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07

淸山에 2011. 9. 3. 16:25

 

  

 

** 

 

 
 
  "또 허탕이래. 그래서 홧김에 자전거로 벽을 들이받았어. 울상이더군. 지금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지. 왜 그래? 무척 지친 것 같은데?"
  "또 나가야 해. 잠깐 찾을 것이 있어서."
  그레버는 배낭을 더듬어보았다. 소련에서 보드카를 가지고 왔던 것이다. 빈딩그에게
받은 아르마냑도 있었다.
  "아르마냑을 가지고 가게." 로이타가 말했다.
  "보드카는 한 방울도 안 남았어."
  "?"
  "우리가 전부 마셔버렸어. 네가 진작에 내놨다면 좋았을 거야. 전우들 생각도
해야지. 하여튼 맛이 좋던데?"
  그레버는 아르마냑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넌 어떻게 술을 구할 수 있었지?"
  "샀어. 또 물어볼 것은?"
  로이타는 싱글싱글 웃었다.
  "없어. , 아르마냑을 가지고 어서 가게. 이 원시적인 카사노바. 수줍어하는 건
시간의 낭비야. 휴가는 짧고 전쟁은 길다."
  그레버는 담배와 잔을 챙겼다. 그는 나오면서 룸메르가 여전히 열중해 있는 것을
보았다. 룸메르 앞에는 돈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병영은 이미 소등나팔을 불고 있었다. 그레버의 발자국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그는 넓은 광장을 가로질렀다.
  "저런 아가씨를 잘도 나꿔챘군. 저건 장교용이야." 보초가 말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는 담에 기대어 얌전히 서 있었다. 그는 보초의
어깨를 두드렸다.
  "새로운 규칙이 정해졌어. 일선에서 4 년간 버틴 자에게는 훈장대신에 저것을 받을
수 있어. 모두 장군의 딸들이지. 너도 일선 근무를 지원하라고. 그리고 이 멍청아,
근무 중에 말을 하면 안된다는 수칙을 모르는가?"
  그레버는 엘리자베스에게로 가까이 갔다.
  "너야말로 멍청이지." 보초가 그의 등에 대고 투덜거렸다.
 
