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투했다는 정보가 있어 밤에는 보초를 세우고 있었다.
"좀 빠르지 않아?" 임메르만이 말했다.
"교대하려면 아직 반 시간이나 남았어. 들어가서 눈 좀 붙이라고. 자네 나이라면
얼마든지 잘 수 있어. 자네, 몇 살이야? 스물 셋?"
"응."
"혹시 고향에 가고 싶어서 병이 난 게 아닌가?" 임메르만은 그레버의 얼굴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휴가는 어떻게 되었지? 갔다왔나?"
"아직. 전부 취소될는지도 몰라. 나는 지금까지 세 번이나 그런 일을 당했어."
"그건 그래. 도대체 얼마나 연기되고 있지?"
"6개월이야. 언제나 그런 식이지. 지난번에는 관통상을 입어 고향에 갈 수 없었어."
"괴롭군. 그래도 자네에게는 자격이 있잖아. 나는 틀렸어. 전 사회민주당
당원이거든. 반역분자로 찍혔어. 1000 년의 제국을 위한 밑거름이며 대포밥이 될
운명이지."
그레버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임메르만은 소리내어 웃었다.
"독일이의 눈초리로군. 걱정하지 마. 모두들 불평하고 있어. 슈타인브레너도 역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냐." 그레버는 화를 내면서 대답했다. 임메르만이
정곡을 찔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나쁘지." 임메르만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하면 큰 일이지. 이 영웅적인 시대에 밀고자들이 마치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다니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레버는 잠시 주저했다.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 슈타인브레너나 조심하시지."
"나는 슈타인브레너 같은 자는 티끌만큼도 걱정 안해. 그자도 나에 대해서는 어쩔
수가 없지. 전 사회민주당 당원쯤은 이미 관심조차 없어. 그렇지 않을까?"
그레버는 손에 입김을 불었다.
"추운데."
그는 정치적인 논쟁 따위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다만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임메르만의 말이 옳았다. 불신은 제3제국의 가장 공통된
특징이다. 어디를 가나 안전하게 있을 수는 없다. 안전하지 않을 때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이 상책이다.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가 언제였지?"
"2 년 전이야."
"오래 되었군. 돌아가면 깜짝 놀라겠는데."
그레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깜짝 놀랄거야." 임메르만이 되풀이했다.
"많은 것들이 변했을 테니까."
"도대체 무엇이 변했단 말인가?"
"모든 것이 변했다. 가 보면 알 거야."
그레버는 순간 심한 공포를 느꼈다. 이런 공포는 때때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엄습하곤 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계에서는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지? 너는 휴가를 간 적이 없잖아?"
"물론 없지만 알고 있어."
그레버는 일어났다. 도대체 나는 왜 밖으로 나왔단 말인가? 그는 혼자 있고 싶었던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거의 강박 관념이 되고 있었다. 단 2,
3주라도 혼자 있고 싶다. 그리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있다. 고국으로
돌아가서, 전쟁을 벗어나서.
교대 시간이다.
"샤우워를 깨워야겠어."
천둥소리와 같은 굉음이 밤새껏 계속되었다. 하늘까지 이어지는 빛나는 섬광.
그레버는 먼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련군. 1941 년의 가을, '놈들은
마지막이다.' 라고 총통은 선언했다. 또 실제로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의 전선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진격을 멈춘
것이다. 마치 마술에라도 걸린 것 같았다. 갑자기 소련군은 대포를 쏘아댔고 총통의
연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독일군의 전투사단은 계속해서 퇴각했다. 전군단이
항복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승리가 패주로 일변했다는 소식이 모두에게
알려졌다. 카이로가 눈앞에 있었을 때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것과 똑같은 패주였던
것이다.
그레버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눈이 별빛을 반사해 확산시키고 있었다. 집들은
실제의 거리보다는 멀리 보이고 숲은 가까이 있었다. 어디선가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1940 년 프랑스의 여름, 파리를 산책하는 듯했던 진격, 혼란한 도시에 난무하던
폭격기의 소리, 피난민과 일제히 진군하는 군대로 막혀버린 도로. 6월 중순의
풍성하던 밭과 숲. 은빛같은 거리와 카페 마침내 도시는 한 방의 총격도 없이
스스로 성문을 열었다. 그때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던가? 마음이 혼란되고
있었을까? 아니다. 만사는 그것으로 해결되는 것 같았다.
