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예술/소설&드라마

레마르크 作 - 사랑할때와 죽을 때 - 04

淸山에 2011. 9. 3. 16:32

 

  

** 

 

 
 
  "스스로 잘 생각해 보라구."
  쾰른 출신의 병사는 휴가병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송두리째 파괴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전선으로 되돌아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 저음이 말했다.
  "목적지가 차단되면 흔히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레버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건 추운 날씨 탓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한 번 유령과 같은 것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선로를 보았다.
그것은 가정과 평화를 향해 남겨진 유일한 길이었다.
  "특별휴가라고?" 쾰른 출신의 사내가 허탈하게 웃었다.
  "특별휴가라는 게 이런 건가?"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었다. 그에게는 죄가 없었다. 모두들 자기들이 해당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 안전하지는 않다. 하나, , 그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불행은 전염된다.
  기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6
 
  이튿날, 새벽의 안개 속에서 풍경이 나타났다. 그레버는 창가로 옮겨 앉아 유리창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는 미개간지와 아직 눈이 남아 있는 밭고랑에 버려진
보리이삭을 보았다. 어디고 파괴당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적한 평원. 포탄 군막도
지하호도 없다.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이었다.
  드디어 마을이 나타났다. 십자가가 빛나고 있는 교회, 지붕의 풍향계가 천천히 돌고
있는 학교. 선술집 그 앞에 마을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다.
  집집마다 활짝 열어제친 창문, 빗자루를 든 하녀, 파괴되지 않은 창을 비추는
아침햇살 학교로 가는 어린이들. 얼마만에 어린이들을 보는 것인가! 그레버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것이야말로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있었다.
  "무척 생소하게 보이는데." 함께 풍경을 바라보던 하사관이 말했다.
  "그렇군."
  조금씩 안개가 사라져갔다. 지평선으로부터 숲이 다가오고 길다란 길이 나타났다.
전기줄이 기차와 함께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한없이
이어지고 그 위로 새들이 날아다녔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전방의 굉음은 먼 후방에서
잦아들고 있었다. 비행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레버는 오래도록 여행을 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전우들의 얼굴조차 희미해졌다.
  "오늘은 무슨 요일이지?" 그는 물었다.
  "목요일이야."
  "그래. 목요일."
  "커피 좀 안 주려나?"
  "주겠지. 여기는 옛날 그대로이니까."
  배낭에서 방을 꺼내서 씹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레버는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에다가 빵을 적셔 먹고 싶었다. 집에서의 아침식사가 떠올랐다. 어머니는 청백의
줄무늬가 새겨진 식탁보를 씌우고 있었다. 꿀과 롤빵과 뜨거운 밀크를 탄 커피.
카나리아가 노래하고, 여름에는 창가의 장미색 제라늄에 햇살이 가득했다. 그런
아침이면 녹색이 짙은 잎파리를 손과 손에 문지르고 강한 이국적 냄새를 맡으면서
외국의 풍물을 공상하곤 했다. 그로부터 다른 나라는 지리도록 구경했지만, 그 때
꿈꾸던 거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다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들일하는 사람들이 허리를 펴고
기차를 보고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들도 보였다. 하사관은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다. 마주 흔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싫으면 그만둬. 촌놈 같으니라구." 하사관이 실망했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지 모르겠군." 하사관은 흥분해 있었다.
  "저들은 포로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일 거야."
  "그 속에 여자도 끼여 있었어. 손을 흔들 줄도 모른단 말인가?"
  "부상병에게 누가 손을 흔들겠나."
  대머리가 말했다.
  "멍청한 년들." 하사관은 쾅 하고 문을 닫았다.
  "쾰른 같으면 이렇진 않아." 쾰른 출신이 말했다.
 