  그들은 병영 뒤에 있는 언덕 위에서 벤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시내 전체가
내려다보았다. 시내 어디서고 불빛은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강물만이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레버는 아르마냑을 절반쯤 따라서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잔을 돌려주었다.
  "맘껏 마셔. 오늘밤은 술을 마시기에 적당하군. 우리의 따분한 인생을 위하여,
우리가 아직 살아있음을 위하여. , 쭉 들이키자고."
  "좋아요. 모든 것을 위하여."
  그는 컵에 넘칠 정도로 술을 부어서 들이켰다. 온몸이 확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너무도 허전했다. 아직까지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런
고통이 없는 허전함이었다.
  엘리스베스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모으고 두 팔로 무릎을 껴안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밤나무의 싱싱한 잎이 달빛을 받아 파랗게 빛났다.
  "새까맣군요." 그녀는 손끝으로 시내를 가리켰다.
  "그런 것을 보는 게 아냐. 뒤를 봐, 경치가 달라."
  언덕의 반대쪽에는 달빛이 뿌려지고 있는 도로, 마을 교회의 철탑, 숲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 속에는 이 세계의 모든 평화가 깃들여 있을 거야. 안 그래?"
  ". 잠시 뒤를 돌아보고, 저쪽만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곧 그렇게 될 거야."
  "당신은 믿고 있나요?"
  "물론이지. 안 그렇다면 이렇게 살아 있지도 않을걸."
  그는 그녀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에게 어깨를 기댔다.
  "우리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대로 있어요."
  "좋아."
  그들은 침묵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꿈틀거렸다. 그레버는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런! 깜박 잠이 들었었어."
  "나도."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레버는 수중의 바위에 해초가 흔들리듯이 자기가 편안히 잠들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소련에서 귀국한 후, 처음으로 평화를 느꼈다.
  그들은 시내 한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다시 그들을 삼키고 싸늘한 취기가
몰려들면서 밀폐 당한 검은 창이 영구차의 행렬처럼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부르르 온몸을 떨었다.
  "옛날에는 집이나 거리에 빛이 가득 차 있었어요. 난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었지요.
이제야 비로소 없어진 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겠어요."
  그레버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었다. 비행사들에게는 좋은
밤이었다.
  "유럽은 거의 모두가 이런 형편이지. 다만 스위스만이 아직 밤에도 밝을 뿐이야.
비행사들이 중립국이란 걸 알게 일부러 밤에 환히 밝혀 놓고 있지. 비행편대를
거느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 전선에 출동했던 친구가 내게 말해줬어. 스위스는 산의
섬이자, 빛과 평화의 섬이라고. 한쪽은 이미 다른 한쪽을 갖고 있지. 그 섬의 주위에는
암흑으로 덮여 있어. 독일이나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 빛 대신 암흑을."
  "빛은 우리를 인간답게 했어요." 엘리자베스는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거부하고 다시 혈거인이 되었어요."
  빛은 과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었을까? 그레버는 의심스러웠다. 너무 엄청나게
들리지만 엘리자베스의 말이 옳을는지도 모른다. 동물은 빛을 지니고 있지 않다. 빛도
없지만 불도 없다. 그리고 폭탄도 없다.
  그들은 마리가에 서 있었다.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보지 마세요. 술을 왜 마셨는지 난 술을 마시지 못해요. 긴장감이
풀리면서 어쩐지 자꾸만 슬픈 생각이 들어요."
  "나도 마찬가지니까. 이것도 그 중의 하나야."
  "어떤 것?"
  "아까 우리들이 얘기한 것 말야. 뒤돌아 서서 반대 방향을 보지 말아야 해. 내일
밤은 거리를 방황하는 건 그만두지. 어딘가 밝은 곳으로 가기로 하지. 내가 찾아볼게."
  "그러면 나보다 더 명랑한 여자를 구해야 돼요."
  "난 그런 것은 필요 없어."
  "그럼 무엇이 필요하죠?"
  "난 명랑한 상대는 필요 없어. 동정하는 건 정말 싫어. 그런 것들은 낮에 얼마든지
만났어."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래요. 잘 알고 있어요."
  "우린 그들과 달라. 형식적인 건 싫어. 내일 저녁, 시내에서 가장 밝은 곳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시자. 단 하룻밤만이라도 유쾌하게 지내는 거야."
  그녀는 그를 보았다.
  "그것도 그 중의 하나인가요?"
  "그렇지, 그 중의 하나이지. 당신의 옷 중에서 가장 멋있는 것을 입고 나와."
  "좋아요. 8시에 오세요."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입 언저리에 닿아 있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부드러운 바람 같았다. 그가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엘리자베스는 집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 8 may 2006******
 
