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11

淸山에 2011. 9. 3. 16:16

 

  

 ** 

 

 
 
 
바라보았다. 몇 분 전까지 그는 좋은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권력의 대표자로 변하고 있다.
  "에른스트, 어서 술이나 들어."
  그레버는 잔을 놓았다.
  "알폰스, 부탁이 있어. 설탕을 2 파운드 가량 주지 않겠나? 두 포대로 나누어서 1
파운드씩 말이야."
  "각설탕 말인가?"
  "아무것이나 상관없어."
  "그건 얼마든지 줄 수 있지. 그런데 왜 설탕이 필요하지?"
  "실은 그것으로 어떤 인간을 매수할 생각이야."
  "매수하겠다고?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텐데? 더욱 좋은 방법이 있어. 내가 한 번
해 볼까?"
  "아니, 그런 게 아냐. 설탕은 도움을 좀 받은 사람이 있는데, 선물하려고."
  "좋아. 그럼 결혼 축하 파티는 우리 집에서 하도록 해. 알폰스가 훌륭한 증인이
되어 주겠어."
  그레버는 그의 제의를 생각해 보았다. 15분 전이었다면 그 그늘에 숨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이 알폰스에게 맡겨두게! 자넨 오늘밤 여기서 자는 거야. 알겠나? 다시
군복을 입고 병사로 돌아갈 필요는 없어. 내가 열쇠를 주고 갈 테니까."
  그레버는 망설였다.
  "알겠네, 알폰스."
  빈딩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좋아, 좋아. 우린 여유있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눌 수도 있지. 아직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까. 이리 오게, 자네의 방을 안내해 주지."
  그는 그레버의 군복을 들고 상의에 달린 훈장을 바라보았다.
  "자네, 훈장 탄 얘기를 내게 해주어야 돼. 아주 대단한 공로를 세웠겠지."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빈딩그의 얼굴은 언젠가 친위대의 하이니가 술에 취한 채
보안부에서의 공로담을 자랑할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변하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얘기할 것도 없어. 그건 다만 연공으로 받은 것뿐이니까."
 
  루젤 부인은 그레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말끔한 신사복이 그레버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이었군? 쿠루제양은 지금 없어요. 그만한 건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를 적의에 찬 눈초리로 훑어보았다. 그녀의 자색 유니폼 상의에는
스와스치카를 꽂은 핀이 빛나고 있었다. 기름이 번들번들한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져
있고 오른손에는 걸레가 들려 있었다.
  "쿠루제양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데, 이것을 좀 전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루젤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더니, 이윽고 설탕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실은 쿠루제양에게 당신은 모범적으로 당과 공공을
위해서 희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 설탕 1 파운드가 있는데 마침
아주머니에게도 단 것을 좋아할 만한 나이의 아이가 있으시죠?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루젤의 얼굴은 공식적인 표정을 띠고 있었다.
  "우린 그런 물건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총통께서 허락하신 물건만을 자랑스럽게
받고 있어요."
  "당신의 아이도?"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레버는 자색의 상의에다 시선을 고정시켰다.
  "후방에 있는 부인들이 모두 부인과 같다면,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들은 더욱
든든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부정한 게 아닙니다. 이것은 휴가로 귀향하는 병사들이
가족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총통께서 하사하신 것입니다. 제 가족은 행방불명입니다.
그러니까 거절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루젤의 표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당신은 일선에서 오셨나요?"
  "물론입니다."
  "소련에서?"
  "그렇습니다."
  "제 남편도 소련에 있습니다."
  그레버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무척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소속은 어디죠?"
  "중앙군단에 배속되어 있습니다."
  "거기는 지금 평정합니다."
  "평정하다구요?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중앙군단은 지금 치열하게 전투하고 있어요.
남편은 최전방에 있어요."
  최전방! 마치 전선이라는 것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같이 말하고 있군! 그는
순간적으로 명예로운 총통의 조국에 대한 저쪽의 설정은 어떤지 이 부인에게 말해주고
싶은 충동을 꾹 눌렀다.
  "휴가를 오신다면, 기쁘시겠습니다."
