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09

淸山에 2011. 9. 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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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연극이 지나치군."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이 옳다. 쟁반을 돌리고 있는 웨이터를 성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것은 용기가 아니라 경박한 짓이다. 위험은 너무나도 분명하므로 저런 경박한
행동으로는 가려지지 않는다. 그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하느냐는 무수한 죽음이 따른
후에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두번째 경보다." 누군가가 말했다.
  "쳐들어온다!"
  그레버는 그의 의자를 엘리자베스에게 밀었다.
  "난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무섭기만 해요."
  "나도 그래." 그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는 몹시 긴장 돼 있었다. 그는
갑자기 보호본능이 일어나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위험을 깨닫고 몸을 도사리는
연약한 새에 불과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는 불안감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그는 금발의 여인과 함께 들어왔던 사내가 자기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깡마른 중위였다. 금발의 여인이 웃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여자에게 쏠렸다.
  약한 진동으로 지하실이 떨렸다. 뒤따라 폭발의 굉음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수근거리는 소리가 딱 멎었다. 그러자 일부러 내는 듯한 웃음소리가 크게 이어지더니
세 번의 폭발음이 연달아서 들려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꼭 껴안고 있었다. 금발 여인의 웃음소리도 그쳤다. 격렬한
충격이 지하실을 심하게 진동시켰다. 웨이터는 쟁반을 바닥에 놓고 배선함의 나선형
기둥에 매달렸다.
  "당황하지 마!" 한 사람이 크게 외쳤다.
  갑자기 벽이 흔들리더니 길게 금이 그어졌다. 소리를 내면서 전등이 깜박거렸다.
경련하는 불빛 아래로 모여있는 사람들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불빛이
빛났을 때, 야외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다시 번쩍거렸을 때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세 번째는 암흑 속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네 번째는 모두가 여자를
붙잡고 있었으며 그녀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때 불은 완전히 꺼져버리고 수없이
메아리치면서 반항하는 굉음 속에 지구의 전 중력이 빨려들어가 지하실이 둥둥 뜨고
있는 것 같았다.
  "전기가 나갔을 뿐이야, 엘리자베스." 그레버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디서 전선이 끊어진 거야. 그뿐이야. 호텔은 아직 괜찮아."
  그녀는 그에게 찰싹 붙어 있었다.
  "양초! 성냥!"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어디 양초가 있을 텐데. 제기랄, 어디 있지? 회중 전등은 어디 있나?"
  성냥불이 몇 개 켜졌다. 그것은 지하의 거대한 공간에서 작은 도깨비불처럼 보였다.
성냥불은 얼굴만을 겨우 비추고 있었다.
  "이 호텔은 비상용 전등을 준비하지 않고 있나? 웨이터는 어디로 갔어?"
  여기저기서 불빛이 움직이며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럴 때마다 야외복을 입은 여인의
,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 멍청하게 벌린 입이 드러났다.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흐느끼는 소리가 차츰 강해지면서 미칠 것 같은 신음이 되어
견딜 수 없게 했다. 마치 거대한 강철의 유성이 일직선으로 지하실에 부딪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격동했다. 불꽃이 흔들렸다가 금방 껴졌다. 지하실은 이미 허공에
떠 있지 않았다. 요란한 굉음이 모든 것을 분쇄하여 공중에 집어던지는 것 같았다.
그레버는 머리가 천장으로 튀어 오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두 팔로 엘리자베스를
힘주어 껴안았다. 그는 몸을 그녀에게 던져 바닥으로 쓰러뜨리면서 그녀의 머리 위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런 다음에 의자를 벽에 붙이고 천장이 내려앉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허물어지고 쪼개지고 하면서 우르르 쾅 폭음이 들려왔다. 거대한 괴수의 손아귀가
지하실을 송두리째 집어 던져서 폐나 위장이 몸집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둣 했다.
사람들은 이번에야말로 최후의 암흑과 질식이 몰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대신 거짓말처럼 지하실 안이 환해졌다. 바닥으로부터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야외복을 입은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사람 살려! 살려 줘요."
  여자는 깡충깡충 뛰면서 두손으로 몸을 두드렸다. 그럴 때마다 손 밑으로 불꽃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군복이 여자의 몸에 덮여지며 그녀를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여자는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다. 그것은 어떤 굉음보다도 요란스러운, 도저히 인간의
소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괴성이었다.
  그레버는 그의 밑에 깔려있는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기고 두 손으로
그녀의 귀를 막아 주었다. 마침내 화염이 사라졌다. 비명과 흐느끼는 소리는 의복과
, 머리카락이 타는 냄새로 변했다.