아프리카에서 매일같이 진격을 하고 있을 때는 어땠나. 바람에 실린 열기와 탱크로
어지럽혀진 사막의 밤. 그곳은 이국의 땅이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프랑스가 있고
그 다음에 겨우 독일이 있다. 비록 이국의 국토를 잃었다 하더라도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내 소련에 왔다. 소련, 패주. 이번에는 고국을 사이에 두고 바다도 없다.
더구나 아프리카에서처럼 한두 개의 군단이 패배한 것이 아니다. 독일군 전체가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승리하고 있는 동안은 만사가 질서정연한 것같이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은 것은 무관심하지 않으면 위대한 목적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위대한
목적.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숨어있다. 그중의 한 면은 처음부터 음산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나는 정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까? 사실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구토증을 느끼면서도 애써 뿌리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샤우워가 기침하는 소리를 듣고 파괴된 집을 두서너 곳 더 돌아보았다. 샤우워는
북쪽을 가리켰다. 지평선으로부터 거대한 화염이 공중을 향하여 치솟고 있었다.
소리를 내면서 불꽃이 타올랐다.
"소련군이 벌써 저기까지 왔나?" 그레버는 깜짝 놀랐다.
"아니, 저건 아군 공병이야. 군사 시설물을 폭파하고 있는 거야."
"후퇴한단 말이로군."
두 사람은 귀를 귀울였다.
"오랫동안 파괴되지 않은 집은 구경한 적이 없어."
그레버는 라에의 숙소를 가리켰다.
"저건 아직 쓸만한데."
"저것이 쓸만하다고? 기관총이 여기저기에 구멍을 내고 지붕은 불에 타 형편
없는데도?" 샤우워는 한숨을 토했다.
"파괴되지 않은 거리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나 역시."
"너는 곧 보게 될 거야. 고국으로 돌아가서."
"그럴 수만 있다면."
샤우워는 멀리 불꽃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이 소련에서 모든 걸 파괴한 모습을 보면 두려운 생각이 들어. 놈들이 독일
국경을 넘는다면 어떤 짓을 할까.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있나?"
"없어."
"우리 집은 동부의 프러시아(독일의 옛 왕국)에 있어. 1914 년에 소련군이 침공했을
때 도망하던 일을 지금도 기억해. 그때 나는 열 살이었지."
"국경까지는 아직도 멀어."
"경우에 따라서는 순식간에 도착할 수도 있어. 처음에 얼마나 빨리 진군했는지
알고나 있나?"
"아니. 그때 나는 아프리카에 있었어."
샤우워는 다시 북쪽을 바라보았다.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격렬한 폭발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저기서 아군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겠지? 놈들이 우리에게 똑같은
짓을 도대체 무엇이 남아 있겠나?"
"여기와 마찬가지겠지."
"그것이 마음에 걸려. 분명하니까."
"놈들은 국경까지는 못 왔어. 너도 엊그제의 연설을 들었지? 우리는 새로운 비밀
무기를 운반하기 위하여 단지 전선을 단축하고 있을 뿐이야."
"바보 같은 소리!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처음엔 왜 진격을
했지? 만약에 국경선까지 밀리면 강화조약을 맺어야 해. 다른 방법이 없어."
"왜?"
"왜라니? 우리가 놈들에게 했던 짓을 놈들이 우리에게 하지 않을 것 같은가?
뻔하지."
"알겠어. 하지만 그자들이 끝내 강화조약을 맺지 않는다면?"
"누가?"
"소련이."
샤우워는 그레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 할 수가 없지. 강화는 강화야! 전쟁은 끝나고 우리는 살 수 있어."
"그놈들은 우리가 무조건 항복을 할 경우 강화조약을 맺으러 할 거야. 놈들은
독일을 점령하고 너 역시 집을 잃게 되지. 네 말은 그런 뜻이지?"
샤우워는 순간 당황했다.
"그건 그래." 마침내 그는 분명히 말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냐. 강화조약을 맺게 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파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눈을 빛내며 교활한
농부처럼 말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조국은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있지. 놈들의 나라만
파괴되었을 뿐이야. 그리고 언젠가는 철수하겠지."
그레버는 침묵했다. 어째서 다시 말려들었겠는가? 떠들어대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위험하기 짝이 없다. 신념도 마찬가지다. 소리도 없이 다가오는 것은 너무도
거대하고 막연하며 불길하여 얘기조차 할 수도 없다. 먹을 것과 추위에 대해서는
자유롭게 말한다. 그것이 죽은 사람에 이르면 모두들 입을 다문다.