  기차는 계속해서 달렸다. 도중에 굴 속에서 두 시간이나 서 버렸다. 차내에는
조명등이 없어서 그대로 암흑이었다. 그들은 어둠에 차차 익숙해졌으나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담뱃불이 빨갛게 빛을 내며 올라갔다 내려갔다 했다.
  "이건 기계가 고장난 거야." 하사관이 입을 열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비행기의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누구 로텐부르크에서 살아 봤나?" 쾰른에서 온 남자였다.
  "오래된 도시지." 그레버가 말했다.
  "가본 적이 있나?"
  "없어. ?"
  "나도. 거기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넌 차라리 베를린으로 가는 것이 좋았을걸." 생쥐였다.
  "휴가는 단 한번이니까. 베를린에는 여러 가지 일이 있어."
  "그 곳까지 갈 여비도 없어. 잠은 호텔에서 자나? 처자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드디어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가는군." 저음이 말했다.
  "여기서 또 생매장되는 줄 알았지."
  한 줄기 회색빛이 암흑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차츰 은빛으로 변하다가 서서히
평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바깥의 경치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창가로 몰려들었다.
  어떤 정류장에서 저음이 내렸다. 한 시간 후, 그레버에게 낯익은 모습들이 나타났다.
이미 황혼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레버는 배낭을 짊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도시가 보이기만을 기다렸다.
 
  기차가 멎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역 이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또 만나세." 쾰른의 남자가 말했다.
  "더 가야 해. 정거장은 시내 한 가운데에 있다."
  "정거장이 바뀔 수도 있어. 물어 보게."
  그레버는 문을 열었다, 사람들이 승차하고 있었다.
  "여기가 베르덴입니다?"
  한 사람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 급히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레버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역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르덴! 베르덴 손님 내리십시오!"
  그는 사람들을 밀어붙이면서 역장에게 갔다.
  "이 기차는 정거장까지 가지 않습니까?"
   역장은 지쳤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베르덴으로 가는 겁니까?
  "그렇소."
  "승강장에서 오른쪽으로 가서 버스를 타시오."
  그레버는 지금 걷고 있는 승강장을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승강장은 생목재로
새롭게 다시 세워져 있었다.
  "베르덴행이오?" 그는 운전수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기차는 시내까지 안 들어가오?"
  "."
  "어째서 안 갑니까?"
  "거기까지만 갈 수 있습니다."
  그레버는 운전수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운전수에게 물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말해 줄 리가 없다. 그는 버스에 올랐다. 구석에 빈자리가 있었다.
밖은 어두워져서 선로 같은 것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으로 보일 뿐이었다. 선로는
직각으로 꺾여 시내를 향하고 있었다. 기차는 이미 선로를 바꾸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질이 나쁜 휘발유를 쓰고 있는 고물차였다. 메르지데스 고급 차 몇 대가
버스를 추월했다. 앞에 가는 차에는 나치스 장교들이 타고 다른 두 대에는 친위대의
장교들이 앉아 있었다. 버스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메르지데스가 옆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조용한 가운데에 어린아이가 통로에서 킬킬거리고 웃거나
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레버는 처음에 나타난 거리를 재빨리 살펴보다가 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거리는 파괴되지 않았던 것이다. 버스는 털털거리며 달리다가 수 분 후에 급정거했다.
  "모두 내려주십시오."
  "여기가 어딥니까?" 그레버는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물었다.
  "브람스가입니다."
 
