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06

淸山에 2011. 9. 3. 16:27

 

  

  ** 

 

 
 
 
  "회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나?"
  "확신은 없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난 계속해서 편지를 쓸 거야."
  "도대체 누구 앞으로 썼지?"
  "수용소장과 만일을 대비해서 직접 베차의 아내와 내 부모 앞으로 보냈어."
  그레버는 편지 다발을 꺼내 보였다.
  "지금 우체국으로 갈 참이야."
  로이타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은 어디로 갔었지?"
  "시립학교와 교회학교의 체육관에. 어떤 집회소의 호적과에도 다시 한 번 가 봤지만
소용없었어."
  다른 사람과 교대하고 도박판에서 빠져 나온 사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들었다.
  "특별휴가를 맡은 인간들이 왜 병사 안에서 어슬렁거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는 그레버에게 말을 건넸다.
  "프러시아인은 가급적 멀리하라. 나라면 그것을 모토로 하겠어! 방을 하나 빌려서
사복을 입고 2주일 동안만이라도 인간다운 생활을 하겠어."
  "사복만 입으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가?" 로이타가 물었다.
  "당연하지. 그밖에 또 무엇이 있나?"
  "알아듣겠나?" 로이타는 그레버에게 물었다.
  "인생이란 간단하게 생각하면 간단한 거야. 자넨 사복을 가지고 왔나?"
  "아니. 그런 건 하겐 가의 벽돌더미 밑에 묻혀버렸어."
  "내가 빌려줄게."
  그레버는 창 너머로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3개 분대 가량의 병력이 실탄의 장진법과
점검, 수류탄 던지기, 경례 등을 연습하고 있었다.
  "휴가 전에는 집에 도착하는 즉시 군복 따위는 훨훨 벗어던지고 양복으로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병사의 버러지."
  카드에 열중해 있던 한 사내가 말하고 나서 소시지를 씹었다.
  "보병 놈들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어. 언제나 모자라는
인간들만이 휴가를 얻지."
  그는 다시 카드에 손을 댔다. 그는 룸메르에게 4 마르크나 잃고 있었고, 오늘
아침에는 병원 군의관으로부터 병역가능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그 때문에 약이 올라
얼굴이 시뻘개져 있었다.
  그레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나?" 로이타가 물었다.
  "우체국에 갔다가 어디든 또 가 봐야지."
  로이타는 빈 병을 바닥에 놓았다.
  "지금은 휴가중인 걸 알아야 해. 그리고 휴가가 곧 끝날 것이라는 것도."
  "그것만은 잊지 않고 있지." 그레버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로이타는 조심스럽게 붕대를 감은 다리를 창가로부터 내려놓았다.
  "내가 말하는 건 그런 뜻이 아냐. 부모님을 찾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자기가 휴가중이라는 건 잊지 말라는 말이야. 휴가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니까."
  "알고 있어."
  "좋아. 그것만 알고 있다면 됐어."
  그레버는 문을 향해서 걸어갔다. 테이블에서는 여전히 승부가 한창이었는데
룸메르가 계속해서 이기고 있었다.
  "몽땅 털려 버렸어!" 그레버를 '병사의 버러지'라고 불렀던 사내가 절망적으로
말했다.
  "에른스트!"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작달만한 돌격대장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비로소 새빨간 볼따구니와 둥근 얼굴을 기억해냈다.
  "빈딩그, 알폰스 빈딩그!"
  "맞았어."
  빈딩그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입이 벌어졌다.
  "에른스트! 우린 천 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어! 도대체 어디 있다가 왔나!"
  "소련에서."
  "그럼 휴가를 맡았군. 그렇다면 축하해야지. 내가 있는 곳으로 가지. 그다지 멀지
않아. 고급 코냑이 있어! 전선에서 돌아온 옛 동창을 만나다니!  이쯤 되면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없지."
  그레버는 그를 보았다. 빈딩그와 그는 2 년 동안 같은 반이었는데도 그에 대한 것도
거의 잊고 있었다. 알폰스가 돌격대에 입대했다는 소식은 소문으로 듣고 있었을
뿐이다. 지금 그 당사자는 번쩍번쩍 빛나는 장화를 신고 행복한 얼굴로 그레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가자, 에른스트."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시간이 없어."
