 배낭에서 개인용 텐트를 꺼냈다. 그는 외투를
엘리자베스에게 벗어 주고 텐트를 침대 위에 세우기 시작했다.
"오늘밤 잘 곳을 마련해야 돼."
"비 때문에 불이 꺼질지도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서 밤을 새울까요?"
"글쎄."
"여기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어요. 당신의 텐트와 외투를 이용해서."
"그럴까?"
"피곤해서 어디라도."
"빈딩그의 집에 빈 방이 있는데, 거긴 싫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폴만 선생님께 가도 되고."
"잠깐 기다려 봐요. 우리 방은 아직 타지 않았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군용외투를 입고 빗속에 서 있었다.
"뭐든 마실 게 있었으면 좋겠어."
"있어. 짐을 꾸릴 때 책장 뒤에서 보드카를 발견했어. 그걸 잊고 있었군."
그레버는 침구를 풀었다. 그 속에는 술병뿐만 아니라 술잔도 숨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해. 조심하지 않으면 국민의 불행을 비웃고 있다고
루젤에게 밀고를 당할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잔을 들고 쭉 마셨다.
"멋지군요! 제겐 이것이 필요했어요. 담배도 있어요?"
"전부 가지고 나왔지."
"그럼 우린 필요한 건 전부 갖춘 셈이군요."
"가구를 더 꺼낼까?"
"경비원이 길을 막고 있어요. 그리고 갖고 와 봤자 별수도 없어요. 오늘밤을 어디서
지내든 그걸 가져갈 순 없으니까요."
"한 사람이 피난처를 찾고 한 사람은 짐을 지키면 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며 보드카를 마셨다. 아파트의 지붕이 무너지더니 곧
이어서 층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거리에서 지켜보던 거주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격렬한 불꽃이 창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우리 방은 아직 괜찮군."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한 남자가 대꾸했다.
그레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건 또 왜 그렇습니까?"
"우리보다 당신들이 운이 좋으란 법은 없어. 난 저기서 23 년이나 살았어. 그게
지금 불타고 있는 거야."
중년의 남자는 대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나는 이건 우연의 문제지,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의의 문제야. 그 뜻을 알 수 있다면!"
"잘 모르겠지만 탓이라고 할 순 없으실 겁니다." 그레버는 웃었다. "아직도 그것을
믿고 있다면 당신은 힘든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보드카를 한 잔 드릴까요? 화를
내기보다는 이게 괜찮습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이제 당신 방이 내려앉으면 그게 필요할 테니까."
윗벽이 무너져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것은 엘리자베스 방의 바닥을 뚫고 밑으로
떨어졌다. 루젤 부인은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울고 있었다. 식탁에
앉아있던 가족들은 알코올 스토브에다 커피 대용품을 끓이는 중이었다. 안락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은 의자의 등을 신문지로 가리고 비를 막아 보려고 애를 썼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우리의 2주간의 보금자리가 타고 있군."
"정의다!" 대머리가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내기를 했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군요. 당신이 이긴 게 틀림없으니까."
"난 유물론자가 아냐."
"그럼 어째서 불평을 하셨죠?"
"저건 내 집이야. 자넨 내 기분을 몰라."
"모르는 게 당연하오. 독일 제국은 나를 젊었을 때부터 세계 유람자로
만들었으니까."
"그것을 감사히 생각해야 돼."
대머리는 입에 손을 대고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보드카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겠지?"
"이제는 안되오. 그보다는 기도나 올리시오."
루젤의 방에서 불꽃이 튀어나왔다.
"책상이 타고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속삭였다.
"스파이의 책상 속에 든 보고서와 함께!"
"난 거기에 석유를 한 병 뿌려놓았지. 그런데 우린 이제 어떻게 하지?"
"잘 곳을 찾아야죠. 찾지 못하면 거리에서 자기로 해요."
"거리나 공원에서."
그레버는 하늘을 보았다.
"텐트로 비는 막을 수 있지만 의자와 책은?"
"여기 그대로 두고 내일 결정하는 게 좋겠어요."
그레버는 배낭을 지고 침구를 어깨에 둘러멨다. 엘리자베스는 슈트케이스를 들었다.
"이리 줘. 난 짐을 나르는 것에 익숙하니까."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루젤이 비명을 지르면서 깡충 뛰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불이 밧줄로 차단한 거리를 넘어서 그녀의 얼굴에 명중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화염이 솟구쳤다.