더 안 갑니까?"
  "그렇소."
  그레버는 그 남자의 뒤를 따라 내렸다.
  "난 특별휴가로 돌아왔습니다."
  "2 년만에 오는 거지요." 그는 아무에게라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그를 돌아보았다.
  "댁은 어디십니까?"
  "하겐가 18번지입니다."
  "그러면 구시가입니까?"
  "변두리입니다. 루이제가의 모퉁이에 있지요. 거기서 카타리네 교회가 보입니다."
  남자는 어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다면, 길은 알겠군요."
  ". 그것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조심해 가시오."
  "감사합니다."
  그레버는 브람스가를 걷고 있었다. 집들은 옛날 그대로였다. 창문을 보았지만
모두가 어둡고 침침했다. 공습에 대비하고 있었으므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였다.
거리에는 밝게 불이 켜져 있을 거라고 짐작했었다. 급히 거리를 지나쳤다. 빵집이
있었으나 빵은 없고, 쇼윈도에는 유리꽃병에 종이로 된 장미꽃이 두 송이 꽂혀 있었다.
그 다음에는 역시 아무것도 없는 식료품 가게가 나타났다.
  바로 다음이 마구상이었다. 그는 이 가게를 기억하고 있었다. 전에는 박제한 말
한필이 언제나 쇼윈도에 서 있었다. 살며시 안을 들여다보았다. 말은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말 앞에는 옛날의 모습 그대로 박제사냥개가 사납게 짖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는 끔직한 세월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은 가게 앞에 잠시 서
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갑자기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입구 옆에 서 있는 낯선 사나이에게 정다운 인사도 건넸다.
  군화소리가 터벅터벅 울렸다. 이런 신발은 빨리 벗어버려야지. 더운물에 목욕을
하고 깨끗한 셔츠로 갈아입어야지.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문득 무엇인지 타는 냄새가
났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굴뚝에서 나오거나 모닥불을 피우는 연기가 아니라 화재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들은 파괴되지 않았고 지붕에 불이 붙지도 않았다. 지붕
위에는 푸르른 하늘만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거리는 화단이 있는 작은 광장에서 끝나고 있었다. 연기 냄새가 더욱 강하게
풍겨오고 있었다. 그레버는 코를 벌름거렸다. 어디서부터 나고 있는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이제 냄새는 도처에서 나고 있었다. 마치 잿가루를 하늘에서 뿌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다음 가도에서야 비로소 파괴당한 집을 발견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지난 몇
해 동안 파괴된 건물만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그는 마치
생전 처음으로 파괴된 현장을 보는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단 한 채 뿐이었다. 다른 집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그곳에서도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이 집은 옛날에 파괴된 것이었다.
  그는 거리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부레메르가였다. 하겐가는 아직도 멀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거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얼마 후, 폐허가 된 거리가 나오고 파괴된 집도
여러 채 보였다. 다만 앙상한 벽만이 남아 바퀴가 지나간 것처럼 우툴두툴한 모양을
공중을 향해 드러내고 있었다. 그레버는 그 옆을 지나갔다. 어둠 속에 검은
그림자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여보세요!" 그는 소리를 질렀다.
  "거기 누가 있습니까?"
  그림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의 숨결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았다. 그는 그것이 다름아니라 바로 자기의 숨소리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달리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미칠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동공장이 있었던 걸 떠올렸다. 그것이 폭격의 목표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습기가 차고 있는 파괴물들을 넘으면서 무턱대고 거리를 달렸다.
  그레버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걸었던 거리는 일변하여 방향을 정할 수가 없었다. 그의 옆으로
지나가던 여인에게 길을 묻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뭐라고요?" 여자는 섬찟하며 두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저기, 저쪽 모퉁이를 돌아서."
  여인이 가리키는 쪽으로 돌아섰다. 새까맣게 그슬린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쳐
있었다.
  그레버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해 보려고 애썼다. 여기서 카다리네 교회의
탑이 보일 것이다 교회도 파괴가 됐는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이제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한쪽에서 사람들이 발굴작업을 하고 있었다. 소방대원들이
뛰어다니고 하늘로 치솟는 연기 사이로 물줄기가 튀었다. 동공장 위가 빨갛게 달아
오르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하겐가에 와 있었던 것이다.
      7
 