  "남편은 때가 되면 옵니다. 애당초 특별한 은혜 같은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저 역시."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2 년만에 나왔습니다."
  "그러면 계속 거기에 계셨나요?"
  "그렇습니다. 물론 부상당했을 때는 제외하고."
  그레버는 확고부동한 당의 여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 나는 왜 이 여자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여자는 차라리 사살하는 쪽이 훨씬 낫다.
  루젤의 아이가 나왔다.
  "어째서 갑자기 사복을 입으셨죠?"
  "군복은 세탁소에 맡겼습니다."
  "그래요? 나는 또."
  루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레버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그런 루젤 부인이 끔찍했다.
  "그렇다면 좋아요. 우리 애를 위해 설탕을 받기로 하겠어요." 
  그녀는 꾸러미 두 개를 받았다. 그레버는 그녀가 두 손으로 무게를 비교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나가면 틀림없이 엘리자베스의 꾸러미를 뜯어 볼 것이다.
그리고 설탕 이외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것이다.
  "하이 히틀러!" 그레버도 루젤이 하는 대로 따라서 했다.
  그는 밖으로 나왔다. 문지기가 문 옆에 서 있었다. 돌격대원의 바지와 장화를 신은
작달만한 사내였다.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이러한 허수아비조차 위험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군."
  그는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뽑아 그에게 권했다.
  문지기는 투덜거리면서 그것을 받았다.
  "제대했소?" 그레버의 옷차림을 흘낏거리며 물었다.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엘리자베스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망설이다가 그만
두었다.
  "일주일 후에는 다시 가야 해."
  문지기는 담배가루를 토했다.
  "맛이 없소?" 그레버가 물었다.
  "아니, 나는 잎담배를 더 좋아하거든."
  "잎담배는 귀할 텐데?"
  "그렇소."
  "난 고급 잎담배를 갖고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는데, 기회가 되면 구해다 주겠오."
  "최고급이오?"
  "물론, 그 사람이 바로 돌격대장이오."
  "돌격대장?"
  "그렇소. 알폰스 빈딩그라고 나와 가장 친한 친구요."
  "빈딩그가 당신의 친구라고?"
  문지기는 그레버를 쳐다봤다. 그레버는 그의 눈초리가 뜻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빈딩그와 친한 친구라면 어째서 보건 고문관인 쿠루제가 강제수용소에 강금되어
있는지 도저히 닙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오해도 풀리고, 만사가 제대로 해결될 거야."
  "그렇겠죠." 문지기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레버는 시계를 보았다.
 
  그레버는 거리를 거닐었다. 매수의 일보는 우선 성공적이었으나 곧 새로운 불안이
그를 사로잡았다. 어쩌면 오늘 한 행동은 가장 서투른 짓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사복이 원망스러웠다. 모든 게 옷 탓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잠시라도
군대의 규칙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순식간에 불안과 근심의 세계로 빠져버렸다.
  밤까지는 엘리자베스를 만날 수도 없었다. 서류신청을 서둘렀던 게 후회스러웠다.
어제 아침에는 결혼이 그녀를 보호할 것이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것이 위험이 되고 있었다.
  "축제 기분을 내서 어떻게 할 작정이지?"
  그는 눈을 치떠서 올려다보았다. 키가 작은 소령이 눈앞에 서 있었다.
  "국가의 비상시국이란 것을 넌 모르는가!"
  그레버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서 소령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마침내 겨우 그
이유를 깨달았다. 자기 자신이 사복을 입은 사실을 잊고 소령에게 경례를 했던
것이다. 노인은 자기를 놀리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뭐라고? 뻔뻔스러운 놈 같으니라구! 넌 왜 군대도 안 갔지?"
  그레버는 노인을 세심하게 살폈다. 그는 언젠가 엘리자베스와 함께 만난 적이
있었던 바로 그 소령이었다.
  "너 같은 병역 기피자는 하루 속히 땅 속으로 꺼져버리란 말이야!" 소령은 소리를
질렀다.
  "너를 체포하겠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실 텐데. , 이제는 나를 내버려 두시오.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이니까."