12
 
  "좋아! 인정할 수 있어." 베차가 말했다.
  "난 술집 여편네와 잤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 난 뭔가 해야만 했어! 아니면,
휴가고 뭐고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난 순진한 송아지새끼처럼 그대로 일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단 말야."
  그는 펠드만의 침대에 걸터앉아 커피가 가득 든 반합 뚜껑을 들고서 두 발을 물통
속에 담그고 있었다. 자전거를 부수었기 때문에 발이 부르텄던 것이다.
  "그런데 자네는?" 그레버에게 물었다.
  "오늘은 무엇을 했어? 아침에 나갔었나?"
  "아니."
  "나가지도 않았단 말인가?"
  "이 녀석은 잠만 잤어." 펠드만이 말했다.
  "아침부터 아무리 떠들어대도 일어나지 않더군."
  베차는 물통에서 다리를 빼고 발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발바닥이 잔뜩 부어오르고
있었다.
  "이것 보라구! 난 기운깨나 쓰지만 발은 어린애처럼 부드러워. 태어났을 때부터
그랬지. 이런 발로 새 출발을 해야 되는데 말야."
  "왜 그러지? 좀더 기분을 낼 수 있을 텐데." 펠드만이 빈정거렸다.
  "여주인을 정복하지 않았는가 말야."
  "아아, 그 여편네! 집어치워!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어. 더구나 난 환멸을 느꼈어."
  "일선에서 돌아온 자들은 처음엔 실망을 하지. 그건 누구나가 그래."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냐. 일이 제대로 되기는 했어. 그렇지만 썩 좋은 여자라고 할
순 없었어."
  "단 한 번에 생각대로 할 수 있는가. 여잔 우선 분위기를 맞혀줘야 한다구."
  "넌 아직 내 말은 못 알아들었어. 그녀는 정말 굉장했어. 그러나 두 사람의
영혼까지 합쳐지진 않았단 말야. 우린 한 이불 속에서 열심히 일을 진행하고 있었어.
글쎄, 전투가 막 벌어지고 있는 판에 난 너무 열중한 나머지 아르마라고 부른 거야.
그녀의 이름은 루이제야. 아르마는 내 마누라고."
  "저런!"
  "그건 실책이야."
  "꼴 좋다." 노름 패거리들 중에서 한 사람이 말했다.
  "그것을 보고 부정에 대한 천벌이라고 하는 거야. 그 여자가 널 실컷 두들겼으면
좋았을걸!"
  "부정이라고 누가 말했지?" 베차는 두 다리를 내려놓았다.
  "네가 말했지 않아! 아니면 바보냐?"
  응수한 사내는 머리가 계란처럼 생기고 키가 작은 남자였다. 그는 독살스럽게
베차를 노려보았다.
  베차는 잔뜩 약이 올랐다.
  "저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는 주위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부정이란 말을 입밖에 낸 것이 너 하나 뿐이야! 미련한 놈! 만약에 마누라가 곁에
있는데도 딴 여자가 잔다면 부정하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마누라는
여기 없어. 요는 그것이 문제야! 그것이 어째서 부정인가? 난 내 마누라만 만났더라면
그 여편네쯤 우습게 알았을 거야!"
  "성인군자 같은 말씀에 일일이 신경 쓰지마." 펠드만이 베차를 위로했다.
  "저 놈은 질투하는 거야. 한데 네가 루이제라고 부르니까 그 여잔 어쨌지?"
  "루이제? 루이제가 여냐. 루이젠 그녀의 이름이야. 난 아르마라고 불렀어."
  "그렇지, 아르마였지. 그래 어떻게 되었지?"
  "여잔 도무지 알 수 없단 말야. 웃거나 수다를 떠는 대신 훌쩍훌쩍 울고 있었어.
악어 같은 눈물을 흘리는 꼴이라니. 생각해 보게. 몸집이 큰 여자는 우는 게 아냐."
로이타는 기침을 하면서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베차를 바라보았다.
  "?"
  "어울리지 않아. 몸집이 큰 여잔 울지 말고."
  "네 마누란 네가 루이제라고 부른다면 웃을 거라고 생각하나?" 계란 머리가
독살스럽게 물었다.
  "만약에 나의 아르마가 거기 있었다면." 베차는 태연하게 권위까지 내세우며
말했다.
  "난 우선 내 앞에 있는 맥주를 마시지. 그런 다음에 다시 남은 술들을 모조리
마셔버리는 거야. 마지막에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녀가 어찌나 사랑해주는지
구두 한 짝밖에 남지 않았어. 나의 아르마였다면 그 정도는 된다, 요 계란 대가리야!"
  계란 머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말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그래서 넌 그런 아르마를 배반했군." 마침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난 내 마누라를 배반하지 않았어. 내 옆에만 있었다면 그런 여자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단 말야. 이건 배반이라고 할 수 없어. 정당방위라구, 이 새끼야!"
  로이타는 그레버를 보았다.
  "넨 어젯밤 그 아르마냑으로 어떤 공로를 세웠지?"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펠드만이 물었다.
  "그런데도 송장처럼 축 늘어져 잠만 잤나?"
  "그럼 왜 그렇게 피로를 느꼈는지 악마가 아니라면 도저히 모를 거야.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잘 수 있지. 마치 일주일 내내 한잠도 못 잔 것 같아."
  "그럼 또 잠이나 자게."
  "현명한 충고지." 로이타가 말했다.
  "뭐니뭐니해도 수면의 대가이신 펠드만 선생의 충고니까."
  "펠드만은 당나귀야." 계란 머리가 얼른 끼여들었다.
  "그는 오로지 잠으로 휴가를 보냈어. 휴가를 오기나 했는지 모르겠군. 차라리
일선에서 잠이나 자면서 휴가를 가 꿈이나 꾸는 게 낫지."
  "그건 네가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사실은 그 반대이지."
  펠드만이 반격을 가했다.
  "난 잠을 자고 있을 때는 일선에서 싸우는 꿈을 꾸고 있어."
  "그런데 넌 실제로 어디 있지?" 로이타가 물었다.
  "뭐라고? 그야 물론 뻔하지."
  "너 그게 확실하니?"
  계란 머리가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바로 그거야. 계속 잠만 잘 바에야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란
말야. 멍청한 놈, 그것도 모르니?"
  "그래도 잠을 깼을 때는 달라." 펠트만이 갑자기 화를 내더니 그대로 침대에 벌렁
누웠다.
  로이타는 그레버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넌? 도대체 너의 영혼을 위해서 오늘 무엇을 할 생각인가?"
  "어디로 가면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나?"
  "혼자서 가나?"
  "아니."
  "그러면 게르마니아에 가게. 거기밖에 없네. 다만, 곤란한 건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런 전투복 차림으로는 어림도 없어. 장교용 호텔인데 레스토랑이 있어.
아마도 웨이터는 너의 훌륭한 모습에 경의를 표하겠지."
  그레버는 자기의 초라한 군복을 내려다보았다.
  "상의를 빌려줄 수 없겠나?"
  "좋아. 그런데 넌 나보다 훨씬 가벼워. 그런 꼴로는 도저히 입구를 통과시켜 주지
않을 거야. 내가 어디 네 몸에 맞는 하사 정복을 빌려 보지. 바지도 함께. 그 위에
외투를 걸치면 아무도 눈치챌 수 없지. 한데 넌 어째서 아직도 졸때기지? 이미 소위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하사관으로 진급했었는데 소위를 때려서 강등 당했어. 그때부터 진급이 중지되어
만년 졸개 신세지."
  "좋아. 그럼 넌 하사관의 복장을 할 만한 도덕상의 권리가 있어. 만약에 부인과
함께 게르마니아에 가면 와인은 G.H.폰 뭄 제조의 1937 년산 요하니베르게르
콕스베르그를 주문하게. 이건 죽은 사람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최고급이지."
 