  굽어진 가로등에 거리의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아래의 포탄 구멍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구덩이에는 무너진 벽과 철제 침대가 처박혀 있었다. 그는
그곳을 돌아서 계속 달렸다. 눈앞에 파괴되지 않은 집이 한 채 서 있는 것이 보였다.
'18번지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저 집은 18번지가 틀림없다. 신이시여,
제발 18번지이기를 !
  그러나 집의 정면만 온전할 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부 허물어져 있었다. 피아노
한 대가 대들보 사이에 끼여서, 뚜껑은 떨어져 나가고 건반은 상어의 거대한
아가리처럼 빛나고 있었다. 마치 선사시대의 전설적인 동물이 격노해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면의 현관은 활짝 열려져 있었다. 그레버는 그곳으로 뛰어갔다.
  "조심해!" 누군가가 소리를 질렀다.
  "조심하라고. 어디로 가는 거야?"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살았던 집이 어딘지, 아무 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그 집을 눈앞에 그려보곤 했었다. , 현관, 층계
오늘밤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조심해!" 처음에 주의를 줬던 사람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벽돌이 떨어진다!"
  그레버는 안을 들여다보았다. 층계의 끝이 보였다. 그 집이 몇 번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공습경계 감시원이 왔다.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 거야?"
  "여기가 18번지입니까?"
  "18번지?"
  감시원은 철모를 똑바로 썼다.
  "18번지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말이겠지?"
  "있기는 했습니까?"
  "물론이지. 넌 눈이 없나?"
  "여기가 18번지 아닙니까?"
  "18번지는 이미 없어."
  그레버는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
  "잠깐만요."
  그레버는 얼이 빠져서 말했다.
  "난 농담할 시간이 없습니다. 18번지는 어디입니까?"
  감시원은 그를 훑어보았다.
  ". 놓지 않으면 이 호각으로 경찰관을 부를 테다. 이곳엔 들어오지 못해. 여기는
정리구역이다. 우물쭈물하면 체포당해."
  "체포라고요? , 일선에서 돌아온 사람이오."
  "대단하시군! 그러면 여긴 전선이 아닌가?"
  그레버는 잡고 있던 옷을 놓았다.
  " 18번지에 살고 있었소. 내 부모도 여기 살았소!"
  "이 거리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어!"
  "아무도?"
  "난 잘 알아. 나도 전에 여기 살았으니까." 사내는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살고 있었어! 살고 있었지!" "우린 2주일 동안에 여섯 번이나 공습을 당했어. 일선
군인 아저씨! 그렇지만 자네들 악당은? 보면 알겠지! 나의 아내는? 저기다."
  그는 바로 보이는 집을 가리켰다.
  "누가 저것을 파 줄 것인가? 아무도 아니야. 죽어 버렸어! 구호반은 지금 파낸다
해도 소용 없다고 하더군. 폭파된 기록들, 사무국이나 정부기관에서 구제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거야!"
  그는 그레버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군인 아저씨, 하나 가르쳐 줄까? 자기에게 닥치기 전까진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무도 아는 체를 안 해."
  "훈장을 탄 용감한 군인 아저씨! 18번지는 저기야. 지금 발굴작업을 하는 곳이야."
  그레버는 뒤로 물러났다. 발굴작업을 하고 있는 곳 그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잠을 깨면 소련의 이름 없는 지하호 속에 있을 것이다.
여긴 소련이다. 독일 땅이 아니다. 조국은 건재하다.
  고함 소리와 삽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수도관에서
터진 물이 엄폐된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작업 지시를 내리고 있는 남자에게로
뛰어갔다.
  "여기가 18번지입니까?"
  "뭐라고? 저리가! 넌 무얼 찾고 있는 거야?"
  "양친을 찾고 있습니다. 내 부모는 어디 있습니까?"
  "!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린 하느님이 아냐."
  "내 부모는 살았습니까?"
  "다른 데로 가보라고. 우린 파묻힌 사람을 파내고 있는 중이야."
  "여기 사람이 묻혀 있습니까?"
  "그래. 지금 장난하고 있는 줄 아나?"
  그는 동료에게로 가 버렸다.
  "중지! 조용히. 위르만 두들겨 봐!"
  스웨터를 입은 청년, 흰 칼라가 새까만 노인, 군복의 바지만 입은 사내 등이
일어났다. 그들은 먼지와 땀으로 얼굴이 번들거렸다. 한 사람이 망치를 들고 벽돌더미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밖으로 삐죽 나온 파이프를 두드려보았다.
  "조용히!"
  감독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망치를 든 사내가 파이프에 귀를 바짝 댔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칠식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는
파이프를 다시 한번 두들겨 보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응답을 하고 있지만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어요. 공기가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
  감독이 명령을 내렸다.
  "저쪽으로! 오른쪽으로 말이야. 파이프를 좀더 두들겨서 공기가 들어가게 해."
  그레버는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여긴 방공 지하실입니까?"
  "물론이지. 방공 지하실이니까 밑에서 사람 소리가 나지."
  "그럼, 이집 사람들입니까? 공습경계 감시원은 여긴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그 녀석은 정신이 돌았어. 밑에서 응답이 오는 것으로 충분해. 사람이 살고 있는지
우리가 알 바가 아냐."
  그레버는 배낭을 내렸다.
  "저도 발굴작업을 돕겠습니다. 부모님이."
  "그런 건 상관없어. 위르만! 교대자가 생겼다. 도끼가 남은 게 있나?"
 