  "뭐라고?" 소령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더니 코를 벌름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군복을 입지 않았군! 이 남창 같은 놈! 남자가 향수나 뿌리고 나다니니,
."
  노인은 침을 탁 뱉고 나서 그레버를 노려보다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게슈타포 본부가 보이는 거리에 서 있었다. 입구의 복도에서 젊은 친위대원이
하품을 하면서 서성거렸다. 친위대의 장교 두 사람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때 한 사나이가 주저하면서 정문을 올려다본 다음에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그것을 읽고 난 그는 주위를 돌아보고 마치 작별을 고하는 것처럼
하늘을 쳐다보다가 위병소를 향해서 걸어갔다. 친위대원은 그의 호출장을 읽고 나서
통과시켰다.
  그레버는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힐슈만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에 최고 훈장을
받게 되면 아버지는 강제수용소에 끌려가지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최후를 지원했던
힐슈만. 그는 힐슈만에게 양친을 찾아보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주소를 적은 쪽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 당장
힐슈만과의 약속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이
엘리자베스와 관련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재빨리 주머니를 뒤졌다. 마침내
급료부 속에서 쪽지를 찾아냈다.
  힐슈만의 집은 아담한 3층집이었다. 그는 3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눌렀다. 이윽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고 창백한 얼굴이 밖을 내다보았다.
  "힐슈만 부인을 만나고 싶습니다."
  "바로 접니다."
  "저는 댁의 아드님과 같은 중대에 있습니다."
  여인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그것은 궁지에 몰린 동물의 모습과 흡사했다.
  "댁을 방문해 달라는 아드님의 부탁을 받았습니다. 저는 휴가중이라서 사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인은 문을 활작 열었다.
  "들어오세요. ."
  "에른스트 그레버입니다."
  여인은 앞장서서 그레버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걷고
있었다.
  거실에는 벽 쪽으로 긴 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레버가 그 의자에 앉으려고 하자
부인은 재빨리 다른 의자를 권했다.
  "여기가 더 편해요. 저것은 침대 대신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레버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저는 2주일 전까지 아드님과 함께 근무했습니다."
  부인은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냉정했지만 손은 안정감을 잃고 후들후들
떨렸다.
  "저 좋으시다면 뭣 좀 드실거라도?"
  그레버는 갑자기 갈증을 느꼈다.
  "고맙습니다. 물이나 한잔."
  ", 그럼." 힐슈만 부인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알겠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방에서 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 왜
그러지? 공포에 질려있는 인간들은 얼마든지 보았지만 이건 정말 지나칠 정도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았다. 모두 복제였다. 하나는 꽃이
만개된 밤나무 그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플로렌스 소녀의 옆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그때 힐슈만 부인이 돌아왔다. 그녀는 적색 와인을 담은 작은 잔과 빵 두 조각이 놓인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레버는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드님께서는 무사히 있습니다. 제가 휴가 올 무렵에는 예비대로 배치되고
있었죠."
  부인은 그를 뚫어지게 보았다. 그는 다시 포도주를 마셨다. 아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식사는 어떤가, 위험하지 않은가 등등 어머니들이 당연히 궁금해 할 것들을
질문하지 않은 데에 그레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요. 잘 있단 말이죠?" 마침내 그녀는 겨우 한 마디했다.
  "지금은 일선이나 여기나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위험하기는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레버는 혼자서
그림을 구경하다가 한 아이를 발견했었다. 긴 의자 밑의 종이상자에 숨겨놓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혹 눈치라도 채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입니다." 마침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인은 소리도 없이 그레버와 함께
문이 있는 곳까지 따라 왔다.
  "아드님에게 전할 말씀이 없으십니까? 저는 일주일 후에 출발합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전해드리겠습니다. 편지나 선물이 있으시면 제가 다시 오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레버는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그는 부인이 자신을
믿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단정하고 급료부를 꺼냈다.
  "제 증명서입니다. 저는 지금 사정이 있어서 사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급료부를 뿌리치기라도 할 듯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 애는 죽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속삭이고 있었다.