  안개가 끼고 있었다. 그레버는 다리 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강물은 쓰레기를
가득 띄우고 천천히 흘러갔다. 안개 저편으로 학교가 보였다.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리를 건너 교정으로 향하는 오솔길로 들어섰다. 습기가 차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철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교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텅 빈
교정을 가로질러 강가로 갔다. 강을 마주보며 축축한 벤치가 놓여 있었다. 그레버는
항상 거기에 앉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 무렵에 그가 꿈꾸고 있었던 것들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학교에서 곧바로 전쟁터로 향한 것이었다.
  그레버는 묵묵히 강물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침대조각이 강물에 떠내려와 기슭에
박혀 있었다. 그 옆에 물에 젖은 베개가 해면처럼 뒹굴고 있었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는 되돌아 와서 교사 앞에 서서 잠깐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레버는
현관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침한 층계와 강당, 회의실로 통하는 까만 문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감명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폴만을 생각했다. '가 봤자
해로울 뿐'이라고 했던 그 녀석의 말이 맞았어. 그는 어쩐지 허전해지고 있었다.
교문을 나온 이후에 스스로 터득한 것들을 교실에서 배운 것과 완전히 모순되고
있었다. 교육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입구 양쪽에 전사자를 위한 기념 사진이 있었다.
오른쪽의 사진은 1차 대전 당시의 전사자를 기념하고 있는 것이었고, 왼쪽의 사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번 전쟁에서 쓰러진 자들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었다.
  교정에서 수위를 만났다.
  "무엇을 찾고 있소?" 노인이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 것도 찾지 않습니다."
  그레버는 그대로 걸어가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되돌아왔다.
  "폴만 선생님의 주소를 알 수 없습니까? 여기서 교편을 잡던 분입니다.
  "그분은 이미 그만두셨오."
  "알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디 살고 계실까요?"
  수위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전에는 얀프라츠 6번지에서 살았는데 아직도 거기 계신지 잘 모르겠소. 당신은 이
학교 학생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심메르씨는 아직도 근무하십니까? 교장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수위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물론 계시지요. 또 여기 계실 수 없는 이유도 없습니다."
 