  두 다리를 다친 남자가 최초로 땅 속에서 나왔다. 철주가 그를 누르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살아 있었다. 그레버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낯선 얼굴이었다.
작업반원이 쇠톱으로 철주를 끊고 들것을 갖고 왔다. 그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허공만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지면서 동공이 넓어졌다.
  입구를 넓혔다. 빈대떡처럼 납작해진 시체 두 구가 발견되었다. 그레버는 허리를
굽히고 시체의 얼굴을 재빨리 들여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의 가족들은
금발이었다. 작업반원들은 시체를 끌어냈다.
  구름 속에서 달이 천천히 기어 나오고 있었다.
  "언제 공습이 있었습니까?" 그레버는 교대하면서 물었다.
  "어젯밤이야."
  그레버는 손을 펴 보았다. 누구의 피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 검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맨손으로 기왓장이나 유리조각을 긁어내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작업을 하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폭탄의 증기로부터 발산된 산이 눈을
자극했다. 모두들 소매로 닦아 냈지만 눈물은 자꾸만 고였다.
  "이봐, 군인 아저씨!"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건, 당신 배낭인가?"
  눈시울이 붉어진 사내가 물었다.
  "어디 있습니까?"
  "저기. 누가 달아난다." 그레버는 머뭇거렸다.
  "저놈이 훔쳤다. 내가 교대해 줄 테니까 빨리 쫓아가 봐."
  그레버는 손가락이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한 사람이
벽돌더미 위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배낭을 훔친 사람은 목에 때가 낀 노인이었다. 그레버가 허리띠를 밟아 버리자
노인은 배낭을 놓고, 두 손을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즉시 순찰차가 달려왔다. 두 명의 친위대가 차에서 내렸다.
  "왜 그래?"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레버는 대답하면서 배낭을 맸다. 비명을 지르던 노인도
침묵을 지켰다.
  "여기서 뭘하고 있었지?" 중년의 소위가 물었다.
  "증명서."
  "저기서 발굴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부모님께서 살고 계시기 때문에."
  "증명서!" 소위가 더욱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레버는 입술을 깨물며 두 사람을 응시했다. 도대체 친위대가 사병을 조사할 수
있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장을 하고 있다. 그는 휴가증을
넘겨주었다. 그 소위는 회중전등을 비춰가며 그것을 읽었다. 그레버는 온몸의 근육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는 불이 꺼지고 그의 증명서를 돌려주었다.
  "자넨 하겐가 18번지에 거주했었군?"
  "그렇습니다." 그레버는 미칠 것만 같았다.
  "저기입니다. 난 지금 발굴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찾고 있습니다."
  "어디서?"
  "저깁니다. 지금 파내고 있습니다. 안 보입니까?"
  "저기는 18번지가 아냐." 소위가 말했다.
  "뭐라고요?"
  "18번지가 아니라 22번지야. 18번지는 저쪽이다." 그는 철근이 비죽 나온 폐허를
가리켰다.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이지. 이 근처는 다 비슷비슷 하지만 저기가 분명하다.
  그레버는 연기도 나지 않는 잿더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 부근은 지난 주에 폭격을 당했어. 아니 훨씬 전인지도 몰라."
  "모두." 그레버는 말이 막혀버렸지만 겨우 입을 열었다.
  "모두 살아났는지, 잘 모르시겠죠?"
  "그건 모르긴 해도 항상 몇 사람씩은 구조됐었어. 아마 자네 부모도 집에
없었을 거야. 공습 경보 중에는 대개 방공 지하실로 대피하니까."
  "어디서 부모님이 계신 데를 알아볼 수 있습니까?"
  "오늘밤은 소용없어. 시청이 폭격을 당해서 서류고 뭐고 엉망진창이니까. 내일 아침
구청에 가서 물어 봐. 한데 이 잔 왜 그러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밑에도 사람이 묻혔습니까?"
  "어디를 가나 시체야. 전부 꺼내려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 되야해. 개새끼들은
시에 무차별 폭격을 가하고 있다."
  소위는 돌아섰다.
  "여긴 금지구역이 됐습니까?" 그레버는 재빨리 물었다.
  "?"
  "저 공습경계 감시원이 그러던데요?"
  "그 녀석은 머리가 돌았어. 해임된 사람이야. 있어도 상관없어. 적십자를 찾아가면
잠자리를 마련해 줄 거야. 그전 정거장이 있던 자리야."
 