그는 마을을 지나 막사로 돌아올 때 교회 앞을 지나쳤다. 작은 교회는 포탄으로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안에는 라이케의 시체가 안치되어 있었다. 엊저녁
병사들의 시체가 더 발견되었다. 그들을 내일 아침 군장하라는 라에의 명령이 있었다.
병사 중의 하나는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조차 없게 얼굴이 짓이겨졌다.
그레버는 교회로 들어갔다.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회중전등을 밝히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한 구석에 파괴당한 성상이 두 개 서 있고 그 옆에 찢어진 감자
자루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전에 이 방은 감자를 저장하는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어와 쌓인 눈 속에 체인도, 타이어도 없는 자전거가 한 대 놓여
있었다.
방 한복판에 천막을 깔고 그 위에 시체를 눕혀 놓았다. 그들은 거기에서 준엄하고
초연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미 매사에 무관심한 표정으로.
그레버는 그곳을 나와 마을을 순찰했다. 그는 무덤을 팠던 언덕으로 올라갔다.
라이케의 묘혈은 두 병사의 시체와 함께 매장할 수 있도록 구덩이를 더욱 넓혔다.
물방울이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 올린 흙더미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이름을 새긴 십자가도 세워져 있었다. 며칠 동안은 그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그 이상은 안된다. 마을은 다시 싸움터로 변할 테니까.
그레버는 언덕 위에서 아득한 저편을 바라보았다. 빛은 눈을 기만했다. 사물을
확대시키고 희미하게 보이게 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공기조차 차갑다.
모든 것이 이국적이다. 그레버는 갑자기 한기를 느꼈다.
흙더미에서 흙가루가 소리를 내며 구덩이 속으로 떨어졌다. 이런 딱딱한 흙
속에서도 구더기가 살 수 있을까? 만약에 구더기가 살고 있다면 내일부터 먹이는 실컷
먹게 된다.
우리는 구더기에게 풍부한 먹이를 선사하였다. 전우들의 고기뿐만이 아니다.
주검은 너무나도 많았다. 주로 적군에서 나왔지만 서서히 아군의 진영을 침투해
왔다. 어느 연대나 항상 보충병이 필요했다. 전우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갔다. 가장
먼저 사귄 친구들은 지금 한 명 남았다. 제4중대장인 프레젠버어그 외에는 모두
죽었거나 병원에 입원했다. 운이 좋은 녀석은 병역 불능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샤우워가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아니야.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소련군의 시체가 뒹굴고 있는 마구간에서
쥐새끼들이 놀더군."
샤우워는 게릴라들이 묻혀 있는 무덤을 보았다.
"저자들은 적어도 무덤 속에서 잠들 수 있군."
"그래. 자기들 무덤을 스스로 파야 했지."
샤우워는 탁 침을 뱉았다.
"불쌍하게도 그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들의 땅을 파괴했으니까."
그레버는 의아스러웠다. 밤이 되면 생각이 변하게 된다. 그렇지만 샤우워는
고참인데다 결코 감정적인 사내가 아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지? 후퇴하고 있기 때문인가?"
"물론이지! 언젠가는 우리도 똑같은 일을 당할 걸 생각해 봐."
그레버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급적이면 이런 생각을
뿌리치려고 했다.
"곤경에 빠지면 다른 사람들의 기분도 헤아릴 수 있게 되지. 이상하지. 모든 것이
잘돼 가고 있을 때는 그런 건 생각조차 않았는데."
"물론이야. 누구나가 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그런 게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
"변명? 자기 목숨이 위험한 판국에 그까짓 변명이 무슨 소용이야?" 샤우워는
초조한 얼굴로 그레버를 응시했다.
"자네 같은 먹물들은 엉뚱한 생각을 잘하지. 우리가 전쟁을 시작하진 않았어.
따라서 전쟁의 책임을 질 필요까진 없어. 우리는 다만 의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명령이니까, 안 그런가?"
"그렇지." 그레버는 지쳐버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3
일제히 사격을 가하는 요란한 소리가 창공 속으로 퍼져갔다. 돌담 위에 앉아 있던
새들도 도망가지 않고 요란스럽게 지저귀고 있었다. 새들은 이미 총성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천막 세 개가 눈 속에 반쯤 묻힌 채 놓여 있었다. 얼굴없는 병사의 시체를 두른
천막은 꼭 묶여 있었다. 라이케의 시체는 중앙에 묻혀 있었다.
병사들은 삽으로 흙더미를 헤치기 시작했다. 구덩이를 다 메우고도 흙이 많이 남아
있었다. 뮤케는 뮬러를 보았다.
"흙을 뿌려 밟을까요?"
"뭐라고?"