  "의사, 의사를 데리고 와! 의사는 어디에 있나?"
  "뭐라고?"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해! 제기랄! 앞을 볼 수 있어야지. 이 여자를 여기서
끌어내야 해."
  "지금 바로?"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로?"
  모두들 잠자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밖에는 고사포가 미친 듯이 포탄을 쏘아댔다.
그렇지만 폭격은 이미 끝나고 있었다.
  "가버렸다! 끝났다!"
  "잠깐 동안 이대로 있어."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움직이면 안 돼. 폭격은 이미 끝났어. 그러나 잠시 기다려 봐야 해. 또 다시 적기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
  그때 국민학교 선생님 같은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밖은 안전하지 않다. 고사포의 파편이 위험해!"
  둥근 빛이 입구로부터 들어오고 있었다. 회중 전등의 불빛이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여지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안돼요! 안돼요! 불을 끄세요!"
  "불이 아니라 회중 전등이야."
  암흑 속에서 꺼질 듯한 불빛이 흔들렸다.
  "여기야. 이리로 오란 말야! 누구야? 그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빛은
재빨리 방향을 돌리며 당황하고 있는 얼굴들을 비추기 시작했다.
  "지배인 프리츠입니다. 식당이 무너져서 더 이상 여러분을 모실 수 없습니다.
계산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뭐라고?"
  프리츠는 회중 전등의 불빛이 자신의 얼굴을 보이게 했다.
  "공습은 끝났습니다. 그래서 계산서를 가지고."
  "뭐야!"
  "여러분." 프리츠는 암흑을 향해서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레스토랑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어디 있어!"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우리를 사기꾼으로 아나? 네 얼굴만 비추지 말고 이리로 와! 부상자가 있어."
  프리츠는 다시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불빛이 벽과 바닥 위를 방황하다가 군복
덩어리 위에서 정지했다.
  "이게 뭐야!" 사내는 고함을 질렀다. 와이셔츠의 소매가 창백하게 보였다.
  사내는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사내의 두 손을 비췄다. 지배인이 후들후들 떨고
있는 게 눈에 띄였다. 군복을 들어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 사내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보지 마."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흔히 있는 일이야.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지. 공습은 아무 관계도 없어. 그러나
당신은 시내로 가서는 안돼. 공습이 없는 시골로 내가 데려다 주겠어. 내가 잘 아는
마을인데 그곳 사람들이 당신을 보호해 줄 거야. 우린 거기서 살 수 있어."
  "들 것 갖고 와!"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호텔에 들것이 있나?"
  ", 그런데 저, ."
  지배인은 그 사내의 계급을 알 수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군복의 상의는 다른
것들과 함께 여자 옆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는 지금 허리에 단검을 차고 있을
뿐이었다.
  "계산서 얘기는 죄송합니다." 프리츠는 풀이 죽어 있었다.
  "부상자가 생겼으리라고 미처."
  "빨리 들것이나 갖고 와! 아니, 내가 직접 가겠어. 밖으로 빠져 나갈 순 있나?"
  "."
  사내가 바닥에서 일어나 상의를 걸치자 순식간에 소령으로 변했다. 불빛이 꺼졌다.
그와 함께 희망도 사라져 버리고 오직 여자의 흐느껴 우는 소리만이 남았다.
  "완더!" 격렬한 남자의 목소리가 났다.
  "완더, 우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제는 나가도 되겠지?" 누군가가 물었다.
  "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았어." 학교 선생의 목소리였다.
  "해제고 뭐고 알게 뭐야, 불은 어디에? 불은."
  "의사가 필요해."
  "완더!" 다시 격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벨하르트에게 뭐라고 말하면 되지? 뭐라고 말야."
  "싫어! 싫어! 불은 싫어!" 여자가 부르짖었다.
  불빛이 반짝했다. 이번에는 소령이 직접 램프를 들고 있었다. 그 뒤로 연미복을
입은 웨이터 두 사람이 들것을 들고 따라왔다.
  "전화도 안돼." 소령이 말했다.
  "전화선이 끊어졌어. 들것을 이리로!"
  그는 램프를 바닥에 놓았다.
  "완더!" 역시 그 사내였다.
  "비켜!" 소령이 명령했다.
  "그런 것은 나중이야."
  그는 여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이만하면 됐어. 곧 잠이 들겠지.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피하 주사 한 대를 남겨
놓고 있었지. 조심해서 들것에 태워!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구급차를 세워야 해!"
  "알겠습니다. 소령님." 프리츠는 굽신거리며 말했다.