  "에른스트! 친구끼리 한잔하는 거야. 우리는 죽마고우가 아닌가?"
  죽마고우! 그레버는 대장의 배지를 단 제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빈딩그는
출세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을 찾는 일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내는 당의 보스였던 것이다.
  "좋았어. 알폰스, 우리 한잔하러 가세."
  "좋았어. 따라 오라구."
 
  빈딩그는 교외의 작은 별장에 살고 있었다. 별장은 아무런 피해도 없이 수목들이
솟아있는 정원을 안고서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새의 둥지가 보였으며
새들이 주위를 맴돌며 지저귀고 있었다.
  빈딩그가 앞장서서 그레버를 집안으로 초대했다. 현관에는 암사슴의 뿔, 멧돼지의
, 박제된 곰의 목 등이 걸려 있었다. 그레버는 깜짝 놀랐다.
  "자넨 언제부터 훌륭한 수렵가가 되었나?"
  빈딩그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냐. 난 단 한 번도 총을 만진 적이 없어. 장식품이지만 그럴듯하지?
게르만적이라고 할까!"
  그는 융단을 깐 방으로 그레버를 안내했다. 벽에는 훌륭한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나의 소굴이 어떤가?" 그는 자랑스러운 듯이 물었다.
  "있을 만하지. 안 그래?"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은 당원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알폰스는 가난한
우유장수의 아들이었다.
  "앉게, 에른스트. 어떤가, 나의 루벤스는?"
  "뭐라고?"
  "저 피아노 위에 걸려있는 그림 말이야!"
  그것은 연못가에 서 있는 매우 육감적인 나체의 여인이었다. 금발의 여인은 유달리
엉덩이가 통통해 보였다. 이만하면 베차도 좋아하겠군.
  "예쁜데."
  "예뻐?" 빈딩그는 실망했다.
  "이것은 참으로 훌륭해. 원수의 친애를 받고 있는 화상으로부터 구입한거야.
걸작이지! 난 이걸 소유한 자에게 다시 싼값으로 샀지. 참으로 근사하지?"
  "물론 근사해. 단지 난 전문가가 아니라서. 난 이것을 보면 미쳐버릴 남자를 알고
있어."
  "그래? 대수집가인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는 루벤스의 전문가야."
  빈딩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건 반가운 얘기인데, 에른스트. 정말 기쁘다. 나도 내가 미술품의 수집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지. 그런데 자넨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얘기해 봐.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줄게. 난 다소 연줄이 있거든." 그는 교활하게 웃었다.
  그레버는 약간 감동되었다. 휴가를 나온 이래 아무런 경계를 하지 않고
도와주겠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네에게 한 가지 도움을 청할 일이 있네. 나의 부모님께서 행방불명이 되셨어.
아마도 지방의 시골로 가셨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
  빈딩그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번쩍번쩍 윤기가 흐르는 장화는 난로의
그의 굴뚝처럼 그의 앞에 세워져 있었다.
  "시내에 계시지 않다면 쉬운 일이 아니지. 그러나 한번 알아보기나 하지. 한 사흘은
걸릴거야. 어쩌면 더 걸릴지도 모르고."
  "나도 각오하고 있어."
  빈딩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장으로 가서 술병과 컵 두 개를 들고 왔다.
  "에른스트, 우선 한잔하세. , 건배."
  "건강하게, 알폰스."
  빈당그는 술을 따랐다.
  "그럼, 지금 어디서 묵고 있나? 친척집에 있나?"
  "시내에는 친척집이 없어. 난 병영에서 침식을 하고 있지."
  빈딩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에른스트,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휴가를 즐기지도 못하고. 나한테 있어.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목욕탕도 있고 절대로 안전하지."
  "자넨 여기서 혼자 살고 있나?"
  "물론이지. 내가 결혼했다고 생각하나? 난 바보가 아냐. 나 정도의 지위에 있으면
여자들이 떼를 지어서 몰려들지! 여자들이 내 발 밑에 무릎을 꿇는 거야."
  "정말이야?"
  "무릎을 꿇고 말고. 어제도 하나 찾아 왔지! 상류계급의 귀부인이야. 그 귀부인은
융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어. 마치 분수처럼 눈물을 흘리며 무슨 말이라도
듣겠다더군. 그 대신 강제수용소에서 남편을 빼달라는 거야."