  "뭐라고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아드님과는 며칠 전에 얘기를 나누었었는데."
  "죽었습니다." 그녀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사흘 전에 통지가 왔어요."
  그레버가 더 물으려고 하자,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를 혼자 있게 해주세요. 그 아인 제발!"
  그녀는 문을 닫았다. 그레버는 하나하나 층계를 내려갔다. 그는 힐슈만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그에 대해서는 힐슈만이란 성만 알 뿐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는
도중에 층계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 집에서는 힐슈만의 동생이 그의 어머니에
의해서 숨겨져 있다. 아마도 그 아인 유대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강제수용소가
두려워 그렇게 숨은 것이리라. 절망적인 암흑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만한 일로
몸을 숨긴다면 엘리자베스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 모른다!
 
  그레버는 퇴근시간이 되기 훨씬 전부터 공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나올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혹시 공장 안에서 체포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는데, 그녀의 모습이 입구에 나타났다. 그녀는 양복 차림의 그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아주 젊어졌는데요."
  "난 젊다는 실감이 나질 않아. 오히려 100 년은 더 늙은 것같아."
  "왜 그렇죠? 예정보다 빨리 출발해야 하나요?"
  "아냐. 그것은 걱정없어."
  "그럼, 양복을 입어서?"
  "모르겠어. 좌우간 난 이 양복과 함께 온 세상의 고통을 혼자서 짊어진 것 같은
기분이야. 그건 그렇고 서류는 어떻게 되었지?"
  "됐어요."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점심시간을 이용했어요."
  "이미 제출했단 말이지? 그럼, 어쩔 수 없군."
  "왜 그러시죠?"
  "아무 것도 아냐. 다만 걱정이 되니까. 어쩌면 우리가 실수를 저질렀는지도 몰라.
당신에게 불리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
  그레버는 망설였다.
  "게슈타포가 결혼 신청자의 신원조회를 하는 모양이야."
  엘리자베스는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당신 무슨 소리를 들으셨군요?"
  "아니,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 갑자기 두려워졌을 뿐이야."
  "우리가 결혼을 하면 내가 체포된다는 말인가요?"
  "그런 건 아냐."
  "그럼 뭐죠? 아버지가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사실이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죠?"
  "그것도 아냐." 그레버가 말했다.
  "그건 다 알고 있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당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 게슈타포가 무슨 짓을 할는지도 모르고 놈들이 무슨 속임수를 쓸지 알 수
없어.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게슈타포에게 정의를 기대하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라고."
  엘리자베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하죠?"
  "나도 하루종일 생각했어. 정말 속수무책이야. 만약에 신청한 서류를 취소하면, 그땐
의심 받을지도 모르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야릇한 눈초리를 했다.
  "그래도 역시 취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엘리자베스, 이미 늦었어. 이제는 모든 것을 운에 맡기는 수밖에."
  그들은 무작정 걷고 있었다. 그레버는 광장을 끼고 공장이 들어서 있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여긴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나?"
  "."
  "공장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겠군."
  "커다란 지하 방공호가 몇 개나 있어요."
  "안전해?"
  "아마도."
  그레버는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정면만 바라본 채 걸음을 빨리 옮겨
놓고 있었다.
  "제발! 내 말의 진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난 다만 당신이 걱정되어서 그래."
  "내 걱정은 마세요."
  "당신은 걱정이 안돼?"
  "이제는 걱정할 일도 없고, 조금도 두렵지 않아요."
  "난 그렇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걱정이 자꾸
생겨나거든."
  엘리자베스는 그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는 웃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어제 열변을 토했어. 그것은 잊지 않아. 자신의 사랑이 진실인지를 알기 위해선
우선 걱정부터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글쎄, 잘 모르겠군요."
  "이놈의 양복은 다신 입지 않겠어. 난 일반 시민들의 생활이 부러웠었지."
  엘리자베스가 또 웃었다.
  "그게 어디 양복 탓인가요?"