  그레버는 계속 걸었지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짙은 안개 때문에
폐허가 된 거리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폐허는 어디고 다 비슷비슷해서 거리를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조금씩 안개에 잠기고 있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자진해서 말려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마침내 하겐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옛 집터로 가서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전갈도 없었다. 돌아서려는 순간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리에는 인적이 끊겨 있었다.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레버는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습
경비원이다.' 그는 생각했다. 그 미치광이다. 틀림없는 것이다. 그는 정면만이 서 있는
건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사람이 안락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그 의자는 그의 옛 집터에 있던 의자였다.
  "왜 그래?" 공습 경비원은 깜짝 놀라 큰소리로 물었다.
  소리는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저건 무슨 소리입니까? 어디서 들리고 있습니까?"
  경비원은 축축한 얼굴로 그레버에게 가까이 댔다.
  "군인 아저씨로군! 조국의 수호자! 저것이 뭐냐고? 자네에겐 잘 들리지 않나? 저건
생매장당한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이야. 구원을 청하는 부르짖음이야. 빨리 파내 줘!
빨리 파내 줘!"
  "바보 같은 소리!"
  그레버는 서서히 밀려가는 안개 속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검은 전선 같은 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흔들릴 때마다 야릇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폐허의 높은 곳에 걸려 있던 뚜껑이 없는 피아노를 생각해 냈다.
전깃줄이 드러난 건반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다!"
  "피아노! 피아노!" 경비원은 그레버의 흉내를 냈다.
  "넌 저게 무언지 알고나 있나? 이 비양심적인 살인자! 장례식을 알리는 종소리인데
바람이 치고 있는 거야. 바로 하늘이 종을 치게 하고 자비를 베푸는 거야.
지상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자비를. 너 같은 야만족들이 죽음이란 무엇인지 알기나
하나?"
  경비원은 그레버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처에 시체가 있어." 경비원은 소근거렸다.
  "어디를 가나 시체가 있네! 시체는 가슴을 딱 벌린 채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네놈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처치할 거야."
  그레버는 거리로 나왔다.
  "모조리 처치하는 거다." 경비원은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사자들을 위하여 하나하나 심판을 행하는 거다."
  그레버는 더 이상 그를 볼 수가 없었다. 다만 소용돌이 치고 있는 안개 속에서 그의
쉰 목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레버는 무턱대고 걷고 있었다.
  "죽어라." 그는 중얼거렸다.
  "하루빨리 죽어서 네가 지금 머물고 있는 죽음의 섬에 묻혀 버려라!"
 