  그레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가능한가?"
  빈딩그는 웃었다.
  "난 누구라도 수용소에 집어넣을 수 있어. 그렇지만 석방이란 건 그리 간단하지
않아. 물론 그 여자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없지. 그건 그렇고, 이리로 오겠나?"
  "당장은 어려워, 알폰스. 몇 군데 부모님의 소식을 알면 병영으로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어. 통지가 올 때까진 기다리고 있어야해."
  "알았어. 어쨌든 자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 그렇지만 알폰스에게는 집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게. 식사도 최고급이야. 앞을 내다보고 잔뜩 준비해 놓았지."
  "고맙네, 알폰스."
  "고맙긴! 우린 동창이 아닌가. 서로 돕고 살아야지. 자네에게 숙제를 해달라고 많이
졸랐었지. 자네 부르마이스터를 기억하고 있나?"
  "수학 선생이었던가?"
  "ㅂ바로 그자야. 내가 상급반 2 학년 때 쫓겨난 것은 그자 때문이었어. 루시 에들러
사건으로 말야. 자네도 기억하고 있지?"
  "물론." 그레버는 대답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 그자에게 그 사건을 덮어달라고 얼마나 사정했는지 몰라! 그렇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어. 그잔 좀처럼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도덕상의 의무니, 뭐니 하면서
말야. 그 때문에 우리 영감한테 실컷 두들겨 맞았지." 알폰스는 여기서 말을 끊었다.
  "난 그자에게 톡톡히 보복을 했지. 강제수용소에 6개월 동안 집어넣었어. 그자가
거기서 풀려 나왔을 당시의 모습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군. 그잔 나를 가르치는 것도
싫어했지만 난 녀석을 철저히 재교육시켰어. 재미있지?"
  "그래."
  그는 그레버가 일어나는 걸 보았다.
  "벌써 가나?"
  "이만 가야겠어. 난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킬 수가 없어."
  빈딩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심각하게 말했다.
  "자네 사정은 잘 알겠네. 나도 정말 딱하게 생각해. 알겠지, 내 마음을?"
  "알겠어, 알폰스." 그레버는 그가 또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급히
서둘렀다.
  "이틀 후 다시 들러겠어."
  "내일 오후에 오게. 다섯 시 반경에."
  "좋아. 그 때까지 알 수 있을까?"
  "글쎄. 좌우간 힘써 보지. 어쨌든 한잔할 수 있어. 그건 그렇고 병원에는 가
보았나?"
  "가 봤어."
  빈딩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물론 이런 말은 할 것이 아니지만 공동묘지는?"
  "아니."
  "가 보게. 거기에는 아직도 보고되지 않은 게 많이 있어."
  "내일 가 보기로 하지."
  "그게 좋아, 에른스트." 빈딩그는 무엇인가 안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일은 좀더 오래 있도록 하게. 되도록이면 동창끼리 덩어리가 되어야 해.
정도의 지위에 있으면 얼마나 쓸쓸한지 잘 모를 거야. 다들 이것저것 부탁만 하지."
  "나도 그랬군."
  "넌 달라. 내가 말하는 건 다른 사람에 관한 거야."
  빈딩그는 아르마냑의 코르크 마개를 막더니 그 것을 그레버에게 내밀었다.
  "에른스트, 가지고 가게. 고급 술이야. 반드시 도움이 될 거야. 잠깐만 기다려!"
그는 문을 열었다.
  "크라이네르트, 종이 한 장! 아니, 봉투를!"
  그레버는 술병을 들었다.
  "그럴 필요없어, 알폰스."
  빈딩그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가지고 가게. 술은 얼마든지 있어." 그는 가정부가 가져온 봉투에 술병을 넣었다.
  "조심하게, 에른스트. 절대로 용기를 잃지 말게! 그러면 내일 또."
 
  그레버는 하겐가로 갔다. 그는 알폰스에게 다소 압도당하고 있었다. 돌격대장.