  그녀는 그의 옆에서 태평스럽게 걷고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 사람은 매일매일 달라지고 있다. 전에는 이 사람이 두려워하고 내가
태연했었는데, 지금은 그와 반대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히틀러 광장을 통과했다. 저녁 노을이 한층 더 짙어져서 그들의 얼굴과 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레버는 맞은 편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 자기의 운명을 지고 바쁘게 걸어간다. 사람들은 갖은 게 아무 것도 없을
때는 쉽게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용감하게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무엇인가를
지니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져 버린다. 그것은 모든 일을 간단하게 바꾸거나,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전보다 안전해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위험이 당장
찾아오는 것도 아니다.
      18
 
  베차는 소지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동료들이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러면 찾았단 말인가?"
  그레버가 물었다.
  "물론 그렇지만."
  "어디서?"
  "거리에서 만났어. 게라와비르가의 모퉁이에 있는 우산가게 앞에 서 있었어.
처음엔 그녀인지도 몰랐지."
  "그 동안에 어디 있었을까?"
  "에르후르트 근처의 수용소에 있었던 모양이야. , 들어보게! 난 우산가게 앞에
있었으면서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어. 내가 그대로 지나가려니까 아내가 나를 부르는
거야. '베차, 저를 모르겠어요?' 하면서 말야.
  베차는 말을 끊고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체중이 80 파운드나 줄어든 여자를 내가 어떻게 알아보겠어?"
  "수용소 이름이 뭐지"
  "잘 모르겠어. 임간 캠프 2 호라고 생각되는데 아내에게 물어보지. 하여튼
들어보라구. 난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아르마, 당신이었군.' 했어.
'^36^예요!'하고 아내가 대답했지. '베차! 전 당신이 돌아왔을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곳에 돌아왔어요.'하는 게 아니겠어. 난 언제까지나 아내를 쳐다보고만
있었지. 전에는 맥주공장의 살찐 말처럼 뚱뚱하던 여자가 반으로 줄어서 서 있는
거야."
  "키는 얼마나 큰가?" 펠드만이 흥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160센티미터 정도는 되지."
  "그러면 표준이라고 할 수 있겠군."
  "표준? , 바보 같은 소리 말아." 베차는 펠드만을 노려보았다.
  "내겐 아니야! 내가 보았던 그녀는 옥수수대처럼 보잘것없었어. 난 네 기준의
표준적인 체중 같은 건 흥미없어. 난 아내의 엉덩이에 깔리고 싶단 말야. 그런데 대체
우린 왜 싸웠지?"
  "넌 말이야. 우리들의 경애하는 총통과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서 싸우진 않았어."
로이타가 말했다.
  "3 년이나 일선에 있었으면, 그만한 것쯤 이미 옛날에 알았어야 돼."
  "내 아내의 체중을 놓고 왜들 야단을 떨지?" 베차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날뛰었다.
  "그만둬!" 로이타가 한쪽 손을 들어 경고했다.
  "네가 멋대로 생각하는 건 자유지만 그걸 함부로 입밖에 내놓지 마! 넌 네 마누라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돼."
  "그야 물론 나도 기뻐. 그러나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느냐 말야."
  "그렇지만 베차!" 펠드만이 말했다.
  "네가 다시 뚱뚱하게 살찌우면 되지 않겠어."
  '"그럴까? 그런데 무엇을 먹여야 뚱뚱해지지. 배급표? 그 참새눈물만한 식량."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말로는 쉽지!" 베차는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휴가는 사흘밖에 남지 않았어. 사흘 안으로 어떻게 뚱뚱해 질 수 있겠어? 그녀가
한가롭게 목욕이나 하고 하루에 일곱 번씩 먹는다 해도 그건 불가능해. 고작해야 몇
파운드?"
  "그러나 지방이 문제라면 네겐 그 비계덩어리 여주인이 있잖아?"
  "문젠 바로 그거야! 난 아내만 만난다면 그 여잔 거들떠볼 생각도 안 했어. 원래가
난 성실한 남편이지 바람둥이가 아냐. 하지만 지금은 그 여주인이 낫겠군.
  "넌 정말 둔한 인간이야." 로이타가 말했다.