  그레버가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즉시 문이 열렸다. 마치 문 뒤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어머나, 당신이었군요!"
  루젤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그렇소."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방에서 나왔다. 이번에는 루젤도 아무런 소리 없이 물러갔다.
  "들어오세요, 에른스트. 곧 준비하겠어요."
  그는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이것이 당신의 옷 중에서 가장 멋있는 건가?" 그는 엘리자베스가 입고 있는 검은
스웨터를 가리켰다.
  "오늘밤에 외출한다는 것을 잊었어?"
  "그것이 정말이었던가요?"
  "물론이지! 나를 봐. 이것은 하사관의 정장이야. 내 친구가 빌려주었어. 당신과 함께
호텔 게르마니아로 가라고 했어. 그런데 장교가 아니라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건 당신에게 달려 있어. 다른 옷은 없어?"
  "있지만."
  그레버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보드카를 보았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 그런 것 잊어 버려. 루젤도, 이웃들도 모두 잊는
거야. 당신은 가끔씩 이곳을 빠져나가야 돼.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 거야. ,
보드카를 한 잔 마시라구."
  그는 보드카를 따라서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좋아요. 실은 나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지
몰라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잠깐 밖에 계세요. 타락했다고 루젤 부인에게 밀고
당하기는 싫으니까."
  "밀고를 해도 소용없어. 군인을 상대하는 건 애국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도 밖에서 기다리지." 
  그레버는 바깥에서 서성거렸다. 안개는 많이 걷혔지만 아직도 집들의 벽과 벽
사이에서 맴돌았다. 갑자기 2층의 창문이 열렸다. 양손에 드레스를 하나씩 든
엘리자베스가 어깨를 창 밖으로 내밀었다. 드레스가 바람에 날렸다. 하나는 금빛이고,
다른 건 색을 잘 분간할 수 없는 검은빛이었다.
  "어느 것?"
  그는 금빛을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창문을 닫았다. 그레버는 주위를
살폈다. 인적이 없는 거리는 몹시 어두웠다. 등화관제 위반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밖으로 나왔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의 긴 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루젤 부인이 보았소?"
  ", 보았어요.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 여잔 내가
누더기를 걸치고 슬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난 어쩐지 마음에 걸려요."
  "마음에 걸리는 건 오히려 그럴 필요가 없는 인간들이야."
  "난 두렵기까지 해요. 당신은."
  "아니, 난 아무 생각도 안 해. 오늘밤에는 모든 걸 잊어버려. 이제부터 우린 단 한
번이라도 유쾌한 추억을 남길 수 있을까 시험해 보는 거야."
  호텔 게르마니아는 파괴된 건물들 사이에 우뚝 서 있었다. 호텔은 가난한 친척들
사이에 끼여 있는 돈 많은 여자와 같았다. 벽돌더미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기 때문에
폐허에서 죽음의 흔적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내인은 손님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 같은 눈초리로 그레버의 군복을 훑어보았다.
  "주연실은 어디지?" 그레버는 상대방이 말하기도 전에 딱딱하게 물었다.
  "홀은 오른쪽 끝에 있습니다. 지배인이신 프리츠씨와 말씀해 주십시오."
  그레버와 엘리자베스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소령과 대위 두 사람이 그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레버는 경례를 했다.
  "여기는 장군들이 우글우글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2층에는 군사기관이 있지."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렇다면 너무 당돌하지 않아요. 혹시 발각되면 어떻게 하지요?"
  "발각된다고? 하사관의 흉내는 보통이야. 나도 전엔 하사관이었어."
  빼빼 마른 여자를 동반한 육군 중령이 나타났다. 중령은 그레버의 머리 너머로
정면을 보면서 걷고 있었다.
  "만약에 발각되면 어떻죠?"
  "별게 아니지."
  "혹시 총살당하는 건 아닌가요?"
  그레버는 살며시 웃었다.
  "엘리자베스! 설마 그럴 리가 있을라구. 일선에선 내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럴 순
없어."
  "그러면?"
  "별게 아냐. 2주일 정도 구류를 받겠지. 2주일 동안 휴식인 셈이지. 어차피 2주일
후에는 일선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조금도 겁나지 않아."
  지배인인 프리츠가 오른쪽 통로에서 나타났다. 그레버는 지폐를 한 장 슬며시 손에
쥐어주었다. 프리츠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물론 주연실로 가시겠죠?" 그는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했다. 프리츠는 기둥 옆의
테이블로 안내를 한 다음에 공손한 태도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도 이 정도는 돼야지. 분위기에 익숙해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군. 당신은
어때?"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당신은 틀리는데." 그레버는 경탄했다.
  "당신은 마치 단골손님 같군."
  학처럼 생긴 나이 지긋한 웨이터가 메뉴를 가지고 왔다. 그레버는 메뉴를 받았다가
지폐 한 장을 끼워서 돌려주었다.
  "우린 메뉴에 없는 게 먹고 싶은데 갖다줄 수 있을까?"