자기를 전면적으로 도와주고,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겠다고 말한 최초의 인간이
돌격대장이라니! 그는 술병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레버는 신문의 '사람찾기' 구실을 하고 있는 문 앞에 섰다. 그런데 그가 붙인
종이쪽지가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바람에 날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압정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압정까지 없어졌다면 사람이 떼어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혹시 무슨 흔적이라도 남기지 않았나
해서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옛 집으로 달려가
보았다. 둘 사이에 끼워 놓은 종이쪽지는 그대로 있었으므로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람이 손을 댄 흔적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마치 여우에게 홀린 것처럼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에서
종이쪽지 같은 것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없어졌던 쪽지였다. 그는 재빨리
펴 보았다. 여백에는 달필로 '그대 훔치지 마라.'고 씌어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두 개의 압정이 없어진 걸 상기했다. 그는 옆에
붙은 '어머니로부터'의 전언이 네 개의 압정으로 꽂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란
분이 자기의 소유물을 도로 가지고 가면서 일종의 훈계를 남긴 것이다.
  그는 납작한 돌을 두 개 집어다가 그 종이쪽지를 지면에 눌러 넣고 다시 집터로
갔다.
  그는 폐허 앞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녹색의 안락의자가 없어지고 대신에
신문이 몇 장 벽돌더미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는 신문을 끄집어냈다. 신문은 온갖
승리와 유명한 이름으로 메꾸어진 오래된 것으로서 군데군데 찢어지고 빛이 바래져
있었다. 그는 신문을 버리고 계속 더듬어갔다. 그러자 책이 한 권 뒹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옛 교과서였다.
  그것은 교리문답서로서 숱한 문답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옆으로 밀고
다시 구석구석 뒤졌지만 더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집터에 앉아 있었다. 저녁 바람이 불어대면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시고 현명하시다.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모두가
옳고.'
  그레버는 빈딩그가 준 술병을 꺼내 한 모금 마신 다음에 거리로 나왔다. 문답서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거리는 어두어졌지만 어디서고 불을 켜지 않았다. 그레버는 칼스푸라츠를 걷고
있었다. 방공 지하실이 있는 근처에서 누군가와 충돌할 뻔했다. 반대 방향으로부터
급히 걸어오고 있던 청년 장교였다.
  "조심하란 말야!" 젊은 장교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레버는 그를 바라보았다.
  "잘 알았어, 루드비히. 다음엔 꼭 조심하지."
  소위는 눈을 크게 뜨더니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에른스트, 너였군!"
  루드비히 폴만이었다.
  "웬일이야. 휴가인가?"
  "그렇다. ?"
  "끝나버렸어. 지금 원대로 돌아가는 중이야. 그래서 이렇게 급히 서둘렀지."
  "재미있었나?"
  "글쎄. 다음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야겠어. 집에는 절대로 가지
않겠어!"
  "어째서?"
  "에른스트, 가족들은 재미없는 법이야. 내 휴가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어. 돌아와서
며칠이나 되지?"
  "나흘."
  "두고 보게. 차차 알게 될 테니까!"
  폴만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고 했다. 바람이 성냥불을 껐다. 그레버는 그에게
라이터를 켜 주었다. 순간 라이터의 불꽃이 폴만의 깡마른 얼굴을 비췄다.
  "모두들 나를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생각하고 있어." 그는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단 하룻밤이라도 집에 들어가지 않으면 책망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단 말야.
그저 집 안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어머니는 나를 아직
철부지 소년으로 알고 있어. 어머닌 휴가기간의 처음 절반을 눈물로 보내더니
나머지도 역시 내가 다시 떠나야 한다니까 울면서 보냈어. 그러니 어떻게 휴가를 즐길
수 있겠나?"
  "네 아버지는? 아버지는 제1차 대전 때 군인이 아니셨던가?"
  "그런 건 이미 잊고 있었어. 아버지에게 있어서 난 영웅이지. 아버진 내가 가슴에
달고 있는 깡통조각이 자랑스러워서 나와 함께 있는 걸 남에게 보여주려고 했어.
불쌍한 노인이지. 에른스트, 너도 부모님에게 잡히지 않도록 조심해."
  "알았어. 조심하지."
  "물론 그게 지나친 애정 때문이란 걸 알지만 그게 문제란 말야. 싫은 소리를 할
수도 없고 마치 죄인 같은 생각이 들거든."
  폴만은 때마침 옆으로 지나가던 아가씨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아가씨의 노란색 양말만 눈에 띄었다.