"밟아서 다지는 겁니다. 소위님. 그러면 남은 흙도 처리하고 그 위에 돌덩어리를
놓을 수도 있습니다. 여우나 이리들이 덤벼들지 못하게요."
"여기까지야 오지 않겠지. 무덤을 깊이 팠으니까. 게다가."
'무덤을 파헤치지 않아도 들판에 얼마든지 있다.'고 뮬러는 생각했다.
"바보 같으니라구. 왜 그런 생각을 했지?"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뮤케는 무표정하게 뮬러를 쳐다보았다. 이 녀석도 멍청한 놈이 틀림없어. 언제나
모자라는 녀석은 살아 있고 아까운 사람만 죽는다. 라이케처럼.
뮬러는 고개를 흔들었다.
"남은 흙으로 봉분을 만들어라! 그런 다음 머리맡에 십자가를 세워라."
"알겠습니다! 소위님."
뮬러는 중대를 정열시키고 도보행진을 시켰다. 그는 필요이상으로 소리 질렀다.
고참병들은 항상 자기가 하는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대로였다.
샤우워, 임메르만, 그레버는 남은 흙으로 봉분을 만들었다.
"십자가는 오래 가지 못할 거야." 샤우워는 말했다.
"당연하지."
"사흘도 가지 않겠지."
너는 라이케의 친척이냐?" 임메르만이 물었다.
"그는 참으로 호인이었어."
"십자가를 세우나?" 그레버가 물었다.
임메르만이 힐끔 뒤를 보았다.
"휴가병이로군. 몹시 서두르는데."
"설마 자네는 서둘지 않겠지?" 샤우워가 물었다.
"나는 휴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 너도 알고 있으면서 왜 묻는 거야? 나쁜 자식!"
"물론이지. 휴가를 보내면 넌 그대로 탈영할 거야."
"아마 돌아오기는 할거야."
샤우워는 탁 하고 침을 뱉았다. 임메르만은 비웃고 있었다.
"아마도 나는 자원해서 귀대를 할 거야."
"네가 무슨 짓을 할지 알게 뭐야? 그 꿍꿍이속은 아무도 모를거야."
샤우워는 십자가를 바르게 세워 삽등으로 몇 번인가 내리쳤다. 십자가가 깊이
박혔다.
"어때." 그레버에게 물었다.
"사흘도 못 갈 거야."
"사흘이라도 서 있으면 돼." 임메르만이 대답했다.
"좋은 걸 가르쳐 줄까? 샤우워, 사흘만 지나면 공동묘지의 눈이 녹아서 묘석이
나올거다. 그때 돌십자가를 가지고 와서 여기다 세우는 거야. 그러면 너의
노^36^예근성도 잠잠해지겠지."
"소련인의 십자가를?"
"상관없지. 하느님은 전 인류의 아버지시니까."
샤우워는 고개를 돌렸다.
"날강도 같으니라구. 너는 국제적인 날강도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샤우워. 옛날에는 나도 안 그랬지. 십자가 얘기는 네가 먼저
끄집어냈어. 너는 어제부터 십자가 타령이었어."
"어제는 라이케를 소련군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야."
그레버는 삽을 들었다.
"그만 돌아가겠어. 이제 일은 다 됐겠지?"
"맞았어, 휴가병." 임메르만이 대답했다.
"다 끝났어."
그레버는 묵묵히 언덕길을 내려왔다.
분대는 지하 방공호 속으로 대피하고 있었다. 지붕의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밑에 네 사람이 웅크리고 앉아 카드 놀이를 하고 두 사람은 구석에서
잠들어 있었다. 샤우워는 편지를 쓰고 있었다. 지하호는 당의 거물급이 사용했던 듯
꽤 넓었다.
슈타인브레너가 들어왔다.
"최신 뉴스를 들었나?"
"라디오가 고장났어."
"멍청하긴. 취급 주위 지시가 있었잖아."
"그럼 네가 고쳐 봐." 임메르만이 말했다.
"어디가 고장이지?"
"전지가 없어."
"전지가 없다구?"
"그래." 임메르만은 슈타인브레너를 보고 히죽히죽 웃었다.
"그렇지만 너의 코밑에 전선을 연결하면 제대로 들릴 거야. 네 머리는 항상
충전되고 있으니까. 시험해 보시지."
슈타인브레너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좀처럼 혀끝을 누를 수 없는 녀석이 있어."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맥스." 임메르만은 침착하게
말했다.