  학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메뉴에 적혀 있지 않은 건 없습니다만 ."
  "알았어. 우선 G.H. 폰 뭄 제품인 요하니스베르게르 콕스베르그 1937 년산을 한 병
갖다주게. 너무 차지 않은 걸로 말야."
  학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잘 알겠습니다."그는 갑자기 경의를 표하면서 말했다.
  "지금 오스텐드 카레이가 들어와 있습니다. 아주 신선하죠. 여기에 벨기에 샐러드와
파슬리 포테이토를 첨가하시면?"
  "좋아. 그런데 오드볼은? 캐비어는 질색이야."
  "물론입죠. 그 대신 슈트라스부르의 리비아가 있습니다."
  학은 점점 신이 났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다음에 네델란드 치즈는 어떻습니까?"
  "그것도 좋지."
  학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처음에는 그들이 길을 잃고 우연히 들어온 군인쯤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에른스트, 당신은 어디서 그런 걸 다 알았지요?"
  "병영에 함께 있는 로이타에게서 들었어. 오늘 아침까진 이런 건 모르고 있었지.
사람은 식도락가야."
  "그렇지만 돈을 메뉴에 끼워주다니!"
  "그것도 로이타에게 배운 거야. 그 녀석은 이런 방면으로 훤하지."
  엘리자베스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웃음소리는 무척 자유롭고 부드러웠다.
  "난 당신이 그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나도 당신이 그렇게 차리고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어." 그는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엘리자베스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웃으면
금세 표정이 달라지는 것이 마치 어둠에 싸여있던 창문이 활짝 열린 것처럼 보였다.
  "옷이 잘 어울리는 군." 그는 멋적은 듯이 말했다.
  "이건 어머니께서 입던 옷이에요. 어젯밤에 좀 고쳤어요."그녀는 살짝 웃었다.
  "사실 당신이 오기 전에 이미 준비를 마치고 있었어요."
  "그럼 당신은 바느질을 할 수 있단 말이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얼마 전까진 할 줄 몰랐어요. 최근에 배웠지요. 난 군용외투를 매일 여덟 시간씩
깁고 있어요."
  "정말이야? 그럼 근로봉사에 끌려 다니는군."
  "그럼요. 스스로 지원했어요. 그렇게 하면 아버지를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에겐 어울리지 않아. 엘리자베스란 당신 이름도 그래. 누가 그런 이름을
지었지?"
  "어머니가 지으셨죠. 어머닌 오스트리아의 남부 태생이었는데 이탈리아인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파란 눈의 블론드로 태어나길 바라셨대요. 그리고 엘리자베스란 이름으로
정했지요. 어머니의 기대대로 안됐지만, 결국 이름만은 그대로."
  학이 술을 가지고 왔다. 그는 보석을 다루는 것처럼 소중하게 병을 들고 조심스럽게
따랐다.
  "고급 커트 글라스를 가져 왔습니다. 색깔이 잘 보이지요. 아니면 캐브레드가
좋을까요?"
  "아냐, 이게 좋아."
  엘리자베스는 웃었다.
  "어머나, 너무 사치스러워요!"
  "사치." 그레버는 컵을 들었다.
  "사치라고? 그렇지! 엘리자베스, 우리 그것을 위해서 건배하는 거야! 2
동안이나 반합으로 음식을 먹고 있었지. 끝까지 무사히 먹을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말야. 그러니까 이건 사치가 아냐, 그 이상의 것이지.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이지."
  그는 마셨다. 술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녀도
부드러운 분위기에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 전선에서 죽음과 서로 노려보고 있던
그에게 술은 단지 술만을 의미하진 않았다. 화려한 은제 접시들이나 우아하게 흐르는
음악 역시 그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과 파괴가 없는 생활, 이미
신화가 되어 바랄 수 없는 꿈이 된 생활을 위한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인간이란 때때로 자기가 살아 있다는 걸 잊는 법이야."
  "그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엘리자베스가 웃었다.
  학이 다가왔다.
  "술은 어떻습니까?"
  "참으로 훌륭해. 그렇지 않으면 오랫동안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되살아 날 수가 없지."
  "그렇습니다. 마치 황금처럼 사면팔방으로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첫 잔에 알 수 있었지! 단번에 위장으로 가지 않고 바로 눈으로 가서 세계를
놀라게 한다!"
  "당신은 술에 조^36^예가 깊으시군요." 학은 비밀이란 듯이 그에게로 몸을 굽혔다.
  "저기 오른쪽 테이블에서도 똑같은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걸 물
마시듯 하지요. 그런 자들은 차라리 우유를 마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학은 그들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물러났다.
  "오늘은 사기꾼을 위해서 운이 좋은 날이군. 엘리자베스, 술이 어때? 당신에게도?"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난 꼭 감옥에서 탈출한 것 같아요. 그리고 사기죄로 즉시 체포당할 것
같은."
  "그건 그래! 자기 감정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학은 카레이와 샐러드를 날라 왔다. 그레버는 느긋한 마음으로 그가 시중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학은 술병을 들었다. 그는 마치 아들을 보살피는 어머니처럼 굴었다.
  "일반적으로 모젤 와인에는 생선이 따르는 법이지만 카레이는 다릅니다. 이것은
나무열매와 같은 풍미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말 그래."
  학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물러갔다.
  "에른스트, 이렇게 잔뜩 주문해 놓고 값을 치를 수 있어요? 엄청나게 비쌀 텐데."