  "덕분에 모처럼의 휴가를 영 잡쳐버렸네! 겨우 부모님을 설득시켜서 정류장까지는
따라오지 못하게 했지. 하지만 숨어 있다가 나타날지도 모르지." 그는 웃었다.
  "처음부터 잘해야 돼. 적어도 밤엔 집을 빠져나가야 해. 무슨 구실이든지
만들어야지! 강습이나 야간 근무가 있다고 말야. 안 그러면 너도 나처럼 엉망으로
휴가를 보내게 될 거야."
  "난 다를 거야."
  폴만은 그레버의 손을 잡았다.
  "제발 그래야지. 그럼, 넌 나보다 운이 좋은 셈이지. 학교에 가 보았나?"
  "아니."
  "그만두는 것이 좋아. 난 갔었지만 실망만 했어. 단 하나뿐인 훌륭한 교사가
파면당하고 있었어. 폴만 선생님 말야. 종교를 가르치던 기억하고 있겠지?"
  "물론 만나 볼 생각이야."
  "조심해.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어. 무턱대고 아무 데나 찾아가는 게 아냐. 에른스트,
우리의 짧지만 영광스러운 생을 위해서. 안 그래?"
  "그렇지, 루드비히. 그저 공밥이나 얻어먹고 외국여행을 하고, 마지막엔 국(나라
)장이다."
  "언제 또 만날지 모르겠군." 폴만은 웃으면서 사라져갔다.
 
  그레버는 목적도 없이 걷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시내는
무덤과 같은 암흑이 지배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찾아 헤맬 수는 없고, 지루한 밤이
두려울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병영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을 찾아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들이 당황하는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찾아가면 모두가 곤혹스러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타다 남은 가옥들의 지붕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가?
후방 있는 섬? 안전. 은신처. 위안.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희망의
섬은 죽음 속에 가라앉고 도처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머리 속에서도,
마음속에서도.
  그는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안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불빛 없는 거리를 헤매는
것이나 술에 취하는 것보다 극장에라도 앉아 있는 편이 한결 좋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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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공동묘지에는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그레버는 포탄이 명중했다는 것을 알았다.
깨진 십자가와 묘비가 길바닥이나 주위의 무덤 위에 흩어져 있었다. 나무가 거꾸로
뒤집어져서 뿌리가 가지처럼 보이고 나뭇가지는 땅바닥을 기는 녹색의 뿌리가 돼
있었다. 마치 해조를 그대로 붙인 채 바다 속에서 끌어올린 이상한 식물과도 같았다.
무덤 안의 뼈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한데 쌓여 있었다.
  교회 옆에 움막이 세워져 있었는데 감독 한 사람과 묘지기 두 명이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감독은 그레버의 이야기를 듣자 손을 흔들면서 거절했다.
  "틈이 없습니다. 점심 전에 열두 구의 시체를 묻어야 합니다. 당신의 부모가 여기
묻혀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소? 묘비도 없고 이름도 없는 무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시체를 대량 생산하고 있는 셈이죠."
  "사망자 명단이 없습니까?"
  "명단?" 감독은 묘지기들을 돌아보았다.
  "이봐, 이분께서는 명단을 보시겠데. 들었나? 당신은 낮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뒹굴고 있는지 알고 있소? 자그만치 이백입니다. 며칠 전에 공습이 있었을 때는
오백이었소. 그리고 지난번 공습에는 삼백이고. 불과 사흘 동안이오. 언제 또 공습이
있을지 모를 지경이오."
  그레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담배갑을 꺼내서 탁자 위에 놓았다.
감독과 묘지기들이 그것을 살짝 보았다. 그레버는 잠시 동안 기다리고 있다가
이번에는 잎담배를 세 개 나란히 놓았다. 그것은 그가 부친에게 드리기 위해서
소련에서 특별히 가지고 온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감독이 말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겠습니다. 이름을 적어 주십시오. 한 사람이 묘지
사무소에 가서 물어보지요. 그 동안에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체들을 조사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쪽 교회 옆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레버는 교회로 걸어갔다. 시신 중에는 이름이나 관, 꽃다발까지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개 흰 광목에 가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이름을 읽어보다가 이름이 없는
것은 광목을 일일이 들춰보았다. 그런 다음에 임시로 마련된 천막에 안치되어 있는
시체를 향해서 걸어갔다.