"넌 내 행동을 보고하고 있어. 그건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이지. 그런 일에 아주
적합한 인간이야. 미안하게도 나는 기계의 숙련공이고 훌륭한 기관총사수란 말야.
여기서는 그런 사람이 네 따위 것들 보다는 몇 백 배 필요하지. 네가 번번이
헛수고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았나?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몇 살인가?"
"닥쳐!"
"스물 정도는 됐겠군. 아니면 열아홉? 나이에 비하면 멋진 생활을 해왔군.
유대인이나 소위 국민에 대한 배신자들을 5, 6 년씩 쫓다니. 삼가 경의를 표하는
바야! 나는 네 나이 때 여자 뒤만 따라다녔어."
"잘 알고 있어!"
"아무렴, 어련하실려고?"
그때 뮤케가 입구에 나타났다.
"왜 그래?"
모두들 가만히 있었다.
"뭐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베르닝이 말했다.
"그저 얘기를 나누고 있었을 뿐입니다."
뮤케는 슈타인브레너를 보았다.
"무슨 일인가?"
"최신 뉴스를 들었어." 슈타인브레너는 몸을 꼿꼿이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레버만이 듣고 있을 뿐이었다. 노름을 하고 있는
자들은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편지를 쓰고 있던 샤우워는 고개를 들지 않고,
잠들어 있던 사람들 역시 코만 골아댔다.
"차렷!" 뮤케는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모두들 귀머거리냐? 최신 뉴스가 있다! 모두들 주목해. 이것은 공식
보도야."
"네." 임메르만이 대답했다.
뮤케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빈틈이 없었다. 노름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카드를 바닥에 덮어 놓았다. 샤우워는 절반쯤 몸을 일으키고 슈타인브레너는
허리를 쭉 폈다.
"중대 뉴스! '국민의 시간'에 발표. 아메리카에서 파업 발생 제강업계 완전
조업 중단 대부분의 군수공장은 가동 중지. 항공기 산업에 사보타주 발생
즉시 강화를 요구하는 시위운동이 전국에 파급. 정부는 동요하고 있음. 정부 전복의
쿠데타가 예상되고 있음."
모두들 침묵했다. 코를 골던 사람들은 눈을 비벼댔다. 뚫어진 지붕에서 눈 녹은
물방울이 물통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독일의 잠수함대는 아메리카 전 해안을 봉쇄했다. 어제 대형의 병력수송선 두 척과
군수품을 실은 화물선 두 척 격침. 이것으로 이번 주에는 3 만 4000 톤이 된다.
영국은 폐허 속에서 굶주리고 있다. 항로는 모두 차단되고 새로운 비밀무기가
완성되었다. 지금 우리는 무착륙으로 아메리카를 왕복할 수 있는 폭격기를 가졌다.
조국의 대서양안은 거대한 요새이다. 만약에 적이 침입을 기도한다면 우리는 1940
년도에 감행했던 것처럼 적군을 해중으로 구축할 것이다."
노름꾼들은 다시 카드를 들었다. 눈덩어리가 물통에 떨어졌다.
"좀더 안전한 참호로 옮길 수 없을까." 슈나이더가 말했다. 그는 붉은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슈타인브레너!" 임메르만이 불렀다.
"소련의 뉴스도 갖고 왔나?"
"왜 그러지?"
"이 가운데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어. 예를 들면 휴가병인 그레버가 그렇지."
슈타인브레너는 잠시 망설였다. 그는 임메르만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당에 대한
충성심이 우선이었다.
"전선 단축 작전은 거의 완료되었다.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고 거의 소멸되었다.
새로이 구축된 반격의 거점은 준비가 완료되었다. 예비군의 전략적 배치도 끝났다.
신무기를 보유한 아군의 반격은 적의 저항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는 손을 들었다가 그대로 내렸다. 소련 전선에 대해서 말하는건 사기를 북돋워
주지 못한다.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뻔히 보이는 것이다. 갑자기 슈타인브레너는
당황했다.
"진짜 중대한 뉴스는 엄중히 비밀에 붙여지기 때문에 지금은 발표할 수 없다.
확실한 건 금년 내로 적군을 섬멸한다는 것이다."
그는 발표를 중단하고 참호에서 나갔다. 뮤케가 그의 뒤를 따랐다.
"쓸개 빠진 녀석 같으니라구!" 잠을 자던 병사가 말하더니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노름이 다시 시작됐다.
"섬멸이라?" 슈나이더가 말했다.
"우린 놈들을 해마다 두 번씩이나 섬멸했지."
"난 스무 번이나 섬멸시켰어."