  "문제없어. 2년치의 전투수당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돈은 오래 갖고 다닐
필요가 없어." 그레버는 웃었다.
  "2주일 동안만 지니고 있으면 돼."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어느 새 바람이 멎고 안개가 몰려들고
있었다.
  "당신은 언제 돌아가시죠? 2주일 후?"
  "그렇지."
  "금방이군요."
  "길게 느껴지다가도 어느 순간, 너무 짧아져 있기도 하지. 전시에는 평화로울 때의
시간과는 다르지. 당신도 그만한 것은 알고 있을 거야. 여기도 일선과 마찬가지로
전쟁터야."
  "똑같지는 않아요."
  "아냐, 똑같아. 오늘밤 난 처음으로 휴가를 즐겼어. 학과 로이타, 그리고 당신의
금빛 드레스 덕분이지."
  그녀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안개가 그녀의 얼굴을 이슬 머금은 과일처럼 적시고
있었다. 그레버는 이것들을 뒤에 남겨두고 병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하사관, 자넨 눈이 없나?"
  하얀 턱수염을 기른, 작고 뚱뚱한 소령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아마도 고무창이
달린 구두를 신고 슬며시 다가온 모양이었다. 소령은 노후 정리로 예비군에 돌려진
군인의 골동품으로서 현재의 계급을 방패로 허세를 부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레버는
이 노인을 당장 집어던지고 싶었으나 그런 위험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는 관록있는
군인처럼 아무 소리도 않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노인은 그에게 회중 전등를 비추고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려갔다.
  그레버는 이것이 굉장한 모욕으로 생각되었다.
  "특별복!" 노인은 언성을 높였다.
  "안락의자에 앉아 군무를 수행하는 자가 아니면 입고 다닐 수 없을 텐데! 특별복을
입은 일선용사라! 대단하군! 넌 어떻게 후방에 있는 거지?"
  그레버는 묵묵히 서 있었다. 자신의 초라한 상의에서 종군기장을 떼어 붙이는 일을
잊었던 것이다.
  "여자를 끌고 다니는 재주밖에 없나?" 소령이 호령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갑자기 몸을 움직였다. 회중 전등의 불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노인을 잔뜩 노려보다가 불빛 속에서 빠져 나와 그레버에게로 왔다.
소령은 헛기침을 하면서 그 자리를 물러났다.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그레버는 어깨를 움츠렸다.
  "저런 영감쟁이들은 어쩔 수가 없어. 부하들에게 경례를 받고 싶어서 거리를
방황하지. 그것이 그자들의 소일거리야."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소령의 흉내를 냈다.
  "넌 어째서 후방에 있지?"
  그레버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특별복을 입었다고 천벌이 내렸어. 내일은 사복을 입고 나서야지. 빌릴 곳이
있으니까. 그러면 우린 게르마니아에서 마음놓고 즐길 수 있어."
  "또 거기로?"
  "그럼 또 가야지. 엘리자베스, 나중에 일선에서 회상할 일은 그것 뿐이야. 내일 여덟
시에 다시 오겠소. 우물쭈물하면 그 노인이 또 와서 이번에는 급료카드를 꺼내보라고
할지도 모르니까."
  그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아무 저항도 없이 그에게 안겼다. 그는 그녀를
자기의 팔 안에 완전히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간절히 원했다. 오로지 그녀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힘껏 껴안고
키스를 했다. 오늘밤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하겐가의 옛 집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달이 갈라진 구름 사이로 화사한
빛을 던져주고 있었다. 그는 급히 돌 사이에서 종이쪽지를 끄집어냈다. 자세히 보니
한쪽에 연필로 무엇인가가 적혀 있었다. 그는 회중 전등을 찾았다.
  "본국에서 물어라. 창구 15"
  그는 시계를 보았다. 이미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렇지만 내일 아침 여덟 시가
마침내 부모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우체국에서 그 쪽지를 보이기
위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는 죽은 듯이 고요한 거리를 병영을 향해 걸어갔다.
      13
 
 
  우체국에 도착하니 건물의 일부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입구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이 붕괴되고 소실되어 있었다. 어디에나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레버는
잠시 기다리다가 15번 창구로 가서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국원은 종이쪽지를 도로 그에게 주었다.
  "신원을 확인할 무슨 증명이 있습니까?"
  그레버는 급료카드와 휴가증을 제시했다. 국원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전갈입니까?"
  국원은 아무런 대꾸도 없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안으로 사라졌다. 그레버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서류를 무심히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국원은 구겨진 소포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소포에 적힌 이름과
그레버의 휴가증을 대조해 보았다. 이윽고 소포를 내밀었다.
  "여기에 서명해 주십시오."
  그레버는 소포에 적혀있는 어머니의 필적을 보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일선의
그에게로 보냈고, 그것이 또한 전선으로부터 회송된 것이었다. 발신인의 주소는
하겐가로 되어 있었다. 그는 영수증에 서명을 했다.
  "이것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