"그만 가요." 엘리자베스가 재촉했다.
그레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컵을 가지고 달아났던 꼬마가 이미 그들의
의자를 차지해 앉아 있었다.
"루젤이 깡충깡충 뛰는 동안에 핸드백을 슬쩍했지. 서류가 가득 들어 있어. 불 속에
던져 버려야지. 누군가가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아도 될 거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레버는 오랫동안 서서 문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을 열리지
않았다. 그는 뒤돌아섰다.
"폴만 선생님은 집에 안 계셔. 아니면 소리를 못 들으셨든지."
"다른 데로 옮기셨는지도 몰라요."
"다른 데 어디로? 혹시나."
그레버는 다시 문 앞에 섰다.
"아냐. 게슈타포는 오지도 않았어. 어떻게 할까? 방공호로 갈까?"
"싫어요. 이 근처에 있을 곳이 없을까요?"
주위는 이미 어두워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하늘에는 타버린 건물의 까만 잔해가
세로로 서 있었다.
"여기 지붕이 약간 나와 있군. 한쪽으로 텐트를 걸고 다른 쪽엔 외투를 걸치기로
하지."
그레버는 대검으로 지붕을 두들겨 보았지만 내려앉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폐허에서 쇠막대기 두 개를 찾아냈다. 그것을 지면에 꽂고 그 위에 천막을 걸쳤다.
"이것이 커튼이야. 다른 한쪽에 외투를 걸면 텐트가 될 거야. 괜찮겠지?"
"도와줄까요?"
"아니. 짐이나 지키고 있어."
그레버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파편과 돌멩이를 치웠다. 그런 다음에 슈트케이스를
들여놓고 침구를 풀었다. 배낭은 머리맡에 놓았다.
"이만하면 훌륭해. 난 지금까지 이보다 훨씬 못한 곳에서 살고 있었어. 물론
당신에겐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지만."
"저도 이제 익숙해지고 있어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레인코트와 알코올 스토브를 꺼냈다.
"빵을 도둑 맞았지만 배낭 속에는 통조림이 두 개나 있어."
"요리할 냄비는?"
"반합이 있어. 그리고 빗물이 있고, 또 보드카도 남았지. 뜨겁게 스튜를 만들까?"
"그보다 보드카를 마시겠어요."
그레버는 스토브에 불을 붙였다. 창백한 불빛이 텐트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콩
통조림을 땄다. 그들은 그것을 데워서 결혼증인인 크로츠에게서 받은 소시지와 함께
먹었다.
"폴만 선생님을 기다려 볼까, 잠을 잘까?"
"자는 게 좋겠어요."
"옷을 입은 채로 자야 해."
"피곤해서 금방 잠들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는 구두를 벗어서 밤 사이에 도둑을 맞지 않도록 배낭 앞에 놓았다.
그레버는 그녀에게 모포를 덮어주었다.
"어때?"
"호텔 같은데요."
그는 엘리자베스의 옆에 드러누웠다.
"집이 없어져서 마음이 아프지?"
"아니. 난 처음 공습을 당한 후로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어요. 그 뒤부터는 모든
소유물은 남에게 빌린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건 그래. 그러나 항상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희망이 사라진다면 또 모르죠."
그녀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레버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선에서 병사들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고 말하던 것 중의 하나
지붕과 침대와 여자, 그리고 조용한 밤 바로 이것이었던가.
21
그는 문득 잠을 깼다. 희미한 발자국소리가 저벅저벅 들려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모포에서 기어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뒤척이다가 다시
잠들었다. 그레버는 텐트 밖으로 나갔다. 폴만이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혹시 도둑이나
게슈타포가 왔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런 때에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 만약에
게슈타포라면 미리 폴만에게 귀띔을 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서 그들을 뒤따라갔다.
그러나 도중에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벽이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는 몸을
움츠렸다. 그림자 하나가 뒤를 휙 돌아다보았다.
"누구야?" 폴만의 목소리였다.
그레버는 얼른 모습을 드러냈다.
"폴만 선생님, 접니다. 에른스튼 그레버입니다."
"그레버? 자네가 웬일이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집에 불이 나서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하루밤만이라도
방을 빌릴 수 없을까 해서."
"누구와?"
"저와 제 아내입니다. 전 며칠 전에 결혼을 했습니다."
"좋아."
폴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빛났다.
"내가 오는 걸 보았나?"