"소련인은 선천적으로 배신자야." 임메르만이었다.
"핀란드에선 일부러 약한 척하였지. 그것이야말로 비열한 볼셰비키적 속임수지."
샤우워는 고개를 들었다.
"좀 조용히 해. 넌 모든 걸 알고 있겠지만."
"물론이지. 놈들은 전엔 우리의 동맹국이었지. 핀란드에 관해선 릴링 원수가 직접
말씀하셨어. 그래도 이의가 있나?"
"야, 이제 작작 좀 해라." 누군가가 벽 속에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야단들이지?"
"모두 조용해졌다. 카드 던지는 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레버는 웅클이고 앉아 있었다. 그는 사형집행이나 매장을 한 뒤에는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었다.
저녁에 부상병들이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후송되는 병사들도 있었다. 그들은
회색의 평원으로부터 피투성이의 붕대를 감고 와서 반대편의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병원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고 회색 속에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모두들
굶주림 때문에 말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들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구급차도 없었으므로 남은 부상병들을 위하여
교회 안에 임시병원이 마련되었다. 포탄으로 파괴된 천장에는 감광판을 폈다.
지칠대로 지친 군의관 한 사람하고 간호사 둘이 들어와서 수술을 시작했다. 낮에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들것으로 부상병을 실어 날랐다. 수술대 위에 하얀 등이 걸렸고
한쪽 구석에 성상의 조각을 세워 놓았다. 성모마리아가 손 없는 두 팔을 내밀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한쪽 다리가 없었다. 마치 수족이 끊긴 인간을 십자가에 붙여
놓은 것 같았다. 부상병들의 신음소리가 크게 들려오지는 않았다. 군의관에게는 아직
마취제가 조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주전자와 니켈이 든 용기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절단된 다리와 팔이 중대장 숙소에서 운반해 온 통에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나타났다. 아무리 쫓아내도 입구에서만 맴돌았다.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그레버는 의아했다. 그레버는 프레젠버어그와 함께
옛사제관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프레젠버어그는 오들오들 떨면서 목을 내밀고 있는 그 털투성이를 응시했다.
"숲 속에서 기어 나왔겠지."
"숲 속에 먹을 거라곤 없을 텐데."
"먹이는 얼마든지 있어."
그들은 개에게 접근해봤다. 개는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도록 경계태세를 갖추었다.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마을의 똥개가 아닌데. 혈통이 좋은 개인걸?" 프레젠버어그가 혓소리를 짧게
냈다.
개는 두 귀를 쫑긋 세웠다.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레버가 물었다.
프레젠버어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먹이는 저기에 얼마든지 있어. 불빛을 따라서 인가를 찾아 온거야. 이놈은 친구가
필요한 모양이야."
수술하다가 줄은 시체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개는 껑충 뛰며 뒤로 물러나더니
부동자세로 프레젠버어그를 바라보았다. 프레젠버어그는 개에게 말을 건내면서 한걸음
접근해 보았다. 순간 개는 다시 물러서면서 꼬리를 한두 번 흔들었다.
"무서워하고 있어." 그레버가 말했다.
"그래. 정말 좋은 개야."
"사람을 물어 버릴지도 몰라."
프레젠버어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들 역시도."
"어째서?"
"사람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아직 선량하다고 믿고 있을 뿐이야. 그러면서 이놈처럼
따뜻한 마음과 빛과 우정을 찾아 헤매고 있는 거야.
프레젠버어그의 얼굴의 한쪽 부분이 씰룩 움직였다. 커다란 상처 자국이 선명한
반대 부분은 마치 죽어있는 것 같았다. 그레버는 그의 얼굴 경계를 이루는 면에서
미소가 사라지자 야릇한 느낌을 받았다. 저건 우연이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모두 전쟁 탓이야."
프레젠버어그는 고개를 흔들며 산책용 지팡이로 구두 위의 눈을 떨어냈다.
"그렇지 않아, 우리는 기준이라는 걸 10 년 동안이나 고립시켜 왔었어. 소름이 끼칠
만큼 비인간적이고, 교민과 공포를 지켰어. '우리는 지배자적 민족이다. 다른 민족은
모두 노^36^예로서 우리에게 봉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배자적 민족! 도대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지? 바로 여기가 좋은
해답이라고 할수 있지. 언제나 죄많은 인간보다 죄없는 인간에게 돌아가지."
"그레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프레젠버어그는 그가 이 전쟁터에서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고향이 같았으며 오래 전부터 친구였다.
"넌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이대로 있니?" 마침내 그는 말했다.