  들것이 흔들리면서 밖으로 나갔다. 불에 타서 머리카락이 없어진 새까만 얼굴이 들
것 위에 실려 있었다. 여자의 몸은 테이블 덮개로 가려졌지만 움직일 때마다 유난히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죽었나요?"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아냐. 위기는 면했어. 다시 머리카락이 나겠지."
  "얼굴은?"
  "눈은 뜨고 있었어. 상처는 별로 대단치 않아. 곧 깨끗해질 거야. 난 화상입은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이건 그리 심한 게 아냐."
  "도대체 어떻게 저런 끔찍한 일이 생겼지요?"
  "옷에 성냥불이 붙은 거야. 너무 가까이 대고 성냥을 켰어. 이 지하실은 정말
훌륭해. 직격탄을 견뎌냈으니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 머리맡에 세워놓았던 의자를 치우다가 깨진 유리조각을
밟았다. 주바의 문이 파괴되고 술병이 깨져 도처에 흩어지고 술은 검은 기름처럼 온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잠깐만." 그는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게 하고 외투를 들었다. 그는 술 저장고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 가 볼까?"
  호텔 밖에 여자를 태운 들것이 서 있었다. 웨이터들이 휘파람을 불어서 구급차를
불렀다.
  "도대체 에벨하르트는 뭐라고 할까?" 뒤따라 오던 사내가 역시 격렬하게 말했다.
  "아아, 참으로 재수가 없군! 그에게 무슨 말을."
  에벨하르트는 그녀의 남편일 것이라고 그레버는 생각했다. 그는 어느 웨이터의
어깨를 짚었다.
  "주연실의 웨이터는 어디 있지?"
  "누구 말입니까? 오토입니까, 카알입니까?"
  "학처럼 생기고 키가 작달막한 노인인데."
  "오토로군." 웨이터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오토는 죽었습니다. 주연실의 천장이 내려앉아 밑에 깔리고 말았습니다."
  그레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난 아직 계산을 안 했는데. 술 한 병이야."
  웨이터가 이마에 땀을 닦았다.
  "제가 받기로 하겠습니다. 무엇을 드셨지요?"
  "요하니스베르게르 카렙베르그."
  "최고급으로?"
  "그래."
  웨이터는 주머니에서 가격표를 꺼내 회중 전등을 비췄다.
  "4 마르크입니다. 팁을 포함해서 4 마르크 반입니다."
  그레버는 그것을 지불했다. 웨이터는 돈을 받아서 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레버는 그가 돈을 횡령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폐허를 따라 걸었다. 시가지 한 쪽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늘은
회색과 진홍으로 뒤섞이고 바람은 검은 연기를 사방으로 보냈다.
  "당신 집이 괜찮나 가 볼까?"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우린 휴식이 필요해요."
  그들은 처음 만났을 때 함께 들어간 적이 있는 방공호가 있는 광장으로 나왔다.
그곳은 마치 지하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처럼 암흑 속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은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배가 고프지? 당신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어."
  "괜찮아요. 지금은 먹을 수가 없잖아요."
  그는 외투를 펼치고 주머니에서 술병 두 개를 꺼냈다.
  "무엇을 들고 왔는지도 모르겠군. 이건 아마 코르크인가 봐."
  엘리자베스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았다.
  "어디서 가지고 오셨어요?"
  "술 저장고에서 가지고 왔지. 문이 파괴되고 술병이 모두 박살나 있었어."
  "몰래 들고서?"
  "물론이지. 활짝 열려져 있는 술 저장고를 보고도 모른 척하는 병사는 좀 모자라지.
군대는 십계 같은 게 해당 안돼."
  "그렇겠군요." 엘리자베스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울리지 않는 건 또 얼마든지 있어요." 그녀는 웃고 있었다.
  "당신에 대해서 과연 난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당신은 이미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어."
  "당신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요. 내 앞에 있는 당신은 원래의 당신이 아니에요."
  그레버는 외투에서 병 두 개를 더 꺼냈다.
  "이건 병 따개가 필요없어. 삼페인이야." 그는 마개를 감고 있는 철사를 벗겼다.
  "이것을 마실 때 도덕적인 자책감 같은 건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런 건 조금도 느끼지 않아요."
  "우린 지금 목이 마르고 이것밖에 마실 것이 없으니까 이것을 마시는 거야. 우리는
아직 살아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씽긋 웃었다.
  "그걸 일부러 설명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얘기를 해요. 당신은 술병을 네 병씩이나
몰래 갖고 왔으면서 왜 홀에서 마신 건 지불을 하셨죠?"