  "난 둔하지 않아. 난 무엇이든지 완전하게 느낄 수 있어. 그게 나의 결점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도저히 그 여자에게 만족할 수 없었어. , 시골뜨기들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베차는 마지막으로 남은 소지품을 배낭에 꾸렸다.
  "당신 부부는 어디서 숙박할 예정이지?" 그레버가 물었다.
  "혹시 아파트라도?"
  "물론 갈 수 없어. 모조리 타 버렸으니까! 그래도 여기보다는 폐허가 된 지하실이
더 편해. 하나 불행한 건 아내가 전처럼 날 즐겁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지. 물론 난
아내를 사랑하고 있어. 그러나 그런 체중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지?"
  "휴가는 얼마나 남았나?"
  "사흘."
  "그 동안 어떻게 즐기는 척할 수 없을까?"
  "이봐." 베차는 나지막이 말했다.
  "여자라면 침대에 누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남자는 틀려. 차라리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오히려 만나서 괴롭군."
  그는 배낭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로이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그레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넌? 네 계획은 어때?"
  "난 보충대로 가 보겠어. 또 무슨 서류가 필요한지 알아볼 생각이야."
  로이타는 히죽히죽 웃었다.
  "넌 베차의 불행을 보고 실망을 한 모양이군. 안 그래?"
  "내가 두려워하는 건 그런 게 아냐."
 
  "엉망진창이다." 보충대의 사무병이 말했다.
  "일선은 엉망진창이야. 그럴 때는 어떻게 하는 건지 알아?"
  "물론 몸을 숨겨야지. 그런 건 애들도 알고 있어. 그게 나와 무슨 관계가 있지?
휴가중이야."
  "나도 그건 알고 있지." 사무병은 그레버를 응시했다.
  "오늘 하달된 명령을 본다면 그게 과연 가치가 있을까?"
  그레버는 담배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위장이 오그라드는 것만 같았다.
  "저기압이야." 사무병은 사무적으로 말했다. 
  "막대한 손실. 보충병을 즉시 보내라. 긴급한 사유가 없는 휴가병은 즉각 송환하라!
이만하면 알겠나?"
  "알겠어. 긴급한 이유란?"
  "가족의 사망 및 중대한 가정문제의 처리, 그리고 중병..."
  사무병은 담배를 집었다.
  "그러니까 자취를 감추란 말이야! 널 찾아낼 수 없다면 송환할 수도 없어. 휴가가
끝날 때까지 숨어있는 거야. 그럼, 난 보고하는 거야. 주소 변경 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처벌은 않겠지. 어차피 일선으로 복귀하면 그것으로 끝나."
  "난 결혼하는데 그것도 이유가 될까?"
  "결혼한다고?"
  "그래. 그래서 찾아왔어. 급료부 외에 어떤 서류가 필요하지?"
  "결혼! 그건 충분한 사유가 된다."
  사무병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긴급한 사유에 해당하지. 그런데 왜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너와 같은 일선
돼지들은 서류 같은 건 필요없어. 그러나 필요한 경우엔 날 찾아와. 몰래 만들어 줄게.
그런데 넌 그럴듯한 옷이라도 있나? 설마 그런 누더기를 걸치고 장가갈 생각은
아니겠지?"
  "여기서 교환할 수 있나?"
  "보급계의 특무상사를 찾아가서 사정해 봐. 좌우간 내 얘기를 하라고. 이런 좋은
담배가 또 있나?"
  "없지만 구할 수는 있어."
  "내가 아냐. 특무상사에게 주는 거야."
  "알았어. 한데 전시결혼에 여자는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알고 있나?"
  "잘 모르겠는데. 별로 까다롭지는 않을 거야. 하여튼 빨리 해치워야 하니까."
사무병은 시계를 보았다.
  "보급계로 가게. 지금 상사가 있을 거야."
  그레버는 보급계가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보급계는 다락방에 있었다. 특무상사는
몹시 뚱뚱했으며, 안경알의 색이 좌우가 다른 걸 끼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을 흘끔흘끔거리는 게 아냐." 그는 호통을 쳤다.
  "안경알을 본 적이 없나?"
  "있긴 하지만 이렇게 색깔이 다른 건 처음이군요."