"왜냐구? 강제수용소 안에 있거나 병역 기피자로 총살당하지 않고 말이지?"
"그런 뜻이 아니야. 1939 년에는 소집될 나이가 아니었잖아. 어째서 지원을 했지?"
"그때, 나이가 많았지만 구경만 할 수는 없었어. 지금은 나보다 나이 많은 자들도
끌려오고 있어. 그런 것은 변명이 될 수가 없어.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지. 우리들은 스스로를 설득시킨 거야! 전시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저버릴 수 없다. 원인이 무엇이건 누가 전쟁을 시작했건 상관없다. 우리는 악을 막기
위해서 함께 싸웠다고 말하지만 이것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지.
그뿐이야!"
그는 지팡이로 눈을 톡톡 털었다. 개는 벌써 교회 뒤로 달아났다.
"우리는 하느님을 시험한 거야. 알겠나?"
"모르겠어." 그레버는 그런 건 알고 싶지도 않았다.
프레젠버어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자네는 이해 못할 거야." 이윽고 그는 좀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는 아직도 어리지. 히스테릭한 원숭이 춤과 이 전쟁 말고는 아는 게 없어.
나는 1차 대전에도 참전했었고 그 사이의 시대도 알고 있어."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파도의 물결처럼 얼굴에 번졌지만 절반을 넘지는 못했다.
"내가 오페라 가수였으면 좋았을걸. 텅 빈 머리에 호소력이 있는 목소리를 지닌
테너 말이야. 노인이나 어린이라도 상관없어. 전쟁에 졌어. 적어도 그 정도는 알겠지?"
"모르겠는데?"
"책임감이 있는 장군이라면 벌써 옛날에 그만두었을 거야. 우리는 여기서 헛된
싸움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야." 그는 되풀이해서 말했다.
"부질없는 짓이야. 항복 조건을 완화시킬 수도 없어. 우린 마치 네로나
칭기즈칸처럼 군림했어. 우리는 모든 인간의 법칙을 짓밟았어. 우리들은."
"그것은 친위대야."
그레버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는 임메르만이나 샤우워나 슈타인브레너를 피해서
프레젠버어그를 만난 것이었다. 그와 함께 강변에 있는 도시와 보리수가 서 있는
고향을 얘기하고 싶었다.
이쯤이면 전보다 더욱 악화되고 있다. 후퇴의 혼란 때문에 프레젠버어그와도
오랫동안 만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서 위안을 받고 싶었다 자기가
오랫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고국에서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했던 것,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사실을 프레젠버어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친위대." 프레젠버어그는 조소했다.
"게슈타포, 사기꾼, 광신자, 살인자, 미치광이, 다만 이런 무리들을 위해서 우리는
싸우고 있는 거야. 단지 놈들의 체면 때문에. 전쟁은 이미 옛날에 졌어."
조금씩 어두워져 갔다.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교회의 문이 닫혀 있었다. 창으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지하실이나 방공호의 입구도 엄폐되었다. 프레젠버어그는
그것을 보고 있었다.
"두더지! 우리의 영혼까지도 멋지게 변신했어."
그레버는 담배를 꺼내 권했으나 프레젠버어그는 거절했다.
"너나 피워. 난 얼마든지 있어."
그레버는 고개를 흔들었다.
프레젠버어그는 미소를 지으며 한 개피 뽑았다.
"언제 출발하지?"
"모르겠어. 아직 서류가 안 왔어."
그레버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여 마셨다가 토해냈다. 담배가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때로는 친구보다도 가깝게 느껴진다. 담배는 사람을 혼란시키지 않는다.
"모르겠어." 그는 다시 한 번 되풀이했다.
"요즘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전엔 모든 것이 분명했었는데. 세상 모르게
잠들었다가 현재가 지나가 버리면 깨어나고 싶어. 이제야 비로소 눈이 뜨이는 것
같아."
프레젠버어그는 손등으로 얼굴의 상처를 눌렀다.
"괜찮아. 10 년 동안 놈들은 우리를 허위 선전으로 선동하고 다른 건 듣지도 못하게
귀를 막았으니까. 자네 폴만 교수를 아나?"
"전에 역사와 종교를 배웠어."
"고국으로 돌아가면 한 번 찾아보게. 아직 살아 계실 거야."
"그러지. 군인이라서 괜찮을까?"
"그럼"
"꼭 살아 계실 거야. 예순 다섯은 됐을걸."
"안부나 전해주게."
"알았어."
"그만 가 봐야겠어. 몸조심하게.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내가 돌아올 때가지 그리 길지도 않아. 겨우 3주간이야."