  "그것은 처음부터 술값을 내기로 하고 주문한 것이니까. 그 값을 내지 않으면
떼어먹게 되는 셈이지."
 
  주위는 정적에 싸였다. 붉은 노을이 점점 번져가고 있었다. 이 특이한 빛이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잠깐 저기 있는 나무를 보세요."
  "꽃이 나고 있어요."
  그레버는 그 나무를 보았다. 폭격으로 인해 거의 땅 속에서 뽑혀져서 뿌리의 일부가
허공을 향해 늘어지고, 나뭇가지가 잘려져 나간 나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
꽃이 활짝 피고, 그것은 저녁놀을 받아 적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 나무 옆에 있는 집이 불에 탔어. 아마도 그 열기가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일어나 나무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벤치의 그늘에서 붉은
빛 속으로 들어갔다. 마치 무용수가 조명이 켜진 무대에 등장이라도 하듯이. 빛은
바람 속에 그녀를 밀어넣고 세계의 종말이나 구세주의 탄생을 고지하는 중세기의
혜성처럼 그녀의 등 뒤에서 타올랐다.
  "활짝 피었어." 그녀는 중얼거렸다.
  "이 나무는 지금 완전한 봄이로군요. 다른 건 전혀 문제가 안돼요."
  "그래. 나무는 우리에게 중요한 걸 가르쳐 주고 있어. 오늘 오후 난 보리수에게서
많은 걸 느꼈는데 이번에는 이 나무에게 배우는군. 나무는 자라서 잎을 만들고 꽃을
피게 하지. 비록 찢기고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땅 속에 뿌리를 뻗고 성장을 멈추지
않아. 결코 불평을 하거나 자기 자신을 동정하는 일이 없어."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그레버에게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광선에서 빠져나오듯이
암흑 속에 던져진 그의 곁에서 다시 따뜻하고 싱싱한 숨결을 내뿜었다. 그는 그녀를
자기에게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나무는 하늘을 향해 힘차게 가지를 뻗고 만개한 꽃은
눈을 가리고 보리수가 되고 대지가 되고 하늘이 되고 엘리자베스가 되었다. 그는 그녀
안에서 숨쉬고 있었다.그녀는 그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15
48 호실은 매우 동요되고 있었다. 계란 머리와 도박에 빠져 있던 두 사내는
일선으로 복귀할 준비를 했다. 그들은 병역 가능자로 판명되어 수송대와 함께
전선으로 출발하려는 중이었다.
  계란 머리는 새파랗게 질려서 로이타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멀쩡한 다리를 하고 있으면서! 기피자! 넌 남게 됐지만 한 집안의 가장인 난
전선으로 끌려가게 되었어!"
  로이타는 침묵을 지켰다. 펠드만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봐! 넌 로이타 대신에 일선으로 끌려가는 줄 아나. 넌 병역 가능자이기 때문이야.
알았나? 바보같은 소린 그만두시지."
  "난 하고 싶은 말은 참지 못한다." 계란 머리는 소리를 질렀다. "난 죽으러 가니까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네놈들이 여기 남아서 먹고 싸고 놀음을 하는 동안 난
일선으로 끌려가서 전투를 해야 돼. 난 일가의 가장이야! 그런데 저기 앉아 있는 저
꾀병쟁이는 다리를 불리려고 물만 잔뜩 퍼 마시고 있어!"
  "그건 너도 할 수 있었을 텐데?" 로이타가 물었다.
  "내가? 천만에! 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책임을 회피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불평할 게 없잖아."
  "?" 계란 머리는 헛점을 찔리자 얼굴을 붉히며 씩씩댔다.
  "넌 네 스스로 비겁하지 않다는 걸 자랑으로 알지. 그런데 왜 불평만 일삼지?
자랑을 위로 삼아서 얌전히 좀 계시지."
  "뭐라고? 뭣 때문에 걸고 늘어지는 거야! 넌 그런 짓밖에 할 수 없지.
돼지새끼야! 그러다가 너도 걸려들 줄 알아. 내가 네 놈을 가만둘지 알아?"
  "제발," 병영 가능자로 편입된 또 한 사람이 끼여들었다.
  ", 빨리 나가봐야지!"
  "저 주정뱅이 대신 가장인 내가 일선으로 끌려가야 하는 법이 있는가 말야. 난 다만
공평하게 처리해 주기를 바랄 뿐이야."
  "공평 좋아하네. 넌 군대에서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 가자. 이것 봐,
우린 뭐 그렇다고 해서 기피자들을 고발할 생각은 없어. 그저 입으로만 떠들고 있을
뿐야. 그럼 잘 있게! 몸조심들 하라구."