  "이건 원래 내 것이 아냐." 특무상사는 파랗게 빛나는 눈을 가리켰다.
  "친구에게 빌렸어. 내 것은 어제 깨졌지. 이런 건 셀룰로이드로 만든 게 안전하지."
  "그건 불에 약하지요."
  상사는 그레버의 훈장을 보면서 실쭉거렸다.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줄 옷은 없어. 모두가 자네가 입고 있는 것보다 못한
것들뿐이야."
  그는 파란 눈으로 날카롭게 그레버를 쏘아보았다. 그레버는 빈딩그에게 받은 담배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사는 그것을 흘끔 보고 나서 상의 한 벌을 꺼내 왔다.
  "이것밖에 없어."
  그레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한 코냑을 꺼내 담배의 옆에
놓았다. 상사는 자리를 비우더니 더 좋은 상의와 거의 신품에 가까운 바지를
내보였다.
  그는 바지를 뒤집어 보았다. 가장자리에 미세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레버는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코냑병을 쳐다보았다.
  "피가 아니라 고급 올리브유지. 그 옷의 주인은 이탈리아에서 돌아왔어. 그런 건
벤젠을 사용하면 금방 지워진다구."
  "그렇다면 직접 지워서 입을 것이지 어째서 교환을 했을까?"
  상사는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말을 제법 잘하는군. 그 녀석은 전선의 냄새가 풍기는 군복이 필요했었어. 지금 네
군복처럼 말이야. 밀라노의 사무실에서 2 년간이나 자기 약혼자에게 일선에서 전투에
참가하는 것처럼 편지를 써 보냈다는 거야. 그래서 샐러드를 엎지른 바지를 입고
사랑하는 약혼녀를 만날 수 없었던 거지. 그건 여기 있는 것 중에서 최고로 좋은
옷이야."
  그레버는 상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교환 조건을 더 유리하게 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교환하지 않아도 돼. 너의 너절한 군복도 가지고 가.
넌 특별복이 생긴 셈이지."
  "수량을 채우려면 헌 옷이 필요하지 않소?"
  상사는 그런 것쯤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창문으로 스며든 햇살이 그의 파란 안구에
비쳤다.
  "수량 따위가 맞았던 적이 있었나? 알고 있으면 말해보시지?"
  "나 역시."
  "그럼 좋아. , 가 보라구."
 
  그레버는 시립병원 앞을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뮤치히가 갑자기 떠올랐다.
한 번 찾아가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선행을 하면
뜻밖의 행운이 찾아올는지도 모른다는 미신같은 게 그를 병원으로 떠밀었다.
  지체절단병들은 2층에 있었다. 아래층은 중환자나 수술을 받고 아직도 누워 있는
병사들이 수용돼 있었다. 그것은 공습을 받을 때 즉시 지하실로 옮기기 위해서였다.
지체절단병들은 혼자서 피신할 수도 있고 서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다리를 절단한
자는 팔이 없는 병사 두 명의 목에 팔을 감고서 지하실로 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자네였군!" 뮤치히가 말했다.
  "설마 자네가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
  "실은 나도 그랬지."
  "고맙네, 에른스트. 슈트크만도 여기 있어. 넌 그 녀석과 함께 아프리카에 갔었지?"
  "."
  슈트크만은 오른팔을 잃은 동료들과 카드를 하고 있었다.
  ", 에른스트. 네가 도대체 웬일이지?"
  슈트크만은 이상하다는 듯이 그레버를 훑어 보았다. 불구가 된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같은 상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어."
  모두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슈트크만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휴가를 왔지." 그는 멋쩍은 듯이 말했다.
  육신이 멀쩡하다는 게 무슨 죄악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난 또, 네가 아프리카에서 호되게 당했으니까 아^36^예 귀국이라도 한 줄 알았지."
  "거기서 소련으로 쫓겨갔지."
  "그래도 넌 운이 좋았군. 다른 녀석들은 모두 포로가 되었어." 슈트크만은 한쪽
팔을 흔들어 보였다.