"그건 그래. 조심해."
"자네도."
프레젠버어그는 눈을 밟으면서 이웃 마을에 있는 자기 중대로 돌아갔다. 그레버는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돌아섰다. 교회의 문틈으로 한
줄기의 빛이 새어 나왔다. 입구 앞에 천막이 걸려 있었다. 왜 이런 곳에 밝은 빛이 켜
있을까. 그는 하마터면 집으로 착각할 뻔했다. 교회 밖의 눈 속에 파괴된 상이 서
있었고 그 옆에 망가진 자전차가 뒹굴고 있었다. 밖으로 내던진 것이다. 안에서는 단
한 평의 공간도 아쉬울 테니까.
그는 자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하호를 향해서 걸었다. 폐허 속으로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녹아드는 눈 속에서 10월에 묻힌 시체가 3구나 발견되었다. 그의
옆에는 오늘 오후 교회에서 죽은 부상병의 시체를 눕혀놓았다. 그 시체는 창백했으나
적의가 드러나 있었고 아직 생을 체념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4
모두 잠을 깼다. 지하호가 흔들리더니 귀가 쩡쩡 울리고 파편이 떨어졌다. 마을
뒤편에 배치됐던 고사포가 미친 듯이 발사되고 있었다.
"모두들 나가라!" 새로 온 보충병 중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성냥불을 켜지마!"
"나가! 여기서 달아나야 해!"
"미련한 놈! 어디로 나간단 말야. 얌전히 있어! 넌 아직도 신병인가?"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하호가 크게 흔들였다. 무엇인가가 암흑 속에서
굴러떨어졌다. 돌이나 나무 조각이 쪼개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사람이 생매장되었다."
"조용히 해. 벽이 약간 무너졌을 뿐이야."
"나가! 우물쭈물하면 여기서 파묻혀 죽는다!"
희미하게 보이는 지하호 입구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바보 같은 자식!" 누군가가 욕설을 퍼부었다.
"그냥 여기 그대로 있어. 여기라면 포탄의 파편 세례도 막을 수 있다."
모두들 제각기 우왕좌왕했다. 보수공사를 하지 않은 지하호를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밖으로 뛰쳐나간 사람들이나 안에 남은 사람들 모두가 옳았다. 이제는 운명에
맡겨야 했다. 압사하든지, 파편에 맞아 죽든지.
그들은 모두 조심해서 숨을 쉬었다. 다음에 떨어질 것을 조용히 기다렸다.
이번에야말로 가까운 곳에서 터지기 쉬웠다. 몇 번이나 폭발음이 들렸지만 훨씬 먼
곳에서였다.
"개새끼!" 누군가가 또 욕을 했다.
"아군의 추격기는 어디로 갔지?"
"영국 상공으로 갔겠지."
"닥쳐!" 뮤케가 소리질렀다.
"스탈린그라드이겠지." 임메르만이 말했다.
"닥치라니까!"
그 때, 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슈타인브레너가 부르짖었다.
"우리 비행기가 왔다!"
모두가 긴장돼 있었다. 기관포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연달아 폭탄 세 개가 마을
뒤에서 폭발했다. 한 줄기 빛이 지하호를 스쳤다고 생각되는 순간, 백, 적, 녹색의
빛이 소용돌이치며 뇌성과 암흑 속에 지면이 솟아 오르면서 작렬했다. 밖에서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가 터지고 지하호의 벽이 마침내 무너져내렸다.
그레버는 손을 휘저으면서 어둠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는 교회를
생각했다. 지하호의 입구가 보였다. 몸을 움직여 보았다.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다.
"제기랄!" 샤우워가 그의 곁에 있었다.
"가까운 곳이로군. 지하호가 폭삭 주저앉았어."
그들은 살금살금 기어나갔다. 밖의 소음에 뒤섞여서 뮤케의 호령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날아온 돌이 그의 이마를 적중해 얼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빨리 파내! 누가 없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레버와 샤우워는 부서진 파편과 돌덩어리를 집어내고
있었다. 철주와 커다란 돌덩어리 때문에 일이 더디었다. 앞을 거의 분간할 수 없었다.
보이는 건 오직 화염으로 덮인 하늘뿐이었다.
그레버는 파편을 헤치며 무너진 지하호의 벽을 따라 기고 있었다. 소음이 너무 커
신음소리를 그냥 지나칠까 봐 바닥에 귀를 바짝 대고 손으로 더듬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렸을 지도 모를 인간의 수족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때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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