  그중에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은 것도 있었지만 대개의 시체들은
발견된 상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팔은 몸에 바짝 붙여놓고 다리는 곧게 뻗도록 하여
되도록 자리를 조금씩 차지하도록 했다. 침묵의 행렬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창백한 얼굴로 죽은 가족들을 찾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 행렬 속에 가담했다. 그의 앞에서 가고 있던 여자가 갑자기 땅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그녀를 지나쳐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행렬이 끝났을 때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레버는 되돌아왔다.
  "교회에 들어가 보셨습니까?" 감독이 물었다.
  "아니오."
  "수족이 절단된 시체들이 거기 있습니다." 감독은 그레버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지만, 당신은 군인이 아닙니까?"
  그레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시체들은 너무도 많이 보았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시체의 대부분이 여자와 아이들이라는
사실조차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는 시체라면 넌덜머리 나게 보아왔다.
소련인, 네델란드인, 프랑스인 수족이 없는 시체들도 지금 여기서 목격한
시체와 마찬가지로 두 번 다시 바라볼 수 없는 끔찍한 것이었다. 소련의 추위에
그대로 동결된 시체, 부풀어오른 머리, 찢어진 입술, 게다가 오십 명이 한 덩어리가
되어 교수형을 받은 것들이 지금 본 것보다 훨씬 끔찍했던 것이다.
  "묘지 사무소에는 기록이 없었소." 감독은 말했다.
  "시에는 시체 안치소가 두 개나 있습니다. 가 보셨습니다?"
  "."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집단으로 매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레버는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그런 것은 재난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했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기술도 따라갈 수 없고 또한 종교상의 규정이 있지요."
  그는 묵묵히 있다가 그레버에게 손을 흔들고 움막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충실하고
열성있는 주검의 관리인. 
  그레버는 몇 분 동안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장례의 행렬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사는 무덤에 기도를 하고 친족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빈딩그의 하얀 집은 아름다운 정원이 딸려 있었다. 잔디에는 새들의 연못이 있어서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 앞에 황 수선화와 튤립이 피고 있었으며 나무들
사이에는 대리석으로 된 소녀상이 빛나고 있었다.
  가정부가 문을 열었다. 백발의 여인으로서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레버씨죠?"
  "그렇습니다.
  "대장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당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셨습니다. 당신에게 메모를
남기셨습니다."
  그레버는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 위에는 잘 포장된 병이 놓였고 
그 옆에 편지가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자세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너의 부모님이 사망했다거나
부상당했다는 보고는 없다. 아마도 지방으로 이동하셨을 거다. 내일 다시 들려주게.
보드카는 자네가 멀리 소련에서 돌아왔다는 것을 축하하는 뜻이니 오늘밤 실컷
마셔주기를 바란다.'
  그는 술병과 편지를 주머니에 넣었다. 크라이네르트 부인이 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님은 안부도 전하셨습니다."
  "내일 다시 들러겠다고 전해주십시오. 보드카도 고맙다구요."
  크라이네르트 부인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대장께서는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친절하신 분이니까."
  그레버는 정원으로 나왔다. 친절하신 분. 알폰스는 자기가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은
수학강사 부르마이스터에게도 친절했단 말인가? 아마도 모든 인간은 어떤 사람한테는
친절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반대이겠지.
  그는 술병과 편지를 만져보았다. 축하하기 위하여. 도대체 무엇을 축하한단 말인가?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실 것이라는 희망? 그런데 누구와 함께 축하하라는 것인가?
병영의 48 호실 사람들과? 그는 보드카를 엘리자베스 크루제에게 가져가기로 했다.
그녀라면 자기와 똑같은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나에겐 아직 아르마냑이 남아있다.
 
  여인이 문을 열었다.
  "크루제양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레버는 그대로 여자 옆을 지나치려고 했다.
  여자는 문을 막고 서서 꼼짝하지 않았다.
  "쿠루제는 지금 집에 없습니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잘 알고 있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녀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던가요?"
  "전혀. 몇 시에 돌아옵니까?"
  "7."