  도박을 하고 있던 두 사내는 미친 듯이 날뛰는 계란 머리를 질질 끌고 나갔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며 뒤돌아서서 욕설을 퍼붓는 계란 머리를 두 사내가
밖으로 밀어냈다.
  "바보 같은 놈!" 펠드만은 로이타에게 말했다.
  "일류 배우답게 연극도 잘도 하는군! 내가 휴가를 잠으로 채운다고 놈이 떠들어대던
일을 기억하지?"
  "그잔 많이 잃고 있었어." 갑자기 룸메르가 말했다. 그때까지 그는 구경만 하고
있었다.
  "33 마르크야! 그 돈을 돌려주려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수송대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으니까."
  "뭐라고?"
  "그 녀석은 아직도 밖에 있어.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돈을 돌려 주면 되잖아?"
  룸메르는 밖으로 나갔다.
  "저 녀석도 돌았군." 펠드만이 말했다.
  "전쟁터에서 돈으로 대체 무엇을 하지?"
  "또 도박을 하면 되지."
  그레버는 창가로 갔다. 분견대가 집합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들과 노인만 보이는군." 로이타가 말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이곳에 이르기까지 사람만 만나면 남김없이 사로잡았지."
  분견대는 정렬을 했다.
  "룸메르는 왜 그러지?" 펠드만이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저 녀석, 또 떠들어대기 시작했어!"
  펠드만은 잠옷 차림이었다.
  "계란 머리가 저기 서 있는데, 잠을 자면서 전선의 꿈을 꾸는 것과, 전선에서 고국을
꿈꾸는 것 중에서 어느 편이 좋은지 직접 체험할 수 있겠지."
  "우리도 곧 그렇게 된다!" 로이타가 말했다.
  "다음은 내 차례야. 군의관 녀석은 '참다운 독일 민족은 도망가기 위한 다리는
필요없어. 앉아서라도 싸워야 된다.'고 하더군."
  구령 소리가 들리더니 마침내 분견대는 출발했다. 그레버는 마치 망원경을 거꾸로
들고 보는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았다. 점점 멀리 사라져 가는 병사들은 어느새 장난감
총을 지닌 인형이 되어 있었다.
  "계란 머리가 불쌍하군." 로이타가 말했다.
  "그 녀석은 나에게 화를 냈다기보다 자기 아내에게 화를 낸 거야. 일선으로 떠나면
아내가 자기를 배반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어. 마누라가 결혼수당을 받는 걸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 마누라가 정부와 놀아나는 동안 한 푼도 남지 않을 테니까."
  "결혼 수당? 그런 것도 있었나?" 그레버가 물었다.
  "도대체 넌 어디 가 있었나?" 펠드만이 고개를 흔들었다.
  " 200 마르크라는 돈이 여자 손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지. 굉장하지? 여자들은
그것 때문에 군인하고 결혼하기를 원해."
  로이타가 창가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 친구인 빈딩그가 왔었어."
  "무슨 일로? 혹시 남긴 말이라도?"
  "집에서 파티가 있다고 꼭 참석해 달래."
  "그것뿐이야?"
  "그래."
  룸메르가 들어왔다.
  "계란 머리를 만났나?" 펠드만이 물었다.
  룸메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어." 그는 가뿐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했다.
  "그런데도 전쟁터로 가야 하다니."
  그는 얼른 돌아서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계란 머리가 저런 꼴을 본다면!" 펠드만이 속삭였다.
  "저 녀석은 내버려 둬." 로이타가 나무라듯이 말했다.
  "너도 언제 우는 소리를 하게 될지 몰라.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몽유병자 역시도." 그는 그레버를 보았다.
  "넌 얼마나 남았나?"
  "열흘."
  "열흘! 아직도 그렇게 많이!"
  "지금까지는 지루했지만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너무 짧더군."
 
  "아무도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루젤 부인도, 아이들도 모두 없어요. 오늘은 우리가 독차지했어요."
  "좋았어! 오늘밤 그녀가 한마디라도 잔소리를 한다면 죽이려고 작정하고 있었어.
어젯밤에도 말다툼을 했나?"
  "그 여잔 나를 매춘부 보듯 해요."
  "어째서? 어젯밤 우리가 여기서 한 시간밖에 같이 있지 않았을 텐데!"
  "그저께 당신이 여기서 밤을 지샌 일이."
  "우린 단단히 잠그고 축음기를 틀고 있지 않았는가 말야, 도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모르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살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 그레버의 눈과 마주쳤다. 처음 만났을 때, 내 눈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암늑대는 대체 어딜 간 거야?"