"네."
그레버는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지나친 조심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엘리자베스를 위하는 것도 아니며, 지금 폐허의 어딘가에 숨어 있는 사람을 위하는
것도 아니다.
"선생님, 저를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폴만은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 그는 좀처럼 단안을 내릴 수 없는지 그대로 서 있었다.
"자네는 내가 혼자가 아닌 걸 목격했지?"
"그렇습니다."
폴만은 마침내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좋아, 들어오게. 오늘밤만이라고 했지. 그리 넓지는 않아."
두 사람은 모퉁이를 돌아갔다.
"괜찮아." 폴만은 앞의 그림자를 향해서 말했다.
폐허 속에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폴만은 자물쇠를 열고 그레버와 그 남자를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폴만은 다시 안으로부터 현관문을 잠궜다.
"자네 아내는 지금 어디 있지?"
"밖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간단하게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폴만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그레버, 미리 말해두겠는데,혹시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위험할지도 몰라."
"알고 있습니다."
폴만은 기침을 했다.
"나 때문에 위험하다는 거야. 나는 지금 혐의를 받고 있어."
"잘 압니다."
"자네 아내도?"
"그렇습니다." 그레버는 잠깐 사이를 두고 나서 대답했다.
또 한 사람의 남자는 그레버의 등 뒤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폴만은 커튼을 내리고 작은 램프에 불을 붙였다.
"이름은 모르는 게 좋아. 이름을 모르면 누설할 우려도 없으니까. 에른스트와
요셉으로 충분하지."
요셉은 마흔 살 정도의 남자로서 유대인처럼 보였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그레버에게 미소로 인사를 한 다음에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여기도 안심할 만한 곳이 못 돼."
폴만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했다.
"요셉은 오늘밤 여기서 지내야 해. 어제까지 거처하던 아파트가 없어졌기 때문이야.
내일은 다른 은신처를 찾아 보아야지. 여기도 위험해. 요셉, 이유는 그것뿐이야."
"알고 있습니다." 요셉이 대답했다.
뜻밖에도 목소리가 굵직했다.
"에른스튼, 자네는 내가 모종의 혐의를 받고 있는 걸 잘 알 것이다. 이런 시각에 내
집에 있다가 게슈타포에게 발각되면 어떻게 된다는 것쯤 잘 알고 있겠지?"
"네."
"오늘밤은 무사할 거야. 시내가 혼란하니까. 그러나 안심할 순 없지. 그래도
괜찮은가?"
그레버는 묵묵히 폴만과 요셉을 번갈아 보았다.
"저는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차피 2, 3일 후 일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내의 경우는 사정이 다릅니다. 아내는 계속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미처 그 생각을
못했습니다."
"나는 자네를 쫓아내려고 그러는 게 아냐."
"잘 알고 있습니다."
"밖에서 밤을 샐 수 있겠소?" 요셉이 물었다.
"가능합니다. 비를 맞지 않도록 텐트를 쳤습니다."
"그럼 거기 있도록 하시오. 당신과 우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셈이 되지. 내일
아침 일찍 짐을 이리로 옮기시오. 당신이 가장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오? 짐은
카타리네 교회에 맡길 수 있소. 그 교회의 집사가 허락할 거요. 그는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오. 낮엔 자유롭게 거처를 구하러 다닐 수 있소."
"그게 좋겠군, 에른스트. 요셉은 이런 일에 대해선 나보다 밝아."
옛날과 마찬가지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이 노인에게 그레버는 무한한 애정이
솟구쳤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무엇이건 용건이 있으면 아침 일찍 오게.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 그리고 재빨리 두
번 두들기도록. 조용하게 말이야."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레버는 텐트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아침 6시에 잠을 깼다. 짐마차가 크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전 아주 푹 잤어요.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얀푸라츠야."
"그렇군요. 오늘밤은 또 어디서 자죠?"
"그건 낮에 생각하기로 하지."
그녀는 다시 누웠다. 텐트와 외투 사이로 실오라기 같은 햇살이 들어오고 새들의
지저귐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녀는 외투를 걷어 올렸다.
"마치 집시같군요." 그녀가 말했다.
"안 그래요? 이런 생활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어젯밤 폴만 선생님을 만나보았어. 필요한 게 있으면
선생님을 깨우면 돼."
"필요한 건 없어요. 참, 커피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여기서 요리를 만들어도
괜찮겠죠?"