  "이만해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
  한가운데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들고 있던 카드를 바닥에 팽개쳤다.
  "도대체 카드를 하는 건가, 잡담을 하는 건가?" 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레버는 그의 양쪽 다리가 절단된 사실을 알았다. 더구나 오른손에는 손가락이 두
개나 없었다.
  "계속하게." 그레버가 말했다.
  "난 괜찮아."
  "한 판만 끝낼게." 슈트크만이 말했다.
  그레버는 뮤치히와 나란히 창가에 걸터앉았다.
  "아놀드는 모른 척해. 저 녀석 오늘 몹시 저기압이야."
  "저 한복판에 앉아있는 사내?"
  ". 마누라가 어제 면회를 왔었지. 그러면 저 녀석은 이틀씩 언제나 저기압이야."
  "너희들 거기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아놀드가 소리를 질렀다.
  "우린 지금 옛날 얘기를 하고 있어. 왜 안되는가?"
  아놀드는 중얼거리면서 도박을 계속했다.
  "여긴 언제나 재미있어." 뮤치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은 여러 가지 재미있는 놀이로 시간을 보내. 아놀드는 비밀
공제조합원이었지. 간단치 않아. 그런데 저 녀석의 아내가 그를 속이고 있거든.
아놀드의 어머니가 귀띔해 주었어."
  슈트크만은 카드를 테이블 위에 던졌다.
  "제기랄! 크로버로 단단히 잡으려고 했더니, 한 사람이 잭크를 석 장이나 잡고 있을
줄이야."
  아놀드는 계속 투덜거리면서 카드를 섞었다.
  "결혼상대로 한쪽 팔이 없는 게 나을까, 한쪽 다리가 없는 게 나을까?" 뮤치히가
물었다.
  "슈트크만은 외팔이가 더 낫다는데 말야. 하지만 한쪽 팔로는 여자를 안을 수
없잖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중요한 것은 살아있다는 사실이야."
  "그건 그래. 하지만 그것만으로 일생을 지탱할 수는 없어. 전쟁만 끝나면 모든
사정이 달라져. 그땐 우린 영웅이 아니라 불구자로 전락하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의수나 의족의 보조술이 상당히 발달했잖아?"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냐.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우린 전쟁에 승리해야 돼." 아놀드가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두 사람의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
  "기분 전환을 해야겠다. 이건 이제 지겨워졌어."
  그는 적의를 품고 그레버를 보았다. 
  "기피자들이 모두 일선으로 가게 된다면, 이렇게까지 후퇴할 필요가 없을 거야."
  그레버는 묵묵히 있었다. 불구가 된 인간과 싸움을 할 수는 없다. 수족을 잃은
자들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이다. 폐를 관통했거나 포탄의 파편이 위장 속에 들어간
병사라면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구자들과는 싸움이 안된다.
  아놀드는 다시 카드를 계속했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뮤치히가 물었다.
  "문스터에 여자 친구가 있어. 우린 편지를 계속 주고받고 있지. 그녀는 내가 다리를
부상당한 줄로 알고 있어. 절단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
  "두 번 다시 일선으로 돌아가지 않게 된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해야지."
  "물론 그렇지.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너희들 얘기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울적해지는데." 노름을 구경하던 한 남자가
말했다.
  "술이나 잔뜩 퍼먹고 사내답게 굴란 말야!"
  슈트크만은 웃었다.
  "넌 왜 웃어?" 아놀드가 물었다.
  "잠깐 이런 생각을 해 봤어. 만약에 오늘밤 우리들 머리 위에 폭탄이 떨어진다면.
그리고 그 자리에 재만 남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대체 아군의 고사포는 어떻게 된 거야?" 아놀드가 그레버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
  "전부 일선에 가 있나? 여긴 하나도 없어."
  "거기도 없어."
  "뭐라고?"
  그레버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일선에선 신무기를 감추고 대기해 있어."
  아놀드는 그레버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넌 우리가 패전한 것처럼 말하잖아. 바보 같은 놈. 넌 내가 1차 대전 후의
상이군인들처럼 휠체어에 앉아 성냥이나 팔라는 게냐? 우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