  "아이들을 데리고 농촌으로 갔어요. 구호모금을 위해서죠. 내일 밤까지 돌아오지
않아요. 오늘밤과 내일 낮 동안은 우리만의 세상이에요."
  "내일까지! 당신 공장에서 일해야 되겠지?"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내일은 일요일인걸요. 일요일엔 쉬고 있어요."
  "일요일! 난 전혀 몰랐어! 그러면 밝은 대낮에 당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군.
우린 언제나 밤에만 만났지."
  "정말! 그랬었군요."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나도 밝은 낮에 당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우린 열에 들뜬 것 같은 생활을 하고 있어요."
  "다른 수가 없잖아?"
  "그렇긴 해요. 내일 대낮에 서로의 모습을 마주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하느님에게 맡기기로 하지. 오늘밤은 어젯밤 갔던 레스토랑으로 갈까?
게르마니아가 문을 닫아서 아쉽군."
  "집에서 보내기로 해요. 내가 요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여기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루젤만 없으면 여긴 낙원 같아요."
  "그럼, 여기 있기로 하지. 음악이 없는 밤이라 아마도 멋질 거야. 난 당신을
두고 돌아가지 않아도 되고, 저녁식사는 어떻게 하지? 당신, 정말로 요리를 할 줄
아나?"
  "해 볼게요. 배급을 조금 받은 것 외엔 요리할 만한 게 없거든요."
  두 사람은 부엌으로 갔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배급받은 것을 바라보았다.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약간의 빵과 꿀벌 대용품, 마가린과 계란 두 개, 사과 몇 개가
전부였다.
  "아직 배급표가 남아 있으니까 받아 올 수도 있어요."
  그레버는 서랍을 닫았다.
  "배급표는 그냥 두라고.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까. 오늘은 다른 수단을 강구해야지."
  "집안에선 아무 것도 손을 댈 수 없어요." 엘리자베스는 놀란 것 같았다.
  "루젤 부인은 자기 물건을 훤히 알고 있어요."
  "난 절대로 도둑질할 생각은 없어. 적국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처럼 징발하러 나갈
뿐이야. 알폰스 빈딩그란 사내가 나를 파티에 초대했어. 파티에 참석해야지! 날 위해
준비한 음식을 잔뜩 안고 오겠어. 30분 후에 돌아오지."
 
  알폰스는 두 팔을 벌려서 그를 환영했다.
  "잘 왔네. 어서 들어오게! 오늘은 내 생일이야! 친구들이 몇 명 와 있지."
  실내는 담배 연기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알폰스." 그레버는 복도를 지나면서 급히 말했다.
  "난 곧 돌아가야만 해."
  "돌아간다고? 에른스트, 도대체 그런 말이 어딨어?"
  "자네가 초대했다는 걸 알기 전에 선약을 한 사람이 있어."
  "무슨 상관인가! 갑자기 공식적인 회합에 출석하게 됐다고 하면 돼." 알폰스는 크게
웃었다.
  "게슈타포의 장교 두 사람이 와 있어! 당장 소개해 주지. 약속한 친구에게
게슈타포에 끌려갔었다고 들러대게. 그러지 말고 이리로 데려오든지."
  "그건 안돼."
  "어째서? 우리에게 불가능은 존재하지 않아."
  그레버는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알폰스, 벌써 짐작했을 텐데. 네가 생일축하 파티를 열 줄은 전혀 몰랐어. 난 네게
먹을 것 좀 얻으려고 들른 거지. 난 지금 누군가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여기로 데리고
올 수는 없어. 이제 짐작하겠나?"
  빈딩그는 잇몸까지 보이면서 웃었다.
  "알았어. 영원히 행복을 약속한 여성인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했군! 자넨 틀렸다고
체념했는데 그만하면 알겠어. 그래, 좋아. 그렇지만 여기도 괜찮은 여성이 둘이나
있어. 어때, 한번 만나보지 않겠어? 아르마란 여성은 참으로 유쾌한 여자야
저기 하이힐을 신은 금발말야. 그녀는 부인 강제수용소의 소장이야. 네가 마음에
있다면 오늘밤 톡톡히 재미를 볼 수 있지. 저 여잔 일선 장병이라면 누구라도
좋으니까. 참호의 냄새가 그녀를 흥분시키는 모양이야."
  "난 그렇지도 않아."
  알폰스는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아르마의 몸뚱이에서 풍기는 강제 수용소의 냄새를 맡으면 자네도 참을 수 없을걸.