  그레버는 엘리자베스가 외출했을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보드카를 놓고 갈까
망설였지만 이 여자 스파이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그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밖으로 나와 시계를 보니 6시 조금 전이었다. 지루한 밤이 다시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휴가중이란 걸 잊지 마라.' 로이타는 말했었지. 물론 잊지는 않았지. 그러나
잊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는 칼스푸라츠 광장의 벤치에 앉았다. 엄폐된 방공호가 커다란 두꺼비처럼
움츠리고 있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엘리자베스와 다시 만나리라고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집에 있었다면 아마도 보드카를 그녀에게 주고 그대로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한 지금은 7시가 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직접 문을 열었다.
  "당신이라고는."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난 또 당신의 성문을 지키고 있는 스파이 할멈인줄 알았지."
  "주인은 지금 집에 없어요. 국가 사회주의 부인단의 회의에 참석했어요."
  "그렇지.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이지!"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여자가 없으면 이 안의 분위기도 다르군."
  "지금은 입구에 불이 켜져 있어서 그렇게 보이고 있어요. 전 그 여자가 나가자마자
곧 불을 켜놓는 걸요."
  "그 할멈이 있을 때는?"
  "잔소리가 심해요. 그것이 바로 애국심이라는 것이겠죠. 모두가 암흑 속에 있지요."
  "맞았어. 우리를 그런 곳에 가둬놓고 싶은 거야." 그는 술병을 꺼냈다.
  "보드카를 가지고 왔어. 어느 돌격대장의 술 창고로부터 가지고 온 거야. 옛 동창의
선물이지."
  "당신에게 그런 동창이 있었어요?"
  "그래. 당신이 원하지도 않는 사람과 한 집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말야."
  그녀는 웃으면서 술병을 받았다.
  "병따개가 어디 있는지 찾아보아야지."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검은 스웨터에 역시 검은 타이트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 없군요." 그녀는 서랍을 닫으면서 말했다.
  그레버는 병을 들고 밑바닥을 탁 쳤다. 마개가 빠졌다.
  "군대에서는 항상 이렇게 하지. 컵이 있을까?"
  "내 방에 있어요."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또 외로이 하룻밤을 지내야 했는데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게 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벽장에서 컵 두 개를 꺼냈다.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은
방의 분위기가 다르게 보였다. 그녀는 그에게로 돌아섰다.
  "우린 얼마 만에 다시 만난 거죠?"
  "백 년은 되었을 거야. 난 어렸었고 전쟁 같은 것도 없었지."
  "그런데 지금은?"
  "어린 시절을 훌쩍 뛰어 넘어 나이만 먹었어. 신념도 상실했고 때때로 슬픈 생각이
들어."
  "그게 정말이세요?"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도대체 진실은 어디에 있지? 당신은 알고 있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해야 할까요?"
  "그렇진 않겠지. 그건 왜?"
  "모르겠어요. 저마다 자기가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들도 믿게 된다면
전쟁은 이미 끝났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레버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관용이 결여된 셈이군."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버는 그녀의 컵에 보드카를 따랐다.
  "한 잔 더 안 하겠어?"
  엘리자베스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 들겠어요."
  그는 보드카를 다시 따르고 병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오세요. 관용의 모범을 보여드리겠어요."
  그녀는 앞장을 서서 입구를 지나 문을 열어 보였다.
  "스파이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문도 안 잠그고 나갔어요. 그 여자의 방을 구경해
보세요. 그녀는 내가 집을 비우면 항상 내 방을 뒤지니까 신뢰를 배반한 건 아니죠."
  방은 다른 가정과 다름이 없었지만 한쪽 벽에 꽃다발로 장식된 히틀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 밑의 테이블 위에는 검은 가죽 표지의 '나의 투쟁'이 놓여 있었다.
책의 양쪽에는 은촛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 주위에 총통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게다가
명예의 단검과 당원 배지. 그것으로 진열품들은 무게를 더 했다.
  "그녀는 여기서 고발장을 쓰겠군."
  "아니에요. 저기 있는 아버지의 책상에서 쓰고 있어요." 그레버는 그 책상을 보았다.
  "그녀가 박사님을 고발했나?"
  "그것은 잘 모르겠어요. 그 전부터 방 하나를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끌려가신 후, 하나 더 사용하게 되었어요."
  그레버는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방 하나를 더 쓰기 위해서 고발했는지도 모르겠군."
  "모르겠어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럴 수도 얼마든지 있어요."
  "그건 그래. 그녀도 광신도 중의 하나 같은데."
  "에른스트."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광신은 개인적인 이익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세요?"