  그레버는 입구를 찾고 있었다. 한 군데, 통로가 정리되고 있었지만, 지하실 입구는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벽돌더미 위에 올라 서 보니 그 한복판에 층계의 일부가
나와 있었다. 옆집의 뒷벽이 정원쪽으로 쓰러져서 벽돌더미 위에 겹쳐졌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재빠르게 지나갔다. 조금 전의 그 노인으로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건 고양이였다. 무심히 돌멩이를 집어서 던졌다. 그때 고양이가 시체를 뜯어
먹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급히 벽돌더미를 넘어서 반대쪽으로 가
보았다. 분명히 자신이 살았던 집이었다.
  눈에 익은 목조건물이 서 있고, 정원의 일부도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창백한
달빛이 폐허를 그대로 비추고 있었다.
  집 뒤는 모두 벽돌더미에 묻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그레버는 귀를 기울여
보았다. 철주를 두드리고 나서 가만히 반응을 기다렸다. 훌쩍훌쩍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다. 바람이겠지 그는 생각했다. 바람일 것이다 잠시 후, 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층계 쪽으로 뛰어갔다. 눈앞으로 숨어 있던 고양이가 휙
달아났다. 그는 숨을 죽이고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자신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가족들은 이 흙더미 밑에 깔려 있는 것이다. 그들은 살았으며, 지금
암흑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껍질이 벗겨진 손으로 필사적으로 바닥을 긁으면서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점점 확신이 되어 있었다.
  그레버는 돌멩이와 벽돌을 집어내다가 작업현장으로 급히 되돌아갔다.
  "이봐요! 여긴 18번지가 아닙니다! 내가 18번지를 파내는 걸 도와주십시오!"
  "뭐라고?" 감독이 몸을 일으켰다.
  "여긴 18번지가 아닙니다! 내 부모는 저기에."
  "어디에?"
  "저쪽이오! 빨리 갑시다."
  감독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거긴, 이미 오래 되었어."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군인 아저씨, 좀 비켜주어야겠어. 난 일을 해야 하니까."
  그레버는 배낭을 내려놓았다.
  "저기에 부모님이 묻혀 있습니다. , 여러 가지를 많이 갖고 있습니다! 먹을 것도,
돈도."
  사내는 눈물이 흐르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것이 여기 묻혀 있는 사람들을 생매장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진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밑에는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어."
  "그러나 나중에."
  "난 당신을 도와 여길 파냈습니다."
  "이봐."
  감독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화를 냈다.
  "답답한 소리 그만해. 새삼스럽게 그곳을 파낸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지? 모르겠나?
그 밑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지 않아. , 더 이상 귀찮게 굴지 마."
  그는 곡괭이를 들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레버는 꼼짝 않고 서서 작업중인
사람들의 등을 노려봤다. 들것이 보이고 방금 도착한 검시인들도 있었다. 터진
하수관에서 새어 나온 물이 거리에 넘치고 있었다. 그는 온몸의 힘이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꼈다.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레버는 지친 몸으로 간신히
18번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너진 벽돌더미를 보다가 돌멩이를 하나 집어서 던졌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파편의 산더미를 치운다 해도 철주와 콘크리트가 얽혀있다. 아마도
부모님은 피난하셨을 거야. 어쩌면 다른 지방으로 피난했는지도 모른다. 남부 독일의
어느 마을에 살아 있거나 로덴부르크로 갈 수도 있다. 어머니! 저는 텅 비어 있습니다.
저는 심장이 멈췄습니다.
  그는 층계에 쪼그리고 앉았다. 저건 무엇이었을까? 하늘로 올라가는 층계가
아니었을까? 천사들이 날아다니지는 않았을까? 그 천사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비행기로 변했을까? 지구는 어디로 갔는가? 지구는 무덤으로 변했는가? 나는 무덤을
팠다.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째서 나는 이 밑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들것이 운반되었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8
 