슈테게만이란 녀석은 완전히 빠져 있어. 소파에 앉아 있는 저 뚱보가 바로 그
주인공이야. 내 취향은 아니지. 저기 구석에 있는 아담한 아가씬 어떤가?"
  "일류인데."
  "그래? 마음에 든다면 얼마든지 양보하겠네."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수는 없어."
  "알았어. 그렇다면 자네가 발견한 여성은 확실한 상류층이겠군. 좋아, 양해하지.
알폰스도 신사야. 우선 부엌으로 가서 자네가 좋아하는 걸 찾아볼까? 그런 다음에
축배를 드는 거야. 딱 한 잔이라구. 어떤가?"
  "좋아."
  부엌에는 크라이네르트 부인이 흰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야유회의 진수성찬이다! 자넨 운이 좋아! 뭣이든 좋아하는 걸로 가지고 가게. 아니
크라이네르트가 멋지게 포장해 놔요. 우린 지하실에 갔다올 테니까."
  지하실에는 구경하기도 힘든 물건들이 잔뜩 저장되어 있었다.
  "모든 건 알폰스에게 맡겨."
  빈딩그는 싱글싱글 웃었다.
  "만족스럽게 해주지. , 첫 개시로 프랑스제 통조림 두 개를 받게나."
  그레버는 통조림을 받았다. 알폰스는 여기저기를 뒤졌다.
  "네덜란드에서 온 아스파라거스가 두 통. 그대로 먹어도 되고 데워 먹어도 좋아.
그리고 여기 프라하의 햄이 한 통. 복숭아 통조림도 있군. 그것보다도 딸기가 좋지
않을까?"
  그레버는 번쩍번쩍 빛나는 장화를 신고 앞에 서 있는 짧은 다리를 보았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특산품과 통조림이 높게 쌓여 있었다. 문득 엘리자베스의 초라한
배급품이 떠올랐다.
  "두 가지 다 가져갈 수 있다면 좋겠지."
  알폰스는 이를 드러냈다.
  "맞았어! 마침내 자네도 옛날도 돌아갔군. 에른스트, 세상을 비관해 봤자 별수 없어.
안되는 건 어차피 안돼. 손에 들어오는 건 꽉 움켜잡아. 걱정 따윈 목사에게 맡겨
두라구."
  알폰스는 사닥다리에서 내려와 다른 지하실로 갔다. 거기에는 술병이 가득 저장되어
있었다.
  "여기에도 멋진 전리품이 많아. 우리들의 적군이 이런 것 미시면 술의 신에게
노여움을 사지. , 무엇으로 할까? 보드카? 아르마냑? 폴란드산 매실주도 있어."
  술은 게르마니아에서 갖고 온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빈딩그의 말이 옳다
전리품은 전리품이다. 네게로 가는 것은 놓치지 마라.
  "샴페인도 있어. 난 이런 건 좋아하지 않지만 로맨스엔 어울리는 술이지. 한 병
가지고 가게. 이게 있다면 오늘밤은 성공이야!"
  빈딩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즐기는 술이 무엇인지 아나? 퀸메르야. 그것도 한 병 주지. 퀸메르를
마시면서 알폰스도 생각해 주게."
  두 사람은 다시 부엌으로 갔다.
  "크라이네르트, 꾸러미를 둘로 나눠요. 하난 음식물, 하난 술병으로. 병과 병
사이에는 종이를 끼워서 술병이 깨지지 않도록. 이만하면 됐나, 에른스트?"
  "이걸 다 가지고 갈 수 있을까?"
  빈딩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폰스는 무엇이든지 도중에 그만두는 법이 없지."
  빈딩그의 눈은 번들거리고 두 뺨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새의 둥지를
발견한 소년이 흥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레버는 그의 친절에 감동했지만
알폰스가 하이니의 소련에서의 체험담을 듣고 있을 때도 지금과 같은 표정이 되었던
것을 상기했다.
  빈딩그는 그레버에게 윙크를 해 보였다.
  "최고급 커피도 준비했지. 그건 내일 아침 몫이야.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절대로
서두르지 마라. 그럼 들어가 볼까? 내 친구를 소개하지. 게슈타포에 있는 슈미트와
호프만이야. 저들은 도움이 될 수 있는 인간이지. 잠깐이면 돼. 그리고 나를 위해서
건배해 주게. 내가 가진 모든 걸 그대로 보존할 수 있도록!"
 
  "저것을 부엌에 놓아둘 순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감춰야겠어요. 루젤이 보고 나를 암매상으로 밀고할 거에요."