  "아니지. 실제로는 일치하는 때가 많아. 이상하게도 인간은 항상 그런 사실을 잊고
있어. 아마도 사나운 독사는 자기 아이나 남편 같이 자신에게 귀중한 모든 걸
사랑하고 있었겠지. 그런데 도대체 그녀는 왜 당신 아버지를 무턱대고 고발하였을까?"
  "아버진 선량한 분이지만 오랫동안 감시당하고 있었어요. 자기 집이라 해도
하루종일 당의 연설을 들으면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인간이 나타나는 법이에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지?"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움츠렸다.
  "아버진 독일의 승리를 믿지 않으셨어요."
  "지금도 그것을 안 믿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어."
  "당신도?"
  "물론이지. , 저쪽으로 가지! 우물쭈물하다가 그 스파이한테 발각될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발각될 염려는 없어요. 복도 문을 잠궈 놓았거든요."
  그녀는 문으로 가서 빗장을 벗겼다.
  "여긴 공동묘지 같군. , 저리로 가서 한잔 더 하지."
  그는 보드카를 가득 따랐다.
  "어째서 우리가 무척 나이가 들어버린 것 같은가를 알겠어. 너무 지저분한 것만
보았기 때문이야. 나이가 많으면 당연히 현명해야 할 사람들이 긁어모은 오물 말야."
  "전 별로 나이가 든 것 같진 않아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기뻐할 일이로군."
  "전 감금당한 것 같아요. 나이가 많다는 것보다 더욱 나쁜 일이죠."
  그레버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당신도 고발할 지 몰라. 이 아파트 전체를 독점할 생각인지도 모르지. 빨리
집을 옮기도록 해. 지금 세상이 어떻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
  ", 잘 알고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말했다.
  "내가 여길 떠나지 않는 한 아버진 언제라도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내가
만일 이곳을 떠난다면 아버질 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죠. 아시겠어요?"
  "글쎄 어쩔 수가 없군."
  "그래요."
  그녀는 술 한 잔을 단숨에 마셨다.
  "왔어!"
  두 사람은 입구에서 들려오는 발자국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파이 부인이 한 바탕 욕설을
퍼붓고 나서 문을 쾅 닫았다.
  "불을 그대로 켜놓고 있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살며시 속삭였다.
  "우리 밖으로 나가요. 때때로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어요. 밖에 나가서 다른
얘기를 해요."
 
  거리는 적막했다. 그들은 시내 쪽으로 들어섰다. 아파트 앞을 지나갈 때 창문마다
검은 색 커튼들이 죽음의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보여 마치 시내 전체가 초상을 당한 것 같았다.
  "모두 어디 있는 것일까? 오늘은 다른 날보다 조용하지 않는가 말야."
  "이미 이틀째나 공습이 없었지요. 그래서 지금은 안심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거에요. 사람들이 나오는 건 공습이 있고 난 후의 일이죠."
  "그것도 이미 습관화되었군."
  "일선에서도 그렇죠?"
  "그렇지."
  그들은 파괴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실같은 구름이 하늘 한가운데로 흐르다가 빛을
가리고 있었다. 갑자기 벽돌더미 속에서 새까만 그림자가 나왔다가는 다시 들어갔다.
고요를 깨고 어디에선가 접시 부딪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고마운 일이로군요! 누군가가 먹고 있어요! 아니면 커피를 마시고 있거나. 어쨌든
살아 있어."
  잠시 후, 그레버는 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자베스, 집에 앉아 있는 것보다 더 쓸쓸한 생각이 드는데. 보드카를 가지고
올걸. 우리 술을 마시자고. 이 근처에 마실만한 데가 없을까?"
  "난 술집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그곳은 창을 엄폐해서 마치 감금된 것 같아요."
  "그럼 막사로 가지. 남아있는 보드카를 밖에서 마시면 돼."
  "좋아요."
  고요를 깨고 마차가 그들을 향해서 달려 왔다. 마부는 고삐를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말이 자기 몸을 스치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게 벽돌더미 위로 올라갔다.
말이 그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그들은 병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기다려, 엘리자베스. 술을 갖고 올게."
  그레버는 연병장을 가로질러 48 호실로 갔다. 로이타는 노름꾼들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베차는 어디 갔지?"
  로이타는 책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