 
  날이 밝자, 그레버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파괴된 집^5,55^마침내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고양이가 반쯤 묻혀 있는 물통 옆에 앉아서 얼굴을 씻고 있었다. 파괴 같은 것은
고양이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구청에 가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묻었던 피가 굳어 있었다. 물통 속에는 깨끗한 물이 약간 남아 있었다. 아마도
소방수나 빗물일 것이다. 수면에 비친 얼굴이  자기를 마주보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배낭에서 비누를 꺼내 세수를 했다. 물은 금방 더러워지고 손에는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두 손을 햇볕에 내놓고 말렸다. 바지는 찢어지고 상의는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손수건에 물을 적셔서 상의를 문질렀다. 그렇게나마 하고
나니까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배낭 속에는 빵이 조금 남아 있고, 수통에는 아직 커피가 있었다. 그는 커피에다
빵을 적셔서 먹었다. 여전히 뱃속이 허전했다. 밤새껏 소리를 지른 것처럼 목구멍이
껄끄러웠다. 고양이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빵을 떼어 주자 조심스럽게 받아 물고서
구석으로 가서 빵을 씹었다. 그레버는 배낭을 메고 거리로 나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시의 어디를 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들은 이빠진 자국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카타리네 교회의 탑은 무너져
있었다. 시내는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원시의 곤충이 굴을 파헤쳐 놓은
것처럼. 아직도 소련에 있는 것 같았다.
  정면만 남아 있는 집의 문이 열리고 어젯밤의 공습경계 감시원이 밖으로 나왔다.
이미 집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듯이 문에서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그레버를 보자 눈짓을 했다. 그레버는
망설였다. 이 사내가 미쳤다는 말이 생각났지만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감시원은 잇몸까지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넌 여기서 뭘 하지? 약탈을 하고 있나? 여기선."
  "여보시오! 바보 같은 소리는 그만두고 내 부모가 어디에 있는지 제발 가르쳐
주시오. 폴 그레버와 마리 그레버라고 하는데 저 곳에 살고 있었소."
  감시원은 수염투성이의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아, 자네였군! 군인 아저씨! 그렇게 큰소리로 고함을 치지 말게. 가족을 잃은
것이 자네뿐인가? 자넨, 저기 있는 걸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그는 방금 나온 집을
가리켰다.
  "집 말이오?"
  "아니, 저기 문 위에 있어. 자넨 눈이 없나? 저것이 만화 신문이라고 생각하나?"
  문이 바람에 흔들리고 그 위에 종이쪽지가 잔뜩 붙어 있었다. 그레버는 그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그것은 행방불명이 된 가족을 찾는 주소와 전언들이었다. 잉크나 숯으로 문짝에
짧게 써 놓은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종이에 써서 붙여놓고 있었다. '하인리히와
게오르규는 헤르만 숙부 댁으로 오라. 이르마는 죽었음. .'라고 씌어 있는 게 보였다.
바로 그 밑에 구두 상자 뚜껑에다 '부탁합니다. 쥬린게르 가 4번지 부룬히르테
슈미트를 아시는 분은 연락해 주십시오.'라고 쓴 것도 있었다. '오토, 우리는 지금
하스테 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엽서에 적어 붙인 것도 있었다.
  그레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떤가?" 감시원이 물었다.
  "자네를 찾는 이름이 있나?"
  "부모님은 내가 돌아온 걸 모르고 있습니다."
  미치광이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찾는 사람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어. 그건 아무도 몰라! 언제나 나쁜
놈들이 살아남기 마련이야. 악당들은 항상 안전해. 자넨 그 진리도 아직 몰랐나?"
  "알고 있다오."
  "그럼, 자네 이름을 적어 놓게. 불행한 자들의 명단에 올리란 말야! 그리고 무작정
기다리는 거야! 우리들과 함께 자기가 까맣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감시원의 표정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레버는 등을 돌려 무엇인가 메모를 남기지 않았는데 벽돌더미사이를 구석구석
살폈다. 부서진 사진틀에서 히틀러의 초상화 한 장이 나왔다. 뒷면에는 아무 것도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위쪽을 찢어서 연필을 꺼내고 잠시 생각하다가 '
그레버와 마리 그레버의 소식을 알고 싶음. 특별 휴가중인 에른스트.' 라고 썼다.
  "반역이다." 감시원이 그의 뒤에서 말했다.
  "뭐라고?" 그레버는 뒤를 돌아보았다.
  "반역이다! 자넨 총통의 초상화를 찢었어!"