  "미처 생각을 못했군! 어떻게 매수하는 방법이 없을까? 우리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주든지."
  "필요없는 것?"
  그레버는 웃었다.
  "당신의 소중한 벌꿀 대용품. 아니면 마가린."
  "그러나 어려울걸요. 그 여잔 배급표만으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아니까."
  "내일밤까지 먹어치우기로 하지."
  "그래도 전부 먹을 수는 없을 테니 나머진 어떻게 하지?"
  "내 방에 숨겨두기로 해요. 책이나 옷 속에."
  "그녀가 냄새를 맡는다면?"
  "난 아침마다 자물쇠를 채우고 나가는 걸요."
  "그녀가 똑같은 열쇠를 갖고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들었다.
  ", 그것을 생각 못했군요."
  그레버는 술병을 들었다.
  "그것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고 지금은 먹는 일에나 열중해 보자고. 우리의 생일로
알고 테이블 가득히 차려. 파티를 하는 거야!"
  "통조림도?"
  "통조림은 장식용이야. 뚜껑을 열 필요는 없어. 우선 상하기 쉬운 것부터 먹어
치우기로 하지. 술병도 나란히 세워놓고. 도둑질과 뇌물로 당당하게 입수한 전 재산을
말이야."
  "게르마니아에서 갖고 온 것도?"
  "물론이지. 그건 충분한 대가를 치른 거야."
  그들은 테이블을 방 한가운데로 옮긴 다음에 포장지을 전부 벗기고 매실주와 코냑과
퀸메르의 마개를 땄다. 샴페인만 그대로 두었다.
  "멋지군요! 그런데 무엇을 축하하지요?"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 술잔을 넘겼다.
  "우린 모든 것을 축하하는 거야. 여러 가지로 따로따로 축하할 시간이 없어. 첫째는
당신과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또 이틀간이나 둘만이 지낼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는
거야!"
  그는 테이블을 돌아서 엘리자베스를 가슴에 안았다. 그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제2의 자신이 끝없는 생명력으로 잠겨드는 것 같았다. 더욱 새롭고 가슴 벅찬
희열이 그의 내부에 퍼졌다.
 
  창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바로 맞은 편에 보이는 집에 어젯밤 명중된 직격탄의
파편으로 엘리자베스 방의 창문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녀는 등화관제용의 검은
종이로 창문을 가리고, 그 위에 엷은 커튼이 쳤다.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방안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간간이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기침을 했다.
  "도시는 거의 잠들었군요. 난 몹시 취했고요."
  그들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테이블에는 음식 찌꺼기와 마시다 남은
술병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치우지 않고 다시 배가 고파질 때까지
기다렸다. 보드카는 마셔버리고 코냑은 침대 밑의 바닥에 세워놓고 있었다.
  그레버는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평화로운 마을에 있는 듯 했다. 샘물이 솟아나고 보리수에는
꿀벌들이 윙윙 거리며 몰려든다 멀리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곧 달이 뜨겠군."
  이제 달이 뜰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부드러운 달빛, 단순한 생물의 행복, 그것은
이미 여기에 존재한다. 잠들지 않고 순환하는 우리의 피 속에 있다.
  그는 폴만과의 대화를 떠올렸지만 그것은 아득한 옛날로 느껴졌다. 그토록 처절하게
절망하고 나서 다시 이런 정열을 발산할 수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그러나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의문에 잠겨있는 동안은 그것 이외의 사실은 깨닫지
못하기 마련이다. 열렬히 기대했던 것이 사라져버릴 때, 비로소 새로운 눈이 뜨이고
공포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 줄기의 빛이 창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빛은 재빨리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벌써 달이 나왔을까?"
  "그럴 리가 없어요. 달빛은 저렇게 하얗지 않아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용 슬리퍼를
신었다. 그녀는 창가로 가서 살며시 밖을 내다보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나신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않았다.
  "방공단의 작업반들이에요. 삽과 곡괭이를 들고 맞은 편 집에 모여 있어요.
지하실에 사람들이 묻혔을까요?"
  "전신주를 수리하는 중인지도 모르지."
  "맞아요."
  엘리자베스는 그레버에게로 돌아왔다.
  "난 때때로 공습이 있고 난 다음에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차라리 아파트가 불에 타
버렸길 바라고 있어요. 집도 가구도 옷도 그리고 기억조차도! 당신은 이해할 수
있겠죠?"
  "이해하고말고."
  "그렇다고 아버지에 대한 추억까진 아니에요. 다른 것들 공포라든가,
실망이라든가, 증오 같은 것. 집이 타 버리면 그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까 처음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