"그것도 금지돼 있겠지.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우린 집시니까."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집 뒤의 항아리 속에 깨끗한 빗물이 고여 있어.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주위를 돌아보고 싶어요. 마치 시골에 온 것 같군요. 옛날 같으면 로맨틱하겠죠?"
그레버는 웃었다.
"지금도 그래 소련의 진창에 비한다면 말야. 결국은 비교하기 나름이지."
그는 침구를 똘똘 말았다. 재빨리 스토브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였다. 갑자기
엘리자베스의 방에서 그녀의 배급표를 두고 나온 게 생각났다. 세수를 하고 돌아온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넘쳤다.
"당신 배급표를 갖고 있나?"
"아니. 책상서랍에 두었었죠."
"야단났군! 왜 그걸 빠뜨렸을까? 시간은 충분했는데."
"당신은 더 중대한 걸 생각했겠죠. 배급표는 새로 신청하면 되잖아요. 배급표를
불에 태운 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죠."
"그러나 오래 걸릴 거야. 독일 관리들은 세상의 종말이 올 때까지 저울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내고 웃었다.
"공장에서 조퇴를 하고 배급표를 받으러 가겠어요. 집이 타버렸단 보증은 문지기가
해주겠죠."
"당신 출근할 생각인가?"
"가야 해요. 집이 탄 건 사유가 될 수 없어요."
"그런 공장은 불이나 나버렸으면 좋겠어."
"그래요. 그래도 결국은 다른 공장에 배치 되겠죠. 더 지독한 데로 갈지도 몰라요.
무기를 만드는 공장은 싫어요."
"그냥 빠지는 게 어때? 어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모르니까. 크게
다쳤다고 하면."
"그것 역시 증명이 필요해요. 공장에도 의사와 경찰이 있어요. 만약에 거짓이
탄로나면 처벌을 받아요. 시간 외의 노동이나 휴일을 취소하거나 심하면
강제수용소로 보내서 애국주의 교육을 시키죠."
엘리자베스는 반합 뚜껑에 뜨거운 물을 붓고 커피를 탔다.
"제가 이틀 동안의 휴가를 즐긴 사실을 잊지 마세요. 한꺼번에 무리한 부탁을 할 순
없어요."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버지에게
도움이 된다고 믿으면서 그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악당놈들! 사람을 아주 달달 볶는군!"
"자, 커피. 절대로 화내지 말기! 우린 그럴 틈이 없어요."
"그러니까 화가 나는 거야, 엘리자베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고 있어요. 우리는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어요. 당신의 귀대 날짜는
다가오고. 당신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일을 쉬었으면 좋겠지만."
"당신의 용기는 대단해."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하고 살며시 웃었다.
"이제 출근을 해야지. 오늘밤에는 어디서 만날까요?"
"글쎄? 지금은 마땅한 장소도 없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지. 내가 공장으로
갈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공습이나 교통 마비 같은.'
그레버는 잠시 생각했다.
"난 짐을 꾸려서 카타리네 교회로 가겠어. 그곳에서 만나도록 하지."
"밤에도 문이 열려 있나요?"
"밤에 올 생각인가?"
"그야 알 수 있나요. 언젠가는 여섯 시간이나 방공호 속에 갇혀 있었어요. 최악의
경우, 말이라도 전해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안심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 중의 한쪽이 사고가 생길 수도 있단 말야?"
"그래요."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의 행방불명이 되고 있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폴만 선생님께 부탁할까? 아니야, 거긴 불안해."
"빈딩그다!" 그레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기라면 안전해. 그 녀석 집을 알지? 그 녀석은 우리가 결혼한 걸 모르고 있지만
상관없어. 내가 미리 말해두지."
"또 식량을 징발하러 가나요?"
그레버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는데? 정말이지, 우린 먹을 것이 필요해. 그러니 한 번 더
타락해야지."
"우린 오늘밤도 여기서 자나요?"
"그건 곤란해. 난 낮에 다른 장소를 찾아볼 생각이야."
"그럼, 전 출근을 하겠어요."
"선생님께 맡겨놓고 공장까지 나도 함께 가겠어."
"그럴 틈이 없어요. 늦어서 뛰어가야만 해요. 그럼 저녁까지 안녕!"
그는 그녀를 배웅했다. 폐허만 남은 자리에 아침 이슬이 수정처럼 반짝 빛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다가 늦었다는 시늉을 하면서 빠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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