  "이건 찢어진 채로 흙더미 속에 뒹굴고 있었소." 그레버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다.
  ", 그런 억지는 집어치우고 제발 나를 혼자 내버려두시오."
  종이를 꽂아 놓을 만한 것이 없었다. 다른 종이쪽지에 꽂아 놓은 압침을 두 개 빼서
겨우 글씨가 보이게 해 놓았다. 마치 낯선 사람의 관에서 꽃다발을 훔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딴 방법이 없었고 그 종이쪽지도 다시 붙여놓았다.
  감시원은 그레버의 어깨 너머로 지켜보고 있었다.
  "좋아!" 그는 노래라도 부르는 듯이 말했다.
  "군인 아저씨 승리, 만세. 애도는 금물이다. 상복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전투정신을
약화시킨다.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는 걸 자랑으로 생각하게. 자네들이 제대로 임무를
수행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더니 갑자기 방향을 돌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레버는 감시원은 곧
잊어버렸다. 히틀러를 다시 찢어내어 문에 붙여 놓은 종이쪽지에서 발견한 주소를
적었다. 그것은 루제일가의 거처였다. 그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찾아가서 부모님의
소식을 묻기로 했다.
  초상화의 나머지 부분에는 아까 메모했던 내용을 그대로 적어서 18번지로 갔다.
그는 그것을 남의 눈에 쉽게 띄일 수 있도록 돌과 돌 사이에 끼워놓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셈이다. 그런 다음에 잠시 동안 벽돌더미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것은
무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구청에 가기에 적당한 시간이 되어 있었다.
  행방불명자과의 접수계는 새로운 송판을 억지로 짜 맞추어 놓고 있었다. 생목에다
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송진 냄새가 그대로 배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접수계에는 외팔이 남자 직원과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성함은?" 가장 우측에 앉은 여자가 물었다. 납작하고 둥근 얼굴에다가 머리에는
빨간 리본을 매고 있었다.
  "그레버. 폴 그레버와 마리 그레버입니다. 세무 서기. 하겐 가 18번지입니다."
  "뭐라고요?" 여직원은 한쪽 손을 귀에다가 댔다.
  "그레버." 큰소리로 되풀이했다.
  "폴 그레버와 마리 그레버. 세무 서기."
  "그레버, 그레버." 그녀의 손가락이 카드 위를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딱 멈추었다.
  "그레버 네, 여기 있습니다. 이름은 뭐라고 하셨지요?"
  "폴과 마리입니다."
  "뭐라고요?"
  "폴과 마리!" 그레버는 신경질을 냈다. 여러 가지 일을 당한 끝에 자기의 불행을
큰소리로 외쳐야 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아니군요. 에른스트 그레버로 되어 있어요."
  "그건 내 이름입니다. 가족 중에 그런 이름은 없어요."
  "그럼, 아닙니다. 다른 그레버는 없습니다." 여직원은 고개를 들어 미소했다.
  "며칠 후에 다시 와 보세요. 아직 다 보고 받지 않았으니까. 다음!"
  그레버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여기 말고 어디서 알아보면 되오?"
  여직원은 머리에 꽂은 빨간 리본을 어루만졌다.
  "호적과로 가세요, 다음."
  그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 너무도 어이없게 끝나버린
것이다.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었다. 외팔이 남지 직원이 그에게 말을 건넸다.
  "명부에 이름이 없다면 다행입니다."
  "왜 그렇죠?"
  "이건, 사망자나 중상자의 명부입니다. 보고되지 않았다면 행방불명입니다."
  "그럼, 그 명부는 어디 있지요?"
  과원은 매일 여덟 시간씩 타인의 불행을 취급해야 하는 사람답게 인내를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세요." 마침내 그는 말했다.
  "행방불명자 명부를 만들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명부를 만들어도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아낼 순 없겠지요. 행방을 안다면 행방불명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안 그래요?"
  "아마도 그렇겠죠." 그레버는 묵묵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호적과로 갔다. 그곳은 시청의 모퉁이에 있었는데 아직도 산과 화약 냄새가
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겨우 안경을 쓴 신경질적인 여자에게로 갔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여자는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선 아무것도 알 수 없어요. 서류가 타버려서 엉망이 되었어요 다행히 타지
않은 건 소방서의 멍텅구리 아저씨들이 물을 뿌려 놓았어요."
  "어째서 기록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지 않았지요?" 그레버 곁에서 있던 하사관이
물었다.
  "안전한 장소? 안전한 곳이 어디죠? 알고 있어요? 따질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